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자동차 기름값이 거의 1800원대가 되었다. 5월에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화가 나니까 화를 낸다고’라는 글에서, 넷플 시리즈 ‘성난 사람들 비프’를 이야기하면서 8월 이후에 기름 값이 올라 더 분노를 배설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라고 예고했었다. 나 같은 하찮은 인간도 이렇게 앞일이 보이는데 전문가들의 눈에는 얼마나 답답한 미래가 보일까. https://brunch.co.kr/@drillmasteer/3726#comments


라면 값 50원 내려가고 모든 것이 다 올랐다. 그러다 보니 무인 밀키트 파는 곳이나 무인 아이스크림 점에서 도둑질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우리는 외국과는 달리 카페에서 노트북과 휴대전화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화장실에 다녀와도 아무렇지 않은 그런 나라다. 그런데 길거리에 있는 이삿짐도 그냥 들고 가 버리는 사람들이 늘어난 나라가 되었다.


어제는 식당주인을 성폭행하려다 죽여 버린 60대에게 징역 30년이 선고됐다고 한다. 법은 어째서 일반인들의 도덕적 관점과 전혀 달리 판결이 되는 걸까. 우리나라는 대 범죄자들이 형을 살고 있는 청송 교도소라고 있지만 외국처럼 들어가면 벌벌 떠는 그런 교도소는 아직 없다. 구치소는 어떤 재소자에게는 오히려 위험에서 멀어져 있고 밥도 잘 나오고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내가 구치소에서 근무를 2년 해봐서 좀 안다.


지난번에 이야기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화가 나니까 화를 낸다고’에서 말한 것처럼 현대인은 분노가 조금씩 쌓여 간다. 자신이 알게 모르게 조금씩, 야금야금 쌓여 가다가 곪는다. 곪을 대로 곪고 곯아 있다가 이상한 곳에서 터져 버린다.


분노는 주로 가까이 있는, 자주 만나는 사람들에게 쌓여 간다. 무시를 당한다거나, 따돌린다거나, 나의 부모를 욕한다거나, 나의 결점을 가지고 재미있어한다거나. 점점 분노가 쌓여간다. 그러다가 참지 못하고 터져 버리는데 분노하는 사람에게 터지는 게 아니라 아무 상관없는 불특정 다수에게 분노를 표출한다.


사람들은 분노를 참지 않게 되었다. 화가 나면 한 번 참을 법도 한데 그대로 화를 내뱉는다. 어느 날 여중생이 아버지를 살해하는 일이 일어났다. 아버지는 공부는 하지 않고 방에만 틀어박혀 게임만 하는 중학생인 딸을 경멸했다. 딸은 학교에서 몸무게가 많이 나간다는 이유로 따돌림당하고 폭행까지 당했다. 그 사진을 찍혀서 아이들에게 내내 놀림을 받았다. 그럴 바에는 학교에 가지 않는 편이 낫다. 하지만 집에 아버지만 들어오면 학교에서 아이들이 괴롭히는 것보다 더 심한 말을 한다. 미쳐버릴 것만 같다. 다 죽여버리고 싶다. 다 죽여버리고 나도 죽어버리면 그만이다. 이런 세상에서 이렇게 살아서 뭐 하냐.



곡비


이 영화 곡비 본 사람이 있을까. 대만 좀비 공포 영화로 수위가 상당하다. 좀비라고 하기에는 뭣 한 것이,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나서 좀비처럼 사람을 물어뜯지만 말도 하고 정신도 제대로 박혀있다.


앨빈 바이러스라고 하는 바이러스는 뇌의 변연계를 변이 시킨다. 고로 인간이 교육과 훈련으로 잠재우고 있던 본능이 억제가 되지 않아서 분노가 들끓게 되고 폭력과 성적 욕구를 참지 못하게 된다.


여자친구와 함께 살고 있는 주인공은 집에서 보이는 다른 집 옥상에 멍하게 서 있는 노인을 보게 된다. 노인을 불러서 돌아보는데 상태가 심각해 보였다.


여자친구를 오토바이로 지하철까지 태워주고 늘 들리는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아까 그 노인이 들어왔다. 그러더니 갑자기 음식을 튀기는 뜨거운 기름을 종업원 얼굴에 붓더니 녹아내리는 얼굴을 뜯어서 노인이 먹었다.


그때부터 점점 바이러스를 퍼져나갔다. 앨빈 바이러스는 인간이 가지는 극도의 분노를 드러낸다. 그저 폭력성과 성적 욕망으로 물들어가는 자신을 알게 되기에 입은 웃고 있지만 눈에서는 눈물이 흐른다. 눈물이 말라갈 때 눈동자가 검게 변하면서 바이러스에 점령당한다.


분노에 찬 감염자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지하철에서 옆에 있는 사람의 옆구리를 웃으면서 쑤신다. 다른 감염자는 물어뜯고 또 다른 감염자는 그저 성적 욕망을 풀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장기가 쏟아져 내리는 등 물어뜯어 씹고 즐기고 맛보는 적나라한 모습들이 나타난다. 우산으로 눈을 쑤시고 또 그 눈에 욕망을 풀기도 한다.


인간에게 분노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 바이러스는 침투한다. 짐은 캣을 지하철에 바래다주고 이 사달이 난 세상에서 캣을 찾으러 가려고 하다가 짐도 바이러스에 걸린다. 마지막 철장을 사이에 두고 짐은 캣을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바이러스에 물든 짐의 사랑은 캣의 가죽을 벗겨 먹어 버리고 싶은 게 짐의 사랑인 것이다.


요즘 분노를 참지 못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그저 분노를 표출하고 싶은 것이다. 여자고 남자고, 늙은 사람이고 대상도 모호하다. 그저 칼을 휘두르는 것이다. 칼을 휘두르는데 몽둥이로 범인을 때려잡지도 못한다. 정당방위도 형성이 안 된다.


그래서 이 영화 끝에 가서 어떻게 될까. 감독은 캐나다 사람인데 대만에 오래 거주하다 보니 이런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었다고 한다. 감독상부터 여러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만큼 꽤나 여러모로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 ‘곡비’였다.  https://youtu.be/t4vSwRinxIs


이 영화를 보면 지금 분노를 참지 못하고 표출하는 사람들의 모습처럼 보인다. 이런 분노가 한 번 이뤄지면, 그 분노를 표출한 사람에게 칼에 찔려 죽음에 이르렀어도 이 분노가 미디어를 타고 퍼지게 되면 모방범죄가 나타나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나는 분노에 어떨까. 이렇게 주절주절 말을 하고 있지만 나는 분노가 없을까. 나 역시 분노에 취약하다. 분노가 확 올라올 때가 있다. 나 같은 인간이라고 해서 분노가 없을 수 없다. 아니 나 같은 인간이기에 늘 분노가 차 있다. 이러다가 나도 언제 어느 순간에 한 번 터질 수도 있다. 나는 누군가와 싸움을 하는 게 너무 힘들어하는 축에 속하는 사람이다. 싸운다고 소리를 지르고 에너지를 낭비하는 게 너무 싫다. 그러다 보니 어지간한 안 좋은 소리를 들어도 그냥 꾹 참고 넘어가는 편이다. 이런 나 같은 인간이 참다 참다 어느 순간 터지게 되면 분노가 폭발할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매일매일 쌓이는 분노를 배출하는 방법은 매일 조깅을 하고, 이렇게 매일매일 조금씩 글을 쓰는 것이다. 글을 쓰면서 조금씩 쌓인 분노를 배설하듯 배출해버리고 만다. 그러다 보니 매일 쓰는 글의 분량이 많다.


정부는 살기가 편해졌고 마음껏 다니라고 하지만 길거리에 장갑차가 등장하는 시기까지 와 버렸다. 살기가 편해졌는데 사람들의 분노는 더 늘어났고 깊어졌다. 분노해야 할 대상은 분명히 있다. 명백하게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분노해야 할 대상에는 분노하지 않는다. 그저 불특정다수에게 나의 분노를 표출할 뿐이다. 그게 무섭다는 것이고, 그 대상이 내가 될까 봐 불안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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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소설을 쓰고 있지만


하루키의 에세이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의 챕터 중에 ‘일단 소설을 쓰고 있지만’라는 챕터가 있다.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의 겉표지를 보면 사자가 채소를 먹고 있다. 사자 앞에는 얼룩말과 여우가 ‘사자가 채소를 먹네?’ 같은 표정?으로 있다.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라니. 그래서 그런지 표지의 삽화를 보면 사자가 말랐다. 역시 채식주의자 하루키 사마.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초식동물은 대부분 덩치가 거대하다. 코끼리, 하마, 기린 같은 동물은 사자의 몇 배에 이른다. 또 초식동물은 눈이 얼굴의 옆에 붙어있고 육식동물은 인간처럼 얼굴의 앞에 붙어있다. 그래서 사실 이 에세이의 표지 그림을 보고 유추해 볼 수 있는 사실은 사자가 계속 마르기 때문에 채식을 하기로 결심을 했을지도 모른다. 초식동물은 전부 거대하니까. 사자도 빼빼 마르면 우습게 보이니까.


이 에세이의 ‘일단 소설을 쓰고 있지만’의 챕터 내용은 하루키의 넋두리 같은 것이다. 삼십 년 넘게 소설을 쓰고 있지만 작가들과의 교류가 없다던가, 즉 문학에 관련된 작가들과는 교류가 없고, 문단의 모임에도 나가지 않고, 비평가와 그럭저럭 화기애애하게 환담을 나누고 헤어졌는데 하루키를 씹어대는 비평을 했다 던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들이다.


지난번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소설가를 언젠가부터 ‘작가님’이라고 부르게 된 걸까?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다고 하루키는 말한다. 예전에 언제였던가 김영하가 자신을 소개할 때 소설가 김영하입니다,라고 하는 것 같았는데. 저는 작가 누구누구입니다, 보다 저는 소설가 누구누구입니다, 가 훨씬 정체성이라든가 더 나아 보이는데.


그림 그리는 화가도 작가님, 사진도 사진작가님, 공예품 만드는 사람도 작가님이다. 하루키도 ‘채소가게님’ ‘생선가게님’ 같은 느낌이라고 했다. 가수도 가수라고 부르는 게 제일 좋은 거 같은데 가수보다는 아티스트, 싱어송라이터 같은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가수 = 노래 부르는 사람, 제일 좋은 거 같은데 가수를 가수라 하는 게 어감이 뭔가 이상한가.


요리사 박찬일도 셰프 같은 명칭보다는 자신은 요리사로 불리기를 바란다고 했는데, 요리사가 요리하는 사람에게 제일 딱 인 명칭 같다. 그런데 또 생각해 보면 음악가에게는 작가라는 호칭이 붙지 않는다. 아마 배나 비행기에는 이름이 붙지만 버스나 택시에는 이름이 붙지 않는 것과 비슷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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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온 더 쇼우의 다무라 카프카 녀석은 오시마 상이 마련해 준 숲 속의 조그만 산장에서 홀로 며칠을 지낸다. 그때 군인 두 명을 만난다. 다무라 녀석은 홀로 지내면서 자신을 달래기 위해 라디오 헤드의 kid A 앨범을 듣는다.


15살이 듣기에는 무척이나 까다롭고 어려울 수 있다고 생각이 들다가도 다무라 녀석은 보통의 15세가 아니다. 외적으로는 고등학생정도로 보이며 터프한 소년에, 아버지를 저주하고 있으며 가출을 위해 손목시계 하나까지 철저하게 계산하는 녀석이다. 친구도 없고 운동을 좋아하며 외롭지만 고독을 보내는 방법을 안다.


키드 에이 앨범은 모든 노래가 좋다. 키드 에이는 연주도 마치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들린다. 외계의 한 지점에 교신을 하는 듯한 음악처럼 들리기도 한다.


인터뷰집 ‘작가란 무엇인가’의 하루키 편을 보면, 라디오 헤드가 kid A 앨범에서 자신을 언급해서 기분이 좋다고 인터뷰를 한다. 라디오 헤드는, 그러니까 톰 요크는 키드 에이를 기점으로 음악이 철학이 되었다. 아주 기묘한 일이지만 키드 에이 이후 나온 ‘데이 드리밍’의 뮤직비디오는 마치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해변의 카프카와 라디오 헤드의 닮은 점이라면 프랑수아 트뤼포의 유연한 호기심에 가득 찬, 구심적이면서도 집요한 정신이 깃들여 있다. 그리고 장 자크 루소의 울타리와 안톤 체호프의 자립적인 개념의 필연성, 헤겔의 자기의식, 앙리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 헤테로(이형접합자), 티에스 엘리엇이 말하는 공허한 인간들, 소포플레스의 훌륭한 희곡 ‘일렉트라’의 이야기와 아리스토파네스와 괴테가 말하는 세계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하루키는 해변의 카프카를 태엽 감는 새보다 더 복잡하다고 언급했다. 카프카 온 더 쇼우는 인간의 관계와 잃어버린 것에 대한 것을 깊게 고찰하는데 라디오 헤드의 키드 에이 역시 그렇다.


엑시트 뮤직으로 시작해서 블랙스타를 거쳐 키드 에이와 네셔널 엔썸을 지나 이디오 테크를 접합하고 나면 모닝 벨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저 멀리 두 개의 달을 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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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3-08-13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월이 흐르고 흐를수록 더 빛날 앨범이지요.

교관 2023-08-14 11:38   좋아요 0 | URL
정말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고 날이 갈수록 더 좋아집니다 ㅎㅎ
 


이 단편 역시 몹시 마음에 드는 소설이다. 짧아서 더욱 강하고 깊게 잔상을 남긴다. 코끼리의 소멸을 보게 된 주인공은 알 수 없는 상실감을 느낀다. 코끼리의 소멸을 보게 된 후 적극성이 몸에서 빠져나가 버린다. 우선순위가 사라지는 것이다. 회사에서 사장이 시킨 중요한 일보다 눈앞에 보이는 쓰레기통을 치우는 일을 먼저 해버리는 것처럼.


어느 날 도시의 한 동물원에서 코끼리와 사육사가 사라졌다. 신문과 뉴스에 보도가 되었다. 코끼리가 문을 통해 빠져나간 흔적도 없고 사육사가 끌고 나간 흔적도 없는데 깜쪽 같이 사라진 것이다. 동물원의 배경과 코끼리가 어떻게 이 동물원에 들어오게 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도 소설에 나온다. 그런데 주인공이 코끼리와 사육사가 사라지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사육사는 코끼리와 아주 친밀한 관계처럼 보였다. 동물을 오랫동안 돌보다 보면 그런 관계가 된다.


주인공은 어느 날 작은 구멍으로 보이는 동물원의 모습 속 코끼리와 사육사가 점점 작아지는 것을 본다. 원거리에 있어서 작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코끼리와 사육사의 물리적인 크기가 작아져서 없어지는 모습을 본다. 주인공은 그 이후 옳은 일이라고 선택을 하는 것도 힘겨워지고 상실의 깊고 깊은 터널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마치 하나레이 만에서 서퍼를 꿈꾸는 아들 타카시가 상어에게 목숨을 잃고 알 수 없는 공백에 갇혀 10년을 하나레이 만을 찾아가는 사치처럼 말이다. 그러나 사치는 다리 한쪽이 잘린 일본인 서퍼를 보는 순간 마음속의 공백에 대해서 알게 된다, 망나니 남편이 듣던 음악을 타카시가 듣고 아들이 듣던 그 음악을 들으면서 사치는 알게 된다.


코끼리의 소멸을 본 주인공이 가지는 상실의 공백은 몹시 폭력적이다. 이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이 전혀 모르는 사실을 주인공 혼자 알고 있다는 진실이 점점 주인공을 폭력의 세계로 서서히 밀어 넣는다. 그로 인해 주인공은 조금씩 자신도 코끼리와 같이 실오라기처럼 자신이 소멸해 간다는 걸 느끼게 된다.


주인공은 결국 파티에서 만난 여성에게 이 모든 사실을 털어놓는다. 우리는 가끔 자신만 떠안고 있는 사실이 힘겨워할 때가 있다. 코끼리의 소멸에 등장하는 사육사의 이름은 와타나베 노보루다. 단편 패밀리 어페어에 등장하는 여동생 애인의 이름도 와타나베 노보루. 태엽 감는 새에 나오는 아내의 오빠도 와타야 노보루다. 우리가 좋아하는 안자이 미즈마루 씨의 본명이 와타나베 노보루 인 것으로 보아 하루키 씨는 아무래도 미즈마루 씨를 만나고 나서 소설 속에 그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았나 싶다.


안자이 미즈마루 씨는 항상 젊은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분위긴데 여자들에게는 하루키를 소개해줄게,라고 하지만 한 번도 하루키에게 젊은 여자들을 소개해준 적이 없는 안자이 미즈마루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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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소설에는 엄청난 음악이 나온다. 2000년대 이전에는 소설을 읽으며 등장하는 음악을 가슴에 품었다가 나중에 찾아서 들었겠지만(더 이전에는 음반을 구하러 다녔겠고 – 생각해 보면 하루키 팬들이 모여 독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다 같이 음반가게 들러 음반을 고르며 소설에 등장한 음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아주 재미있었을 것 같다) 요즘은 소설에 음악이 나오면 바로 검색을 해서 틀어 놓고 소설을 읽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게 마냥 좋은 것이냐고 한다면 나는 잘 모르겠다.


노르웨이 숲에도 재즈가 왕창 나온다. 하루키가 재즈카페를 하면서 접한 재즈의 경험을 노르웨이 숲에 많이 녹여냈다.


버드 파렐, 셀로니어스 몽크, 데사피나도, 이파네마의 소녀, 토니 베네트(토니 베넷은 지난달에 세상을 떠났다. 그와 듀엣으로 가장 핫 했던 최근의 인물이 할리 퀸으로 나올 레이디 가가였다. 둘이 부르는 노래를 듣고 있으면 진정 재즈, 재즈의 중심에 서 있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든다. 레이디 가가는 토니 베넷과의 듀엣에서 마치 60년대를 빙의한 듯하다), 오네트 콜만, 마일드 데이비스 등 재즈가 잔뜩 나온다.


노르웨이 숲에 나온 곡은 아니지만 토니 베넷과 레이디 가가의 듀엣이 너무 좋아서.

Tony Bennett, Lady Gaga - I've Got You Under My Skin https://youtu.be/xyTa_gJkYwI


[일요일 아침,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책상에 앉아 나오코에게 편지를 썼다. 큰 컵으로 커피를 마시고, 마일스 데이비스의 옛 레코드를 들으면서 긴 편지를 썼다]


“비가 오는 일요일은 나를 좀 혼란스럽게 만들어. 비가 오면 빨래를 할 수 없고, 다리미질도 못하게 되니까. 산책도 못하고, 옥상에서 뒹굴지도 못하지. 책상 앞에서 앉아 [카인드 오브 블루]를 자동 반복으로 틀어 놓고 몇 번이고 들으면서 비 내리는 마당 풍경이나 멍하니 바라보는 정도가 고작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야.”


카인드 오브 블루는 한 시간가량 정도의 마일드 데이비스의 앨범이다. 와나타베 녀석처럼 우리도 이 앨범을 반복으로 틀어 놓고 소설 노르웨이 숲으로 빠져 들어간다.


비가 오는 일요일 오전에 마일드 데이비스를 들으며 편지를 쓰는 모습은 이제 동경이 된 것 같다. 상실의 시대가 나온 시기가 일본은 전공투, 한국은 민주화 운동이 한창때라 세상이 시끌시끌했다. 무차별적인 폭력에 대항하기 위해 목숨이 사라지기도 했다.


그런 분위기가 지금 21세기에도 변하지 않고 일어나고 있어서인지 이렇게 느린 재즈로 뭉쳐있는 마일드 데이비스의 음악을 들으며 일요일 비 오는 아침 커피를 마시며 편지를 쓰고 싶은 동경이 더욱 깊어만 간다.


현실 속에 있는 비현실적인 생활. 현실 앞의 초현실의 세계가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지만 닿지 않는 세계. 그 세계를 향한 끝없는 동경의 목마름이 하루키의 소설 속에 존재한다.


마일즈 데이비스 - 카인드 오브 블루 https://youtu.be/vDqULFUg6CY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위스키소다를 두 잔 째 주문하고, 피스타치오를 먹었다. 셰이커가 흔들리고 유리잔이 부딪치고 제빙기에서 얼음을 가느라 달그락 소리가 나는 뒤쪽에서, 사라 본이 옛 러브 송을 부르고 있었다]


Sarah Vaughan - Misty https://youtu.be/lJXLqAutql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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