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성 하나가 불만을 품고 궤도에서 이탈해 버렸다. 이 답답한 궤도는 싫어! 가고 싶은 곳으로 갈 거야,라며 방향을 틀어 마음껏 날아가고 있다. 하늘에 존재를 각인하고 사라져 간 저 별을 보며 나도 그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답답하다. 도대체 이 방에서 언제쯤 나갈 수 있을까. 눈앞에는 홀로그램으로 나의 생체인식에 대한 정보가 떴다. 어디든 갈 수 있다고 하더니 아직도 이 방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생체정보에는 모든 게 정상이지만 적응 부분에서 아직이라고 미약하게 정보가 표기되었다]


사람이 죽고 나면 정신은 살아있을 때처럼 살려 둘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적응이 힘들어서 오히려 죽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육체가 없어서 어딘가로 이동을 하지 못하니 정신만 살아있어서 컴퓨터 속에서 생존을 이어간다. 하지만 마치 방에 갇혀 있는 것 같은 기분만 든다. 전뇌의 기술이 아직 상용화되지 않아서 안드로이드의 뇌에 정신을 입력할 수 있지만 대기자 수가 너무 많아서 기다려야 하는 과정에서 적응을 하지 못하고 사람들은 괴로워했다. 문제는 죽고 싶다고 해서 죽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미 육체는 죽고 정신만 백업을 해 놓은 상태라 컴퓨터 시스템 속에서 한 없이 대기를 해야 한다. 1차 적응이 완료되면 살아 있을 때처럼 휴대전화를 사용하여 사람들과 소통이 가능했다. 휴대전화라고 하지만 그렇게 착각을 하는 것이다. 그저 정보 안에서 휴대전화라고 느끼고 그것을 사용한다고 착각을 하는 것이다. 휴대전화로 연락하고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대기를 할 수 있다.


어쩐지 곧 이런 미래가 올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며칠 전의 애플의 공습을 보니 오래전 아이폰이 등장했을 때처럼 미래에 대한 생각이 새롭게 들었다. 영화에서는 이런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지만 영화의 과학적 시간과 현실의 과학적 시간은 차이가 많이 난다.


1980년대 초에 개봉한 블레이드 러너 속, 세계는 2019년이 배경이다. 백 투 더 퓨처의 미래는 2015년이었고, 미래소년 코난의 배경은 2008로 한참 전에 지났다. 블레이드 러너 속 데커드가 지구에 몰래 들어온 래플리컨트(요즘 말로 에이아이, 안드로이드)를 잡는 이야기다. 그 속에서 날아다니는 자동차는 현실에서는 아직 한참 먼 이야기다.


리들리 스콧은 블레이드 러너의 장면 장면에 은유를 심어 놨다. 영화의 모든 컷이 하나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블레이드 러너에 대해서 현재에 이야기를 하면 모두가 할 말이 많다. 하루 종일 이야기를 해도 모자랄 것이다. 영화 속 인간은 하층계층부터 차별을 하고 서로 죽이고 생명을 앗아가지만 래플리컨트들은 동료가 인간에게 당해 죽으면 괴로워하고 분노했다. 인조인간 주제에 마음이라는 것이 없지만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었다.


블레이드 러너는 이후 나오는 디스토피아를 표방하는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 지대한 영향을 줬다. 아키라, 공각기동대, 토탈리콜, 저지 드레드 등. 대부분의 어두운 미래를 말하는 영화는 핵전쟁으로 암울한 지구를 말한다. 현재 세계는 핵전쟁은 아니지만 암울하긴 하다. 좀 있으면 빙하가 다 녹는 대지, 여러 나라의 전쟁으로 인해 수입해야 할 저렴한 식재료를 수입하지 못해 물가는 치솟을 대로 치솟지.


블레이드 러너는 하나의 상징, 장르가 되었다. 이번 애플의 헤드셋을 보며 애플 역시 또 한 번의 상징을 만들어내서 장르가 되려고 하는 느낌이 들었다. 예전에 스티븐 스필버그가 쥬라기 공원을 만들어 냈을 때 현대 자동차에서 자동차 백만 대 팔아치운 것보다 더 많은 이윤을 남겼다. 문화의 힘이라는 게 엄청나다.


애플워치가 처음에 나왔을 때 하루만 차고 나면 충전해야지, 누가 차!라고 했지만 지금은 스위스에서 나오는 그 모든 엄청난 시계의 판매량을 뛰어넘었다. 보통 휴대전화로 카톡을 하고 유튜브를 보고,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을 고르고 보정하느라 하루를 꼬박 보내지만 아이폰이 등장 함으로 가장 큰 변화는 책상에 앉아서만 하는 업무를 오피스에서 벗어나서 할 수 있게 되어 버렸다.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번에 나온 헤드셋을 보니 500만 원에 육박하지만 아이폰이 처음 등장했을 때의 그 기이한 느낌을 받기에 충분했다.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과 맥북 에어를 들고 나와서 무대에서 설명을 했을 때 나는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들으면서 새벽에 기다렸다가 유튜브로 그 장면을 보았다. 주머니에서 폰을 꺼낼 때에도 짜릿했지만 노란 서류 봉투에서 맥북에어를 꺼낼 때 정말 짜릿했다.


스티브잡스는 애플사의 자랑 매킨토시를 만들었다. 매킨토시는 미국의 사과 중에서 맛이 좀 떨어지는 사과다. 그래서 잼으로 만들어 먹고, 뭐 그런 사과를 매킨토시라고 한다. 스펠링이 Mclntosh다. 이 매킨토시에 스티브잡스가 약간 마법을 부려서 Macintosh로 만들었다. 이 맥이라는 게 초반에는 마니아들만 사용을 했는데 지금은 저변이 넓어졌다.


잡스의 이런 마법이 들어간 것이 픽사다. 픽사라는 단어도 잡스가 만들었는데 픽셀과 아트를 조합해서 pixar를 만들었다. 다 아는 얘기지만 잡스가 픽사를 처음으로 설립했다. 픽사를 설립하고 무모하게도 하나의 애니메이션에 10년을 매달렸다. 이 하나의 애니메이션을 만드는데 데리고 온 사람이 바로 존 라세티였다. 존 라세티는 70년대부터 스타워즈의 루카스 필름에서 그래픽을 담당하는 부서에서 애니메이터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쓰리디를 담당하면서 디즈니사에 파견 근무식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그래픽과 애니메이션에 대해서 열공하고 있었다. 86년에 잡스가 애플사에서 쫓겨나서 존 라세티를 데리고 와서 10년 동안 애니메이터들과 매달린 애니메이션에 바로 ‘토이 스토리’였다. 잡스는 토이 스토리를 선보이기 전 단편 애니메이션 ‘룩소주니어’를 만들었다. 그래, 바로 픽사 영화가 시작할 때 등장하는 꼬마전등 녀석, 그게 룩소 주니어였다. 평단의 평판이 괜찮았다.


잡스는 우디와 버즈가 만들어가는 토이 스토리 하나에 10년이라는 시간을 투자했다. 지치는 애니메이터들에게, 당신들이 창조해 내는 우디와 버즈는 비록 생명이 없는 장난감이지만 영혼을 불어넣을 수 있다. 세상의 아이들이 우디와 버즈를 좋아하게 될 것이며 언젠가 우리의 이 허황된 노력을 모두가 알아주는 날이 올 것이다. 잡스는 게다가 10년 동안 애니메이터들에게 월급을 꼬박꼬박 주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95년에 토이스토리가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미국의 평단에서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지브리 사와 비교해 가며 망할 것이라 했지만 사람들은 우디와 버즈를 보기 위해 아이들의 손을 잡고 극장으로 몰려들었다. 말 그대로 열광했다. 쓰리디 애니메이션이라는 하나의 장르가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픽사는 디즈니 사에 넘어갔고, 이번 인어공주를 계기로 디즈니를 살렸던 픽사의 직원들을 포함해 7천 명이 해고가 되었다고 한다. 잡스가 죽고 나서 토이 스토리 3에서 어른이 되어 떠나는 앤디를 향해 우디가 So long, Partner라고 하는 말은 픽사가 스티브 잡스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 대사를 할 때 눈물이 났다.


지금 문득 든 생각인데, 공황장애 때문에 석방이 된 박희영 구청장이 다음 날 새벽에 바로 출근을 했네. 아프다더니 좀 쉬지. 새벽에 출근한 이유도 유가족이 찾아와서 몰래 출근하느라 새벽에 한 거라는데.


2022년 12월 05일 자 주간경향 박희영 구청장에 관한 기사를 보니 어떻게 박희영 구청장은 공천되었을까. 전문성과 거리가 먼 행보에 권영세 장관 영향력이 컸다고 하는 기사가 있다. 공천과정에서 논란이 많았다고 한다.


얼마나 일을 열심히 하고 싶었으면 아픈데도 석방되자마자 새벽에 출근을 할까. 근데 공무원들은 일을 열심히 하는 것보다 일을 잘해야 하는 것 아닌가. 사람에게는 욕망이 있다. 욕망이 커지면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상태가 된다. 그런데 이 욕망을 뛰어넘는 게 야망이다. 야망에 눈에 뒤집히면 자신의 가족, 자신 주위의 소중한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다. 궤도를 벗어나라. 안전한 궤도 속에서 손에 꽉 쥐고 있으려 하지 말고 손을 놓고 그대로 떠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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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닭죽을 먹었다. 닭죽은 배가 금방 꺼진다. 집에서 해 먹는 닭죽은 엄마의 냄새가 있다. 닭죽도 너무나 간단한 음식이라 닭 한 마리를 넣고 그냥 끓이면 끝인 음식이다. 그런데 집집마다 어머니들이 해주는 닭죽의 맛이 다 다르다.


집에서 해 먹는 닭백숙에는 마늘을 있는 대로 넣으면 맛있다는 걸 알았다. 어릴 때 먹던 닭죽보다 마늘도 잔뜩 넣고, 방울토마토도 넣어서 끓였는데 이상하지만 집에서 만든 닭죽을 먹으면 엄마의 맛이 있다. 비논리와 비상식에서 벗어나서 먹는 맛인데도 먹다 보면 엄마의 냄새가 나는 것 같네.


나는 집밥, 엄마의 손맛, 같은 말을 썩 좋아하지도 않고, 혼자서 밥을 챙겨 먹게 될 때에는 잘 차려서 먹기보다 그저 있는 것으로 끼니를 때우는 식으로 먹는 게 낫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래서 사람들과 마찰을 겪기도 한다. 마찰을 겪는 것도 내 입장에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나는 집밥을 좋아하고, 엄마가 해주는 음식을 맹신하는 것을 나무라지 않는다. 그냥 내 개인적으로 별로라고 생각을 하는데, 왜 엄마의 손맛을 부정하냐며 마찰을 겪는다.


집밥을 좋아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집과 떨어져 살다 보니 엄마가 해주는 밥이 먹고 싶기 때문이다. 한국을 떠나 타국에서 지내다 보면 한국 음식을 그리워하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나는 좀 이상해서 그런지 몰라도 김치 없이는 밥을 못 먹겠어, 이제 이 음식은 질린다. 같은 것이 별로 없다. 그냥 그 지역에 가면 거기에 나오는 음식을 그냥저냥 먹는 편이다. 못 먹는 음식이 아닌 다음에는 특별히 맛이 없어서 먹지 못하거나 하는 일이 없다. 지금까지 살면서 엄마에게 이 음식이 먹고 싶으니 좀 해달라고 한 적도 없다. 내 기억은 그렇다. 모친도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냥 그렇게 생겨먹은 인간인 것이다.


다른 집의 어머니 음식은 내가 모르니 나의 모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나의 모친이 한 음식은 그렇게 맛있지가 않다. 그건 엄마 자신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옆 집의 아주머니들에게도 늘 듣는 이야기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맛없는 음식도 맛없네, 마네, 같은 이야기를 나는 하지 않고 그냥 먹는다. 잘 먹는 편이다. 모친은 국, 찌개, 탕 같은 음식을 많이 했었다. 이 국물이 있는 음식을 집에서 없애는데 7년 정도가 걸렸다. 손이 커서 이삼일을 먹어도 없어지지 않을 양의 찌개를 끓인다. 그런데 정작 모친은 먹지 않는다. 음식을 버리는 건 또 하지 않는다. 하하하 그러면 어떻든 내가 다 먹어야 한다.


명절에 차례를 지내고(몇 해 전부터는 차례를 지내지 않고 음식을 하지 않는다) 한 상 깔린 음식을 몇 날 며칠 동안 내가 다 먹어야 한다. 모친은 새로 만든 음식은 드시지만 하루이틀 지나면 거의 드시질 않는다. 빵이나 치즈 같은 건 두 달 정도 유통기한이 지나서 내가 버리려고 하면 그제야 먹으려고 한다. 조카가 어릴 때 일주일정도 모친이 봤는데 애가 일주일 만에 너무 통통해졌다. 애가 좋아한다고 매일 아이스크림에 치킨에. 그래서 나는 집밥, 엄마의 손맛이 별로다.


김범수의 ‘집 밥’이라는 노래가 나왔을 때 나는 웃었다. 그 당시가 집 밥에 대한 예능프로그램, 이야기가 많았다. 시류에 묻혀 나온 노래에 그놈의 바이브레이션에, 가족의 마법에. 나이가 든 엄마에게 이제 집 밥 같은 거 신경 쓰지 말고 라면이나 끓여 먹자,라고 하는 게 더 나은 것 같은데. 밥을 매일 꼬박 세끼를 한다는 게 그게 얼마나 힘든 노동인가. 그럼에도 가족에 묶여,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엄마에게 나 힘드니 밥 해 달라고 한다. 고독한 미식가 씨처럼 그냥 혼자 맛있는 음식점을 찾아서 맛있게 묵으라고.


그 시기에 이태원이나 가로수길에 줄을 서서 먹는 음식 트렌드가 생겼다. 그 식당이 ‘집밥’이라는 곳이다. 집밥 식당에서 판매하는 상차림은 가정집에서 먹는 음식을 표방했다. 상추가 있고 콩나물이 있고 멸치조림과 김치 정도에 된장국이 나오는 게 전부다. 이렇게 해서 만오천 원에서 이만 원 정도 했다.


상차림이 다른 음식점에 비해 초라한데 비싸다. 그런데도 줄을 서서 사람들은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식탁의 주인은 반찬이 아니라 밥이라 생각하고 식당 한 편에 도정기를 갖다 놓고 손님이 오면 바로 나락을 도정해서 밥을 해서 내놓았다.


도정을 해서 바로 밥을 해 먹어 보면 그 맛있음이 그대로 소리로 나오게 된다. 그냥 밥만 먹어도 맛있다. 밥이 정말 맛있기 때문에 반찬은 그야말로 옵서버일 뿐이다. 그저 간장만 있어도 맛있다. 쌀이라는 건 나락으로 있을 때 살아있는 상태다. 도정하기 전에 쌀은 한 알 한 알 숨을 쉬고 있다. 대신 도정을 하면서 나락을 까는 순간 죽어버려 변성이 시작된다. 그리고 도정한 지 15일이 지나면 변성이 되어서 밥이 조금 맛이 없다. 일반적인 밥이 된다.


사실 집에서 엄마가 해주는 밥에서 이렇게 맛있는 맛이 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집밥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있다. 그 그리움이라는 것에는 역사적인 어떤 사회상이 깃들어 있는 부분도 있다. 그저 ‘밥 집’이라 불리는 식당은 외식산업의 시초가 되었다. 한국은 전쟁 통에 남편을 잃은 여자들이 생계를 위해 집에서 늘 해 먹던 식단으로 ‘아침밥 됩니다’ ‘가정백반’ 같은 간판을 내걸고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가정식 백반으로 매일 다른 반찬과 밥으로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것이 남자의 로망이었다. 신혼인 아내가 앞치마를 두르고 고등어를 굽고 된장찌개를 보글보글 끓이고 나물과 함께 저녁상을 차린다. 퇴근하고 들어오면 “손만 씻고 오세요”라는 말을 듣는 것까지가 남자들의 로망이었던 때가 있었다.  


김훈의 ‘밥벌이의 지겨움’을 보면 [밥벌이도 힘들지만, 벌어놓은 밥을 넘기기도 그에 못지않게 힘들다. 술이 덜 땐 아침에, 골은 깨어지고 속은 뒤집히는데, 다시 거리로 나아가기 위해 김 나는 밥을 마주하고 있으면 밥의 슬픔은 절정을 이룬다. 이것을 넘겨야 다시 이것을 벌 수가 있는데, 속이 쓰려서 이것을 넘길 수가 없다. 이것을 벌기 위하여 이것을 넘길 수가 없도록 몸을 부려야 한다면 나는 왜 이것을 이토록 필사적으로 벌어야 하는가. 그러니 이것을 어찌하면 좋은가. 대책이 없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제는 집밥, 엄마의 손맛에서 벗어나야지. 어쩌면 보통의 어머니들이 가족의 밥을 하느라 정작 자신이 먹고 싶은 음식을 잊어버렸을 수도 있다. 집밥의 환상에서 벗어나면 가족이 다 편하다. 가끔 가족이 모여 집에서 음식을 먹을 때 라면 끓여 먹어도 아주 즐겁다. 오랜만에 모였다고 거하게 차려서 거하게 먹을 필요가 없다.


요즘은 재철 식재료로 간단하고 저렴하게 해 먹을 수 있는 맛있는 음식들이 많다. 제철 음식이라 가장 영양가도 풍부하고 가격도 저렴하다. 음식을 만드는 시간도 아주 짧고 간단하다. 그런데 맛도 좋다.


마늘을 엄청 넣고 닭죽을 끓였는데 어릴 때 엄마가 해주던 그 냄새가 난다. 닭죽을 먹고 마당에 나가 놀다가 보면 금방 배가 꺼져서 또 호로록 떠먹었던 닭죽. 좀 있으면 또 닭죽을 많이 먹을 날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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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 학교 등나무 벤치에서 전기기타를 울러 메고 오즈의 마법사에서 도로시가 부른 ‘섬 웨어 오브 더 레인보우’를 연주했던 영태라는 녀석이 있었다. 빼빼 말라서 교복 윗도리를 벗고 앙상한 상체로 Somewhere over the rainbow를 연주하는 모습이 너무 멋있게 보였다.


우리는 온 마음을 다 빼앗겨 영태가 연주하는 곡을 들었다. 등나무는 푸르른 계절에 맞게 초록의 잎을 활짝 피워 냈고 그 안에는 송충이가 있었지만 영태는 연주를 할 때 그런 것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멋있었다.


영태는 기타를 너무 잘 쳐서 대학교 밴드에서 기타로 참여하기도 했고 주말에는 학생들이 디제이를 하는 음악 감상실에서 디제이까지 했다. 연주가 끝나면 관객들은 박수를 쳤다.


어때 좋지? 이게 임펠리테리가 연주한 곡이야.


그때 임펠리테리를 처음 들었다. 학창 시절을 돌아보면 꽤나 재미있는 일들이 있었다. 나는 사진부여서 축제를 준비할 때에는 클럽활동 하는 애들끼리 사고도 치고, 축제가 금토일 3일이나 되어서 규모가 컸다. 그래서 여학교 애들과도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다 보니 이런저런 일들이 많이 터지고 수습하고 울고 불고 정리하고.


아무튼 그 교류 속에 우리의 중심이 되어 준 건 음악, 하루키, 카나리아(치킨집) 뭐 이랬다. 인문계인데 정말 지독하게 공부를 하지 않아서 선생임이 포기 상태에 돌입하기도 했다.


임펠리테리는 본조비처럼 자신의 이름 크리스 임펠리테리를 따서 밴드 이름을 지었다. 바로크메탈의 정수가 바로 임펠리테리다. 바로크메탈이 뭔가라고 하면 그냥 검색해 보기 바람. 예전에는 그렇게 장르로 불리는 밴드가 많았다.


김경호가 벤치마킹을 한 스트라이퍼도 가스펠록의 화신?, 아무튼 가스펠록이라고 불렸다. 그런데 들어보면 아, 하고 납득이 간다. 김경호가 1집을 냈을 때에는 머리도 짧고 사람들에게 각인이 전혀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스트라이퍼를 보고 김경호가 그렇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스트라이퍼의 무대를 보면 목소리가 김경호와 완전 같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끝 부분에 야이야 하는 것도 비슷하다. 스트라이퍼나 임펠리테리가 지금은 전부 60대가 되거나 넘었지만 여전히 공연을 하며 무대에서 내지르며 활동을 잘하고 있다.


요즘말로 미친 짓도 반복이 되면 하나의 장르가 된다는 말이 있다. 유튜브에 소주를 병 째 마시는 먹방을 하는 유튜브가 나타났다. 한 번에 두 병 정도를 원샷하고는 안주를 먹는 그런 먹방이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보지 않을 것 같더니, 그걸 계속하면서 병원에서 검사를 해서 모든 부분이 정상이라고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또다시 원샷으로 소주를 깨끗하게 비웠다. 그렇게 쌓인 소주병이 방을 가득 채웠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사람을 찬양하면서 따라 하기 시작한 사람이 생겼다. 이 사람은 원조보다 더 해서, 한 번에 소주를 5병을 마시는 것이다. 사람들의 만류에도 스승님(원조)의 제자라고 자칭 말하면서 그렇게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왜냐하면 이젠 어떤 여자도 나타나서 제자라 칭하며 소주를 병나발로 원샷을 때리고는 먹방을 하는 것이다. 이런 걸 보면서 미친 짓도 정말 반복이 되면 하나의 장르가 되는구나, 사람들이 추종을 하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의미랄까, 바로크메탈도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장르가 된 바로크메탈, 가스펠메탈, 스피드메탈의 특징이라면 기타리스트의 속주연주가 일품이라는 것이다. 그 속에는 가장 위에 잉위 맘스테인이 있었다. 그러나 우열을 전부 가릴 수는 없었다. 왜냐? 자신들이 좋아하는 밴드가 제일 최고라고 했기 때문이다.


바로크 메탈이 잉위 맘스틴(잉베이 맘스틴, 잉베이 맘스테인, 이름도 헷갈리게 불렸다)으로 시작되었는데 무대에서 입는 옷도 바로크시대의 의상처럼 레이스가 달린 무대의상을 입는다든가, 바로크 시대의 작품들을 가져와서 그 선율과 구조를 잘 비틀어서 메탈로 승화시켰다. 그래서 록과 클래식이 버무려진 그런 메탈이었다. 그러니까 바흐와 모차르트가 미친 듯이 기타를 들고 연주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신날 수밖에 없다.


가사가 연주를 따라가지 못한다. 연주가 너무 빠른 멜로딕스피드메탈이기 때문이다. 답답할 때 고출력 엠프로 듣기에 좋다. 그리고 제일 위에서 말한 것처럼 오즈의 마법사에서 도로시가 저 먼 하늘을 보며 부른 노래 ‘섬 웨어 오브 더 레인보우’ 역시 좋다. 좋다는 이유는 이 연주를 바로크 풍으로 연주를 하기 때문이다. 음악 전문인이 아니라서 코드가 어떻게 되고 어떤 식으로 바로크 풍인지 설명은 못하겠지만 들어보면 아! 그렇군. 하게 된다.


이 것이 바로크 메탈의 진수다. VICTIM OF THE SYSTEM https://youtu.be/BdVUzRxZHqs


somewhere over the rainbow https://youtu.be/ytvzMr1N1m8


참고로 넥스트의 기타리스트 김세황의 오버 더 레인보우도 같이 비교해서 들어 보시길 https://youtu.be/BLrWU5RHuT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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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조깅을 하면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재미가 있다. 오월까지는 달이 반달의 모습이었다가 유월에 접어들어 크고 둥근달이 되었다. 가까워졌다는 말이다. 백석의 시 ‘통영’에도 유월의 풍경이 잘 담겨있다.


[저문 유월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붉으레한 마당에 김냄새 나는 비가 나렸다]


유월이 되면 태양과 달의 이런저런 합의에 의해 평소보다 가까워진다. 그래서 평소에 38만? 킬로미터 정도의 거리가 -이 거리를 좀 빠르게 쉬지 않고 걸어가면 8, 9년 정도 걸으면 달이 닿을 수 있다. 시속 100킬로로 붕 자동차를 몰고 가면 한 150일 정도 걸린다고 한다- 유월에는 조금 가까워진다.


그렇게 되면 달이 평소보다 훨씬 커 보이고 조수간만의 차가 달라진다. 그래서 바닷물이 한꺼번에 확 빠지고 나면 바위에 붙어 있던 수천수만의 조개가 아가리를 벌릴 때 쩍 하며 나는 소리를 백석은 조개가 울을 유월의 저녁으로 표현했다. 백석은 정말 과학과 미각과 인간의 온갖  감각을 전부 시에 잘 버무렸다.


백석 하니까 생각나는 일이 있는데, 나 예전에 어떤 곳에서 포토샵 강의 제의가 들어와서 한 번 한 적이 있었다. 사실 포토샵이라는 게 앞에서 아무리 주절주절 떠들어봐야 다 쓸모없다. 해보는 게 제일 좋다. 그래서 잠깐 설명을 하고 나머지는 해보게 했다. 그리고 그 시간에 백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왜, 갑자기, 느닷없이 백석이야기를 하게 되었는지 나도 알 수가 없다. 인간의 일이라는 게 갑자기 방향을 틀어서 가버리는 경우가 있다.


아무튼 귀로는 백석의 이야기를 듣고 눈과 손은 포토샵을 하면 되는 것이니 별 문제가 없다. 백석 이야기는 안도현 시인이 쓴 ‘백석평과’과 자야의 ‘내 사랑 백석’에서 이것저것 생각나는 대로 웅얼웅얼거렸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야기를 너무 재미있어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신이 나서 이야기를 했다. 사람들은 포토샵을 손 놓은 채 백석의 이야기에 빠져들었고 나는 그 뒤로 잘리고 말았다.


비록 그때 잘렸지만 사람들의 말똥말똥한 눈을 나는 보았다. 뭐랄까 사람들은 백석이나 윤동주나 김광섭, 천상병 같은 시인들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 열망 같은 것들이 있었다. 누군가 도화선에 불을 지핀다면 사람들은 활활 타오를 것이다. 어머니들의 가계부 구석에는 자신만의 글과 시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여하튼 달과 지구가 가까운 유월이다. 본격적인 무더위가 덮치기 전, 봄의 허무를 벗고 여름을 기다리는 피부 같은 야들야들 온순한 면모가 가득한 유월인 것이다. 유월에는 달과 구름을 담는 재미가 있는데 조깅하다 멈춰 서서 마냥 그렇게 입을 헤 벌리고 서 있다가는 하루살이가 공격적으로 입 속으로 들어온다. 나도 억지로 많이도 먹었는데 정말 아무 맛도 안 난다. 벌레 맛이라고 하기에도 이상하고 그냥 방구 맛이다.


오늘은 도로에서 신호대기를 하고 있었는데 신호가 바뀌고는 뒤의 차가 붕 와서 나를 박아 버렸다. 쿵 하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리고 나의 몸은 앞뒤로 움직였으며 수동기어라 시동이 꺼졌다. 조수석의 가방이 앞으로 밀려 떨어졌고 휴대폰도 떨어졌다. 순간 나는 몸을 살폈고 자동차 시동을 다시 켜봤다. 거의 20년 가까이 조심조심 몰고 다녔는데, 차 안에서 카세트테이프를 듣는 그런 재미가 있는데, 이 모든 게 안 되면 어떡하지. 같은 생각이 순간적으로 휘몰아쳤다.


시동은 잘 들어오고 노래도 다시 잘 나오고 핸들도 잘 돌아가고 나는 내려서 뒤차로 갔는데 뒤차의 여성이 놀라서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그제야 나와서 뒤처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나도 그렇고 여성도 그렇고 놀라서 발 빠른 상황대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성은 보험을 불러 해결해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도로 한가운데니까 차를 옆으로 뺐다.


차 범퍼를 보니 뭔가 거의 표시도 안 날 정도로 자국이 있었다. 몸은 멀쩡하고 자동차도 그것 외에는 겉으로는 눈에 띄는 사고표시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아서 그냥 보험을 부르지 않아도 되니 그냥 가자고 했다. 여성은 범퍼에 자국이 있는데 보험을 불러 갈아야 하지 않느냐고 했다. 나는 아니라고 했다. 차도 오래됐고 눈을 크게 뜨고 자세하게 봐야 보이는 자국인데 괜찮다고 했다. 그래도 여성은 뭔가 조금 의심스러웠던 모양이었다. 이 남자가 혹시 나중에? 그런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워낙에 그런 일들이 많이 일어나니까.


자동차 범퍼가 원래 방어하라고 있는 거니까 점 찍힌 것처럼 표시가 난 건 안 바꿔도 된다. 그래서 그대로 그 도로를 나오게 되었다. 여성은 그래도 모르니 자신의 전화번호를 찍어 주면서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을 꼭 해달라고 했다. 개인적으로는 자동차를 다시 카센터에 넣고 범퍼를 갈고 그 시간에 렌트차를 몰고. 뭐 그런 일련의 일들이 너무 귀찮은 것이다.


인간은 정말 제멋대로 인 존재라 이렇게 매일 글을 쓰는 건 귀찮지 않은데 생활에서 귀찮은 건 정말 귀찮다. 요컨대 샤워를 하는 건 귀찮지 않다. 그런데 씻는 건 너무 귀찮다. 요 앞에 걸어서 갔다 오는 건 정말 미칠 정도로 귀찮다. 일어나서 거기까지 걸어갔다가 걸어오는데 덥고, 습관적으로 마스크를 하고, 아무튼 너무 귀찮다. 그런데 1시간 넘는 거리를 달리는 건 또 귀찮지 않다.


인스타그램의 디엠은 그렇게 귀찮지 않지만 카톡은 귀찮은 경우가 많다. 읽씹, 안읽씹 때문에 따지는 사람들이 카톡에는 있다. 같이 있으면 말하고 싶은 사람이 있고, 말하기 귀찮은 사람이 있다.


여러 번 올린 글이지만 코로나가 덮치고 난 후 강변의 풍경이 세세하게 바뀐 부분이 있다. 코로나 전에는 그렇게 없던 메뚜기들이 엄청 많아졌다. 그래서 재작년에는 메뚜기를 잡아서 다리를 뜯어가며 노는 초딩들이 있었다. https://brunch.co.kr/@drillmasteer/1978


그리고 비가 와도 우산을 쓰며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 아마도 코로나 덕분에 집에만 있어서 살이 쪄서 그럴 것이다. 무엇보다 지렁이가 많아졌는데 조깅코스에 굵고 긴 지렁이가 일이십 마리가 아니라 오십 마리씩 달리는 코스에 나와서 꼬물꼬물 거어 다닌다. https://brunch.co.kr/@drillmasteer/1937


또 11월 겨울에도 아직 겨울잠을 자러 들어가지 않은 뱀들이 똬리를 틀고 강변에 나타나는 일들이 많아졌다. 뱀 하면 천경자 화백의 뱀 그림 ‘생태’가 가장 먼저 생각난다. 서른다섯 마리의 뱀이 서로 몸을 섞고 있다. 환상적이고 애틋하다. 천경자는 뱀을 그리는 여자다. 뱀은 원초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천경자는 그럼 뱀을 닮았다. 독하면서 아름다운, 미끌거리면서 축축하고 팔과 다리가 없음에도 어디든 갈 수 있는 존재.


바닷가에 살고 있어서 인지 바다의 수평선을 보면 뱀을 닮았다고 생각이 든다. 멀리서 보는 바다는 뱀과 같다. 팔다리가 없어도 불평 한 번 안 하잖아. 늘 어딘가 숨어 지내고 있지만 역사적으로나 현재에도 증오와 미움을 잔뜩 받고 있는 존재. 바다와 뱀의 공통점이지.


그리스 신화에서도 바다는 늘 인간을 괴롭히는 광대하고 육중한 증오의 대상으로 나왔지. 우리가 자주 가는 카페의 컵에 새겨진 사이렌만 봐도 알 수 있지. 사이렌은 예쁜 얼굴을 하고 있지만 뱀 꼬리를 가지고 있잖아. 그 예쁜 얼굴로 선원들을 현혹시켜 바다에 빠져 죽게 만들잖아.


차가운 겨울의 햇살을 튕겨내는 바다의 실루엣은 마치 뱀의 체강을 뒤덮고 있는 비늘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 같다. 매혹적이며 은근하다. 몸을 이루고 있는 색감은 인간의 인공적인 붓질로는 표현해 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보고 있으면 그 컬러의 매혹에 빠져들 것이다. 우울할 때 키리코의 그림을 보자. 그러면 깊은 우울을 느끼고 나면 괜찮아지듯 팔다리 없이도 고개를 들고 어디든 스르륵 가는 뱀에게 눈을 떼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뱀에게 다가가기를 꺼려한다. 오히려 뱀은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 않음에도 뱀을 보면 돌을 던지려고 한다.


천경자는 그런 뱀을 그렸다. 그런 뱀을 닮은 여자다. 생태를 보자. 생생하고 감동적이니까. 뱀이니까. 수평선 너머 이어지는 바다는 뱀의 몸통과도 비슷하다. 쥘 르나르가 뱀에 대해서 그랬다지 “너무나 길구나.” 뱀은 자신의 독 때문에 인간처럼 말이 많지 않다. 바다를 조금 멀리서 보면 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고독하며 품고 다니는 독이자 치유제인 그 액체를 마음만 먹으면 내 몸에 수혈할 수 있도록 말이다. 생태에 대한 이야기는 말이야, 천경자 화가가 생태를 그렸을 때 “뱀을 그리는 여자가 나타났다”였다.


남은 유월은 덜 귀찮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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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한국에서는 여성팬들을 비틀스만큼 몰고 다녔던 록밴드는 부활이 처음이 아닐까 싶다. 항상 비교되던 시나위와 블랙홀 그리고 다른 밴드는 우리는 록!이라는 걸 누가 봐도 아는 의상을 입고 있었지만 부활의 이승철은 머리도 짧고 미소년 같은 모습에 무엇보다 우수에 젖은 눈망울로 희야~를 불렀다.


그야말로 여성팬들을 집 안에서 밖으로 뛰쳐나오게 만든 록 밴드가 부활이었다. 이승철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김태원의 터질 것 같은 그로울링의 화음이 부활의 어떤 색깔이 되었다. 전국의 아마추어 록밴드들이 프로 록밴드의 노래를 따라 불렀는데 부활의 이 대조적인 목소리를 따라 부르는 게 힘겨웠던 것이다.


김태원의 이야기는 너무나 많이 알려졌다. 아이의 가정사부터,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 투게더 같은 아이스크림을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밥 대신 매일 먹었던 일까지. 그래서 몸이 엄청나게 불어버린 일화가 여러 방송에서 소개가 되었다.


김태원이 예전에 예능에 한창 출연을 할 때 그때는 트위터가 지금의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처럼 사람들의 일상소통 창구였다. 그때 누군가 나의 부활 이야기에 댓글로 김태원이 예능으로 나오지 않고 계속 음악만 했으면 좋겠다는 글을 달았다. 예능에만 나오니까 어린아이들이 김태원을 예능인으로만 알고 있다면서 주절주절했다.


하지만 그게 뭐? 어때서? 예능인으로 알려지면 좀 어때? 도대체 그게 왜 문제인가. 예능인으로 알려져서 그 사람이 원래는 기타리스트였어?라고 알게 되면 또 그것 나름대로 괜찮은 거지. 뭐 그런 댓글싸움을 많이도 했었다.


그때는 나도 지금처럼 유순하지만은 않아서 대단히(까지는 아니지만) 공격적이었다. 사람들에게 막 그랬지. 왜? 그럼 변호사가 범죄소설을 쓰는 것도 못하게 하지 그래? 변호사는 변호사 일만 하고, 개그맨들은 라디오 디제이 못하게 하고, 안재욱은 노래 못 부르게 해야지. 라며 나도 대들었다.


그때 사람들과 가장 많이 싸웠던 내용이 ‘먹거리 엑스 파일’이었다. 당시에 먹거리 엑스 파일이 대단한 인기였다. 마치 성역과도 같아서 거기에 문제를 제기하면 큰일이 나는 것이다. 건드리면 안 되는 분위기가 가득했다. 하지만 먹거리 엑스 파일은 이상한 프로그램이었다.


즉,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은 식당은 착한 식당이라 칭하고 조미료를 조금이라도 사용하는 식당은 마치 착하지 않은 식당, 장사를 해서는 안 되는 식당으로 매도해 버렸다. 조미료는 몸에 엄청 나쁜 것으로 말했다. 게다가 몰래카메라로 섭외한 음식 전문가들이랍시고 불러다가 그런 편집으로 방송을 했다.


조미료는 간단하게 말해 음식에 들어가면 맛을 중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매워야 할 떡볶이에 조미료가 들어가면 맵기만 하지 않고 맵고 달고 짠맛이 서로 잘 섞이게 만드는 게 조미료가 하는 역할이다. 그래서 조미료가 몸에 나쁘다는 연구결과가 어디에도 나와있지 않다. 지금은 감미료의 종류가 다양하지만 조미료의 주원료가 되는 게 예전에는 다시마였다. 우리가 요리를 할 때 다시마를 우려내서 국물을 만들기도 한다.


어떻든 조미료가 문제라고 먹거리 엑스파일은 말했는데, 그렇게 조미료가 정말 나쁜 것이라면 조미료를 만드는 공장을 공격해야지 왜 일반 식당으로 가서 조미료를 썼네 마네 해서 그곳을 공격하는지. 방송국 지들이 뭔데 착한 식당, 그렇지 않은 식당으로 분류를 하는지에 대해서 글을 올렸다가 정말 많은 공격을 받았다. 그때는 그래서 내가 졌다. 사람들의 맹신이 그렇게나 무섭다. 일단 알아보기보다 내가 믿는 것이 올바름이라고 생각을 하니까 공격이 무서워지는 것이다.


식당이라는 게 사실 매일 같은 맛을 낸다는 것이 어쩌면 이상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날의 습도, 온도, 물기, 시간, 특히 조리사의 컨디션에 따라 음식의 맛은 달라지기 마련인데 맛이 조금 달라지면 이거 큰일이 났다고 생각을 한다. 음식의 맛이라는 게 음식이 가지고 있는 식재료의 맛만 가지고 우리가 맛을 느끼는 건 아니다. 식당의 노란 조명, 옆 테이블의 떠들썩한 분위기와 함께 갓 나온 음식이 풍기는 냄새와 같이 먹으니 맛이 나는 것이다. 식당에서 맛있게 먹은 음식도 포장을 해서 집에서 혼자 먹으면 식당에서만큼 맛이 나지 않는다.


아무튼 그때는 그럴 때라 김태원은 가수만 해야지, 부활만 해야지 왜 예능을 하느냐며 따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김태원은 천재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사실 정말인 거 같다. 김미경 강사, 유명한 김미경 강사가 대학생 때인가 음악에 재능을 보여 작곡도 하고 노래로 밀고 나가려고 했단다. 그래서 혼을 다해 작곡한 곡을 어느 날 우연찮게 김태원이 그 곡을 보더니 그 자리에서 5분 만에 싹 뜯어서 바꿔 주며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하며 가버렸다. 그때 김미경이 그런 천재적인 사람들이 있는 곳이 가요계구나 하며 자신은 포기했다고 했다.


김태원은 괴짜 같은 구석이 많아서 그런지 타인의 노래나 음악을 잘 듣지 않는다. 그래서 김태원의 곡은 창조적이다. 표절시비에 모든 가요가 걸려 있는 요즘 부활의 곡은 거기에서 멀어져 있다. 지금 세상에서 음악이 완전한 창조가 있을 수는 없다. 이미 6, 70년대에 좋은 리듬과 곡은 다 나와 버렸다. 인간이 정말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좋은 곡에서 리듬을 좀 따온 들 사람들은 너그럽게 생각을 할 것이다.


중학교 때 학교까지 걸어갔다가 걸어왔다. 한 40분 정도 걸어야 했다. 등하굣길에 친구가 되어 준 건 미니카세트 플레이어에서 나오는 노래였다. 성적은 바닥을 기었고 친구도 없고 그저 먼지처럼 지내는 중학교 시절은 그야말로 우울의 극치였다. 어딘가 뛰쳐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고 싶지만 그럴 용기도 없는 바보 같은 중학생 시절이었다.


자율학습을 해야 하는데 한 시간만 하다가 도망을 쳐서 간 곳은 음악 감상실이었다. 거기서 디제이가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자신이 고등학생 시절의 80년대 이야기. 사춘기가 심각하게 와버린 디제이는 모든 것이 무의미했을 때 학교에서 학교로, 여학생에서 여학생으로 그리고 남학생으로 열병처럼 번진 부활의 이야기를 들었다. 모든 것이 힘든 학생들에게 위로가 되어준 부활의 노래들.


너 이 노래 들어봤어? 무슨 노래? 부활 몰라? 부활? 그래 부활, 록 밴드인데? 에이 록 밴드는 싫어. 아니야 부활은 달라. 롤링 스톤즈의 믹재거가 레이디 제인을 불렀다면, 부활의 이승철이 희야를 불렀어.라는 이야기를 디제이가 숨을 참아가며 해 주었다.


그런데 그 희야라는 노래 말이야, 17살 소녀의 아름답고 슬픈 사랑의 노래야, 부활의 리더 김태원의 친구 양홍섭이 여자 친구가 백혈병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는데, 그 아픔을 담은 노래가 바로 희야,였어.


디제이가 부활의 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는데 그 자리에 눈물이 뚝 떨어졌다. 나는 부활의 1집 앨범을 사서 희야를 듣고 또 듣고 내내 들었다. 그 가슴아픔 사연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먼지 같았던 중학생 시절을 견딜 수 있었다.  


앨범의 뒷면에는 희야에 대한 곡 설명이 있다.

[희야는 17세 소녀의 아름답고 슬픈 사랑의 진혼곡. 특히 마이클 생커도 실패한 기타에 의한 진혼의 종소리를 세계 최초로 개발한 곡이다]


나는 이 진혼이라는 말이 너무 좋아서 언젠가는 나도 글에 써먹어야지. 나의 진혼곡을 만들어야지 하며 생각했다. 1집의 타이틀 곡이 원래는 ‘비와 당신의 이야기’였지만 ‘희야’로 바뀐 것도 그 사연이 깃든 곡이었기 때문이었다.


부활의 희야 https://youtu.be/Fy3OUzgwORE


부활 초기작품을 들어보면 미소년 이승철의 미성의 목소리에 김태원의 기타 연주와 긁어대는 그 강렬한 목소리의 화음을 들을 수 있어서 좋다.


개인적으로는 희야보다 더 좋아하고 미쳐버렸던 노래가 ‘회상 3’이었다. 이 노래를 이승철의 미성으로 부른 버전이 마지막 콘서트다. 하지만 김태원의 온전한 굵은 목소리로 부르는 회상 3은 엄청난 해외 해비메틀 속에서도 단연 나의 가슴에 박힌 곡이었다.


그건 김태원이 목이 아니라 가슴으로 회상 3을 불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힘겹게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는 자신을 저 무대 뒤에서 숨 조리며 바라보는 한 소녀에 대한 이야기 역시 김태원의 부인이라는 걸 안다. 노래 마지막에 나나나 하며 부르는 소녀의 목소리는 김태원 부인의 목소리라고 한다.


소녀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건 오직 이 노래를 부르는 것뿐인 그 오래전 소년이 시간이 흘러 2023년의 늙은 소년이 되어 추억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드럼의 거대한 소리가 공백을 흔들어 깨울 때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흘러 모든 풍경을 흐리게 만들었다. 그 풍경 속에는 나를 바라보는 어린 소녀가 애써 눈물을 참고 있다. 불안하고 앞이 보이지 않았던 그때 가슴을 이렇게나 뒤 흔들었던 김태원의 노래가 나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회상 3 https://youtu.be/-fRov8cqw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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