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에서 전도서는 신약의 빈 무덤에 해당한다. 빈 무덤, 정경의 복음서들이 한 목소리로 부활을 이해하는 데에 필수적이라고 말하는 이야기는 위대한 ‘아니오’의 경험이다.

이것은 사실 인간이 할 필요 없는, 사실 할 수 없는 일을 표상한다.

나는 하나님을 돌볼 필요가 없다. 그분은 스스로 돌보신다

나는 그분을 관리하거나 방어하거나 그분께 다음에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말할 필요가 없다.

그 말은 곧 이제 나는 집으로 가 내가 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명령을 받은 일을 하기만 하면 된다는 뜻이다.

목회자가 함께 일하는 사람들(그리고 목회자 자신 역시 예외가 아니다)은 전혀 복음의 일부가 아닌 도덕적이며 종교적 짐을 엄청나게 많이 짊어지고 다닌다

우리는 신앙에 관해 매우 열심히 노력한다. 그것에 대해 번민한다. 그것과 씨름한다. 우리는 그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이를 악문다. 빈 무덤은 그런 태도에 반대하는 순간이다.

거짓된 겸손한 태도로 하나님을 대하며 그분을 마치 우리가 돌보아야 할 사람인 것처럼 취급하는 종교적 지도자들이 너무나도 많다. 우리가 하는 일이 그분의 유효성을 결정한다고 생각하며, 그런 태도가 창조주 앞에 조아리는 피조물의 자세가 아니라 우상을 대하는 이방인의 모습임을 깨닫지 못한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까지 예수님은 권위 있는 치유와 가르침으로 확실히 모든 것을 통제하셨다. 그러나 십자가 죽음은 너무나 극단적이었기에 제자들은 이제 자신들이 상황을 넘겨받아야 한다고 느꼈다. 예수님이 그런 곤경에 처하셨으므로 그분을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들이 향유를 바르고 슬퍼하고 방어하는 행동을 통해 그분을 구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은 해야 할 일을 이미 다 하셨다.

코헬렛은 "결론은 이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라"라고 말한다(12:13).

어떤 신약에는 마지막에 시편이 덧붙여져 있다. 시편은 결론으로서 너무나도 적합하다. 시편은 찬양과 간구, 믿음과 회의를 통해 은총의 경험을 우리 삶에 결합시킨다.

시편은 정직한 고백을 통해 감사와 갈등을 표현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해진 사람은 시편이 여러 방식으로 인격적 친밀함을 길러주고, 이로써 우리 믿음을 "아침마다 새롭게" 해준다는 것을 깨닫는다.

목회자는 개인적 갱신과 목회 사역 모두를 위해 성경의 다른 어떤 부분보다 시편을 잘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시편이 신약에 대한 적합한 결론인 것과 마찬가지로, 전도서는 적합한 서문이다.

사람들은 복음에 대해 너무나도 많은 오해와 너무나도 많은 어리석은 감정, 너무나도 많은 성급한 요구를 가지고 있어서 복음의 진정한 메시지를 듣지 못하고 그 실질적인 약속을 대면하지 못하고 있다.

코헬렛은 이 모든 것을 제거한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종교라고 생각하는 내부의 소음과 우리가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산만한 경건을 버리게 만든다. 그는 잔뜩 쌓여 있는 종교적인 쓰레기를 내다버리고 신앙으로 가장한 속임수를 내쫓는다.

짜임새 있게 배치된 코헬렛의 헤벨(hebel, 헛됨)을 신약 서문으로 삼는 것은, 복음의 메시지를 왜곡하거나 들리지 않게 만드는 혼란과 기만을 제거하고, 단순하고 바르게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일에 목회적 지침을 제공한다.

"한 통에 두 종류의 음료수를 동시에 담을 수는 없다. 만약 통에 포도주를 담고자 한다면, 먼저 그 안의 물을 따라내고 통을 깨끗이 비워야 한다. 만약 하나님이 주신 기쁨을 누리고자 한다면, 먼저 당신이 만들어낸 모든 것을 따라내거나 내다버려야 한다."

모든 목회 사역은 교회, 즉 신앙 공동체라는 배경 속에서 일어난다. 목회자는 결코 개인들을 섬기는 사적인 종교 전문가가 아니다. 목회자는 결코 군중을 상대하는 비인격적 연설가가 아니다. 목회자는 공동체에 자리 잡고 그 공동체를 세우는 책무를 맡고 있다.

목회 사역은 사람들에 대해, 그리고 그들이 그들을 만드신 하나님의 뜻에 의해 주어진 인간성을 성취하지 못하는 문제에 대해 관심을 기울인다. 그런 사람들과 더불어 일하는 목회자는 그들을 단세포적 유기체가 아니라 "그 몸의 지체들"로 바라본다.

인간은 관계 속의 개인이다. 사람들은 공동체를 부인할 때조차도, 공동체를 모를 때조차도 언제나 공동체의 일부다.

회중(카할)은 하나님과 히브리 백성 사이의 관계에서 기본적인 작동 단위였다. 그들의 법적 체계에서 최악의 처벌은 공동체로부터의 단절이었다.

추방당해 혼자서 살아가야 할 때 개인은 온전한 인격체가 아니었다.

무리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내 그들 자체로 독립적인 실체인 것처럼 그들과 대화하고 그들을 우주 안의 고독한 단자처럼 대하는 목회 사역에서는, 그들을 성서에서 인정하는 인격체에 미치는 못하는 존재로 축소시킨다. 성경적 인간관은 공동체 안의 인격체, "하나님의 백성"이다.

상자 안의 자갈처럼 개인들의 집합체가 아니라 한 몸이라는 의식,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 그 몸의 지체들이라는 의식이 있었다.

그리스도인은 개인이 축소되는 것이 아니라 인격이 확장된다고 생각했다.

개인을 강조하는 미국적 경향과 공동체를 강조하는 성경적 전통 사이에서 목회 사역은 단일한 개인들이 아니라 ‘백성’을 다루는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사람들은 신앙 공동체 안에서 전인적 인격체들을 구속하는 복음의 통전성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개인주의로부터 탈피해야만 한다.

명백한 사실은, 신앙 공동체, 즉 교회는 매우 전문화된 공동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독특한 공동체다. 교회와 비슷한 조직은 없다. 어떤 유비나 유사한 경험도 교회의 본질을 설명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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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헬렛을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전통 속에 위치시킬 때 그의 목회적 중요성을 더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기본적으로 세 가지 흐름-제사장, 예언자, 현자-속에 자리 잡고 있다("…우리에게는 율법을 가르쳐줄 제사장이 있고, 지혜를 가르쳐줄 현자가 있으며, 말씀을 전하여줄 예언자가 있다"[렘 18:18]).

(이른 시기의) 잠언과(늦은 시기의) 집회서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지혜가 건전한 상태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보여준다. 그 사이에 자리한 욥기와 전도서에서는 지혜의 타락에 대해 항의한다.

현자들이 입을 닫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도록 해야만 할 때가 있다.

욥기는 지혜를 거부하지 않는다. 사실 이 책은 지혜 운동 안에서 쓰였다. 이 책이 거부하는 것은 상투적인 글귀로 축소된 지혜, 성공 이야기로 선전하는 지혜다.

전도서는 "제자리를 아는" 지혜이기 때문이다. 코헬렛은 "지혜로울 뿐만 아니라"(12:9) 자신이 맡은 일의 중요성과 그 한계를 확실히 알고 교사와 율법학자로서 자신의 일에 임했다.

지식이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분리되지 않게 막는 유일한 방법은 예배의 신앙고백적 기초-신명기의 설교와 예배-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 안에서 선포하고 순종하는 성서로부터 나온다.

마음은 영원과 맞닿아 언제나 하나님의 존재의 신비를 알고자 애쓴다. 그런 마음은 단순한 대답만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고, 대답보다 훨씬 크신 하나님으로만 만족할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타자이시다. 기적은 하나님께는 우리가 우리의 모든 지식으로도 기대할 수 없었던 차원이 있다는 증거다

하나님이 자유로우신-자유롭게 새로운 일을 하시는-분이라고 말하는 유일한 방법은 기적을 믿는 것이다.

그분은 자연적인 원인과 결과라는 결정론적 창조에 구속을 받지 않으신다. 그분은 자신이 지으신 우주적인 기계 안에 갇혀 있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방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초월해 자유로우시다.

목회자는 기적을 행하시는-아픈 이들을 고치시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키시고, 길 잃은 자를 구원하시는-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북돋는 동시에 기적 자체에 대한 믿음-즉, 하나님이나 그분의 백성과의 인격적 관계로부터 분리된 채 초자연적인 것을 추구하는 태도-에 대해 경고하는 어려운 책무를 맡고 있다.

정말로 기적은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증거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성경적으로 기적의 기능은 현실을 깨뜨리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실존을 그 본질에 따라 바라보고, 우리가 큰 그림이라고 여겼던 표층적 일상의 이면을 보며, 감각 자료에 대한 우리의 완고한 고집이나 우리의 둔한 믿음 때문에 감춰져 있던 것을 우리 자신에게 드러나게 하고, 우리 삶을 인격적 사랑의 치유하고 구원하시는 궤도 안으로 점점 더 이끌려 들어가게 한다.

이사異事와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께 무조건적으로 헌신했던 이스라엘 역시 모든 기적의 세속화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했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인간과 하나님의 올바른 관계(겸손한 신뢰, 순종의 예배)는 그들의 예배에서 인간이 신께 압력을 가하는 수단으로 삼는 모든 마술적 행위를 배제함으로써 보존되었다

전도서에서는 기적을 조달하는 이들(마술사, 신접하는 자, 점쟁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모든 얼빠진 종교적 행위에 대한 신랄한 거부를 통해 그런 마술적 행위를 효과적으로 미리 차단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길을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의 길을 가기 위해서, 어떤 능력을 얻어 친구들을 감동시키기 위한 수단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분의 구원으로 우리를 영원히 감동시키시도록 그분께 우리를 맡겨드리기 위해서 그분께 나아간다.

야훼 신앙은 언약의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을 그 중심으로 삼는 예배 형태였다. 감정이 아니라 의지에 호소했다.

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응답하라는 부르심을 받을 때 인간의 합리적 지성이 각성되었다.

야훼 신앙에서는 무언가-사람들에게 섬기고 사랑하고 순종하고 책임 있게 행동하고 결단하라고 촉구하는 말-를 말했다.

이스라엘에서 예배는 제사장 혼자의 일이 아니었다. 그는 예언자와 함께 일했으며, 예언자적 말씀이 성전 예배와 결합되었다. 이스라엘이 성숙했을 때는 예언자적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예배를 지배했다.

이스라엘에서 예배는 절대로 부차적인 일이 아니었다. 예배는 인간 삶 전체를 관통하는 살아 있는 종교를 참되게 표현하고자 노력했으며 많은 부분에서 그렇게 하는 데에 성공을 거두었다.

예배는 개인적, 영적, 민족적 삶을 사로잡는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매개체로서 삶의 물질적인 측면(건물과 몸)까지 하나로 모았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예배를 시작하고 통제했지만, 감각을 통한 참여도 배제되지 않았다. 기도하며 무릎을 꿇고 엎드리는 신체적인 동작도 포함되었다. 거룩한 춤과 교창交唱으로 공동체의 연대를 표현했다.

아무리 풍성하고 다양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규정되고 통제되는 한 부분이었다. 그 어떤 행위도 그저 감각적 경험만을 위해 행하는 것은 없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라는 맥락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예배에 관해 이야기한다.

성경적 자료와 예전적 역사 속에서 예배는 개인이 경험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그것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와는 관계없이, 혹은 느낌의 여부와 관계없이 우리가 행하는 무언가다. 경험은 예배를 통해서 생겨난다.

이스라엘과 교회에서는 예배가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 그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촉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말씀은 권위 있고 분명하다.

하나님은 자신의 본성을 계시하시고 그에 대해 순종을 요구하셨다. 예배는 그 계시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것에 순종하는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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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삶의 공공적인 특징으로 미루어 볼 때, 말의 의미와 영향력은 이례적인 방식으로 증가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보다 교회 밖에 설교자들이 더 많습니다.

교회의 번영과 회중들의 모임에 이런 현상이 엄청난 위험이 된다는 것은 모순의 여지가 없습니다.

인쇄된 글이나 다른 곳에서 우리에게 전해지는 말이 어떤 영향을 끼친다 할지라도, 회중으로 모인 모임에서 우리에게 선포된 말씀 가운데 우리의 마음과 삶과 가족과 사회에 주어지는 복과는 결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오직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과 언약의 인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직 여기에서 우리는 성도의 교제, 죄의 용서 그리고 영생의 원리를 맛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다른 그 어떤 모임도 이 자리를 대체하거나 그 모임의 상실을 보상할 수 없습니다.

그 어떤 시대보다 우리 시대에, 주어진 은사를 소홀히 하지 말라는 거룩한 부르심이 복음 선포를 위해 허락된 말씀의 사역자들에게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모든 단순성과 진리와 권세가 자신들의 섬김을 통해 사람들의 양심에 적용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확실히 그리스도의 복음은 인간의 지혜에서 비롯된 멋진 장식과 효과적인 말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그 자체로 진실하고 아름답고 부요합니다.

그 영광의 풍성함 가운데 복음을 제시하고 성령과 권능의 증거로 말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훈련과 지속적인 노력, 그리고 충실한 헌신이 요구됩니다.

이 무기들을 숙련되게 사용한다면, 여러분의 능력은 배가될 것이고 영향력은 더 광범위해질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에 관계된 다른 모든 은사들은 더 강력하고 열정적인 표현으로 제시될 때 더욱 영광스럽게 될 것입니다.

말씀의 종 즉 하나님의 말씀의 종이라는 이름은 매우 영예로운 이름입니다

성경은 혀와 말의 거룩한 사용에 대한 의무를 강력하게 강조합니다.

말하기를 잘 하는 것은 단순히 강단이나 법정에서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과 사회적 품행에도 필요합니다.

성경은 이런 자연신론을 직접적으로 배격하고, 처음부터 만물의 원리를 맹목적인 충동의 무의식적인 힘이 아니라, 자의식적이며 인격적이며 독립적인 말씀에 둡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창조를 시작하실 때부터 하나님이 소유하신 지혜를 통하여, 곧 만물의 첫 열매(prwtotocoj thj ctisewj)이신 말씀을 통하여,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존재하도록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시고 또 재창조하십니다.

이 절대적이며 신적이며 근원적인 말씀의 능력을 보십시오. 다른 모든 말에서 나타나는 능력은 이 말씀에서 비롯되며, 바로 그 안에 이 능력의 기원과 형상이 있습니다.

말씀이 모든 피조물 중에 맏아들이시기 때문에, 또한 하나님의 피조세계 전체에 걸쳐 어떤 특정한 언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만물에는 인류가 이해할 수 있는 사상과 언어와 음성과 소리가 있습니다.

피조물의 발화는 세상 끝날까지 계속됩니다.

만물이 말을 합니다. 각각의 피조물들은 그 고유의 언어와 음성으로 말을 합니다. 피조 세계 전체가 웅변적(eloquent)입니다. 죄는 그 노래의 유일한 불협화음입니다.

인간이 피조 세계의 대표자이기에 피조적 언어의 정점은 인간에게서 발견됩니다. 만물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발자취를 보여줍니다. 그[인간]는 하나님의 형상인데 특히 그의 언어가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생명이요 빛이기 때문에 [그것은] 어떤 칼이나 폭력보다 강력한 힘입니다

말은 죽어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추상적인 상징도, 상투적인 소리도, 헛된 예술 작품도 아니요, 적극적인 이해를 통해 "수고롭고 부지런히" 추구됩니다.

오히려 그것은 다른 모든 생물들처럼 살아있고 열망하며 정화되고 성장하며 퇴보하고 아프며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로고스는 그의 존재 자체로부터 발생한 것이지, 아리안주의(Arianism)가 주장하는 것처럼 그의 의지로 인해 창조된 것이 아닙니다.

언어를 통해 우리는 그 사람, 곧 가장 깊고 내밀한 그의 존재를 보게 됩니다.

말을 통해 사람은 빛으로 발을 들여놓고 은밀함과 침묵에서 나와 자신을 나타냅니다

거기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정서가 형성되고 산관(birth canal)의 어둠 속에서 영과 혼의 자녀가 출생합니다.

이 무익하고, 무가치하며, 쇠약한 말, 곧 이 공허한 말(cenoi logoi)에 반대하여 성경은 우리에게 강력하게 경고하는 것이 있는데, 이는 우리가 모든 무익한 말을 해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형식에 대한 이러한 선호는 곧 거짓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이는 존재와 반대되는 것을 향한 사랑, 곧 공허한 무에 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인간적이라면, 거짓말은 사탄적입니다.

무익한 말의 근원은. 인간이 형식도 공허한 무도 다 탈피한 채 그저 표면적인 것만을 선호하는 데 있습니다.

말을잘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온전히 존재해야 합니다.

언어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웅변의 근원은 논리적인 지성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의지의 행동이나 결정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도리어 그의 마음에 있으며 생명이 흘러나오는 그의 정신에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웅변의 생명입니다.

"위대한 생각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Les grandes pensees viennent du coeur)입니다.

마음의 열정이 말에 임하게 되면 웅변이 태어날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양심이 감동을 받고 영혼의 생명의 파동이 너울거린다면, 우리 정신이 이끌려 활기를 띄며 기쁨으로 가득하게 된다면, 잠겨 있던 진정한 웅변술의 근원이 우리 안에서 열리게 될 것입니다.

깊은 내면의 감정이 연설의 원리입니다.

흔들리고 아연실색하는 그것이 바로 영혼의 감수성입니다.

둘째로 진정한 웅변술의 창조를 위해서는 강력한 감정 상태, 감동 받은 정신, 감명 받은 마음, 그리고 이러한 감정들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 부인할 수 없는 충동과 같은 것들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서기관으로서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권위 있는 자로서 말했습니다.

그들은 웅변적이었는데, 이는 그들 자신의 훈련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사에 의한 것이며, 고찰이나 연구가 아니라 영감을 통한 것이고, 사람의 부름이 아니라 신적 권위(droit divin)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들에게 웅변은 계획된 것이 아니라 본성이었고, 예술이라기보다는 은사였습니다.

여전히 웅변술은 단지 하나의 은사로만 취급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또한 예술입니다.

성경 말씀에 관한 한, 은사는 어떤 영역에서도 결코 간과될 수 없습니다. 은사는 기술을 요구하고 필요로 합니다

재능은 웅변을 탄생시키거나 그 흐름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하지만, 그것을 기쁨의 강으로 인도할 수는 있습니다

웅변은 "열정적인 이성"(la raison passionnee)이라고 올바르게 이름 지어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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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사역은 손님과 장사꾼들-자기 삶을 더 낫게 만들어줄 무언가를 찾겠다는 희망을 안고 찾아온 사람들과 삶을 더 낫게 만들어줄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고 약속하는 사람들-이 흥정하는 소리로 시끄럽게 붐비는 종교 장터 안에서 이뤄진다.

종교에 관한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은 자신이 찾고 있는 것을 목회자에게서 발견하려고 한다.

그 자체로 목회자는 선망의 대상이 되는 위치에 있다. 우리가 날마다 하는 일은 사람들이 영원에 대해 가장 개방적이며 그것을 가장 기대하는 곳에서 그들의 일상과 교차한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관련된 기대를 충족하고자 할 때 도움을 구하기 위해 우리만 찾아오는 것이 아님을 깨달을 때, 목회자로서 선망의 대상이 되는 위치에 있다는 자부심도 금세 사라져버린다.

어떤 목회자도 사람들의 관심을 독점하는 호사를 누리지 못한다

목회 사역은 모든 종류의 영적 기대가 목회자를 향하는(고무적인) 상황에서 이뤄진다.

우리는 사람들이 가장 근원적이며 친밀한 욕구를 가지고 우리에게 찾아오는 특권적인 위치에 있지만, 현란한 말로 유혹하고 엄청난 약속을 남발하는 다른 이들과 경쟁해야만 한다.

사람들의 기대(적어도 목회 사역이라는 통로를 통해 전달되는 그들의 기대)를 대략 살펴보면 크게 두 종류, 즉 기적과 응답으로 나눌 수 있다.

목회자가 그들의 경쟁자들이 제시하고 있는 것을 살펴볼 때도 그 대부분은 기적과 응답으로 분류해볼 수 있다. 수요·공급의 시장에서 원하는 것과 제공되는 것 사이에 이런 상관관계가 존재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수많은 사람들은 기적이나 응답을 주는 것이 목회자에게 맡겨진 책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주기를 거부해야만 하는 어색한 위치에 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서 그것을 받을 온전한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실망시킬 수밖에 없는 당혹스러운 위치에 있다.

우리는 적합한 기적을 위해 기도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권위 있는 응답을 선포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의 소명에 따르면 우리는 그럴 자격이 없다. 사실 그 소명에 따르면 우리는 절대로 기적이나 응답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이때는 평화와 어느 정도 번영을 누렸으며, 심각한 갈등이 약화됨에 따라 종교가 쇠퇴기에 접어들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전도서는 구약에서 가장 늦게 기록된 책 중 하나다. 당시 유대교의 상황을 감안할 때, 이 책은 우리가 그때의 추세라고 알고 있는 것에 이르는 자연스럽거나 명백한 결론이 아니다. 전혀 다른 것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도 있었다.

대신 우리에게 전해진 것은 코헬렛의 냉소적인 글이다. 그는 인본주의자들의 안이한 자기만족도 거부했고, 묵시론자들의 공포에 사로잡힌 집착도 거부했다.

너무나도 쉽게 장사를 할 수 있었고 지금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시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혀 새롭지 않은 재탕한 지혜에 대한 요구에도, 설익은 묵시에 대한 요구에도 영합하기를 거부했다.

전도서는 세례 요한류의 책이다. 이 책은 식사가 아니라 목욕의 기능을 한다. 이 책은 양분이 아니라 정화다. 이 책은 회개다. 더러운 것을 제거한다.

목회자는 환상과 감상을, 우상숭배적인 관념과 질릴 정도로 달콤한 감정을 닦아내고 깨끗해지기 위해 전도서를 읽는다

이 책은 목회자를 경유해 하나님을 향하는 모든 오만하며 주제넘은 기대를 폭로하고 거부한다.

코헬렛은 "하나님 앞에 백성을 불러 모으는 사람"인 셈이다

목회 사역의 특징 중 하나는 인격적인 하나님과 성숙하고 인격적인 관계를 계발하는 것, 신학의 창백한 추상적 관념을 제자도의 인격적 실례로 번역해내는 것이다

저자가 스스로 자신의 직책을 밝히고 있다는 사실과 그의 직책이 공적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그가 유대교 주류에서 속한 사람으로서 일했다고 가정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코헬렛이 직면한 문제는 종교적 쓰레기와 신학적 폐기물 때문에 그 주류가 막혀서 흐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틀림없이 그의 목소리는 소수의 목소리였지만, 그 목소리는 주류에서 나온 목소리였다. 그는 어떤 인간적 체계 안으로도 흡수될 수 없는 신적 타자성의 충실한 수호자로 남아 있다.

성서문학의 주류는 하나님의 ‘예’로 특징지을 수 있다. 어쩌면 이 말은 다른 어떤 말보다 복음의 메시지를 더 잘 표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예’라고 말씀하신다. 인간은 ‘예’라고 응답한다.

목회 사역이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삶의 상황 속에서 복음의 ‘예’를 반복하고 믿음의 ‘예’로 응답하도록 격려하는 일이다.

그분은 확실하시고, 신실하시고, ‘예’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아멘’이시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멘,’ 즉 믿음 안에서 살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예’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예’라고 말하고, 그리하여 그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시는 긍정적인 방식으로 그분과 관계를 맺으라고 배운다.

거짓으로 종교 행세를 하려 들면서 터무니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예’를 반복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뿌리가 깊은 ‘예’이자, 긍정하시는 하나님과 응답하는 사람 사이의 성서적 사귐 안에서 유기적으로 생동하는 ‘예’이어야 한다.

선전을 목적으로 사용된 목회적 열정은 하나님의 ‘예’의 예리한 날을 무디게 만든다. 목회자는 홍보산업에서 배울 것이 거의 없으며, 오히려 그것에 대해 크게 두려워해야 한다.

성경적 ‘예’인 아멘은 언제나 하나님, 즉 사람들을 지으시고 영원한 목적과 구속의 사랑 안에 그들을 든든히 품어주시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사용된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맡겨주신 책무를 받아들이겠다고 분명히 말하고 싶을 때 ‘아멘’이라고 말한다.

‘아멘’이라는 말은 개인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무언가 내면적이고 사적인 것에 대해 응답하고자 할 때 사용된다.

‘아멘’이 공적인 연도連禱와 예배의 찬양을 통해 개인적인 고백을 하기 위해 사용될 때 이 말은 기도와 찬양의 내용을 확증한다.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예’를 포괄적인 예배의 행위 안으로 집약시키는 케리그마적 사건은 장막절이었다.

가장 긍정적인 축제 기간 중에 다섯 두루마리 중에서 가장 부정적인 책을 읽어야 했다. 장막절과 전도서를 한데 묶었다는 것은 분명히 목회적인 선택이다.

영적으로 기운을 북돋는 말투로 말하면 무슨 말이든 복음이 된다는 순진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좋아질 것이라고 말하며 응원의 말을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적 안내자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향해, 목회자는 초자연적 복음을 긍정하고 하나님의 ‘예’를 반복해야 한다.

하지만 사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고 말하는 모든 것이 좋은 것은 아니다. 그저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기만 하면 일어나는 모든 일이 괜찮아지는 것이 아니다.

장막절의 따뜻한 축복에 대해 찬양할 때마다 전도서의 차가운 지혜를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어려운 문제를 기피하고 최악의 고통에 눈을 감는 쾌활하지만 무책임하고 냉담한 태도에 맞서야 한다.

코헬렛은 하나님의 편에 있을 때 모든 어려움을 해결하는 안락한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순진한 낙관론에 도전하고, 편리한 기적에 대한 줄기찬 기대에 맞섬으로써 이러한 목회적 기능을 수행한다.

코헬렛은 창조주가 모든 것을 그때에 맞게 아름답게 만드셨으며 인간의 마음속에 영원을 심어놓으셨으므로 인간은 내적으로 그분과 결합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어떤 것이든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이라는 맥락에서 억지로 떼어낼 때 그것은 본질을 잃어버리고 만다

하나님 아니면 무(헤벨)이다. 어떤 생각도, 어떤 느낌도, 어떤 진리도, 어떤 즐거움도 그 자체로 존재할 수는 없다.

사람들이 하나님 없는 종교를 만들려고 하고 믿음 없이 온전함을 이루려고 하는 한, 코헬렛의 사역은 계속되어야 한다.

목회 사역은 손님과 장사꾼들-자기 삶을 더 낫게 만들어줄 무언가를 찾겠다는 희망을 안고 찾아온 사람들과 삶을 더 낫게 만들어줄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고 약속하는 사람들-이 흥정하는 소리로 시끄럽게 붐비는 종교 장터 안에서 이뤄진다.

종교에 관한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은 자신이 찾고 있는 것을 목회자에게서 발견하려고 한다.

그 자체로 목회자는 선망의 대상이 되는 위치에 있다. 우리가 날마다 하는 일은 사람들이 영원에 대해 가장 개방적이며 그것을 가장 기대하는 곳에서 그들의 일상과 교차한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관련된 기대를 충족하고자 할 때 도움을 구하기 위해 우리만 찾아오는 것이 아님을 깨달을 때, 목회자로서 선망의 대상이 되는 위치에 있다는 자부심도 금세 사라져버린다.

어떤 목회자도 사람들의 관심을 독점하는 호사를 누리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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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자녀들, 그리고 친구, 혹은 동네 사람들을 수호하고 자기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 P53

충동적으로 행동하거나 광분하지도 말고 주변 사람들의 자유의지를 대변하고 차분히 미래를 관망하며 신중한 결정을 내릴 때 그 가치를 인정받고 존경받을 수 있다. - P53

화라는 감정은 복수를 향한 뜨거운 격정보다 강렬하다. 그 때문에 화라는 감정에 쉽게 휘둘려서는 안 된다. - P53

우리도 긴 호흡을 유지하며 끝없이 밀려오는 끈질긴 악덕에 맞서야 한다. 악덕을 뿌리 뽑기 위해서가 아니다. 어떻게든 사악한 격정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 P101

너무 마음이 약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잔인해도 안 된다. 전자는 지나치게 중심이 없고 후자는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다. 현명한 사람은 중도를 유지해야 한다. 강력한 힘이 필요할 때는 화의 도움을 구하지 말고 씩씩하게 대처해야 한다.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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