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이 규정하는 것과
법이 하는 일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나쁜 사람들을 제지하기 위해 좋은 법이 필요한 게 아니라, 나쁜 법을 저지하기 위해 좋은 사람들이 필요하다.

우리는 빛의 자녀들이다. 그러나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사람도 다름 아닌 바로 우리들이다.

우리가 심판을 받는다면, 그것은 다른 나라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한 지적 잘못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지 못한, 지극히 영적인 죄 때문일 것이다.

오래전에 매듭지은 일뿐만 아니라 최근에 매듭지은 일까지 뒤엎을 준비가 안 되어 있는 한 ‘사상의 자유’란 있을 수 없다. 언론은 결정을 밀어붙일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끊임없이 대중을 선동한다.

지금 정말 필요한 건 잘못된 결정을 무효로 돌릴 강단이 있는 지도자다.

그리고 이것이 힘을 가늠하는 진정한 시험대가 될 것이다.

온 우주를 특정한 시각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위대한 문학 작품은 모두 은유다.

《일리아스》가 위대한 이유는
모든 인생이 전투이기 때문이요,

《오디세이아》가 위대한 이유는
모든 인생이 여행이기 때문이요,

욥기가 위대한 이유는
모든 인생이 수수께끼이기 때문이다.

요즘, ‘논리’라는 것이 가치가 있느니 없느니 하는 말을 많이 듣는다. 사실, 대부분의 논리는 방어하는 데 쓰는 무기이지 생산하는 데 쓰는 도구가 아니다.

지적 체계를 쌓는 사람은 느헤미야처럼 한 손에는 칼을, 다른 손에는 흙손을 들어야 한다. 탄탄한 체계와 상상력이 흙손이라면, 논쟁은 칼이다.

실제로 광범위한 지적 활동을 경험하다 보면, 논리라는 것이 주로 논리학자를 무찌르는 무기로 가치가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무언가를 사랑하는 비결은
그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있다.

미치광이는 조그마한 세상에서 살면서
그 세상이 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10분의 1의 진실 안에 살면서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는 어떤 이야기나 어떤 음모,
또는 어떤 관점 밖에 있는 우주를
상상하지 못한다.

자기 이름을 잊어버린 사람의 이야기를 한 번쯤은 다 읽어 보았을 것이다. 그는 길을 걸으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의 진가를 알아보지만, 정작 자기가 누구인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모든 인간은 이 이야기 속 주인공과 다르지 않다. 모든 인간이 자기가 누구인지 잊어버렸다. 우주를 이해할지는 몰라도 자아를 이해하지는 못한다. 자아는 그 어떤 별보다 더 멀리 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러나 너는 네가 누군지 모른다

우리는 모두 같은 재앙 아래 있다.
우리는 모두 우리 이름을 잊어버렸다.
우리가 정말 누구인지 잊었다.

우리가 상식, 합리성, 현실성, 확실성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모두 우리가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확실히 잊어버렸음을 의미할 뿐이다. 우리가 정신, 예술, 황홀감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모두 우리가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아주 잠깐 기억한다는 걸 의미할 뿐이다.

인간이 그저 인간일 때는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을 때뿐이다.
땅을 풍경 삼아 서 있으면 그 땅에 사는 사람이 되고,
집 앞에 서 있으면 그 집의 주인이 된다.
인간들이 연대감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곳은
죽음과 영계靈界가 존재감을 강렬하게 내뿜는 곳뿐이다.
마음에 스며든 신성한 어둠을 떨쳐 내는 순간,
사람과 사람의 차이가 아주 분명해진다.

예술은 인간의 독특한 특징이다.

인간은 늘 길을 잃었으되,
이제는 찾아갈 주소마저 잃어버렸다.

늘 뒤꽁무니를 보고야 무엇이 지나간 줄 아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사람들은 늘 끄트머리에 다다라서야 실체를 깨닫는다.
해 질 녘에야 그날 일을 상기한다.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짧게 줄이는 게 문학이다.
요즘 철학책들이
문학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래된 이상理想을 추구해 본 적 없는 사람들이
새로운 이상에 눈을 돌리는 기이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다.
사람들은 기독교에 싫증이 난 게 아니다.
싫증이 날 만큼 기독교를 탐구한 적도 없다.
사람들은 정치적 정의에 싫증이 난 게 아니다.
정치적 정의를 기다리다 지쳤을 뿐이다.

좋은 소설은 주인공에 관한 진실을 들려주고,
나쁜 소설은 저자에 관한 진실을 들려준다.

평범한 사람들만 기이한 것에 기습당한다. 기이한 사람들은 기이한 것을 보아도 아무 감흥이 없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흥미진진한 순간이 훨씬 많으나, 기이한 사람들은 늘 삶이 따분하다고 불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구약 성경 대부분의 핵심 사상은
‘하나님의 고독’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구약 성경의 등장인물 중 유일한 주인공이 아니라,
구약 성경에 나오는 유일한 등장인물이다.

인간이 해와 달을 사사로이 소유할 수 없듯이,
인간은 종교 역시 사사로이 소유할 수 없다.

욥기가 지적으로 아름다운 건
실상을 알고자 하는 갈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럴듯해 보이는 현상이 아니라
지금 일어나는 일의 실상을 알고자 하는 갈망 말이다.

아무리 광기를 끌어올려도 현대 궤변가들이 생각해 낼 수 있는 새로운 이상은 없다. 오래된 이상 중 하나를 완성하는 게 그보다 훨씬 더 놀라울 것이다. 어느 날, 케케묵은 격언이 현실이 되면 지축이 흔들리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해 아래서 할 수 있는 새로운 일은 단 하나, 해를 바라보는 것뿐이다.

슬픈 일을 겪은 사람이 음울한 철학을 갖게 된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어떤 의미에서 슬픔과 비관은 정반대다. 슬픔은 무언가에 가치를 두어서 생기지만, 비관은 그 무엇에도 가치를 두지 않아서 생기기 때문이다. 실제로, 모질고 잔인한 일을 많이 겪고도 누구보다 세상을 낙관하는 시인들을 자주 보지 않는가. 오랜 고통에서 벗어난 그들은 늘 인생을 낙관한다. 가끔은 그 정도가 지나쳐 역겨울 지경이다.

시인은 보통 사람들을 이해함으로써 그들을 뛰어넘는다. 과똑똑이는 사람들을 이해하려 하지 않음으로써 그들 위에 올라선다. 과똑똑이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묘하고 칙칙한 것을 모두 편견이요 미신이라 매도한다.

과똑똑이는 사람들로 바보 같은 기분이 들게 하고, 시인은 사람들로 생각했던 것보다 내가 더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평범한 사람들을 포용하고 존중하는 시인은 종종 돌을 맞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평범한 사람들을 경멸하는 과똑똑이는 대체로 땅을 차지하고 왕관을 쓴다.

현대 세계 전체가 보수와 진보로 갈라져 있다.
실수를 계속하는 게 진보의 일이고,
그 실수를 바로잡지 못하게 막는 게 보수의 일이다.

자아는 메두사다.
허영은 다른 사람의 거울 속에서
메두사를 보며 살고,
교만은 혼자 메두사를 연구하다가
돌로 변한다.

이제, 우리 시대의 근간을 뒤흔든 크나큰 실수에 관해 이야기할 차례다. 우리는 서로 다른, 정반대되는 두 가지를 섞어 버렸다. 모름지기 ‘진보’란 우리가 꿈꾸는 ‘이상’에 맞춰 이 세상을 계속 변화시킨다는 의미여야 한다. 그러나 지금 진보는 우리가 계속해서 이상을 바꾸고 있다는 의미가 되어 버렸다

모름지기 진보란 비록 느리더라도 사람들 가운데 정의를 구현하고 자비를 베푼다는 의미여야 한다. 그런데 지금 진보는 정의와 자비의 타당성을 즉각 의심한다는 의미가 되어 버렸다.

모름지기 진보란 우리가 새 예루살렘을 향해 계속 나아간다는 의미여야 한다. 그러나 지금 진보는 새 예루살렘이 계속해서 우리와 멀어지고 있다는 의미가 되어 버렸다.

우리는 이상에 맞춰 현실을 바꾸지 않는다.
대신에 이상을 바꾼다.
그게 더 쉽기 때문이다.

상류층의 권력을 이해하는 열쇠는 간단하다.
그들은 항상 진보 쪽에 서려고 애쓴다.
항상 유행의 최첨단을 걷는다.
상류 계층에게는 참 쉬운 일이다.
상류층에게 새로움이란 필수품에 가까운 사치품이다.
과거와 현재가 너무 따분한 그들은
굶주린 짐승처럼 미래를 노려보며 아가리를 한껏 벌린다.

개인적으로 이야기했든 공개적으로 이야기했든,
우리가 내놓은 지혜로운 말은 이 세상 몫이나,
우리가 내뱉은 어리석은 말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몫이다.

재산은 민주 국가의 예술이다. 모든 인간이 하늘의 형상을 따라 하늘의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으니 누구나 자기의 형상을 따라 자기 모양대로 만들 수 있는 무언가를 소유해야 한다는 뜻이다.

여론은 언제든 들불이 될 수 있다.
이견을 모조리 집어삼키는 들불.

견해 차이 못지않게 무관심도 신성하다는 사실은 이상하리만치 잊힌 듯하다. 대중의 무관심 역시 하나의 여론이다. 그리고 그 여론은 대개 현명하다. 모든 사람에게 ‘미네랄 섭취’에 대해 투표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치자. 투표용지가 한 장도 수거되지 않으면, 나는 아마도 시민들이 투표하지 않았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시민들은 이미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무성한 나무처럼 사방팔방 잘 자랄 수 있는 사람은 이름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이들뿐이다. 사람들은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고서야 내 안에 내가 너무 많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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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시작 - 도입부로 읽는 네 편의 복음서 비아 시선들
모나 D. 후커 지음, 양지우 옮김 / 비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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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마무리가 주는 여운을 뒤로하고 또 다른 시작이다.

거창한 계획과 다짐보다, 소소한 일상을 단단히 살고싶다.


독서도 마찬가지.

이런저런 책을 읽겠다는 계획보다,

책이 내게 말을 건네기를 기다렸다.


이 책. 원서 제목이 '시작'(Beginnings)이다.

심지어 얇다. 

새해 첫 책으로 제격이다. 


저자는 마가복음, 마태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의 프롤로그를 세세히 살핀다.

성경 저자의 세심한 편집과 배치에 따라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 이미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고, 어떤 점을 전제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야하는지를 밝힌다.


얇지만 풍성한 내용이다. 

복음서를 대할 때 먼저 이 책을 읽고 시작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모나D후커 #복음의시작 #비아 #2021년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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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복음서의 도입부는 문체 면에서 다른 복음서들과 상이합니다. - P126

마르코가 간결하고 극적인 장면들을 보여주었다면, 마태오와 루가는 이를 좀 더 확장해 이야기 형식으로 서문을 썼습니다. 반면 요한은 우리에게 단단한 신학을 선사합니다. - P126

어둠 속에서 비치는 빛을 언급함으로써 요한은 창조라는 주제를 하느님께서 역사 속에서, 그리고 당신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예언자들을 통해서 당신의 백성에게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내신다는 생각과 연결 짓습니다. - P131

우리가 예수를 통해 받은 것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의 전언도, 하느님 영광의 잔영도 아닙니다. 그것은 저 말씀과 영광이 체현된 것입니다. - P140

이제 복음서 저자가 ‘육신이 된 말씀‘이라 말했던 분이 우리에게 있으며, 우리 가운데 사십니다. - P140

다른 무엇보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보게 되는 것은, 저 영광이 하느님의 외아들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 P156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그가 은총과 진리의 진정한 현현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 P156

요한 복음서를 여는 문단들은 예수의 이 ‘영광스러운‘ 죽음에서 모든 것이 성취됨을 보여줍니다.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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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먼저 루가가 사용하는, 다소 숨은 의도가 있는 언어에 담긴 단서들에 주목해 봅시다. 그가 사용한 언어에 이를 해명할 단서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 P91

루가는 의도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구성해 우리가 이야기의 시초부터, 그들이 탄생하기도 전부터 요한이 예수의 길을 준비하는 선구자이며 예수의 등장을 암시하는 인물임을, 곧 예수를 따를 이들을 위해 길을 예비하는 이임을 깨닫게 합니다.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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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은 따분한 날에 벌어지지,
화창한 날에는 벌어지지 않는다.
단조로움이라는 현絃이 최대한 팽팽하게 당겨지다가

끊어지는 순간,
노랫가락 같은 소리와 함께 모험이 시작된다.

인류가 진보했는지는 인류가 한 선택에 달렸다. 인류가 선택한 길은 곧게 쭉 뻗은 길이나 굽이진 오르막 혹은 내리막이 아닐 수도 있다.

골짜기를 지나는 사람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그는 자기가 가고 싶은 길로 가고, 멈추고 싶은 곳에서 멈출 수 있다. 교회에 갈 수도 있고, 발을 헛디뎌 도랑에 빠질 수도 있다.

인간의 삶은 하나의 이야기, 곧 모험담이다.
우리 눈에 비친 하나님의 이야기도 그러하다.

완벽한 행복이란 게 가능하다면 말이지만, 인간이 이 땅에서 느끼는 지복至福은 동물이 느끼는 만족감처럼 단호하지도 견고하지도 않다. 행복은 마치 지독한 연애처럼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되, 그 균형이 언제 깨질지 모르는 위태로움 속에 있다.

모험에 뛰어들려면
자기 자신을 충분히 믿어야 하고,
모험을 즐기려면
자신을 충분히 의심해야 한다.

미치광이가 되기는 쉽다. 이단이 되기도 쉽다. 자신의 것을 지키는 게 어렵지,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는 건 어려울 게 하나도 없다. 현대의 사조에 순응하기는 쉽다. 속물이 되는 건 어려울 게 전혀 없다. 기독교가 걸어온 역사의 길목에 늘어선, 온갖 풍조와 종파가 놓아둔 오류와 과장의 덫에 빠지는 건 정말 정말 간단한 일이다.

넘어지는 건 간단하다.
넘어지는 각도는 무한하고,
서 있는 각도는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흐르는 대로 떠내려가는 건 죽은 것이다.
살아 숨 쉬는 것만이 흐름을 거스를 수 있다.

죽은 개는 날쌔게 내달리는 사냥개처럼
급류를 타고 떠내려간다.
오직 살아 있는 개만 물살을 거슬러 헤엄칠 수 있다.

자기 말만 하면서 대화를 독점하는 사람은
둘 중 하나다.
자기 목소리를 좋아하거나
자기 목소리가 어떤지 모르거나.

성경은 우리에게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고,
또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다.
대개는 그 둘이 같은 사람이라서가 아닐까.

지혜 안에만 아름다움이 있는 게 아니다.
아름다움은 이렇게 멍하고 눈부신
무지 속에도 있다.

편협함은 어떤 주장에 대한 대안을 진지하게 생각해 내지 못하는 무능함과 다르지 않다.

그 주장이 옳다고 여기는가 아닌가와는 상관이 없다. 애가 타서 속이 새까매지거나 전쟁도 불사할 만큼 무언가를 강하게 확신한다고 해서 다 편협해지는 게 아니다. 설사 자기가 믿는 도그마가 사실일지라도, 그 도그마 역시 그저 도그마일 뿐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할 때 편협한 사람이 된다.

누런 종이에 그린 그림은
지혜롭되 지독한 사실을 하나 드러낸다.
하양은 색이라는 사실이다.

하양은 색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하양은 선명하고 밝게 빛난다. 빨강만큼 강렬하고 검정만큼 또렷하다.

기독교에서 최고로 꼽는 도덕 두셋 중 하나도 이와 같다. 하양은 색이다. 이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도덕의 주된 요지다. 덕은 악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도덕에 위협이 될 만한 요소를 멀리하는 것을 뜻하지도 않는다.

덕은 고통이나 특정한 냄새처럼 생생한, 별개의 것이다. 자비롭다는 건 잔인하지 않다거나 복수심을 버린다거나 처벌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자비는 해처럼 명확하고 확실하다.

누군가는 경험하고 누군가는 경험하지 못한다. 순결은 성적인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고 자제한다는 뜻이 아니다. 잔 다르크처럼 불타오르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색으로 그림을 그리시나 지나치게 화려하게 색칠하지 않으신다. 그분이 하얀색으로 그리신 그림을 나도 모르게 번지르르한 말로 치장하려 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건설과 창조의 극명한 차이를 말하자면,
건설된 구조물은 건설된 뒤에만 사랑받을 수 있으나
창조된 피조물은 존재하기 전부터
사랑받는다는 점이다.
마치 어머니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사랑하듯이.

어떤 이유로 사회의 좋은 기능들이 더는 작동하지 않을 때 그 사회는 쇠퇴하기 시작한다. 식량이 있어도 먹이지 않고, 치료제가 있어도 치료하지 않고, 나눠 줄 혜택이 있어도 나눠 주려 하지 않을 때 그 사회는 쇠퇴한다. 그런 좋은 기능을 잃어버린 사회에 대해서는 진보와 퇴보를 논할 가치조차 없다.

‘비이성적’이라는 말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따라서 기독교의 덕이나 신령한 덕을 논할 때는 이 덕이 본래 역설적이고, 전형적인 이교의 덕이나 이성론자의 덕과 같지 않다는 점을 명확히 밝혀야 한다.

정의는 누군가로 말미암아 무엇을 찾아내고 찾아낸 그것을 그에게 주는 걸 의미한다. 절제는 특정한 탐닉의 적절한 경계를 찾아내고 그 경계를 지키는 걸 의미한다.

그러나 사랑은 용서할 수 없는 이를
용서하는 걸 의미한다.
그러지 않는 사랑은 덕이 아니다.

소망은 아무 희망이 없을 때
소망하는 걸 의미한다.
그러지 않는 소망은 덕이 아니다.

믿음은 믿기 힘든 것을 믿는 걸 의미한다.
그러지 않는 믿음은 덕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팔레트를 빽빽이 채운
물감만큼 많은 색을 주지 않으셨다.
대신에 그림의 소재와 모델,
특정한 시각을 주셨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가 그리고 싶은 게 무엇인지
분명히 해야 한다.

평범한 것들이 비범한 것들보다 더 가치가 있다. 아니, 평범한 것들이 더 비범하다.

인류보다 한 사람이 더 존엄하다. 그러니 권력이나 지성, 예술이나 문명이 이룬 기적보다 ‘이웃 사랑’이라는 기적을 더 생생하게 경험해야 한다. 두 다리로 서 있는 보잘것없는 사람을 볼 때 그 어떤 음악을 들을 때보다 더 가슴이 미어지고, 그 어떤 그림을 볼 때보다 더 경탄해야 한다.

우스꽝스러움과 숭고함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존엄성이 없으면, 존엄성을 잃을 수도 없다. 길을 걷던 사람이 갑자기 바닥에 고꾸라진다.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운 이유는 뭘까? 그럴듯한 이유는 하나뿐이다. 그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오직 인간만이 우스꽝스러워질 수 있다. 오직 인간만이 존엄성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적 신앙이 있는 사람에게는 철학적 의심도 있게 마련이다. 거만하게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에게 더는 의심하지 말라고 말하는 건 옳지 않다. 오히려 계속 의심하라고 말해야 한다

여호와께서는 어떠한 답도 주지 않으셨다. 하지만 욥은 너무 좋아서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는, 등골이 오싹해질 만큼 소름이 돋는 어떤 기운에 에워싸인다. 하나님이 당신의 계획을 설명하길 거부하신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그분의 계획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하나님의 수수께끼가
사람의 해답보다 더 만족스럽다.

기독교에 관하여 생각을 거듭할수록 분명해지는 사실이 하나 있다. 기독교는 규칙과 질서를 세운다. 그러나
질서를 세우는 주된 목적은
선한 것들이 마음껏 뛰놀
여지를 주기 위해서다.

정신의 자유와 감정의 자유는 보기보다 단순하지 않다. 이 둘은 사회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만큼이나 법과 상황의 균형이 깨지지 않도록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왔습니다. 그중에서도 사고력과 상상력, ‘정신’이라는 위대한 선물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요. 이것들은 그 자체로 선합니다. 설사 타락하여 악용될지라도, 이것들이 본래 어디에서 왔는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정결함과 소박함이 정말 필요한 곳은 따로 있다.
삶에 감사하고 웃음을 잃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정결하고 소박한 마음이 필요하다.

날아가는 새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려면,
길가에 자리한 돌멩이와 잡초에도
눈길을 주려면,
해 질 녘 들판 위로 펼쳐지는 저녁노을에
마음을 쓰려면,
기뻐하는 법을 연습하고
감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너무 위대해서
그 앞에만 서면 누구든
초라한 기분이 들게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진정한 위인은
함께 있는 사람 누구나
기분 좋게 만드는 사람이다.

너무 위대해서
그 앞에만 서면 누구든
초라한 기분이 들게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진정한 위인은
함께 있는 사람 누구나
기분 좋게 만드는 사람이다.

짙은 색은 흐린 날에 더 선명해 보인다. 칙칙한 배경과 대비를 이루어 저만의 빛깔로 불타오르기 때문이다. 검은 하늘 아래서 온갖 꽃은 마치 쏘아 올린 불꽃 같다. 마치 환상 속 마녀의 정원에서 활활 타오르는 꽃처럼 강렬하면서도 은밀한 그네들에게는 무언가 기묘한 구석이 있다.

모든 건 쥐의 철학이 무엇인가에 달려 있다. 무엇이 더 낫다는 신조가 없으면, 승리나 우월함을 논할 수조차 없다. 채점 제도가 없으면 고양이의 점수를 운운할 수 없다. 받을 수 있는 최고점이 없는데, 어떻게 고양이가 최고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변칙은 아주 큰 문제가 되고 대단히 해롭다. 추상적인 불합리함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본성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그 이유가 뭔지 다 알 것이다.
모든 불의는 마음에서 시작되고,
변칙은 사람들 마음이 불합리하고 거짓된 사상에 익숙해지게 한다.

부패한 천성과 야심이 필요한 상황에는 고상한 사람들, 유능한 사람들, 업무 능률이 높은 사람들을 데려다 써라. 그러나 곁에 두고 마음을 내줄 사람은 그들이 아니다. 우스꽝스럽고 바보 같은 사람들을 곁에 두라. 명석한 사람들은 짐짓 당신을 좌지우지하려 할 것이고, 흠 하나 없이 완벽한 사람들은 짐짓 당신에게 충고하려 할 것이다. 이러든 저러든 내버려 두고, 오직 바보들에게만 마음을 열어라. 결점이 훤히 보이고 무슨 생각인지 딱 봐도 이해가 되는 바보 같은 사람들만 인생에 들여라.

그들에게 곁을 내주고,
불가능을 향해 나아가는 고독한 여정을
함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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