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단순한 리듬은 그대의 영혼에 좋다. 단순하고 단순하게 흐르는 리듬이 때로는 격렬하게 마음을 뒤 흔들기도 한다. 단순한 반복, 반복이 인간을 천상에 도달하게 한다. 천상에 당도했던 자들이 음악을 연주하며 지상으로 하강하기도 한다. 그런 음악이 세상에 존재한다.


시인 박정대는 자신의 시에서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음악을 찬양했다. 산울림처럼 단순한 음이 지속적으로 반복된다. 뛰어난 기교가 있는 것도 아니며 현란한 솜씨를 뽐내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깊은 늪으로 빠져 들어가는 착각에 빠진다. 그 늪은 순수한 영혼 수십만 개가 뭉쳐 있는 늪이다.


담배연기를 빨아들이고 나면 세포는 격렬한 몸부림을 친다. 폐는 쥐어짜는 고통을 호소하고 혈관은 머리가 띵할 정도로 수축한다. 하지만 곧 후하며 연기를 내뱉고 나면 찰나로 세계가 바뀐다. 세상이 연기로 가득 차며 그 중심이 내가 있고 나는 연기 속을 걷는 주인공이 된다. 그날이 바로 퍼펙트 데이다.


바나나로 만든 마이크를 들고 니코가 노래를 한다. 니코의 음색에서는 니코킨 냄새가 난다. 나는 니코보다 루 리드의 목소리가 좋다. 그의 목소리는 순박한 물질이다. 그 물질은 지구 밖에서 온 물질 같다. 그 물질이 나를 이끈다.


사인 박정대는 이어서 루 리드에 대해서 시로 이야기를 했다.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팩토리의 전경이 한눈에 보이는 착각이 든다. 앤디 워 홀의 팝 아트도 숨을 쉬고 에디 세즈윅의 방탕하고 외로운 자유가 연주 중간중군 나온다.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그들을 루 리드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보듬어 준다. 어쩌면 기적과도 같은 일이 아닐까.


시인 박정대의 시 제목처럼 그들은 진정 타락 천사이었거나 전직 천사였다. 순수한 물질로 똘똘 뭉친 그들의 늪과 같은 음악은 누군가를 닮았다. 눈으로 본모습은 변하기도 하고 잊히기도 하는데 손은 생생하게 그 누군가를 기억하고 있다. 도자기 같은 가녀린 목과 언저리 부분을 나의 손은 기억하고 있다. 그대의 목은 초현실 세계, 나는 그렇게 그대의 세계에 스며든다. 바로 퍼펙트 데이다.


루 리드의 퍼펙트 데이 https://youtu.be/9wxI4KK9Z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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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3-08-02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VU 음악은 들을때마다 영감을 줍니다..

교관 2023-08-03 12:56   좋아요 0 | URL
정말 그렇습니다 너무 좋아요 ㅎㅎ
 

나는 라면을 먹으며 질질 짜거나, 울컥하거나, 눈물을 흘려본 적은 없다. 라면을 먹다가 눈물이 나오는 경우는 매운 고추를 먹었거나, 매운 김치를 먹었거나, 라면이 맵거나 해서 눈물이 찔끔 나온 것이 아니라면 라면에 울컥한 사연 따위는 없다.


사람들은 맛있는 라면은 누가 끓여주는 라면이라는데 나는 그것도 별로다. 내가 끓여 먹는 게 나는 가장 맛있다. 학창 시절에 친구집에 놀러 가면 누나가 늘 라면을 끓여 줬는데 파를 엄청 많이 넣어서 끓여 줬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라면을 건져 먹으면 라면과 파가 일대 일 비율로 씹혔던 기억이 있다.


나에게 라면이란 학창 시절에는 불편한 어른들과 고기를 구워 먹는 것보다 친구들과 라면을 끓여 먹는 게 가장 맛있었고, 지금의 라면이란 라면은 전부 너무 맛있어서 자주 먹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라면만 하루 세끼 먹고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라면은 종류를 막론하고 전부 맛있어졌다. 그러나 매일 라면을 먹으면 안 된다. 사실 매일 라면만 먹어도 괜찮다. 집에서 해 먹는 갖은양념을 부어서 만든 찌개보다 라면이 훨씬 낫다. 그러나 라면은 국물을 마지막으로 끝을 내야 하기 때문에 면만 호로록 먹기에는 아직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영화 속에서도 라면은 캐릭터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는 고마운 음식이다. 검색을 해보면 영화 속 라면 먹방만 모아놓은 영상이 있어서 보고 있으면 정말 맛있게 보인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라면이 슬픈 음식으로 나오는 경우도 많다.

봄날은 간다에 나오는 라면은 너무나 슬픈 음식이다. 상우와 은수의 첫 날밤의 팡파르는 라면과 함께 시작되었다. 소주와 몹시 어울리는 라면은 금방 식어 버리지만 또 금방 끓어오른다. 그 뜨거운 사랑을 상우는 은수와 한다. 화분의 꽃이 더디게 피듯 상우의 시간은 차근차근 흘러가지만 은수의 시간은 라면처럼 너무나 금방 끓어오른다. 후루룩 입으로 빨려 올라오는 라면은 어느 순간 바닥을 보이는 냄비의 허무를 나타낸다. “라면이나 끓여” 은수의 말에 이제 고작 라면이나 끓이는 놈이 된 상우.


누군가와 마주하고 먹으면 더없이 행복한 라면이지만 혼자 먹으면 더 맛있기에 라면은 슬픈 음식이다. 사랑하는 이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을 때 끓이는 라면은 슬프다. 결국 상우는 은수에게 “내가 라면으로 보이냐고!” 소리를 지른다. 라면은 그렇게 슬프다. 라면이 끓어오르면 비로소 외로움과 마주하게 된다. 스프를 넣고 팔팔 끓일수록 자극은 극에 달한다. 라면은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어서 젓가락으로 자꾸 휘젓게 된다.

https://youtu.be/vf6TWmxJZxY


몸부림을 바라는 라면은 외로워서 슬픈 음식이다. 라면의 많아진 종류만큼 슬픔도 전부 제각각이다. 오늘도 우리는 라면을 마주하며 슬픔을 젓가락질한다. 영화 속에서 라면이 그렇게도 슬프게 나온다. 표면적으로 슬프게 라면이 보이는 건 선생 김봉두에서다. 선생 김봉두에서 불쌍한 녀석 소석은 라면이 그렇게 좋다.

김봉두가 김치 없는 라면이 맛없어서 먹지 않을 때 소석은 그 맛없다는 라면을 맛있게 허겁지겁 먹는다. 이 장면은 잘 보면 라면을 먹는 것처럼 보이지 실제로 먹지는 않는다. 황비홍 1편을 너무나 재미있게 봤지만 지금 보면 이연걸의 대역의 티가 너무나 심하게 나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소석은 비가 쏟아지는 날에 김봉두에게 바칠 삼을 캐다가 들어와서 부뚜막에서 쭈그리고 앉아 라면을 끓여 먹는다. 라면은 소석의 삶을 파고든 곰팡이와 같다. 한 번 꽃을 피우면 걷잡을 수 없다. 라면은 슬픈 음식이다. https://youtu.be/yKDQz_v1VDQ


천하의 나쁜 노무 새끼 필제는 화를 내도 웃기고, 짜증을 내면 더 웃기고, 웃기면 대책 없이 웃겼다. 세상 무서울 것 없고 껄렁해 보이는 그 역시 그럴수록 더 슬프다. 그런 필제가 좋아하는 건 왕뚜껑 라면. 필제가 기가 찬 동네에 왔지만 기똥찬 동네라는 것을 알게 되고 거기서 어떻게 해야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지 알게 된다.


그 중심에 슬픈 라면이 있었다. 라면은 필제의 슬픔을 같이 했다. 하지만 필제에게 라면이 없었다면 해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절망의 끝에서 날개를 달고 날아가면 희망이 보인다는 것을 이 영화가 보여줬는데, 실제의 임창정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일까. https://youtu.be/1FuzcwV3AN4


한 청년이 라면을 끓여 밥상 위에 올려놓다 밥상 다리가 힘이 없어 기울면서 라면이 전부 방바닥에 쏟아졌다.

그저 멍하게 바라봐야만 했다.

그저 멍하게.


5시에는 일어나야 한다.

아침밥은 고사하고 씻고 옷을 입고 마을버스를 타고 대로변까지 나가서 다시 416 버스를 타야 한다. 늘 그 버스를 그 시각에 타지만 언제나 사람들로 터져 나간다. 양보라든가 친정을 찾다가는 버스를 타지 못한다. 버스를 놓치면 그다음을 상상하기도 두렵다. 버스 문에 매달리는 한이 있어도 어떻게든 올라타야 지하철을 탈 수 있다. 비라도 오는 날이면 버스 속은 사람들이 뿜어내는 숨 냄새와 비 비린내로 먹은 것도 없는데 구토가 인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지옥철에 오르는 순간 전혀 다른 세계가 되어 버린다. 보이는 건 사람들의 등과 길고 짧은 머리카락이 달린 머리통뿐이다. 고개를 꺾어 천장을 바라보며 오늘도 무사히 회사에 도착하기를 빈다. 이렇게 난리를 피워야 회사에 제대로 출근할 수 있다. 소변이 마려워도 참아야 하고 앞사람의 머리에서 냄새가 나도 참아야 한다.


이렇게 모든 걸 참아가며 서울에서 생활한 지도 벌써 7년째다.

하지만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나에게 편지를 쓰며, 힘없이 서 있던 나를 안아주며 나의 길을 두려움 없이 상경했지만 현실은 나의 발끝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가기만 한다.

눈을 감으면 보이는 것이 미래인 현재에 오직 희망 하나만 믿고 달려왔다.

하지만 희망이라는 것이 세상에서 배신을 잘한다는 것을 알아버린 순간 이 세계에서 홀로 되어 버렸다.

언제부턴가 세상은 점점 빨리 변해가기만 하는데 나만 같은 곳에 머물러 있다.

레이먼드 카버의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서 아들을 잃어버린 하워드와 앤이 된 느낌이다.


마음의 심한 공백이 생기면 마왕의 노래를 들었다.

고흐의 불꽃같은 삶도,

니체의 상처 입은 분노도 스스로의 현실에 더 이상 도움 될 것이 없다고 마왕이 말했다.

전망 좋은 직장과 가족 안에서의 안정과

은행구좌의 잔고 액수가 모든 가치 척도인가

돈, 큰 집, 빠른 차, 여자, 명성, 사회적 지휘

그런 것들에 과연 우리의 행복이 있을까, 라며 늘 나의 등을 토닥여 주었는데.

마왕도 가 버리고 남은 것이 없다.


이젠 지친다.

라면이 쏟아졌다.

밥상 위에서 흐르는 라면 국물이 바닥으로 퍼지는 꼴이

마치 머리가 터져 뇌하수체가 흐르는 모습처럼 보인다.


오늘의 선곡은 신해철의 나에게 쓰는 편지

https://youtu.be/HRlwPwqC-Y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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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3-08-01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라면 참 좋아하는데, 파김치 사서 끓여먹어야겠습니다.

교관 2023-08-02 11:21   좋아요 0 | URL
파김치 조합 정말 맛있죠 ㅎㅎ
 

장마가 지나가고 난 후의 도시는 그야말로 뜨거운 습도로 가득한 찜통이다. 대기에 가스층이 이렇게 두텁고 짙게 껴 있는 날들을 본 적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조깅을 하려고 강변으로 나가면 습 하면서 무겁고 질척이는 습도가 입 안으로 훅 들어오는 느낌이다.


오늘은 절대 외출을 삼가라는 오후 2시에 조깅을 했다. 너무나 바싹한 햇빛에 모든 것이 말라비틀어질 것 같았다. 움직이면 땀이 났고, 달리니까 땀이 줄줄줄 흘렀다. 그럼에도 산스장에는 멋지게 기구를 드는 어르신들이 있었다. 운동의 맛있음을 아는 사람들이다. 고통의 참맛을 안다. 아무튼 해가 가장 이글거릴 때 두 시간 정도 조깅 겸 걷고 몸을 풀었다. 달리는데 사람들이 저런 미친놈을 봤나 같은 표정으로 나를 훑었다.

그래서 별로냐 한다면 그렇지 않다. 조깅하기에 너무나 좋기 때문이다. 달리자마자 땀이 나기 시작하는데 평소에 흘릴 수 없는 땀이 줄줄 흐르는 경험이 나쁘지 않아서 괜찮다. 폭염이 오는 여름에 늘 하는 말이지만 이렇게 더운 날에 조깅을 하고 나면 저녁에 부는 덥덥한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진다. 아니 시원하다.


에어컨 바람 앞에 있다가 밖으로 나오면 너무나 덥덥하고 답답한 자연의 바람이겠지만 땀을 듬뿍 흘리고 맞이하는 자연바람은 시원하다. 거기에 바닷가에 살고 있으니 바닷가에 부는 바람이 그렇게 덥지 않다. 올해도 어김없이 몇십 년만의 더위라는 말이 나왔다. 맞는 말이기는 하나 매년 여름에 그런 말은 늘 나왔다.


하지만 올해는 체감상 다른 해들과 좀 다르다. 어쩌면 내가 한 살 한 살 나이가 들어가는 탓일지도 모르지만 기록적인 폭우에 들끓는 도시가 예전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UN 안토니오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올해 7월 27일 자로 지구 온난화는 끝났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끓는 지구의 시대가 되었다고 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 각 나라에서 폭우와 폭염으로 사람들이 시달리고 있고 사망하는 수도 늘어가고 있다. 사무총장은 공식적으로 이를 보며 두렵다고 표현했고 이는 단지 시작일 뿐이라고 했다.


매년 여름이 더웠는데, 매일 일상을 기록하다 보니 작년, 재작년 여름에 적어 놓은 글을 보면 그때에도 이 비슷한 이야기를 써놨다. 특히 2021년도 이맘때에도 너무나 더운 폭염에 코로나가 한창이나 늘 마스크를 써야 하기 때문에 더위 조심하라는 재난문자가 자주 왔었다.


그때에도 엄청난 더위가 몰려와서 조심하라고 했지만 나는 매일 조깅을 하기 때문에 강변으로 나가 달렸다. 신나게 달렸다. 한 20분 정도 달렸을 때 내 앞에서 달리던 남성이 느닷없이 쓰러졌다.


남성을 약간 그늘로 옮기고 119를 부르고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에게 괜찮으니 갈길을 가라고 하고(그래봤자 구경한다고) 119가 도착하는 도로와 강변이 좀 떨어져 있어서 도로에 올라가서 119 구조대원들을 데리고 오고. 아무튼 그때 코로나 기간이라 119 구조대원들은 그 무더위에 방역복까지 껴 입어서 아우 정말. 그날 흘렸던 땀이 정말 한 바가지였다. 그때의 일을 자세하게 기록해 놨다.


요즘은 달리고 있으면 달이 따라온다. 그래서 달을 바라보는 날이 많아졌다. 밋밋한 하늘에 달이 떠 있으면 여러 가지 이야기가 생각난다. 달은 루나틱과 인세인 두 가지의 이야기가 있다.


하루키의 일큐팔사에도 나오지만 서양의 달은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데, 인세인은 천성적으로 머리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전문적인 치료를 받는 게 바람직하고 루나틱은 달에 의해 즉 루나에 의해 일시적으로 정신을 빼앗기는 것이라 오래전 서양에서 루나틱은 달 때문에 일시적으로 미치는 것으로 그 사람의 문제를 달에게 넘기기도 했다.


이번 영국 드라마 블랙미러 시즌6에서 4화 ‘메이지 데이’에 그런 이야기를 잘 그려냈다. 주인공으로 데드풀 2의 재지 비츠가 나온다. 기생거머리 파파라치로 스타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담아내는 더러운 짓에 넌덜머리를 내고 그만두다가 슈퍼스타인 메이지 데이가 촬영장에 나타나지 않고 그녀를 집요하게 추적하다가 약물에 찌들어 있는 모습을 파파라치들과 카메라에 담는다. 쇠사슬에 묶여 있어서 파파라치들은 특종이라며 사진을 담으면서 점점 메이지 데이 곁으로 간다. 그때 달이 뜨며 메이지 데이가 변한다. 아무튼 그런 이야기를 짧은 영상 속에 잘 담아냈다.

조깅을 하면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달이 떠 있다. 달은 어제의 그 달이다. 그러나 하늘의 구름은 어제의 그 구름이 아니다. 심지어 1분 전의 구름에서도 벗어났다.


달이 떠 있으니 하늘이 밋밋하지 않다. 그래서 달이 뜬 요즘의 하늘은 여러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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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초난강, 쿠사나기 츠요시가 주인공으로 나온 데서 보게 된 영화다. 초난강이 주인공이지만 주인공은 따로 있는 영화였다. 아무 생각 없이 보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서 놀란 영화였다.


어린 시절 글짓기를 잘해서 선생님의 칭찬을 먹고 아이들의 박수를 받으며 지내는 히사는 불혹에 만년 대필 작가로 헤어진 아내와 딸을 가끔 만나며 의미 없이 지낸다. 대필 제의가 들어왔는데 편집자에게 소설을 쓰고 싶다고 하지만 돈이 되지 않는다며 대필해 주면 곧바로 5만 부가 팔려 나가 돈을 번다고 빨리 작업하자고 한다.


가끔 딸을 만나 데이트를 하고 헤어지면 홀로 집으로 들어가 소설을 쓰려고 하지만 시작도 못한다. 화면에는 커서만 깜빡일 뿐이다. 그러다 고등어 통조림(사바켄 – 일본 원제는 사바캔이다)을 보며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영화는 마치 몇십 년 만에 먼지가 가득한 일기장을 펼치는 향수를 느끼게 한다. 그 속에는 나와 비밀을 나누었던 친구와 일상이 담겨있다. 특별한 것도 없고 그저 껌 하나로 낄낄 거리며 지냈던 시절. 키득거리며 그걸 읽는데 눈물이 갑자기 흐르는 것 같은 영화다.


초난강이 하는, 어른이 된 히사의 대사 “내게는 고등어 통조림을 보면 떠오르는 아이가 있다”로 시작해서 1986년 그 여름으로 간다. 너무나 새파랗게 멍이 든 하늘과, 실루엣이 아름다운 여름의 푸르른 바다, 부메랑 섬, 탄탄 바위 그리고 그 모든 풍경을 공유했던 타케.


타케는 친구도 없이 늘 혼자서 책상에 물고기 그림이나 그리는 아이였다. 옷도 단 두 벌로 여름을 그렇게 보낸다. 타케는 아이들의 놀림감이었다. 그러다 한 녀석이 타케에게 너네 집에 피아노 놓으면 바닥이 무너지는 거 아니냐며 놀린다. 타케는 그렇지 않다면서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간다. 아이들은 너무 먼 곳에 있는 타케의 집으로 가면서 지친다.


타케의 집에 도착했을 때, 집은 다 쓰러져가는 모습처럼 보여서 아이들은 일렬로 서서 웃으며 타케를 놀린다. 그때 타케의 여동생이 집으로 오지만 오빠와 함께 같이 놀림을 받는다. 웃으며 놀리는 그 아이들 속에 히사도 있었다.


히사는 가기 싫은 엄마의 두부 심부름 때문에 슈퍼에 갔다가 백 엔을 줍는다. 그 큰돈을 주워서 경찰서에 돌려줘야 하나. 철없는 아빠에게 물으니 아빠는 경찰서에 안 갖다 줘도 된다고 한다. 그렇게 히사는 저금통에 백 엔을 넣는다.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여름방학의 행복과 불행을 좌지우지하는 건 성적표다. 펼치는 순간 망했다고 생각하는 히사. 집에 와서 악마보다 더 무서운 엄마에게 혼난다. 그러나 철부지 아빠는 국어는 잘했다고 하다가 둘 다 엄마에게 혼난다.


어느 날 친하지 않았던 타케가 히사의 집으로 놀러 왔다. 히사는 이상하게 생각하지만 타케는 부메랑 섬에 돌고래가 나타났다고 한다. 히사는 좋아하는 돌고래를 상상한다. 타케는 돌고래를 보면 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는 그 경험으로 글짓기를 해서 선생님에게 또 칭찬을 들을 수 있다며 같이 가자고 꼬신다. 하지만 히사는 내키지 않는다. 그때 타케가 그 주운 돈 백 엔 경찰서에 돌려주지 않으면 도둑으로 신고할지도 모른다고 한다. 히사는 말을 더듬으며 겨 겨 경찰서에 가 가 갖다 줘줬어.


타케의 으름장에 히사는 여행에 동참하게 된다. 히사에게는 자전거가 있었다. 둘이 같이 타고 새벽에 섬으로 가는 거야. 새벽 5시에 부모님 몰래 일어나서 나가려는데 철부지 아빠가 나와서 둘을 보더니 뒷자리 안장을 제대로 만들어준다. 그대로 뒤에 타고 갔으면 엉덩이 다 으스러진다며. 아빠는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엄마 깨기 전에 얼른 다녀오라며 용돈까지 준다.


그렇게 둘은 섬으로 둘만의 여행을 간다. 가다가 자전거도 망가지고 지치고 힘들다. 그러다가 동네 양아치들을 만나서 히사가 당하려는데 똥 누고 돌아온 타케는 양아치들에게 달려든다. 양아치 형들은 타케를 때리고 발로 밟는다. 타케는 맞으면서 히사에게 빨리 도망가라고 한다. 그때 동네의 제일 일인자 형이 나타나서 그 양아치들을 때린다.


그렇게 타케와 히사는 그곳을 벗어난다. 고장 난 자전거를 끌고. 부메랑 섬으로 간다. 지쳐 잠시 바닥에 누워서 히사는 타케에게 고맙다고 한다. 그리고 묻는다. 왜 나에게 같이 가자고 했냐고 묻는다. 나에게 자전거가 있어서 그랬냐고 묻는다. 그러자 타케가 너는 웃지 않았으니까. 뭐? 너는 우리 집보고 웃지 않았잖아.라고 한다. 이상하지만 별것도 아닌데 여기서부터 눈물이 흐른다. 밝고 맑은 영화인데 기이했다.


그렇게 시작된 둘만의 1986년 여름방학의 이야기는 보는 내내 향수를 일으켰다. 바다에 떠 밀려온 한국의 오성사이다. 목숨을 구해준 누나. 귤을 서리하러 가면 늘 나타나서 잡으려는 고약한 과수원 할배, 고등어로 초밥을 만들어 주었던 아버지 그리고 모든 것을 다 알고 있고 네 명의 동생들을 돌보며 씩씩하게 지내는, 나와 너무 다르지만 언제나 나의 편일 것 같은 타케.


이 모든 것들이 마치 나의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 동네의 친구, 어른들, 동네 바보 형, 친구 집 앞에서 친구야 놀자!라고 큰 소리로 부르면 집 안에서 그래!라고 친구가 말하고, 시끄럽다고 소리치던 삼촌 같은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양아치들에게 구해준 동네 형이 자신의 모자를 타케에게 씌워줄 때에는 의도인지 꼭 원피스의 상디와 루피를 보는 것 같았다. 이젠 돌아갈 수 없는 가난했던 어린 시절, 비밀을 공유하며 땀을 흘리며 같이 시간을 보냈던 친구와 함께 순간이 있었다. 그러다 타케에게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서 히사와 헤어지게 된다. 친구와 영영 헤어지게 된 히사는 처음으로 아빠에게 안겨 엉엉 운다. 헤어질 때 귤 농장의 악마 할배가 타케에게 귤을 줄 때, 기차에서 귤을 까먹을 때에도 뭉클했다.


이 영화는 너무 아무것도 아닌 노스탤지어를 섬세하게 다루어서 너무 특별하게 만들어서 감동이 되는 그런 영화였다. 좋은 영화를 보면 지금 이 따라다니는 잔상을 좀 오래 주욱 끌고 가고 싶다.



https://youtu.be/pkUeT12nAO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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쥘 베른의 소설은 딱 내 수준에 맞다. 지금의 수준이 어릴 때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는데 그때 읽었던 쥘 베른의 소설이나 지금 읽는 쥘 베른의 소설이나 별반 다름없이 흥미롭고 재미있다.


쥘 베른은 바다 밑이나 지구의 중간으로 막 들어간다. 그러다 보면 지구 속 또 다른 세상, 또 다른 존재들이 나타난다. 재미있다. 지구 속을 과학적, 지구과학적으로는 지표와 멘틀과 핵 같은 거, 거친 땅과 땅과 땅 또 땅으로 이루어져 있겠지만 쥘 베른의 소설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지구의 중앙으로 가면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미국의 할리우드 공포영화가 8, 90년대 스티븐 킹의 소설을 원작으로 둔 것처럼 바닷속 SF영화는 쥘 베른의 해저 2만 리 소설을 원작으로 하거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캐릭터와 잠수정을 갖다 썼다. 쥘 베른은 1800년대 초기의 사람인데 정말 상상력 그 하나로 지구의 속과 겉, 하늘, 바다를 전부 표현했다.


2008년에 나온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도 쥘 베른의 지구 속 여행을 각색해서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줄거리가 딱 내 수준에 맞는 이야기다. 형의 아들과 함께 오래된 책자를 들고 아이슬란드로 가서 한나를 만나 책의 비밀을 풀기 위해 모험의 세계, 즉 지구 중심으로 가게 되고 수많은 위기를 피해 형이 있었던 공간을 발견하면서 모험이 시작된다.  

당시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혹평을 받기도 했는데, 지구 속을 탐험하는 SF 판타지 영화가 현실과 비슷하면 더 이상한 것 아닌가. 게다가 쥘 베른의 소설을 토대로 하고 있어서 상상력을 발휘해서 보면 아주 재미있게 볼 수 있다.  https://youtu.be/iJkspWwwZLM


이 영화의 주인공은 미이라 1, 2로 세계적인 배우로 떠버린 브렌든 프레이저다. 190이 넘는 키에 시원시원한 이목구비로 할리우드 영화계에 등장해서 인기가 좋았다. 무엇보다 태도,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좋았다. 그래서 영화 판에 등장한 지 1년 만에 코믹 액션 영화 원시 틴에이저의 주연을 하게 된다.


그때 나이 서른 살인데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한다. 그녀는 조지 오브 정글이라는 영화에 같이 출연한 배우로 한 살 연상이었다. 그리고 브랜든 프레이저를 세계적인 배우로 오르게 만든 미이라를 찍게 된다. 대성공이었다. 엄청난 인기였다.


영화 미이라는 판타지 영화치고는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재미를 주었다. 007의 그녀 레이첼 와이즈의 미모도 찬란했고 모험과 공포, 그리고 미지의 존재가 전부 잘 어울렸다.


그렇게 승승장구만 할 것 같았던 브렌든에게는 벼락 맞는 소리를 듣게 된다. 첫 아이를 얻었는데 아들이 자폐증이라는 것이다. 병원에서 자폐 판정을 받는다. 그런데 아내마저 엄청난 위자료를 요구하며 이혼을 통보한다. 그 돈이 매달 1억씩 줘야 했다.


브랜든은 미아라를 촬영하면서 몸이 성한 곳이 없었다. 그간 영화를 촬영하며 액션을 하다가 다치고 골절되는 일들이 다반사였다. 갈비뼈가 부러지기도 했다. 그런데도 감독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다했다. 한 영화에서는 8번이나 내동댕이쳐져야 컷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결과 몸과 마음에 제동이 걸렸다. 우울증은 더욱 깊어졌고 전처는 자신을 사기꾼이라 몰아세웠다.


각종부상으로 수술과 재활로 7년을, 2000년대 초 권력과 부를 가진 제작자에게 성추행을 당했고, 매달 1억씩 10년을 양육비로 주면서 견뎌온 브랜든은 더 이상 의욕이라고는 1도 남아있지 않았다.


받아주는 영화사는 더 이상 없고 집 안에서 나오지 않는 그의 몸은 미이라를 찍을 때의 멋진 사람이 더 이상 아니었다. 몸은 점점 비대해졌고 머리카락은 거의 다 빠져나갔다. 자포자기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브랜든에게 손을 내민 사람이 블랙스완의 감독이었다.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맞는 배우가 없다고 해서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10년이 넘게 방치해 두고 있었는데 그 주인공에게 어울리는 배우가 바로 브랜든이었다.


이 시나리오는 말이야 삶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의욕이라는 곤 전혀 없는 한 남자의 이야기야. 한 번 해볼래?  

그렇게 해서 브랜든은 죽음을 앞둔 인간을, 인간에 대한 인간의 구원과 사랑을 다룬 영화 더 웨일을 찍게 된다. 더 웨일에서 270킬로그램이나 나가는 브랜든이 소리를 지르고 딸과 삶을 대하는 연기에 빠져 들 수밖에 없었던 건 그의 삶을 그대로 연기를 했기 때문이었다. 아마 그 장면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 시상식에서 그의 수상소감을 들으며 또 한 번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중학생 때인가, 아무튼 그때 즈음 쥘 베른의 소설을 옆구리에 끼고 읽으며 우와우와 했다. 이게 막 눈앞에 미지의 세계, 지구 속 또 다른 세계가 화악 펼쳐졌다. 유치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잃어버린 세계는 재미있다. 브랜든 프레이저의 모습을 보는 것도 꽤 좋다.


브랜든이 수상식에서 말했다. 캄캄한 어둠 속에 있다고 느끼신다면 이 말을 기억하세요. 여러분도 저처럼 다시 도전하세요. 빛을 향해 가세요. 분명 좋은 일이 생길 겁니다.

https://youtu.be/wRz-UrBoI2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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