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은 서평 대상이 된 책뿐 아니라 서평자 자신의 지력, 매력, 멍청함, 편견 등을 대대적으로 홍보할 좋은 기회다. - P154

공부의 목적 중 하나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contestable) 영역에서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하고, 그 입장을 남에게 공적으로 설득하는 것이다. - P176

비판을 하는 사람은 어떤 덕성이 필요한다. 첫째, 상대 주장의 약점보다는 강점과 마주하여 비판적인 논의를 해야 한다. - P211

상대의 핵심 주장에 강점이 있음에도 상대가 보인 약점에 탐닉한 나머지 그것을 상대의 ‘본질‘이라고 간주해서는 안 된다. -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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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되어야 할 첫 번째 진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목적과 수단 사이의 어떤 분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 P118

이렇게 분열을 조장했던 것은 그리스의 윤리사상이다. - P118

우리가 출발해야 하는 지점은, 하나님의 사역에서 목적과 수단이 같다는 사실이다. - P118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현존할 때 하나님나라는 다가왔다. 이 문장은 목적과 수단 간의 관계를 아주 정확하게 표현한다. - P118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성육신 속에서 인간의 구원과 하나님나라의 설립을 위한 하나님의 수단으로서 나타난다. - P118

동시에 예수그리스도가 계신 거기에 또한 인간의 구원과 그의 나라가 존재한다. - P118

우리 문명은 수단 속으로 목적을 흡수하는 반면에, 하나님의 사역 안에서 수단은 오직 목적이 실현된 현존으로서만 나타난다. - P118

단 하나뿐인 유일한 중재자인 하나님의 수단이 현존할 때, 시간의 끝에서 오는 하나님나라라는 목적은 이미 실현되었다! - P118

하나님의 모든 사역은 목적을 수단에 의하여 실현하는 것이다.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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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와 바울은 서로 반대되는 유형이다. 요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도망가다가 돌아온 불순종하는 선지자이고,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하나님의 고귀한 부름을 따르다가 방해를 받으나 포기하지 않는 순종하는 사도이다.

요나는 소명에 불순종했다가 돌아서고, 바울은 소명에 순종했음을 확인받는다.

전파된 말씀을 통해서 온 세상에 구원을 가져오시려는 하나님의 열정을 축으로 두 이야기는 진행된다.

구원, 즉 모든 피조물이 구함을 받는 사랑을 경험하길 바라는 하나님의 뜻은 가볍거나 차가운 관념이 아니라 거칠고 넘치는 에너지이며, 인간의 통제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고, 종교적 직업에 종사하도록 고삐를 매서도 안 된다.

폭풍은 전면적이고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통제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바람과 유사한 면이 있다.

폭풍 앞에서는 목숨을 잃거나 구출받거나, 둘 중 하나밖에 없다.

걸터앉아 구경할 수 있는 멋지고 안전한 바위 같은 건 없다.

천둥과 번개, 파도와 하얀 물거품을 즐길 수 있는 외야석 같은 건 없다

선지자와 사람들, 선원과 성인들 모두가 그 안에 있다.

폭풍 앞에서는 다른 어떤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뿐이다.

지금까지의 현안이 무엇이었든 상관없다. 단 하나의 문제만 있을 뿐이다. 구원이냐, 아니냐.

자신의 소명 운명을 책임지겠다는 요나의 적극적인 행동과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서 끌어온 상당한 재정이 이제는 하찮게 되었다. 하나님의 폭풍과 하나님의 구원이(혹은 비非구원이) 그 장면을 지배한다. 요나의 뜻과 요나의 돈은 이제 사소해져버렸다.

요나는 다시스로 가는 표를 사기 위해서 상당한 액수의 돈을 지불했고, 선주는 이윤 때문에 바울의 조언을 무시했다. 그러나 돈의 권력은 폭풍 앞에서 사라진다. 이제 상대해야 하는 권력은 하나밖에 없다. 바로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이다.

인간의 자율성에서 강력한 요소인 돈이 두 이야기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요나와 함께 폭풍을 만난 선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배를 가볍게 하는 것, 지금까지 주요 관심사로 여겼던 것을 없애는 것뿐이었다.

하나님의 행동이 강화되면서 인생의 의미는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 것인가, 우리가 무엇으로 하나님을 도울 것인가가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가에 집중된다.

요나와 바울의 소명은 정화된다. 좋은 의도(바울)와 나쁜 의도(요나)로부터 정화된다.

소명이 조금이라도 가치를 가지려면,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증언, 하나님에 대한 반응이어야 한다.

부정적으로건 긍정적으로건, 소명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의 일을 대신해서도 안 된다.

구원에는 예외가 없었고, 그것은 요나의 의도나 바울의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일이다.

폭풍이 이 이야기의 물리적 환경이라면, 기도는 이 이야기의 핵심 행동이다.

난관에 봉착할 때, 극단적인 난관, 폭풍 난관에 봉착할 때 우리의 모든 것이 벗겨지고 삶의 가장 기본적인 실재가 드러난다. 요나에게 그것은 기도 없음이었고, 바울에게 그것은 기도였다. 폭풍은 요나가 기도하지 않는 선지자라는 점을 드러냈다. 폭풍은 바울이 기도하는 사도라는 점을 드러냈다.

예수님은 소명을 따라 살도록 제자들을 훈련하시면서 그들이 통제할 수 없는 바다 폭풍을 사용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기도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통제에 참여할 수 있게 하셨다.

이 바다 폭풍의 이야기들을 연결해주는 끈은 기도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 우리를 창조하고 구원하는 말씀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다.

우리의 소명에 의문을 제기하는 바다 폭풍은 소명을 회복하는 수단이 된다.

폭풍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것 앞에 우리를 노출시킨다.

우리는 태곳적 혼돈으로, 창세기 1장의 ‘토후tohu’와 ‘보후bohu’로 돌아가 거기에서 세상을 만드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삶을 굴복시킨다.

뒤덮는 하나님의 바람/성령 앞에 우리의 삶을 노출시키는 것이다.

폭풍 앞에서 우리는 근본적인 것으로 환원되는데, 궁극적 근본은 바로 하나님이다.

기도는 하나님과 상관있는 유일한 행동으로 떠오른다.

우리의 소명은 하나님이 부르시고 하나님이 형성하시는 평생의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을(주변적으로가 아니라) 최우선으로 대하지 않으면 우리는 더 이상 소명을 따라 살지 않는 것이며, 우리의 삶과 우리 주변의 모든 세계를 구성하는 거대한 실재와 의식적이고 자발적이고 참여적인 관계를 맺으며 살지 않는 것이다.

폭풍은(요나의 경우처럼) 우리가 하는 일의 무익함을 폭로하거나(바울의 경우처럼) 그 일을 확인시킨다

어떤 경우건 폭풍은 하나님이 우리의 일을 구성하신다는 인식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며, 우리의 일에서 하나님을 피하거나 조작할 수 있다는 약간의 암시도 모두 바로잡아준다.

일단 이 일이 제대로 이뤄지면 우리는 진실하게, 쉽게, 두려워하지 않고, 야망이나 불안 없이, 부인하거나 게으름 피우지 않고 일하면서 우리의 소명에 적합한 영성을 배울 준비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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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종교는 우상숭배이다. 대부분의 종교는 자기 확장이다. 목사들은 시급히 문화 종교와 기독교 복음을 구분해야 한다.

시설을 잘 갖추고 손님을 잔뜩 태운 미국 종교의 배는 목사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다.

미국인들은 하나님을 자신들이 잘살 수 있게, 적어도 지금보다 더 잘살 수 있게 도와주는 상품으로 본다.

목사들은 자기가 무얼 하고 있는지 미처 깨닫지도 못한 채 흥정을 시작하고, 사람들이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상품으로 하나님을 포장하고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제시한다.

내 딸과 두 아들에게 아버지가 되지 못하고, 아내에게 남편이 되지 못하고, 회중에게 목사가 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경악한 나머지 나는 난파가 눈앞에 있는 것만 같아 거기에서 탈출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오래 신중하게 연구해서 여러분 앞에 서서 설교하고 가르칠 때 정확한 내용을 전하고 싶습니다. 여유를 갖고 사랑으로 기도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내적으로 깊고 정직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과 함께 자주 여유로운 시간을 가져서 십자가의 길을 함께 가는 가까운 동료로서 서로를 알아보고 서로 충고와 격려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언가를 배우는 ‘방식’이 배우는 내용보다 우리에게 더 큰 영향을 끼친다.

어떤 내용도 형체 없이 우리 삶에 주어지지 않고 늘 어떤 형식을 통해서 주어진다.

기본적이고 통합적인 하나님과 믿음의 실재를 담기 위해서는 그 형식도 기본적이고 통합적이어야 한다.

그 시절 내 골수에 사무친 것은 하나님과 열정이 삶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이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관계를 맺어야 하는 실재이고, 그 실재에 대해서 우리는 열정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 그리고 열정. 그래서 나는 목사가 되었던 것이고, 그래서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현존 가운데서 열정을 가지고 살고,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의 현존으로 끌어모아 열정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하기 위해서 말이다.

나는 사람들을 그냥 살리기만 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과 열정이 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서재에서 도스토옙스키를 만났고, 《죄와 벌》, 《지하생활자의 수기》,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가지고 여유롭게 대화를 나눴다.

하나님과 열정이 필수였던 사람, 그리고 그것이 통합되어 있던 사람과 나는 오후 시간을 함께 보냈다.

공작은 ‘이용 가능’하지가 않다. 공작은 그냥 존재할 뿐이다

어디에도 쓸모가 없고 그냥 선할 뿐이다.

서서히 사람들이 자기 뜻을 이루려고 교묘한 술책을 쓰는 와중에 공작은 단순히 자신의 인간성 때문에 중요한 사람으로 부상한다.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어가면서도 공작은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고, 아무 일도 일으키지 않고, 권력을 즐기지도 않고, 마음대로 간섭하지도 않았다.

미슈킨 공작이 무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에게 사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공작은 자신의 필요 때문에 관계를 차단하거나 왜곡하는 일이 없었다.

도스토옙스키는 당시 유행하던 무정부주의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유토피아 대신에 어리석음과 고난의 십자가를 뿌리까지 파고들었다.

10년간 시베리아에서 유형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도스토옙스키는 무신론적이고 사회공학적인 활동에 뛰어드는 대신 사회에 파고들어 거룩함을 통해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인물들을 창조하며 여생을 보냈다.

도스토옙스키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나라를 시작하셨던 방식을 모본으로 삼았다.

미슈킨 공작의 존재는 도덕성, 즉 옳은 것을 행하고 말하는 것과는 아무(혹은 거의) 상관이 없다.

미슈킨을 통해서 배우는 것은 아름다움과 선함이다.

아름다움과 선함은 추상적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이다. 생활 속에서, 살며 사랑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움과 선함은 마주할 수는 있으나 관찰할 수는 없다.

아름다움과 선함을 향한 갈망은 끝도 없는 좌절이다. 우리가 아름답고 선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거의 항상 인식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체로 상태가 좋지(거룩하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 부적절한 느낌을 깊이 안은 채 살아간다.

우리가 계속해서 거룩함을 열망하는 이유는 그 대안이 너무도 무미건조하기 때문이다.

내 인생에 변화를 가져온 사람들은 누구인가? 바로 변화를 가져오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미슈킨 공작은 사랑과 아름다움과 거룩함을 전달하는 사람들을 알아보게 해주었다.

목사가 되는 것과 작가가 되는 것은 내게 실질적으로 같은 것이었다. 혼돈 속으로, 엉망진창인 상황으로 들어가서 거기에서 무언가 선하고 복된 것, 즉 시, 기도, 대화, 설교, 은혜의 목격, 사랑의 인식, 덕의 형성을 이루어내는 느리고 신비로운 작업이었다.

하나님 앞에서 영혼이 강렬하게 집중하는 것이 기도이다. 그리고 그 기도가 글쓰기와 목회의 핵심이다.

기도 없이 말을 사용하거나 사람을 대하는 순간 인생에서 본질적인 무엇이 새어나가기 시작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자아에 대한 열광이 결코 역사적 기독교의 영혼에 대한 관심과 같지 않다는 것을 분별하게 도와주었다.

사람들이 자아라고 부르는 것은 기독교가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하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에 굶주리고 의에 목마른 것이 삭제되어 있었다.

도스토옙스키는 나를 바로잡아주었다. 논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창조를 통해서, 하나님 없이 비인간적으로 말라붙은 인생을 보여주는 인물을 창조하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인생의 소름끼치는 아름다움과 비교하고 대조함으로써 나를 바로잡아주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인간의 본성을 설명하려는 근대의 열정, 고통과 불만족을 제거하고 이 세상에서 편히 지내게 해주려는 열정, 그 강박적 사리추구가, 하나님과 거룩함을 향한 극심한 목마름과 굶주림을 지닌 거대하고 신비로운 피조물을 기하학으로 축소시킨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즉, 인간을 선과 각도로, 치수와 숫자로 설명될 수 있는 것으로 축소시킨다는 뜻이다.

영혼을 자아로 축소하고 하나님을 중심과 깊이에서 제거하고 나니(신비가 모두 사라졌기 때문에) 자아를 진단하고 자아의 필요를 만족시키는 데 딱 맞는 종교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하나님과 인간 관계의 복잡함이 모두 빠져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악과 고통, 사랑과 구원의 깊이에 기백 넘치고 과도하고 무모하게 몰두했고, 그것이 내게 하나님과 열정을 회복시켜주었다.

영혼을 자아로 축소하고 하나님을 중심과 깊이에서 제거하고 나니(신비가 모두 사라졌기 때문에) 자아를 진단하고 자아의 필요를 만족시키는 데 딱 맞는 종교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하나님과 인간 관계의 복잡함이 모두 빠져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악과 고통, 사랑과 구원의 깊이에 기백 넘치고 과도하고 무모하게 몰두했고, 그것이 내게 하나님과 열정을 회복시켜주었다.

뼈만 남은 정도의 존재라 할지라도 인간은 우리 중 누구라도 뒤흔들어 당혹감과 경외심에 빠지게 할 정도의 충분한 영광을 지니고 있다.

말과 사람을 쉽게 대할 때 공통의 위험이 있다. 경멸하며 무례하게 구는 자만심이다.

도스토옙스키는 그들의 삶 이면으로 파고 들어가 저 깊은 곳에서 불과 열정과 하나님을 발견했다.

도스토옙스키는 그들을 다시 한 번 큰 존재로 만들었다. 열망도 죄도 영광도 아주 거대한 사람들로 말이다.

바르트는 두 책 다 호기롭게 관습적인 평가와 명예를 무시하고 관습적으로 보이는 삶의 표면을 걷어내고 예기치 못한 하나님의 깊이를 드러냄으로써 사람들의 삶에 다가간다고 지적한다.

도스토옙스키와 창세기는 남자와 여자들의 가면을 존중하지 않고 그들의 비밀을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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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대한 경험적인 지식이 쌓일수록, 세상은 모순이나 긴장이나 혼란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인식에 이르게 된다. - P41

섬세함은 사회적 삶에서도 중요하다. 섬세한 언어를 매개로 하여 자신을 타인에게 이해시키고 또 타인을 이해하고자 하는 훈련을 할 때, 비로소 공동체를 이루고 살 수 있다.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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