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저귀를 뗀 이후부터 나는 죽 경쟁하는 인간으로 살았고, 나를 부추기는 아드레날린에 중독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미 잘 연마된 나의 경쟁적 본능이 내 주변의 경쟁적이고 소비주의적인 교회 문화 때문에 더 심해지고 있다는 것을 이제 깨닫고 있다고 했다.

경쟁적인 목사에서 명상하는 목사에 가까운 어떤 존재로 내가 발전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냐고 나는 물었다. 사람들과 특별한 안건 없이도 함께 있을 수 있고,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개입하지 않으면서 직접적인 인도는 성령이 하시게 하고, 나는 인내하며 부드럽게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성숙한 삶으로 안내하는 목사가 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기도와 의식이 기본적인 틀이 되고 나머지는 모두 자연스럽게 일어나게 내버려두는 목회적 관계가 가져다주는 엄청난 자유를, 그와의 관계를 통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배우고 있었다.

장로교는 기도와 예배, 성인과 예술가, 나라와 대륙 사이의 거대한 연속성 안에 나를 이식해 주었다

목사의 자리는 잘 배우면서 훈련받아야 하고, 고통을 겪는 남자와 여자들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자세히 알아야 하고,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뿐만 아니라 교인들의 직장과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까지도 이해해야 하는 자리였다.

오순절파와 장로교는 둘 다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선물이었다. 서로 긴장 관계에 있는 반대 극이 아니라 연속체를 이루는 양극이었다.

의도적인 안식일을 만들어서 우리가 이미 하고 있는 일을 더 깊이 이해해 보라고 제안했다. 그냥 하루 쉬는 것은 ‘사생아 안식일’이라고 그는 말했다

우리는 이제 막 지나온 창조의 주간에 주의를 기울였다. 이제 막 지나온 거룩한 주간에 주의를 기울였다. 언제나 우리가 놓친 것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안식일은 다시 기억하는 날, 우리가 어디에 있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인식하는 날이 되었다.

그 시간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해서 주신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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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중이라는 일터에서 목사로 사는 것이 온통 비옥한 농지와 매끄러운 푸른 언덕과 장엄한 지평선과 웅장한 산만 있는 삶이라고 내가 생각했단 말인가? 하나님이 보좌에서 다스리시는 풍요롭고 멋진 지평선과 봉우리가 있는 하나님 나라의 대륙이라기보다는, 황무지와 월 드러그에 더 가까워 보이는 미국 문화와 미국 교회에서 나는 목회를 하고 있었다.

나는 목사였다. 지금 이곳에서, 이 회중 안에서, 이 장소에서, 이 일터에서, 이 가족과 더불어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 필요한 상상력을 얻고 믿음을 개발할 때까지 나는 이 사람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

모든 성장에는, 특히 성품의 성장, 영적인 성장, 교회의 성장, 그리스도의 몸의 성장,영혼의 성장에는 휴지기가 있다는 것을 이제는 나도 알 때가 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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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예배로 부름받을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현존과 말씀과 행동을 인식하게 되는 장소로 계속해서 들어갈 것이며, 깨어서 그 현존과 말씀과 행동에 동참할 것이다.

교회를 공식적으로 세울 준비를 하면서 우선순위가 정해지기 시작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지성소를 마련할 것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을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가는 핵심적 형성의 행위다.

단순히 거룩한 땅으로 가는 순례자들이 아니라, 단순히 역사 속에서 자신이 처한 위치와 상황에 따라서 규정되는 사람들이 아니라,하나님의 백성이다.

성막의 가구들은 그들이 드리는 예배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것이었다.

예배는 그 누구도 보지 못한 하나님과 관련된 일이다.

예배란 ‘숱한 세월의 희망과 두려움’을 지나 오면서 남자와 여자와 아기들의 몸에, 동네에, 가정에, 일터에 날마다 조금씩 형성되는 구원이라고 우리는 이해하게 되었다. 구원이 이루어지는 ‘산자의 땅’이 우리 동네에 창조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말씀을 통해서 우리와 말씀하시고, 우리가 기도와 찬송을 통해서 그분과 말하는 것 이외에는 그 어떤 일도 이 안에서 일어나서는 안 된다"

예배의 북극은 "당신의 거룩한 말씀을 통해서 우리와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이고, 예배의 남극은 "기도와 찬송을 통해서 주님과 말하는" 우리의 말이다.

우리는 예배당의 건축 양식이 그 북극과 남극을 유지하고, 어느 각도에서 보나 하나님의 현존과 말씀이 존중되는 것을 느낄 수 있고, 우리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임을 인식하는 데 최대한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장로교 전통에서 ‘거룩한 말씀’은 성경과 설교를 통해서 ‘듣는 말씀’과 성경적 성례전인 세례와 성찬을 통해서 ‘보는 말씀’, 두 가지다.

말씀을 통해서든 성례전을 통해서든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동일한 것을 말씀하신다.

세례반. 세례는 기독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성례전으로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기 시작했음을 표시해 준다. 예배당에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세례반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첫 번째 말씀이 우리를 받아들이시고 용서하신다는 말씀이라는 뜻이다.

예배의 장소는 듣는 장소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다.

그러나 그곳은 또한 말씀으로 선포된 것에 대답하고 응답하는 장소이기도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대화를 촉발한다.

우리는 회중으로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며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기도와 찬송을 통해서’ 이야기한다.

예배드리러 올 때는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족이다. 우리는 단지 보고 듣기 위해서만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함께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온다. 넉넉한 환대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 복도는 넓게 만들었다.

높이 달린 이 십자가가 하는 또 하나의 선언은, 우리가 망각해서 혹은 부주의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아래에서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면, 예배는 소원 성취를 위한 행위가 되고 찬송은 자기를 축하하는 행위가 된다는 것이었다

십자가를 통해서 시작된 행동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일보다도 크고 포괄적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오직 관계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관계는 눈으로 볼 수 없다. 그것은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무엇을 만들거나 무엇을 하는 데 이용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힘이 아니다.

예배는 감각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신비를 인식하게 하고 그 신비에 집중하게 하는 예술이다

예배는 야웨의 구원과 계시에 푹 잠기는 삶을 실천하는 것이다.

아내 잰이 누구이며 무슨 일을 하는지, 그 관계의 복잡성을 설명하는 단 하나의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환대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잠자리를 마련하고 식사를 준비하는 것 이상의 환대였다.

정원 가꾸기는, 우리가 먹을 것을 기르고 조리하고 대접하는 일이 곧 창조계를 존중하면서 거기에 존엄성을 부여하는 행위가 되게 하고, 또한 인간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모두를 포함하는 살아 있는 창조계와 우리를 연결시켜 주는 행위가 되게 하는 데 전략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숙고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실천이 되었다

성만찬도 식사다. 주님의 식탁에 모여 앉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준비해서 내놓은 예수님의 살과 피다. 그것은 궁극적 환대이며, 모든 환대의 모체다.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이 서로 유기적인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새와 물고기, 흙과 공기, 검정색과 하얀색,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침, 점심, 저녁 등 우리가 집에서 하는 모든 식사는 강렬하고도 깊은 의미에서 주의 만찬에서 파생되었다.

잰이 하는 일에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대략 ‘하늘과 땅의 교차로에서 서성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살피는 것’ 정도가 될 것이다.

우리가 살면서 자녀들에게 그리고 또 다른 누구에게나 예수님을 증언할 때 우리는 조언이 아니라 씨앗을 나누어 주는 겁니다. 그리고 씨앗은 싹이 틀 수 있는 땅을 필요로 하지요. 식사는 바로 그와 같은 땅이에요. 식사는, 우리가 하거나 하지 않는 모든 말과, 느끼거나 느끼지 않는 모든 것과, 하나님의 말씀과 잡담 몇 마디가 음식과 함께 흡수되어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는 관계의 환경을 날마다 마련해 줍니다.

함께 식사를 할 때는 추상성이나 보편성이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사람들에게 간단한 지혜를 나누어 주지 않으셨어요. 그런 몇 가지 지혜로 사람들이 알아서 하나님이나 자기 이웃을 찾아가게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여러분도 예수님이 하신 대로 할 수 있습니다. 매일 저녁 여러분의 식탁에서 예수님의 생명을 취하고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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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더 많은 일들이목회로 보이기 시작했다. 주중에 일어나는 일은 더 이상 단절된 행위들의 집합이 아니었다.

우리는 주중에 우리가 하는 일들-무작위적이고 단절되어 보이는 기도와 이야기와 고통과 거절과 공동체-과 일요일 사이의 내적인 연결성을 보기 시작했다

교회 지도자들이 예배하고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를 조금이라도 비인격화할 때마다 복음은 약해지네.

특히 규모는 정말로 잘 비인격화시키지.

키르케고르의 비판은 지금도 여전히 설득력이 있네. ‘사람이 많을수록 진실은 줄어든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성숙해지는 유일한 길은 친밀감, 포기, 그리고 인격적 깊이뿐이라네.

목사는 그와 같은 성숙을 양육하는 핵심적인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네.

그러한 일이 큰 회중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하려면 무지 애를 쓰며 결을 거슬러 가야만 한다네. 큰 규모는 도움이 되기보다는 장애가 되기 때문일세.

군중은 과도한 술과 비인격적인 섹스만큼이나 철저하게 영혼을 망친다네.

초월성을 느끼게 해주지만 하나님을향하게 하는 초월성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멀어지게 하는 거짓 초월성이라네

종교적인 굶주림은 만족을 모르는 자아의 본성에 뿌리를 두고 있네.

회중을 규모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해 갈 수 있는, 군중이 아닌 공동체로 전략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키울 위치에 있는 사람은 지구상에서 아마 목사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네.

목사가 된다는 것은 소명이지 직업이 아니다. 그러나 목사가 되었을 때 나는 내가 소명과 직업을 구분하지 못하는 문화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예술가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연결시키는 눈을 가지고 있고, 우리의 부주의한 눈으로는 부분밖에 보지 못하는 것을 완전히 다 보여 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나는 목사로 고용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목사의 일차적 책임은 내가 섬기는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내가 섬기는 하나님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섬기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보다는 자신들이 원하는 일을 해주는 우상을 종종 선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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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늘 제기되었고 또한 답을 내려야 했던 근본적인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왜 그리스도교 교회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바쳐야 할까요? - P7

유대교인은 태어날 때부터 유대교인으로 납니다.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그리스도교인으로 나는 사람은 없지요. 그리스도교인이 되려면 거듭나야 합니다. - P7

물론 4세기 이래 대다수 그리스도교인은 유아 때 세례를 받습니다. 이것을 보면 그리스도교인도 태어날 때부터 그리스도교인으로 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례받은 이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세례가 뜻하는 바를 자신의 것으로 삼아야만 합니다. - P7

누군가가 그리스도교인이 된다는 것은 온갖 독특한 이유와 요소가 어우러진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 P8

그러나 그 어떤 경우라도 결국 그 사람이 신앙을 가져야, 즉 신자가 되어야 하지요. - P8

그리고 그리스도교에서 이야기하는 신앙은 언제나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뜻합니다. - P8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것, 곧 하느님께서 예수 안에서, 예수를 통해 활동하셔서 인류를 회복시켜 그들과 화해하시며, 나아가 인류를 통해 당신의 피조물 전체를 회복시켜 그들과 화해하신다고 고백하는 것, 이 고백과 신앙이 그리스도교인을 만듭니다. - P8

우리가 경험을 통해 진리로 간주하는 것은 도전을 받게 되기 마련입니다. - P12

우리가 순간 확실하다고 생각하거나 느끼는 것에는 추가적인 검증과 해석이 필요합니다. - P12

그것의 참됨은 우리의 경험과 지식을 통합하여 이를 근거로 삼을 때만 확인됩니다. - P12

진리의 최종 기준을 규정하는 것은 일관성coherence입니다. - P12

일관성은 진리의 속성이기도 하기에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 P12

참된 것은 무엇이든 궁극적으로 다른 모든 진리와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 P12

진리는 하나이면서 모든 것을 아우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이는 한 분 하느님이라는 개념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 P12

신학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참됨 여부에 관심하는 것은 성찰의 차원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교적 체험과 그리스도교 공동체에는 신학이 필요합니다. - P12

신학의 과제는 그리스도교 신앙 및 교리의 기원과 본래 내용, 혹은 그 역사적 변천을 연구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 전통에 담긴 진리를 밝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P13

진리의 내용은 체계로 제시되어야 합니다. 체계로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은 포괄적인 서술 안에 있는 특정한 주장들 각각이 내세우는 진리를 검증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진리는 그 자체로 체계적이기 때문입니다. - P15

(앞서 말했듯) 일관성은 진리의 특징입니다. 따라서 신학을 체계로 제시하려는 시도는 전통이 전하는 가르침을 탐구하는 것의 목적인 진리에 대한 관심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 P15

신학을 통해 하느님의 진리를 체계적으로 탐구하는 데서 나오는 흥분에 도취해 우리가 마치 진리 자체를 손아귀에 쥐고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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