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묵시, 거룩한 결혼 안에서 잉태된 묵시는 열정으로 인내하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고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건 하나님나라를 증언하고 그 나라를 위해 일하는 데 용감하게 헌신된 공동체를 키운다.
묵시의 양육을 받는 집단은 주로 주변부에 있는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집단들이다.
성 요한은 무척이나 다급해하지만 서두르지는 않는다. 그의 책에 나타나는 서두르지 않는 긴박함을 보라.
성 요한이 인내를 강조하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거대한 신비와 엉망진창인 인간 조건의 복잡함을 다루기 때문이다.
신비도 엉망진창도 단순하지 않다. 엉망진창의 역사에서 거룩한 삶을 배우려면 세대를 넘나드는 차원에서 생각하고 세기의 단위로 생각해야 한다.
묵시적 상상력은 지질학자들이 ‘깊은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을 가늠할 수 있는 재능을 준다.
목사들이 일하는 환경은 인내를 약화시키고 조급함을 보상해준다. 사람들은 신비(하나님)와 엉망진창(자기 자신)을 불편해한다.
은혜의 신비와 인간의 죄의 복잡함 한가운데서, 매달 평가할 수 있고 자신이 어디쯤 서 있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으면 안도가 된다.
우리 자신이나 하나님과 대면하지 않아도 되고, 종교 용어를 사용하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환경에서 일하면서 우리가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묵시는 우리가 절박한 상황에 같이 처해 있다고 납득시킨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악을 해결하고 신실함을 키우는 것이다.
묵시는 긴박함을 유발하면서도 지름길과 서두름의 불은 끈다. 왜냐하면 시간은 하나님의 손에 있기 때문이다. 신문이 아니라 섭리가 우리가 사는 시대를 설명해준다.
묵시에서 충실함이 비롯된다. 하나님에 대한 충실함은 물론이고 사람, 교구,장소에 대한 충실함이 나온다.
성 요한과 그의 회중과 함께 우리는 장소와 사람에 대한 충실함을 배운다. 그것은 엉망진창인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신비 앞에서 도덕적ㆍ영적ㆍ전례적 삶을 사는 것이 얼마나 복잡한지에 경의를 표하는 신실한 인내이다.
목사들은 자신이 진단하고 치료할 책임이 있는 질병을 오히려 퍼트리는, 미처 감지 못한 보균자가 될 위험에 처해 있다. 우리에게는 가장 강력한 예방책이 필요하다. 성 요한의 묵시적 기도와 시와 인내 같은 것 말이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말도 못하게 제멋대로인 사람들이 거룩한 장소를 진흙 발로 오가며 지저분하게 만든다. 예배의 질서는 논쟁과 의심, 통증에 시달리는 육체와 혼란에 빠진 감정, 말을 듣지 않는 아이들과 엉뚱한 일을 벌이는 부모들의 무질서에 자리를 내준다.
주일 예배 때 그토록 분명했던 목사라는 비전이 나를 자신들의 자아의 볼모로 보는 사람들의 눈에 반사되어 흐릿해지고 왜곡된다.
일요일은 중요하다. 축하의 날이고 본질의 날이다. 일주일 가운데 이 첫날은 주님의 부활이 우리 삶을 규정해주고 그 삶에 활력을 주며 나머지 날들에도 부활의 영향을 미친다.
일요일과 일요일 사이의 엿새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축하의 날은 아니지만 부활이 형성되는 날이기에 중요하다
대부분의 목회가 그 엿새 동안에 일어나기 때문에 동일한 관심을 주어야 하고 살아가는 일 한가운데서 기도의 기술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 시대의 소명 개혁은, 만약에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면, 영혼을 치료하는 목회의 재발견이 될 것이다
영혼 치료는 죄와 슬픔에 맞서는 끝없는 전쟁과 은혜와 믿음의 부지런한 계발을 내가 아는 한 가장 잘 조화시키는 표현이다.
영혼의 의사가 되는 것이 교회 운영보다 우선이며, 내 목회 소명과 관련해서는 동시대인보다 현명한 선배들의 지도를 받겠다고
영혼 치료가(예를 들어 병원 원목이나 목회 상담가 같은) 특수 사역이 아니라 목회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것은 목회를 종교적 차원으로 축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중의 의무와 만남과 상황을, 기도를 가르치고 믿음을 발전시키고 아름다운 죽음을 준비시키는 원재료로 사용하는 삶의 방식이다.
평일에 하는 목회 본질의 회복은 이 시대의 세속화된 기대와 긴장 관계 속에서 시행되어야만 한다
협상, 토론, 실험, 대립, 조정이 있어야 한다. 영혼을 인도하는 일에 헌신한 목사는 자신에게 교회 운영을 기대하는 사람들 틈에서 그 일을 해야 한다.
영혼의 그 거대한 영토를 되찾는 일을 자신의 중요한 책임으로 삼으려는 목사라면, 목회 현장을 떠나 재교육을 받는 것으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계속해서 사역하면서 그것을 해내야 한다.
소명의 회복이라는 임무는 신학 개혁만큼이나 끝이 없다.
영혼의 치료는 하나님이 이미 주도권을 쥐셨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 진리를 정의하는 전통 교리는 선행先行이다.
모든 곳에 계신 하나님이 언제나 주도권을 쥐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일을 이루신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이 운을 떼신다. 선행은 내가 등장하기 전에, 여기에 내가 할 일이 있음을 인식하기 전에, 하나님이 부지런히, 구속적으로, 전략적으로 일하고 계셨다는 확신이다.
영혼의 치료는 인간의 무기력함에 무관심하지 않고, 회중의 고집스러움에 무지하지 않고, 신경증적 완고함에 부주의하지 않는다
대신에 우리가 하는 모든 것―정말 말 그대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첫 일, 하나님이 개시하신 행위에 대한 반응이라는 훈련된, 단호한 확신이 있다.
영혼을 치료할 때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은 여기에서 무엇을 하셨는가? 이 인생에서 내가 분별할 수 있는 은혜의 흔적들은 무엇인가? 이 집단에서 내가 읽어낼 수 있는 사랑의 역사는 무엇인가? 내가 참여할 수 있는,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은 무엇인가?
우리 자신을 출발점으로 삼고 현 상황을 기본 데이터로 삼으면 실재를 오해하고 왜곡하게 된다. 옴짝달싹 못하는 인간 조건에 맞서 시간을 아끼며 그것을 바꾸려는 대신에 하나님이 선행하신 것을 보고 어떻게 하면 제때에 제대로 된 방식으로 거기에 참여할까 분별한다.
하나님이 이미 시작하셨다. 회의에 늦은 사람처럼, 나는 하나님이 이미 결정적인 말씀을 하시고 결정적으로 행동하신 복잡한 상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꼭 그 사실을 선언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발견하고 그에 적합하게 사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
영혼의 치료에서는 그들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하는지보다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되어가는지에 훨씬 더 관심이 있다. 그 일에는 설명하는 언어나 동기부여의 언어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된다.
동기부여의 언어는 무엇을위한 언어다. 일을 해내기 위해서 말을 사용한다. 명령하고 약속하고 요청한다. 그러한 말은 사람들이 자기 주도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만든다.
우리 인간성에 더 본질적이고 믿음의 삶에 훨씬 더 기본적인 언어가 있다. 그것은 바로인격의 언어다.
영혼의 치료는 사물의 중심에서, 가장 자기다운 곳에서, 믿음과 친밀감의 관계가 개발되는 곳에서부터 일하겠다는 결심이다
목회의 임무는 인간성의 가장 기본 차원에 적합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설명하는 언어가 아니라, 동기부여 하는 언어가 아니라, 자발적인 언어, 즉 외침과 감탄, 고백과 감사 같은, 마음이 말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영혼 치료에 사용하는 일차적 언어는 대화와 기도다.
목사가 된다는 것은 인격적 유일성이 강화되고 개인적 존엄성이 인정받고 존중받는 언어를 사용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이다.
그것은 서두르지 않고 강요되지 않고 들뜨지 않는 언어다. 친구와 연인들의 여유로운 언어이며, 또한 기도의 언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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