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기분에 영향 받지 않기 위해서는 기분의 출처를 정확히 해야 한다. - P55

타인에게 전염된 기분이라고 판단되면, 과감하게 쳐내는 연습을 해보자. - P55

남의 감정까지 내가 감당해야 할 의무는 없다. - P55

지금 나의 기분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만 깨달아도 그 무게가 훨씬 가벼워져서, 내 안에서 흘려보내는 일이 그리 어렵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 P55

사람에게 덜 기대할 것. 내가 준만큼 똑같이 받으려고 욕심내지 않을 것. 이 두 가지가 인간관계에서 실망하지 않은 가장 단순하고 확실한 방법이다.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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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백 년 동안 목회자가 맡은 임무는 "사람들로 하여금 좋은 죽음을 맞도록 준비시키는 것"이었다. 여전히 그것은 목회 사역에서 무가치한 목적이 아니다.

"하나님의 큰 일"(오순절의 주제)을 "우리의 각 언어로"(룻기의 형식) 말할 때 교회가 생겨난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가 순종과 신뢰, 사랑과 축복이라는 새로운 이야기를 통해 참신하게 표현되는 신앙 공동체가 생겨난다.

"이야기를 듣는다는 말은 그 이야기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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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의 책무는 역할을 정해주거나 감독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서" 각자에게 적합한 일을 하고 그들과 함께 그 이야기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반응하도록 돕는 것이다.

창조적인 차이를 위한 여지가 충분한 구원의 역사라는 광대한 장 속에서는 전형적인 것으로부터 개별적인 것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불경건해 보이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심지어 신성모독처럼 들리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런 공식화된 불평이 성경에 꽤나 자주 등장한다는 것이다.

목회자는 불평을 공식화하도록 도움으로써, 즉 불만의 내용을 목록화하고, 어디서 하나님이 그분의 역할을 하는 데 실패하셨는지를 명확히 하고, 그분에 대한 기소장을 작성하는 일을 도움으로써 한 사람이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도록" 도울 수 있다

목회자가 언제나 하나님 편에서 그분을 변호할 필요는 없다.

고소인의 편을 드는 것이 성경적 입장일 때도 있다.

때로는 사소하고 때로는 극적인 방식으로 그는 모든 외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신실하신 하나님이 여전히 자신의 일을 이루고 계심을 깨달았다.

이야기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룻이 갑자기 자유의지를 개입시켜 단호하게 주도권을 잡는 이 장면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룻은 희생자가 아니다. 하나님의 이야기 안에 있다는 것은 수동적으로 무언가가 우리에게 일어나도록 내버려두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기력한 복종이나 맹목적인 순종이 아니다.

그는 비록 이방인이며(그리고 룻기에서는 그가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여섯 차례나 그는 "모압 여인"이라고 불린다) 정해진 언약의 경계 바깥에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에 의해 주어진 사회적 역할-며느리, 모압 여자, 이삭 줍는 사람의 역할-바깥으로 걸어 나가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이 이야기 안으로 들어간다. 그 결과 그는 이야기의 중심으로 진입하고 메시아의 조상이 된다.

사람들로 하여금 경계 바깥으로 걸어 나가 자신의 생각을 밝히도록 격려함으로써-그저 어머니와 아버지, 배우자와 교사, 심지어는 목회자가 충고한 것을 앵무새처럼 그대로 따라하는 대신-목회자가 이야기 만들기에 협력하는 때가 있다.

이야기를 만들고자 할 때, 재료의 배열이나 남들은 간과했지만 숨겨진 하나님의 방식을 보여주는 현실에 주의를 기울이는 일에 관해 창의적일 뿐만 아니라, 때가 왔을 때 스스로 목소리를 높이고 원하는 것을 요구하는 일에 관해서도 창의적이어야 한다.

보아스는 새로운 책임을 떠맡음으로써 이야기 안으로 들어갔다.

보아스처럼 어떤 사람들은 책임을 떠맡음으로써 이야기 속으로 들어온다.

그들은 율법 조문을 뛰어넘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부와 지위를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꾸준히 그리고 넉넉한 마음으로 모색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로운 관계를 모형으로 삼는 의로운 삶 속으로 뛰어든다.

자신의 힘과 자신의 부, 자신의 영향력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결코 다른 이들을 위해 사용하지 않는 ‘재력가’들이 있다. 목회자들은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드는 일에 협력자가 되어, 그들이 더 이상 자신을 명성과 재산, 권력이 당연히 집중되는 중심으로 여기는 대신 스스로 다른 이들을 책임지고 돌보아야 할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위치에 있다.

사실 누구든 이야기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구속이라는 포괄적인 이야기를 철저히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그 모습 그대로 있는 그 자리에서, 조금씩 룻의 이야기만큼 위대해져가는 이야기들을 진술하기 시작하도록 도와야 할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경우가 많다.

신학적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룻기를 계속해서 읽을 때, 그 안에 담긴 미묘한 의미를 이해하게 될 것이며, 목회 사역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에 관해 말하게 하고 자신이 그 이야기의 일부임을 깨닫게 할 수 있다는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룻기가 목회자들에게 중요한 이유는, 마치 천둥이 내리치는 듯한 오순절 예배의 케리그마와 달리 조용하고 사적인 공간을 마련하며 평범한 사람들이 사랑과 구원, 섭리와 축복에 관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법을 배울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룻기는 그 자체로도 하나의 이야기지만, 그것만 읽으면 복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 책은 우주적 구원 서사 속에 들어 있는 하나의 탁월한 세부항목이다.

족보는 동떨어진 장소에서 동떨어진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미시적으로 검토하는 것으로부터 하나님의 방식의 광대한 영향력을 거시적인 전망으로 전환하도록 도와주는 문학적 장치다.

족보는 그 자체에 대해 주의를 환기하지 않으며, 이야기의 강렬함과 중요성, 온전함을 약화시키지 않으면서 그런 목적을 달성한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지루하게 느끼는 성경의 족보는 사실 이야기의 가장 흥미진진한 부분을 기록하고 있다.

왜냐하면 복음은 얼굴 없고 이름 없는 군중이 아니라 인격체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원의 역사 속에는 숱한 이름이 등장한다. 이름을 부르는 것은 인격적인 사랑, 독특한 친밀 관계, 정확한 책임을 위해 한 사람을 부르는 이야기 형식이다.

성경에서 족보를 선호하는 것은 젠체하는 의고주의擬古主義가 아니라, 인격적 접촉에 대한 모색, 즉 그 안에서 하나님이 구원을 이뤄가시는 관계의 망 속에서 사람들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하는 노력이다.

구속사는 창의적이며 통합적이다. 당신의 어머니가 누구였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누구든 이 가족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

누구의 개인적 이야기이든지 이 가족의 이야기로 통합될 수 있다. 족보의 목적은 하나님이 그분의 피조물 안에서 구속을 이루어가시는 방식이 무한히 광범위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의 기원이 하나님 안에 있음을 확신할 때, 내 미래 역시 그분 안에 있음을 굳게 확신할 수 있으며, 그런 확신은 내가 현재 믿음으로 살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한다.

자신의 이야기가 이처럼 다른 이들의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는 모든 사람들은 믿음으로 살아갈 힘을 얻는다.

"우리는 전방을 등진 채 차에 올라 타 있다. 우리의 여정이 어느 단계에 와 있는지 우리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 이야기는 전체를 다 듣고 난 후에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바로 그런 종류의 이야기다.

족보는 이름을 강조하는 동시에 기원(이는 목적지도 내포한다.우리에게 조상이 있다면 후손도 있을 것이다)에 대한 관심을 집중하기 때문에, 개인의 이야기가 그 자체에만 몰두하지 않도록 해준다.

목회 사역에서는 사람들과 협력해 그들의 이야기를 만든 후에 그들로 하여금 강단과 성찬대, 세례반 가까이로 되돌아오게 한다.

더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해할 때만 기독교 신앙은 성숙해진다.

복음은 개인적인 성공과 만족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포함된다.

예배당 안에서는 모든 것이 여전히 개인적이지만 그 어느 것도 누군가의 환경이라는 한계 속에 갇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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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의 책무는 역할을 정해주거나 감독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서" 각자에게 적합한 일을 하고 그들과 함께 그 이야기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반응하도록 돕는 것이다.

창조적인 차이를 위한 여지가 충분한 구원의 역사라는 광대한 장 속에서는 전형적인 것으로부터 개별적인 것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불경건해 보이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심지어 신성모독처럼 들리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런 공식화된 불평이 성경에 꽤나 자주 등장한다는 것이다.

목회자는 불평을 공식화하도록 도움으로써, 즉 불만의 내용을 목록화하고, 어디서 하나님이 그분의 역할을 하는 데 실패하셨는지를 명확히 하고, 그분에 대한 기소장을 작성하는 일을 도움으로써 한 사람이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도록" 도울 수 있다

목회자가 언제나 하나님 편에서 그분을 변호할 필요는 없다.

고소인의 편을 드는 것이 성경적 입장일 때도 있다.

때로는 사소하고 때로는 극적인 방식으로 그는 모든 외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신실하신 하나님이 여전히 자신의 일을 이루고 계심을 깨달았다.

이야기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룻이 갑자기 자유의지를 개입시켜 단호하게 주도권을 잡는 이 장면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룻은 희생자가 아니다. 하나님의 이야기 안에 있다는 것은 수동적으로 무언가가 우리에게 일어나도록 내버려두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기력한 복종이나 맹목적인 순종이 아니다.

그는 비록 이방인이며(그리고 룻기에서는 그가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여섯 차례나 그는 "모압 여인"이라고 불린다) 정해진 언약의 경계 바깥에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에 의해 주어진 사회적 역할-며느리, 모압 여자, 이삭 줍는 사람의 역할-바깥으로 걸어 나가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이 이야기 안으로 들어간다. 그 결과 그는 이야기의 중심으로 진입하고 메시아의 조상이 된다.

사람들로 하여금 경계 바깥으로 걸어 나가 자신의 생각을 밝히도록 격려함으로써-그저 어머니와 아버지, 배우자와 교사, 심지어는 목회자가 충고한 것을 앵무새처럼 그대로 따라하는 대신-목회자가 이야기 만들기에 협력하는 때가 있다.

이야기를 만들고자 할 때, 재료의 배열이나 남들은 간과했지만 숨겨진 하나님의 방식을 보여주는 현실에 주의를 기울이는 일에 관해 창의적일 뿐만 아니라, 때가 왔을 때 스스로 목소리를 높이고 원하는 것을 요구하는 일에 관해서도 창의적이어야 한다.

보아스는 새로운 책임을 떠맡음으로써 이야기 안으로 들어갔다.

보아스처럼 어떤 사람들은 책임을 떠맡음으로써 이야기 속으로 들어온다.

그들은 율법 조문을 뛰어넘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부와 지위를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꾸준히 그리고 넉넉한 마음으로 모색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로운 관계를 모형으로 삼는 의로운 삶 속으로 뛰어든다.

자신의 힘과 자신의 부, 자신의 영향력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결코 다른 이들을 위해 사용하지 않는 ‘재력가’들이 있다. 목회자들은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드는 일에 협력자가 되어, 그들이 더 이상 자신을 명성과 재산, 권력이 당연히 집중되는 중심으로 여기는 대신 스스로 다른 이들을 책임지고 돌보아야 할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위치에 있다.

사실 누구든 이야기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구속이라는 포괄적인 이야기를 철저히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그 모습 그대로 있는 그 자리에서, 조금씩 룻의 이야기만큼 위대해져가는 이야기들을 진술하기 시작하도록 도와야 할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경우가 많다.

신학적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룻기를 계속해서 읽을 때, 그 안에 담긴 미묘한 의미를 이해하게 될 것이며, 목회 사역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에 관해 말하게 하고 자신이 그 이야기의 일부임을 깨닫게 할 수 있다는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룻기가 목회자들에게 중요한 이유는, 마치 천둥이 내리치는 듯한 오순절 예배의 케리그마와 달리 조용하고 사적인 공간을 마련하며 평범한 사람들이 사랑과 구원, 섭리와 축복에 관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법을 배울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룻기는 그 자체로도 하나의 이야기지만, 그것만 읽으면 복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 책은 우주적 구원 서사 속에 들어 있는 하나의 탁월한 세부항목이다.

족보는 동떨어진 장소에서 동떨어진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미시적으로 검토하는 것으로부터 하나님의 방식의 광대한 영향력을 거시적인 전망으로 전환하도록 도와주는 문학적 장치다.

족보는 그 자체에 대해 주의를 환기하지 않으며, 이야기의 강렬함과 중요성, 온전함을 약화시키지 않으면서 그런 목적을 달성한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지루하게 느끼는 성경의 족보는 사실 이야기의 가장 흥미진진한 부분을 기록하고 있다.

왜냐하면 복음은 얼굴 없고 이름 없는 군중이 아니라 인격체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원의 역사 속에는 숱한 이름이 등장한다. 이름을 부르는 것은 인격적인 사랑, 독특한 친밀 관계, 정확한 책임을 위해 한 사람을 부르는 이야기 형식이다.

성경에서 족보를 선호하는 것은 젠체하는 의고주의擬古主義가 아니라, 인격적 접촉에 대한 모색, 즉 그 안에서 하나님이 구원을 이뤄가시는 관계의 망 속에서 사람들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하는 노력이다.

구속사는 창의적이며 통합적이다. 당신의 어머니가 누구였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누구든 이 가족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

누구의 개인적 이야기이든지 이 가족의 이야기로 통합될 수 있다. 족보의 목적은 하나님이 그분의 피조물 안에서 구속을 이루어가시는 방식이 무한히 광범위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의 기원이 하나님 안에 있음을 확신할 때, 내 미래 역시 그분 안에 있음을 굳게 확신할 수 있으며, 그런 확신은 내가 현재 믿음으로 살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한다.

자신의 이야기가 이처럼 다른 이들의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는 모든 사람들은 믿음으로 살아갈 힘을 얻는다.

"우리는 전방을 등진 채 차에 올라 타 있다. 우리의 여정이 어느 단계에 와 있는지 우리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 이야기는 전체를 다 듣고 난 후에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바로 그런 종류의 이야기다.

족보는 이름을 강조하는 동시에 기원(이는 목적지도 내포한다.우리에게 조상이 있다면 후손도 있을 것이다)에 대한 관심을 집중하기 때문에, 개인의 이야기가 그 자체에만 몰두하지 않도록 해준다.

목회 사역에서는 사람들과 협력해 그들의 이야기를 만든 후에 그들로 하여금 강단과 성찬대, 세례반 가까이로 되돌아오게 한다.

더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해할 때만 기독교 신앙은 성숙해진다.

복음은 개인적인 성공과 만족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포함된다.

예배당 안에서는 모든 것이 여전히 개인적이지만 그 어느 것도 누군가의 환경이라는 한계 속에 갇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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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인 차이를 위한 여지가 충분한 구원의 역사라는 광대한 장 속에서는 전형적인 것으로부터 개별적인 것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불경건해 보이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심지어 신성모독처럼 들리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런 공식화된 불평이 성경에 꽤나 자주 등장한다는 것이다.

목회자는 불평을 공식화하도록 도움으로써, 즉 불만의 내용을 목록화하고, 어디서 하나님이 그분의 역할을 하는 데 실패하셨는지를 명확히 하고, 그분에 대한 기소장을 작성하는 일을 도움으로써 한 사람이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도록" 도울 수 있다

목회자가 언제나 하나님 편에서 그분을 변호할 필요는 없다.

고소인의 편을 드는 것이 성경적 입장일 때도 있다.

때로는 사소하고 때로는 극적인 방식으로 그는 모든 외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신실하신 하나님이 여전히 자신의 일을 이루고 계심을 깨달았다.

이야기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룻이 갑자기 자유의지를 개입시켜 단호하게 주도권을 잡는 이 장면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룻은 희생자가 아니다. 하나님의 이야기 안에 있다는 것은 수동적으로 무언가가 우리에게 일어나도록 내버려두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기력한 복종이나 맹목적인 순종이 아니다.

그는 비록 이방인이며(그리고 룻기에서는 그가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여섯 차례나 그는 "모압 여인"이라고 불린다) 정해진 언약의 경계 바깥에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에 의해 주어진 사회적 역할-며느리, 모압 여자, 이삭 줍는 사람의 역할-바깥으로 걸어 나가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이 이야기 안으로 들어간다. 그 결과 그는 이야기의 중심으로 진입하고 메시아의 조상이 된다.

사람들로 하여금 경계 바깥으로 걸어 나가 자신의 생각을 밝히도록 격려함으로써-그저 어머니와 아버지, 배우자와 교사, 심지어는 목회자가 충고한 것을 앵무새처럼 그대로 따라하는 대신-목회자가 이야기 만들기에 협력하는 때가 있다.

이야기를 만들고자 할 때, 재료의 배열이나 남들은 간과했지만 숨겨진 하나님의 방식을 보여주는 현실에 주의를 기울이는 일에 관해 창의적일 뿐만 아니라, 때가 왔을 때 스스로 목소리를 높이고 원하는 것을 요구하는 일에 관해서도 창의적이어야 한다.

보아스는 새로운 책임을 떠맡음으로써 이야기 안으로 들어갔다.

보아스처럼 어떤 사람들은 책임을 떠맡음으로써 이야기 속으로 들어온다.

그들은 율법 조문을 뛰어넘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부와 지위를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꾸준히 그리고 넉넉한 마음으로 모색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로운 관계를 모형으로 삼는 의로운 삶 속으로 뛰어든다.

자신의 힘과 자신의 부, 자신의 영향력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결코 다른 이들을 위해 사용하지 않는 ‘재력가’들이 있다. 목회자들은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드는 일에 협력자가 되어, 그들이 더 이상 자신을 명성과 재산, 권력이 당연히 집중되는 중심으로 여기는 대신 스스로 다른 이들을 책임지고 돌보아야 할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위치에 있다.

사실 누구든 이야기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구속이라는 포괄적인 이야기를 철저히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그 모습 그대로 있는 그 자리에서, 조금씩 룻의 이야기만큼 위대해져가는 이야기들을 진술하기 시작하도록 도와야 할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경우가 많다.

신학적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룻기를 계속해서 읽을 때, 그 안에 담긴 미묘한 의미를 이해하게 될 것이며, 목회 사역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에 관해 말하게 하고 자신이 그 이야기의 일부임을 깨닫게 할 수 있다는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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