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의 삶은 급행열차와도 같다. 다들 전전긍긍하는 마음으로 어느 역에는 서지 않아도 좋으니, 창밖을 내다보지 않아도 좋으니, 목적지에 빠르게 도착하기만을 원한다. - P9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게임의 규칙이 불공정하다고 생각하기에, 누군가 먼저 목적지에 도착하더라도 상대의 성취를 인정하지 않고 시기하며, 먼저 도착한 이의 휴식을 방해하고, 뒷담화에 열을 올린다. - P9

그러나 이 불공정 경쟁을 포기할 수는 없다. 경쟁에서 패하면 자칫 이 사회의 노비로 전락할 수 있으므로, 물론경쟁의 종착지에 무엇이 기다리는지는 모른다. - P9

심화된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단어의 기본적인 뜻뿐 아니라 관련된 함의까지 숙지해야 한다.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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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는 날마다 해야 하는 소박한 일들로 이루어져 있다

목회에는 영예로운 면이 많지만, 회중은 결코 영예롭지 않다.

적어도 도표로 측정할 수 있는 그런 성공은 기대하기 어렵다.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한다. 예배와 기도의 장소에서, 날마다 일하고 노는 장소에서, 미덕과 죄가 오가는 혼잡함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되고 있음을 누군가는 신실하게 보여줘야 한다.

어느 곳이든 오래 머물다 보면 도무지 막을 수 없는 험담, 고장 난 난방 시설, 초점을 잃은 설교, 포기하는 제자들, 불협화음을 내는 성가대 혹은 그보다 더 심한 일들이 표면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회중은 전부 죄인들의 모임이다. 게다가 그 회중의 목사까지 죄인이다.

회중 가운데 찬란한 순간들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분명히 그런 순간들이 있다. 종종 있다. 그러나 지저분한 때도 있다. 그것을 왜 부인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안 그럴 수 있겠는가? 정직한 목사는 회중의 형편없는 면을 깊이 인식한다.

목사의 소명은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뜻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지, 명성과 재물을 찾아 저 멀리 종교의 바다로 항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치를 경멸하거나 부인하지 않고 십자가의 스캔들을 수용하는 것, 그 굴욕과 그 안에 담긴 일상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목회이다.

목사들이 교구 밖에서 자기네끼리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으면 이런 얘기가 전부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대화 주제는 성공을 거둔 프로그램과 번지르르한 회심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목회의 규범은 정주이다.(한때 그랬던 것처럼) 20년, 30년, 40년 목회는 예외가 아닌 전형이 되어야 한다.

요나는 불순종할 때보다 순종할 때 상태가 더 심각하다. 순종하는 요나는 화가 나 있고 앙심을 품고 있다. 요나는 니느웨를 싫어한다. 니느웨를 경멸한다.

요나에게 니느웨는 가장 경멸스러운 곳이고 요나는 니느웨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는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기는 하지만, 자신의 분노로 하나님의 영을 배신하고 만다.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감사하게도 하나님께 용서를 받자 요나는 불평을 터트린다. 이것은 요나가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의 방식과 이제 막 하나님의 백성이 된 니느웨 사람들에 대해서 아무 관심이 없다는 걸 보여준다.

요나는 이제 자신의 명성을 지켜야 한다. 요나는 회중은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자기가 하는 설교의 문자적이고 지배적인 권위에만 신경 쓴다.

목회와 연관해서 변주되기는 했으나 영성의 가장 오랜 진실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덕스런 행동을 할 때 우리는 가장 심각한 죄를 저지를 위험에 처한다

우리가 착하게 굴 때 또한 가장 나쁘게 굴 수 있다

책임 있게 행동하고 순종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가장 쉽게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뜻으로 대체한다.

우리가 순종하며 성공적으로 목회를 잘할 때가 오히려 불순종하며 도망갈 때보다 더 위험하다. 우리에게 제대로 경고하기 위해서 이 이야기는 불순종하는 요나보다 순종하는 요나를 훨씬 더 매력이 없는 인물로 그린다.

불순종할 때는 적어도 배에 탄 선원들에 대한 연민이라도 있었는데, 순종할 때는 니느웨 사람들을 경멸하기만 한다.

여기에서 신비롭고도 자비로우며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이 요나의 두 가지 반응을 모두 사용하셔서 사람들을 구원하셨다는 것이다.

요나가 도망치며 불순종할 때 배에 탄 선원들은 주님께 기도했고 믿음 생활에 들어섰다.

요나가 화를 내며 순종할 때는 니느웨 사람들이 다 구원을 받았다.

하나님은 경솔하게 불순종하고 무정하게 순종하는 우리의 실제 모습을 통해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시고, 자비롭게도 자신의 일을 위해 우리 모습 그대로의 삶을 사용하신다는 이 이야기의 또 다른 측면이 아니었다면, 우리 앞에 거울을 들이대는 것 같은 이 이중의 실패가 매우 힘들고 견디기 어려운 짐이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런 공적도 취할 수 없도록, 그러나 또한 바다에서든 도시에서든 우리가 요나만큼의 역할을 한 그 일에서 하나님이 승리하시는 것을 보고 놀라고 기뻐하지 않을 수 없도록 일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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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 이야기는 목사의 소명 체험을 날카롭게 환기시킨다. 이야기는 이야기를 불러일으킨다. 이야기꾼들은 이야기를 서로 교환한다.

의지력은 내적 에너지를 얻는 데에는 턱없이 부실한 엔진이다. 그러나 알맞은 이미지는 조용하나 가차 없이 우리를 실재의 장으로, 에너지의 장으로 끌어들인다.

비유와 기도는 지나치게 종교적인 배경에 길들어서 영적 지각이 무뎌진 사람들에게 날카롭게 진리를 인식시키는 성경적인 도구이다.

누구나 하나님을 예배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신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에덴의 이야기는 교인들의 가정과 일터에서만 재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하는 예배당과 사무실, 연구실과 회의실에서도 매일 재연된다.

종교적 일터에서 일어나는 뱀의 유혹과 에덴에서 있었던 뱀의 유혹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목사는 언어를 잘 사용하기 때문에 유혹을 받을 때마다 자기를 기만하는 완곡어법을 쉽게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종교적 개념을 다루는 유창한 솜씨 덕분에 우리는 재간 있게 언어를 사용한다. 그래서 우리의 소명이 동산을 돌보는 것에서 동산을 운영하는 쪽으로 바뀌어도 뱀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비유와 기도는 그러한 허울을 비껴 지나가면서 진실을 드러낸다

비유와 기도는 전복적이다.

희극적 요소와 과장을 통해서 우리 문화가 승인한 경력이라는 우상숭배 안으로 은근슬쩍 들어온다. 재미있어 하며 웃는 동안 경계는 늦춰지고 우리의 상상력은 소명의 거룩함을 회복하는 길로 들어선다.

심연 앞에서 머뭇거리던 우리는 비유와 기도에 사로잡혀, 우리의 부름에 적합한 영성을 발전시킬 수 있는 깊은 곳으로 부드러우면서도 확실하게 안내받는다.

심연 앞에서 머뭇거리던 우리는 비유와 기도에 사로잡혀, 우리의 부름에 적합한 영성을 발전시킬 수 있는 깊은 곳으로 부드러우면서도 확실하게 안내받는다.

요나 이야기가 이토록 오래 인기를 누리는 이유 중 하나는 장난기 때문이다. 요나서는 내용도 문체도 모두 장난스럽다.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장난기를 흔들어 깨운다.

장난스럽다고 해서 마냥 까부는 것은 아니다. 장난스럽지만 경솔하지 않고 아주 진지한 진실이 담겨 있다. 인생과 진실의 어떠한 면들은 상상력 놀이, 혹은 장난스러운 상상력을 통해서 가장 잘 드러난다. 텍스트를 장난스럽게 대하는 것도 전통적으로 지지를 받아온 해석 방법 중 하나이다.

랍비들은 미드라시 밑에 숨어 장난스럽게 텍스트를 해석하곤 했다. 나도 그러고 싶다. 텍스트를 아주 진지하면서도 장난스럽게 대하려 한다.

요나 이야기에는 두 가지 큰 흐름이 있어서, 독자들의 소명과 더불어 요나의 소명을 영성 안에 둔다.

이 두 개의 흐름이 서로 결합해서 허세를 강타한다.

목회 소명은 허세에 찬 낭만주의로 가득하다.

허세에 찬 낭만주의가 배 밑에 들러붙은 따개비처럼 더덕더덕 붙어 있다. 요나 이야기는 배를 수리하려고 파놓은 건뱃도랑에 우리를 끌어다놓고 묵직한 거짓 위엄을 긁어내고 환상으로 부풀려진 야망을 떼어낸다.

도입부에서는 불순종하는 요나가 나온다. 그다음에는 순종하는 요나가 나온다. 두 번 다 요나는 실패한다. 성공하는 요나는 보이지 않는다. 요나는 나의 부족함을 보여주는 모델이지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델이 아니다. 요나 이야기는 겸손을 훈련시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 겸손은 비굴한 겸손이 아니라 아주 쾌활한 겸손이다.

목회 소명에는 아이러니가 많은데, 가장 큰 아이러니이자 계속해서 반복되는 아이러니가 바로 이것이다. 요나는 주님의 명령을 이용해서 주님의 현존을 피한다.

얼굴은 우리의 근원이고 태양이며 그 아래에서 우리는 친밀하게 잉태되고 따스하게 빛을 받은 존재로 자기를 실현한다. 얼굴에 대한 이런 경험이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은유로 발전했다.

요람에서 시작된 느낌과 반응은 어른이 되면서 믿음의 영향 아래 예배 행위로 발전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흠모하고 그리스도께 헌신하는 길로 들어서는 계획적인 모험이다.

이 모험을 통해 우리는 거울에 비친 자기만 들여다보는 자기애적 소외로부터 벗어나고, 자신이 보는 것과 자신의 말로만 현실을 정의하는 데서 벗어난다.

하나님을 맛보면 우리에게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이 일은 에덴에서 처음 일어났는데, 지금도 계속해서 일어난다. 하나님에 대한 체험의 황홀경과 완전함은 다시 하나님으로서 그 경험을 맛보고 싶은 유혹을 동반한다. 하나님을 맛보더니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욕심이 발동한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하나님 행세를 하려는 탐심으로 왜곡된다.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세상을 얼핏 보고는 나도 저 자리에 한번 앉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나님의 인격적 현존을 저버리고 비인격적이고 약아빠진 뱀과 어울리기 시작한다.

빛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사람들을 조작하고 신처럼 행세하게 해주는 미끈거리는 종교의 세계로 나아간다.

나 자신을 위해 권력과 영광을 얻을 기회를 모색하는 순간 하나님의 얼굴을 완전히 가리고 싶어지고, 주님의 현존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어지며, 자만심을 키우고 권력을 얻을 장소를 찾고 싶어진다.

누구나 어느 정도는 그런 유혹을 받지만, 목사들은 소명 때문에 유혹을 훨씬 많이 받는다.

처음 소명의 길에 들어설 때는 주님의 현존을 기뻐한다.

이 유혹은 우리가 소명을 따라 살기 시작한 지 한참 지나 찾아온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주하신 사역의 기본에 대한 유혹이 찾아오는(마 4:1-11) 초기 시절만큼 경계하고 있지 않을 때에 찾아온다.

게다가 목사들은 신처럼 행세할 수 있는 상당히 두터운 지지층을 가지고 있다. 도덕성과 관련된 유혹들, 그래서 사회적·물리적 대가가 확실한 유혹들과 달리 이 유혹은 거의 완벽하게 영적이며 흔히 사회적으로 강화되기까지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히 오래 자주 이야기하다 보면 비약적인 상상력이 없어도 그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처럼 행세할 수 있다.

존경하며 따르는 주변 사람들에 의해 하나님 행세가 강화되고, 권력과 칭송이 쌓이기 시작하면 주님의 현존을 계속해서 피해 다니게 된다. 주님 의 얼굴을 대하면 자신의 거짓 행세가 드러날 게 뻔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은 오래전부터 평신도로서건 목회자로서건 지도자의 자리에 서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말해왔다

리더십을 취할 생각만 해도, 소박하게 살짝 관여만 해도, 전에는 접근할 수 없었던 죄의 가능성들이 즉시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데 이 새로운 죄의 가능성들은 죄라는 걸 알아보기가 무척이나 어렵다. 전부 미덕의 형태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방심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미끼를 무는지도 모르고 주를 섬기기 위해 이 새로운 ‘기회’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 기회가 약속하는 것 같았던 결과는 이내(혹은 너무 늦게) 저주였음이 드러난다. 그런 위험을 직접 경험한 야고보는 "너무 많은 사람이 선생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우리가 믿음의 길에 들어선 초기에 마주치는 죄는 쉽게 저항하지는 못해도 쉽게 눈치챌 수는 있다.

소위 ‘저급한 죄들’, 한때 육신의 죄로 분류되었던 죄들은 자명하고, 신앙 공동체뿐 아니라 일반 사회도 그런 죄가 성행하는 것에 반대한다.

고도의 죄, ‘영혼의 죄’는 분별하기가 쉽지 않다. 진단하기가 어렵다.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절대로 쉽지 않다. 종교만큼 속임수가 횡행하는 곳도 없다. 그런데 가장 쉽게 그리고 저주스럽게 속는 사람이 지도자 자신이다.

다른 사람을 속이는 사람은 먼저 자기 자신에게 속아 넘어간 사람이다. 처음부터 악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마귀는 영적인 존재이다. 마귀가 유혹할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은 자명한 악이 아니라 겉으로 보기에 선한 것이다

우리보다 지혜로웠던 세대들은 지도자들에게 충고와 지도를 아끼지 않았다. 어떤 유해한 일을 만나게 될지 충분히 알리지 않고는 이 위험한 길에 들어서게 하지 않았고 중간중간 자주 점검했다. 그렇게 해도 조난당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우리 시대의 어리석음은 사람들을 이 위험한 길로 보내는 단순함에서, 혹은 그들의 진실함을 믿는 순진함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지도자 중에서도 종교 지도자가 가장 믿을 만하지 않다. 그 자리만큼 교만과 탐심과 탐욕의 기회가 많은 자리가 없고, 그러한 비열함이 밝혀지거나 추궁받지 않도록 잘 가릴 수 있는 방법이 많은 자리도 없다.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소명과 임무를 받는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지만, 목적지는 직접 선택하겠다고 점잖게 요구한다. 목사가 되기는 하겠지만, 니느웨에서는 절대 안 할 것이다. 다시스로 가보자. 다시스에서는 하나님을 대면하지 않고도 종교 직업에 종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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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존재는 목사로서 내가 할 일 안에서 확인되고 그 일로 확장되었다. 나와 내 일이 서로 만났다.

내 일이 내 신앙의 확장이 되고, 믿음의 길을 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해 길을 닦는 일이 나의 소명이 되었다.

그런데 커다란 틈이 내 앞에 벌어졌다. 이 틈은 개인적 신앙과 목회 소명 사이의 간극이었다.

나는 그 틈이 내 앞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달았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상황이 훨씬 심각했고 예상보다 더 많은 집중을 요구했다

나는 개인적 신앙과 교회에서의 소명 사이에 생긴 불연속성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찾아보았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나의 존재가 목사의 일을 하는 데 방해가 될 때가 많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목사로서 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삶과 불화할 때가 많았다.

그 바닥에서 나는 개인과 소명이 서로 한 쌍이 되는 것 같은 정합성을 느끼며, 내려간 만큼 올라올 수 있었다.(그러나 반드시 내려간 후에야 올라올 수 있었다.)

목사라는 소명은 그렇게 눈에 띄는 자리는 아니지만, 하나님나라의 시작을 알리고 실천하는 혁명적 복음 사역에 꼭 필요한 자리이다.

소명을 위한 영성, 즉 외면에 적합한 내면을 갖추는 조건이 결코 우호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목회 소명이라고 해서 다른 소명보다 특별히 실현하기 힘든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처지에 공감하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려 하고, 그들이 자신의 제자도에 적합한 영성을 갖추게 하는 한편 우리 자신의 곤경도 매우 진지하게 다루어야 한다. 다른 사람은 구해놓고 정작 우리는 버림받지 않으려면 말이다.

목사가 목사로 사는 게 그토록 어려운 이유가 뭘까? 우상숭배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목사들이 빠지기 쉬운 우상숭배는 개인 차원이 아니라 소명 차원의 우상숭배이다. 목사들은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 관리할 수 있는 경력을 만드는 우상숭배를 한다.

개인적으로는 매우 경건해도 소명에서는 우상숭배를 하는 것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거니와 실제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경건한 목사가 참된 목회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보기에 대다수의 목사들은 정말로 사람이 좋고 선한 의지를 가지고 있고 경건하다. 그러나 그러한 선함이 반드시 소명까지 뚫고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우상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부름이 악마가 제안한 일, 즉 사람의 편의에 따라서 측정되고 조작되는 일로 대체되었다는 뜻이다.

거룩함은 시시하지 않다. 거룩함은 맹렬하다.

목사들은 입으로는 거룩한 소명이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경력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실제로 하는 일은 신학의 진리나 영성의 지혜가 아니라 시장의 압력에 영향을 받는다.

나는 우리가 삶의 경건함에 관심을 가지는 만큼 소명의 거룩함에도 관심을 가지길 바란다.

나는 성경적으로 영적인 것이 필요하다. 창조와 언약에 뿌리를 두고 잘 계발된 영성, 그리스도 안에서 여유롭고 성령 안에 푹 잠긴 영성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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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 (리커버 양장본) -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했던 순간에도
정희재 지음 / 갤리온 / 2020년 4월
평점 :
일시품절




삶이 참 무겁다.

나를 둘러싼 환경은 참 불친절하다.


털썩 주저앉아,

펑펑 울고 싶을 때.


조용히 다가와 

따스하게 토닥여준다.


"괜찮아. 잘하고 있어."


정희재의 글은

깊어서 좋고, 따뜻해서 좋다.


멀리 있는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일  있어 좋다.


위로가 필요한 당신에게.

외로운 당신에게 들려주는 너와 나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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