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이 ˝십자가의 말씀˝으로 묘사하고 있는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는 단지 로마의 정치사상뿐 아니라 주로 고대 세계의 종교적 풍조나 특히 당대 모든 지식인들의 신관에도 위배되는 것이었다.

창조의 중재자요 세상의 구원자이자, 참되고 유일하신 하나님의 선재하시는 한 아들이 멀지 않은 과거에 벽지의 갈릴리에서 이름 없는 유대인들의 구성원으로 태어났다는 사실과 심지어 십자가 위에서 보통 범죄자들과 같이 죽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은 그저 미친 것으로 간주될 뿐이었다.

˝‘즐거운 것‘을 말할 때에는 너그럽게 들을 수 잇지만, ‘십자가‘를 말할 때에는 거슬린다. 후자의 거슬림은 십자가에서 오는 고통과 맞먹는다˝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로마인이든, 다른 외국인이든, 어느 누구에게라도 십자가에 달린 메시아 내지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의 아들, 혹은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그 자체로 모순이자 불편하고 어리석은 주장으로 보였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죽음의 집의 기록』에서 도스토옙스키는 인간 본성에 관한 철학을 정립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극한 상황에서 그는 집중해서 강도 높게 인간을 관찰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가차 없는 분석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관찰은 <3인칭의 인간>이 아닌 <나>를 포함하는 <1인칭 우리 인간>에 관한 철학으로 굳혀졌다. 그만큼 더 설득력이 있고 개연성이 있다.

그가 유형지에서 발견하고 탐구했고 이후 소설에서 끝없이 발전시키게 될 인간 본성의 출발점은 <자유>다.

자유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개념인 동시에 심리적이고 종교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의 소설로 들어오면서 그것은 한 개인으로 하여금 현실 속에서 도덕적인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는 일종의 <인격 수양> 비슷한 어떤 것이 된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그 소설을 <교육적>이라고 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최고의 가치로서의 자유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지향을 둔 삶을 강조한다.

자유를 지향하는 삶은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삶, 치열하게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삶이다.

그의 소설들이 보여 주는 것은 자유를 획득한 인간(어차피 그것은 불가능하다)이 아니라 자유라는 궁극의 종착점을 향해 온갖 고난과 좌절을 무릅쓰고 나아가는 인간의 모습이다.

중요한 것은 중단 없는 자유에의 지향, 자유라는 목적에 대한 갈망이다.

<사람은 누구나, 설령 치욕 속에 놓인 사람이라 하더라도, 본능적으로든 아니면 무의식적으로든 자신의 인간적 가치에 대한 존중을 요구한다. 인간적인 대접은 이미 오래전에 신의 형상을 상실한 사람들조차 인간으로 만들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토스토옙스키의 발자취를 추적하는 동안 나는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가 여기저기 떠돌아다닌 것은 대부분 그의 의사와 무관했다.

시베리아 유형과 도박 중독과 천식을 원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이 숙명적인 이동은 예외 없이 그의 작품 속 서사의 일부로 굳어졌다.

시베리아는 『죽음의 집의 기록』과 『죄와 벌』에, 모스크바는 『백치』에,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가난한 사람들』에서 『미성년』에 이르는 수많은 소설에, 유럽은 『지하로부터의 수기』와 『백치』와 『악령』에, 트베리는 『악령』에, 스타라야 루사는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다.

실제의 공간과 지명은 그의 문학 속으로 들어와 때로는 이야기의 배경이 되고 때로는 저자의 의도를 전달해 주는 비유이자 상징이 되었다.

지도 위의 랜드마크는 시간 속의 사건으로 전이되었다. 특정 공간을 따라가는 저자의 이동 궤적은 소설 속에서 사상의 움직임으로 복제되면서 놀라운 역동성의 문학을 창출했다.

연민은 그의 윤리적 어젠다 맨 앞줄을 차지한다. <연민은 가장 중요한, 어쩌면 유일한 인간 실존의 법칙이다> 혹은 <연민-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전부다>라고 말할 때 그가 의미하는 것은 값싼 동정이나 단순한 측은지심이 아니다.

러시아어로 <연민sostradanie>은 <함께so>와 <고통stradanie>을 합성한 단어다. 영어의 <연민cpmpassion>도 같은 원리다. 요컨대 타인의 고통을 불쌍히 여길 뿐 아니라 더 나아가 함께 고통당하는 것이 곧 연민이다.

도스토옙스키는 물질의 분배가 아닌 고통의 분담에서 공존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멈춘 적이 없지만 또 그렇다고해서 부자라고 무조건 비난하지도 않았다. 탐욕과 인색을 혐오했지만 돈 자체를 악으로 치부하지도 않았다.

도스토옙스키가 돈과 관련해 일관되게 우려했던 것은 병적인 집착에서 촉발되는 맹목적인 <축적>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생 2막을 위한 심리학 - 칼 융의 분석심리학, 삶의 굴레를 벗기다
제임스 홀리스 지음, 정명진 옮김 / 부글북스 / 201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생을 살다 보면

내 의지와 뜻대로 삶이 순적하게 풀리지 않을 때가 많다.


원치 않는 고통이 있을 때도 있고

건강의 문제나 정서적 어려움을 겪을 때도 있다. 


더군다나 개인적인 어려움은 어느 정도 견디지만,

자녀나 배우자의 고통을 마주할 때면 더 힘들다. 


제임스 홀리스(James Hollis)는 칼 융(Carl Gustav Jung)의 분석심리학으로

우리가 겪는 삶의 문제들을 예리하게 직면하도록 돕는다.


그는 심리학뿐만 아니라 

신학과 다양한 종교 전통들을 폭넓게 인용하며 재해석한다. 


또한 그동안 학문의 영역에서 비교적 다루지 않았던

한 사람의 '영혼'을 집중하여 조명한다. 


그는 영혼에 대하여 이렇게 정의한다.


'영혼'은 당신 자신의 깊이에 대한 직관적인 느낌이고, 당신의 깊은 속을 호르고 있는 목적 지향적인 에너지에 대한 직관적인 느낌이고, 의미를 추구하려는 욕망에 대한 직관적인 느낌이고, 또 일상적인 의식이 포착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무엇인가에 참여하고 있다는 직관적인 느낌이다. '영혼'은 우리를 더욱 심오하고 인간적인 존재로 만든다(16-17).


그는 현실의 상황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그 문제와 대면하기를 촉구한다. 


"정신적 혹은 영적 발달을 이루려면 반드시 불안과 모호함을 견뎌낼 수 있어야 한다. 이처럼 힘든 상태를 받아들이고, 그 상태를 참아내고, 그러면서 삶에 충실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우리의 성숙을 말해주는 도덕적 척도이다(62-63)."


우리는 현실을 인정하면서 고난의 문제 앞에 주어지는 과제를 의식함이 필요하다. 

저자는 비록 힘겨운 상황 가운데서 고난 가운데 주어진 과제를 의식하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지속적으로 의식화를 해나가야 함을 역설한다.


우리가 그동안 알게 모르게 피해왔던 우리 내면의 문제와 상처들을 이제는 끌어안고,

힘겹겠지만 더욱 성숙하고 온전한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할 것이다. 


현실의 문제들과 맞서 싸우기를 원한다면,

더욱 성숙한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원한다면,

꼭 참고해야 할 책이 아닌가 생각한다. 


안락과 안전과 예측 가능성을 누리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면서 지금까지 머물고 있던 정박지에서 빠져나오는 것 자체가 심리적으로 큰 이동이다. 이 이동의 목적은 인생의 의미를 찾고, 삶에서 치료의 효과를 누리고, 또 삶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있다. 이런 심리적 이동이 일어나는 동안에, 당신은 자신을 자주 희생자로 여기게 된다. 그런 가운데 그 희생에 당신을 성장시키려는 어떤 목표가 숨어 있다는 진리를 좀처럼 깨닫지 못한다.- P13

개성화는 우리 각자가 스스로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인간에 보다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 노력하는 일생의 프로젝트라 할 수 있다. 개성화는 부모나 종족, 특히 쉽게 위축되거나 부풀려지는 자아가 의도하는 인간이 아니라 신들이 의도한 그런 인간이 되려는 노력인 것이다. 개성화는 우리 모두가 자신의 신비 앞에 서도록 하고 또 인생이라 불리는 여행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해 책임을 보다 충실하게 지도록 한다. 이때 우리 모두 타인들의 신비를 존경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P21

결국 우리가 변화할 수 있기 위해선 반드시 우리의 내면에 어떤 의지 같은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의식의 통제력을 상당히 벗어나 있으면서도 우리 자신에게 옳은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있는 그런 의지 말이다.- P38

외적 기대와 내적 현실 사이의 이런 불일치가 중년에 종종 겉으로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삶을 사는 동안에 영혼의 소환을 한 번만 아니라 자주 경험한다. 어쨌든, 타고난 자기와 성취한 ˝자기감˝(sense of self) 사이에 피할 수 없는 불일치를 경험할 때마다, 정체성의 위기가 나타난다- P47

매일 두려움과 무기력이라는 악마를 만날 때, 우리는 불안과 우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는 일상의 선택에 당연히 따르는 딜레마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P62

비관적인 인생관이라는 초대장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우리는 보다 큰 구도 안에서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의 자리를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겸손한 자세로 걷고 신들을 무서워하라는 옛날의 가르침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 모두에게 의미를 지닌다- P71

어린 시절에 피할 수 없는 존재론적인 상처 중 그 첫 번째 카테고리는 ‘압도‘(overwhelmment)라고 부를 수 있다. 즉 나라는 존재가 환경 앞에서 무력하다는 사실을 경험하는 것을 말한다. 압도적인 환경은 사사건건 참견하는 부모, 사회경제적 압박, 생물학적 장애, 굵직한 세계적 사건 등으로 이뤄져 있다. 이런 압도적인 환경 앞에서 우리가 받는 메시지의 핵심은 다시 우리라는 존재는 외부 세계의 흐름을 바꿔놓기에는 너무 무력하다는 것이다.- P75

심리적으로 반사적인 행동이 일어나는 와중에 자신의 의식을 온전히 지키기는 대단히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의 패턴이 한 번 더 강화될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오랫동안 우리는 그런 낯익고 낡은 체계가 우리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믿어 왔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그처럼 자주 드러내는 그 낡은 체계가 대체로 다른 사람들이 보는 우리의 모습이었다.- P81

나르시시트들은 자신의 내면적 빈곤을 남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 무척 애를 쓴다. 그들은 자랑을 늘어놓기도 하고, 자신의 평판을 크게 부풀리기도 하고, 거드름을 피우며 타인들을 얕잡아 보기도 할 것이다. 혹은 그들은 약간의 무시와 비판에도 무너져 내래는 약한 모습을 보이면서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데 대해 죄의식을 느끼도록 만들 것이다. 나르시시트들의 이런 모든 행위는 우리가 그들의 핵심적인 진실을 보지 못하도록 막기 위한 것이다. 그들의 핵심적인 진실이란 바로 그들의 자기의식은 허영심을 바탕으로 한 것이고 어린 시절에 주변 사람들의 무관심이나 불충분한 미러링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사실을 말한다.- P87

의식이 결여된 곳에서는 자유도 절대로 가능하지 않고 진정한 선택도 절대로 가능하지 않다. 역설적이게도, 의식은 언제나 고통의 경험을 통해서만 생겨난다. 고통으로부터의 도피가 바로 우리가 꽉 조이지만 익숙한 옛날의 신발을 고집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영혼은 절대로 침묵을 지키지 않는다. 고통은 무엇인가가 우리의 주의를 끌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고 또 치유되기를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첫 번째 단서이다.- P95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알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이든, 그런 노력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고도 자기 자신과의 결정적 만남을 가능한 한 피하려 들 가능성이 아주 크다. 우리의 영혼이 기대하고 요구하는 큰 신발을 처음 신는 것보다는 작아도 발에 익숙한 신발을 계속 신고 다니는 것이 훨씬 더 편하다.- P99

개인적 경험을 통해서 영성을 직접 확인하고 뒷받침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역사나 가족을 통해서 물려받는 영적 전통은 개인의 삶에 아무런 변화를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조건화된 반응을 통해서만 살고 있기 때문이다. 오직 경험적으로 진실한 것만이 성숙한 영성을 이루게 할뿐이다.- P262

성숙한 영성은 좀처럼 우리에게 대답을 제시하지 않으며 오히려 점점 더 큰 질문을 던질 것이다. 성숙한 영성은 인생 후반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문제들을 대면하지 않을 경우에 우리를 기만하고 더욱 작게 만드는, 가족이나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가치들에 종속된 상태에서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P26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알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이든, 그런 노력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고도 자기 자신과의 결정적 만남을 가능한 한 피하려 들 가능성이 아주 크다. 우리의 영혼이 기대하고 요구하는 큰 신발을 처음 신는 것보다는 작아도 발에 익숙한 신발을 계속 신고 다니는 것이 훨씬 더 편하다.

우리는 운명이 우리 앞에 제시하는 세상을 반드시 잠정적인 것으로 읽어야 한다. 이때 우리는 불가피하게 세상을 잘못 읽고, 세상을 지나치게 개인화하고, 과잉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르게 된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은 예외 없이 다음과 같은 보편적인 고백을 극화하고 있다. ˝내 인생은 나의 창조물이야. 선택들도 모두 내가 한 것야. 그리고 정말 놀랍게도, 예상치 않은 결과들도 모두 나의 선택의 산물이야.˝ 겸손한 마음에서 이런 식으로 인정하는 바로 거기서 마침내 지혜가 시작된다.

의식적인 삶에 작용하는 이 두 개의 힘의 장(場)은 우리 각자의 내면에서 서로 경쟁을 벌이고 있다.

그 중에서 자아는 안락과 안전, 만족을 추구하는 한편, 영혼은 의미와 노력과 성숙을 요구한다.

이 두 목소리의 주장이 가끔 우리를 찢어놓는다. 일상의 자아의식은 이런 양극성에 몹시 괴로워한다.

또 다시 여기서 어떤 역설이 나온다. 우리의 고통 속에, 우리의 증후 속에 영혼이 요구하는 노력의 의미를 말해주는 심오한 열쇠들이 들어 있는데도, 그 치료의 길은 걱정 많은 자아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힘들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자아가 자신보다 더 큰 뭔가에 문을 열라는 요구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강한 영혼들만이 치료를 추구할 수 있다. 반면 상처를 많이 입은 사람일수록 탓을 돌릴 사람을 찾게 될 것이다.

슬픔에 잠겨 반응성 우울증을 겪고 있을 때조차도 거기엔 언제나 어떤 과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가 상실한 그 타자에게 과잉 투자를 한 것은 아닌지, 아니면 그 대상이 우리에게 지나치게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아닌지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외부로 쏟은 에너지가 우리에게도 돌아올 때, 그것을 다시 간직하는 것도 우리의 몫이고, 그것을 영혼이 바라는 성장을 도모하는 쪽으로 다시 투자하는 것도 우리의 몫이다.

관계가 깨어지고 자시만 덩그러니 남게 될 때, 우리는 그 상실을 슬퍼하겠지만, 그럼에도 그 관계의 유지에 필요한 인격적 측면을 갖추지 못한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책임이다.

슬픔을 느끼는 동안에도, 반응성 우울증은 언제나 우리에게 성장을 도모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제시하고 있다. 슬픔을 직시하고, 또 거기서 비롯된 개인적 임무에 대해 책임을 지는 데는 심리적으로 상당한 정직성이 요구된다.

간혹 이 우울증은 우리를 완전히 접수해 버린다. 그러면 우리는 기진맥진한 상태로 뻗어 눕게 된다. 우울증이라는 샘에는 반드시 바닥이 있기 마련인데, 이 샘의 바닥엔 어떤 명확한 임무와 소환장이 놓여 있다. 그 임무란 영혼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다.

소환장은 우리의 존재 깊은 곳에서부터 대답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또 영혼이 항상 원하고 있는 것을, 즉 보다 큰 인생 여행을 떠나는 위험을 감수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실패한 모든 투사는 특정 양의 에너지이고, 성장이나 치유를 도울 하나의 의제이며, 또 우리에게 다시 주어진 과제이다.

우리의 삶에 패턴이 형성되는 것은 이처럼 오랜 세월을 거치며 형성되었으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송이들이 거듭해서 활성화되기 때문이다. 이 패턴들은 그 자체로 생명력을 갖고 있으며 의식적으로 선택되는 경우는 좀처럼 없다.

모든 관계는 투사로 시작한다. 매 순간은 완전히 새로운 순간이지만, 우리가 매순간 스스로를 다시 창조하지 않고 기능을 수행하는 한 가지 방법은 과거의 경험과 계획, 이해를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상황에 반사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다.

투사는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새로운 상황과 새로운 사람을 옛날의 렌즈를 통해 볼 때, 우리는 그 상황이나 사람의 독특한 성격을 우리의 과거 경험으로 오염시키게 되고 따라서 그 상황이나 사람의 근본적인 실체를 과거의 마무리되지 않은 계획에 맞춰 왜곡시킬 위험을 안게 된다.

˝사랑에 빠지는 행위˝의 은밀한 목표는 타자와의 합일이며, 이때 당사자가 가장 간절히 바라는 결과는 의식의 망각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신비와 접촉하기 위해 우리라는 존재가 가진 신비를 끌어낼 수 있게 될 때, 우리는 확장을 꾀할 수 있는 발달의 과정에 올라서게 된다.

가족은 깨어졌든 온전하든, 혹은 한곳에 모여 있든 멀리 흩어져 있든 언제가 그 이상이었으며 지금도 그 이상이다.

가족은 원형적인 힘의 장(場)이었고 또 그런 곳으로 남았으며, 우리 모두는 청년기 끝에 처음으로 가족을 떠나고 나서도 한참 뒤까지 그 힘의 장에 끌린다.

감각의 문화는 오직 중독을 낳고 희망을 깨뜨릴 뿐이다. 근본주의가 경직성과 아주 큰 그림자만을 낳는 것과 똑같다.

개인적 경험을 통해서 영성을 직접 확인하고 뒷받침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역사나 가족을 통해서 물려받는 영적 전통은 개인의 삶에 아무런 변화를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조건화된 반응을 통해서만 살고 있기 때문이다. 오직 경험적으로 진실한 것만이 성숙한 영성을 이루게 할뿐이다.

성숙한 영성은 좀처럼 우리에게 대답을 제시하지 않으며 오히려 점점 더 큰 질문을 던질 것이다.

성숙한 영성은 인생 후반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문제들을 대면하지 않을 경우에 우리를 기만하고 더욱 작게 만드는, 가족이나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가치들에 종속된 상태에서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