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에게 사랑받고, 칭찬받고, 존중받고 싶다면 자기 자신을 먼저 사랑하고, 칭찬받고, 존중해야 한다. - P134

신뢰와 사랑이 넘치는 관계는 자기 자신을 믿기 전에는 만들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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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변술 그 자체는 무엇이며, 그 본질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습니까? 저는 그 본질이 사람들의 지성에 확신을 주고, 양심을 두드리며, 의지에 설득력 있게 영향을 끼치는 말의 기술과 능력에 의해 발전하는 은사라고 묘사하는 데 아무런 이의가 없습니다.

웅변이 유창한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잘 알아야 하기에, 탄탄한 지식을 소유해야 하며 청중들이 이해하도록 설득력 있게 납득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우리에게 웅변술과 철학 혹은 웅변술과 학문 사이의 연관성으로 안내합니다

그는 논점만 제시해서는 안 되고 그것을 설명해야 하며, 이 설명이 사람들의 양심을 두드리게 해야 합니다. 이는 웅변술과 시문학 사이에 긴밀한 연관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청중들의 의지를 설득하고 움직여야 합니다. 이는 또한 웅변술과 덕목 사이의 상관성을 보여줍니다.

말이 웅변이 되기 위해서는 전인격으로부터 나와야 하며 그 말은 화자의 형상과 모양을 나타내야 합니다.

우리의 경우 피조적인 방식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말씀으로 자기 형상을 따라 만물을 창조하시고 재창조하시는 우리 주 하나님의 경우와 다르지 않습니다.

웅변술은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에 대한 온전한 지식을 요구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웅변가가 그의 말의 아름다움으로 청중을 이기려 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증거로 청중을 설득해야 하고 순간적인 성공을 좇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플라톤은 말을 통해 영혼을 인도하는 것(yucagwgia tij dia logwn)으로 참된 웅변술을 정의했습니다.

거창한 목소리, 불타오르는 말, 사람을 끌어들이는 어조, 공허한 문장들, 아첨하는 용어들은, 그 결핍된 것을 견실하고 실제적인 연구를 통해 보완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의 종은 반드시 선포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확신으로 그는 성경이 실제로 말하는 것 외에 무언가를 성경의 입에 두는 것을 가장 강한 표현으로 금지하기 때문에, 이는 더욱 주목할 만합니다.

설교단에서와 마찬가지로 회의실이나 법정에서 이와 유사한 어법에 맞서기 위한 효과적인 치료약은 단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바로 열심히 연구하고 확고한 지식을 갖추며 참된 학문을 배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말씀의 신성함에 대한 확신이 없는 만큼, 우리의 설교는 영향력과 힘을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그저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한 어떤 견해들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며 근본적으로 불신앙과 같습니다.

유덕한 지식이 진정한 웅변술의 근본적인 요소라 할지라도 웅변적 연설을 그저 지식의 무기고로 가득 채우는 다른 극단으로 빠져서는 안 됩니다.

설교단은 학교의 강단이 아니며 교회는 학교가 아닙니다.

탄탄한 지식은 단순함을 배제하지 않고 포함합니다. 학식이나 배움은 지혜가 아닙니다.

사람들뿐만 아니라 여러분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말로 학식을 자랑하는 설교는 결코 예술이 아닙니다.

성경에 잘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견실한 설교를 위한 최고의 이상은 가장 심오한 사상을 평범한 노동자들조차 이해할 수 있도록 매우 단순하고 자연스럽게 말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종은 반드시 선포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확신으로 그는 성경이 실제로 말하는 것 외에 무언가를 성경의 입에 두는 것을 가장 강한 표현으로 금지하기 때문에, 이는 더욱 주목할 만합니다.

설교단에서와 마찬가지로 회의실이나 법정에서 이와 유사한 어법에 맞서기 위한 효과적인 치료약은 단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바로 열심히 연구하고 확고한 지식을 갖추며 참된 학문을 배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말씀의 신성함에 대한 확신이 없는 만큼, 우리의 설교는 영향력과 힘을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그저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한 어떤 견해들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며 근본적으로 불신앙과 같습니다.

유덕한 지식이 진정한 웅변술의 근본적인 요소라 할지라도 웅변적 연설을 그저 지식의 무기고로 가득 채우는 다른 극단으로 빠져서는 안 됩니다.

설교단은 학교의 강단이 아니며 교회는 학교가 아닙니다.

탄탄한 지식은 단순함을 배제하지 않고 포함합니다. 학식이나 배움은 지혜가 아닙니다.

사람들뿐만 아니라 여러분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말로 학식을 자랑하는 설교는 결코 예술이 아닙니다.

성경에 잘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견실한 설교를 위한 최고의 이상은 가장 심오한 사상을 평범한 노동자들조차 이해할 수 있도록 매우 단순하고 자연스럽게 말하는 것입니다.

웅변가는 단순히 증명하거나 서술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권합니다. 웅변가는 양심과 상상력에 초점을 둡니다.

웅변술은 시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시 예술은 웅변의 어머니였습니다.

옛 언약의 선지자들은 웅변가들이었고 또한 시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사용한 언어의 조화로운 리듬은 이를 증명해줍니다.

웅변술과 시는 여전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마치 가족과 같습니다.

웅변가는 언제나 그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로 하여금 인식하게 해야 합니다. 연설은 논증이지만 동시에 스펙터클한 드라마와 같습니다.

웅변은 미덕과 신앙을 그저 철학적으로 다룬 것만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웅변은 살아있는 몸을 통해 우리 눈앞에서 그것을 시연해 줍니다.

복음 설교자는 기독교의 모든 것이 구체적이고 명백하며 인격적이기 때문에, 혹은 [이를 위한] 가장 심오한 근거를 원한다면 기독교가 삼위일체적이기 때문에, 이런 웅변을 가장 잘 수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점에서 말씀의 종은 시민적, 법률적, 사회적 세계의 그 어떤 연설가보다 훨씬 우월합니다.

만일 말씀의 종이 그저 사물의 피상적인 표면에 머무르지 않고 감히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고자 한다면, 그는 자신이 창조와 구원과 성화 안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서 있는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장대한 역사입니다.

성경은 설명하는 대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성경은 증명하지 않고 보여줍니다.

성경에 있는 모든 것은 명료하고 예술적이며 구체적이고 독창적이며, 근원에서 흘러나오는 맑은 물처럼 언제나 신선합니다.

성경은 생명의 언어, 마음의 언어, 직관성의 언어, 영감의 언어로 말합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고 모든 세대에 미치며 시간이 흘러도 낡지 않습니다.

성경은 최상의, 아주 독특한 의미의 고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의 생각이 역사를 통해 이루어져 가고 있습니다. 예언과 역사는하나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체적으로. 성경은 육신, 성육화 하신 말씀, 신인동형동성화 하신 신성한 분(divine anthropomorphizing), 곧 신격이 육체의 형태로 거하시며 이상이 실재가 되게 하시는 분, 모든 것이 그분을 중심으로 넓은 궤도를 그리며 영적인 위치에 놓이게 하시는 그분을 고려합니다.

하나님과 사람, 영과 물질, 하늘과 땅, 지성과 마음이라는 추상적인 이원론이 여기서 가장 친밀한 일체로 화목하게 됩니다.

웅변술의 두 가지 요구를 성취하기 위해서 성경을 연구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모든 설교는 성경의 역사적 기독교와 결별할 때 그 명료성을 상실합니다.

합리주의는 곧 시의 죽음입니다. 합리주의는 모든 것을 심지어 언어조차 추상적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참된 웅변술은 사상을 삽화를 넣어 묘사해주는 반면에, 합리주의는 역사의 명료성을 차가운 정신적 이미지로 녹여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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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말하는 행복한 삶이란 모든 것을 다 가진 것도 아니고 남보다 경제적으로 부유하게 사는 것도 아니다. - P27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장점을 바탕으로 원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과정 그 자체다. - P27

현재의 ‘나‘가 아니라 그럴듯해 보이는 ‘누군가‘를 바라보며 사는 삶은 행복할 수가 없다. - P27

현재의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무엇인지 집중해야 후회가 덜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 - P27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준 상처가 벽을 쌓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마음의 감옥을 만든 것은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끝없는 의심이다. - P35

낮은 자존감을 높여 주는 것은 더 낮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사랑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 P42

다른 사람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온전히 나 자신의 힘으로 세상과 마주할 때 사랑을 할수도 받을 수도 있다. - P44

우리는 누군가의 빈자리, 침묵, 외로움, 쓸쓸함을 견디기 힘들어 하지만 혼자 있는 시간이 없다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아무 길이나 흘러가 버릴 것이다. - P44

당신의 마음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그렇게 약하지 않다. - P61

그리고 당신은 더 이상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가 아니다. - P61

자신을 덮쳐 오는 검은 파도 앞에서 ‘이젠 끝이구나‘ 절망하는 대신 서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 사실을 의심하지 말길 바란다. - P61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꼭 착하고 친절할 필요는 없다. 독립적으로 서로를 존중하는 태도만 있다면 충분하다. 그러니 스스로 좋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라. - P68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지금-이 순간‘ 바꿀 수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 P68

비판을 내 집에 찾아온 손님이라고 생각해라.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손님을 비난하고 내쫓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손님의 나쁜 말을 마음에 담지 않고 물리칠 수는 있다. - P85

어떤 순간에도 기억해야 할 핵심은 ‘나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다치지 않도록 소중히 보살펴야 할 사람 역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라. - P85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남의 고통에 무지하고 둔감하다. - P127

말하지 않으면 당신의 희생은 당연한 의무가 되고 만다. 그러니 억울하다면 확실히 말하라. 그 어떤 성취도 당신의 인생을 희생해야 할 만큼의 가치는 없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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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 - 일에서든, 사랑에서든, 인간관계에서든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관계 심리학 너는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 1
배르벨 바르데츠키 지음, 두행숙 옮김 / 걷는나무 / 2013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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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로 둘러싸인 우리들.

관계는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우리를 형성한다.



홀로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대화를 하고 도움을 구하고, 도움을 요청받을 때도 있다.



복잡한 사회, 경쟁을 부치기는 현대는,

더욱 많은 이유로 상처를 주고받는다.



문제는 상처를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받은 이후의 행동이다.



그 상처를 붙들고 살 것인가?

능동적으로 해결할 것인가?



저자는 상처를 받게 되는 원인뿐만 아니라,

그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도 제시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상처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이다.



환경이나 타인을 탓하기보다,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등장하는 상처를 주고받는 여러 유형들을 보고 있노라면,

지금 현재 경험하는 모습과 너무 닮아 놀란다.



구체적인 사례 모두가 우리에게 적용될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친절하고 쉽게 관계의 역동을 설명했다.



관계에서 힘겨움을 겪는 분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책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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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기쁨과 슬픔을 의존하지 말자. 그들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인정받고 싶어 하고 칭찬받고 싶어하는 불안정한 존재들일 뿐이다. 나의 능력을 판단하는 데는 다른 누구보다 나 자신이 가장 믿음직한 심판이다. -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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