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종교는 우상숭배이다. 대부분의 종교는 자기 확장이다. 목사들은 시급히 문화 종교와 기독교 복음을 구분해야 한다.
시설을 잘 갖추고 손님을 잔뜩 태운 미국 종교의 배는 목사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다.
미국인들은 하나님을 자신들이 잘살 수 있게, 적어도 지금보다 더 잘살 수 있게 도와주는 상품으로 본다.
목사들은 자기가 무얼 하고 있는지 미처 깨닫지도 못한 채 흥정을 시작하고, 사람들이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상품으로 하나님을 포장하고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제시한다.
내 딸과 두 아들에게 아버지가 되지 못하고, 아내에게 남편이 되지 못하고, 회중에게 목사가 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경악한 나머지 나는 난파가 눈앞에 있는 것만 같아 거기에서 탈출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오래 신중하게 연구해서 여러분 앞에 서서 설교하고 가르칠 때 정확한 내용을 전하고 싶습니다. 여유를 갖고 사랑으로 기도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내적으로 깊고 정직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과 함께 자주 여유로운 시간을 가져서 십자가의 길을 함께 가는 가까운 동료로서 서로를 알아보고 서로 충고와 격려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언가를 배우는 ‘방식’이 배우는 내용보다 우리에게 더 큰 영향을 끼친다.
어떤 내용도 형체 없이 우리 삶에 주어지지 않고 늘 어떤 형식을 통해서 주어진다.
기본적이고 통합적인 하나님과 믿음의 실재를 담기 위해서는 그 형식도 기본적이고 통합적이어야 한다.
그 시절 내 골수에 사무친 것은 하나님과 열정이 삶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이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관계를 맺어야 하는 실재이고, 그 실재에 대해서 우리는 열정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 그리고 열정. 그래서 나는 목사가 되었던 것이고, 그래서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현존 가운데서 열정을 가지고 살고,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의 현존으로 끌어모아 열정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하기 위해서 말이다.
나는 사람들을 그냥 살리기만 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과 열정이 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서재에서 도스토옙스키를 만났고, 《죄와 벌》, 《지하생활자의 수기》,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가지고 여유롭게 대화를 나눴다.
하나님과 열정이 필수였던 사람, 그리고 그것이 통합되어 있던 사람과 나는 오후 시간을 함께 보냈다.
공작은 ‘이용 가능’하지가 않다. 공작은 그냥 존재할 뿐이다
서서히 사람들이 자기 뜻을 이루려고 교묘한 술책을 쓰는 와중에 공작은 단순히 자신의 인간성 때문에 중요한 사람으로 부상한다.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어가면서도 공작은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고, 아무 일도 일으키지 않고, 권력을 즐기지도 않고, 마음대로 간섭하지도 않았다.
미슈킨 공작이 무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에게 사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공작은 자신의 필요 때문에 관계를 차단하거나 왜곡하는 일이 없었다.
도스토옙스키는 당시 유행하던 무정부주의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유토피아 대신에 어리석음과 고난의 십자가를 뿌리까지 파고들었다.
10년간 시베리아에서 유형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도스토옙스키는 무신론적이고 사회공학적인 활동에 뛰어드는 대신 사회에 파고들어 거룩함을 통해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인물들을 창조하며 여생을 보냈다.
도스토옙스키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나라를 시작하셨던 방식을 모본으로 삼았다.
미슈킨 공작의 존재는 도덕성, 즉 옳은 것을 행하고 말하는 것과는 아무(혹은 거의) 상관이 없다.
미슈킨을 통해서 배우는 것은 아름다움과 선함이다.
아름다움과 선함은 추상적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이다. 생활 속에서, 살며 사랑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움과 선함은 마주할 수는 있으나 관찰할 수는 없다.
아름다움과 선함을 향한 갈망은 끝도 없는 좌절이다. 우리가 아름답고 선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거의 항상 인식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체로 상태가 좋지(거룩하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 부적절한 느낌을 깊이 안은 채 살아간다.
우리가 계속해서 거룩함을 열망하는 이유는 그 대안이 너무도 무미건조하기 때문이다.
내 인생에 변화를 가져온 사람들은 누구인가? 바로 변화를 가져오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미슈킨 공작은 사랑과 아름다움과 거룩함을 전달하는 사람들을 알아보게 해주었다.
목사가 되는 것과 작가가 되는 것은 내게 실질적으로 같은 것이었다. 혼돈 속으로, 엉망진창인 상황으로 들어가서 거기에서 무언가 선하고 복된 것, 즉 시, 기도, 대화, 설교, 은혜의 목격, 사랑의 인식, 덕의 형성을 이루어내는 느리고 신비로운 작업이었다.
하나님 앞에서 영혼이 강렬하게 집중하는 것이 기도이다. 그리고 그 기도가 글쓰기와 목회의 핵심이다.
기도 없이 말을 사용하거나 사람을 대하는 순간 인생에서 본질적인 무엇이 새어나가기 시작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자아에 대한 열광이 결코 역사적 기독교의 영혼에 대한 관심과 같지 않다는 것을 분별하게 도와주었다.
사람들이 자아라고 부르는 것은 기독교가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하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에 굶주리고 의에 목마른 것이 삭제되어 있었다.
도스토옙스키는 나를 바로잡아주었다. 논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창조를 통해서, 하나님 없이 비인간적으로 말라붙은 인생을 보여주는 인물을 창조하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인생의 소름끼치는 아름다움과 비교하고 대조함으로써 나를 바로잡아주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인간의 본성을 설명하려는 근대의 열정, 고통과 불만족을 제거하고 이 세상에서 편히 지내게 해주려는 열정, 그 강박적 사리추구가, 하나님과 거룩함을 향한 극심한 목마름과 굶주림을 지닌 거대하고 신비로운 피조물을 기하학으로 축소시킨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즉, 인간을 선과 각도로, 치수와 숫자로 설명될 수 있는 것으로 축소시킨다는 뜻이다.
영혼을 자아로 축소하고 하나님을 중심과 깊이에서 제거하고 나니(신비가 모두 사라졌기 때문에) 자아를 진단하고 자아의 필요를 만족시키는 데 딱 맞는 종교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하나님과 인간 관계의 복잡함이 모두 빠져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악과 고통, 사랑과 구원의 깊이에 기백 넘치고 과도하고 무모하게 몰두했고, 그것이 내게 하나님과 열정을 회복시켜주었다.
영혼을 자아로 축소하고 하나님을 중심과 깊이에서 제거하고 나니(신비가 모두 사라졌기 때문에) 자아를 진단하고 자아의 필요를 만족시키는 데 딱 맞는 종교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하나님과 인간 관계의 복잡함이 모두 빠져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악과 고통, 사랑과 구원의 깊이에 기백 넘치고 과도하고 무모하게 몰두했고, 그것이 내게 하나님과 열정을 회복시켜주었다.
뼈만 남은 정도의 존재라 할지라도 인간은 우리 중 누구라도 뒤흔들어 당혹감과 경외심에 빠지게 할 정도의 충분한 영광을 지니고 있다.
말과 사람을 쉽게 대할 때 공통의 위험이 있다. 경멸하며 무례하게 구는 자만심이다.
도스토옙스키는 그들의 삶 이면으로 파고 들어가 저 깊은 곳에서 불과 열정과 하나님을 발견했다.
도스토옙스키는 그들을 다시 한 번 큰 존재로 만들었다. 열망도 죄도 영광도 아주 거대한 사람들로 말이다.
바르트는 두 책 다 호기롭게 관습적인 평가와 명예를 무시하고 관습적으로 보이는 삶의 표면을 걷어내고 예기치 못한 하나님의 깊이를 드러냄으로써 사람들의 삶에 다가간다고 지적한다.
도스토옙스키와 창세기는 남자와 여자들의 가면을 존중하지 않고 그들의 비밀을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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