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그냥 무엇을 배우기 위해서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대화하기 위해서 성경을 읽는 법을 배웠다.

미국에서 목사의 소명은 소비주의 종교로 무력해지고 진부한 언어로 게을러질 위험에 언제나 처해 있다. 성 마리아 신학교에서 보낸 그 세월과 시간들은 그 무력함과 게으름을 막아 주는 방어막이었다.

현장에 계신 하나님, 일터에 계신 하나님, 노숙자 안에 계신 하나님, 우리 주변의 사람들 안에 계신 하나님,우리 안에 그리고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증언하는 서로의 글을 우리는 매주 듣고 토론했다.

"나를 보지 말고, 저기 아래에 있는 그림자를 보세요. 그림자놀이를 보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볼지도 몰라요.

자신이 매달려 있는 행글라이더의 인대와 힘줄과 조직을 하늘 높이 띄워 주는 성령을 안다. 이 지상에 자신이 그림자놀이라고 부르는 그것을 드리우는 연약해 보이는 교회를 안다.

목사들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의 상당 부분이 배후에서 이루어진다.

사람들이 일요일에 보는 것은 사실상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일요일에 예배당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견고하게 해주고 거기에 무게를 실어 주는 조화로움과 리듬은 목사와 사람들의 삶 깊은 곳에서 서서히 조금씩 형성된다.

함께 있지 않고 서로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목사와 회중이 서로 분리된 것은 아닌, 그 보이지 않는 시간에 일어나는 일을 조금이나마 보여 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일요일에 보는 모습, 그리고 주중에 가끔씩 보게 되는 그 모습을 뒷받침해 주는 나머지 날들의 모습을 말이다.

나는 우리의 삶을 하나로 연결시켜 주는 조화와 리듬을 감지하게 해주는 공동의 회중 정체성을 개발할 방도를 찾고 싶었다.

일요일에 우리가 서로 아무런 혼란 없이 조화롭게 오가고, 신속하고 품위 있게 하나님께 응답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이유는 상당 부분의 작업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이면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우선, 해서는 안 되는 일에서부터 시작했다. 일요일의 예배에서는 그들이 나를 보지 않을 때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이야기해서는 안 되었다.

일요일의 예배는 그들이 나를 보지 않을 때 내가 하는 일을 전시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그들에게 확인시켜 주는 장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

일요일의 예배는 하나님이 중심이신 자리이고, 하나님이 이 세상과 그들의 삶에서 하고 계시는 일에 그들을 초대하는 자리다.

그날은 가능한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 물론 내가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날 내가 눈에 띈다고 해서 그들이 나 자신이나(내가 그들의 눈에 띄지 않을 때) 내가 하는 일에 주목하게 만들지 않겠다.

나는 아멘 예가 특별히 마음에 들었다. 카렌이 그 말을 할 때마다 나는 고린도에 세워진 신생 교회를 향해 바울이 한 말이 생각났다.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에는 예수의 ‘예’가 찍혀 있습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가 전하고 기도하는 것도 그러합니다. 우리가 전하고 기도하는 것에는 위대한 ‘아멘’, 하나님의 ‘예’와 우리의 ‘예’가 아주 또렷하게 찍혀 있습니다(고후 1:20, 「메시지」).

나는 위대한 아멘인 하나님의 ‘예’와 우리의 ‘예’의 지지 아래 회중과 목사가 서로 연결되어 있게 하는 데 그 편지를 사용하기로 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같이 사는 동료로 서로를 받아들이도록 회중의 상상력을 구성하는 데 사용할 것이고, 회중과 목사의 관계 형성을 위해 사용할 것이다.

나는 함께 사는 우리의 삶을 실제로 느끼게 해주는 간단한 대화를 기록했다.

언어에서 가장 인격적인 단어가 이름이며 따라서 이름이 관계를 맺는 토대가 된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나는 이름을 많이 언급했다.

그리고 그들이 나를 보지 못할 때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돌아보고, 내가 그들을 보지 못할 때 그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를 돌아보았다.

목사로서 성공하는 것이 부모로서 실패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나는 이미 실패한 목사다. 오늘로 사임을 해야겠다.

"기도하는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숙고하고 제대로 반응하며 긴장을 풀고 싶습니다. 그래야 여러분 앞에서 숙고하고 제대로 반응하며 긴장을 풀 수가 있습니다. 서두르면서는 결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입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했는데, 이제는 마음이 너무 분주합니다.

나는 책을 읽고 공부하는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문화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우리에게서 다 짜내 버리는 문화입니다.

나는 그 문화를 충분히 관찰하고 잘 알아서, 나의 신은 나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마귀의 유혹을 회중이 이해하게 돕고 싶습니다. 이건 감지하기 힘든 미묘한 유혹입니다. 어느 정도 떨어져서 거리를 두고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냥 더 열심히 노력하는 것으로는 되지 않는 일입니다.

나는 여러분과 서두르지 않고 여유롭게 대화할 시간이 있는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의심과 어려움, 열망과 즐거움을 잘 이해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가는 여러분의 동반자가 되고 싶습니다.

실패할까 안전부절못하는 상태로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예배로 인도하는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받아들이는 순종의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도록 인도하고, 설교할 때는 성경을 이해하기 쉽고 살아 있는 현실의 언어로 전달하고, 그 설교를 통해서 가정에서든 일터에서든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인의 존엄성을 회복해 주고, ‘그저’ 평신도일 뿐이라는 나약한 이미지를 없애 버릴 수 있는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그들이 나를 내가 원하는 목사가 되게 해준다면, 나는 그들을 자신들이 원하는 장로가 되게 해주어야 했다.

그들의 은혜로 나는 꾸준히 순종하는 목사의 소명에서 중요한 부분인 ‘보이지 않는 것’을 자유롭게 계발할 수 있었다. 그들이 나를 바쁘지 않은 목사가 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러한 결정에서 생긴 의도하지 않은 결과는, 이제 내가 ‘바쁘지 않고’ 그토록 오랜 세월에 걸쳐서 형성된 그 목사가 될 수 있는 자유를 얻었기 때문에 우리 회중의 남자와 여자들이자신의 일터에서 하는 일에 관심을 가질 시간과 에너지가 생겼다는 것이다.

교회를 운영하는 일은 그들이 전임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내가 그들을 신뢰하고 일을 맡긴 것처럼 그들도 다른 사람들을 신뢰하고 일을 맡겨서 회중 전체가 일을 분담하기에 이르렀다.

이 일을 함께하면서 우리 회중이 확신하게 된 것 하나는, 기독교 용어 중에서 ‘전임 기독교 사역’이라는 말이 영혼에 참으로 해로운 문구라는 사실이었다. 그 말이 사용될 때마다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일이 단절되고, 우리의 예배와 우리가 생계를 위해 하는 일이 단절된다.

목사들은 이 세상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날마다 상기하게 되는 사람들이다

"엉망진창이라기보다는, 내가 어떻게 다뤄야 할지를 모르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부닥치는 것을 좋아한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기적이지요. 하지만 기적처럼 보이지 않고 기적과는 정반대로 보이는 기적입니다.

생명을, 하나님의 생명을 서서히 인식하다가 그것이 사람과 상황 안에서, 말과 행동 안에서 모습을 드러낼 때 나는 놀랍니다.

신학자 칼 라너는 기적을 믿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기적으로 삽니다. 기적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저에게 회중이 생기면 저는 인내하는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인생에 하시는 말씀을 듣고 그들의 인생에 행하시는 일을 볼 눈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목사는 공동체 안에서 유일하게 자기 마음껏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진지하게 봐 주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가지는 존엄성을 회복해 주는 사람인 것 같아요.

자신의 유용성을 증명하지 않아도, 잘하는 일이 없어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존재이기 때문에 그들은 영원한 가치를 가지잖아요.

상당 부분의(어쩌면 대부분의) 목회는 자신이 목사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때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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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하느님은 당신의 선택적 의지와 행위에 있어서, 또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아버지로 드러남으로써 인격적입니다. - P59

또한 아버지로서 영원히 당신의 아들과 관계하기에 그분은 아버지, 아들, 영의 연합과 일치 가운데 영원히 인격적입니다. - P60

이러한 연합과 일치 가운데, 형언할 수 없는 신적 신비는 영원히 구체적입니다. 그러니 삼위일체의 인격들 없는 하나의 인격적인 하느님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 P60

이러한 성서의 증언은 신학이 한 분 하느님에 관한 우리의 개념을 교회의 삼위일체론과 통합하는 새로운 방식을 모색하도록 자극합니다.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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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에게 목사와 작가는 하나의 정체성의 양면이었다. 목사라는 소명에 작가를 덧붙인 것이 아니고, 작가라는 소명에 목사를 덧붙인 것이 아니었다.

요한에게 작가와 목사는 같은 것이었다. 황무지의 시기를 지나면서 나는 요한의 그러한 면을, 즉 그가 목사이면서 작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걸을 때 오른발, 왼발 하듯이 그는 목사, 작가였다.

영성 신학이란 실제로살아내는 신학이며, 글을 통해 삶의 기층으로 들어가는 행위다.

스스로 발견해 가는 글쓰기다. 조금 더 깊은 차원에서 보자면 내 글쓰기는 곧 성경과의 대화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것은 회중과의 대화이기도 했다.

내가 아는 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글쓰기를 통해 내가 몰랐던 세계로 들어가는 것, 즉 신비로 천천히 들어가는 글쓰기였다

스스로 발견해 가는 글쓰기. 내가 알지 못했던 것을 탐험하고 발견하기 위한 글쓰기.

언어 안으로 내가 들어가고 언어가 내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글쓰기.

단어와 단어가 연결이 되어 전에는 표현할 수 없었던, 혹은 알아채지 못했던, 혹은 숨어 있던 것을 창조해 내는 글쓰기

집중하기 위한 글쓰기. 기도의 행위로서 글쓰기. 황무지에서 글을 쓰는 행위는 내 목회 소명에 동화되어 관계의 내면을 드러내 주었고, 신비로 나를 데려가 주었고, 상상력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그대로 된’ 성경의 언어세계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성경의 언어 세계로 들어가게 훈련시켜 주었다.

그 글쓰기는 우리 회중의 언어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방편이 되기도 했다.

나는 언어의 신성한 특성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목사로서 내가 하는 일은 온통 언어와 관련된 것이었다. 내가 하는 일 중에서 언어와 상관이 없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정보가 아니라 계시였다. 예수님은 이야기를 들려주셨고, 가르치셨고, 기도하셨다.

우리를 즐겁게 해주거나 우리에게 영감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참여하고 믿고 듣고 사랑하는 삶의 방식으로 우리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

그러한 삶의 방식은 무엇보다도 현장 중심적이고 인격적이다.

기도의 삶이다.

언어는 말로 하고 글로 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듣기도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깨닫기 시작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들어야 하고, 또한 우리 회중에 속한 사람들이 내게 하는 말도 들어야 했다.

황무지의 시기를 지나는 동안 나는 언어의 상당 부분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그리고 분명 ‘받아쓰는’ 것이 아니라-듣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스도인들이 사는 나라는삶 전체라는 것이었다.

버리면, 특히 하나님, 예수님, 기도, 믿음과 같은 말들을 대상화시켜 버리는 불임의 생명력 없는 언어를 사용한다면, ‘하나님 얘기’밖에는 남지 않게 된다

황무지의 시기 동안 이러한 질문들을 던지면서 목사와 작가의 공통 기반은 언어의 신성함이라는 사실을, 모든 언어의 신성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모든 언어는, 모든 진정한 언어는, 도서관에 소장될 법한 정보와 지식을 정확하게 말하고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의사소통이라기보다는, 교제에 더 가깝다.

진정한 언어는 생명을 지향하는 관계를 맺는다

사랑과 믿음과 소망, 용서와 구원과 정의가 그 안에 있다.

진정한 언어는 혀와 귀가 다 필요하다.

요한이 본 것을 기록한 글에서 내가 배운 것을 단 하나의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 얘기-즉 인격이 제거되고, 관계가 없고, 귀 기울여 듣지 않는 언어-는 생명을 죽인다는 것이다

목사와 회중은 자신들이 언어를, 이 신성한 언어를, 이 하나님의 말씀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에 매우 주의해야 한다.

나는살아내는 신학과 성경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고, 글쓰기를 통해 목회적 삶의 기층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단순히 반복하거나, 따라하거나, 맥락 없이 증거 본문을 대지 않는다. 그 글을 쓰고 있는 요한 안에서 성경이 재창조되었다.

그는 성경을 완전히 소화했다. 살아낸 성경이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이 살아낸 것을 글로 쓰고 있다. 그의 책은 결코 ‘받아쓰기’가 아니다.

내 경우 그 이야기는 소명에 따르는 성숙의 과정이다.

내가 하는 일에 초점을 맞출 수 있게 해준 문구는 ‘한 방향으로 꾸준히 순종하기’이다.

"‘하늘과 땅’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은…한 방향으로 꾸준히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생기는 결과는, 언제나 결국에는 생겼던 결과는, 인생이 가치 있어진다는 것이다.

나 자신이 기독교적 삶의 실천 가능성을, 성경에 나오는 모든 내용과 예수님에 대한 모든 것을 이곳에서 실제로 살아내야 한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생각했다.

일과 죄, 가정과 이웃의 혼란 속에서 내 임무는 기도하고 방향을 안내하며 복음을 실제로살아내도록 격려하는 것이었다.

인내하며, 현장에서, 인격적으로 말이다.

인내하며: 나는 이 사람들과 함께 머물 것이다. 이러한 일은 빠르게 혹은 쉽게 할 방법이 없다.

현장에서: 나는 경제, 날씨, 문화, 학교 등, 이곳의 조건들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일의 그 어떤 면도 추상화되거나 경건하게 이상화되지 않게 할 것이다.

인격적으로: 나는 그들을, 그들의 이름과 집과 가족과 그들의 일을 알 것이다. 그렇다고 사생활을 캐묻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을 프로젝트나 대의명분으로 삼지 않을 것이다.

성령은 계시에, 구원의 이야기에 우리를 집어넣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로서 우리 자신을 그 이야기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라고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는 거기에 순종하거나 하지 않거나 할 뿐입니다.

우리가 들어서는 이 세계는 거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세계입니다. 무엇을 사용하고 적용해야 하는지 알 만큼 우리는 충분히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임무는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고 신뢰하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냥 ‘꾸준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들어서는 이 세계는 거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세계입니다. 무엇을 사용하고 적용해야 하는지 알 만큼 우리는 충분히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임무는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고 신뢰하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냥 ‘꾸준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령이 형성하신 믿음의 공동체다.

우리가 서로를 기능이 아니라 이름으로 알고 사귐으로써 함께하는 삶의 선례를 만들고 싶었다.

어떤 책임을 맡느냐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서로에게서 그리고 하나님에게서 무엇을 받게 되는가의 관점에서 예배하는 회중의 삶을 이해하기를 바랐다.

믿음에 대해서, 의심에 대해서,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서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를 제공하고 싶었다.

심리 조작이 없는 예배. 프로그램이 없는 공동체. 내가 목사로서 정말로 즐거워했던 것은 이러한 모호함의 상태, 통제가 없는 상태에서 사는 것이었다.

그러한 상태에서 서서히 얻게 되는 통찰과 하게 되는 결심은 신앙의 고백으로 발전되고, 사전 계획 없이 ‘서로’ 자발적으로 가지는 관심은 세월이 지나면서 환대의 문화로 자리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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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심각한 문제는 상당수 성직자, 목회자가 하느님의 현실성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그 결과 자신들이 전해야 할 메시지를 변화하는 시대 분위기에 맞추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 P37

그러나 그들이 다른 무엇보다 해야 할 일은 세속 문화의 우상숭배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 P37

사람들의 머리와 가슴에 하느님의 궁극적 현실성을 새길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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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택한 멘토는 존 헨리 뉴먼(John Henry Newman), 알렉산더 화이트(Alexander Whyte), 그리고 프레더릭 폰 휘겔(Frederick von Hugel) 남작이었다.

너무 말을 많이 하는 목사, 너무 많이 아는 목사가 되고 싶지 않았다. 영혼을 ‘이하동문’으로 취급하는 목사가 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그로부터 온전히 받아들이고 싶었던 것은, 그리고 실제로 받아들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과 기도, 기도와 성경의 결합이었다.

성령은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성경)과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말씀(기도)을 융합하셔서 그것으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삶을 형성하신다.

새로 안수를 받은 신학교 졸업생이 그를 찾아와 그가 세인트 조지 장로교회의 목사직을 오랫동안 성공적으로 수행해 온 사실을 언급하면서 이제 목회를 시작하는 젊은 목사로서 조언을 구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가능한 자주 화장실에 가고, 휴가를 길게 가십시오."

그런데 이제 내가 목사가 되어 황무지에서 생존하는 법을 찾는 입장이 되자 감정으로는 내 삶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제대로 증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혹 목회의 차원에서 사람들 안에 인위적인 감정을 조작해도 그 감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내가 자란 교회 문화에서는 자신의 ‘영혼’을 점검하는 것이 자기 삶에 하나님이 얼마나 깊이 들어왔는지를 측정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니까 영혼은, 자신의 영성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스펙트럼으로 볼 때 차가운지 미지근한지, 아니면 뜨거운지를 알아볼 수 있는 일종의 내장 온도계였다.

모든 목사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사람들이 계속 예수님을 향해 ‘불 붙어’ 있게 하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예배는 그리고 특히 설교는 타들어 가는 장작에 불을 더 키우는 부채질 같은 것이었다.

당신들은 악을 희화화해서 자기 가정이나 일터에 들어설 때마다 거기에 엎드려 있는 악을 직접 대면하지 않으려 해요.

아니면 아예 그 존재를 부인하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잘못에 이름을 댈 수 있는 죄목을 붙여서 일망타진하려고 들지요

테레사와 요한은 반대편 끝에서 작업을 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영혼의 문제를 다루었는데, 기도의 삶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기도의 방식을 회복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삶을 개혁하고자 했다.

루터와 칼뱅이 성경과 바른 믿음에 관심을 두었다면, 테레사와 요한은 영혼과 바른 기도에 관심이 있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강의실이나 도서관에 앉아서 강의를 듣거나 책을 읽는 것, 혹은 교회에 가고 찬송가를 부르고 설교를 듣는 것을 통해서 자라고 성숙하지 않는다.

우리 일상의 모든 것, 부모와 자녀, 배우자와 친구, 일터와 동료, 꿈과 환상, 애착의 대상, 손쉬운 만족의 방법, 친밀한 관계의 비인격화, 살아 있는 진리를 소모품으로 축소하는 우상숭배, 이 모든 것을 가져다가 정제하는 불의 제단에 놓고-우리 하나님은 태워 버리는 불이시다!-그것이 전부 거룩한 삶을 위해 구속되는 것을 보아야 한다.

목사로서 내가 성경과 진리만큼이나 영혼과 기도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진리가 일상과 분리되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목사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루터와 칼뱅은 진리를 분명하게 제시하려고 노력했고, 실제로 그 일을 아주 잘 해냈다.

테레사와 요한은 자명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에 대한 체험을 정직하고 분별 있게 다루려고 노력했고, 우리가 성숙하고 거룩해지려면 모호함과 그림자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원하는 조건대로 하나님을 대할 수는 없다.

우리의 요구에 맞게 길들이고, 우리의 생각에 맞게 하나님을 축소시킬 수는 없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건 못하건, 좋아하건 말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방식에 몰입하는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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