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란 일상을 전문으로 하는 기독교 사역이다.

사고팔고, 방문하고 만나고, 오고 가고 하는 일상의 일들에 주의를 기울이고, 몰두하고, 그것을 감사히 받아들이는 것이 목회의 본질이다.

출생과 죽음, 회심과 헌신, 세례와 성찬, 절망과 축하 등 위기의 사건들도 물론 다룬다. 이러한 일들 또한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따라서 목회에 포함된다. 그러나 날마다 일어나는 일들과는 다르다.

위기는 소수의 사람들이 인생의 특정 시기에만 만나는 것이다.

잡담은 특정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 때, 논리적으로 생각하거나 현명하게 결정하거나 정확하게 이해하지 않아도 될 때 우리가 말하는 방식이다.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고 스트레스도 주지 않는, 우리를 안심시키는 말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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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함께 사는 이 사람들은 블레셋과 바리새인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기도하기 위해서 이곳에 왔다.

교구는 사실 예배 센터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기를 갈망하는 것이지 교의학 시험을 위한 벼락공부를 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교회 생활의 준거가 되는 핵심 언어는 늘 기도의 언어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목사로서 나의 우선적 교육 임무는 사람들에게 기도를 가르치는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나는 오래전에 고인이 된 선조들과 친구가 되어 많은 도움을 받았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와 아빌라의 테레사가 출발점이었다.

나는 이 대가들을 멘토로 삼았다. 그들은 기도의 개념을 확장해주고, 포괄적이고 상상력 넘치고 격렬한 기도의 언어를 내게 소개해주었다

또 사람들에게 기도를 가르치는 것이 내가 하는 최고의 일임을 확신시켜주었다.

언어 1은 최초의 언어이고, 인간 조건을 표현하고 발전시키는 데에 쓰는 기본 언어이다.

언어 2는 학교에서 주로 사용하는 언어이다.

언어 3은 동기 언어이다

우리는 언어에 의해 움직이고, 언어를 사용해서 다른 사람을 움직인다.

언어 3은 광고와 정치의 언어이다.

언어 1, 즉 친밀함의 언어이자 신뢰와 희망과 이해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언어는 시들해지고, 일단 유년기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그것을 사용할 일이 갈수록 줄어든다.

나는 철저하게 세속화된 학교와 판매 중심 사회에서 배운 것을 교회에서 그대로 사용했는데, 사람들의 인간성과 믿음에 기초가 되는 언어, 사랑과 기도의 언어를 개발하고 사용하는 데에는 별 도움을 주지 못했다.

인격적인 하나님―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자신을 신뢰하는 삶으로 초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똑같이 인격적인 말로 그 말씀에 응답하도록―1인칭으로 2인칭에게, 내가 너에게 말하고 3인칭 논평은 최대한 피하도록―지도하고 격려하는 것이 나의 본질적인 교육 임무였다.

기도를 가르치는 것이 내 임무였다.

기도는 언어 1이다. 하나님이나 믿음에 대한 언어가 아니다. 하나님과 믿음을 섬기는 언어가 아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하나님과 함께하는 언어이다.

《프로슬로기온》은 기도로 하는 신학이다.

목사의 최우선 설교 임무가 인생 전환이라면, 목사의 최우선 교육 임무는 언어 전환이다

존재의 모든 차원을 하나님을 섬기고 영화롭게 하는 일로 끌어들이는 이 믿음의 삶에서는 모든 언어에 능숙해야 한다

내가 가장 잘 쓰는 언어와 다른 사람들이 능숙하게 쓰도록 가르쳐야 하는 최우선 책임이 있는 언어는 언어 1, 관계의 언어, 기도의 언어라고 결정했다.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뜻이 교차하는 지점의 핵심에 있는 문제가 바로 모든 것의 핵심이었다.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의 관계는 특수한 종교적 질문이 아니다. 그것은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그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서 우리 인간성의 모든 영역이 영향을 받는다.

내 인생에서 일어나는 생물학 너머의 일들, 그러니까 먹고 입는 것 너머의 일들에 주의를 기울일 때마다 이 의지라고 하는 특이한 문제가 연루되었고, 그 방식은 전혀 자명하거나 단순하지 않았다.

"주체가 행위의 결과에 참여한다." 내가 행위를 통제하지 않는다.

나는 다른 존재, 즉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내 주께서 시작하신 행동에 들어가 그 행동의 결과에 참여한다.

내가 행하는 것도 아니고 내게 그대로 행해지지도 않는다. 발휘된 의지에 내가 의지적으로 동참하는 것이다.

기도와 영성의 특징은 참여이다. 하나님과 인간, 그분의 뜻과 우리의 뜻이 복잡하게 참여한다.

은혜의 강에 자신을 방치하고 사랑의 바다에 빠져 정체성을 잃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조정하지도 않고(능동태), 하나님의 의해 조정되지도 않는다(수동태). 우리는 행위에 연루되어 있고 그 결과에 참여하지만 그것을 통제하거나 정의하지 않는다(중간태). 기도는 중간태로 이루어진다.

복음은 중간태를 회복해준다. 우리는 자신에게서 유래하지 않은 행위에 기도와 의지로 관여하며 사는 법을 배운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연루된 행위에 주체가 된다. 중간태에서는 주어 다음에 목적어가 온다. 모든 사람과 사물이 주어가 된다.

이 제3의 태,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고 하나님에게 반응하는 인간의 절묘하고 독특한 모험에 미세하게 맞춰진 이 용법에 대한 동사적 경험이 우리는 충분하지 않거나 전혀 없다.

능동태와 수동태로만 존재할 수 있는 우정이나 연애나 결혼은 없다. 또 다른 것이 필요하다. 수없이 미묘한 참여와 친밀감으로, 신뢰와 용서와 은혜로 발산되는 자발성이 필요하다.

인간과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최고 모습은 능동태와 수동태 사이에 서서 중간태로 기도한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21).
경외함이 이 문장의 핵심이다

경외하고 집중하며 사랑과 흠모로 반응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복음 경외, 그리스도 경외, 배우자 경외는 그런 것이 아니라 강렬하고(그러나 결코 주제넘지 않은) 대범한 자유이며, 자발적 에너지가 넘치는 자유이다. 바로 그 맥락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사랑받고 사랑한다.

우리는 압제당할 것이라는 두려움 없이 그리스도 앞에 언제든 엎드릴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내놓으시고,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다 쏟아부으셨기 때문이다. 의지적 수동성이다.

사랑은 자발적으로 내 뜻을 포기하는 것이다("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자발적인 십자가의 죽음이다.

결혼생활은 의지적 수동성의 가능성을 폭넓게 경험하게 해준다.

우리는 자신이 만들어내지 않은 복잡한 현실에서 날마다 관계를 맺는다.

일에서든, 언어에서든, 결혼에서든, 기도에서든, 모든 친밀감의 행위는 고의성은 억제하고 자발성은 계발한다.

창조 행위에서 우리는 모두 고의성을 억제하고 자발성은 계발한다.

거기에는 자아보다 더 큰 무엇, 자신보다 더 나은 어떤 것에 연루되어 있다는 깊은 의식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 ‘더 큰’과 ‘더 나은’을 지칭하는 인격적인 이름이 있다. 바로 하나님이다.

자유로운 의지의 자질 중 하나는 그것이 작용하는 필연성의 성질과 범위를 아는 것이다.

필연성에 신경 쓰지 않으면 의지는 교만해지고 자만심에 빠지거나(그렇게 되면 반드시 비극으로 벌을 받는다고 그리스인들은 생각했다), 식물 상태와 구별되지 않는 무기력함으로 움츠러든다.

건강하고 원기 왕성한 의지―자유로운 자발성―안으로 들어선 겸손한 담대함(혹은 담대한 겸손)은 우리의 구원을 의도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드리는 기도에서 가장 잘 표현되고 가장 만족스럽게 경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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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누구나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있다. 이런 마음이 일어나는 자체는 탓할 일도, 억지로 가라앉힐 일도 아니고 그저 자연스러운 욕망일 뿐이다. - P39

다만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일어날 때 ‘아, 내 마음이 이렇구나‘하고 알아채는 일이 중요할 뿐이다. 알아채는 순간, 욕망의 온도는 견딜 만하게 내려간다. - P39

사랑받는 것을 내 삶의 중심으로 두면 힘들어집니다. - P39

우리는 사랑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사랑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합니다. - P39

사랑받으려 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 P39

연인 사이에 흔히 ‘넌 내 거야‘ 하고 말하죠. 그러면 그 사람이 내 것이되는 게 아니라, 내가 그 사람 것이 됩니다. - P39

내 행복이 그 사람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죠. 그 사람의 한마디, 몸짓 하나에 내 행복과 불행이 좌우되기에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지 못합니다. - P39

내가 널 이렇게 좋아하고 사랑하는데, 너도 날 사랑해야 돼. 이건 거래고 흥정이지 진정한 사랑은 아닙니다. - P39

그래서 사랑받으려 하면 괴로움이 생겨날 뿐입니다. 반면 사랑하려 하면 충만이 옵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으로 바로 서기 때문이죠. - P39

인생이란 어느 한 순간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기다림이며, 가장 나다운 나와 만나는 먼 여정임을 이해했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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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를 볼 때) 바람직한 관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자주 반복되는 표현과 주제가 무엇인지 파악하라. - P117

(2) 전통적인 지혜 진영(규범적 지혜)과 이들의 신학에 반발하는 진영(반성적 지혜) 사이의 대결구도로 이해하라. - P117

(3) 이 두 가지 지혜가 ‘신의 속성‘(하나님은 어떤 분인가)과 ‘인간의 고난‘의 문제에 대해 어떠한 논리와 주장을 펴는지를 큰 틀에서 정리하라. - P117

3장의 욥의 말은 규범적 지혜 진영을 대표하는 욥의 친구들을 자극합니다. - P118

감히 건방지게 죽고 싶다는 ‘망발‘을 했기 때문이 아니고, ‘죽음‘과 ‘사후세계‘를 신학적 사유의 영역으로 끌어 오기 때문입니다. - P118

욥기 1장과 2장이 잠언의 규범적 지혜가 다루지 않는 천상의 공간을 언급한 것처럼, 3장은 마찬가지로 규범적 지혜의 영역 밖에 놓여 있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언급함으로써 규범적 지혜의 한계를 폭로합니다. - P118

잠언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할 때, 욥기는 천상의 세계와 죽음의 공간을 논의의 단상에 올려놓습니다. - P118

규범적 지혜는 사람을 올바른 "생명의 길"로 인도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잠 6:23). - P125

하지만 엘리바스는 이 규범적 지혜를 죄 없는 자를 죄인으로 낙인 찍는 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 P125

사람을 살리는 지혜가 사람을 죽이고 누군가의 영혼을 파괴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욥기는 잘 보여줍니다. - P125

욥의 말이 친구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지점은 "하나님이 나를 괴롭게 하셨다"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진술이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는 무죄 주장과 연결되는 순간입니다. - P133

하나님이 죄 없는 자에게 고통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인과응보의 원리 안에서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 P133

규범적 지혜의 절대선 개념에 도전하는 욥의 주장은 친구들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모독하는 교만이고 무지이고 죄악입니다. - P133

‘니플라옷‘, 즉 하나님의 인식불가능성과 예측불가능성은 한 인간이 겪는 고통을 까닭 없는 것으로, 즉 그 원인을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듭니다. - P135

하나님은 "까닭 없이"(חנם) 사람에게 고통을 주실 수도 있고, 의인이든 아니든 상관 없이 멸망시킬 수도 있는 분입니다. 흥미롭게도 욥기는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화합니다. - P135

욥의 주장은 규범적 지혜의 "경외"와 "겸손"을 재해석합니다. 규범적 지혜는 하나님이 패턴을 만드셨기 때문에 그 패턴을 잘 알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이자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이라고 말하는 반면, 욥의 반성적 지혜는 인간이 하나님의 패턴을 알 수 없고, 하나님이 반드시 패턴대로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은 두려운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 P138

전통적 지혜보다 반성적 지혜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거리가 멀어집니다. - P144

먼지 티끌 같은 인간이 그보다 훨씬 크신 하나님의 뜻을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 P144

그리하여 반성적 지혜에서 하나님의 행하심은 인간에게는 이해 불가한 것(‘니플라옷‘)이며 까닭을 알 수 없는 것(‘힌남‘)이 됩니다. - P144

하지만 엘리후는 인간과 하나님의 차이를 강조하는 반성적 지혜와, 하나님의 뜻을 인간이 알 수 있다는 전통적 지혜를 동시에 주장하고 있습니다. - P144

계속 반복되는 "네가 아느냐", "누가 했느냐" 등의 표현은 단지 욥에게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욥뿐 아니라 모든 인간들의 경험의 한계, 인식의 한계, 그리고 존재의 한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인간의 이해가 미치는 범위는 그리 넓지 않습니다. - P156

하나님의 언설 속에는 권선징악이라는 개념에 해당될 만한 발언이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 P156

흥미롭게도 하나님은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씀을 통해 자신을 ‘선한 존재‘로 포장하지 않습니다. - P156

욥과 친구들 사이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인과응보 사상에 대해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시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언설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 P156

욥기는 핵심을 찌르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렇다면 당신도 마찬가지로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우리가 바라는 대로 움직이시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아무런 효용가치가 없다 해도 우리는 "까닭 없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하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 P180

"까닭 없는 신앙"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사탄의 신학이고,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이 욥의 신앙입니다. - P180

한 사람의 고통 앞에서 욥기는 우리가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고통을 당하는 사람에게 그 고통의 원인을 설명하거나 이해시키려는 태도를 취하면 안 됩니다. - P183

고통을 당하는 사람의 잘못을 지적해서도 안 되지만, 그 고통이 무언가를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설명 역시 ‘교만‘입니다.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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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 공동체는 결코 닫혀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처럼 그리스도인이 필연적으로 세상 속에서 존재해야 할지라도, 그는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 P38

이것은 그가 세상에 의하여 통제되지도 않으며, 세상을 의존하지 않는 생각과 삶과 마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또 생각과 삶과 마음이 다른 주인에게 속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P38

이처럼 다른 주인에 소속된 그리스도인은, 이 주인과의 연합이 끊어지지 않은 채, 주인에 의하여 세상 속으로 보냄을 받았다. - P38

그리스도인의 역할은 구체적으로 다른 사람들처럼 문제를 제기하고, 기술적이고 윤리적인 헛된 해결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혹은 경제적인 모든 상황이 포함하는 진정한 영적인 어려움을 발견하는 것이다. - P49

정치적, 경제적 문제 등이 해결될 수 있는 것은 바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실천함으로 가능하다. 따라서 거짓과 눈가림이 아닌 사람의 도리로 이 문제에 응답하게 하는 유일한 길은, 앞에서 언급한 이 긴장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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