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의 수많은 단편 소설집 중에 아마 제일 얇은 단편집일 것이다. 개똥벌레는 2004년인가? 도서출판창해를 통해서 출판되었다. 같은 출판사에서 초판 격인 이전의 개똥벌레가 있다. 이전에 나온 책은 겉표지에 5세 아이가 초록색 크레파스로 마구 낙서를 해 놓은 듯한 표지인데 나는 그 소중한 책을 잃어버린 모양이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 하루키의 한국 출판 소설은 다 가지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씩 사라지는 경우가 있다. 다리가 달린 것도 아닌데 어째서 도망을 가는지 모르겠다. 내 주위에는 하루키를 좋아하는 사람도 없고, 아예 하루키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도 있는데 그래서 누군가에게 빌려주지도 않는데 찾아보면 없다. 초판의 개똥벌레 표지에는 재미있게도 ‘헛간을 태우다, 그 밖의 단편’라고 쓰여 있다.


이 단편집은 얇은 만큼 두 편이 전부다. ‘개똥벌레’와 ‘헛간을 태우다’가 실려 있다. 헛간을 태우다는 이창동 감독이 영화 ‘버닝’으로 만들어 버렸다. 영화 속에 종수가 윌리엄 포크너를 좋아하고 꿈을 꾸면 비닐하우스가 불에 타는 꿈을 꾸는데, 헛간을 태우다,라는 단편 소설은 하루키가 윌리엄 포크너의 ‘헛간 타오르다’를 읽고 오마주를 하여 자기 식으로 쓴 것이고, 이 모든 걸 이창동 감독이 버닝으로 담아냈다.


이창동은 원래 소설가여서 그런지 버닝을 보면 대사가 마치 메타포어 같다. 공백과 공백이 존재하고 그 공백 사이를 은유가 들어앉아서 대사를 이어 주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조명을 기가 막히게 사용했다고 말하고 싶다. 종수가 나오는 부분은 자연광을 사용하여 아주 어둡다. 그건 해미가 나오는 부분도 그렇다. 그렇지만 벤이 나오는 장면은 인공광원을 사용하여 아주 밝게 나온다. 그것이 세상의 중심이 되는 것과 변두리의 것을 대변하는 모습이다. 조명으로 잘 표현했다.


윌리엄 포크너의 ‘헛간 타오르다’는 아주 고집불통의 완고한 아버지가 나온다. 주인공 ‘나’는 분노조절이 되지 않아 지주의 헛간에 불을 지르는 아들로 완고한 아버지를 닮았지만 또 평화로운 삶을 바란다. 보통 아버지의 완고함은 가부장적이 아니더라도, 그 반대적인 친밀한 아버지의 모습일지라도 살다 보면 완고한 모습을 가지게 된다. 이 완고함이 가정을 이루고 그 벽에 꺄지지 않게 지탱하는 모태가 되기도 한다. 이창동 감독의 버닝 속 종수와 아버지의 모습도 그렇다. 학창 시절에 꼴 보기 싫었던 아버지의 모습도 막상 나 자신이 아버지가 되고 나면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듯 그런 모습을 하고 있다.


윌리엄 포크너도, 하루키(는 너무나 많은 소설 속에서)도, 이창동 감독의 버닝에서도 유전자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대물림. 발버둥을 치며 벗어나려고 해도 이미 정해져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버닝 영화 속 벤의 모습은 이 사회의 중심이 되는 하나의 구심축 같은 존재다. 어느 시대에나, 어느 나라, 어느 시점에도 존재하는 축. 물질로 이루어져 사람들을 돌아가게 만들고 사람들이 그 축을 따라 움직이며 서로 광기에 사로 잡혀 공격하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하는 거대한 사회의 중심이 되는 축. 즉 굳건한 진실 같은 것이다. 절대 무너지지 않고 단단한 물질로 이루어져 시대가 아무리 흘러도 구성원만 바뀔 뿐 근간을 이루는 물질 즉 유전자는 바뀌거나 변하지 않는다.


그 축은 동시에 우물 같은 무서운 것이기도 하다. 세계의 곳곳에 있는 우물에 한 번 빠지면 어둠에 갇혀 위를 보며 언제 빠져나갈지 모르는 공포에 시간을 보낸다. 그 속에서 흔들리는 가능성 따위는 의미가 없어져 버린다.

거기에 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귤이 없다는 걸 잊어버리면 되는 거예요. 그뿐이에요.


귤이 그곳에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귤이 그곳에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된다. 그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다는 사실보다 그것이 늘 있어야 할 그곳에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된다. 마치 음식을 먹고 있는데 음식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그건 재능도 무엇도 아니다. 그것은 사실 그곳에도 존재하고 이곳에도 존재한다. 동시 존재한다. 동시 공체일지도 모른다. 스팅이 그에 관한 철학적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나는 이곳에 존재하지만 렌선을 타고 그곳에도 존재한다.


구름 없던 하늘에 구름이 모락모락 그림을 그려 한참을 서서 바라보는데 꼭 저 대책 없는 구름의 모습이 나의 마음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구름 같은 마음을 글로 표현하는 것은 참 어렵다. 화려하면서도 소박한, 양립된 마음이 동일선상에 놓여 있어서 자칫 발을 헛디디면 한쪽으로 기울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일종의 습관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어쩌면 일상의 반은 습관을 유지하려고 자신과 싸우고 또 일상의 반은 습관에서 벗어나려고 자신과 싸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해미와 종수는 언어습관이 억울하고 비굴한 일이 많은지 곧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말을 한다. 바늘로 툭 건드리면 마치 눈물이 탁 터져버릴 것 같다. 그 울음이 분에 차서 나오는 울음인지 환희에 차올라 나오는 눈물인지는 모른다. 그에 비해 벤은 유쾌하고 망설임이 없다. 이창동의 세계에서 보면 이전 영화에서도 서민의 얼굴은 늘, 어쩐지, 지극히 그러했다.


팬터마임, 고양이, 우물, 춤을 추는 무희가 해미를 나타내는 기호들이다. 이런 수식어를 이창동 감독은 하루키에게서 잘 떠왔다. 망가지지 않게 그릇에 잘 담아와서 그것을 화면에 골고루 펼쳐서 해미를 만들어냈다. 해미는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에 나오는 그녀로서, 여러 사람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것이 영화 속에서 말하는 동시 존재이기도 하다. 나 자신을 지칭할 때 저는 이런 사람, 또는 이건 싫어요, 이건 좋아요, 이 맛은 꽤, 이건 별로,라고 할 때 그것이 정말 나 자신인지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상대방에 따라 내가 싫어도 상대방이 좋아하면 따라가는 경우가 있고, 나를 가장한 내 속의 또 다른 추한 마음의 내가 있다는 것도 안다. 내 속에도 여러 명이 동시 존재하고 있다.


해미는 마치 상실의 시대의 미도리의 모습처럼 보인다. 메타포가 뭐지? 하면서도 종수에게 자신도 모르게 꽤 많은 메타포를 안겨준다. 종수는 그 메타포의 끈을 잡고 해미를 찾으려고 한다. 그런 모습은 양을 쫓는 모험에서도, 댄스 댄스 댄스에서도 심지어는 15살 소년 다무라 카프카에서도 잘 나타난다.

매일 아침저녁 벤 녀석이 태울 것 같은 비닐하우스를 찾아다녔다. 매일 몇 킬로미터나 되는 근처에 있는 낡고 쓸모없는 비닐하우스를 찾아다녔다. 떨어지고 찢어진 비닐을 겨우 달고 비닐하우스라는 걸 알아차릴 수조차 없는 비닐하우스는 몇 개나 되었다. 벤 그 녀석이 아주 가까이에 있다고 했다. 그 녀석이 태울만한 비닐하우스는 내가 다 알아볼 수 있다. 벤 녀석이 비닐하우스 하나를 태웠다면 나는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한 달 가까이 매일 비닐하우스가 있는 곳을 다녀도 타버린 비닐하우스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비닐하우스를 찾아다니면서 나는 벤 녀석이 나로 하여금 비닐하우스를 태워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그 녀석이 건네준 마리화나를 피우면서 나의 머릿속에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이미지를 심어 준 다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이미지는 풍선이 부풀어 오르듯 점점 커져가고 있는 착각이 든다. 착각이 아닐지도 모른다.


꿈을 꾸면 어린 내가 태워버려 활활 타오르는 비닐하우스를 보며 일종의 절정기를 느낀다. 벤 녀석이 태워버리는 것을 기다리기 전에 내가 비닐하우스를 태워버리는 것이다. 내가 쓸모없고 소용없는 것들을 태우는 것이다. 없애는 것이다. 그러는 편이 마음이 편할지 모른다. 태워 없애는 것. 수많은 인간들 중에 개츠비 같은 벤 녀석 만이 하는 이 짓거리를 나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야, 그래야 혜미가 돌아올 것 같으니까. 커다랗고 하루 종일 내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럼에도 잘 굴러가는 쓸모없는 비닐하우스를 내가 태워 없애는 것이다.

"씨발, 나는 해미를 사랑한다구요."

종수가 애타게 말을 하지만 벤은 큭큭큭큭 웃으며 대마를 피운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으니 안 그런 척 하지만 나 이외의 사람들은 멸시당해도 지극히 당연하다는 웃음. 킥킥 킥킥 거리며 웃는 소리는 귀로 들어오는 게 아니라 피부를 통해서, 내 얼굴에 뚫려 있는 구멍을 통해서 기어 들어온다. 마치 벌레처럼.

종수는 복수를 하는 것이 아니다. 종수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종수가 말했다. 나는 아버지를 미워한다고, 아버지는 분노조절장애가 있다고 말이다. 그래서 한 번 터지면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다고 말이다. 종수는 그런 아버지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걸 알고 있다.


가진 게 없어도 재미를 위해서 여행을 가고 팬터마임을 배우는 해미는 재미를 위해서 무엇이든 하는 벤과 어울리지만 종수는 낄 수 없다. 공항에서 곱창집으로 가면서 벤은 엄마와 통화를 하면서 우수한 DNA를 이어받았으니 걱정하지 말라며 종수가 가지지 못한 엄마와 웃음을 난타한다.


종수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종수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분노조절로 구치소에 간 것처럼 자신도 그런 아버지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다는 것을. 해미 이전의 해미들이 벤의 서랍 속에서 사라져 갔다는 것을. 유전자는 내면의 호러인 것을.


사람들은 버닝이 미스터리하고 애매해서 어렵다지만 실은 버닝은 시처럼 구체적이어서 어려울지도 모른다. 모든 장면과 대사가 구체적이고 구체적이어서 구체적으로 다 나타난다. 단지 너무 가까이 있어서 구체성을 사람들이 찾지 못해서 어려울지도 모른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해미는 상실의 시대의 미도리를 닮았다. 이 단편집의 단편소설 '개똥벌레'가 장편소설이 된 것이 '상실의 시대'다.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대체로 몸속에 머무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고 싶은 말은 입 밖으로 나오기 전에 느닷없이 다른 형태가 되어 비명처럼 밖으로 툭 튀어나온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나는 과연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개똥벌레의 주인공은 친구의 죽음을 본 후 죽음은 생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뿌연 공기 같은 미미한 죽음의 잔존이 주인공을 끝 간 데 없는 결락으로 몰고 간다.


하루키의 단편 개똥벌레를 양쪽에서 잡고 힘 좋은 누군가가 주욱 늘린 것이 노르웨이 숲, 상실의 시대다. 개똥벌레에서 주인공은 친구가 자살을 하고 난 후 친구의 여자친구와 만나게 되면서 ‘그녀가 찾고 있는 것은 내 팔이 아니라, 누군가의 팔이었다. 그녀가 찾고 있는 것은 내 체온이 아니라 누군가의 체온이었다’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문장이 단편인 개똥벌레에서 장편인 노르웨이 숲으로 심도 있게 늘어나게 된다.  단편인 개똥벌레에서는 장편인 노르웨이 숲의 나오코가 요양소에 들어가게 되고 편지를 주고받는 것까지 나온다.


나오코, 그녀에 관한 기억이 와타나베 안에서 희미해져 가면 갈수록 와타나베는 더욱 깊이 그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죽음, 죽음은 삶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이런 세계관은 그간 하루키 소설의 어떤 뿌리가 되었다. 토니 타키타니에서도, 하나레이 만에서도. 가장 최근에는 영화가 되어 오토를 잃고 나서야 제대로 상처받는 법을 알게 된 가후쿠처럼.


단편인 개똥벌레가 늘어나서 노르웨이 숲이 되었고 후에 그린 파파야 향기와 씨클로의 트란 안 홍 감독에 의해 영화가 되었다.

감독인 트란 안 홍의 색채는 필름 카메라에서나 볼 법한 색감이 우울함에 번지는 물감처럼 흐릿하다. 와타나베와 나오코의 닿을 수 없는 붉은 우울을 정화시키는 것은 맑고 투명한 미도리다. 하지만 우울이란 밝음 속에 숨어 있는 우울이 더 단단하고 크고 위험하다.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살지 못한다. 미도리는 와타나베만 곁에 있어주면 된다. 약속을 해 놓고도 만나러 나오지 않아도 남는 게 시간이라 괜찮아, 자산 같은 시간에 책이나 읽은 돼(이런 대사는 실은 없지만 하루키의 소설 속 주인공들의 스타일을 떠올렸을 때),라고 해버리는 와타나베를 미도리는 좋아한다. 미도리는 그게 사랑이다.


하루키의 문체를 영화의 문채로 옮기는 작업은 어렵기 때문에 많은 영화감독이 포기를 했다. 아마 앞으로 39년은 더 인기가 있을 ‘노르웨이 숲‘을 영화로 만들기로 했을 때 트란 안 홍 역시 고민이었을 것이다. 영화 ‘토니 타키타니‘에서 하루키의 문체를 영상으로 뿜어내야 하기에 한 공간에서 세트를 전부 바꿔가며 촬영을 했고 음악은 류이치 사카모토, 미야자와 리에가 쓰러질 듯 말 듯 멋지게 에이코와 하사코를 다 표현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좋은 하루키의 영화는 위에서 말한 이창동의 ‘버닝’이다. 그건 정말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하루키도 인터뷰에서 이창동 감독을 언급했다.


노르웨이의 숲에 나오코와 레이코가 요양하는 시설에 들어가 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물론 시설에 들어가서 요양을 하는 사람들의 수에 비해 엄청난 시설과 스태프가 훨씬 많기에 돈이 많이 들겠지. 그렇지만 그곳에 들어간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의 왜곡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왜곡된 마음을 바로잡으려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왜곡을 받아들이려 생활한다. 내게 정말 필요한 시설인 것이다. 그리고 페페를 기르는 카페의 아가씨와 환자 같은 이상한 닥터와 이야기도 나누고 싶고, 나오코가 와타나베의 은밀한 곳을 만져 주었던 강렬한 나무의 냄새가 있던 숲에도 들어가 보고 싶다. 거기서 비틀스의 '노르웨이 숲'을 제대로 듣고 싶다. 왜곡된 마음이지만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다.  


‘노르웨이 숲’ 속 미도리는 현실감은 제로다.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인물이다. 그래서 더더욱 사랑스럽다. 붉은 피로 온통 세상이 덮이려 할 때 미도리 하나 만의 존재로도 와타나베는 살아갈만하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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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참지 못하고 잡탕라면을 끓여 먹었다. 이토록 자극적이라 얼마나 맛있는지 모른다. 자극적인 맛은 입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자극을 잊어버리지 않게 곧바로 젓가락을 움직이게 만든다. 자극적인 맛은 급하게 먹어야 제맛이다. 뜨거울 때 해치워야 자극적인 맛이 자극적이라 못 느끼며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이런 자극은 비록 혓바닥을 신나게 하는 맛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지금 현재 유튜브 세상에는 매일 별에 별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특히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일들은 자극적인 내용이다. 사건이 하나 터졌다 하면 그 사건이 하루 만에 끝나는 법이 없기 때문에 몇 날 며칠 알고리즘이 상위로 올려준다.


유튜브 세상에서 인기가 많았던 먹방 유튜버 웅이는 여자친구를 스토킹 하고, 그것도 모자라 열쇠공을 불러 여자친구의 집 현관문을 따고 집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시시티브이에 잡히면서 경찰의 조사를 받게 되었다. 그러자 웅이는 오해가 있는 거라며 변호사들을 대동하여 억울한 부분이 있으니 바로잡겠다며 해명 영상을 하나 올리게 된다. 그런데 후에 여자 친구와 녹취록이 공개되면서 웅이의 악마적인 모습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여자친구에게 집착하는, 전문가들이 피해야 하는 전형적인 스토커의 모습을 보이다가 여자친구를 폭행했다는 증거까지 녹취가 되었다.


여자 친구가 끝끝내 만나주지 않으니까 애걸복걸하다가 나중에는 입에도 담지 못할 말을 내뱉더니 쌍욕을 시전 하면서 통화를 끝내는 녹취가 공개가 되면서 해명 영상 따위 전혀 마음에도 없는 자기 방어라는 것이 드러났다. 댓글에는 사람들의 항의성 분노 섞인 글과 조롱이 가득했다. 웅이 하면 어르신들에게 너무나 잘하고 싹싹한 면모를 보이며 온 국민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그러다가 대형 유튜브 채널에 나오기 시작하더니 점점 떡상했다. 그랬는데 이중인격이 드러나는 순간 이전의 모든 모습에 속았다는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 이런 자극은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단발성으로 끝나지 않는다.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래서 도처에 하이에나 같은 사람들, 즉 렉카들이 진을 치고 있다가 먹잇감이 보이면 달려들어 이 자극을 사람들에게 전한다.


두 번째, 연예뒤통령이라고 이진호 기자가 있다. 연예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대중의 관심의 대상이다. 이는 미국을 비롯한 일본, 대만을 넘어 유럽의 모든 나라들이 다 그렇다. 대중은 유명 연예인들의 가십에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있고 이는 곧 파파라치들의 돈으로 이어진다. 연예뒤통령 이진호 기자 채널은 연예인들의 사건사고를 공중파보다 자세하게 전달하는 채널이다. 요컨대 임창정의 사건부터, 이번 피프티피프티 까지. 그런데 이진호 기자와 권영찬 교수라는 사람의 대결? 유튜브로 결투? 서로 고소하겠다? 같은 상황이 현재 일어나고 있다.


권영찬은 이번 계기로 알게 된 사람인데 자신을 상담심리학박사이며 대구 커넬대의 정교수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으며 그런 자신의 지위로 인해 황영웅이나 이찬원 등 트롯 아이돌의 앨범을 수월하게 구할 수 있다거나, 그들의 활동을 자신의 지위로 좀 더 일찍 팬들에게 알려준다는 명목으로 라이브 방송으로 슈퍼쳇을 받는데 그 돈이 일억 몇천만 원이 넘는데, 이진호는 이런 행위가 권영찬의 실체를 잘 모르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 황영웅 팬들의 주머니를 털어가는 짓, 사기라고 주장하고 권영찬은 그런 이진호가 사기라며 서로 자극적으로 싸우고 있다.


이진호는 기자답게 커넬 대학에 전화를 걸어 권영찬이 정교수가 맞는지 물어보는 과정을 몇 번 겪는 동안 정교수가 아니라고 했다가, 맞다고 했다가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대학교 측에서 보여주었는데, 이 같은 사실이 드러나니 권영찬의 네이버 소개란에 정교수에서 교수로 바뀐 것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이진호는 도대체 커넬대학교가 무슨 학교인데 정교수라고 했다가 아니라고 했다가 말을 바꾸는지 이상해서 교육부에 전화를 했다. 이는 방송으로 다 공개가 되어 있다. 대학교의 정교수가 되려면 보통 밟는 단계가 있고 정교수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는데 매일 4시간씩 라이브 방송으로 구독자들의 후원을 받는 게 이상한 이진호는 교육부에 전화를 걸어 커넬대에 대해서 물어본다.


그랬더니 교육부 관계자가 커넬 대라는 곳은 교육부에서 인가를 내준 학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대학교라기보다 그냥 단체 내지는 사이비 같은 대학교라는 답변을 한다. 이 학교는 교수, 학생을 합쳐 총 60여 명이 전부다. 그 학교에서 사기를 당했다고 생각한 학생들이 법정 소송을 하고 현재까지 몇 건은 이어지고 있다고 말을 한다. 그래서 인가를 내준 학교가 아니기 때문에 정교수, 교수 같은 직책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진호는 이 모든 것이 권영찬의 사기행각인데 본인이 그걸 모르고 구독자들 즉 나이가 많은 할머니들을 꼬드겨 좋아하는 황영웅이나 트롯맨들의 소식을 전하는 라이브로 후원을 받는 것이 부당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권영찬은 그에 대해서 바로 반박 영상을 찍는데, 이진호가 사기라는 말을 방송을 켜서 하는데 사실 들어보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것 같다. 그저 구독자들을 믿고 그들에게 자신이 옳다는 식으로 이 말 저 말을 하면 댓글에는 전부 권영찬을 찬양하는 댓글들이 엄청나게 달린다. 정말 종교 같은 기분이다. 어쨌거나 서로 고소하겠다고 하니, 고소를 하는 순간 형사가 개입이 되어 조사가 이루어질 것이고, 그러면 뭔가 잘못이 있는 사람은 드러나겠지. 물론 이 과정에서 돈이 많은 사람은 변호사를 여럿 두면 또 결론은 달라질지도 모른다. 그 외에 이진호는 권영찬의 여러 문제를 말하고 있다. 들어보면 하아 하며 한숨이 나오는 이야기들이 있다. 싸움구경이 제일 재미있다고 이런 자극적인 대결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세 번째로 사람들의 미움을 무한정으로 받고 있는 뷰티유튜버 김기수다. 김기수도 대단하고 반대편에 있는 대중도 대단하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이유는 여러 가진데 밉상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짭을 짭이 아닌 것처럼 사용하다 사람들에게 걸린다든가 – 이는 예전 짭을 사용 하다가 나락으로 간 프리지아를 방송에서 풍자하면서 김기수는 자신의 샤넬가방을 문손잡이에 걸어둬, 방송에서 은근슬쩍 보이게 한다. 그런데 방송을 보던 사람들이 정품이라고 말하는 김기수에게 정품이 아니라며 사건이 일어난다. 네티즌들이 가방 해명 요구를 하자 김기수는 자신을 이용해서 수익창출한 그 유튜버에게 가서 해명해 달라고 하라며 목걸이를 뜯어서 던지며 욕을 하면서 급부상하게 된다.


한창 JMS가 방송을 할 때 정명석을 따라 하면서 피해당한 사람들에게 또 다른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한 걸 사람들이 지적하는 문제, 또 한 제품을 공구하기 위해 사용후기를 말하는데 너무 허위광고로 말을 해버려서 그 제품의 제조사가, 해명 자료를 배포하기에 이르렀다. 그 회사는 김기수와 어떤 광고 및 리뷰 요청이 없었고 협찬을 부탁한 적도 없다고 하며 김기수도 사과문을 발표한다. 이 같은 사건이 ‘김기수 급발진 영상’ 같은 제목으로 퍼지게 되고 뉴스기사에도 올라오면서 김기수는 사람들에게 욕을 먹는 동시에 자신을 더욱 알리는 계기가 된다.


이런 밉상의 모습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 2018년 배성재가 하는 라디오에 출연을 하여 시종일관 배성재에게 꼽을 주는 모습에 사람들이 싫어하게 된다. 여자친구가 없어서 배성재의 얼굴 피부가 그 모양이라고 계속 발언한다. 김기수는 재미로 장난스럽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 하지만 보는 이들은 그게 밉상으로 보였던 것이다. 무엇보다 배성재가 프로라서 김기수의 모든 발언을 다 받아준다. 현재 김기수가 동영상을 하나 만들어내면 안티팬들이 여러 동영상으로 분할해서 김기수를 자세하게 갈구는 영상을 만드는 사태에 이르렀다. 이게 보통의 노력으로 안 되는 영상들인데 김기수도, 또 안티팬들도 아무튼 대단하다. 서로가 자극으로 자극을 주며 자극적이 되어 간다.


네 번째, 유튜브로는 프랑스에서 현재 일어나는 폭동에 대해서 자세하게 볼 수 있다. 사림들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애플 매장을 털어 사람들에게 아이폰을 나눠주고, 창문을 깨고, 가게를 털고 무장 경찰들이 나타나서 폭도들을 사정없이 내려쳐 연행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노한 시민들이 버스를 공격하고 돌을 던지고 과격한 행동을 하고 경찰들이 사정 봐주지 않고 폭도들을 잡아서 끌고 가는데 지금까지 잡아들인 사람들만 삼천 명이 넘는다고 한다. 프랑스는 벌써 오래전에 아이를 낳지 않아서 국가에서 다른 나라 사람들을 쉽게 자국민으로 인정해 주었다. 그래서 파리에 가면 인종이 다른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를 고국으로 여기고 귀화해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어느 나라던지 이민자들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있다. 그런 분위기가 죽 이어지다가 이번에 알제리 출신 17세 학생이 경찰의 검문에도 차를 몰고 가려다 총에 맞아 사망하면서 현재 프랑스는 걷잡을 수 없는 폭동사태가 일어나고 있다. 유튜브로는 자세한 영상을 볼 수 있다. 자극적이다.


그다음 마지막으로, 마지막을 말하기 전에 천만영화에 다시 이름을 올린 범죄도시 3을 다 봤을까. 영화를 보면 마석도가 더욱 강력한 펀치와 한껏 풀어진 유머를 장착했다. 거기서 마석도는 경찰은 민중의 몽둥이라는 명언을 한다. 방망이라고 했나. 본지 오래되어서 잘 기억이 안 난다. 현재 유튜브에서 가장 핫 한 일은 격투기 유튜버 엄태웅과 조폭들과의 전쟁이다. 엄태웅은 부산 돌려차기 가해자와 구치소에서 한 방을 같이 쓰면서 가해자에게 들은 이야기를 출소 후 하기도 했다.


수원의 남문파인가, 아무튼 사건의 발단은 엄태웅이 어느 날 밤 수원의 어느 도로를 지나가려는데 누군가 도로에 차를 주차시켜 놓고 모든 차들이 못 지나가게 한 것이다. 내려서 차주에게 차를 빼라 누군데 사람들에게 이렇게 피해를 주느냐, 나는 못 뺀다, 왜 못 빼냐, 나 화났다. 이러면서 격하게 분위기가 고조되었고, 서로 욕을 하며 화를 내다가 그 차를 빼지 않던 사람이 몸에 문신을 한 남문파인 것을 알게 되었다. 경찰이 오면서 차주인이 차를 몰고 가면서 일단락이 되었는데, 엄태웅이 유튜브로 남문파에게 저격 영상을 보낸다.


조폭 양아치들이 하는 일이 왜 그러냐, 왜 시민들에게 피해를 주느냐, 사과를 해라, 그러지 않으면 전쟁을 선포한다며 같이 전쟁을 할 사람을 모집했고 그 장소에서 조폭들과 만나서 전쟁을 하는 장면까지 영상으로 담았다. 그런데 엄태웅에게 조폭 여러 명이 달려들었다. 그때 경찰들이 우르르 등장한다. 범죄도시 3처럼 말이다. 하지만 영화와 다른 점은, 영화는 경찰들이 봉을 촤르르 꺼내서 조폭들을 때려 잡지만 실제로는 조폭들을 달랜다고 해야 할까. 어르고 달래는 것처럼 행동을 하여 제압?을 한다.


엄태웅은 격투기 선수출신이지만 민간인이고, 민간인 한 명에게 조폭 여러 명이 달려들었는데 민중의 몽둥이가 되어야 하는 경찰들이 순둥이들이 되어서 싸움을 말린다. 영화에서처럼 광수대가 아니라서 그럴까. 이래서 경찰들을 순수하게 믿고 일반인들이 위험이 많은 곳에서 지낼 수 있을까. 이러면서 경찰 간부들이 정말 할 말이 있나. 정보를 알고 대기 타고 있었다고 하던데, 그러면 광역수사대를 보내던지, 전투경찰들을 투입하던지. 간부들은 도대체 앉아서 뭘 하는 것일까.


위의 모든 사건들은 유튜브에 들어가면 영상들이 자세하게 나와 있다. 자극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마어마하게 그 영상에 몰려든다. 사람들은 모순덩어리라 연예인들이 도덕적으로 착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도적적이며 유교적이고 붕우유신을 잘 지키는 연예인들에게는 큰 관심이 없다. 욕을 해도 사고 치고 자극적인 연예인들에게 대중은 더 관심이 많다. 티브이의 연애프로, 나는 솔로 같은 방송에서도 자극적인 사람이 나와야 사람들은 욕을 하면서도 달려들어 시청을 한다. 음식도 자극이 없으면 맛이 없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인간은 정말 모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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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더 스크랩’은 하루키의 에세이 중에서도 무게로 따지면 가벼운 글이다. 에세이 ‘작지만 확실한 행복’보다는 무게가 있고 ‘먼 북소리’보다는 가벼운 책이다. 내용면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가방에 넣어 다니다가 버스를 기다릴 때 꺼내서 아무 페이지나 펴서 읽기에 좋은 책이다. 이 책은 두 번째 사진에서 설명을 잘해놨다. 이런이런 책인 것이다.


하루키는 어디 어디에 연재하는 걸 싫어한다고 하면서도 여러 잡지(일본의 앙앙[우리나라로 치면 ‘쎄시’ 같은, 여성중앙보다는 조금 젊은 층을 겨냥한 여성 잡지 – 하루키는 기묘하지만 에세이는 남성들보다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은 것 같다] 같은 잡지. 앙앙의 올해 1월 호에는 우영우로 일본에서도 인기가 많은 박은빈이 인터뷰를 장식하기도 했다)에 연재를 한 칼럼을 묶어 에세이로 펴낸 책들이 많다.


그래서 잡지의 한편에 짤막하게 올라가는 칼럼이라 깊게 생각하며 읽어야 할 글은 아니다. 그래서 읽다 보면 오오 하거나, 큭큭 하며 웃음이 나오는 이야기가 많다.


이 책 ‘더 스크랩’에는 잡다한 80년대의 것들이 가득하다. 더 자세하게 말하면 80년대 미국의 문화 내지는 여러 잡다한 미국 것들로 가득 차있다. 80년대의 미국은 산업, 경제가 전 세계에서 꼭대기에 있었다. 무엇보다 문화, 미국의 영화가 세계를 집어삼키고 강타하고 있었다. 문화적으로 풍요로웠던 미국의 사정을 하루키를 통해 엿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에세이를 보면 실버스타 스탤론의 록키라든가 아놀드 슈왈츠 제네거, 이티에 관한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록키는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영화다. 그래서 록키 시리즈는 마지막 크리드 3까지 전부 보았지만 록키 발보아의 첫 이야기 록키 1이 제일 좋았다. 록키 1은 감격에, 감탄에, 감동까지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록키는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70년대 필라델피아로 왔다. 돈을 걸어 내기를 하는 3류 복서장에서 몸을 혹사시킨다. 당시 미국은 기회의 나라였다. 필라델피아는 미국 독립의 성지이며 그 해가 독립 200년이 되는 해였다. 미국은 기념을 하기 위한 이벤트가 필요했는데 크리드와 록키의, 슈퍼 복서와 삼류 복서의, 신과 인간의 대결을 부추긴다.


록키는 배운 것 없고 배우기 싫어서 몸으로 되는대로 먹고살자, 같은 정신과 투박한 말투인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 말투가 친숙해진다. 록키는 에드리안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마음이 드러나는 장면이 있는데 점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배우기 싫어하는 록키가 그녀에게 다가가기 위해 쓸쓸한 집에서 거북이와 금붕어에게 농담 연습을 하는 장면이 찡하다.


어둡기만 한 필라델피아 골목은 록키의 앞날과도 같다. 눈을 감으면 보이는 세계, 그것이 록키 발보아의 미래였다. 하지만 록키는 자신도 힘들고 앞이 보이지 않지만 친구의 여동생을 악의 소굴에서 데리고 집으로 바래다주고, 주위를 돌아보며 사람들을 챙긴다. 그러면서도 새벽마다 시합을 위해 조깅을 할 때 시장 상인들이 록키에게 사과를 던져 준다.


눈물이 펑펑 흐르는 장면은 마지막 크리드와의 시합이다. 너무나 멋진 장면이다. 판정승을 한 크리드. 사람들은 록키에게 재시합을 묻는다. 록키의 얼굴은 마치 찰흙을 벽에 던져 흘러내리는 얼굴로 애드리안을 큰 소리로 찾는다. 군중 속에서 모자를 잃어버리고 록키에게 안기는 애드리안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장면이 가슴을 몇 번이나 두드린다. 록키는 승리하지 못했다. 하지만 진정한 승리가 무엇인지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다. 꼭 이기지 않아도 이길 수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너무너무너무 좋은 영화다.


당시에 록키를 실제 권투선수로 착각했던 사람들도 많았다. 영화 속 사과를 던져주는 것도 실제로 권투 선수로 알고 록키에게 던져 주었는데 그대로 영화에 삽입이 되었다. 요즘도 어떤 사람들은 록키를 실제 권투 선수 역사에 있는 실존 선수로 알고 있다.


록키를 몇 번을 봤다. 지치고 쓰러질 때 록키의 주제가는 많이 이들에게 어김없이 힘을 주었다. 저 필라델피아 광장의 계단으로 뛰어 올라가 양손을 높이 든 록키가 되어, 보이지 않던 앞도 보이게 될 것만 같다. 록키보다 더 멋진 사람은 코치였다. 록키의 모든 캐릭터가 눈물의 포인트다.

https://youtu.be/K-YSlyhSues


그래서 이 책을 보면 80년대의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다른 에세이들과 또 다른 책이 이 책 ‘더 스크랩’이다. 그중에 존 어빙의 챕터를 보면 마흔의 존 어빙이 별거한 이야기를 하루키가 하고 있다.

존 어빙의 소설을 읽어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정말 길다, 아주 길고 몹시 길다. 또 너무 길어서 지겹다. 하지만 존 어빙은 소설이란 자고로 길어야지,라며 죽 길게 소설을 집필하고 있다. 멋있는 사람.


존 어빙의 소설이 영화가 되었을 때 직접 각본을 써서 각본상을 받기도 했는데 그건 어느 소설가도 이루지 못한 업적이었다. 트루먼 카포티도 레이먼드 카버도 이루지 못했었다. 카포티에 대해서도, 레이먼드 카버에 대해서도 할 말이 너무너무 많지만 넘어가자. 카포티는 영화 천재,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이 트루먼 카포티로 나온 영화 '카포티'가 있다. 영화를 좋아하고, 트루먼 카포티를 좋아한다면 롸잇 나우.


존 어빙을 보면 프란츠 슈베르트가 겹친다.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는 타인에게 들려줘도 너무 긴 나머지 지겨워할 뿐이었고, 가정 내에서 편안하게 연주하기에는 음악적으로 너무 어려워서 악보로 팔릴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고, 사람들의 정신을 도발-환기시킬만한 적극성도 결여되어 있었다. 사회성 같은 건 전무한 거나 다름없었다. 돈도 명예도, 그 무엇도 아닌 것을 위해서 슈베르트는 피아노 소나타를 만들었다. 하지만 슈베르트가 죽고 난 후 가곡 ‘마왕’을 들어보면 눈물이 날 정도로 좋다. 특히 피아노 부분은 말이 흙을 파헤치고 달려 나가는 것 같다. 가곡의 시초가 된 마왕을 만들어낸 슈베르트를 사람들은 사후에 인정했다.


그리고 한 챕터에는 짧지만 카펜터스의 카렌 카펜터에 대해서도 언급을 했다. 카렌의 이혼 소식에 대해서 짤막하게 하루키가 언급했다. 카렌의 몰락은 자신과 가장 가까이 사람들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착한 이미지를 덮어 씌워서 어떠한 일탈도 하지 못하게 하고 결국 오빠의 천재적인 음악성에 가려져 그저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노래만 부르다 죽음을 맞이했다.


카렌은 오빠에게 인정받기 위해 드럼을 배워 드러머가 되어 공연에서 미치듯이 드럼을 연주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빠의 마음에 들지 않았고 카렌은 점점 음식을 거부하고 말라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했다. 카렌의 목소리는 세기에 나올까 말까 한 목소리였는데 안타깝다.  https://youtu.be/6dJUnh6N8-U 카렌의 드럼 연주


하루키가 한국 독자들의 마음을 파고든 이유를 생각해 보면 - 요컨대 조정래 작가의 경우는 너무 완벽에 가까운 근대적 구축성과 완결적 천상성을 지니고 있어서 독자들이 아무런 불만 없이 그의 작품이 훌륭하다고 인정하면서도 그 완벽함에 답답해한다. 그에 비해 하루키는 비순열 친근함으로 사람들이 바라는 ‘부드러운 혼돈’을 추구한다. 하루키는 ‘느슨하고 심플한 의미에서 난해한’ 텍스트를 추구하는 경향이 새끼 고양이처럼 일반 독자들의 품을 파고 들어온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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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소름 돋는다고 적어놨지만 정말 소름 돋는지는 모르겠다. 나도 사람들 한 번 끌어 보려고 소름 돋는다고 적어봤다. 헤헤.


백석의 시 ‘통영’에서도 유월이 되면 달과 지구가 가까워져 바닷물이 밤에 화악 빠져나가는 장면을 조개가 울을 저녁으로 너무나 아름답게 표현을 했다. 백석의 시를 읽으면 한 줄인데 그 안에 담긴 여러 의미나 환경을 찾아보고 생각하느라 시간이 꽤 오래 걸리는 경우가 있다. 백석은 시인으로 알려졌지만, 러시아어도 잘하고, 영어 선생님이었을 만큼 영어, 그리고 일본어는 물론 신문사에서 기자로 일을 했으니 박학다식인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의 시 속에는 백석의 박학다식보다 인간이 가진 오감, 특히 미각에 대해서 너무나 눈앞에 아른 거릴 정도로 시를 써놔서 그의 지식이 드러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를 읽으면 뭐 재철에 나오는 식재료가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거나, 그래서 의미를 유추해 볼 수 있다.


김영하 소설가의 단편소설 중에 기묘한 소설 ‘피뢰침’이 있는데 그 속에는 낙뢰와 적란운 같은 자연 현상에 대해서도 잘 나온다. 번개라든가 천둥이라던가, 한 번은 검색해서 보거나 내셔널지오그래픽 채널에 들어가서 태풍이나 번개에 관해서 유심히 보게 된다. 그러면 김영하의 소설을 읽으며 오 하며 감탄하게 된다.  김영하의 장편 소설 '검은 꽃'을 읽은 지 꽤 오래전인데 아직까지 그 배밑에서 몇 달 동안 갇혀 항해를 하면서 구토와 배설과 식사해결 같은 처절함이 선하다. 대단한 글이라고 생각한다. 김영하는 정말 햇빛도 들어오지 않는 배에 갇혀 경험을 통해서 그런 글을 썼나 싶을 정도였다. 그러니까 아주 과학적이었다.


앞전에 소개한 아베 코보의 소설을 영화화 한 ‘모래의 여자’ 속에도 이런 장면이 나온다. 쥰페이가 모래 속에서 탈출하기 위해 모래 구덩이 속에 나무통을 넣어두고 까마귀를 잡으려고 얼마 뒤 뚜껑을 열어 보니 그 안에 마실 수 있는 물이 가득 들어 있는 장면이 나온다.


가끔 해안가를 거닐면 해수욕장의 백사장 말고, 좀 분위기가 다른 백사장으로(사람들이 많이 오지 않는) 가면 모래 구덩이 안에 맑은 물이 고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물은 바닷물과 달리 그냥 맑은 맹물이다. 그래서 마실 수 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모래가 물을 생성시키고 산소를 만든다. 자세한 작용을 설명을 하기는 힘들지만 모래 알갱이 사이에는 구멍이 있는데 그런 작용을 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해안가에 아파트 단지나 인공 구조물을 엄청 만드는 바람에 해안가에 있던 모래가 사라지고 있다. 이는 대체로 몹시 심각한 상황인데 개발이라는 명목하에 모든 것이 묵살되고 있다.


미국도 벌써 몇십 년 전에 이런 심각한 문제를 인지하여 해안의 인공구조물 때문에 모래가 빠져나가지 않게 많은 연구를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해안가에 살고 있는 사람만, 그것도 몇 명 정도만 그 심각함을 알고 있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내가 사는 곳도 바닷가이기 때문에 그런 점을 좀 알고 있다. 동해만 해도 해수욕장이 굉장히 많다. 그런데 그 모든 해수욕장이 정부의 지원을 받는 것은 아닌 것으로 안다. 어떤 기준인지는 모르지만 지자체나 정부의 지원을 받는 해수욕장이 있는데, 6월이 되면 해수욕장이 개장을 위해 단장을 하는데 가장 큰 변화는 곱고 새로운 모래가 트럭으로 실려 와서 깔린다는 것이다.


집 앞의 해수욕장도 매 년 유월이 되면 대대적인 단장에 들어간다. 백사장을 갈아엎고 그 위에 고운 모래를 다시 깐다. 그리고 주위의 소나무와 야자수를 다듬는다.


문제는 동해의 해안도로를 따라 있는 해안가의 모래들이 자꾸 줄어들어 간다는 것이다. 해안도로를 타고 도로를 짓고, 인공 구조물을 짓고,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지어서 바다에서 오는 바람이 구조물에 부딪혀 밑으로 내려가서 모래를 파고 깎아서 바다로 가버린다. 그래서 모래를 다시 까는데 굉장히 많은 자본을 투자한다. 그런데 모래를 까는 건 일 년에 한 번 까는데 그 모래들이 사라지는 속도는 3, 4개월이면 다시 사라진다. 미국은 위에서 말했지만 해안의 모래를 살리고 지키는데 사활을 걸고 있다.


이런 문제를 잘 담은 다큐멘터리가 있다. 이 방송을 본 게 벌써 10년 전인데 지금은 해안가의 모래가 어떻게 되었을까.


‘모래의 여자 속’에 등장하는 모래 안의 맑은 물은 몹시 과학적이다. 모래의 기능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모래는 물을 저장하는 능력이 있다. 바닷가에 모래 구덩이가 있고 그 속에 맑은 물이 생성되면 계속 물이 솟아난다. 아주 물이 좋다. 그리고 생명체를 살게 한다.


바닷가에 있는 모래 구덩이 속 맑은 물에는 민물에서만 살 수 있는 생명체들도 살아간다. 모래가 바닷물이 들어오는 것을 막고 맑은 물에 산소를 끊임없이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 백사장이 망가진 모습이 10년 전 다큐멘터리에 가득했는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까.


다큐를 보면 1960년대 우리나라 백사장을 모습을 보여주는데 딱 ‘모래의 여자’ 속에 나오는 백사장 같은 모습이다. 그런데 해안을 따라 도로가 들어서고 인공 구조물이 들어서고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언젠가부터 해안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이런 걸 보면 인간이 인간을 망가뜨리는 존재 3위에 당당하게 이름이 올라오는 것도 크게 이상한 일도 아니다.라고 이 글을 2주 전에 적어놨는데, 지금은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존재 2위라고 한다. 하하.


백사장이 사라지는 해수욕장, 해변의 위기 [환경스페셜-살아 숨 쉬는 땅, 모래] https://youtu.be/t3KN40VXEU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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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도시로 간 처녀’는 81년 작품으로 김수용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김수용 감독은 우리나라 문예 영화의 거장이라 불렸다. 이 영화의 각본을 김승옥이 썼다. ‘도시로 간 처녀’ 이전에 김승옥과 김수용 감독이 만나서 작품을 만들었던 건 64년에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만들었던 소설 ‘무진기행’을 영화로 만든 ‘안개’였다.


영화 ‘안개’가 소설만큼 재미있는 건 김승옥이 직접 각본을 썼기 때문이다. 이때 재미있는 일화가 김수용 감독이 김승옥에게 제발 쉽게 써달라고 요청했다고.

김승옥이 한국문단에 등장하자 그야말로 일대 파란을 일으킨다. 그 이전까지 대한민국의 대중 소설은 무협소설과 민담 설화에 가까운 소설이었는데 김승옥이 문단에 등장하자마자 모국어의 폭발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야말로 피츠제럴드 같은 직유와 은유, 그리고 구조가 너무나 완벽하게 이루어진 문장이 사람들의 염통을 후려쳤던 것이다.


김승옥이 등장했을 때의 일화 중 하나는, 지금 한국의 대문호 격인 소설가 김훈, 김훈의 아버지 김광주 소설가도 우리나라 거의 1대 문인이었다. 김훈이 꼬꼬마 16살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아버지 김광주의 방에 아버지 후배들, 즉 문인들이 모여서 심각한 얼굴들을 한 채 이야기 중이었다. 이야기 즉슨 읽어봤냐? 괴물이 등단을 했어! 였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김훈에게 막걸리를 받아오게 해서 김광주와 문인들이 마시면서 이제 우리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같은 이야기를 밤새 했다고 한다.


김훈은 한국일보 문화부 기자였다. 당시 최고의 소설이 황석영의 장길산이었다. 장길산은 한국일보에 74년부터 84년까지 매일 연재된 소설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황석영이 매일 소설을 연재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다 도망을 쳤다. 도망을 쳐도 어느 지역에서 그날그날 쓴 소설을 우편으로 동봉해서 신문사에 보냈는데 그날은 연락이 되지 않는 것이다. 신문사는 발칵 뒤집어졌다. 사람들이 연재가 끊어져 난리가 났다. 그래서 도망간 황석영을 잡으러 간 사람이 담당 편집기자인 김훈이었다.


아무튼 김승옥의 무진기행이 세상에 나온 이후 한국 문단은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특히 상상의 도시, 무진의 명산물 안개를 여귀가 뿜어낸 입김 같다고 표현을 했는데 그 이후 지금까지 안개를 이만큼 표현한 소설 속 미문이 없다. 소설 속의 여귀는 영화 ‘안개’ 속에서 마녀로 대신 나온다.


김승옥의 문장 속 세계관을 나타내는 언어는 지금도 유효하다. [햇볕의 신선한 밝음과 살갗에 탄력을 주는 정도의 공기의 저온 그리고 해풍에 섞여 있는 정도의 소금기, 이 세 가지만 합성해서 수면제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그것은 이 지상에 있는 모든 약방의 진열장 안에 있는 어떠한 약보다도 가장 상쾌한 약이 될 것이고 그리고 나는 이 세계에서 가장 돈 잘 버는 제약 회사의 전무님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누구나 조용히 잠들고 싶어 하고 조용히 잠든다는 것은 상쾌한 일이기 때문이다 – 무진기행]


소설 속 ‘조’가 영화에는 조한수로 나온다. 두 사람은 세무서장이 된 조의 집으로 가서 사건의 중심에 있는 인숙, 하인숙을 만나게 된다. 영화에서 하인숙을 연기한 배우는 윤정희다. 아주 어린 모습의 윤정희는 그 당시로는 보기 드문 예쁜 얼굴의 배우다.


이 무진기행은 세 번 영화가 되었다. 67년에 한 번, 76년, 87년에도 만들어졌다. 윤정희는 두 번 하인숙으로 열연했다.


안개가 재미있는 이유 중 또 하는 배우들의 열연이다. 이제 고인이 된 신성일과 윤정희가 주인공으로 나오며 소설 속의 문체를 영화적 문채로 절묘하게 녹아냈다. 김승옥의 각본과 김수용 감독의 연출이 빛을 발했기 때문이다.


그런 김승옥과 김수용이 다시 한번 영화를 만든 것이 ‘도시로 간 처녀’였다. 이 영화는 재미있기도 하지만 사회고발 영화의 시초였다. 이 영화는 그 당시 버스 안내양의 부당함을 말하고 있다. 돈을 삥땅 하는 일 때문에 알몸수색을 하는 문제가 당시에 있었는데 김승옥은 시내버스를 타고 다니며 버스 안내양들을 취재하여 실화를 바탕으로 영화가 만들어졌다.

영화에서 부당한 대우와 모욕감 때문에 유지인이 투신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당시에는 난리가 났다. 김수용 이전의 영화에서는 누가 봐도 마네킹이 절벽 같은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연출을 했는데, 김수용은 실제로 유지인이 투신하는 것처럼 보이게 연출을 한 것이다.


이 영화는 33일 밖에 상영하지 못했다. 실제 일어나는 사회고발 영화이기에 기득권이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영화는 몇 번이나 삭제를 하고 또 당해서 나오게 되었지만 군사정권 시대라 마음껏 상영할 수 없었다. 우리 사회의 단면을 가장 잘 드러낸 영화였다.


그럼에도 재미있는 장면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바보들의 행진의 히로인 영자의 이영옥의 모습과 금보라의 풋풋한 모습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다른 의미의 재미다) 건 이 영화가 상영되고 지금까지 시간이 몇십 년이 흘렀는데 조직이나, 단체, 회사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일은 여전하고 그들을 지금 이 더운 태양 아래서 농성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불가사의할 정도로 이상한 일이다.


그렇게 핍박당하고 죽음을 각오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순수함을 지키려 하고 진실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다는 것 역시 예나 지금이나 이상하다면 이상한 일이다.


이 영화에서 마지막 유지인, 극 중 문희는 투신을 하지만 살아난다. 희망을 주며 끝이 나지만 해피엔딩이 말할 수는 없다. 김수용 감독은 2005년 씨네 21과의 인터뷰에서 “영화에 무슨 사회성이냐, 폭로 항변 메시지는 접어두고 좋은 세상 만날 때까지 사랑하고 정사하고 눈물 짜는 영화나 찍자”라고 했다.


김승옥 소설가가 광주민주화항쟁의 충격으로 절필을 선언했을 때 이어령 박사가 붙잡아서 호텔에 던져 놓고 장편 소설을 계속 쓰게 했는데 그 소설이 ‘서울의 달빛’이었다. 그런데 김승옥은 끝끝내 소설을 다 쓰지 못하고 절필을 하고 만다.


그래서 ‘서울의 달빛 0장’으로 단편 소설이 되었다. 만약 장편으로 이어졌다면 1장, 2장 주욱 이어졌을 것이다. 김승옥의 단편 소설들은 읽고 또 읽었지만 너무 재미있다. 김승옥의 소설 속에는 위트와 유머가 살아있다. 이후 김승옥의 몸에 풍이 와서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2014년인가 순천에서는 무진기행 50주년 행사를 하기도 했다. 김승옥 소설가도 41년 생이시니까,,,


김승옥의 무진기행이 얼마나 무진, 즉 순천의 자랑이었냐 하면 응사, 응답하라 1994에서 순천의 해태와 여수의 학생이 술집에서 서로 더 대단한 도시라고 싸운다. 비행장이 있니 없니, 백화점이 있니 없니. 그러다가 밀리게 된 해태가 그런다. 김승옥! 무진기행! 우린 무진기행이 있는디. 정말 멋진 대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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