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모든 것을 흡수해버릴 정도로 사랑하는 것도 즐겁기만 할 수는 없다. 행복으로 충만했던 나의 모든 것과 나는 커 갈수록 고통을 알게 되고, 상처를 받고, 그 상처는 흉터가 되어 영원히 나의 마음 어느 구석에 남아 있다는 것 또한 알지 못했다.

부모는 이혼하고, 여자 친구는 떠나고, 여동생들은 엄마를 따라 가버리고, 아버지는 초췌한 모습으로 일에만 몰두하고 나는 공황장애를 겪으며 그런 아버지 옆에 남아서 나의 모든 것인 영화에서도 멀어져 버렸다.

처음 영화를 보고 온 마음을 다 빼앗겨 버렸을 때의 나는 지금 없어지고, 그때의 나를 데리고 극장에 왔던 사랑하는 엄마는 아빠의 친구에게로 가버렸다.

구원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절망 끝에 가니 희망이라는 빛이 쪼그리고 앉아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에도 영화는 만들어져야 하고, 사람들은 나의 영화를 봐야 한다.

나는 낙관을 보았다. 배고프지 않았다면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몰랐을 것이다. 특별함은 특별하지 않는 평범한 것에서 나온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조심스럽게 꺼내는 영사기 속의 나의 밝은 고백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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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판 카프카 온 더 쇼우


해변의 카프카는 연극으로 태어나서 더 많은 인기를 끌었다. 많은 평론가들이 하루키의 문체는 영화적 문채와 연극으로 연출이 어렵다고 했는데 그간 하루키의 많은 소설이 영화가 되었고 해변의 카프카는 연극으로 재탄생되었다. 영화는 정말 많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대부분 재미있다.


해변의 카프카 연극 일본 버전으로 사에키 상은 미야자와 리에가 맡았다. 그녀는 토니 타키타니에서 에이코와 하사코, 1인 2역을 맡기도 했다. 호리호리 분명 같은 모습이지만 다른 모습을 표현했다. 여자이지만 남자인 오시마 상으로 후지키 나오히토가 맡았다. 그가 우리에게는 호타루의 빛에서 부쵸로 잘 알려져 있다. 건어물녀 호타루와 티격태격하다가 둘이 러브라인이 그려지는 호타루의 빛은 재미있었다. 해변의 카프카 연극의 주인공 다무라 녀석으로 후루하타 니노가 나오는데 잘 모르는 배우다.


해변의 카프카 연극이 인기가 많아져서 우리나라 버전으로도 2013년에 연극으로 연출이 되었다. 이런 연극을 보려면 일단 서울에 서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해변의 카프카에는 모두가 좋아하는 할아버지 커넬 샌더스가 나온다.


커넬 샌더스는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에서 살아난다. 실체가 아니라 관념으로 다시 태어나 호시노 청년에게 다가간다. 메타포가 아니라 이데아로 나타난다. 커넬이 흥미로웠던 건 헤겔 같은 철학적 말을 막 한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하루키는 커넬을 빌려 ‘주체’와 ‘주체아’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우리는 보통 바다를 보면 아름답다고 느낀다. 그 대부분 주체를 바다라 단정하고 주체 자체가 아름답다 느낀다. 그때 우리는 주체아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다. 만약 내가 아파서 움직이지 못하고 겨우 숨만 쉬는 상태에 바다에 나갔어도 바다를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을까. 내 아프고 귀찮은데 바다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나, 그러니까 주체아인 나 자신이 아름답기에 내가 바라보는 주체인 바다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다.

 

아무래도 해변의 카프카에 잠깐 등장한 커넬 샌더스는 호시노 청년에게 그것을 말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주체만 보지 말고 주체아를 인지하라고. 내가 하는 실수가 실패가 아니라 실력이 되는 것이라고. 그리하여 호시노 청년은 자신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생을 살아왔고 그런 인간이라고만 생각했지만 입구의 돌을 가지고 세상을 구원하는 지혜와 힘을 가지게 된다.


너무나 흥미로운 해변의 카프카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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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란 무엇인지 예전에 한 번 올렸는데 그 글이 집의 편안함을 말한다면 https://blog.naver.com/drillmasteer/222604268489


이번에는 좀 호러블 하다는 것을 말하려고 한다. 인간에게 집이란 어떤 곳일까. 집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필요한 3요소 중 하나이다. 집은 어떤 이에게는 살아가는 이유를 준다. 그건 집에서 같이 생활하는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행을 떠나고자 하는 이유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집으로의 여행이 가장 좋은 여행이다. 호텔 같은 곳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집 같은 속박시설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다.


집이라는 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장소이기에 나만의 방법으로 나만이 쉴 수 있는 공간이다. 그런 편안한 집도 머물러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떠나고 싶은 게 또 집이다. 지겹고 심심하기만 하다. 집이란 악착같이 들어가고 싶은 곳인 동시에 어떻게든 떠나고 싶은 곳이기도 한, 세상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장소이다.


대학교 시절 집을 떠나 자취를 했다. 그 역시 어떤 식으로 보면 여행이다. 주말에 가끔 집으로 오면 그렇게 편안하고 좋을 수가 없다. 군대도 마찬가지다. 내부반에서 고참이 되면 편안하게 잠이 들지만 집 같은 기분은 느끼지 못한다. 결국 집으로의 여행인 것이다. 집은 보통 이런 느낌이다.


하지만 집의 대문을 걸어 잠그는 순간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가 없다. 그 안은 또 다른 세계다. 그 속에서는 폭행이 일어나도, 일그러진 성적 욕망을 채워도, 사이비 종교 활동을 해도, 기르는 반려동물을 죽여도 집 밖에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 여자 자신의 아들과 섹스를 한데.

누가 그래?

동네 사람들은 다 알고 있어.

아들이 중학교 때 따돌림을 당하고 집밖으로 안 나가기 시작했지. 그러면서 컴퓨터만 한 거야. 그러면서 성인 동영상도 보게 된 거지. 그러다가 고등학생이 된 거야. 다른 애들은 전부 학교에 가지만 그 애만 집에서 나이가 들어갔던 거지. 아들이 엄마에게 자위를 도와달라고 했던 거야. 엄마는 아들의 자위를 해 주었고 그게 습관처럼 되었지. 아들은 엄마의 가슴을 만지면서 사정을 한 거야. 밥을 들고 방으로 엄마가 들어오면 아들은 엄마의 옷을 벗겨 가슴을 만지고 자위를 시켰다. 그때 엄마가 왜 그러냐고 머라고 하면 아들은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고 칼로 자신의 목을 긋는다며 엄마를 겁주었지. 결국은 엄마는 아들에게 섹스까지 허용한 거야.

그럼 그 집 아빠는?

아빠는 그 이전부터 바람을 피우고 있었는데 아들과 마누라의 그런 장면을 목격을 한 거야. 그 뒤로 집을 나가버린 거지.

그 집 여자 생활비를 벌어야 하니까 얼굴을 까고 그걸 외국의 음란 사이트에 올려 버린 거야. 세금 없는 돈을 꽤 많이 번 것으로 알아.

그럼 아직도?

아직도 뭐? 아들과 그러냐고? 그게 일반 사람들은 이해가 가지 않지만 인간이라는 게 어떠한 선, 우리가 그어놓은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선, 그 선을 넘기가 너무 어려운데 일단 한 번 넘고 나면 그 뒤로는 큰 문제로 여기지 않게 되는 것 같아. 집 현관문을 닫는 순간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밖에서는 누구도 알 수 없지. 저 집 같은 가족이 아마 엄청 많을 걸.


집이란 추억과 비슷하다. 추억은 가슴 저 안쪽에서부터 따뜻함을 주기도 하지만 마음 안쪽으로부터 칼로 도려내는 듯한 아픔도 준다. 집은 따뜻하고 편안한 곳인 동시에 서늘하고 불편한 곳이기도 하다. 아동학대의 대부분은 부모에게 일어나고 부모는 대부분 집 안에서 자신의 자식을 학대한다. 끔찍한 일이다. 그래서 전원일기의 시골의 집들처럼 서로 들여다 보고 관심을 가지는 게 좋지만 현대사회는 그럴 수 없는 구조가 되었다.


우리나라 공포영화 중에 ‘라이브 TV’라는 영화가 있다. 공포영화다. 그래서 아주 무섭고, 몹시 잔인하다. 이 영화에는 살인마가 등장해서 사람의 머리를 몸에서 분리를 한다. 그리고 그런 장면이 다 나온다. 이 살인마는 서울이라는 거대 도심지에 숨어 있는데 잡히지도 않는다.


거대한 도시에는 수많은 모텔들이 존재한다. 이 수많은 모텔은 고립이며, 고독하고, 폐쇄적이며, 개인의 욕망이 집합되어 있는 또 다른 일그러진 세계인 것이다. 하루키의 소설 ‘어둠의 저편’에 나오는 ‘알파빌' 같은 곳이다. 섹스는 가능하지만 사랑은 이뤄지지 않는, 낮에는 웃는 얼굴을 하고 잠들어 있지만 밤이 되면 폭력이 난무하는 곳이다.


모텔 안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무슨 사건이 벌어지는지 일단 터지고 나야 알 수 있다. 그동안에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개개인의 욕망을 푸는 곳, 지하에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그래서 인간도 알지 못하는 지하실과 하수구들, 꽈리처럼 꼬인 전선들이 인간을 공격한다. 폭력이 마치 정당화되어 벌어지는 도심 속 고독의 공간에서 그 모든 것을 라이브로 생방송을 하다 살인마에게 잡혀 죽는 그런 내용의 영화다. 문을 걸어 닫은 그 안에서는 어떤 폭력이 일어나는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잘 보여주는 영화다.


지난번에 집의 편안함을 말했다면 이번에는 집이 공포인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번에 사망한 인천의 어린이도 양쪽 다리에만 상처, 흉터, 딱지 등 232개나 발견되었다고 한다. 다른 신체 부위에도 여러 차례 걸쳐 맞은 흔적이 있다고 한다. 이 아이에게는 집이라는 곳이 공포의 장소였던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도 아이는 제대로 눈조차 감지 못했다고 한다. 아이의 명복을 빌 뿐이다.


미드 1883을 보면 더튼 가의 딸, 엘사가 ‘세상이 얼마나 잔인하고 무정해질지 알지 못했다. 당신이 죽어도 세상은 신경 쓰지 않는다. 비명도 들어주지 않는다. 피 흘린다면 대지가 마셔버릴 것이다. 당신이 사라져도 아무 상관이 없다. 신을 만난다면 맨 먼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 왜 경이로운 세계를 만들고 그 속에 괴물들로 가득 채우셨냐고. 왜 꽃을 심으시고 그 속에 뱀을 숨겨 두셨냐고. 토네이도는 왜 불어오느냐고. 그러다가 떠올랐다. 그는 우릴 위해 세상을 만든 게 아니라는 걸‘라는 내레이션을 한다. 이 글을 적으면서 이 대사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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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바뀌어 편지를 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다시 벚꽃이 피는 계절이 되었습니다. 여기 앉아서 창밖을 보니 날은 아주 따뜻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흐립니다. 어쩌면 하늘보다 저의 마음이 흐린 거겠지요. 시간은 너무나 순수합니다. 때가 되면 헤헤 거리며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다시 모든 걸 시작하게 합니다. 그래서 무섭습니다. 이 세상의 무서운 것 중 최고라면 순수한 것들입니다. 바로 시간이 그러합니다.


시간이란 아름답거나 포악스럽습니다. 시간은 중간이란 없습니다. 관능의 대상처럼 모호한 욕망의 존재처럼 설명할 수 없습니다. 빛처럼 지나치는가 싶으면 달팽이가 길을 닦아 놓듯 천천히 가버리고 맙니다. 시간은 당신이라는 미스터리 하고 미지적인 기간에 종착점을 가져오고 불행을 암시합니다. 시간은 인간의 적이며 동시에 동맹군입니다. 모든 것을 파괴함과 동시에 새롭게 시작을 알리는 동력원입니다.


시간이란 것은 정말 알 수 없습니다. 시간은 때때로 사람을 조급하게 하거나 서글프게 합니다. 오래전이지만 학창 시절에 일요일 오후 3시가 되면 나는 서글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서글픔은 당시에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강해서 혼자서 마당의 무화과나무 밑에 앉아서 오후 3시를 미워하기도 했습니다. 일요일 오후 3시는 토요일 오후 3시와는 무척 다릅니다. 금요일 오후 3시와도 다르며 월요일 오후 3시와도 다릅니다. 그런 점에서 당신은 시간을 닮았습니다.


당신도 참 알 수 없었지요. 이만큼 다가갔나 싶으면 저만큼 가버리고. 포기하고 싶을 때에는 이만큼 들어와서 나의 곁에 있어 주었지요. 시간이라는 것은 형태가 없고 너무나 기묘해서 사람을 쥐었다 폈다 합니다. 여기저기에서 벚꽃이 팝콘처럼 부풀어 오르기 시작합니다. 당신이 계신 곳은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없어서 좋기도,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겠군요. 봄이라고는 하나 아직 밤은 춥습니다. 봄의 바다가 무척 차거나 너무 차가운 것처럼 말이죠. 그럼 또 편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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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리아 한우버거는 돼지국밥보다 비싸다. 롯데리아 햄버거 하면 새우버거인데 요즘도 새우버거 팔겠지. 결정적으로 햄버거를 나는 달 단위도 아니고 년 단위로 먹을 것이다. 남들이 나에게 햄버거에 대해서 하는 말이 아주 특이하다는 것인데 그중에서도 나는 편의점 햄버거가 가장 맛있다고 느끼고 있다. 일전에 버거킹의 햄버거를 주식으로 먹는 형님이 나에게 하나 사주었는데 패티의 맛이 뭔가 불맛이 약간 나는 게 나와는 맞지 않았다. 무척이나 커서 하나 다 먹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맥도널드 햄버거 중에서는 치즈버거가 단연코 제일 맛있는데, 특유의 맛이 있다. 그 맛이 좋아서 그런지 맥도널드는 치즈버거, 롯데리아는 새우버거지. 여분으로 치즈가 있다면 치즈버거든, 새우버거든 그 안에 하나 더 넣어서 먹으면 좋다. 이렇게 먹는 맛이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은 편의점 햄버거다. 적당히 시원하며(굳이 따뜻하지 않아도 된다 햄버거는) 식감이 있어서 빨리 먹게 되지 않는다. 천천히 씹어 먹기에 편의점 햄버거가 제일이다.


햄버거가 사실 내가 딱 좋아할 만한 음식이다. 나는 김밥을 무척 좋아하는데 가장 큰 이유가 이것저것 다 김밥 안에 있어서 귀찮지 않은 음식이기 때문이다. 햄버거 역시 그렇다. 그 안에 필요한 것이 다 들어 있어서 그냥 햄버거만 들고 먹으면 된다. 김밥처럼 귀찮지 않다. 숟가락으로 뜨고 젓가락 질을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몇 달에 한 번 정도 먹을 뿐이다. 그건 김밥도 그렇다. 김밥을 일 년 동안 거의 매일 사 먹을 때가 있었는데 1년 정도로 끝이 났다.


그런 것을 생각해 보면 좋아한다고, 그 좋아하는 것이 손에 쉽게 쥘 수 있다 하더라도 자주 하게 되지는 않는다. 인간의 삶이라는 게 그런 식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티브이 프로그램 생로병사에서는 햄버거를 매일 먹는 사람이 가지는 질병에 대해서 나오고, 미국의 다큐 영화 ‘슈퍼사이즈 미’를 보면 매일 햄버거 슈퍼사이즈를 먹고 난 후 안 좋은 쪽으로 몸이 변하는 과정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나는 햄버거가 좋다. 햄버거가 좋은데 매일 먹게 되지는 않는다.


햄버거가 정말 눈물이 날 만큼 맛있게 느껴졌을 때가 언제였더라 생각해 보면 몇 번 있었다. 내가 아주 어릴 때 아버지 회사에서 특식으로 나오는 햄버거가 있었다. 아버지는 점심대신 나오는 그 햄버거를 드시지 않고 들고 와서 나를 먹였다.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다. 또 군대에서 나온 군대리아다. 군대리아는 먹는 방법도 다양하고 가지각색이다. 딸기잼을 활용하는 놈, 내용물은 그냥 먹고 빵은 우유에 말아먹는 놈 – 빵을 우유에 말아서 먹으면 맛있었다, 기존 햄버거처럼 빵과 빵 사이에 내용물을 넣어서 야무지게 먹는 놈 아무튼 군대리아는 맛있었다. 정말 눈물이 쏙 나올 만큼 맛있었던 것이다.


영화 ‘더 메뉴’가 얼마 전에 나왔다. 억지춘향 같은 영화였다. 안냐 테일러 조이가 나오고, 니콜라스 홀트에 랄프 파인즈가 나오는 기상천외한 요리이야기라 아주 기대하며 봤지만 똥망인 영화였다. 유명셰프가 된 볼트모트가 돈 많은 재벌들을 식사에 초대해서 아작 내는 스릴러 이야기라지만 재미는 없다.

전위적이고 아방가르드, 아크로바틱 한 스토리와 장면을 요리라는 것에 접목시켜 뭔가를 보여주려고 했지만 뭘 보여주겠다는 건지 아무도 모를 영화였다. 세상의 불만을 잔뜩 품은, 정신이 확 돌아버린 유명 셰프가 된 볼트모트가 지 요리에 스토리텔링을 입혀 멋진 방법으로 모두를 죽이면서 끝내려 했으나 결국 치즈버거로 마무리 짓는 영화였다.


이 영화에서 치즈버거가 가지는 어떤 메타포를 말하라고 했던 모양인데 마지막에 치즈버거를 먹는 장면, 그 한 장면이라도 맛있게 보였다면 참 좋겠지만 살아남은 안냐 테일러 조이가 맛있게 먹지 못한다. 치즈버거 먹방은 아이언맨 토니 스타크가 1편에서 살아 나와서 먹을 때 아주 맛있게 먹는다. 치즈버거는 그렇게 먹어야 한다.


그래도 한우버거는 가격이 세다. 소고기를 구워서 편의점 햄버거에 안에 넣어서 먹어봐야겠다. 어떻든 햄버거는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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