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과 그 대답은 단지 글쓰기 기술을 연마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진정성 있는 삶의 태도나 우리를 둘러싼 세계와 타인을 바라보는 애정 어린 시선으로 나아가곤 한다. - P12

한쪽은 편집자의 눈으로 다른 한쪽은 독자의 눈으로 글을 읽지 못하면 편집자는 책을 만들 수 없다. - P14

사실 편집자들은 원고를 ‘심판‘하는 판관이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예비 저자의 가능성, 아직 다듬어지지는 않았지만 적절한 조언과 도움이 수반되면 극대화될 글쓴이만의 장점 등을 살피고 그것이 효과적으로 발휘될 수 있도록 돕는 조력자에 가깝다. - P14

우리가 이토록 매력적인 책의 세계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까닭은 책 속에 확고부동한 길이 있어서가 아니라 책이 더 자주, 더 많이 길을 잃게 만들어 또 다른 책의 세계로 계속 항해하도록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 P16

그래서인지 지금까지 내가 읽어 온 책들 중에서도 오랫동안 길잡이 역할을 해 준 책들은 정답이나 해법을 알려 주는 게 아니라 그 책을 읽기 전보다 좀 더 나은 질문을 가능하게 하는 책, 그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을 다른 관점에서 새롭게 질문할 수 있게 한 책이었다. - P16

여전히 많은 예비 저자가 ‘유리창‘ 같은 원고가 아니라 ‘거울‘ 같은 원고를 보낸다. 이렇게 물어보고 싶다. 당신의 원고는 유리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세상)과 사람들(독자)에게 말을 걸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거울 앞에 선 채 당신 자신만을 비추며 독백하고 있는가? 어쩌면 여기에서 "왜 투고하는가?"라는 질문의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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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아름다움은 즉각적인 현현(incarnation)을 추구합니다

웅변술에서는 형식과 언어와 표현이 전적으로 내용의 영향을 받습니다.

우리 모두가 단 하나의 모델을 채택하는 것은 불필요하며 유익하지도 않습니다.

개인의 다양성은 그 자체로 대중 연설에서 나타납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말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각각은 자신만의 연설의 [종류]를 소유합니다.

삶은 목가적 휴식이 아니라, 오히려 심각한 투쟁입니다. 씨앗 형태로, 재능으로 행하는 훌륭하고 적절한 하나의 연설을 통해 우리는, 한편으로는 조잡함과 진부함과 사소함을 정복해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경직됨과 기만과 꾸밈과 부자연스러움을 정복해야 합니다.

유일하게 우리 자신만이 소유할 수 있는 그런 좋은 연설은, 스스로 존재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과 분리해서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설교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을 때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단련하는 일에는 전적으로 소홀히 하면서 그저 일어나서 자신의 말에만 집중하는 것은 전적으로 부적절하며 헛된 일이 될 것입니다.

좋은 연설은 이러한 총체적인 품위를 대중 앞에서 말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특정한 정황 속에 적용하는 일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일상생활에서, 사회 활동에서, 품행이 단정한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은 그러한 작은 훈련으로도 좋은 설교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더욱이 대중 연설은 단순히 우리 몸의 한 부분에만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대중 연설은 음성이나 몸짓이 아니라 우리 전 존재를 차지합니다.

설교의 권리와 필요성은 육체와 영혼의 긴밀한 연합과 내면과 외면의 조화에 기초합니다

연설의 내용과 그 제시 사이에는 바로 이러한 친밀한 조화가 있어야만 합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육체와 영혼, 화법과 목소리, 말과 몸짓, 그리고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와 그가 어떻게 말하는지 사이에 조화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말할 때는 반드시 우리 전 영혼과 육체를 통해, 우리의 온 힘을 다해 말해야만 합니다.

모든 것을 우리에게, 우리를 통해, 우리 안에서 말해야 합니다.

음성의 색조, 각각의 몸짓, 손의 움직임, 눈동자의 응시는 각각 그 고유의 표현과 능력이 있습니다.

웅변술이란 전인격을 통해 생산되는 것입니다.

설교의 황금률은 "현재의 당신 자신이 아니라 당신이 될 수 있는 그리고 반드시 되어야만 하는 그 자신을 주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여러분 자신이나 여러분이 가진 것 이상의 것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특별히 말씀 사역자는 평민이나 그저 저속한 사람들(vulgus)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회 앞과 주님의 기업 앞에 서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자신의 영혼에서 이런 우월한 생각을 막아야 합니다.

사람의 전 존재와 관계하는 설교에서, 음성은 최우선의 위치를 차지합니다. 좋은 목소리는 귀한 선물입니다.

연설가가 명료하고 강력한 목소리를 가졌다면 이에 비교될 수 있는 다른 특권은 없을 것입니다.

목소리는 훌륭한 악기입니다. 그것을 잘 연주하고 가장 아름다운 음색을 이끌어내는 사람은 복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런 의미에서 틀리게 연주하고 노래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람도 틀리게 말할 수도 있음에 유의해야 합니다.

최고의 예술은 자신의 목소리를 완벽하고 철저하게 제어하며, 자신의 영혼 전체와 정서의 모든 의미를 듬뿍 담아 이를 통해 자신을 표현합니다.

인간의 목소리는 마음과 언어만큼이나 풍성합니다. 인간의 목소리는 가장 아름다운 최상의 음악입니다.

자연 전체에, 인간의 목소리가 표현할 수 없는 음조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목소리는 천둥처럼 울리고 폭풍우처럼 휘몰아칠 수 있습니다. 또한 그것은 산의 강물처럼 세차게, 개울처럼 졸졸 흐를 수 있습니다.

설교를 통해 이 목소리라는 음악은 반드시 우리 몸 전체를 통해 전달되어야 합니다.

설교에서 그 어떤 부분도 중요하지 않은 측면이 없습니다. 우리 몸의 각 부분은 고유의 언어를 지닙니다.

입술의 언어가 있고 눈의 언어가 있으며, 손의 언어, 머리의 언어, 몸의 언어가 있습니다.

영혼의 각각의 정서는 마치 거울처럼 눈에 비칩니다. 사랑과 증오, 경멸과 동정, 우정과 분노, 신뢰와 두려움, 그리고 모든 다른 열정들을 사람의 눈에서 읽어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기쁠 때 빛나고 슬플 때 희미해집니다.

청중들은 연설가가 자신들을 바라보며 단순히 소리로만이 아니라 눈을 마주치면서 말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설교자는 그가 전하는 말의 내용이 그의 음성, 눈의 응시, 머리의 위치, 몸의 자세, 손짓, 심지어 그의 의복의 색깔과 모양과 같은 언어로 말할 때, 더불어 영혼과 몸, 내면과 외면, 음성과 어조, 언어와 몸짓이라는 모든 이원론적인 요소들이 완벽한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설교의 완성에 도달하게 됩니다.

설교자는 코미디언이 아니며 설교는 영화가 아니며 몸짓은 무언극이 아닙니다.

제스처는 설교 그 자체가 아닙니다. 몸짓은 단지 설교를 이끌고 지지하며 강화시켜 줍니다.

사람은 오직 생각과 말, 그리고 말과 몸짓의 완벽한 조화가 존재하는 기독교의 원리에 부합할 때만 웅변적일 수 있게 됩니다.

기독교의 출현은 생명력 넘치고 그 아름다움에 흥분하는 사상의 세계를 열어주었습니다.

예술에 새로운 내용이 주어졌고 생각은 영원한 대상을 사색했으며 언어에 영원한 내용을 복원시켰습니다

생각과 말, 행동과 설교의 모든 불일치는 본질적으로 기독교와 충돌합니다.

우리의 것이든 상대방의 것이든, 진실하고 선하고 조화로운 모든 예술과 학문 분야는 그리스도를 닮은 것입니다.

기독교의 중심점은 말씀의 성육신인데, 바로 이 안에 하나님과 사람, 영과 물질, 내용과 형식, 이상과 현실, 육체와 영혼, 사상과 언어, 말과 몸짓의 화목이 존재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설교자는 그가 전하는 말의 내용이 그의 음성, 눈의 응시, 머리의 위치, 몸의 자세, 손짓, 심지어 그의 의복의 색깔과 모양과 같은 언어로 말할 때, 더불어 영혼과 몸, 내면과 외면, 음성과 어조, 언어와 몸짓이라는 모든 이원론적인 요소들이 완벽한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설교의 완성에 도달하게 됩니다.

설교자는 코미디언이 아니며 설교는 영화가 아니며 몸짓은 무언극이 아닙니다.

제스처는 설교 그 자체가 아닙니다. 몸짓은 단지 설교를 이끌고 지지하며 강화시켜 줍니다.

사람은 오직 생각과 말, 그리고 말과 몸짓의 완벽한 조화가 존재하는 기독교의 원리에 부합할 때만 웅변적일 수 있게 됩니다.

기독교의 출현은 생명력 넘치고 그 아름다움에 흥분하는 사상의 세계를 열어주었습니다.

예술에 새로운 내용이 주어졌고 생각은 영원한 대상을 사색했으며 언어에 영원한 내용을 복원시켰습니다

생각과 말, 행동과 설교의 모든 불일치는 본질적으로 기독교와 충돌합니다.

우리의 것이든 상대방의 것이든, 진실하고 선하고 조화로운 모든 예술과 학문 분야는 그리스도를 닮은 것입니다.

기독교의 중심점은 말씀의 성육신인데, 바로 이 안에 하나님과 사람, 영과 물질, 내용과 형식, 이상과 현실, 육체와 영혼, 사상과 언어, 말과 몸짓의 화목이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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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의 종말 신학의 전제들에 관한 탐구 2
크리스틴 헬머 지음, 김지호 옮김, 김진혁 해설 / 도서출판100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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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한가운데서 살아갈 때 소통의 부재를 경험한다. 교회는 세상에 적절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 교회의 언어는 세상과는 동떨어져있는 듯 보인다. 교회의 언어는 교회 안에서만 머문다. 교회의 언어는 세상의 언어와 많이 다르다. 우리는 세상과 소통할 수 있을까?


헬머(Christine Helmer)의 『교리의 종말』은 역설적이다. 교리의 새로운 시작을 위해, 교리의 진정한 '목적'에 이르기 위해, 기존의 관점을 과감하게 바꿀 것을 요구한다. 저자는 닫혀 있고, 대화할 수 없는 교리는 생명력을 잃었다고 강조한다. 그러한 교리는 고정되어 있어, 외부와 소통할 수 없다. 기존의 세계관 안에서 견고하게 자신의 교리만 반복한다.  


하나님께서 살아가신다고 고백하면서 정작 살아계신 하나님의 현실을 담아내지 못한 교리는 의미와 영향력이 없다. 그렇기에 신학의 과업은 하나님의 현실을 포착하며, 말씀이신 하나님의 현실을 언급하는 것이다. 생동감 있는 언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고 설명하는 것이다.


신학은 비상 신호를 곤두 세우고 신적 현실을 증언하는 학문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언어와 개념이라는 렌즈를 통해 자신과  세계와 하나님을 바라본다(231).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듯, 『교리의 종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지 린드벡(George Arthur Lindbeck, 1923 ~ 2018)의 『교리의 본성』(The Nature of Doctrine)에 대한 사전 지식이 필요하다. 


린드벡의 『교리의 본성』은 20세기 후반의 조직신학서 중 매우 큰 영향력을 끼친 책 중 하나다. 아쉽게도 아직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았다. 『교리의 본성』의 내용은 『교리의 종말』에 곳곳에 흩어져있어 있다. 따라서 명확하게 그 내용을 파악하기가 쉽지는 않다. 


하지만 『교리의 종말』에 말미에 삽입된 김진혁 교수의 해설은 우리를 친절하게 안내해준다. 린드벡의 『교리의 본성』에서 핵심 되는 종교와 교리의 이해 방식을 정리한다. 또한 린드벡의 제자들이 계승하고 발전시킨 교리도 자세하게 소개한다. 


더불어 『교리의 종말』의 전체적인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재배치하고 설명함으로 독자들의 접근성을 높였다. 그렇기에 책의 뒤편에 있는 해설을 먼저 읽고 책 전체를 읽는 것도 효율적인 독서를 위한 하나의 방편이 되겠다.


헬머는 린드벡의 슐라이어마허 읽기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한다. 저자가 새롭게 읽는 슐라이어마허는 성경의 언어를 종교적 경험으로 대체한 신학자가 아니다. 오히려 슐라이어마허의 인식론은 사회와 상호작용하기 위한 주요한 도구다. 


헬머는 마르틴 루터와 슐라이어마허를 거쳐,  바르트를 관통하며 교리와 초월성의 연결고리를 찾는다. 그리하여 교리는 사회문화적인 변화 앞에 능동적이고 역동적으로 변화함을 주장한다. 


저자의 놀라운 작업은 앞으로의 신학이 어떤 방향성을 가져야 할지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신학은 교회를 섬기면서도, 세상과 소통해야 하는 학문이다. 이는 신학이 개방적이며, 우리의 언어가 소통 가능해야 함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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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람이길 포기하면 편안해지지
소노 아야코 지음, 오경순 옮김 / 책읽는고양이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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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인정이나 칭찬을 받고 싶어 한다. 



반면 무시받거나 비난을 듣게 되면,

속으로 끙끙 앓는다.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도,

절대적 의인이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결국 좋은 사람이 되려는 마음도,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마음으로부터 비롯된다.



『약간의 거리를 둔다 』의 저자 소노 아야코.

그녀는 우리에게 타인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권한다.



타인으로부터의 자유는 단순한 해방감 이상이다.

자신을 지키고, 오히려 더 정직한 관계를 맺게 만든다.



다른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기보다,

나 자신에게 더욱 신경 써보자.



비로소 내가 보이고 다른 사람이 보이고,

이 관계에 어느 정도 에너지를 써야 할지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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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자신의 평판에는 신경이 쓰이는 법이다. 그러나 평판만큼 근거가 없는 것도 없다. - P69

나 외에 나의 세세한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는데, 나를 모르는 타인이 나에 대해 말하고 있으므로 평판이 옳을 리 없다. - P69

그런데도 그런 평판에 동요되는 사람이 많다. 세상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압력을 가하는 것이다. - P69

인맥이란 그것을 이용할 마음이 없다면 거의 필요 없는 것이다 .그것을 연줄로 장사하거나 정치가로서 표를 모으는 일이라도 된다면 분명 인맥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들이 사회의 한 구석에서 자신의 능력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데는 특별히 인맥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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