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BYFiiJy5ioE 뽕을 찾아서 [예고편 같은 영상]


이오공이 앨범을 냈다. 뱅버스에서 주체할 수 없는 어깨의 들썩임이 온몸을 타고 오더니 마지막 휘날레에서는 느닷없이 눈물이 줄줄 흘렀다. 이상하고 이상했다. 뽕 끼 가득한 앨범 속 노래들인데 마지막까지 다 듣고 나니 알 수 없는 슬픔, 어떤 밝은 슬픔, 기쁜 슬픔 같은 것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정말 이상하고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오공의 다큐가 있다. ‘뽕을 찾아서’다. 스브스에서 제작을 했는데 그 모든 편이 유튜브에 있다. 생활 속에서 뽕을 찾아가는 다큐멘터리다. 이오공은 가까이 있는 생활의 소리에 얼마나 많은 음악요소가 숨이 있는지, 뽕 끼가 있는지 찾아낸다. 그 여정을, 그 힘들고 긴 여정을 지치지 않고 즐겁게 찾아다닌다.


앨범 첫 시작의 ‘모든 것이 꿈이었네’를 들으면 흥얼흥얼 하게 된다. 본능적으로 이 리듬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도 흥얼흥얼 웅얼웅얼 따라 하게 된다. 그러다가 가사를 보면 ‘하얀 나비’ 같은 그런 서정이 가득하다. 슬프다. 이상하지만 슬프다.


뽕 끼 충만한 노래, 그야말로 전통시장의 각설이가 틀어 놓은 듯, 그 음악 같은 ‘뱅버스’를 듣고 있으면 아싸라비아 콜롬비아 야호, 으허 하며 관광버스 춤을 추게 된다. 한 번 들어보시게. 이야호 하며 들썩들썩하게 된다. 그런데 이 음악, 뮤직비디오가 있다. 주인공은 마구 달린다. 달리고 또 달린다. 그러다가 넘어지는데 하필 개똥에 넘어진다. 하지만 또 달린다. 그런데 그 밑에 누군가 댓글을 달았다. ‘나는 분명 살려고 달렸는데 어느 순간부터 달리기 위해 사는 나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구나’라고 달았다. 이렇게 미칠 듯이 신나는 음악인데 이상하지만 슬프다. https://youtu.be/aunbwaZ7Q1o


'바라보고'를 듣고 있으면 이건 정말 미친 이디엠에 각설이가 절묘, 교묘, 녹아든 음악인데 너무 세련된 거 아니야? 하게 된다.  https://youtu.be/2ySh4h9QEAc


그렇게 죽 다음 곡들을 듣다가 마지막 ‘휘날레’에서는 차오르는 그 슬픔을 헤아릴 길이 없다. 이 앨범에는 소설가 양인자도 작사에 참여를 했고, 이박사와 김수일, 색소포니스트 이정식, 그리고 아기공룡 둘리 주제가를 부른 오승원도 함께 했다.


휘날레는 말 그대로 마지막 곡으로 둘리의 그 목소리 그대로 오승원의 목소리가 담겨있다. 들어보면 리듬이 신나고 낯익은데 이상하지만 애절하고 슬프다. 이오공은 오승원의 목소리에도 뽕이 있고, 뽕은 원래 슬프다고 했다. https://youtu.be/mfmPGG7HHIk 이 영상은 누군가 휘날레를 둘리의 영상에 입혀 놓은 것이다. 이상하지만 슬프다.


이오공은 인터뷰에서 앨범에 여러 뮤지션들이 참여한 것에 대한 질문을 받고, (오승원 선생님은 음악적 요소라기보다는 그냥 목소리만으로 갑자기 나를 어느 순간으로 돌려버리는 느낌이 있어서 만나 보고 싶었다. 오승원 선생님은 찾는 데 한 3년 걸렸다. 그 아드님이 가수인데 ‘스타킹’에 출연한 적이 있어서 검색을 하다가 알게 됐다.


오승원 선생님 목소리는 내가 어린 시절 집에서 부모님 기다리며 혼자 TV 보던 그때를 떠올리게 했다. 둘리는 사실 만화책으로 보면 슬픈 만화가 아니고 명랑하고 밝은 내용인데, TV로 볼 때는 항상 슬펐다. 그게 생각해 보면 주제가 때문이었다. 주제가를 들으면 너무 슬프고, 그 만화에서 어떤 에피소드가 나와도 둘리는 그냥 엄마를 잃은 아이인 거다. 그때 만화 주인공들은 부모님과 떨어진 아이들이 많았다. 까치도 하니도 독고탁도.


그 시절을 돌이켜보니 왜 그렇게 슬펐는지 떠오르더라. 오승원 선생님 영상 중에서 2013년쯤에 고등학교 강당에서 노래 부르는 영상이 있는데, 오승원 선생님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영상에서도 선생님이 ‘둘리’ 주제가를 부르는데, 요리 보고~ 이렇게 한 소절 나오니까 벌써 강당이 온통 난리가 났다. 정말 놀라웠다. 노래가 좋고 안 좋고를 떠나서 모두가 아는 노래를 부른 가수를 생전 처음 본 건데, 한 마디만 들어도 목소리가 애잔하고 너무 똑같더라.


영상에 달린 댓글을 보니까 다들 슬퍼하더라. 나도 비슷했다. 어떤 무언가는 그대로인데, 그 무언가가 맨 처음 각인됐던 기억으로부터 지금은 떨어져 있으니까. 그만큼의 시간이 느껴지는 거였다. 그게 느껴지는 어떤 순간이 ‘노스탤지어’이고 뽕짝의 기본 정서이기도 하다)라고 SBS 인터뷰에서 말했다.


앨범을 들어보면 알겠지만 외국에 다프트 펑크가 있다면 250은 정말 다프트 펑크를 뛰어넘어 다프트 뽕크로 온몸에 전기충격을 준다. 몸을 가만두지 못하게 만들다가 마지막 오승원의 휘날레에서 이상하지만 애잔하게 된다.


즉 우리의 뽕짝의 기본정서는 향수이며 슬픔이다. 그럼 이렇게 음악을 만드는 게 쉬울까 한다면, 나는 음악을 잘 모르지만 너무 어렵다고 생각한다. 밝은 슬픔이 엿보이는, 밝은 슬픔을 말하는 노래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7번 방의 선물 같은 노래도 많다. 이래도 안 슬퍼? 이렇게까지 하는데 슬퍼야지? 같은 노래들. 그러나 뽕끼 충만한 음악을 듣는데 슬픔이 올라오는 건 우리네 정서의 한을 음악에 담아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노스탤지어, 향수 그것은 그리움이다. 우리는 늘 갈비탕을 먹고 남은 찌꺼기마냥 몸속 저 밑에는 그리움이 미미하게 남아있다. 그러다가 뽕짝을 들으면 신나면서 그리움이 위로 올라온다.


SBS 인터뷰 전문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7136966&plink=ORI&cooper=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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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를 달리다 보면 이렇게 신호등이 많이 보인다. 내가 출퇴근하면서 지나치는 신호등이 오고 가고 통틀어서 한 스무 개는 된다. 신호등은 전부 저런 모양새다. 전봇대에 길쭉하게 붙어 있는 게 이무진이 부르는 신호등이다. 이무진의 노래 속 신호등은 형형색색의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오르지만 현실 속 신호등은 다르게 보인다.


신호대기에 멈춰서 신호등을 보며 늘 드는 생각은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다는 생각이다. 불안한다는 말이다. 신호등이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쇠줄 같은 걸로 고정을 해놨지만 바람이 심한 날에는 흔들흔들 곧 떨어질 것만 같다. 모든 신호등이 이런 모양이고, 모든 신호등이 바람이 심하게 불면 흔들흔들거리고, 모든 신호등이 불안하게 보인다.


도로를 달리다 보면 가끔 큰 비닐봉지(세탁기나, 선풍기를 넣었던 것 같은)가 도로 위에서 춤을 추는 경우를 본다. 차들이 생생 지나가면 터뷸런스에 비닐봉지는 하염없이 춤을 춘다. 바람이 불면 이 도로에서 옆의 도로로 넘어가기도 한다. 그러나 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차들이 달리면서 내는 터뷸런스 때문인지 비닐봉지는 한 도로에서 춤을 추고 있다. 모든 차들이 그 비닐봉지를 잘 피해 가지만 한 자동차가 비닐봉지를 밟았을 때 비닐봉지는 이때가 싶어 그 차 바닥에 붙어서 딸려 가기도 한다.


그러면 다른 차들은 당첨되었군, 같은 표정을 짓는다. 그 한 자동차가 바로 나다. 하고많은 자동차들 중에서 왜 하필 나의 차일까. 차 바닥에 붙어서 다다다닥 하는 소리가 몹시도 거슬리게 들린다. 신호대기에 내려서 비닐봉지를 빼버리고 싶어도 신호가 빨리 바뀐다. 뒤에서 차들이 빵빵 거린다. 어휴 재수 없는 일은 늘 나만 당한다. 머피의 법칙은 악착같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저 불안 불안한 신호등이 강한 바람에 떨어질 때 나의 차에 쾅하며 떨어질 것만 같다.

투데이 너트를 먹을 때에도 저 부분을 뜯어서 하나씩 꺼내 먹으면 왜 먹고 싶은 건포도는 나오지 않고 맛없는, 먹기 싫은 아몬드가 계속 나온다. 맛없는 거 먹고 나서 맛있는 거 먹으면 되잖아?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하나씩 꺼내 먹을 때 나는 건포도를 먼저 꺼내먹고 싶은데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어째서 먹기 싫은 아몬드만 계속 나오는 걸까.


이건 내 뜻대로 되고 안 되고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신호등이 불안하게 보이는 것은 그렇게 생겨 먹은 것이다. 도로 위의 거대한 비닐봉지가 춤을 추고 있다가 나의 차에 들러붙는 것도 나의 의지와 무관하다. 그건 그렇게 생겨 먹은 것이다. 건포도가 처음부터 나오지 않고 아몬드만 줄곧 나오는 것도 그렇게 생겨 먹은 것이다. 넌 여전히 못 생기고 있나? 와 비슷하다. 생긴 건 의지나 뜻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신호등과 건포도와 비닐봉지는 인위적인 것이지만 인간의 의지가 개입할 수 없는, 알 수 없는 무엇이 있는, 그렇게 생겨먹은 세계다.


그렇게 생겨 먹은 것들은 보통 타고 난다. 나는 매일 아침 일정한 시간에 배변활동을 한다. 그 시간이 기가 막히게 30분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 시간이 오전 8시에서 8시 30분 사이다. 매일 그 시간이면 어김없이 밀어내기를 하고 있다. 물론 지금까지 그렇게 하고 있는데, 그 시간에 배변활동을 못했을 때도 있었다. 그때가 군 입대 했을 때였다. 단체생활을 하고 있을 때 내 마음대로 배변활동을 할 수는 없다.


매일 비슷한 시간에 밀어내기를 하니까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전부 건강해서 그런 거라고 말한다. 사실 건강하면 하루 중 아무 때나 밀어내고 싶을 때 밀어낼 수 있는 몸이 건강한 몸 같은데. 내가 생각할 때 건강한 몸은 그런 몸이라 생각한다. 밀어내기를 할 시간에 밀어내지 못하면 엄청난 압박감이 든다. 만약 그 시간에 밀어내기를 하지 못하고 운전을 했다고 치면, 아 정말 식은땀 난다.


이렇게 된 이유에는 날 때부터 안 좋은 위를 타고난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위가 좋지 못해서 소화를 잘 못 시키고, 조금만 많이 먹으면 소화가 안 되어서 트림이 나오고 소화제를 먹어야 한다. 그런 위를 가지고 태어났다. 하루에 한 시간 정도 조깅을 한 후로는 늘 더부룩한 속이 사라져서 조깅을 하는 것을 멈출 수는 없다.


먹는 양이 많아지면 다음 날 배변활동을 할 때 뭐야? 할 정도로 먹은 양만큼 밀어낸다. 이런 위를 가지고 있으면 생활이 이만저만 불편한 게 아니다. 일단 소화가 안 되면 그 기묘하고 이상한 더부룩함이 하루 종일 계속된다. 어떻든 건강한 사람은, 건강한 몸을 가진 사람은 꼭 매일 비슷한 시간에 밀어내기를 하지 않아도 괜찮잖아. 이게 건강한 거 아닌가.


위가 안 좋은 대신에 천천히 음식을 먹으면 괜찮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현대인이 천천히, 한두 시간씩 음식을 먹을 수가 없다. 틈새라면 먹으러 가서 그렇게 먹을 수 있나? 택도 없는 소리다. 이런 모든 것들이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다. 그렇게 생겨먹은 것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그렇게 타고 나는 부분이 많이 차지한다.


요즘은 봄이라 봄나물을 꽤나 먹게 된다. 어제도 여러 나물을 먹는데 시어가는 단계에 들어간 나물이 있어서 빨리 먹어 치웠다. 신맛이 나는 게, 하루이틀만 지나면 상할 것 같았다. 시어가는 나물을 먹으면 어떤 사람은 먹지 말라고 하는데 신 음식은 사실 괜찮다. 상한 음식이 먹으면 안 되는 것이지 시어가는 음식, 신 음식, 이미 시어버린 음식은 나쁘지 않다. 


겉절이 빼고 대부분의 김치가 발효가 된 음식이다. 시어가는 과정의 음식인 것이지. 김치도 상하면 먹으면 안 되지만 우리는 신김치는 아주 잘 먹는다. 그걸 버리면 아마 욕 들어 먹을걸. 어떻든 신 음식을 먹으면 나는 위가 아주 좋아한다. 무척 괜찮다. 그 시큼한 맛, 상하기 직전의 음식을, 날 때부터 생겨먹은 위가 잘 받아준다.


신호대기에서 신호등을 보고 있으면 꼭 나를 보는 것 같다. 신호등을 외로울까 안 외로울까.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외로움이라는 게 나 혼자 있을 때는 오히려 외로움이 들지 않는다. 혼자서는 늘 할 게 많다. 그런데 옆에 누군가가 있을 때 이상하지만 외롭다. 그 사람에게만 집중을 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되고, 그렇다고 홀로일 때처럼 이것저것 할 수도 없다. 나는 늘 불안한 것이다. 그래서 신호등을 보면 불안 불안하다는 건데… 누군가, 교통개발 과학자가 신호등을 홀로그램으로 띄울 수 있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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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것은 가끔 나를 슬프게 하거나 몹쓸 상태로 만든다.

미세먼지가 가득한 봄날, 이상하게도 콧물이 줄줄 나왔다.

나는 그것이 알레르기라는 걸 최근에 알았다.

어제오늘 콧물이 줄줄 흐르는 걸 보고 미세먼지가 대기에 침잠해 있다는 걸 알았다.

미세먼지는 바다에 내려앉고 백사장에 내려앉고 팜트리에도 내려앉는다.

사람들의 입으로 코로 대책 없이 들어가서 몸속 깊이 침투하고 만다.

내 속으로 들어온 미세먼지는 분해되지 않고 악착같이 살아서

피를 타고 떠돌아다니다가 존재를 확인시켜 준다.

오늘처럼 대기가 미세먼지로 덮이면 몸속에서 나와

미세먼지 세계 속으로 가려고 발버둥을 친다.

콧물을 동반해 가면서.

미세먼지는 꼭 당신을 닮았다.

당신의 마음도 그렇다.

한 번 내 심장에 들어와 버린 당신의 마음은

미세먼지처럼 사라지지 않아서,

어딘가 웅크리고 앉아서,

매복하고 있어서,

그리움의 배를 타고 나오려고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투명해져 참 몹쓸 상태가 된다.

확인받고 싶어 하는 일이 나에겐 삶의 이유가 되어 버린다.

기억을 하는 것은,

영혼이 예민하게 잘게 잘게 부서지더라도

살아있기에 할 수 있는 유일한 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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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설가 지망생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자연계 출신이고 건축을 전공해서 그런지 원래는 문학과 너무나 거리가 먼 인간이었다. 문학은 개뿔, 책은 라면 받침대, 벼개(베개 – 베게, 배게 왜 이렇게 헷갈리나/의 사투리다)로만 쓰는 건 줄 알았던, 그런 섬뜩한 인간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소설도 집필하고, 밀리의 서재에 소설집도 내고, 문예지에 소설도 연재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코로나 전에는 독서모임도 주최하고 사람들 앞에서 주절주절 이야기까지 할 수 있다.


와, 전공자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같은 말을 가끔 듣는데, 그럼 전공한 건 엄청나게 잘 알겠네? 인생이란 뭐 그렇지. 전공했다고 해서 그 분야를 전부 잘하느냐? 그건 또 아니거든. 전공하지 않아도 관심이 있으면 또 그 분야를 파고들지도 모르지. 나 같은 인간이 하루키의 소설을 죄다 몇 번씩 읽다니, 이건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소설가 지망생과 나의 공통점은 둘 다 하루키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하루키의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장편소설이 일본에서 오늘(4월 13일) 서점에 풀렸다. 어서 빨리 한국출판물도 나왔으면 좋겠다. 이전의 단편집 ‘1인칭 단수’도 마지막 단편 소설은 아직 읽지 않고 있다. 다음 소설이 나오기 직전에 읽어야지 했는데, 이제 읽을 때가 되었다.

소설가 지망생은 학교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있으니 글 쓰는 법을 알고 있다. 그리고 잘 쓴다. 단지 지가 쓴 글이 지가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다. 소설가 지망생은 꼭 그런 말을 한다. 아니 그런 맨트를 쓴다. 나의 글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면, 단 한 명에게 위안이 될 수 있다면, 같은 말. 이런 말은 겉멋 든 프로필용 멘트 아니냐.


너의 이야기를 쓰고, 그 이야기가 너를 위로하고 너를 감싸 안으면 됐지, 왜 꼭 누구에게 위로를 주고 영향을 주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네, 응? 잘 나가는 작가하고 비교해 봐야 나만 손해다. 하루키하고 비교해 봐야 나만 초라해질 뿐이다. 하루키처럼 되고 싶은 건 알겠으나 하루키는 되지 못한다. 그동안 우리는 수많은 비틀스가 되고픈 가수들을 몇십 년 동안 봤다. 하지만 비틀스가 되지 못한다.


한 달 전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소설적으로, 작법이니 문학적으로 조금 발전했으면 정말 기분 좋은 거 아니냐. 그렇다면 일 년 후의 나는 일 년 전의 나보다 훨씬 나아졌겠지. 그때 일 년 전의 나의 글이 나를 위로하고 있구나. 그렇게 해서 일 년 동안 나를 이만큼 달려왔구나, 하고 생각하면 그만이지 누군가를 위로하고, 한 사람에게라도 위안을 주는 건 그건 그저 멋이 들린 멘트다.


예스 24에서 하루키를 검색하다 보니 책제목이 ‘무라카미 하루키 일큐팔사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책이 있었다. 그 책이 150권이나 팔렸더라. 그저 나의 생각이지만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분명히 정작 하루키의 일큐팔사는 읽지 않을 것이다.


목차를 보면 하루키의 소설과 무관하게만 보이는 제목들뿐이다. 하루키의 소설을 과도하게 해석하고 분석하는 글이 하루키의 일큐팔사를 읽는 데 무슨 도움이 될까. 이 책을 볼 시간에 일큐팔사를 보는 게 훨씬 낫다고 본다.


나는 이미 ‘이야기론으로 읽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책에서 그걸 깨달았다. 이렇게 쓸데없이 분석하고 까발리는 글을 보는 것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게 낫다. 마녀배달부 키키를 보며 지지와 이야기를 하던 키키가 어떻게 변하는지, 또 세상을 받아들이는지 눈과 귀로 직접 보는 게 낫다.


어른들 중에 전두환을 두둔하는 말을 가끔 들을 때가 있다, 이런 쉬발 미친. 그럴 때는 가만있게 되지 않는다. 그러면 본인 주위는 다 그런다고 한다. 본인 주위의 4, 5명의 친구들이 그렇게 말을 하니까 이 세상 모두가 그런 줄 안다. 어른이 되어도 눈과 귀를 협소하게 좁혀 놓으면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 518에 대해서 물어보면 전혀 뚱딴지같은, 이상한 말을 한다. 눈과 귀로 알아보지도 않고 그저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하는 이야기가 세상의 모든 것이라 믿으면 낭패가 온다.


글은 이미 잘 적는 소설가 지망생아, 학교에서 겉멋 같은 것은 빼라고 가르쳐달라고 해. 그냥 하고 싶은 얘기를 쓰고, 나의 이야기를 쓰면 되는 거다. 다른데 정신이 팔리면 망치게 된다. 권경애를 봐. 변호사 일은 제쳐두고 매일 정치에 관심만 보이고 SNS만 하고 사건 변호일은 나 몰라라 하더니 이 사달이 난 거다. 겉멋에 맛들 리면 답이 없다. 너도 하루키를 좋아하니까 우리 같이 하루키의 한국출판물이 나오기를 손꼽아 기다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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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킨을 포장해 와서 딸려온 치킨 무를 뜯었는데 규칙적인 배열이 눈에 들어온다. 하나씩 꺼내먹기 좋다. 이런 패턴이 좋다. 일정하고 규칙적인 패턴은 이상하지만 마음의 안정을 가져온다. 자유를 달라!라고 외치지만 사실 완전한 자유가 주어진다면 아마 공포에 매일, 매시간을 보낼지도 모른다. 그 속에는 규칙이 없고 배열이 소거되어 있다.


나라는 인간은 너무나 하찮은 인간이라 나의 이야기를 책으로 쓴다면 아마 5페이지 미만으로 끝날 것이다. 나 같은 인간은 완전한 자유를 원하지 않는다. 패턴이 있고, 배열 속에서 허용 가능한 자유를 원할 뿐이다. 그래서 예전부터 시키는 일은 잘했다. 군말(을 할지도 모르지만, 내가 아는 나는 군말 같은 것도 잘하지 않고) 없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인간인데 어쩌다가 없는 걸 쥐어짜서 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늘 힘이 들고 불안하다. 배열 속의 하나가 되면 속 편한데 배열과 규칙을 만들어야 하니 모든 관계가 의심스럽고 흐르는 시간을 바라보는 게 무섭다.


치킨을 포장해 와서 딸려온 치킨 무를 뜯었는데 규칙적인 배열이 눈에 들어온다. 하나씩 꺼내먹기 좋다. 이런 패턴이 좋다. 일정하고 규칙적인 패턴은 이상하지만 마음의 안정을 가져온다. 자유를 달라!라고 외치지만 사실 완전한 자유가 주어진다면 아마 공포에 매일, 매시간을 보낼지도 모른다. 그 속에는 규칙이 없고 배열이 소거되어 있다.


나라는 인간은 너무나 하찮은 인간이라 나의 이야기를 책으로 쓴다면 아마 5페이지 미만으로 끝날 것이다. 나 같은 인간은 완전한 자유를 원하지 않는다. 패턴이 있고, 배열 속에서 허용 가능한 자유를 원할 뿐이다. 그래서 예전부터 시키는 일은 잘했다. 군말(을 할지도 모르지만, 내가 아는 나는 군말 같은 것도 잘하지 않고) 없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인간인데 어쩌다가 없는 걸 쥐어짜서 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늘 힘이 들고 불안하다. 배열 속의 하나가 되면 속 편한데 배열과 규칙을 만들어야 하니 모든 관계가 의심스럽고 흐르는 시간을 바라보는 게 무섭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일정한 패턴을 보는 걸 좋아한다. 사진도 그런 규칙 된 패턴의 사진을 좋아한다. 패턴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것만 있을 것 같지만 자연도 일정한 패턴이 있다. 개망초를 보면 아주 정밀한 패턴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치 마이크로 자로 잰 듯 일정한 패턴으로 잎이 이루어져 개망초를 표현한다. 컬러 또한 패턴이다. 개망초 한 송이가 있으면 별로지만 일정한 패턴으로 들판에 가득하니 너무 예쁘다. 꽃들은 대부분 일정한 패턴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꽃을 보면 감탄하게 되고 감동까지 받게 된다.


뿐만 아니라 자연 속을 잘 들여다보면 규칙적인 패턴이 도사리고 있다. 자연이라고 해서 마구잡이식, 멋대로 자유롭지만은 않다. 그 정도의 크기, 그 정도의 깊이, 그 정도의 넓이를 유지한다. 생각해 보면 자연 속에 일정하고 규칙적인 패턴이 없다면 인간은 무서울지도 모른다. 우리가 보는 자연은 대체로 인간 가까이에 있는 자연이다.


아주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면 이 일정한 패턴이 허물어지거나 규칙적이지 않는 배열을 이루고 있다. 나무와 풀이 인간을 공격할리가 없음에도 깊은 산속에 들어가면 낮인데도 불구하고 공포에 빠져든다. 여기가 거기 같고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다. 모든 나무가 똑같아 보이고 다 달라 보인다.


패턴이 인간에게 가장 기쁨을 주는 경우가 있다. 일정하고 규칙적인 패턴이 우리를 기쁘게 하는데 그게 바로 브랜드다. 샤넬, 루이뷔통, 구찌 같은 고급 브랜드의 패턴이 옷이든 가방에 박혀 있으면 우리는 흐뭇해진다. 패턴은 이미 인간의 뇌를 잠식하고 있다.


꼬치구이 전문점에서 나오는 맛있는 꼬치 역시 규칙적인 패턴이다. 꼬치를 잡고 하나씩 떼먹는 맛이 있다. 규칙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규칙에서 벗어나면 겁을 내는 게 인간이다. 나는 치킨 무를 좋아한다. 오물오물 씹어 먹으면 맛있다. 치킨 무의 국물도 맛있는데 국물은 먹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홀짝홀짝 마셔버린다.


치킨 무의 뚜껑을 따 버리고 보는 배열은 감탄하게 한다. 오와 열이 이토록 정갈하게 딱 맞게 배열이 되어 있다. 규칙적인 패턴이 나를 흡족하게 한다. 패턴에서 안정을 얻는 나는 좀 이상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 멋진 자연이 만든 패턴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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