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집에서 나오는데 느닷없는 봄의 기운에 한 방 먹었다. 그러면서 라디오에서 장혜진의 ‘너라는 계절은’이 흘러나왔다. 가요의 강점이라면 정말 가사가 ‘시’ 같아서 가사를 풀어헤치면 서사가 확 펼쳐진다.


너라는 계절은 살아본 적 없는 낯선 풍경

마주한 적 없는 아름다움

다신 못 볼 줄 알았는데 이 설렘들

너와의 계절은 가장 아름다운 하늘의 색

다신 볼 수 없는 아름다움


이 아름다운 너라는 계절이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좋겠지만 신은 인간을 너무나 미워하기 때문에 절대 그렇게 두지 않는다.


계절이 바뀌면 무뎌지고, 질투하고, 좋아했던 그 이유가 싸움을 하는 이유가 되어 헤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함부로 신이라는 걸 믿어서는 안 된다. 신은 그렇게 인간이 쉽게 믿을만한 존재가 아닌 것이다.


계절이 변하듯 나와 나, 인간도 변한다. 변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 왜냐하면 변하는 계절을 닮은 게 인간이니까. 인간은 변해도 사랑은 변하지 않았으면 하고 예전에 상우는 은수를 보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 안에도, 그래 맞다, 라면이 나왔다. 은수와 상우의 첫날밤은 라면으로부터다. 술과도 잘 어울리는 라면은 상우에게 어쩌면 슬픈 음식이다. 화분의 꽃이 더디게 피듯 상우의 시간은 천천히 흘러가기를 바라지만 은수는 사랑은 라면처럼 금세 끓어오르고 빨리 식는다.


결국 상우는 은수에게 내가 라면으로 보이냐고 말한다. 그렇게 라면은 상우에게 슬픈 음식이 되었다. 라면이 끓어오르면 비로소 외로움과 마주하게 된다. 스프를 넣고 팔팔 끓일수록 자극은 극에 달한다. 끓어오르는 라면을 그대로 둘 수 없어 젓가락으로 휘젓게 된다. 몸부림을 바라는 라면은 외로워서 슬픈 음식이다. 그렇게 봄날이 가버린 상우는 슬픔을 젓가락질할 것이다.


은수로 나왔던 이영애는 봄날은 간다에서 정말 예뻤다. 상우에게 은수는 그야말로 계절이었다. 같이 자연의 소리를 따는 작업을 하면서 그대로 상우의 한 계절이 되었다. 너라는 계절. 그런 장면이 너무 좋다. 은수가 잠들어 있는 모습을 옆에서 가만히 보던 상우가 미소를 짓다가 다가가서 입을 맞추고 눈을 뜨고 응? 알지?


너라는 계절은 하지만 변한다. 500일의 서머에서 운명이라 믿는 사람과 그저 우연이라 생각하는 사람의 만남은 영원하지 않다. 변하게 된다. 지금도 계절은 봄으로 변해간다. 지난 주만 해도 전혀 그렇지 않을 것만 같더니만 이제 봄으로 간다. 그리고 곧 봄날도 가겠지.


그래서 라면이나 끓여 먹자. 나는 물만두고 넣고 떡국떡도 넣고 김치도 넣고 치즈도 넣어서 먹을 거야.



장혜진의 너라는 계절은 https://youtu.be/DA4rH9SPHv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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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밤에 조깅을 하면 고개를 꺾어 하늘을 꽤 오래 보게 된다. 이게 북두칠성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진 속에 꼬리 쪽 하나의 별은 담기지 않았다. 이럴 때마다 폰을 탓하게 된다. 근래의 밤은 내가 좋아하는 청록색이 가미된 검은 밤하늘이다. 한차례 바람이 몰고 지나가서 그런지 하늘이 깨끗해서 도시임에도 별이 선명하게 보인다. 무엇보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은 거리에 떠 있는 것 같다.


가스층이 가래처럼 껴 있는 여름의 밤하늘에는 도저히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짙고 짙은, 그래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밤하늘에 별이 그림을 그려 놓았다. 조금 춥지만 밖으로 나와 조깅을 하면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별이 빛나는 모습에 이렇게도 마음을 빼앗길 줄이야. 그래서 몸을 풀면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한 계절이 죽어감을 실감한다. 춥지만 조깅을 한 지 10분이 지나면 후끈함이 밀려오는 게, 그리하여 계절은 죽음을 받아들이고 별은 다시 빛을 내며 다음 계절을 맞이한다. 이렇게 반짝반짝하는 별을 보면 고흐의 그림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나는 김광섭 시인의 ‘저녁에’가 떠오른다. 김광섭 시인은 1900년대 탄생한 시인으로 인간 존재에 대해서 글을 썼다. 김광섭 시인의 시에는 죽음과 탄생 그리고 희망과 절망 같은 인간이 존재하면서 느끼는 감정들이 두루두루 실려 있다. 독립운동을 하다 훈장까지 받고 말년에 미국에서 보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 말년에 하늘의 별을 보며 벗들을 그리워하며 ‘저녁에’를 썼다.


그리고 그 ‘저녁에’라는 시를 보고 10살 터울의 친구인 김환기 화백이 바로 그린 그림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였다. 김환기 화백은 의사에게 수술을 받지 않으면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을 지경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 수술을 받는다. 그리고 호전되는 와중에 침대에서 떨어졌는데 그만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고 한다. 김환기 화백의 그림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보면 유난히 진하게 채색된 점들이 있다. 아마도 미국에서 김광섭 시인이 바라본 그 별일지도 모른다.


저렇게 많은 별들 중에 저 별 하나가 나를 내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 저 별 하나를 올려본다


중략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이 아름다운 시는 80년대에 와서 유심초라는 그룹에 의해 노래로 다시 탄생하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저 하늘의 별이 된다. 유난히 반짝이는 저 별, 나 역시 죽으면 그 별 옆으로 가서 별이 되고 싶다. 그러면 우리의 사랑은 별처럼 반짝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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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빔밥의 정점은 자정에 비벼 먹는 것이다. 참고 참다가 더 이상 정신 줄을 놓고 자아는 그러면 안 된다고 하지만 초자아가 냉장고를 열고 열무를 꺼내고 계란 프라이를 해서 밥을 비비고 있다. 참기름을 떨어트리는 순간 밀고 당기기의 게임은 끝나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밥을 비벼 먹는 맛을 알아버리고 나면 자주 비벼 먹게 된다.


대학교를 다니면서 자취를 할 때 나는 정말 밥을 많이도 비벼 먹었다. 전기밥솥에 밥이 다 되면 뚜껑을 열면 뜨겁고 맛 있는 밥 냄새가 확 난다.  바로 그 안에 고추장을 넣고 날계란을 두세 개를 깨트려 넣는다. 그리고 멸치볶음이(늘 있었다) 있어서 그걸 넣고 김치가 있으면 넣고, 그리고 김을 부셔서 넣어서 그대로 비빈다. 그러면 밥이 아주 뜨겁기 때문에 계란이 그대로 다 익는다. 와 맛있다.


자취방에 아이들이 오면 늘 이렇게 해달라고 조르곤 했다. 나의 생존을 위해서 해 먹는 건 괜찮은데 애들이 느닷없이 우르르 와서 밥을 해달라고 하면 그것만큼 귀찮은 건 없었다. 그래서 전기밥솥 한가득 밥을 해서 비벼주면 소주에 잘 도 처 먹었다. 버터가 있으면 더 맛있다. 버터를 넣으면 뜨거운 밥에 햇살이 녹듯 녹아내린다. 버터가 있으면 계란을 꼭 넣지 않아도 된다. 휘휘 비벼서 멸치볶음을 넣고 고추장을 넣고 김치를 넣고 그대로 비벼서 내놓으면 아이들은 환장을 했다.


아이들이 자취방에 와서 살림을 거덜 내는 것 같지만 학교에서는 또 나의 점심을 대체로 해결해주기도 했다. 돌아가면서 이 놈, 저 놈이 학식으로 돈가스를 사주었다. 돈가스의 강정은 소스와 밥은 마음대로 퍼 갈 수 있어서 그 소스에 밥을 비벼 먹는 것도 맛있었다. 학식에도 비빔밥이 있었는데 인기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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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가까운 시간에 비빔밥을 먹으니 고로 씨가 우리나라에 와서 청국집에서 비빔밥을 먹었던 생각이 난다. 고로 씨는 뭘 해도 어색하면서 어색하지 않다고 생각이 들었다. 고로 씨의 행동에는 어색함이 소거되어 있었다. 볼에 밥알을 붙이고 다녀도 어색하지 않고, 큰 키에 정장차림에 빵집 문 앞에 앉아서 군것질을 해도 어색하지 않다. 식당 주인이 마음대로 말을 해서 여긴 누구? 같은 표정을 지어도 어색하지 않고, 길게 뻗은 다리로 어린이 그네를 타도 어색하지 않다. 한국으로 와서 아 비빔밥데스까 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고 해운대 낙곱새 집에서 수저를 찾지 못해도 어색하지 않다. 오뎅 파는 곳에서 주문만 일분 넘게 해도 어색하지 않고, 몸을 구겨 넣어서 열도를 횡단했던 미니쿠퍼를 운전해도 어색하지 않다. 웃통을 벗고 야구장에서 조카를 응원하던 모습도 어색하지 않고 원작자 쿠스미 씨와 밥집에서 마주치며 엥? 다래? 같은 모습도 어색하지 않다. 이렇게 망가지는데도 어색하지 않은 건 어색함 속에 어색하지 않게 하기 ㅇ 굉장한 장치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잘 만든 영화나 드라마는 엄청난 장치의 기본이 되는 시나리오가 탄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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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는 작가인 이자크 디네센(카렌 블릭센)의 아주 생생한 글을 볼 수 있다.


키쿠유 족이 젖소를 데려와 우리 집 주위에서 풀을 먹였다. 소 치는 소년 하나가 피리를 갖고 있어서 이따금 뭔가 짧은 멜로디를 불었다. 그 후로 같은 곡을 들을 따마다, 나는 우리의 지나간 날들의 고통과 절망 모두를 생생하게 떠올리곤 했다. 그 멜로디에서 나는 뜻밖에도 활력과 신비한 다정함, 그리고 한 편의 시를 들었다. 그 고통의 시기는 정말로 그토록 고통스러운 것이었을까. 그즈음 우리에게는 젊음이 있었고, 격렬한 희망이 넘쳤다. 그 길었던 고난의 날들이야말로 우리에게 단단한 결속을 가져다준 것이다. 설령 어딘가 다른 별에 가게 된다 해도, 우리는 분명 서로를 금세 친구로 인정할 수 있을 만큼. 그리고 뻐꾸기시계, 나의 장서, 잔디밭에 있는 여위고 쇠약한 암소들, 슬퍼 보이는 키쿠유 족 노인들은 서로가 서로를 이렇게 불렀던 것이다. “너도 거기 있구나. 너 역시도 이 응공 농장의 일부로구나” 하고. 그렇게 그 고난의 시기는 우리를 축복하고, 그리고 떠나갔다. - 소설 '아웃 오프 아프리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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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그늘의 오르페우스의 가사가 꿈속으로 데려간다.


더는 나에게 위로를 건네지 않아도 돼

햇빛에 천천히 젖은 마음을 말릴게

괜찮아 괜찮아 나아가고 있어

괜찮아 괜찮아 나아가고 있어


나의 축축한 마음도 옷 밖으로 꺼내 햇빛에 제대로 말리고 싶다. 이 아슬아슬한 하루하루를 보내느라 축축해진 나의 마음을.

이건 나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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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과 진실은 많이 다르다.

 

미드를 보면, 좋아했던 미드들, 덱스터 시리즈, 오자크 시리즈, 홈랜드 시리즈 등. 미드를 보면 주인공 주위 사람들이 계속 진실을 알려 달라고 주인공을 들들 볶는다. 잘 만들고 인기가 좋은 미드에는 언제나 답답하고 갑갑한 사람이 등장한다. 그놈의 진실을 알아서 뭐 하나. 이미 일은 벌어졌고 사람은 죽었는데 주인공의 가족은 계속 진실을 알려 달라고 한다. 그래서 결국 진실을 알고 나면 그저 허탈해하고 한 숨만 쉴 뿐 주인공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안다고 해서 뭘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면서 사람들은 늘 진실을 알려 달라고 한다. 진실은 두려운 것이다. 만약 누군가 모르는 것이 낫다고 하면 모르는 채 넘어가는 게 방법일지도 모른다.


예전에도 전쟁에 공을 세운 선무공신의 공신은 하대하고 호성공신, 요컨대 내시나 왕의 짐꾼들은 1등 공신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원균이 1등 공신에 들어가 있기도 했다. 공신록이 뒤집어져서 사실과 진실이 모호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떤 강가에서 사람이 빠져 죽는 일이 일어났다고 치자. 둑에 발을 헛디뎌 강에 떨어졌다. 허우적거렸지만 힘이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런데 일주일 후 강의 맞은편 아파트에 살고 있는 사람이 그날 뷰가 좋아서 강을 보고 있는데 그때 그 사람이 강에 빠질 때 그 앞에 한 사람이 있었다고 했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 앞에 있던 사람이 밀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아파트의 또 한 사람도 그렇게 증언을 한 것이다. 경찰은 맞은편 아파트에서 뷰가 좋아서 강을 보고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 시각 강변의 시시티브이를 확인하고 그때 강가에 나온 사람들을 탐문수사를 했다. 빠져 죽은 사람 앞에 있던 한 사람을 찾아냈다. 공교롭게도 그 사람은 전과자였다. 그 사람이 강에 빠져 죽은 사람을 밀었다고 생각하고 잡아서 심문에 들어갔다. 사실은 발을 헛디뎌 빠져 죽은 것이지만 진실은 그 앞에 있던 사람이 지나가는 모습이 맞은편 아파트에서 보는 각도에서는 마치 밀어서 강에 빠지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은 있지만 진실은 사실과 멀리 있는 경우는 아주 많다.


토요일에 회사 직원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이건 사실이다. 결혼식에서 웃으며 직원을 축하했다. 이것 역시 사실이다. 그러나 진실은 쉬고 싶은 주말에 회사의 경조사에 가는 일은 너무나 싫다. 이게 어른이 되면 해야 하는 당연한 일이라 그렇게 하는 것뿐이다. 정말 싫고 진짜 싫다. 이게 진실이다.


자살이 많은 사실을 줄이려고 번개탄 생산을 줄이는 게 진실일까. 8점이면 8점이지 9점에 가까운 8점은 뭘까. 시력이 좋지 않으면 활 쏘기도 힘들 텐데. 그래서 진실은 알고 싶지 않다. 사실만 있으면 된다. 사실과 진실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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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네버 렛 미 고’를 봤다.  겉으로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흘러가지만 그 속을 벌리면 너무 잔혹하고 잔인한 현실이 가득한 영화다.


보고 나면 그러지 않으려 해도 미미한 음식물이 계속 위에 붙어서 소화가 안 되는 것처럼 잔상이 어디를 가도 따라다닌다.


중년이 되기 전에 장기를 하나씩 기증하고 세상에서 사라져야 하는 운명 가지고 태어난 복제인간들. 아직 아이들이었을 시절에 그 모습이 안타까워 그 사실을 말해주는 루시 선생님.


그 사실을 아이들에게 말해주고 그녀는 기숙학교를 떠나고 만다. 샐리 호킨스가 아이들을 바라보는 그 표정이 기억에 남는다.


이 영화는 분명 판타지 에스에프 영화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하나의 목적에 의해서 탄생된 주인공들은 그들의 삶을 받아들인다. 나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 요양원에 들어가는 것이 아닌 나의 병을 받아들이기 위해 요양원에 들어가는 상실의 시대의 나오코처럼.


이 영화 속 캐시와 토미, 루스처럼 존재하는 이유를 알아가고 그 가치를 깨닫는 현실의 인간이 있다면 친구를 해도 되리라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영혼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네버 렛 미 고를 본 사람과 친구가 되어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 https://youtu.be/j6wYBA73qNo frameon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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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추를 뿌려 먹으면 맛있는 것들이 있다. 생선구이도 그렇다. 후추는 묘하지만 맛보다는 향 때문에 뿌려 먹게 된다. 후추는 인도가 원산지다. 이 후추가 유럽에는 400년경 아라비아 상인을 통해 전해졌다. 그 오래전 유럽에서는 후추를 불로장수의 정력제라고 믿었다 한다. 그래서 금이나 은보다도 비싼 값으로 거래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고려시대에 들어왔을 정도로 오래되었다. 그때에도 후추는 수입품목이라 아주 귀중한 물품이었다고 한다. 후추에 대한 일화가 많은데 우리 조상들도 예전에 얼마나 후추를 좋아하고 귀중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다.


지식백과를 보면 이 후추의 일화를 말했는데, 선조 때 일본사신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당시 도요토미는 조선 침략의 야심을 품고 사신들에게 우리나라의 사정을 염탐하게 했다. 서울로 오는 도중 침략에 대란 아무런 대비가 없는 지방의 실정을 본 사신들은 온갖 오만불손한 언행을 일삼았으나 외국의 사신이었던 만큼 서울에서는 그들을 맞이하여 동평관에서 주연을 베풀었다.


술잔이 돌고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때 일본 사신 하나가 후추를 꺼내서 술좌석에 마구 뿌렸다. 그러자 자리를 같이 했던 벼슬아치, 악공, 춤을 추던 기생 할 것이 서로 마구 뒤섞여 후추를 줍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며 일본 사신들이 조선에는 규율이 문란하고 엉망진창이니 이 나라를 침략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고 야심을 굳혔다고 한다.


겸공을 본 사람을 깜짝 놀랐을 텐데 이 후추 10알만 넣고 끓인 숭어국은 정말 맛있게 보였다. 평양음식으로 오직 물과 싱싱한 숭어와 후추 10알을 넣고 10분에서 15분만 끓이면 고급지게 보이는 탕이 조리되었다.


나는 이 순 후추를 늘 가방에 넣어서 다니고 있다. 그래서 집 밖에서 음식을 먹을 때 – 컵라면을 먹을 때에도, 후추가 없는 식당에서 음식을 먹을 때에도 후추를 솔솔 뿌려서 먹기도 한다. 이렇게 노릇노릇하게 생선을 잘 구워 잘라먹을 때 후추를 솔솔 뿌려 먹는 맛이 있다. 약간 껍질이 있는 생선을 구워서 먹을 때 맛있는 것 같다.


후추는 내가 일하는 곳의 청소와 비슷하다. 바닥 청소를 매일 하는데 매일 해도 표가 나지 않는다. 했는지 안 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이상하지만 청소를 하지 않으면 표가 많이 난다. 후추도 비슷한 것 같다. 그리고 세상에는 후추 같은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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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필의 '걷고 싶다' 가사가 참 좋아서 열 번을 넘게 듣다 보니 또 지겨워졌다 변덕이 간에 붙었다 위장에 붙었다 참 다양한 포지션을 취한다 그러다 오 분 정도 지나면 또 듣고 싶다 어떻든 가사가 참 좋다 이렇게 지겹다 하면서도 자꾸 듣게 되는 것은 마치 고통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 고통 덕분에 살아있다고 느끼는 것과 흡사하다 가사를 계속 곱씹게 되는 것은 추억 때문일지도 모른다 보드라운 네 손을 품에 넣고 걸었던 그 기억이 추억 속에서 내내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잊지 못하는 추억은 뒤의 또 다른 추억으로 덮으면 되는데 추억과 추억이 마주치면 일어나는 설명 하지 못하는 현상은 죽을 때까지 알지 못할 것이다 알 수 없는 양가감정은 야들한 내면을 면도날로 가르고 간다 동시에 차가워진 한 부분을 따뜻하게 데워준다 우연이 우연을 만나고 우연이 우연과 교차하면 그것은 과연 우연일까 하는 생각들이 조용필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벌처럼 머릿속에서 윙윙거린다 모든 것이 바뀌는 애매한 계절이다 시리지만 냉정한 계절이고, 춥지만 뜨거운 해가 살아있는 계절이다 이런 애매한 계절에는 뭔가가 앞뒤가 바뀐다 무색이던 것들이 먼지를 털듯 무색을 털어내고 피로 물드는 붉은색으로 바뀌고 그렇게 미친 듯이 울어대던 바람의 아름다운 소리를 신이 몽땅 가져가 버렸다 사람들은 계절에 맞게 옷을 꺼내 입고 미처 계절에 부흥하지 못한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은 부흥한 이들의 눈총을 받거나 애처로운 눈빛을 받기도 한다 이 모든 것들을 품고 눈을 살며시 감게 해주는 '걷고 싶다'를 듣고 있다




걷고 싶다 https://youtu.be/kumMqZaEZ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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