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당신에게
변지영 지음, 윤한수 사진 / 카시오페아 / 2014년 12월
평점 :
절판





무기력과 우울의 원인은 다양할 것이다.

저자는 그 원인을 목적론적 사고라고 한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많은 사람들은 

수고에 따른 보상을 기대한다는 것이다. 


더욱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보는 것.

그것이 철학이 가진 힘이다.


이 책은 스토아 철학을 통해 

본질적 물음에 답하려고 한다.


특히 스토아학파의 후기를 이끈

세네카, 에픽테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주목한다. 


짧은 문장들 가운데 지혜를 발견한다.

그러한 지혜는 우리를 넓고 깊게 한다.


지혜자들은 말한다.

많은 문장의 핵심은 이것이 아닐까?


타인의 언행에 자신을 맡기지 말고,

상황에 잠식되지 말자.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딩 2021-03-24 1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표지보고 예감은 츨리지 않는다 인줄 알았어요 ㅎㅎ

모찌모찌 2021-03-24 11:12   좋아요 1 | URL
분위기가 진짜 비슷하네요^^
 
[전자책] 목회의 기초 유진 피터슨의 목회 멘토링 2
유진 피터슨 지음, 박세혁 옮김 / 포이에마 / 201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유진 피터슨의 목회멘토링 시리즈 마지막 세 번째 책.



변화무쌍한 세상 가운데

복음을 전하고 공동체를 세워가기 위한  목회는 어떠해야 하는가?



저자는 아가, 룻기, 예레미야애가, 전도서, 에스더서를 통해 

목회 사역의 다섯 가지 기초석을 소개한다.



유진 피터슨은 위의 다섯 책이 유대교의 절기에 낭독됨에 주목한다.

각각 유월절, 오순절, 아브월 9일, 장막절, 부림절이다.



현대인들에게 위의 책들이 관심받지 못할 수도 있지만,

저자는 다섯 책을 통해 목회의 본질과 기초를 세울 수 있다 주장한다.



이 책을 통해 목회자들은 다른 여러 방법을 일단 내려놓고,

다시금 성경으로 돌아가는 결단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나님은 공동체 안에서 일하신다. 그 말은 곧 성경적 종교는 언제나 어디서나 공동체의 일을 다룬다는 뜻이기도 하다.

성경적 근원에서 유래한 목회 사역 역시 공동체의 일이다.

구원을 경험하고 신앙을 표현하는 것은 언제나 공동체the qahal 안으로부터다

공동 예배와 공동의 지도력이 존재했다.

환경도 중요하고, 문화도 중요하고, 역사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결정적이지는 않다. 신앙 공동체는 언제나 불신앙의 환경 속에서 존재한다

그러나 환경은 하나님 백성의 존재를 설명할 수도 없고 무시할 수도 없다.

그런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신실함, 순종, 종으로 섬기는 자세, 기도다.

목회자는 사회의 세속화에 대해 경계할 필요가 있지만, 그것에 대해 절대로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세속화는 하나님 백성의 실존을 위협하지 않는다.

장소와 시간은 결정적이지 않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공동체를 이해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은 사회학이 아니라 신학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문화가 아니라 은총에 의해 구성되고 보존된다는 뜻이다.

그들이 모이는 진정한 이유는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셨기 때문이다.

목회자들은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님이 보존하시는 사람들의 모임 안에서 지도자의 역할을 맡은 사람이다.

반드시 목회자는 회중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이 만드신 역사적 공동체로, 결점까지도 그대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반드시 교회에 대해 있는 그대로, 결점까지도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에 관해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그들이 거기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존재한다.

그들이 존재하는 것은, 제국 안의 호의적인 상황 때문이 아니라, 교회가 시장에 제공할 수 있는 특정하게 인지된 필요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무로부터 그들을 부르셔서 백성으로 삼으셨기 때문이다(호 1:10)

그러므로 목회자가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를 위해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찬양이다. 불평이나 도덕주의나 불안함이나 지식이 아니라 감사다. 부림절, 살아남은 것을 기뻐하며 하닷사인 신앙 공동체를 하나님께 바치는 축제.

내 몸에 걸친 쇠붙이는 나를 당당하게 보이게 만들겠지만, 내 일을 제대로 하도록 도와주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성경라는 개울에 무릎을 꿇고,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이 오래전부터 준비해오신 것 중에서 매끄러운 돌멩이들을 골라낸다. 거친 모서리는 깎였다. 쓸데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군더더기도 전혀 없다. 깨끗하고 말끔하다. 나한테는 성경이 그렇다. 본질적이며 필수적이다. 이제 나는 거대한 혼돈에서 해방되어 다시 가볍게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타인과 화목하게 지내지 못해서 불행해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실은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과 화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도 불화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 P25

아무리 이렇게 저렇게 애를 써도 우리 인생에서 상처를 일으키는 사건을 완벽하게 차단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위로가 되는 것은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다는 사실이다. 상처를 일으키는 사건을 나와 관련된 문제로 받아들이고 마음이 상할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를 선택할 권리는 전적으로 나에게 있다는 말이다. - P29

마음을 상하게 하는 상황에서 처음 우리가 느끼는 것은 ‘상처‘가 아니라 ‘상처를 받은 것 같은 느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얼마든지 ‘그 느낌‘을 상처로 남길 수도 있고 상대의 문제로 되돌려 줄 수도 있다. - P33

더 나은 나, 더 나은 사람은 다른 멋진 누군가가 되려고 노력해야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 P43

오직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찾으려고 노력할 때 가능한 일이다. - P43

밝은 표정, 긍정적인 마음, 실수해도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는 힘, 새로운 것에 주저하지 않고 뛰어드는 모험심, 낯선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네는 자신감은, 나는 충분히 소중한 존재라는 당당한 자존감이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되고 싶은 사람도 그런 사람이 아니던가. - P43

분노와 비난, 한탄은 그 어떤 문제도 해결해 주지 않는다. ‘어떻게 그가 나에게 이럴 수 있지?‘라는 질문 대신 자신의 내면을 바라볼 때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능력도 가질 수 있다. - P83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차별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는 사실이다. - P9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앙 공동체를 이끄는 일에 관한 성경적 지침을 찾고자 할 때 목회자들은 에스더서에 주목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 책에서는 생존 대 멸망이라는 단호하고도 단순한 관점에서 하나님 백성의 본질과 기능이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의 존재는 삶의 모든 양상을 고양시키며, 거기에 더 깊은 색과 새로운 현실을 부여했다. 사람들은 그런 위기의 상황에서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기적임을 깨닫게 된다.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에 직면했던 사람들은 더 열정적으로 살아간다. 공동체는 역사적 관점에서 설명할 수 없고, 사회학적 관점에서 분석할 수 없다. 공동체는 축제의 언어와 의례, 음식과 웃음을 통해 누릴 수 있을 뿐이다.

신앙 공동체가 살아남은 이야기를 들려주며 해마다 부림절에 이를 기념하라고 명령하는 에스더서는 찬양을 통해 하나님이 공동체를 만드시고 다스리시고 보존하시는 맥락을 규정하는 목회 사역을 위한 중요한 문서로 남아 있다.

여기서 기쁨이란 한 사람이 행운을 누린 것에 대한 기쁨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속에 공동체가 참여한 것에 대한 기쁨이다.

구원은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적이다. 공동체성 안에서, 그것 때문에 기쁨이 있다. 기쁨은 사적인 감정이 아니다. 기쁨을 드러내고 표현할 공동체가 필요하다. 그리고 하나님이 공동체를 주시고 보존하시기 때문에 그 반응은 하나님 안에서의 기쁨이다.

하나님 안에 있는 그 근원으로부터 단절된 기쁨, 신앙 공동체를 떠나서 누리려고 하는 기쁨은 그저 감각적 흥분이 되고 만다.

고통의 경험을 하나님과 분리시키기 쉬운 것처럼, 기쁨의 경험도 하나님과 분리시키기가 쉽다. 전자의 결과가 쓰라림이라면, 후자의 결과는 지루함-권태-이다.

공동체라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과 공동체라는 억누를 수 없는 잔치라는 두 주제는 이야기와 축제 안에 서로 얽혀 있다. 공동체의 생존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기쁜 축제를 벌인다.

만약 축제가 이야기로부터 단절된다면, 즉 만약 경축하려는 노력이 경축할 이유로부터 분리된다면, 잔치는 삶을 그 자체로 경축하는 것으로, 생명력에 대한 찬양으로 금세 변질되고 만다.

에스더서를 공동체의 이해와 표현을 위한 근거로 삼을 때 목회 사역은 한편으로는 엄격함을 강요하는 전체주의적 태도를, 다른 한편으로는 누구나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무정부주의적 무정형성을 피할 수 있다.

에스더서와 부림절은 하나님이 창조하고 구속하신 공동체의 삶이라는 그분의 선물을 자유롭게 나누고 교환하는 사람들의 축제적인 현존을 드러내는 본보기를 제공한다.

그들은 이야기를 하며 예배하고 찬양하고 제사를 드리고 노래하고 말씀을 선포하고 기도했다.

이 모든 것을 통해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부르심과 다스리심에 의해 형성된, 영적으로 독특하며 공동체적인 실체(인종이 아니라, 정치적 집단이 아니라, 문화가 아니라)임을 계속해서 지각하고 있었다.

이들의 공동체적 삶의 형식은 바뀌었다. 이집트에서 그들은 노예였고, 시내산에서는 난민이었으며, 가나안에서는 느슨히 결합된 부족들이었고, 화려하고 강력한 군주정을 이루기도 했으며, 내전을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자 아브라함의 자손이었으며, 비록 희미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실례였고, 이 땅의 민족들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복을 빌" 수단이었다.

수산의 유대인 공동체에서는 최악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했다는 기록조차 없다. 두 곳 모두 칭찬할 만한 공동체는 아니었다. 그러나 두 곳의 존재는 모두 역사적 사실이다. 이런 결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역경을 딛고 신앙 공동체가 살아남았다는 증거다.

어디에서나 언제나 신앙 공동체는 성령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이 하나로 부르시고, 하나님이 하나로 지켜주시고, 하나님의 은총에 살아남을 한 무리의 사람들로 이해할 것이다. 함께 종교적인 사람들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로 이해하지 않을 것이다.

크기는 도덕적 자질이 아니다. 그것은 주어진 것이다. 그것은 거기 있는 것이다. 목회자들이 일하는 환경의 일부다. "목회자가 선을 행하기 어려운 불모의 시대에 태어난 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다."

목회자는 자신의 문화를 선택할 수 없다. 우리가 섬기는 회중의 크기는 우리가 어떤 시대에 태어났는가, 그 시대에 지도자의 자질 중 어떤 것이 유행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분노나 친절함 중 어느 쪽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대로 전달하는가에 상관없이, 어떤 시대에는 분노에 찬 설교가 호응을 얻는 반면, 다른 시대에는 친절한 설교가 호응을 얻는다. 이런 변수는 변덕스럽기로 악명이 높기 때문에, 목회 사역을 할 때 선전의 기법을 능숙하게 활용하는 것보다 영적, 성경적 정직성이 훨씬 더 중요하며, 광고 전략보다 섭리의 교리가 더 중요하다.

목회 사역에서 신앙 공동체를 이끄는 일보다 더 펠라기우스주의적인 경향에 빠지기 쉬운 일은 없다. 강단에서는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구원을 얻는다고 신실하게 설교하지만, 주중에는 일상생활에 성급하고 불안하고 열광적인 마음을 은근히 심어주고 복음의 메시지를 망가뜨린다.

명백한 성경적 진실은, 신앙 공동체가 37명이든 3천 7백 명이든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각 사람이 영원한 가치를 지니며, 은총과 사랑 안에서 자라기 위해 몇몇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

목회자의 책무는, 기도를 이끌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성령의 능력과 은사를 나누어 사역이 이뤄지게 함으로써 37명이든(만약 그들이 그런 교회를 섬기고 있다면) 3천 7백 명이든(만약 그것이 그 자리라면) 그들이 자라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한스 큉Hans Kung에 따르면, 성경에서는 "처음부터 실천해야만 하는 교회에 대한 교리를 규정하지 않는다. 성경은 교회라는 실체로부터 시작하며, 그에 관한 반성은 나중에 따라온다. 이상적인 교회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다."

하나님의 행위에 의해 이미 거기에 있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는 평범한 목회적 언어는 가정법이 아니라 직설법을 취해야 한다. 즉, 도덕주의적으로 온갖 노력을 다함으로써 우리가 되어야 할 이상적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은총으로 창조하신 공동체를 다룬다.

실제로, 그 수가 크게 줄고 뿔뿔이 흩어져 있었지만 그들은 이교적 권력과 문화와 종교 속으로 흡수되어 사라져버리지 않았다. 그들은 살아남았다. 은총으로. 제국帝國은 그렇지 못했다.

모든 교회 공동체는 아무리 작더라도, 아무리 경건이 부족하더라도, 아무리 일을 제대로 못하더라도-계시록의 일곱 교회를 생각해보라!-기적적이며 소중한 선물이며, 아무리 보잘것없고 결함이 있더라도 하나님 나라의 한 예다.

한스 큉Hans Kung에 따르면, 성경에서는 "처음부터 실천해야만 하는 교회에 대한 교리를 규정하지 않는다. 성경은 교회라는 실체로부터 시작하며, 그에 관한 반성은 나중에 따라온다. 이상적인 교회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다."

하나님의 행위에 의해 이미 거기에 있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는 평범한 목회적 언어는 가정법이 아니라 직설법을 취해야 한다. 즉, 도덕주의적으로 온갖 노력을 다함으로써 우리가 되어야 할 이상적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은총으로 창조하신 공동체를 다룬다.

실제로, 그 수가 크게 줄고 뿔뿔이 흩어져 있었지만 그들은 이교적 권력과 문화와 종교 속으로 흡수되어 사라져버리지 않았다. 그들은 살아남았다. 은총으로. 제국帝國은 그렇지 못했다.

모든 교회 공동체는 아무리 작더라도, 아무리 경건이 부족하더라도, 아무리 일을 제대로 못하더라도-계시록의 일곱 교회를 생각해보라!-기적적이며 소중한 선물이며, 아무리 보잘것없고 결함이 있더라도 하나님 나라의 한 예다.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적에 대한 언급은 반대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 민감해지고 그 반대의 본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어디든지 하나님의 백성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적들이 있다.

성경을 가르치고 선포해야 하며, 기도를 드려야 하고, 심방을 해야 하며, 성례전을 집례해야 하고, 상담을 하며, 예배를 인도해야 한다.

목회자는 그에게 주어진 일을 해야 한다. 목회자는 신앙 공동체를 세우는 사역에 관여하는 유일한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해야 할 목회적 사역이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목회 사역을 전문가답게 철저하게 수행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사역을 최대한 면밀하게 정의해야 한다.

필요한 것은 겸손과 목회적 소명에 따라 기꺼이 일하려는 자세, 전쟁의 주인이신 주님이 뜻하는 곳에서 뜻하시는 때에 그분의 종들을 알맞게 사용하실 것이라고 신뢰하는 믿음이다.

공동체의 지도자로서의 지위를 활용해 자신의 무너진 자아를 떠받치려고 하는 목회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신뢰를 배신하고 동료와 후임자들의 일을 두 배, 세 배로 어렵게 만든다.

통계적인 찬사는 신실함과 아무 상관이 없다. 공적으로 유명해지는 것은 순종과 아무 상관이 없다.

목회자에게 모르드개가 중요한 까닭은 그가 보여준 지도력 때문이다. 즉,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섬길 것인지에 관한 모범이 되기 때문이다.

그의 지도력은 그의 사람됨으로부터 나왔다. 그는 지도자가 되기 위해 스스로 나서지 않았다. 그는 지도자의 자리에 오르기를 열망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유다 사람"이었다. 그 정체성 안에서 일관성을 유지하며 살고 그에 따른 의무를 이행함으로써 그는 지도자의 역할을 다했다.

모르드개에게 지도력이란 자기주장이나 자아실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며 그 전통적 정체성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오는 모든 것을 행하는 것이었다.

이방 땅에서 살아남은 디아스포라 신앙 공동체의 이야기를 할 때, 지도력의 본보기는 평범하고 겸손한 종이었다.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의 생존과 성장, 양육의 문제-이것은 목회자에게 맡겨진 책무이기도 하다-에 관한 한 종의 모습이 지도력의 모범이 된다.

사역에 관해 성숙해가고자 할 때 목회자들은 의도적으로 종의 형식을 택해야 한다.

목회자들은 섬김의 사역에서 지속적으로 재훈련을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안수를 받고 권위 있는 지위를 갖게 될 때, 그 권위를 제국주의적인 방식으로 행사하고 초대하기보다는 명령을 내리고 교만한 자세를 취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종들은 묵묵히 정중하게 열심히 자기 일을 한다.

종의 역할은 예수님 안에서 완성되었다. 세상이 존엄한 왕을 맞이할 준비를 하도록 그분의 탄생 이전에 그리고 탄생과 더불어 복된 징조가 존재했지만, 예수님은 가장 겸손한 모습으로 가난한 농부 부모에게서, 보잘것없는 마을에서, 가장 초라한 건물 안에서 태어나셨다.

예수님에 관해서는 모든 것이 종의 모습을 말해준다. 만약 예수님이 우리가 지도력의 모범으로 삼아야 할 분이라면, 목회자들은 이 형식을 결코 피할 수가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