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 사역은 손님과 장사꾼들-자기 삶을 더 낫게 만들어줄 무언가를 찾겠다는 희망을 안고 찾아온 사람들과 삶을 더 낫게 만들어줄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고 약속하는 사람들-이 흥정하는 소리로 시끄럽게 붐비는 종교 장터 안에서 이뤄진다.
종교에 관한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은 자신이 찾고 있는 것을 목회자에게서 발견하려고 한다.
그 자체로 목회자는 선망의 대상이 되는 위치에 있다. 우리가 날마다 하는 일은 사람들이 영원에 대해 가장 개방적이며 그것을 가장 기대하는 곳에서 그들의 일상과 교차한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관련된 기대를 충족하고자 할 때 도움을 구하기 위해 우리만 찾아오는 것이 아님을 깨달을 때, 목회자로서 선망의 대상이 되는 위치에 있다는 자부심도 금세 사라져버린다.
어떤 목회자도 사람들의 관심을 독점하는 호사를 누리지 못한다
목회 사역은 모든 종류의 영적 기대가 목회자를 향하는(고무적인) 상황에서 이뤄진다.
우리는 사람들이 가장 근원적이며 친밀한 욕구를 가지고 우리에게 찾아오는 특권적인 위치에 있지만, 현란한 말로 유혹하고 엄청난 약속을 남발하는 다른 이들과 경쟁해야만 한다.
사람들의 기대(적어도 목회 사역이라는 통로를 통해 전달되는 그들의 기대)를 대략 살펴보면 크게 두 종류, 즉 기적과 응답으로 나눌 수 있다.
목회자가 그들의 경쟁자들이 제시하고 있는 것을 살펴볼 때도 그 대부분은 기적과 응답으로 분류해볼 수 있다. 수요·공급의 시장에서 원하는 것과 제공되는 것 사이에 이런 상관관계가 존재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수많은 사람들은 기적이나 응답을 주는 것이 목회자에게 맡겨진 책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주기를 거부해야만 하는 어색한 위치에 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서 그것을 받을 온전한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실망시킬 수밖에 없는 당혹스러운 위치에 있다.
우리는 적합한 기적을 위해 기도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권위 있는 응답을 선포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의 소명에 따르면 우리는 그럴 자격이 없다. 사실 그 소명에 따르면 우리는 절대로 기적이나 응답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이때는 평화와 어느 정도 번영을 누렸으며, 심각한 갈등이 약화됨에 따라 종교가 쇠퇴기에 접어들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전도서는 구약에서 가장 늦게 기록된 책 중 하나다. 당시 유대교의 상황을 감안할 때, 이 책은 우리가 그때의 추세라고 알고 있는 것에 이르는 자연스럽거나 명백한 결론이 아니다. 전혀 다른 것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도 있었다.
대신 우리에게 전해진 것은 코헬렛의 냉소적인 글이다. 그는 인본주의자들의 안이한 자기만족도 거부했고, 묵시론자들의 공포에 사로잡힌 집착도 거부했다.
너무나도 쉽게 장사를 할 수 있었고 지금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시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혀 새롭지 않은 재탕한 지혜에 대한 요구에도, 설익은 묵시에 대한 요구에도 영합하기를 거부했다.
전도서는 세례 요한류의 책이다. 이 책은 식사가 아니라 목욕의 기능을 한다. 이 책은 양분이 아니라 정화다. 이 책은 회개다. 더러운 것을 제거한다.
목회자는 환상과 감상을, 우상숭배적인 관념과 질릴 정도로 달콤한 감정을 닦아내고 깨끗해지기 위해 전도서를 읽는다
이 책은 목회자를 경유해 하나님을 향하는 모든 오만하며 주제넘은 기대를 폭로하고 거부한다.
코헬렛은 "하나님 앞에 백성을 불러 모으는 사람"인 셈이다
목회 사역의 특징 중 하나는 인격적인 하나님과 성숙하고 인격적인 관계를 계발하는 것, 신학의 창백한 추상적 관념을 제자도의 인격적 실례로 번역해내는 것이다
저자가 스스로 자신의 직책을 밝히고 있다는 사실과 그의 직책이 공적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그가 유대교 주류에서 속한 사람으로서 일했다고 가정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코헬렛이 직면한 문제는 종교적 쓰레기와 신학적 폐기물 때문에 그 주류가 막혀서 흐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틀림없이 그의 목소리는 소수의 목소리였지만, 그 목소리는 주류에서 나온 목소리였다. 그는 어떤 인간적 체계 안으로도 흡수될 수 없는 신적 타자성의 충실한 수호자로 남아 있다.
성서문학의 주류는 하나님의 ‘예’로 특징지을 수 있다. 어쩌면 이 말은 다른 어떤 말보다 복음의 메시지를 더 잘 표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예’라고 말씀하신다. 인간은 ‘예’라고 응답한다.
목회 사역이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삶의 상황 속에서 복음의 ‘예’를 반복하고 믿음의 ‘예’로 응답하도록 격려하는 일이다.
그분은 확실하시고, 신실하시고, ‘예’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아멘’이시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멘,’ 즉 믿음 안에서 살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예’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예’라고 말하고, 그리하여 그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시는 긍정적인 방식으로 그분과 관계를 맺으라고 배운다.
거짓으로 종교 행세를 하려 들면서 터무니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예’를 반복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뿌리가 깊은 ‘예’이자, 긍정하시는 하나님과 응답하는 사람 사이의 성서적 사귐 안에서 유기적으로 생동하는 ‘예’이어야 한다.
선전을 목적으로 사용된 목회적 열정은 하나님의 ‘예’의 예리한 날을 무디게 만든다. 목회자는 홍보산업에서 배울 것이 거의 없으며, 오히려 그것에 대해 크게 두려워해야 한다.
성경적 ‘예’인 아멘은 언제나 하나님, 즉 사람들을 지으시고 영원한 목적과 구속의 사랑 안에 그들을 든든히 품어주시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사용된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맡겨주신 책무를 받아들이겠다고 분명히 말하고 싶을 때 ‘아멘’이라고 말한다.
‘아멘’이라는 말은 개인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무언가 내면적이고 사적인 것에 대해 응답하고자 할 때 사용된다.
‘아멘’이 공적인 연도連禱와 예배의 찬양을 통해 개인적인 고백을 하기 위해 사용될 때 이 말은 기도와 찬양의 내용을 확증한다.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예’를 포괄적인 예배의 행위 안으로 집약시키는 케리그마적 사건은 장막절이었다.
가장 긍정적인 축제 기간 중에 다섯 두루마리 중에서 가장 부정적인 책을 읽어야 했다. 장막절과 전도서를 한데 묶었다는 것은 분명히 목회적인 선택이다.
영적으로 기운을 북돋는 말투로 말하면 무슨 말이든 복음이 된다는 순진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좋아질 것이라고 말하며 응원의 말을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적 안내자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향해, 목회자는 초자연적 복음을 긍정하고 하나님의 ‘예’를 반복해야 한다.
하지만 사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고 말하는 모든 것이 좋은 것은 아니다. 그저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기만 하면 일어나는 모든 일이 괜찮아지는 것이 아니다.
장막절의 따뜻한 축복에 대해 찬양할 때마다 전도서의 차가운 지혜를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어려운 문제를 기피하고 최악의 고통에 눈을 감는 쾌활하지만 무책임하고 냉담한 태도에 맞서야 한다.
코헬렛은 하나님의 편에 있을 때 모든 어려움을 해결하는 안락한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순진한 낙관론에 도전하고, 편리한 기적에 대한 줄기찬 기대에 맞섬으로써 이러한 목회적 기능을 수행한다.
코헬렛은 창조주가 모든 것을 그때에 맞게 아름답게 만드셨으며 인간의 마음속에 영원을 심어놓으셨으므로 인간은 내적으로 그분과 결합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어떤 것이든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이라는 맥락에서 억지로 떼어낼 때 그것은 본질을 잃어버리고 만다
하나님 아니면 무(헤벨)이다. 어떤 생각도, 어떤 느낌도, 어떤 진리도, 어떤 즐거움도 그 자체로 존재할 수는 없다.
사람들이 하나님 없는 종교를 만들려고 하고 믿음 없이 온전함을 이루려고 하는 한, 코헬렛의 사역은 계속되어야 한다.
목회 사역은 손님과 장사꾼들-자기 삶을 더 낫게 만들어줄 무언가를 찾겠다는 희망을 안고 찾아온 사람들과 삶을 더 낫게 만들어줄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고 약속하는 사람들-이 흥정하는 소리로 시끄럽게 붐비는 종교 장터 안에서 이뤄진다.
종교에 관한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은 자신이 찾고 있는 것을 목회자에게서 발견하려고 한다.
그 자체로 목회자는 선망의 대상이 되는 위치에 있다. 우리가 날마다 하는 일은 사람들이 영원에 대해 가장 개방적이며 그것을 가장 기대하는 곳에서 그들의 일상과 교차한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관련된 기대를 충족하고자 할 때 도움을 구하기 위해 우리만 찾아오는 것이 아님을 깨달을 때, 목회자로서 선망의 대상이 되는 위치에 있다는 자부심도 금세 사라져버린다.
어떤 목회자도 사람들의 관심을 독점하는 호사를 누리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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