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조비의 앨범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앨범이다. 그래서 엘피, 시디로도 다 가지고 있었다. 늘 그렇듯이 시디는 찾아도 없고, 엘피(나에게 엘피가 한 100장 정도 있었다, 군에 갈 때 보관을 잘해달라고 친한 누나에게 맡겼는데 제대하면서 연락이 끊겼다, 다른 앨범은 카세트테이프로 가지고 있는데 데미스 루소스 앨범은 정말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도 없고, 카세트테이프로 앨범이 남아 있다.


뉴저지 앨범은 대학교에서, 군대에서도 친한 사람들 생일이면 이 앨범을 구입해서 포장해서 선물로 사주었다. 그때 다양하지 않은 다양한 반응들이 있었다. 여자애들은 어? 어,,, 그,, 그래 고마워, 또 앨범이네. 같은 반응이었다. 남자친구들이라고 좋은 반응은 아니었다. 저 새끼 또 앨범을 주네, 같은 반응이었다. 그래서 내 주위는 본조비를 좋아하던 좋아하지 않던 본조비라는 밴드를 다 알고 있었다.


코로나가 덮치기 전 내가 조깅하는 강에서는 카누 세계대회가 개최되었다. 요즘도 슬슬 준비를 하는 모양이다, 아무튼 그래서 여러 나라 선수들과 여러 나라 사람들이 강변으로 몰렸다. 저녁에는 매일 축제 비슷했다. 곳곳에서 노래를 부르고 먹거리가 있고. 코로나 이후 사라졌지만 강변에는 포장마차촌이 있었다. 그곳에서 술을 마시던 외국인들이 많았다. 우리도 한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다가 본조비 뉴저지 앨범을 틀었는데 그들 역시 본조비의 팬이었다.


포장마차 안에서 술을 마시던 모든 이들이 ‘아일 비 데이 포 유’를 부르며 술잔을 높이 들었다. 바야흐로 꺼져가는 하루의 밤, 강가의 포장마차에서 떼창이 펼쳐진 것이다.


이 앨범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멋지고 멋있는, 그래서 촌빨 날리지만 아 이래서 본조비구나, 하는 노래가 바로 리빙 인 신이다. 뮤직비디오가 스토리 형식으로 나오기 때문에 보는 재미가 있다. 본조비는 이후로 이런 스토리의 뮤직비디오와 내용의 노래가 많다.


잘생기기로는 리치 샘보라가 당시에는 좀 더 우위에 있었다. 노래에 욕심이 많았던 리치 샘보라도 본조비가 노래를 부를 때 같이 옆에서 부른다. 뮤직비디오를 보면 그 모습이 잘 나온다. 본조비 좋아하는 사람들이 음감에서 떼창 하는 노래 1순위가 이 노래였다. 이 뮤직비디오가 야시시하고 확실하게 야하게 보이는 건 본조비의 목소리 때문이다. 이 앨범의 모든 곡에 등장하는 단어가 있는데 카우보이다. 이 노래 리빙 인 신에만 카우보이가 등장하지 않고 대부분 모든 노래에 카우보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컴 온, 처럼 다양하게 쓰이는 말이지 싶다.


Bon Jovi - Living In Sin https://youtu.be/VI2-ASiNCac


본조비를 좋아하는 팬들은, 메탈리카를 좋아하는 팬들에게 한 소리 듣는 이유가 말랑말랑한 록을 한다는 것, 그래서 그건 메탈이 아니야,라는 것이다. 본조비는 신시사이저를 풍부하게 사용했다. 그래서 음악이 폭넓게 들린다. 진정한 메탈계에서 건반은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 때문에 본조비를 좋아하면 너는 저리 가, 같은 분위기가 메탈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있었다. 그러나 이 노래, 레이 유어 핸즈 온 미는 건반이 함께 해서 이 노래가 얼마나 신나고 멋진 음악인지 알게 해 준다. 광분하는 관중들을 봐. 이때 존 본조비는 정말 지치지 않는 한 마리의 종마 같다. 부드러운데 거칠고 말랑말랑한데 단단하다. 그걸 본조비가 해내고 있었다. 한 마디로 멋있다.


Bon Jovi - Lay Your Hands On Me https://youtu.be/EhjSzibOIH4


베드 메드신도 너무 신나 버려서 올리고 싶지만 넘어가고, 뉴저지 앨범에서 가장 좋아하는 곡 아일 비 데어 포 유를 들어보자. 이 노래가 딱 이 뉴저지 앨범을 표현하고 대표하는 노래이지 싶다. 우리는 이런 록을 해, 이렇게 부드러우면서 강렬하고 호소력 있는 노래를 불러, 그걸 너희들은 알 거야, 내가 부르는 이 노래가 너희들에게 가서 닿을 때 나의 마음이 전달될 거야, 같은 말을 하는 것만 같다.


바닷가 집 앞에 웨일스 출신의 존 아저씨가 하는 퍼브가 생겼었다. 그래서 자주 갔다. 존 아저씨는 브루스 스프링스턴을 아주 좋아했다. 존 아저씨의 퍼브에는 여기 바닷가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이 많이 왔다.


존 아저씨는 한국인 아내와 재혼을 했는데 영국에 있는 가족과도 다 같이 친하게 지낸다고 했다. 그런 점은 참 부러웠다. 퍼브에 들락거린 지 몇 개월이 지났을 때 존 아저씨는 셔터를 일찍 내리고 새벽까지 같이 술을 마시기를 바랐다. 대화가 되지 않지만 우리는 이미 브루스 스프링스턴과 본조비로 서로 암약하는 사이가 되었다.


좀 더 친해진 다음에는 주말에는 늘 파티가 열리는데 그곳에서 본조비의 아일 비 데이 포 유를 다 같이 불렀다. 본조비는 누구나 다 좋아했다.


그래서 생각하니 노래는 경계가 없다는 것이다. 요즘을 생각하면 방탄소년단의 노래를 전 세계가 좋아하고 스트레이키즈가 이번에도 빌보드 앨범 1위를 차지했다. 벌써 세 번 째다. 르세라핌의 이프푸의 쇼츠는 전 세계의 춤꾼들이 다 따라 해서 유튜브에 올리고 있다. 노래는 경계를 허무는 부드럽고 강력한 무엇이다.

존 아저씨


새벽까지 술 마실 때


여름의 퍼브 모습


여름에는 모히또지


주말에는 늘 파티


시끄럽게 해서 경찰이 온 적도 있음


내가 찍어서 붙여 놓은 퍼브의 모습


80년대 록의 세계에 한 번 빠져 봐.

Bon Jovi - I'll Be There For You https://youtu.be/mh8MIp2FOh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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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년 일본의 교토.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한복을 입은 경자(사와지리 에리카)에게 김치 냄새가 난다며 시비를 거는 일본 남자고등학생이 나타난다. 경자와 친구는 그 자리를 피하려고 했지만 남자들은 계속 시비를 걸며 조센징이라 경자를 괴롭히다가 경자의 옷깃에 장난을 친다. 친구가 그 자리를 빠져나가 소식을 조선 고등학교에 전한다. 조선 고등학생들이 일제히 나타나서 경자를 괴롭힌 놈을 찾는다. 일본 남자고등학생들은 이 조총련계 조선고등학생들을 무척이나 두려워한다. 그때 누군가 나타나 경자를 괴롭힌 놈에게 달려가서 박치기로 때려눕힌다. 바로 조선고등학교에서 일진을 먹고 있는 안성이었다.

안성은 이 쪽발이새끼들이라며 아이들에게 일본 고등학생들이 탄 버스를 밀어서 쓰러트리자고 한다.


학생들은 울분에 못 이겨 안 그래도 일본에게 핍박받는 생활인데 잘 됐다 싶어서 전부 버스에 붙어서 버스를 밀어서 넘어트려 버린다. 그 속에 있던 또 다른 주인공 고스케는 식겁한다.

이 사건은 신문에 크게 나고 선생님에게 조총련계 조선인들은 역사의 피해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타국에서 디아스포라 문화를 강하게 지니고 있다는 것을 듣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강한 사람들이라고 고스케는 생각한다. 고스케는 포크 록 음악을 하고 싶은 그저 그런 청소년이었다. 그런데 선생님이 고스케에게 조선고등학교에 가서 패싸움보다는 친선 축구시합을 하자고 제안을 권한다. 고스케는 무서움을 안고 벌벌 떨면서 학교로 찾아간다. 무서운 안성에 일진들이 고스케와 친구를 윽박지른다.

고스케는 무서운 그 학교에서 플루트를 부는 경자를 보고 반하게 된다. 경자가 조선인 학생들과 함께 연주하는 그 곡은 ‘임진강’이라는 아주 아름다운 곡이었다. 고스케는 경자를 만나기 위해 한국어 공부를 하기 시작한다.

고스케는 임진강이라는 곡을 연주하기 위해 기타 판매점에 들렀다가 그곳에서 음악을 하는 사키자카(오다기리 조) 형에게 임진강이라는 노래에 대해서 듣게 된다. 노래는 남북이 임진강을 두고 갈려져서 같이 흘러 흘러 다시 합쳐졌으면 좋겠다는 내용이라는 슬픈 사연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듣게 된다.


고스케는 용기를 내어 경자에게 전화를 걸어 좋아하는 밴드 ‘더 포크 크루세더스’의 공연을 같이 보러 가자고 한다. 하지만 경자는 퇴짜를 놓는다. 대신 그날 공원에서 작은 공연을 하는데 보러 오라고 한다. 고스케는 얼굴이 밝아지며 가겠다고 약속을 한다.


임진강이라는 음악으로 고스케는 경자와 조금씩 가까워지고 포크록을 하고 싶었던 고스케는 경자와 함께 조선의 아픈 역사를 알아가면서 공원에서 임진강을 함께 연주하게 된다. 그때 두 사람의 공연을 지켜보던 라디오 피디가 고스케에게 명함을 주며 라디오에 출연하기를 바란다.


주인공 안성은 일본을 벗어나 고향으로 가서 축구선수가 되려고 한다. 안성과 사귀던 모모코는 안성이 자신의 전부라 믿는다. 안성은 늘 일본에 반항적이고 일본의 야쿠자들과 패싸움을 하고 다니는 모습에 늘 불안하다. 모모코는 자신이 안성의 아이를 갖게 되었다는 걸 알지만 안성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못한다.


강자(마키 요코)는 조선고등학교에 몇 년 늦게 들어간 누나뻘로 안성이 북한으로 가버리면 이제 교토에서 힘을 부릴 수 없다는 걸 알고 간호사가 되어서 병원에서 일을 한다. 거기서 모모코를 돌봐주면서 안성의 아이를 갖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러던 중 안성이 일본의 야쿠자 학생들과 싸우게 된다. 일본 학생들은 오이김치 냄새가 난다며 달려들고 안성은 쪽발이 새끼들아 하며 달려든다. 일본 학생들은 너희 나라는 갈라졌다고 시비를 건다. 조국은 분단되었지만 일본에서만은 조선은 통일이 되었다고 느끼는 안성. 부산에서 온 김일이라는 청년도 안성과 조선고 학생들과 함께 일본 야쿠자들과 싸운다.


안성의 왼팔, 재덕이가 일본의 학생들에게 홀로 찾아갔다가 집단으로 구타를 당하고 도망치다 트럭에 숨지게 된다. 재덕이 숨을 거두면서 재일교포들은 전환기를 맞이한다. 장례식 장은 울음바다가 되고 안성은 장례식장을 찾아와서 일을 도우는 고스케에게 한국 이름을 지어주고 형제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장례식장에 있던 어른들은 그런 고스케를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 그중 한 어르신(사사노 타카시)에게 일본인(고스케)은 장례식장에서 나가라는 말을 듣는다. 어르신은 일본인에게 당한 설움을 울면서 토해낸다.


[고향에서 조용히 농사짓던 사람한테 불쑥 종이 한 장 내밀더니 트럭에 실려갔어. 할머니는 우시고 논바닥에 주저앉아서 피눈물을 흘리셨어. 부산에서 탄 배 위에서 바다에 빠져 죽을까도 생각했어. 온 나라가 텅텅 비도록 끌려왔단 말이다. 너희 일본 젊은 놈들이 뭘 알아. 지금 모르면 앞으로도 절대 모르는 거야, 이 등신들아! 우린 너희하고 달라. 너희가 먹다 남긴 돼지밥 훔쳐 먹다가 야쿠자한테 걸려서 발목이 부러졌어]

고스케는 좋아하는 경자가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이념이 뭔지, 침략이 뭔지, 사랑하는 사람과 있을 수 없는 것에 화가 난다. 경자는 만약 우리가 결혼을 하게 되면 고스케 너는 조선인 될 수 있냐고 할 때 고스케는 곧바로 대답을 하지 못한다. 모든 것이 전부 이상하다. 왜 삶이 이토록 힘겨울까.


고스케는 가지고 있던 기타도 부숴버린다. 개천에 기타를 던져 버리고 몸뚱이만 라디오로 가니 고스케를 끝까지 피디가 기다려주었다. 피디는 고스케에 그때 공원에서 부른 그 아름다운 곡을 불러라고 한다. 하지만 라디오 국장이 내려와서 호통을 치며 그 곡은 일본에서 금지곡이라 부를 수 없다고 한다. 그때 피디가 국장에게 소리를 지른다. 노래 부를 자유도 없는 나라가 무슨 나라냐며 고스케에게 임진강을 부를 수 있도록 국장을 보내버린다.


고스케가 부르는 임진강이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온다. 경자는 라디오를 통해 고스케의 임진강을 듣고 장례식 장의 어른들에게 라디오로 그 노래를 들려준다. 이 노래 고스케가 부르는 거냐? 경자가 그렇다고 하자 모두가 그 노래를 듣고 눈물을 흘린다.


모모코는 끝내 버스에서 양수가 터져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병원에서 강자(마키 요코)를 찾는다. 강자는 이런 몸인데 왜 안성에게 알리지 않느냐고 모모코의 출산을 도운다. 모모코는 북한으로 갈 안성에게 짐이 될 수 없다며 알리지 말라고 한다. 홀로 분만을 하려는 모모코.

그때 안성은 재덕을 죽은 일본 야쿠자들을 찾아가서 패싸움을 한다. 서로가 죽기로 싸운다. 그곳에 강자가 찾아와서 모모코가 곧 아이를 낳으려고 한다고 알린다. 안성은 모든 걸 제쳐두고 모모코가 있는 병원으로 온다. 그리고 힘겹게 낳은 모모코에게 수고했다고 말한다. 옆을 지켜주는 안성을 보며 모모코는 눈물을 흘린다. 일본과 한국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났다. 안성은 모모코가 낳은 아기를 안고 오열을 한다.

임진강을 부른 고스케가 라디오에서 나오니 경자가 와 있다. 수없이 연습했던 말 “우리 함께 해요”를 말하는 고스케.

이 영화의 중심이 되는 노래 ‘임진강’은 57년에 만들어진 북한의 노래로 일본 가수 The Folk Crusaders가 일본어로 번안해서 불렀다. 일본 배우 사사노 타카시가 한국의 어르신 중 한 명을 연기하면서 울부짖었던 대사 중에 “부산에서 탄 배 위에서”라는 말이 있다.


당시 일본의 조총련계는 북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한반도에서 강제로 끌려간 사람들은 대부분 부산 사람과 경상도 사람들이었다. 재일교포는 고향이 북한도 아니며 공산주의와도 관련이 없지만 일본 패망 후 한국으로 가려고 해도 돈도 없고 이승만 정부 당시 북한과 접촉했다는 이유로 재일교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이유가 한국전쟁으로 인구를 줄어든 북한은 노동력이 필요해서 일본으로 가서 북한은 지상낙원이라는 말로 재일교포들과 접촉을 했다. 그리하여 북한으로 많은 재일교포가 들어갔고 일본에 남은 가족은 어쩔 수 없이 조총련과 관련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고스케와 경자의 임진강 공원공연 https://youtu.be/k6t5l6sg-kk


영화는 이 모든 이야기를 재미있게 잘 풀어냈다. 무엇보다 너무나 예쁘게 나오는 경자의 사와지리 에리카(베츠니로 욕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뭐 어때ㅋ)를 비롯해서 나오는 일본 배우들이 전부 재일교포를 잘 연기했다. 사와지리 에리카의 오빠, 삼촌, 어머니라고 말하는 모습이 귀여운 이때의 모습. 마키 요코, 키리나티 켄타, 에구치 노리코, 카세 료 등 지금은 탑이 된 배우들의 초기 모습을 볼 수 있다. 카세 료가 나온다고 하는데 나는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강자로 나온 마키 요코는 20여 년이 흘러  용길이네 곱창집에서 또 한 번 한국인으로 나온다.


여기 또 한 편의 일본 영화가 있다. 일본 영화이자 한국 영화. 용길이네 곱창집이다. 1960년대 일본 오사카의 판자촌에서 사는 한국 가족 용길이네가 곱창집을 하며 일본에 녹아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다.


일본 전시에 나가서 한쪽 팔을 잃어버린 아버지 김상호, 들어가지 말아야 할 곳에 들어가서 다리를 저는 큰 딸 마키 요코, 가족의 일이라면 다 던지고 나서는 엄마 이정은, 지긋지긋하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이 생활 속에서 돌파구를 찾는 둘째 딸 이노우에 마오, 그의 철없는 예비 남편  오오이즈미 요, 닐리아를 기가 막히게 부르며 가수를 꿈꾸는 셋째 딸 사쿠라바 나나미, 그리고 조선인이라 학교에서 늘 맞아서 학교 가기 싫은 일본 사립학교 다니는 막내 토키오. 이 모든 등장인물이 한국인으로 나온다.


내가 대사를 듣기에 한국 배우들이 하는 60년대 일본 대사는 잘하는 거 같은데 일본 배우들이 말하는 한국어는 어눌하다. 영화 속에서도 우리는 한국인이지만 한국어를 못한다고 나온다. 그래도 사쿠라미 나나미는 한국어를 꽤 한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일본의 내놓아라 하는 배우들과 한국의 배우들이 한 가족으로 나온다. 보면서 일본 배우들이 좀 대단하다고 생각이 드는 건 일본의 잘 나가는 배우들이 한국인을 연기하는데 그들의 입으로 한국인이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일본이지만 한국인으로 살아가야 한다, 김치는 김치다, 다들 한국인들이 우습지? 같은 대사를 한다.


영화를 보면 각본이 얼마나 좋은지 알 수 있다. 재미있는 요소가 곳곳에 있어서 보는 내내 재미있다. 하지만 폐부를 찌르는 대사들이 일본 속 1세대 한국인들이 얼마나 힘겨웠는지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재일’은 모순덩어리야. 차별과 편견 속에서 일본을 증오하고 한국을 그리면서도 여기를 벗어나지 못하니.

당연하지, 한국 가봤자 먹고살 길이 없잖아. 한국어도 서투른데.

결국 이거야, 돈에 묶여 있는 거지. 한 손에 돈, 한 손에 눈물. 눈물의 ‘재일’ 스토리.

벗어날 수 없으니 그곳에서 악착같이 살아야 한다. 앞길이 보이지 않아도 그놈의 고문 같은 희망을 품으며 내일은 밝으리라.


재미있게 봤다. 각본이 정말 좋다. 정의선 감독은 일본 영화판에서 각본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일본 영화계의 안톤 체호프라 불린다. 비록 60년 대의 이야기지만 80년대, 2000년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영화 이전 이미 한국과 일본에서 용길이네 곱창집, 야키니쿠 드래곤으로 연극으로 관객들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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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3-06-13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영화에서 처음으로 <임진강>을 들었죠. 중국에 사는 동안 북한 음식점을 가면 공연 시간에 임진강을 신청해서 듣곤 했는데, 북한 종업원이 부르는 노래가 정말로 좋았던 기억이 나네요. 종업원 반주에 어설프게 불러도 보았죠. 물론 한국 노래방에는 없는 노래지요.

교관 2023-06-14 11:29   좋아요 0 | URL
좋은 추억을 갖고 계시네요 ㅎㅎ 가사가 좀 다르지만 김연자 버전도 유튜브에는 있더라구요
 

내가 처음으로 들었던 팝이 아바의 치키티타였다. 초딩 때, 나는 국민학교였으니까 국딩 때. 나는 국민학생 때에도 라디오를 많이 들었다. 요즘 초등학생들은 라디오 같은 거 안 듣겠지?라고 생각하겠지만 윤도현이 오후 4시에 라디오를 하는데 일주일에 한 번 어린이들과 전화 통화하는 코너가 있다. 아니 그런데 내가 국민학교 때처럼 요즘 초등학생들 중에 라디오를 듣는 아이들이 아주 많았다. 신기할 일도 아닌데 정말 신기했다.


어릴 때에는 집이 워낙 가난해서 단칸방에서 지냈다가 아버지가 악착같이 돈을 벌어서 형편이 조금씩 풀렸다. 그 풀리는 시기에 나는 국민학교를 다녔다. 아버지는 가난을 자식들에게 줄 수 없다는 그런 신념이 강해서였는지 나에게 소형 라디오를 하나 사 주었다. 내가 그걸 원했거든. 아버지는 내가 사달라고 하는 건 주저 없이 사주는 편이었다.


지금도 피규어를 좋아하지만 어릴 때 장난감을 좋아해서 문구점 앞에 서서 움직이지도 않고 30분을 그렇게 서 있기도 했다고. 그런 나를 생각하니 좀 무섭네. 아버지는 장난감도 많이 사주었다. 장난감이라기보다 프라모델이다. 조립을 하는 것을 나는 정말 좋아했다. 왜냐하면 완성된 장난감은 구입하면 끝이지만 프라모델은 구입해서 조립을 해야 하는데 아버지와 함께 만들었다. 그 시간이 나는 너무 좋았다.

누나나 형이 없었던 나는 어쩌다가 라디오에 빠지게 되었고 거기서 흘러나오는 팝을 듣게 되었다. 거기서 처음 팝을 집중해서 들었던 노래가 아바의 치키티타였다. 치키티타는 예쁜 소녀를 부르는 말이라고 한다.


그리고 아바의 치키타타가 들어있는 카세트테이프를 구입하고 아버지는 나에게 미니 카세트 플레이어를 사주었다. 아바의 앨범을 넣어서 내내 듣고 다녔다. 겨울이었는데 추운 줄도 모르고 헤드셋으로 나오는 노래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중고등학생으로 가면서 시끄러운 음악에 심취해서 아바는 잘 듣지 않게 되었는데, 시간이 흘러 흘러 2008년에 영화 맘마미아를 보면서 아바의 노래를 찾아들었다. 그때 실시간으로 엔차관람을 3번 했다. 2주 동안 세 번을 봤다. 그 당시에는 극장에서 영화를 전투적으로 봤을 때였다. 그때 만나던 여자친구도 영화를 너무나 좋아해서 여름휴가를 보낼 때 아침부터 새벽까지 영화만 몇 편 보기도 했다. 극장에서 아예 나오지 않았다.


맘마미아를 볼 때 재미있었던 일이 있었다. 1차 관람 후에 우리는 영화 내내 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고 싶어서 가사를 좀 크게 프린트해서 제일 마지막 회를 관람했다. 마지막 상영을 할 때에는 극장에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신나게 노래를 따라 부를 수 있었다.


그때 한 줄 건너 앞에 외국인 5명이 왔는데 노래가 나오니 그들도 너무나 신나게 몸을 흔들며 따라 불렀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보더니 우리를 보고 더 신나 했다. 그때 상영관에 우리와 그들, 딱 7명이 전부였다. 그때는 외부음식을 들고 들어가지 못하게 했던지라 우리는 큰 텀블러 안에 소맥을 섞어서 넣고, 팝콘 통에 라면을 뽀사서 넣어서 갔는데 그들과 나눠 먹으며 신나게 영화를 봤다.


봤던 걸 또 보고, 읽었던 걸 또 읽는 건 나의 습성이나 특징 같다. 하루키의 소설 들은 죄다 몇 번씩 읽었다. 이창동 감독의 버닝은 열 번은 넘게 봤고, 덴젤 워싱턴의 더 이퀄라이저 1편은 케이블에 나오면 그냥 또 보게 된다. 갔던 곳을 또 가고 먹던 음식을 계속 먹는다. 질릴 법도 한데 한 번 구입했던 조깅화가 낡으면 그 조깅화를 또 구입한다. 나는 분명 새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데 생활이나 습관 같은 것을 보면 새것에 대한 갈망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아마 그래서 음악도 질리지 않고 들었던 음악을 듣고 또 듣고 계속 듣는 것 같다. 아바의 노래를 그렇게 막 집중해서 듣지는 않지만 아바는 유명한 그룹이라 그들의 노래는 대부분 듣게 되었다. 아바는 대 히트를 쳤다.


내가 주워들은 이야기로 아바의 보컬 중에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한 명이(그냥 메인보컬 아그네사라고 하자) 비행기를 타지 못해서 배를 타고 이동을 해서 공연을 해야 했다고. 맞는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학창 시절이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음악감상실에서 디제이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아바는 잘 알겠지만 두 쌍의 커플로 이루어진 혼성그룹이다. 아바의 노래들이 너무나 유명해서 오랫동안 아바가 그룹을 유지했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9년? 10년도 못 되는 시간 동안 활동을 하다가 해체하고 만다. 1982년에 해체를 하는데 커플이 결혼을 하고 다 이혼을 했다.


메인 보컬인 아그네사는 다른 멤버들이 흥에 불타 올랐을 때 심하게 고뇌에 휩싸였다. 왜 이렇게 힘겨운 나날들을 보내며 노래를 불러야 할까, 왜 이다지도 음악에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할까, 아이들도 이제 키워야 하지 않을까,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같은 고뇌에 휩싸이며 슬슬 해체의 분위기가 스멀스멀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 해가 77년이었다.


왜냐하면 빡빡하고 무리한 엄청난 스케줄에 아그네사가 공포에 떨었기 때문이다. 요즘말로 하면 아마 공황장애 같은 것에 시달렸을 것이다. 아바는 시간이 흘러 2013년에 앨범을 발매했다. 그 앨범에 수록된 곡을 들어보면 아그네사의 목소리는 아직 변함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구의 역사를 쓴 위대한 아티스트에 아바는 반드시 들어갈 것이다. 아바는 후배 가수들에게 자신들의 곡을 주는 것을 싫어하기로 유명한데 마돈나가 비행기를 타고 찾아와서 허락받은 곡을 넣은 곡이 헝업이었다.


오늘은 아바의 많은 주옥같은 명곡들 중에 처음으로 나의 마음을 빼앗아 버렸던 치키티타를 들어보자. https://youtu.be/p4QqMKe3rw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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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오뎅을 삶아 먹을 때 감자를 넣어도 맛있다. 감자가 입 안에서 포슬포슬 녹아 없어지는 느낌도 좋고, 오뎅탕의 달달한 국물을 빨아들인 맛을 감자가 가지고 있어서 좋다. 겨울에 가끔씩 해 먹던 오뎅탕을 먹다 보니 며칠 전 지역 축제에서 오뎅을 만원에 파는데 오천 원어치는 팔지 않는다는 기사가 떠올랐다.


그 유튜브가 유익병(유이뿅) 채널인데 한국에 공부하러 왔다가 한국에 눌러앉은? 한국에서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일본인인데(다 알고 있으려나). 유익병은 어지간한 한국인보다 한국의 방방곡곡 다 돌아다녀본 일본인일 것이다.


요즘은 유익병 채널을 보지 않지만 한때는 재미있게 봤다. 유튜브를 가장 잘 활용하는 사람 축에 유익병도 속할 것이다. 전국의 시골이나 작은 도시 구석구석 다니니까 유튜브를 켜고 라이브로 다니다 보면 채팅하는 사람 중에 현지인이 있어서 느닷없이 만나서 길 안내를 받기도 하고, 민박을 하다가 주인 할머니에게 밥도 얻어먹고, 일본 아가씨 혼자 한국 여행한다고 고생이라며 시골에서 어르신들의 귀여움을 온통 받기도 했다.


하와이인가 베트남인가 갔을 때에도 사기당하지 않게 현지에 사는 한국 구독자가 나와서 길 안내부터 식당, 숙소까지 전부 안내를 해 주고 다음 날에도 나와서 안내를 해주기도 했다. 혼자 캠핑을 할 때에는 다음 날 비가 와서 씻지 못하고 그 전날 해 놓은 화장이 다 지워져 같은 사람이 맞아? 할 정도가 된 몰골로 라면을 끓여 먹는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재미를 줬다. 또 덕자(다 알죠?)와 합방을 했을 때에는 도대체 둘이서 하는 외계어 같은 한국말 때문에 큰 웃음을 주었다. 꾸준하게 한국을 다니며 유튜브에 영상을 올리더니 이번에 뉴스에서 지역축제 오뎅 사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지역축제가 잘 되어 있는 일본은 지역마다 특색 있는 먹거리가 있지만 우리나라는 다니면 여기나 거기나 저기나 축제에서 파는 음식물이 다 거기서 거기다. 왜 그럴까 도대체. 축제에 가면 파전에 닭꼬치, 오뎅, 삶은 돼지고기 등 거의 비슷하다. 개선이 되지 않는다.


보통 지역축제가 열리고 먹거리가 들어서면 먹거리 코너를 지자체에서 관리를 못하고 업체에 위임한다. 그래서 자릿세가 있다. 보통 2, 3일에 백만 원에서 백오십만 원 정도 한다고 한다. 이삼일에 자릿세 본전과 이익을 뽑아야 하니 비싸게 팔아먹을 수밖에 없다. 지역 축제를 살리고 하는 의무나 마음 같은 건 없다. 그래서 축제 특성상 축제마다 다니며 먹거리를 파는 외부상인들이 많다. 그들에게 지역에 대한 애착이 없기 때문에 자릿세를 뽑아서 또 다른 축제에 가서 장사를 한다. 올해는 코로나도 끝나고 해서 일 년 동안 전국의 축제가 삼일에 한 번 꼴로 열린다고 한다.


지역축제는 정권에 따라 달라진다. 지자체는 중앙정부만큼 돈이 없기 때문에 지원을 덜 받게 되면 축제를 열어 활성화가 되면 그 돈으로 충당을 한다. 진보가 정권을 잡게 되면 지역 축제를 줄이고 지원금을 뿌리는 방법으로 지자체를 돌리고, 보수가 정권을 잡으면 지원금은 줄이고 축제를 많이 개최한다.


지역축제가 많이 열리면 풍성해지는 반면에 공무원들이 투입이 되어야 하는데 그만큼 인력이 없다. 공무원들이 축제의 먹거리를 관리해야 하지만 턱없이 일손이 부족하다. 그리하여 축제가 늘어나면 인력을 동원하는 비용이 든다. 기존의 공무원 인력만으로 축제를 전부 관리하다는 또 말단 공무원의 과로사가 뉴스에 날 것이다. 하지만 제한된 공무원으로 관리를 전부 하지 못하니 외주를 줄 수밖에 없다. 브로커가 끼게 되면 당연하지만 중간 마진이 올라간다. 그렇게 되면 외부상인들이 돌아다니며 먹거리 질은 떨어트리고 가격을 올려 지역 축제를 살리는 것과는 멀어지는 일이 반복된다.


내가 있는 바닷가에서도 주말마다 축제를 한다. 도시 인구가 150만 명이니까 도시 곳곳에서 축제가 열리는데 규모가 크다. 가수들도 많이 오고 불꽃놀이도 크게 쏘아 올리고, 맥주를 하루동안 그냥 준다. 영화제가 열리기도 하고, 67년도부터 공업축제가 시작했기에 역사가 깊어서 다운타운에는 매일 밤 먹거리 골목이 열리는데 이곳은 나름대로 관리가 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바닷가 쪽으로 오면 품바가 열리고 파전을 팔고 하는 그런 늘 같은 먹거리가 생긴다. 그곳이 한 번 열리는 여름 내내 그곳에서 먹거리 장사를 하고 여름 내내 밤마다 축제가 열린다. 하지만 여기 사람들은 그곳에 앉아서 먹지 않는다. 사람들이 바닷가에 바글바글한데도 그곳에서 먹거리를 먹지 않는다. 비싸고 질도 좋지 않고 맛도 썩 없기 때문이다. 바로 옆에 치킨전문점, 샌드위치, 백다방 같은 곳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런 곳에서도 오뎅을 만원에 팔지는 않는다. 오천 원어치는 팔지 않는다니 이 무슨 해괴모니냐.


오뎅탕은 날이 쌀쌀해지면 생각이 나는 음식이다. 나는 어릴 때 아버지와 목욕을 하고 나오면 늘 오뎅을 하나씩 먹곤 했다. 요즘은 아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깅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점찍어 놓은 포장마차에서 오뎅을 두 개씩 사 먹었다. 그렇게 매일 오뎅을 사 먹다 보면 주인하고 친해져서 오뎅탕 안에 들어있는 무를 먹을 수 있는 자격도 주어진다. 오뎅탕에 빠진 무가 정말 맛있다.


그렇게 몇 해를 조깅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들러서 오뎅을 사 먹었던 포장마차는 주인 할머니의 나이가 너무 들어서 그만 사라지고 말았다. 그 할마니 포장마차가 그 자리에서 몇십 년은 했는데 이제 휑하니 사라지고 난 후로는 나도 오뎅을 사 먹지 않게 되었다.


그 집이 내가 딱 좋아하는 오뎅의 맛이다. 국물이 짭조름하니 새우나 게, 땡초 같은 것들은 전혀 들어가지 않고 예전의 오뎅국물 같은 그 맛. 정말 보온병에 담아와서 국수를 말아서 후루룩 먹고 싶을 정도였는데, 한 번은 그렇게 국물을 받아와서 국수를 삶아서 먹었다. 꿀맛. 오뎅은 두부 같은 음식이다. 다른 음식에 비해 저렴하고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그래서 먹고 나면 기분 좋아지는 그런 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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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모는 3집이 제일 좋다. 찬란하고 화려한 꽃처럼 김건모 3집은 정말 최고였다. 모든 노래가 이토록, 전부 대 히트였다. 첫 시작의 ‘아름다운 이별’부터 ‘드라마’를 지나 ‘잘못된 남만’을 거쳐 ‘겨울이 오면’까지.


그런데 김건모 3집을 아무리 찾아도 없다. 이상하다, 꼭 그렇다. 늘 넣어두는 곳에 같이 우르르 넣어 뒀는데 찾아도 없다. 발이 달린 것도 아닌데 꼭 사라지는 물품이 있다. 한때 그렇게 나에게서 사라지는 물품이 립글로스였다.


요즘은 일 년 열두 달 사시사철 쳐발쳐발하고 다니지만 예전에는 겨울에만 입술이 메말라서 그때만 바르고 다녔다. 보통 두 개 정도를 구입해서 하나는 집에, 하나는 일하는 곳에 두고 열심히 발랐는데 어느 날 보면 꼭 사라지고 만다.


마치 립글로스 공장에서 반 정도 사용하면 알아서 없어지는 장치를 심어 놓은 게 아닐까 할 정도로 매년 그렇게 립글로스는 사용을 다 하기도 전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 립글로스가 요즘은 바닥이 보일 때까지 사용을 한다. 대신 이렇게 가만 두었던 김건모 3집 앨범이 사라지고 만다. 하루키의 오래된 버전의 책들이 다 있는데 사라진 것들이 있다. 정말 짜증이 나는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우산이 그럴지도 모르고, 또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양말이 그럴지도 모른다. 팬티가 그런 사람이 있고, 휴대폰이 그런 물품에 속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생각해 보니 휴대폰이 그렇다면 참 난감하다. 휴대폰이 도망가 버리면, 아아 생각만으로도 아찔하다.


휴대전화기도 물품이라 없어져도 이상할리 없지만 없어지면 정말 주인은 정지 상태가 되어 버린다. 모든 걸 휴대폰에 넣어두기 때문에 없어지면 큰일이 나는 것이다. 일시정지가 된다. 우리는 휴대폰을 맹신하고 있다. 잃어버리기 전까지는 나는 절대 잃어버릴 리 없다고 생각까지 하고 있다.


아직 나는 한 번도 휴대폰을 잃어버린 적이 없지만 내일이라도 도망갈지 모른다. 물품이니까. 발이 달린 것도 아닌 것들이 도망을 간다. 휴대폰은 비번을 풀 때 초기처럼 숫자를 눌러 푸는 게 지문이나 눈동자인식으로 푸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개인의 정보가 깡그리 담겨 있는 이상 요즘처럼 무서운 세상에 누군가에게 잡혀가서 기절을 당했을 때 휴대폰을 풀 때 나쁜 놈들이 지문이나 눈꺼풀을 억지로 까뒤집어서 폰의 비번을 풀 수 있지만, 숫자로비번을 풀어야만 한다면 쉽게 풀지 못한다. 주인인 내가 깨어나야만 한다. 그래서 직접 누르거나 알려주지 않으면 폰을 절대 풀 수 없다.


아무튼 김건모 3집은 여러 날 찾아봤지만 나오지 않았다. 김건모는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걱정이 연예인 걱정이라는데 쓸데없는 걱정을 해본다. 악독한 놈들에게 걸려들어 결국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아무런 혐의가 없다고 밝혀졌지만 밝혀지는 동안 김건모는 추락할 대로 추락을 했다. 그 과정에 공연을 하기도 했지만 거기서 노래도 거의 성의 없이 부르고, 무대에 그대로 드러눕기도 하고, 노래도 못 불러 팬들의 빈축을 샀다.


바로 악독한 그 놈들이 바라던 바였다. 연예인들을 구워삶을 줄 아는 놈들에게 걸린 것이다. 연예인들은 회사라는 막강한 벽에서 나오게 되면 한없이 허물어지는 나약하기 짝이 없는 모래성 같다. 현재까지 김건모의 마지막 모습이 공연에서 성의 없이 팬들을 대하는 모습이었다. 미우새에서도 김건모는 손을 너무 떠는 등 눈치를 보는 것 같은, 그래서 자존감이 떨어지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손을 그렇게 심하게 떠는 건 아무래도 술 때문이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피곤해서 손을 떠는 것과 술 때문에 손을 떠는 건 다르다.


김건모는 노래도 잘하고, 피아노도 잘 치고, 무엇보다 높은 자존감으로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티브이에 비치는 모습에서 낯빛이 어두워지고 말 수도 적어지는 것 같았다. 방송은 편집이라는 게 있다. 사실 일박이일 같은 경우 이삼일 같이 지내면서 대게 지루하게 흘러간다. 실상은 옆에서 보기에 썩 재미있지 않다.


현실에서 친구들과 캠핑을 가면 잘 알 수 있다. 캠핑을 즐기는 우리야 재미있을지 몰라도 옆에서 보기에는 지루하게 흘러갈 뿐이다. 하지만 일박이일의 새끼피디들이 붙어서 편집을 몇 날며칠에 걸려 한다. 재미있는 부분을 추려내서 이어 붙이고 음향을 넣고 자막을 달아서 보는 이들이 재미있게 볼 수 있게 만든다. 그러려면 카메라가 많아야 한다. 전체샷, 개인샷 따로, 좌우 따로. 카메라가 많지 않으면 재미있는 영상을 편집하기 힘들다. 제작비가 많으면 카메라가 많다.


축구경기를 생각하면 된다. 월드컵 경기는 다른 나라끼리 경기를 하는 것도 아주 재미있다. 골대 바로 옆에서 공이 날아오는 장면, 선수들의 역동적인 장면도 드론촬영, 망원촬영, 좌에서 우로 따라가면서 촬영을 한다. 카메라가 많기 때문에 티브이로 보는 사람들도 굉장히 역동적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한국의 프로축구 경기를 중계로 보면 역동성이 떨어진다. 카메라가 몇 대 없기 때문이다. 치열한 축구 경기가 마치 정적인 경기처럼 느껴져 재미가 떨어지는 것이다. 늘 한 면에서 촬영하는 모습만 비추어주니 프로축구 경기가 고등학생들의 경기처럼 보였다. 하지만 시간을 거쳐 한국의 프로축구 중계도 예전에 비해서 많이 나아졌다.


하지만 영국 프리미어 리그의 경기만큼 카메라가 담아내야 한다. 영국 프로 리그에 돈을 얼마나 많이 뿌리는지 잘 알 수 있다. 월드컵 경기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많은 카메라가 경기를 담고 있어서 재미가 있다. 마찬가지로 편집을 거치면 풀 죽은 김건모도 어지간하면 살릴 수 있다. 재미있게 보이게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건 김건모에게 너무나 큰 시련이 닥쳤다는 것이다.


김건모도 1집에서는 큰 인기를 얻지 못했다. 그러다가 2집의 ‘핑계’가 뜨면서 걷잡을 수 없는 초대형 가수가 되었다. 김건모도 한국 가요계에서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잘 생긴 것도 아니야, 얼굴도 까매, 키가 큰 것도 아니야, 그렇다고 몸매가 좋은 것도 아니었다. 처음에는 충격이었다. 뭐야? 이 까만 사람은?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에 대해서도 비슷했다. 1913년에 파리에서 이 곡이 처음 연주되었을 때, 그 지나친 참신성을 청중이 미처 따라가지 못해 연주회장에는 고함이 터져 나오고 엄청난 혼란에 빠졌다고 한다. 기존의 틀을 깨뜨리는 그 음악에 다들 깜짝 놀랐던 것이다. 하지만 연주 횟수가 거듭되면서 혼란은 서서히 가라앉고 이제는 콘서트의 인기 곡목이 되었다고 한다.


잘 생기지 않은 얼굴은 귀여운 얼굴이 되었고, 얼굴이 까만 건 건강하게 보인다고 했으며, 키가 큰 것도 아닌 건 친근했고, 몸매가 좋지 않은 것도 일반인들이 다가가기 쉬웠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김건모 패션에 열을 올렸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티피코시를 김건모가 모델을 하면서 그의 인기는 더 많이 올랐다.


김건모가 예전에 티브이에서 몸매 좋은 거 그거 다 나이 들면 쓸모없다, 나처럼 매끈한 이런 몸매가 유지되는 게 나이 들어 좋다고 했는데 그 말이 어느 정도 수긍이 가기도 하고. 2집 앨범은 사랑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끝난다. 2집의 첫 시작 곡도 너무나 좋다.


혼자만의 사랑으로 시작하는 이 앨범은 숨은 보석 같은 앨범이 아닐까,라고 흔한 소리 한 번 해본다. 핑계를 부를 때 옆에서 꿀렁꿀렁 같이 춤을 추던 까무잡잡한 댄서는 김송.


혼자만의 사랑 https://youtu.be/B34o8wTSfow


핑계 영어버전으로 부르는 김건모 https://youtu.be/1nBSABl3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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