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서를 유월절 예배의 맥락 안에 자리 잡게 함으로써 만들어진 상관관계는, 유월절에 크게 영향을 받은 기독교 예배 행위인 성만찬과의 관련성으로 발전되었다.

유월절처럼 성만찬은 결정적인 구원의 행위를 기억하고, 의례적 식사를 통해 그 사건을 재현함으로써 사람들의 참여를 통해 하나님의 행위에 믿음이 중요한 일부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드러내며, 완전하고 최종적인 성취를 기대하는 예배 행위다.

역사적 자료라는 환원 불가능한 핵심과 살아 계신 주님의 임재에 대한 믿음, 개인적인 기도를 통한 내적 응답 사이의 상관관계가 유지되는 곳은 바로 성찬대 위이기 때문이다.

유월절의 맥락 속에서 그랬듯이 아가서는 성찬대의 영향력 아래서 새로운 통찰을 계속해서 제공한다.

기도의 형식을 띠는 목회 사역은 구원을 기념하는 예배 행위로부터 친밀함의 욕구에 부응하는 태도를 발전시킨다.

아가서에서 배운 어휘 덕분에, 우리는 엉망이 된 우리 자신의 감정이라는 더러운 렌즈를 통해서가 아니라, 흠을 들춰내는 다른 사람의 비판이라는 얼룩진 창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백성(과 우리 자신)을 바라볼 수 있다.

하나님이, 그리고 그분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누군가가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우리가 얼마나 아름답게 보일 수 있는지, 우리가 얼마나 기뻐할 수 있는지, 우리가 얼마나 강해질 수 있는지 우리는 결코 깨닫지 못한다.

기도가 빠른 치료제나 즉각적인 요법이라서가 아니다. 기도는 평생 동안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도는 변죽을 울리는 대신 실제로 한복판에서 시작한다는 이점이 있다

목회자가 한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그 사람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도덕적 자질이나 영적 성숙도와 상관없이 그저 하나님의 특별한 창조물이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다.

기도가 없다면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과 가치가 항상 명백해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목회자 역시 죄로 인해 분명히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차이도, 의심도, 죄책감도 우리 안에 있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불을 끌 수 없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의 삶 속 깊은 곳에서 불타오를 것이며, 기쁜 경배라는 불꽃으로 타오를 때까지 우리의 습관과 꿈속에 파고들 것이다.

성만찬에서 기원하며 아가서에서 권면하는 목회적 기도의 두 번째 요소는 구속과 화해의 행위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이다.

목회자들은 죄의 무더기를 파내어 겹겹이 쌓인 갈등을 조사하고 책임과 죄책감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고고학자가 아니다. 우리는 함께 싸우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무관심에 대한 공격이며 우리의 반역에 대한 승리다.

목회적 기도를 통해 우리는 지치지 않는 그분의 은총과 그분의 백성들 안에서 사랑의 일을 완성하겠다는 확고부동한 결의를 함께 나누고 거기에 동참한다.

기도할 때 목회자는 수동적이거나 초연하지 않고 능동적이며 헌신적이다. 기도할 때 사용하는 성적 열정의 언어는 전인적이며, 친밀한 관계에 대해 거의 폭력에 가까운 강렬함을 보여준다.

성만찬에 근거한 목회적 기도의 세 번째 요소는 강한 기대의 마음("그가 오실 때까지"[고전 11:26])이다.

아가서는, 믿음으로 이미 우리 주님을 영접했으며 따라서 그분의 성령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들을 위해 소망 가운데 기도할 수 있는 원동력과 이미지를 제공한다.

하나님의 성령(성경의 언어에서 "바람"과 "성령"은 같은 말이다)에 의해 움직여지기 전까지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나님이 휘저어 움직이게 하시기 전까지 사랑은 숨어 있을 뿐이다. 하나님이 일깨워주시고 그에 대해 순종으로 반응하기 전까지 덕은 잠자고 있을 뿐이다.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는 성령은,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올 때와 거의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교회를 나서는 것을 보면서 회의적인 태도를 갖는 사람들에 대한 선제공격이다.

사랑과 믿음의 그 놀라운 친밀함은 그것에 참여하는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다

기도의 언어는 언제나 어느 정도는 급박하다. 지금이 바로 그날이다.

목회자들은 목소리를 높여 수사적으로 선언함으로써가 아니라 흥분과 급박함이 가득한 성경적 계시에 따라 기도하는 일에 몰두함으로써 이 메시지를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다.

기도는,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초대와 약속의 힘을 깨닫고 그것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기에 가장 적합한 목회 사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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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목사가 왜 신학자가 되어야 하는지 동시에 신학자가 왜 설교자가 되어야 하는지, 즉 목사-신학자로서의 설교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장 잘 보여줍니다.

특정한 신학자의신학은 그의설교를 통해 발견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것입니다. 스힐러베이크스에게는 좋은 설교란 교의, 윤리 신학, 설교자 자신의 신앙생활, 그리고 설교를 듣는 사람들의 삶을 가로지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요소들이 복음을 설교하는 행위에 수렴되며 설교자와 회중을 한데 묶어줍니다.

"순전한 설교는 기도와 인간의 경험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교제할 뿐만 아니라 신학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지속적인 훈련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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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소리이든 중요하다는 말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이름을 발음하는 소리가 중요하다

친밀함은 세계와 결합되는 모호하고 신비로운 경험이 아니다. 그것은 구체적인 타자와, 즉 아담과 하와가,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이 인격적이며 특수한 방식으로 연합하는 경험이다.

친밀함은 추상이 아니라 인격화다.

이름은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개별적이며 역사적이고 구체적인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목회 사역 역시 이름에 초점을 맞춘다. 목회자의 서재에서 교인 명부는 성경 다음으로 중요한 책이다.

다른 이의 이름에 익숙해지고 다른 이가 자기 이름에 익숙해졌음을 발견하는 것이 곧 친밀함이다.

이름이 없다면 목회 사역도 있을 수 없다.

아가서에 제시하는 언약의 두 번째 측면은 친밀함의 어려움이다. 친밀함은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친밀함을 제공하는 구조(언약)는 확고하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고자 할 때 장애물과 방해물을 만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 응답하는 사람은 모든 죄가 사함을 받았음을 알고는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의심이라는 장애물 없이 하나님과의 하나 됨을 느끼지는 못한다.

갈망은 정처 없이 헤매는 것이 아니며, 찾음은 어둠 속을 더듬는 것이 아니다. 방향이 있고, 목표가 있다.

목회 사역은 영적 추구의 어려움과 고통을 인정하고 그것을 함께 나눈다.

목회자의 책무는 영적 삶을 단순화하거나 공통분모의 공식을 만들어내거나 제자도를 실천하는 손쉬운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다.

영적 성장의 길에는 항상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으며, 그 어려움을 부인하거나 최소화하거나 그것을 피할 수 있는 지름길을 제공하려고 할 때 목회자는 그 사람이 참된 성장을 이루지 못하게 막는 것이나 다름없다

오히려 목회자의 책무는 어려움 속에 있는 사람들의 동반자가 되고, 그 어려움을 인정함으로써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그런 시간을 통과할 때 그들과 함께 대화하고 기도하여 그들이 조금이나마 고독감을 덜 느끼고 조금이나마 소망을 품고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 의도가 아무리 선하다고 할지라도 단순화시키려고 하는 사람은 좋은 목회 사역을 파괴하는 사람이다.

이 세상은 은총에 대해 결코 우호적이지 않다. 어떤 차원에서든-하나님과의 친밀함이든 사람들과의 친밀함이든-친밀함을 추구할 때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기 어렵다.

친밀함은 수지가 맞지 않는다. 그것은 효율적이지 않으며, "매력적"이지도 않다.

친밀함은 결코 쉽게 이룰 수 없다. 고통이 따른다. 갈망과 실망, 상처가 있다.

친밀함을 얻기 위해 상당한 정도의 비용이 드는 만큼, 보상은 비길 수 없을 정도로 크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의도하신 그 인간성을 완성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듬거리며 비틀거리고, 방황하며 곁길로 빠지고, 지체하며 꾸물거린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결같 이 영원한 사랑을 받듯이 우리도 그렇게 사랑하는 법을 배워간다.

사랑과 신앙 모두에서 친밀함은 긴장으로 가득하다. 성취는 지연되고, 욕망은 쓰디쓰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과 그 사랑이 절정에 이르는 순간 사이에는, 약속과 성취 사이에는, 언약으로 규정되는 경계 사이에는 열렬한 사랑과 열정적인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 인내하며 끈질기게 기도해야 할 책임이 있다.

사람들과 더불어 그들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그 욕망의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고 그 어려움을 하나님 아래 맡겨드린다

기도는 가장 탁월한 언약의 언어다.

기도는 가장 중요한 관계, 사람과의 관계와 하나님과의 관계 모두를 진지하게 대하는 가장 중요한 목회적 대화다

기도할 때 우리는 욕망에 관해 이야기하고 그것을 하나님께 아뢴다.

기도할 때 어려움을 분석하거나 연구하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님과 더불어 어려움을 풀어나갈 뿐이다.

친밀함이 우리의 목표라면, 교육이나 상담, 심리 요법으로는 그 목표에 이를 수 없으며(이런 사역들이 도움을 줄 수는 있을 테지만), 중요한 이들과의 관계, 즉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서만 그 목표에 이를 수 있다.

사랑과 신앙 모두에서 친밀함은 긴장으로 가득하다. 성취는 지연되고, 욕망은 쓰디쓰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과 그 사랑이 절정에 이르는 순간 사이에는, 약속과 성취 사이에는, 언약으로 규정되는 경계 사이에는 열렬한 사랑과 열정적인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 인내하며 끈질기게 기도해야 할 책임이 있다.

사람들과 더불어 그들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그 욕망의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고 그 어려움을 하나님 아래 맡겨드린다

기도는 가장 탁월한 언약의 언어다.

기도는 가장 중요한 관계, 사람과의 관계와 하나님과의 관계 모두를 진지하게 대하는 가장 중요한 목회적 대화다

기도할 때 우리는 욕망에 관해 이야기하고 그것을 하나님께 아뢴다.

기도할 때 어려움을 분석하거나 연구하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님과 더불어 어려움을 풀어나갈 뿐이다.

친밀함이 우리의 목표라면, 교육이나 상담, 심리 요법으로는 그 목표에 이를 수 없으며(이런 사역들이 도움을 줄 수는 있을 테지만), 중요한 이들과의 관계, 즉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서만 그 목표에 이를 수 있다.

적어도 기독교는 성례전적이라는 뜻이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이며, 세속적인 것은 성스러운 것의 통로이고, 물질적인 것은 영적인 것을 담은 그릇이다.

세례에서 물은 죄사함의 성례전이 되고, 성만찬에서 음식은 영생의 성례전이 된다.

몸이라는 "지표"는 성육신을 통해 가장 완전히 다뤄지는 실재의 목록이다.

몸은 결코 그저 몸이 아니라 존재의 영역, 창조와 구원을 결합하는 삶의 과정을 연결하는 망이기 때문이다

경배, 송축, 일편단심-우리가 "사랑에 빠질" 때 경험하는 모든 것-은 우리가 사랑/구원받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사랑은 우리를 위해, 우리 안에서 모든 것-자신에 관한 우리의 생각, 다른 이들을 향한 우리의 태도, 우리의 가치와 목적-을 바꾼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삶이 어떤 궁극적인 의미를 지니게 만들며, 우리 삶을 영원히 무언가에 적합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목회 사역이란 우리를 서로와 그리고 하나님과 구별시켜주는 작은 차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런 다음 그것에 대해 찬사를 보내는 사역이다.

친밀함에 대한 욕구와 실제 인간관계의 시시콜콜한 문제들이 기도의 내용이 된다. 욕망은 경배로 바뀌고, 어려움은 간구로 변한다.

목회 사역에서 서둘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질 때, 개인적인 필요를 충족하는 관계를 계발하는 대화와 기도의 사역을 못하게 된다

목회자는 "바쁘지" 말아야 한다.

바쁘다는 것은 영혼의 질병이다. 그것은 소명을 성실히 수행하게 해주는 버팀목과 은총의 우선성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한 가지 일에서 다른 일로 서둘러 넘어가려는 태도다.

친밀함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하는 목회 사역을 가능하게 해주는 대화와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조용한 여가를 넉넉히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한다는 것은 곧 공동체 안의 다른 사람들에 의해 사람들에게 강요되는 여가에 대한 기능적, 기술적, 비인간적 의미 규정을 거부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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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바르트는 이러한 목회 사역에서 아가서를 활용하고자 할 때 필요한 주석적 기초를 제공한다. 그는 창세기 2장을 주석하면서 "남자와 여자로 창조된" 인간의 성적인 본성에 대해 검토하고, 인간이 언약적 관계에 참여하고 그 관계를 계발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고 논증한다.

성경에서는 인간이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신실한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기를 거부하는 태도와 그렇게 할 능력이 없음을 묘사할 때, 성적 은유를 가장 자주 사용한다.

카를 바르트는 이러한 목회 사역에서 아가서를 활용하고자 할 때 필요한 주석적 기초를 제공한다. 그는 창세기 2장을 주석하면서 "남자와 여자로 창조된" 인간의 성적인 본성에 대해 검토하고, 인간이 언약적 관계에 참여하고 그 관계를 계발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고 논증한다

깨어진 약속이라는 폐허와 잃어버린 신실함이라는 파편 속에서 구원의 사건이 일어난다.

아가서는 성적 이미지를 예언자들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는 예외에 속한다. 이 책에서는 창세기 2장을 긍정적으로 해석한다.

이 사랑 노래들은 온전한("구원받은") 관계로 귀결되는 인격적 만남을 이룰 능력이 사람들에게 있다고 설명한다.

아가서에서는 언약의 내적 기초를 묘사하기 위해 창세기 2장에서 사용된 성적 관계의 언어를 가져와 언약이 어떻게 성취되는지, 어떻게 분리된 것이 연합되는지, 어떻게 외로움을 벗어나 사귐에 이를 수 있는지, 어떻게 인격적 친밀함을 이룰 수 있는지, 어떻게 죄로 인해 파괴된 친밀함이 구원을 통해 회복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하나님이 본래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신 것은 이 언약을 위해서다. 그리고 아가서에서도 그렇다고 말한다. 이 언약의 관점에서 남자와 여자는 그 어떤 장애와 제약에도 불구하고 만남을 향해 서둘러 나아가야만 하며 그럴 수 있고 그럴 것이다.

아가서가 특히 유월절 전통 안에서 사용될 때 구원 사건으로부터 파생된 관계, 그 자체로 구원의 사건이 된 관계를 계발하는 목회 사역을 위한 자극과 지침이 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하나님이 그분의 일을 하실 때 활용하시는 구조인 언약 안에서 그들의 창조와 구원의 관점에서 살아가고자 사람들은 관계 속에서 살아야만 한다.

모든 창조와 구원은 관계적(언약적)이므로 그런 토대로부터, 그리고 그런 환경 속에서 자라나고 발전하는 삶 역시 관계적(언약적)이어야 한다.

목회 사역 전체를 인격적 관계를 다루는 걸작인 아가서를 통해 이해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구원을 거친 후 창조의 결과에 익숙해지는 것이 중요하다.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이 책을 경건한 삶-묵상과 기도의 삶-을 묘사하는 책으로 읽어왔음을 알 수 있다.

아가서가 자리 잡고 있는 유일한 맥락은 성경의 정경이다. 정경으로 받아들여지기 전에 신앙 공동체가 이 책을 사용했던 전前역사가 있었음은 분명하다.

교회에서는 아가서에 등장하는 낭만적 사랑의 언어를 사용해 날마다 삶 속에서 누리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을 이해하고 이를 계발하고자 했다.

교회가 아가서를 우의적으로 영해靈解한 것이 고상한 체하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하는 현대 학자들은, 성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내적으로 깊이 연결되었음을 알고 있던 고대인들의 지성, 그들의 시적 지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유대교와 기독교 문서의 주된 관심사는 현대인들이 그토록 몰두하는 역사가 아니었다. 이들 문서에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가시적 상징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 맥락은 언약, 즉 사랑하는 이와 사랑받는 이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이며, 여기서 사랑하는 이는 하나님이고 사랑받는 이는 인간, 즉 "남자와 여자" 모두다

성애를 다루는 내용은 신학적 맥락 안에서 읽어내야 한다.

고대인들은 성에 관한 내용에 대해 당혹스러워해서가 아니라 성을 성례전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아가서를 경건의 관점에서 읽었다.

인간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그 색깔을 취했다.

구원은 자아의 강화, 즉 고독한 영혼이 신비하고 심오한 깨달음 속으로 침잠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자아의 추상화, 인격적인 것을 감정이나 사상의 단편으로 이상화하는 것을 뜻하지도 않는다.

구원은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찬양하는 우리의 말에 의해 계발되는 인격적 관계다.

아가서는 모든 성경적 신앙이 작동하는 환경, 즉 대화적 언설의 세계, 질문과 대답, 초대와 헌신, 약속과 성취가 존재하는 세계, 말이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는 세계를 표상한다.

목회자는 대화 상대자로서 성도들과의 대화를 통해 분열과 냉담, 무관심이라는 장벽을 극복하고자-그들을 이해하고, 타자의 진리를 발견하고, 타자의 의미를 자세히 살피고자-노력한다.

목회적 대화는 친밀함을 추구하는 인격체 사이의 대화다.

성경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과 구원받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의 구조를 가리킬 때 가장 많이 쓰이는 말은 언약berit이다.

사실 언약은 인류가 명시되고 계시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삶을 이해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언약이라는 말 자체는 아가서에 등장하지만, 아가서를 노래한 사람들은 언약의 관점에서 삶 전체를 이해했던 사람들이었다.

아가서에서는 나라 간 조약을 맺을 때 사용하는 객관적인 언어가 아니라 인격체들이 사랑을 나눌 때 사용하는 주관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언약의 경험을 안으로부터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언약을 명시적으로 지칭하는 나라 간의 조약에서는 두 나라가 평화롭게 살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백성이 의롭게 살 수 있는 조건을 규정한다.

잘 알려진 성적인 사랑의 언어를 사용하여, 사람들이 다른 사람과 온전하고 건강하며 만족스러운 관계가 삶 속에서 실현되는 인격적 경험을 추구고자 할 때 그들 사이의 내적 역학을 묘사한다.

모세오경에서 언약을 세우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면, 아가서에서는 언약의 관계 안에서 실현되는 관계에 대해 노래한다.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기리는 모세의 노래로부터 그 구원의 주관적 경험을 속속들이 살피는 솔로몬의 노래로 넘어가는 과정(이는 목회적 설교로부터 목회적 기도 및 대화로 전환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은 매우 갑작스럽다.

고독한 인격체의 외로운 고립 상태 안으로 파고들어가야 한다. 삶이 의미 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함께 해야만 한다. 친밀함은 온전함의 필수요건이다.

구원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그에 반응한 이들은 날마다 자신의 삶에서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깨달아가는 중이다.

말을 한다는 것은 결국 공동체의 행위다. 내가 말을 할 때, 설령 그것이 나 자신에 관한 말이라 하더라도 나는 다른 사람의 존재(와 중요성)를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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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죽음은 심지어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가지고, (7장의 화자와 같이)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고 그 율법에 순종하기로 헌신한 사람에게까지 율법을 사용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합니다(롬 7:8, 11). 이러한 죄와 죽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행위로만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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