나는 사람을 문제로 대하는 것이 최우선 목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도록 그들을 부르는 목사였다.

내 회중을 이루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많은 것이 사실이고 그들이 많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지만, 회중은 자신의 집단적 문제로규정되는 존재가 아니다.

회중은, 자신들이 인식하건 못하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 살아 있는영혼이라는 사실에 의해 규정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들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존귀하게 대하고 존중해야 하는 신비다.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으로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자체로, 있는 모습 그대로 알려지는 회중 안으로 사람을 맞이하고 반기는 임무를 맡은 사람이 공동체에서 목사 말고 누가 있겠는가?

나의 일은 사람들을 고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일은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사람들을 인도하는 것이고 그들이 거룩한 삶을 살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예배를 드릴 때는서로를 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너머를 보았다. 그러면서 우리가 보지 못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주의해서 반응하려고 했다.

켈트식의 십자가와 성만찬 탁자와 세례반과 강단은 우리가 보거나 가늠할 수 없는 하나님께 주의를 기울이게 했다.

치료나 문제 해결이나 사람을 고치는 것은 우리와 관련된 일이었다. 예배를 드리고, 온전해지고, 우리가 통제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을 향해 우리의 삶을 여는 것은 하나님과 관련된 일이었다.

일요일의 의자에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작용한다는 관점에서 사람들을 이해하는 법을 배웠다. 이와 같은 깨달음은 관찰 그 자체에서 온 것이 아니라, 내가 회중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존재로 지금 모습 그대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있는 사람들로 보기보다는,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대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는 깨달음에서 왔다.

회중은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가면서 희생적인 삶을 살겠다는 대단한 열의를 가진 사람들의 예외적인 모임이 아니라, 바울이 자신의 고린도 회중을 설명한 것과 더 비슷하다는 것을 이제는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그리스도인의 성장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이고 오직 신비로서만 그것을 대할 수 있을 뿐이다.

내 회중을 문제로 대할 때는 내가 하는 일을 대체로 알 수 있다. 그러나 목사로서 그들을 대할 때는 나의 이해와 통제를 벗어나는 신비를, 하나님과 관련된 어떤 것을 대하는 것이다.

예배를 드리러 오는 사람 중에 문제 없는 사람은 없다. 목회적으로 돌보려면 그러한 문제에 적절하게 대응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것 자체로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내 회중을 문제로 규정하고 그렇게 대하는 습관에 빠져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어떻게든 손 써 보기 위해서, 아니면 적어도 도울 수 있는 누군가에게 의뢰하기 위해서, 그들을 문제로 축소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서서히 사람들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대하는 목사가 아니라, 사람들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다루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들을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축소시킴으로써 나는 그들의 인생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하나님과 그들의 영혼을, 그리고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목사의 소명을 배제시켜 버렸다.

회중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일은 매우 복잡한 일인데 그것을 명명하고 이해할 수 있는 문제로 축소시키고 있었다. 꽤 자주 말이다.

성장이 대체로 느리고 한동안은 그 성장이 보이지도 않을 회중의 모호함을 안고 살아가겠는가? 진단할 수 있고 정면으로 다룰 수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감정적인 만족에 안주할 것인가, 아니면 구원과 거룩함의 신성한 신비를 함께 탐험하는 동료가 될 것인가?

오랜 잉태 기간 끝에 최근에야 비로소 확실하게 다시 보게 된 소명이었다. 그 소명에서 회중이회중으로 회복된 것, 화요일이 아니라 일요일이 규정하는회중으로 회복된 것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나의 내면에서 단호한 결의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요청받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리라.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속화의 시대는 하나님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다. 하나님은 주변적 존재다.

하나님은 선하지만(혹은 그다지 선하지 않지만) 중심을 차지하지는 못한다.

사람들이 부모 때문에, 자녀 때문에, 혹은 감정 때문에 도움을 받고 싶을 때 그들은 보통 자신이 하나님과 관련해서 도움을 받고 싶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목사라는 소명에 진실하다면, ‘시장’이 내가 하는 일을 결정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 사람들과 함께 그리고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할 방법을 찾을 것이고, 그들에게 기도를 가르칠 것이다.

보통은 조용히 그리고 종종 그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전복적으로 가르칠 것이다. 하지만 요청받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목사다.

자신의 옛 도시 회중과 나의 비(非)도시 회중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의 본질은 지리나 인구 통계가 아니라 성령이라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성령의 사역과 현존이 두 회중 안에 똑같이 있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의 모습이 아닌 것에 매여 살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우리의 일터를 적으로 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일요일에나 월요일에나 같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러한 연속성을 자명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우리 회중에는 혹은 지역사회에는 별로 없었다.

우리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우리가 회중의 기대에 맞추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주일 내내 우리는 같은 목사였지만 일요일의 그 분명한 정체성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 일요일이 우리의 존재를 규정해 주고 나머지 6일 동안 우리가 일하는 방식을 규정해 준다는 사실은 인식하지 못한다.

바로 기도가 모든 것의 핵심이라는 것 말이다. 예배당에서건 길거리에서건, 내가 생각하거나 말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대화와 교차해야 했다.

동료 목사회에서 처음으로 합의한 것은목사의 소명을전적으로 성경 본문에 근거해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요일의 성경 본문을 통해서 목사와 예배하는 회중은 구원 공동체로 형성된 하나님의 백성과 살아 있는 관계를 맺는다.

목사와 회중, 그것이 바로 우리 관계의 본질이다. 설교와 가르침, 찬송과 기도, 세례와 성만찬.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 설교, 그리고 성례전이 목사와 회중인 우리를 부활의 공동체로 형성했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사시는 것이다.

홍해에서 성취된 구원의 축제인유월절은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탈무드 시대 유대인들의 기도서 역할을 한 아가서와 짝을 이룬다.

시내 산에서 계시로 받은 율법을 축하하는오순절은 룻기와 짝을 이룬다.

구원의 삶을 어떻게 일상적인 나날의 삶으로 끌어오는가? 바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현존하신 사건이다.

기도는 그러한 하나님 앞에 우리가 개인적으로 현존하게 해주는 행위다.

성과 성전의 상실, 그리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상실로까지 보이는 사건을 슬퍼하며 금식하는아브월 9일은 예레미야애가와 짝을 이룬다.

예레미야애가는 적막함과 상실감을 쏟아 내며 고통의 경험으로 깊이 들어가는 책이다.

성도들과 함께 그 고통을 직면하지요. 고통 가운데 인내하며 그들의 동료가 되어 줍니다.

성막절에는 옥상이나 마당에 성막처럼 임시 공간을 설치해서 광야 생활을 재현한다.

성막절과 짝을 이루는 본문은 전도서다.

거절하는 연습이다. 목사들이 어떤 행동과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성경의 종교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종교가 아니다.

부림절에는 페르시아에서 대학살로부터 구원받은 것을 축하하고 즐긴다

부림절과 짝을 이루는 본문은 에스더서다.

구원은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집단적이다. 목사는 개개인의 영혼만이 아니라 공동체에 관심을 둔다.공동체 안에 있는 영혼들에게 관심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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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기 저자는 레위기 26장 34절을 거의 문자 그대로 인용하여 예레미야서 인용에 넣음으로써, 예레미야서에는 없는 70년 유배에 대한 신학적 근거를 제공한다. - P137

70년은 유배기 이전까지 지키지 못했던 안식년들을 보충하는 데 필요한 기간이다. 안식년은 7년마다 지켜야 하므로, 역대기에서 가능한 추론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7년이 열 번 돌동안 이 요구를 이행하지 않았다(10×7=70). - P137

옛 언약은 오류를 범하기 쉬운 인간에게 의존하여 언약 조항을 이행했으므로, 예측 불허인 개개인의 의사 결정을 따라야 했다. 반면 예레미야가 마음에 그리는 회복된 공동체에서는, 하나님이 그 백성의 성품을 고치셔서 그 계명들이 제2의 천성이 되게 하실 것이다. - P138

문제는 계명들이 아니라(계명들은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계명들에 순종할 이스라엘의 역량과 다짐이다. - P138

하나님이 인정하셨듯이 이스라엘을 다가올 재난에서 보호하려면 이스라엘 내부부터 회복되어야 한다. -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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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도행전의 패턴을 따라서 교회로 형성되려면 사도행전을 안내서가 아니라 이야기로 우리의 상상력 안에 완전히 흡수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고유한 특징들을 가진, 형성 중인 우리 교회도 설 자리가 있는 이야기로 말이다.

그대로 따라하는 청사진이 아니라, 참여하는 이야기여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이야기로서 교회의 모습이다. 누구나 조연을 담당하는 것을 무릅쓰고 그 이야기에 참여하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니다.

그중에서도 벤이 화를 가장 많이 냈다. 당시에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딱 나를 위한 일이네. 바로 이런 그룹이 교회를 필요로 하는 것 아니겠어?’

우리는 이 사람들을 우리가 고칠 수 있는 문제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이야기에 참여하는 사람들로서 하나씩 알아 갔고, 그들이 자기 자신이 될 수 있게 했고, 강제로 이야기에 참여시키지 않으려 했다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이 사는 지역사회에 더 깊이 참여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더 넓게 참여하는 일에 미국인들은 익숙하지가 않다.

학교에서 우리가 배우는 언어는 정보로서의 언어, 이름을 짓고 설명하는 언어다.

또한 물건을 만들고, 문제를 해결하고, 달나라에 가는 등의 일을 해내는 데 필요한 언어다.

하지만 참여로서의 언어는 어떤가? 관계의 수단으로서의 언어는? 우리를 다른 사람들과 연결시켜 주는 언어는? 공동체로 사는 역량을 키워 주는 언어는?

카타콤은 그런 언어를 배우기 딱 좋은 곳이었다. 예배 후에 커피를 마시거나 가끔씩은 각자 먹을 것을 싸 가지고 와서 점심이나 저녁을 먹는 분위기는 서로 이야기를 듣고 들려주는 연습을-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연습하고 있는지도 몰랐다-하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이제 막 형성되는 교회로서 언어가 사용되는 서로 다른 방식들을 구별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아니본질적인 이유는 교회에서 언어가 사용되는 일차적인 방식이 예배이고, 예배의 언어는 참여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참여의 언어가 취하는 일차적인 형식이 바로 이야기다. 노래와 이야기, 대화와 이야기, 시와 이야기. 어떤 식으로든 이야기가 스며 있다.

누가는 거의 똑같은 병렬 구조로 예수님의 탄생과 교회의 탄생을 이야기한다. 누가복음 1-2장은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이고, 사도행전 1-2장은 우리의 구원 공동체인 교회의 탄생 이야기다.

사도행전은 교회의 탄생과 관련된 모든 일을 성령이 하시는 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다.

교회는 예수님의 승천 이후 예수님의 일을 우리가 이어 나가는 것이라고 보지 않고, 성령이 창조하시고 계속해 나가시는 일이라고 보는 전환 말이다.

그 전환은 우리가 계획하고 성취하고 책임진다는 관점에서 교회를 이해하는 것(프톨레마이오스 패러다임)에서,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성취하시고 책임지신다는 관점에서 교회를 이해하는 것(갈릴레오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이라는 기적을 주셨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아무런 이해나 지지도 받지 못한 채 위험한 장소에서 가난하게 태어난 무력한 아기의 형태로 주신 기적이었다.

예수님은 자신이 태어나신 그 세계, 연약하고 주변적이고 가난한 그 세계를 결코 떠나지 않으셨다.

결국 우리는 이야기에 설복당했다. 하나님이 교회를 시작하실 때는 아무런 이름도 없는 사람들을 데리고 시작하신다는 사실이 점점 더 분명해졌다.

스가랴와 엘리사벳, 마리아와 요셉, 안나와 시므온처럼, 이 세상에 우리의 구원자를 보내시기 위해서 성령이 처음 데리고 일하신 사람들이 그랬다. 그렇다면 구원 공동체인 교회를, 이 회중을 형성할 때 성령이 전략을 바꾸실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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잰에게 ‘목사의 아내’란 단순히 목사와 결혼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소명의 차원이 더 깊었다. 삶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잰에게 그것은 섬세한 환대를 베푸는 삶이었다

잰에게 목사의 아내가 된다는 것은 하늘과 땅이 교차하는 혼잡한 교차로에 전략적으로 거하면서도 요란 떨지 않으며 사는 것이었다

나는 책과 언어와 배움의 세계에 푹 빠져 있었다. 그 세계가 그토록 흥분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잰에게 푹 빠져 있었다. 감성적이고, 주변의 사람과 사물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인생의지금과여기를 즐거워하는 잰을 사랑했다.

내가 몰랐던 사실은 우리가 결혼했을 때, 아직은 감지되지 않았지만 내 속 깊은 데서 이미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고, 그것이 내가 기대했던 배움의 삶을 살지 못하게 하리라는 사실이었다. 3년이 채 지나기 전에 잰은 자신이 언제나 되고 싶어 했던 사람, 곧 목사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쉐키나는 집단적 비전을 일컫는 히브리어인데, 그 집단적 비전을 통해 흩어져 있던 신성의 파편들이 한데 모이지. 보통은 빛을 퍼뜨리는 현존으로 이해해

말하자면 어떤 시간과 장소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게 하는 빛이지. 하나님은 보통 어떤 장소에 계시진 않지만 말이야.

그건 대대적으로 드러나는 광경이라기보다는, 격려하거나 확인해 주기 위해서 혹은 우리가 아직은 볼 눈이 없는 어떤 것의 실재를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이 자신의 재량으로 선택해서 보여 주시는 것에 더 가까워. 성경에 나오는 용어는 아니지만 중세 때 유대교 신비주의에서는 자주 사용이 되었다네.

궁상스러워 보이는 대체물에 그들은 마음이 아파서 울었지. 그들이 울고 있는데 눈부신 빛의 현존인 쉐키나가(하나님의 개인적인 현존이) 내려와서 그 소박하고, 보잘것없고, 가건물 같고, 영광스러웠던 성전에 비하면 안쓰럽기 그지없는 성전을 가득 채웠어. 그들은 손을 들어 찬양했지. 이제 정말로 집으로 돌아온 것 같았어. 하나님이 정말로 그곳에 계시는 것 같았지. 쉐키나는 서서히 사라졌지만 영광은 남아 있었어.

나의 존재에 딱 맞는 일인 이 소명이 명쾌해지자 기분이 좋았다.

그냥 생계를 위한 일이 아니라 지금까지 만들어져 온 나의 존재와 일치하는 삶의 방식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마치 예정된 목적지에 도착한 느낌이었다. 마침내 목사의 아내가 된 잰도 마찬가지였다.

그 다음에 일어난 일에 익숙해지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바로 회중이다. 나는 그냥 목사가 아니라 한 교회의 목사였다. 성도이면서 동시에 죄인인 사람들이 모인 회중이 나의 일터였다. 나는 그곳으로 날마다 일을 하러 갔다.

내가목사이고, 인식하지는 못했어도 언제나 목사였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나의 일차적 일터인회중의 본질에 대한 이해는 목사라는 정체성의 인식만큼 분명하지가 않았다

나는그냥 목사가 아니라, 교회의 목사, 회중의 목사였다. 목사는 자율적인 소명이 아니었다. 목사는 하나님과 나 둘이서만 협상한 소명이 아니었다.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내 회중에 속한 남자와 여자들이 하나님과 성경, 기도와 자신들의 영혼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이 그것을 믿지 않거나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별 관심이 없었다. 나는 회중들이 목사란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당연히 생각할 줄 알았다.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회중에 참여하는 일차적 이유는 하나님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들이 하나님과 성경, 기도와 자신들의 영혼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교회에 온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이 내가 하나님과 성경, 기도와 그들의 영혼의 문제에 대해서 인도와 격려를 해줄 것으로 기대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그보다 더 큰 오해는 없을 정도로 나는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었다.

회중과 내가 공통된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에서의 일은 종교적인 잡다함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교회를 별 생각 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교회는 그냥 삶의 배경에 불과했다. 그런데 교회가 내 일터가 되고 나니 이 장소에 그리고 이 사람들에게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그들을 존중하고 어떻게 하나님이 현존하시고 일하시는지 깨어서 살펴야 했다

내가 교회에 무관심했던 세월에도, 그리고 문화에 오염된 그들의 기대에도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 교회의 일면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양측 모두 불순물을 태워 버리려면 상당한 시간을 정제하는 불 가운데서 보내야 할 것 같았다.

간단히 말하자면 내 일터가-이 회중이, 이 교회가-딱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좀더 반가운 놀라운 일들이 계속해서 생겼다. 일터인 내 회중에 대한 실망, 가끔은 이를 갈기까지 하는 실망이, 얼핏 보이는 쉐키나로 바뀌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엉뚱한 것을 찾다가 현재 있는 것을 놓칠 뻔했던 위기의 순간들에 찾아온 빛이었다.

이야기는 결코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이야기의 집합이다. 내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배워야 하며, 모든 이야기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많은 사람들이 환란 당하고, 빚지고, 마음이 원통하다. 혹은 어울리지 않거나, 화가 나 있거나, 무례하거나, 자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상황은 상당히 복잡하지만, 그것을 피해 갈 길은 없다

우리는 회중이다. 우리는 인생의 의미를 찾고 있다.

우리는 플롯의 한 가닥을 잡고 그것을 따라가면서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는 복음을 듣고,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서 실제로 하신 행동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잘나가는 것 같다가 미처 이야기임을 알아보지 못한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부딪히고는 균형을 잃는다. 산란해진 마음으로 우리는 비틀거린다.

하나님의 말씀이 형성하고 성령이 창조하신 희생적 겸손, 놀라운 용기, 영웅적인 미덕, 거룩한 찬양, 즐거운 고난, 쉬지 않는 기도, 끈기 있는 순종의 삶이 거기에 있었다. 쉐키나다. 하지만 때로는 그것을 보지 못한다. 시글락이다.

교회는 그 나라가 완성된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그 자체다.

교회는 죽음의 나라에 세워진 하늘의 식민지요,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게 하는 성령의 전략이다.

나는 교회와 목사의 소명이 사업 운영의 관점에서 재정의됨으로써 가차 없이 축소되고 부패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지하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는 교회에 대한 기대나 세속적인 기대 그리고 교회가 무엇이고 목사는 무슨 일을 하는지에 대한 기존의 모든 생각들을 자발적으로 내려놓고 있었다.

산적한 과제 사이에서 ‘한 가지 필요한 것’이 있었다. 목사와 교인으로서 우리는 함께 우리가 무엇 때문에 모였는지, 교회가 무엇인지, 교회로서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기초 작업을 해야 했다

예배를 위해 구분된 그 지하실이 우리의 장소가 될 것이고, 우리의 텍스트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교회 형성기의 이야기, 첫 교회의 형성과 발전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카타콤 예배당에 예배하러 모인 우리가 해야 했던 첫 번째 일은 물론 공통된 기반을 세우는 것이었다. 나는 그 어느 것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예수님이 하나님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고, 우리 가운데 거하는 하나님이 되시고, 사역과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에 우리를 참여시키시고, 자신을 따르라고 그리고 자신을 신뢰하며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라고 남자와 여자들을 초대하신 이야기였다.

갓 세워진 교회로서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내가 의도했던 바는, 앞으로 우리가 갖추게 될 모습 전부를 사도행전에 나오는 교회의 형성 이야기에 기초해서 갖춰 가게 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상상력이 사도행전에 완전히 절어서 교회로 세워지는 우리 자신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그 일에 동참하게 하고 싶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곧 우리 가운데 거하신 하나님의 이야기이며, 그분이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고,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하시는 이야기다.

물론 예수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일이다. 그러나우리가 책임자가 된다. 이제우리가 결정을 내린다.우리가 예수님의 명령을 전하고,우리가 예수님의 모범을 실천한다.

이제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우리가 교회에 대해서 책임을 진다. 우리가 그 책임을 맡거나 거부하거나, 둘 중 하나밖에 없다.

사도행전을 교회 선조들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회원이 되려면 어떤 진리에 동의해야 하는지를 기록한 글이 아니라, 우리를 포함하는 이야기, 우리도 동참하도록 초대하는 이야기로 이해시키려고 노력했다.

이야기의 특징은, 일단 우리가 이야기에 사로잡히고 나면 그 끝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누가 이야기에 참여하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탁월한 이야기꾼의 이야기에는 예측 가능한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무의미한 것 또한 하나도 없다. 세세한 부분, 말, 이름, 행동 하나하나가 다 이야기의 일부다.

이야기의 언어로 교회를 알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혹은 누가 등장할지 혹은 어떻게 끝날지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이야기꾼이 자신의 이야기를 정직하게 들려줄 것이라고 믿거나, 아니면 믿지 말거나, 할 수 있을 뿐이다

첫 교회의 이야기가 이야기의 형식으로 주어진 것은, 우리의 새 교회도 이야기의 형식으로 이해하라는 뜻이다.

우리가 확실하게 아는 것은 예수님의 이야기가 다시 들려진다는 것과 이번에는 우리가 그것을 듣고, 반응하고, 따르고, 믿고, 순종한다는, 혹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사도행전은 첫 교회가 어떻게 교회로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지를 자세하게 들려주는 이야기다. 이야기는 모방해야 하는 대본이 아니다. 이야기는 내러티브에 대한 감각을 개발시켜 주어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계속 의식하게 하고, 동시에 우리 안에 예수님의 삶을 형성하시는 성령의 일에 믿음과 순종으로 참여하게 해준다.

사도행전이 처방전이나 경고가 아니라 이야기이기 때문에 유용한 점은, 예수님이라는 플롯을 신실하게 따르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이 속한 상황에서 반응하고 순종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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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한테 조언하거나 제안해 주실 것이 있습니까?" 그는 없다고 했다. "자네가 알아야 할 것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실 걸세."

모두가 내가 목사가 되는 길에 거쳐 간 정거장들이었다. 하지만 그무계획성이라니….

그런데 이제 한 주 한 주마다, 한 학기 한 학기마다, 조금씩 나의 성경 읽기는 대화가 되어 갔다. 나는 더 이상 글을 읽는 것이 아니라, 음성을 들었다.

나는 각 단어들이 2 페이지에 있는 다른 모든 단어와 어떤 관계 속에서 작용하는지를 관찰하게 되었다.

그리고 작가의(저자의) 음성에 조심스레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그들은 언어의 예술가들인 뛰어난 작가, 시인, 이야기꾼이었다. 이사야와 다윗은 시인이었다. 마태와 누가는 서사의 대가였다. 말은 그냥 말이 아니었다. 말은 거룩했다.

이 경험은 단순히 학문적인 경험이 아니었다. 그 강의실에 배어 있던 열정과 인내심은 내 안에 귀납적 상상력을 서서히 주입시켰다. 거기에 있는 모든 것에, 오로지 그것에만 맹렬하게 집중하고 문학적 관계와 인격적 관계 모두를 유심히 보면서 습관적으로 맥락, 즉 성경 안에 계시된 창조와 구원이라고 하는 세계 전체를 인식하는 법을 나는 배웠다.

현장 사역을 하면 매주 몇 시간만이라도 평범한 땅에 발을 디디고 평범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평범한 언어를 쓸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계속해서 지적인 작업만 하면, 특히나신학 영역에서 지적인 작업만 하면 영혼이 쪼그라들 수 있습니다."

조용하면서 조심스럽게, 심사숙고하고 곰곰이 생각하면서 성경을 강해하고, 과시하지도 않고 자기 자신을 주목하게 만들지도 않았다. 그는 정확하고 분명한 언어를 사용했다. 강단의 시인이었다. 그의 설교를 매주 들은 그 해에 나는 단 한 마디의 진부한 표현도 듣지 못한 것 같다.

우리는 설교와 기도와 예배에 대해서 이야기했지만, 결코 추상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의 대화가 구체적이고 직접적이고 인격적이도록 했고, 훗날 나는 그것이 바로 목회의 대화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오후에 두 시간씩 동네를 다니면서 가정 심방을 합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면, 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설교할 방법이 없습니다. 설교는 선포이고, 예수님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것이 대화 속에, 듣는 귀와 반응하는 입술에 뿌리를 박아야 비로소 복음이 됩니다."

내가 확실하게 안 것은 그가 설교 준비를 할 때, 부유하거나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택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것이 아니라,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그 동네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훗날 목회를 할 때 이 사실을 놓치지 않고 기억했다.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나는 바르트를 읽고 있다. 내게 그와 같은 신학자는 처음이었고, 그는 단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 그분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해주었다

그때까지 내가 들었거나 읽은 신학은 전부 하나님에대한 것이었다. 마치 토론 주제인 것처럼, 해결해야 하는 문제인 것처럼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들을 다루었을 뿐, 진액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휘트먼의 시나 멜빌의 소설이나 체스터턴의 저널리즘과는 얼마나 대조적이던지! 하지만 바르트에게는 진액이 가득했다. 아무리 읽어도 질리지가 않았다.

바르트를 읽으면서, 그때까지 나와 함께 지내고 나를 가르쳤던 사람들은 복음과 성경의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그것을 설명하고 변호하는 데 우선적으로 관심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르트는 그런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는 증인이었다(증인은 그가 가장 좋아한 단어다). 그는 기독교적 삶, 성경의 내러티브, 복음서의 복음을 실제로살아내는 것에 주목하게 했다. 그리스도와 성경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것을 설교하는 것에 집중했다.

기독교적 삶을 실험실로 가져가 분해해서 작동 원리가 무엇인지를 알아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 곳곳에서 늘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행위 안으로 들어가고 거기에참여하는 것에 그는 관심이 있었다

바르트가 ‘바르게 이해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의 열정은 온통 ‘살아내는 것’에 가 있었다.

"유진, 자네가 장로교에서 안수를 받았으면 좋겠네. 자네가 목사가 될 생각이 없다는 것은 아네. 앞으로 대학원에 진학해서 교수가 되려하는 것은 알지만, 안수를 받는 것이 좋을 걸세. 동료들에 대해 마땅한 책임을 지고, 인정받는 신학적 전통을 확증해 주는 교회가 자네에게는 필요하네. 교수도 목사처럼 책임을 지는 지지 체제가 필요하다네. 교수건 목사건, 전문적인 사역은 독불장군 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네. 그러기에는 압력도 너무 많고, 유혹도 너무 많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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