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세계를 돌아다니는 것은 목회의 본질 중 하나이다. 우리는 보도에 발을 딛고 현장을 받아들인다. 목회는 신학적인 것 못지않게 지리적이다.

현장은 목회의 일부이다. 현장에 있는 것, 특정 교구의 특정 토양에서 일하는 것이 목회의 본질이다.

조이스는 평범한 사람이 사는 평범한 하루라는 한계 안에서도 의미는 무한하다는 사실을 내게 일깨워주었다.

작가들은 이야기를 쓸 때 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기보다 그 이야기가 자신을 찾아온다는 말을 종종 한다. 자신이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을 쓰거나, 적어도 아는지 몰랐던 것을 쓴다.

이미지와 플롯이 그들의 인식 안으로 들어오는데, 다른 곳에서 와서 그곳에 도착한다. 이러한 신비로운 오고 감에 대해 열린 자세를 계발하고, 그러한 것들에 귀 기울일 때 그들은 진짜 작가가 된다. 이것이 바로 모든 창조적인 일의 기초이다.

그것은 또한 영성의 기초, 즉 목사들이 증언하고, 인식시키고, 이미지와 단어를 제공하는 복음적인 삶의 기초이기도 하다.

목회는 니느웨처럼 지역을 기반으로 한다. 목회의 어려움은 복음은 보편적인 반면 우리의 일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크다는 데 있다.

우리는 온 세상으로 나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우리는 천국과 지옥이라는 큰 틀에서 일한다.

모든 교회는 지역적이다. 모든 목회는 지리적 장소에서 이루어진다.

모든 신학은 지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영지주의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장식된 섬세한 감정을 중심으로 복음을 구성한다. 영지주의는 또한 머리가 나쁜 사람과 뒤처지는 동료들을 답답하게 여겨 언제나 사람들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며, ‘영적으로 깊은’ 그리고 서로가 잘 맞고 전문가 무리의 말을 인용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엘리트 그룹에서 호소력을 얻는다.

복음은 지역적 지식이며, 지역적으로 적용되고, 상당한 열성을 가지고 육신으로 물질로 장소로 뛰어든다.

그 현장에 있게 된 사람이 누구든 그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인다.

목사가 지속적으로 해야 할 일 중 하나는 이러한 조건들이 존중받게 하는 것이다

지금 그대로의 이 장소, 일상복을 입고 있는 이 사람들, "지역적 지식과 지역적 헌신으로부터 나오는 지역적인 것들에 대한 구체적인 사랑"이 존중받게 해야 한다.

베리의 지도하에 내가 배운 것 중 하나는 자신의 장소에 대해 분개하는 것은 어리석다는 것이다. 장소가 없으면 일을 할 수 없다. 교구 일은 농장 일만큼이나 물리적이다. ‘이’ 상황과 ‘이’ 시간에 있는 ‘이’ 사람들과 관계하는 일이다.

이 장소에 있는 이 사람들에게 다른 삶의 방식을 부과하는 것이 내 임무가 아니라, 이미 거기에 있는 것을 가지고 일하는 것이 내 임무이다.

대개 종교적인 일은 목회가 아니다. 그런 일은 영성을 방해하고 복음을 망쳐놓는다

우리의 일은 종교 기관을 성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잘 양육하여 성숙시키는 것이다.

거룩함은 강제로 부과할 수 없다. 거룩함은 안에서부터 자라야 한다.

농부의 임무는 강제로 그 장소에 침입해서 자신의 리듬에 따라, 그리고 자기 자아의 크기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리듬과 비율을 이해하고 건강하게 잘 키우는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공들여 작업하신 영혼이고, 성령께서 영원히 거하기 위해서 지으신 장소이다.

목회에서 회중은 표토이다. 모든 성령의 일은 예배하러 모이고 축복받고 흩어지는 이 사람들, 이 물질적 실체 안에서 일어난다.

그들은 너무나 평범하고 눈에 띄지 않아서 당연시하기 쉽고, 거기에서 상호작용하는 에너지를 보려는 노력을 포기하기 쉽다.

내 신학의 도로를 깔고 선교의 건물을 짓고 커리큘럼 주차장을 만드는 데 몰두한 나머지 이 소중한 표토인 회중을 죽어 있는 비활성 물질로 대하고, 내 비전에 맞게 재조정할 대상으로 보고, 즉각적으로 유용하지 않은 것들은 내 프로젝트를 방해하지 않게 전부 불도저로 밀어서 치워버리려 한다.

에너지와 영양분이 바글거리고, 죽음과 생명이 뒤섞인 그곳이 바로 목회 현장이다.

내가 그것을 제조할 수는 없지만 보호할 수는 있다. 영양분을 공급할 수는 있다.

무엇보다도 농부가 표토를 대하듯 나는 회중을 존경하고 존중해야 하고, 잘난 체하지 않는 그 평범함 속에 담긴 거대한 신비 앞에서 외경심을 느껴야 한다.

목사들은 회중을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돌보는 임무를, 성급하게 종교 쇼핑몰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심으신 교구를 부드럽게 일구는 임무를 교회로부터 배정받았다.

공동체라는 확고한 맥락이 없다면, 공동체에 대한 목사의 애정과 충성이 없다면, 우리의 선포는 못마땅해서 외치는 고함으로 전락할 것이고, 우리의 연설은 우리의 영적 영광인 소중한 ‘나/너 대화’로부터 멀어져 이해를 분노 가득한 언쟁으로 바꾸는 ‘나/그것 고함지르기’로 격하될 것이다.

회중은 적이 아니다. 목회는 회중과 대립하지 않는다.

장의자에 앉은 이 사람들은 정복해야 하는 이방인이 아니다.

패배시킨 후 목사의 자아가 만족할 수 있게 재활시켜야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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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의 기도는 단 한 단어도 독창적인 것이 없다. 요나는 모든 단어를 통째로 시편에서 가져왔다.

그런데 단어만 기존의 것을 가져다 쓴 것이 아니다. 형식 또한 시편에서 파생된 것이다.

지난 백 년 동안 양식비평 학자들은 시편이 취하는 특별한 형식에 주목했는데, 그 형식을 크게 두 범주로 정리했다. 하나는 애가이고 하나는 감사이다.

애가와 감사는 우리가 인간으로서 처하게 되는 두 가지 조건, 즉 곤경과 안녕이라는 조건과 맞물린다.

영혼의 상태나 처한 상황에 따라 우리는 고통 속에 절규하거나 찬양을 터트린다.

기도에서 정직은 필수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상의 것을 바란다. 우리는 최대한 많은 삶을, 가능하다면 모든 삶을 표현하여 하나님께 응답하고자 한다. 이 말은 삶의 복잡함에 걸맞은 기도 형식을 배워야 한다는 뜻이다.

시편에서 가장 흔한 기도 형식은 애가이다. 슬픔이 우리에게 가장 흔한 상태이니만큼 예상대로라고 하겠다. 우리는 곤경에 빠질 때가 많기 때문에 애가 형식으로 기도할 때가 많다

상황은 ‘애가’를 가리켰다. 그러나 기도는 비록 상황에 영향을 받기는 해도 상황에 의해 결정되지는 않는다.

요나는 기도에서 창의성을 발휘하여 ‘찬양’ 형식으로 기도를 드리기로 택했다.

우리의 진정한 상태를 두고 기도하고 싶다면, 살아 계신 하나님께 우리 자신 전부로 반응하며 기도하고 싶다면, 우리의 느낌을 표현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기도에는 오랜 도제기간이 필요하다. 그다음에는 상급학교로 가야 한다. 시편은 학교이다.

요나의 기도는 자신의 즉각적 경험보다 훨씬 더 큰 세계로 요나를 데려갔다. 요나는 자신이 대면하고 있는 하나님의 크심에 적합한 기도를 드릴 줄 알았다.

우리 문화가 제시하는 기도의 형식은 대부분 자기표현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감정을 쏟아내거나, 우리가 필요하다고 느끼거나 기회가 될 때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성숙한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의식의 지배를 받는다.

기도는 자기 자신에게 집착하는 것에서 우리를 구해내어 하나님에 대한 흠모와 하나님을 향한 순례로 우리를 이끈다.

통증에 얼얼해하는 사람들, 위기 속에서 갈팡질팡하는 사람들, 혼란의 늪에 빠진 사람들 등 소명 때문에 참으로 다양한 상황 속의 사람들을 접하게 되는 목사들은 특별히 그러한 구출이 필요하다.

진짜 작가들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안다. 개인의 경험이 재료를 제공하고 추동력이 되는 때가 많지만(어떻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글 쓰는 행위는 무엇보다도 더 큰 세계를 탐험하는 행위이고, 더 깊은 실재로 들어가는 행위이며,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는 행위이고, 자신 너머에 있는 다른 인생과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행위이다.

말 그대로 글 쓰는 행위는 창의적이다. 전에는 없었던 어떤 것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시편은 영이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자기몰두로부터 구하시고, 우리가 하나님께 응답하는 길로 나가도록 이끄시는 공동묘지이다.

시편은 기도를 배우는 사람들을 위한 학교이다. 근본적으로 기도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이다.

하나님이 먼저 말씀하신다. 언제나 그렇다.

우리는 하나님이 호명하시는 세계에서 정신을 차린다. 거기에서 우리는 응답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냥 예, 아니오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응답해야 한다. 우리의 존재 전체가 응답해야 한다.

하나님이 호명하신 세계에서 우리는 심각하게 뒤처져 있다.

우리는 욕망과 요구를 하나님의 현존과 말씀이 있는 야곱의 깊은 우물로 내려서 그것을 다시 물 위로 떠올리는 데에 적합한 그릇이 필요하다.

기본적인 아스케시스 형식은 매달 매일 순서를 따라서 시편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묵상 기도는 우리의 기도 생활을 일상의 모든 구체적인 내용들로 확장하고 퍼뜨린다.

영성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14개 훈련은 영적 독서, 영적 지도, 묵상, 고백, 신체 운동, 금식, 안식일 지키기, 꿈 해석, 피정, 순례, 구제(십일조), 일기 쓰기, 안식년, 소그룹이다.

성경적·교회적 아스케시스인 시편 기도와 그 전후에 드리는 공동예배와 묵상 기도를 회복했다면, 우리는 전문성을 계발해서 그 어떤 훈련이든 필요할 때면 불러서 사용하고 필요하지 않으면 옆으로 제쳐둘 수 있어야 한다.

남이 아니라 내가 존재하는 안팎의 상황, 그것이 지나온 역사와 현재에 신중하고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상황을 무시하고 모방하는 영성만큼 빠르게 망하는 것도 없다.

영성은 강제로 부과할 수 없다. 반드시 직접 키워야 한다

기도는 흙에서 싹트는 씨앗이고, 그 흙에 있는 모든 것에 민감하다.

도구(훈련)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지만, 그 지식을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실제 흙의 상태나 채소와 과일, 영혼과 몸이 실제로 자라는 방식에 대한 경외감에 통합시키지 않으면 결과는 파괴적일 수밖에 없다.

기도는 우리가 참여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행위이다.

기도는 우리의 핵심 활동이다. 인간 존재의 중심에는 기도의 삶, 기도의 실천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과 정신과 영혼을 다루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모든 자연적인 것에 책임 있게 연결되어 있으면서 초자연적인 것에 닿고자 했다.

소명의 거룩함이 경건한 소원 이상의 것이 되려면 목사들이 기도의 깊은 바다로 뛰어들어야 한다.

묵상한다는 것은 단순히 관찰하거나 바라본다는 뜻이 아니라 신의 임재 안에서 그 일을 한다는 뜻이다.

영혼의 유혹은 미덕에의 초대인 양 가장한 채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소명이 악화시키는 이러한 교만은 보통 개인 신앙과 공적 사역이라는 미세한 틈에서 발생한다.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신처럼 행세하지 않으려면 묵상하는 목사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소명에 적합한 묵상의 삶을 개발하지 않으면 우리가 하는 일과 우리의 선의는 은근히 교만을 부채질하여(불가피한 일이다) 우리를 파괴하고 우리와 함께 우리를 위해서 일하는 모든 사람을 파괴할 것이다.

묵상은 예배와 기도라는 거대한 실재를 구성한다.

묵상이 없으면 우리는 성과를 중시하고 프로그램에 집착하는 목사가 된다.

묵상하는 삶은 활동적인 삶의 대안이 아니라 뿌리이자 기초이다.

진정한 묵상가들은 영성에 도피주의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은 오류임을 보여준다.

목사들이 묵상하는 삶을 실천하지 않으면, 어떻게 사람들이 묵상하는 삶의 진실을 알고 그 에너지에 접근할 수 있겠는가?

묵상하는 삶은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이 세상에 발생시키고 풀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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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성공주의가 익사하고 난 다음에는 목회 소명이 부활한다

우리는 원래 부름받았던 그 존재가 된다.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부름받은 그 존재가 된다

물고기 뱃속은 요나가 찾아 나섰던 모든 것의 정반대였다. 물고기 뱃속은 어둡고 눅눅한 감방이었다. 아마 악취도 났을 것이다. 물고기 뱃속은 요나가 ‘아스케시스(askesis, 고행)’로 입문하는 길이었다.

창조적인 예술가와 기도하는 목사는 이 부분에서 일하는 기반이 같다. 제한이 없이는, 압박에 의한 강화가 없이는 말할 가치가 있는 에너지도 없다

이것은 예술가나 목사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것은 창조적·영적 생활에 통합될 수도 있고 되지 않을 수도 있는 요소가 아니다. 이것은 필수사항이다

어떤 아스케시스를 취하느냐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아스케시스가 없이는, 제한·집중의 시간과 공간이 없이는 영혼의 에너지도 없다.

훈련된 습관이라는 아스케시스의 의미는 창조성을 다루고 탁월함을 위해 노력하는 인간의 모든 활동에 적용된다.

영성은 맥락을 요구한다. 언제나 그렇다. 영역, 경계, 한계를 필요로 한다

성숙한 영성은 아스케시스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외부에서 기계적으로 부과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현장에서 유기적으로 배양되어야 한다. 아스케시스는 맥락에 민감해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이상의 것을 기대한 내가 잘못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영적 지도는 기관이 하는 일이 아니다. 기관이 있어야 하는 자리가 있다. 기관이 없다면 나는 제대로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전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관으로부터 영적 보살핌을 받으려 하고 소명에 대한 조언을 기대한 것은 잘못이었다.

사실 우리 회중은 우상을 쇼핑하고 있다. 그들은 쇼핑몰에 갈 때와 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만족시켜주거나 자신의 욕구와 필요를 채워줄 무언가를 얻기 위해 교회에 온다.

장 칼뱅은 인간의 마음을, 우상을 만들어내는 무한히 효율적인 공장으로 보았다.

그들은 하나님을 원하기는 하지만, ‘질투하는 하나님’이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원하지는 않는다.

대체로 그들은 스스로가 신으로 머물면서 통제하고 어려운 대목에서 도움을 받을 보조 우상 정도만을 바란다.

회중의 영적 위치는 에덴의 동쪽이다. 그곳에서는 자아가 최고 주권자이다.

그리스도의 주 되심에 굴복하지 않으면서 종교적일 수 있는 길은 수도 없이 많고, 사람들은 그런 방법에 대한 경험이 풍부하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서 채워지지 않은 깊은 굶주림을 느끼지만, 그 누구도 하나님을 욕망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신이 되는 것이고, 주변에 있는 그 어떤 신이든 취해서 그 일을 돕게 하는 것이다.

목회 소명 실현에 주어진 세 번째 조건은 자아이다. 기관이나 회중과 마찬가지로 자아 역시 피할 수도 없고 호의적이지도 않다.

우리는 소명 때문에 하나님의 대의나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그렇기 때문에 신의 정체성을 취하는 잘못에 빠지기 쉽다.

자아라는 조건은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간파하려면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

내 생각에는 그러한 자아의 환상이 잘 발달하는 지점들을 자주 점검하는 게 좋은 것 같다. 뱀의 교활함처럼 그 환상은 아주 교묘하기 때문이다.

있는 것에 무엇을 더하기 위해 우리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오직 그 이름만 말하면 된다. 아버지, 아들, 성령.

목사는 그 인식을 슬쩍 찔러주어 그것이 주관성과 이데올로기를 지나서 공개적인 장으로 나와 ‘하나님’ 하고 말하게 하기 위해서 거기에 있다.

우리는 거기에서 하도록 되어 있는 일만 해야 한다. 그 이름을 말하고, 그 굶주림을 명명하면 된다

우리는 기회가 너무 많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받은 임무는 ‘한 가지 필요한 것’, 즉 보이지 않는 조용한 중심인 하나님에 대한 것이다.

스스로를 제한하는 일은 쉽지 않다. 중요한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중요한 존재로 주장하게 된다.

빛나는 가운을 걸치고 ‘목사’라는 소리를 들으며 프로그램과 프로젝트에 바쁜 우리는 또 하나의 금송아지를 만들 뿐이다. 이미 이 세상에 필요 이상으로 많은 금송아지를 말이다.

목사들이 일하는 기관, 회중, 자아라고 하는 조건은 피할 수 없고 강력하다. 셋이 하나의 굵은 밧줄이 되어 우리를 얽어매고 소명의 거룩함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유망한 종교 직업을 거부하고 우상 생산에 징발당하는 것을 피하고 아론의 허영심에서 벗어나려면, 강력한 방어와 공격을 동시에 이뤄내야 한다.

이 방어 겸 공격이 바로 아스케시스이다. 아스케시스는 가장 가까운 자아에서부터 시작한다.

자아를 아스케시스의 경기장으로, 기도의 장으로 삼아야 한다. 요나 이야기에서 아스케시스는 물고기 뱃속에서 이루어진다. 물고기 뱃속은 갇힌 장소이며 피할 수 없는 극심한 한계의 장소이다.

아스케시스가 필요한 이유는 ‘신처럼 되라’는 사탄의 유혹을 우리가 끊임없이 받기 때문이다.

신과 같은 조건에서 산다고 생각하는 환상에서 빠져나와 인간의 조건이라는 현실에 맞춰 살면 삶이 축소되는 것이 아니라 깊어지고, 무능해지는 것이 아니라 활기가 넘친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인생을 깊어지게 하고 현실을 깨닫게 해주는 또 한 가지 비자발적 아스케시스는 투옥이다

아스케시스는 자발적인 재난이다.

공식이나 기술적인 것들은 영적인 생활에 소비자적으로 접근하게 만들기 때문에 우리는 부지런히 그것을 경계해야 한다.

영성은 너무도 쉽게 자신의 입맛과 식성에 맞게 이것저것 골라 먹는 식당이 되어버린다.

우선은 ‘아스케시스’가 우리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영적인 기술이 아니라, 우리의 능력이 전무 혹은 거의 전무해지고 하나님의 뜻이 우리 안에 형성되도록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완전히 내맡기는 환경에 몰입하는 것이라고 주장해야 한다.

성토요일. 갇힘이 집중으로 바뀌고 환상이 소망으로 바뀌고 죽음이 부활로 바뀌는 날이다.

우선은 ‘아스케시스’가 우리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영적인 기술이 아니라, 우리의 능력이 전무 혹은 거의 전무해지고 하나님의 뜻이 우리 안에 형성되도록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완전히 내맡기는 환경에 몰입하는 것이라고 주장해야 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중요한 한 가지, 바로 거룩한 안식이 빠져서 다른 모든 진리를 위태롭게 만들고 있었다.

침묵하기를 거 부하고 비우는 것을 강박적으로 회피하는 것, 조금이라도 신으로부터 버림받은 인상을 풍기는 경험이나 사람은 거부하는 것이 바로 그러했다.

아스케시스를 짓는 데 필요한 부품은 간단하다. 시간과 장소이다. 골방과 시계이다. 지성소와 침묵이다

문제는 날마다 하는 것이다. 이 시점에 흔히 하는 미국식 조언, 즉 의지력을 발휘하는 것은 이상하게도 효과가 없다. 목사들 대부분도 선의를 지닌 수많은 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실패한 결심들이 두엄 더미를 이루고 있는 기도의 골방이 있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우리의 영성이 숨을 쉴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롭고, 아주 다양한 상황과 기분과 성장의 단계를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한 어떤 것이다.

역사적으로 아스케시스를 실현할 수 있는 가장 눈에 띄는 구조물은 수도원이다. 수도원의 탁월함은 포괄성에 있다. 하루의 모든 시간이 기도로 정의되고 수사들의 모든 활동이 기도로 이해된다. 시간마다 날마다 해마다 이와 같은 외적 포괄성이 공동체와 영혼을 관통한다. 기도의 삶이 내면화되는 동시에 사회화된다.

중요한 것은 인생의 모든 것을, 예배와 일의 모든 것을 기도로 담을 수 있는 충분히 큰 상상력이다. 그리고 그 상상력은 인생의 모든 것이 실현되는 실제 조건에 부합하는 구조(아스케시스) 안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

우리가 목회의 삶을 기도의 삶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면, 아스케시스는 경건주의적 나르시시즘의 장이 될 뿐이다.

우리가 기도의 삶을 목회 소명의 포괄적 내면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우리가 짓는 어떠한 아스케시스도 종교 공연을 위한 무대 장치에 불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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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란 바로 이런 것이다. 이것은 눈을 멀게 하는 섬광이며 타격이다. 이것을 당하는 순간 현재는 갑자기 과거로 변하고, 불가능은 합법적인 현실로 탈바꿈을 한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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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란 무엇인가
김영민 지음 / 어크로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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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매우 먹음직스러운 책이 있다.

코 끝을 향긋하게 자극하는 냄새.

 술부터  안은  만족스럽다.


적당한 양의 유머.

풍부하고 깊은 사유.

적절한 비유와 비틀기.


산뜻하고 담백하다.

기분 좋게 배부르다.


공부의 길에  들어선 입문자나,

학자로서 소명을 받들 심화자나,

누가 읽어도 도움이 될만한 내용으로 풍성하다.


기왕 하는 공부,

즐겁고 행복하게 하길 원한다면,

꼭 맛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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