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에 나온 BTS의 버터플라이의 가사는 서사를 보는 듯했다. 모순의 배위(背違)를 뒤집어서 또 다른 내가 된 나는 나의 육체는 그대로 두고 나비의 몸을 빌려 내가 사랑하는 그 소녀에게 다가가는 이야기가 보였다. 너무 좋다는 말이지.

버터플라이의 서사를 깊이 있게 표현하려고 작사에 참여한 아티스트들이 많았다. 여기에는 랩몬 남준이 외에도 방시혁, 호비, 브라더수 외에도 몇 명이 더 참여를 했다.

이 가사가 이렇게 서사에 가깝게 들리는 이유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부분은 남준이가 하는 랩 파트 부분 때문이다.

심장은 메마른 소리를 내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네

나의 해변의 카프카여

저기 숲으로 가진 말아줘

내 마음은 아직 너 위에 부서져

조각조각 까맣게 녹아 흘러

내 사랑은 영원한 걸

독서광 남준이는 해변의 카프카를 너무 좋아하고 이 소설을 염두에 두고 버터플라이의 가사를 썼다고 한다.

하루키 팬들이라면 여기 7줄의 랩 가사만 보더라도 서사를 대번에 알 수 있다. 나비는 늘 초현실적인 존재로 표현이 되어 왔다. 웰컴 투 동막골에서도 나비를 따라 들어갔더니 외부 세계와는 단절된 삶을 사는 동막골로 가게 되었다.

나비는 지구상의 생명체 중에 중력을 거스르는 날갯짓을 한다. 일정한 패턴으로 날지 않는다. 마치 바람이 불면 없어져 버릴 것 같은데 그 속에서도 나비는 가고 싶은 곳에는 가고 만다. 나비라는 존재는 이계와 이 세계를 넘나드는 유일무이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해변의 카프카를 보면 15살 다무라는 50살이 넘은 사에키 상에게 나이 따이는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마치 한 마리의 나비가 되어 어떤 경계를 넘어 15살 사에키를 만난다. 무엇보다 방탄이들이 안무로 이 모든 걸 표현했다는 것이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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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면 우나기에서 야쿠쇼 코지가 바람피우는 아내를 칼로 찔러 죽이는 장면이 떠오른다. 아내는 마치 불꽃처럼 쾌락과 동시에 소멸하는 죽음을 동시에 맛보았다. 불꽃은 벚꽃의 미학을 닮았다.

야마시타 타쿠로는 아내를 죽인 칼을 들고 곧바로 경찰서로 가서 자수를 한다. 그리고 복역을 하는 동안 한 마리의 장어를 키운다. 가석방되어서 치바 현의 시골에서 이발소를 하는데 케이코라는 기묘한 여인이 이발소에서 일을 하게 된다.

야마시타는 케이코가 자신의 아내와 너무 닮았다는 것을 알고 케이코에게 거의 마음을 열지 않는다. 야마시타가 마음을 터놓는 존재는 우나기, 장어뿐이다. 이 영화에는 초현실적인 존재와 장면이 꽤 나온다.

유에프오를 진심으로 기다리는 전기공, 붉은 스포츠카를 모는 만화에서나 볼법한 양아치와 그 외의 마을 사람들. 마음을 열지 않는 야마시타는 자신에게 애정을 품은 케이코에게 어느 날 형무소의 동료가 밤에 찾아와 케이코에게 야마시타의 과거를 말한다.

초현실 존재 같은 마을 사람들은 모두 수족관에서 나온 장어를 구하려 하고, 야마시타를 대신해서 싸움을 하고 케이코를 아낀다. 인간관계가 서툰 사람들이 장어를 통해 서로를 알아간다. 야마시타는 케이코의 일에 휘말리고, 기쁘지는 않지만 슬프지 않게 끝나서 좋다. 시미즈 미사는 아내와 케이코 1인 2역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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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모든 것을 흡수해버릴 정도로 사랑하는 것도 즐겁기만 할 수는 없다. 행복으로 충만했던 나의 모든 것과 나는 커 갈수록 고통을 알게 되고, 상처를 받고, 그 상처는 흉터가 되어 영원히 나의 마음 어느 구석에 남아 있다는 것 또한 알지 못했다.

부모는 이혼하고, 여자 친구는 떠나고, 여동생들은 엄마를 따라 가버리고, 아버지는 초췌한 모습으로 일에만 몰두하고 나는 공황장애를 겪으며 그런 아버지 옆에 남아서 나의 모든 것인 영화에서도 멀어져 버렸다.

처음 영화를 보고 온 마음을 다 빼앗겨 버렸을 때의 나는 지금 없어지고, 그때의 나를 데리고 극장에 왔던 사랑하는 엄마는 아빠의 친구에게로 가버렸다.

구원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절망 끝에 가니 희망이라는 빛이 쪼그리고 앉아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에도 영화는 만들어져야 하고, 사람들은 나의 영화를 봐야 한다.

나는 낙관을 보았다. 배고프지 않았다면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몰랐을 것이다. 특별함은 특별하지 않는 평범한 것에서 나온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조심스럽게 꺼내는 영사기 속의 나의 밝은 고백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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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판 카프카 온 더 쇼우


해변의 카프카는 연극으로 태어나서 더 많은 인기를 끌었다. 많은 평론가들이 하루키의 문체는 영화적 문채와 연극으로 연출이 어렵다고 했는데 그간 하루키의 많은 소설이 영화가 되었고 해변의 카프카는 연극으로 재탄생되었다. 영화는 정말 많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대부분 재미있다.


해변의 카프카 연극 일본 버전으로 사에키 상은 미야자와 리에가 맡았다. 그녀는 토니 타키타니에서 에이코와 하사코, 1인 2역을 맡기도 했다. 호리호리 분명 같은 모습이지만 다른 모습을 표현했다. 여자이지만 남자인 오시마 상으로 후지키 나오히토가 맡았다. 그가 우리에게는 호타루의 빛에서 부쵸로 잘 알려져 있다. 건어물녀 호타루와 티격태격하다가 둘이 러브라인이 그려지는 호타루의 빛은 재미있었다. 해변의 카프카 연극의 주인공 다무라 녀석으로 후루하타 니노가 나오는데 잘 모르는 배우다.


해변의 카프카 연극이 인기가 많아져서 우리나라 버전으로도 2013년에 연극으로 연출이 되었다. 이런 연극을 보려면 일단 서울에 서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해변의 카프카에는 모두가 좋아하는 할아버지 커넬 샌더스가 나온다.


커넬 샌더스는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에서 살아난다. 실체가 아니라 관념으로 다시 태어나 호시노 청년에게 다가간다. 메타포가 아니라 이데아로 나타난다. 커넬이 흥미로웠던 건 헤겔 같은 철학적 말을 막 한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하루키는 커넬을 빌려 ‘주체’와 ‘주체아’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우리는 보통 바다를 보면 아름답다고 느낀다. 그 대부분 주체를 바다라 단정하고 주체 자체가 아름답다 느낀다. 그때 우리는 주체아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다. 만약 내가 아파서 움직이지 못하고 겨우 숨만 쉬는 상태에 바다에 나갔어도 바다를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을까. 내 아프고 귀찮은데 바다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나, 그러니까 주체아인 나 자신이 아름답기에 내가 바라보는 주체인 바다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다.

 

아무래도 해변의 카프카에 잠깐 등장한 커넬 샌더스는 호시노 청년에게 그것을 말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주체만 보지 말고 주체아를 인지하라고. 내가 하는 실수가 실패가 아니라 실력이 되는 것이라고. 그리하여 호시노 청년은 자신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생을 살아왔고 그런 인간이라고만 생각했지만 입구의 돌을 가지고 세상을 구원하는 지혜와 힘을 가지게 된다.


너무나 흥미로운 해변의 카프카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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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란 무엇인지 예전에 한 번 올렸는데 그 글이 집의 편안함을 말한다면 https://blog.naver.com/drillmasteer/222604268489


이번에는 좀 호러블 하다는 것을 말하려고 한다. 인간에게 집이란 어떤 곳일까. 집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필요한 3요소 중 하나이다. 집은 어떤 이에게는 살아가는 이유를 준다. 그건 집에서 같이 생활하는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행을 떠나고자 하는 이유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집으로의 여행이 가장 좋은 여행이다. 호텔 같은 곳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집 같은 속박시설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다.


집이라는 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장소이기에 나만의 방법으로 나만이 쉴 수 있는 공간이다. 그런 편안한 집도 머물러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떠나고 싶은 게 또 집이다. 지겹고 심심하기만 하다. 집이란 악착같이 들어가고 싶은 곳인 동시에 어떻게든 떠나고 싶은 곳이기도 한, 세상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장소이다.


대학교 시절 집을 떠나 자취를 했다. 그 역시 어떤 식으로 보면 여행이다. 주말에 가끔 집으로 오면 그렇게 편안하고 좋을 수가 없다. 군대도 마찬가지다. 내부반에서 고참이 되면 편안하게 잠이 들지만 집 같은 기분은 느끼지 못한다. 결국 집으로의 여행인 것이다. 집은 보통 이런 느낌이다.


하지만 집의 대문을 걸어 잠그는 순간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가 없다. 그 안은 또 다른 세계다. 그 속에서는 폭행이 일어나도, 일그러진 성적 욕망을 채워도, 사이비 종교 활동을 해도, 기르는 반려동물을 죽여도 집 밖에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 여자 자신의 아들과 섹스를 한데.

누가 그래?

동네 사람들은 다 알고 있어.

아들이 중학교 때 따돌림을 당하고 집밖으로 안 나가기 시작했지. 그러면서 컴퓨터만 한 거야. 그러면서 성인 동영상도 보게 된 거지. 그러다가 고등학생이 된 거야. 다른 애들은 전부 학교에 가지만 그 애만 집에서 나이가 들어갔던 거지. 아들이 엄마에게 자위를 도와달라고 했던 거야. 엄마는 아들의 자위를 해 주었고 그게 습관처럼 되었지. 아들은 엄마의 가슴을 만지면서 사정을 한 거야. 밥을 들고 방으로 엄마가 들어오면 아들은 엄마의 옷을 벗겨 가슴을 만지고 자위를 시켰다. 그때 엄마가 왜 그러냐고 머라고 하면 아들은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고 칼로 자신의 목을 긋는다며 엄마를 겁주었지. 결국은 엄마는 아들에게 섹스까지 허용한 거야.

그럼 그 집 아빠는?

아빠는 그 이전부터 바람을 피우고 있었는데 아들과 마누라의 그런 장면을 목격을 한 거야. 그 뒤로 집을 나가버린 거지.

그 집 여자 생활비를 벌어야 하니까 얼굴을 까고 그걸 외국의 음란 사이트에 올려 버린 거야. 세금 없는 돈을 꽤 많이 번 것으로 알아.

그럼 아직도?

아직도 뭐? 아들과 그러냐고? 그게 일반 사람들은 이해가 가지 않지만 인간이라는 게 어떠한 선, 우리가 그어놓은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선, 그 선을 넘기가 너무 어려운데 일단 한 번 넘고 나면 그 뒤로는 큰 문제로 여기지 않게 되는 것 같아. 집 현관문을 닫는 순간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밖에서는 누구도 알 수 없지. 저 집 같은 가족이 아마 엄청 많을 걸.


집이란 추억과 비슷하다. 추억은 가슴 저 안쪽에서부터 따뜻함을 주기도 하지만 마음 안쪽으로부터 칼로 도려내는 듯한 아픔도 준다. 집은 따뜻하고 편안한 곳인 동시에 서늘하고 불편한 곳이기도 하다. 아동학대의 대부분은 부모에게 일어나고 부모는 대부분 집 안에서 자신의 자식을 학대한다. 끔찍한 일이다. 그래서 전원일기의 시골의 집들처럼 서로 들여다 보고 관심을 가지는 게 좋지만 현대사회는 그럴 수 없는 구조가 되었다.


우리나라 공포영화 중에 ‘라이브 TV’라는 영화가 있다. 공포영화다. 그래서 아주 무섭고, 몹시 잔인하다. 이 영화에는 살인마가 등장해서 사람의 머리를 몸에서 분리를 한다. 그리고 그런 장면이 다 나온다. 이 살인마는 서울이라는 거대 도심지에 숨어 있는데 잡히지도 않는다.


거대한 도시에는 수많은 모텔들이 존재한다. 이 수많은 모텔은 고립이며, 고독하고, 폐쇄적이며, 개인의 욕망이 집합되어 있는 또 다른 일그러진 세계인 것이다. 하루키의 소설 ‘어둠의 저편’에 나오는 ‘알파빌' 같은 곳이다. 섹스는 가능하지만 사랑은 이뤄지지 않는, 낮에는 웃는 얼굴을 하고 잠들어 있지만 밤이 되면 폭력이 난무하는 곳이다.


모텔 안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무슨 사건이 벌어지는지 일단 터지고 나야 알 수 있다. 그동안에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개개인의 욕망을 푸는 곳, 지하에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그래서 인간도 알지 못하는 지하실과 하수구들, 꽈리처럼 꼬인 전선들이 인간을 공격한다. 폭력이 마치 정당화되어 벌어지는 도심 속 고독의 공간에서 그 모든 것을 라이브로 생방송을 하다 살인마에게 잡혀 죽는 그런 내용의 영화다. 문을 걸어 닫은 그 안에서는 어떤 폭력이 일어나는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잘 보여주는 영화다.


지난번에 집의 편안함을 말했다면 이번에는 집이 공포인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번에 사망한 인천의 어린이도 양쪽 다리에만 상처, 흉터, 딱지 등 232개나 발견되었다고 한다. 다른 신체 부위에도 여러 차례 걸쳐 맞은 흔적이 있다고 한다. 이 아이에게는 집이라는 곳이 공포의 장소였던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도 아이는 제대로 눈조차 감지 못했다고 한다. 아이의 명복을 빌 뿐이다.


미드 1883을 보면 더튼 가의 딸, 엘사가 ‘세상이 얼마나 잔인하고 무정해질지 알지 못했다. 당신이 죽어도 세상은 신경 쓰지 않는다. 비명도 들어주지 않는다. 피 흘린다면 대지가 마셔버릴 것이다. 당신이 사라져도 아무 상관이 없다. 신을 만난다면 맨 먼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 왜 경이로운 세계를 만들고 그 속에 괴물들로 가득 채우셨냐고. 왜 꽃을 심으시고 그 속에 뱀을 숨겨 두셨냐고. 토네이도는 왜 불어오느냐고. 그러다가 떠올랐다. 그는 우릴 위해 세상을 만든 게 아니라는 걸‘라는 내레이션을 한다. 이 글을 적으면서 이 대사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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