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보고 영화 자체도 감동이지만 장예모 감독에 대한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요즘에, 중국 사회에서 체재에 반하는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더불어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한중 축구전에서 패배한 중국 선수들에 대해서 중국 해설자들의 해설 역시 한국 축구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축구에 대한 비판과 발전이 필요한 부분을 말했다.  


역시 탁구 선수들의 매달을 수여하는 방송에서 금메달을 따고도 얼굴이 굳은 중국 선수들을 안타까워하며 메달의 종류에 상관없이 즐거워하며 행복해하는 한국 선수들을 축복하는 중국 해설자들이었다.


그동안 얄팍하게 알고 있던 중국은 그들의 체재에 반하는 언행, 언동을 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구속이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코로나 때 의사, 기자들은 비록 구속될지언정 제대로 된 정보를 알리려고 했다. 후에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그들은 끊임없이 무서운 바위에 계란인 자신의 몸을 던졌다.


이번 부국제의 판빙빙을 보라. 그렇게 중국정부에 탄압을 받았지만 이주영과 함께 영화를 찍고 레드 카펫을 밟았다. 이런 사람들이 중국을 건강하게 만들 것이다.


이 영화 제목 ‘원 세컨드’는 30분 정도 지나면 왜 제목이 그런지 알게 된다. 이 영화는 많은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당연하지만 시네마천국의 알프레도와 토토가 떠오르고, 조지 오웰의 1984 속 윈스턴이 살아가는 세계도 떠오르고 인도영화 천국의 아이들도 떠오른다.


장이머우, 우리에게는 장예모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중국 감독. 첸 카이거와 함께 거장으로 불렸으나 홍콩 반환 이후 중국정부가 원하는 영화를 만들어낸다는 소리를 들었다. 첸 카이거의 패왕별희는 아시아를 넘어 세계를 울렸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그의 영화는 빛을 잃어갔다.


장이머우 역시 붉은 수수밭에서 세상의 조명을 받았고 영웅에서 재능이 아직 남아 있었다. 하지만 역시 그레이트 윌 같은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점점 빛이라는 것이 소멸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 영화 ‘원 세컨드’에서 – 과연 지금 시대에, 현재 시대에 장예모 감독은 자신이 하고픈 이야기를 만들었다. 우리나라도 예전보다 방송이 더 열약해졌다.


예전 김혜수 토크쇼에 나훈아가 나왔을 때 김혜수가 웃으며 여러 번 이혼한 것에 대해서 묻고 나훈아가 대답하면서 풍자 섞인 말들이 오고 갔다. 그런데 지금 이런 이야기를 공중파에서 할 수 있느냐 한다면 그러지 못한다. 한석규, 최민식 주연의 영화 넘버 3의 길거리 포스터에서는 한석규가 가운데 손가락을 올리고 있는 장면이 크게 있다. 하지만 요즘 그렇게 했다가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더불어 풍자로 정부를 비판하는 예능이나 토크 쇼 방송은 공중파에서 전부 사라졌다.


중국은 예전부터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우리나라 보다 더 정부의 간섭이 심하다. 강력하다. 영화계에도 칼바람이 불었다. 성룡도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아들 때문에 중국 정부에 굴복하고 말았다.


첸 카이거와 함께 장예모 역시 무너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영화 원 세컨드를 보면서 장예모라는 감독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했다. 더불어 주연을 맡았던 배우들 역시 생각했다.


주인공 장주성은 딸이 영화에 등장한다는 소리에 감옥에서 탈출하여 영화를 상영하는 마을에 온다. 딸은 영화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영화시작 전 중국뉴스를 보여주는 영상에 등장한다. 그 속에 1초 동안 나온다.


당시의 중국은 마오쩌둥이 집권하고 있었던 1960년대다. 나이를 떠나 모든 인민이 전부 먹기 위해, 살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한다! 운동을 해야 한다! 같은 분위기가 강했다.


아이들도 즐겁게 쌀 가마니는 나른다고 뉴스 속 내레이션이 나온다. 그 1초 안에 주인공 장주성의 14살 딸이 쌀가마니를 울러 매고 웃으며 스쳐간다. 장주성은 그 장면만 몇 십 번을 돌려 본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딸의 모습, 그 딸이 웃으며 무거운 쌀가마니를 나르고 있다.


장주성은 말한다. 고작 14살이다. 14살 여자 아이가 즐거워서 저 무거운 쌀가마니를 나르고 있을까. 장주성은 어린아이까지 사회 운동에 동원하는 중국정부를, 이 중국이라는 나라의 체재에 분노 같은 것을 느낀다. 그 짧은 대사는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 편에서 시저가 했던 한 마디만큼 강하게 느껴졌다.


소녀는 어린 동생이 태워버린 필름으로 만든 전등갓 때문에 필름을 훔쳐 그것을 다시 만들려고 하고, 그 필름 속에 장주성 딸의 1초 영상이 있다.


1초는 너무 하찮지만 그 1초가 모여 영화 한 편이 된다. 1초만 나오는 딸의 모습을 보기 위해 목숨을 건 한 남자와 동생을 위해 필름을 훔치는 한 소녀의 이야기가 처절하고도 아름답게 펼쳐진다.


희망이라고는 1도 보이지 않는 중국의 시골 마을 사람들은 모여서 영화 한 편을 보는 게 삶의 낙이다. 그 영화 필름을 운반하는 도중에 딸을 위해 탈주한 남자와 동생을 위해 필름을 훔친 소녀가 만나서 서로를 위해주는 이야기다. 아주 재미있다. 소녀 역의 2000년 생인 류 하오춘은 라이드 온에서 성룡의 딸로 나와서 연기를 했고 성룡에게 존경의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장예모 감독의 영화에 대한 집념과 애정이 보이는 영화 '원 세컨드'였다.


예고편 https://youtu.be/0v5B7ujnfao?si=UWHM4eOSRkt-zZ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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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은 유튜브 소크라북스의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한 부분을 낭독한 것이다. 달리기에 관한 것이다. 하루키는 이 책을 쓸 당시 30년 동안 거의 매일 한 시간씩 달렸다고 했다. 그 점을 높이 산다. 짝짝짝. 나도 십 년이 넘게 거의 매일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 정도를 달리고 있다. 작년에는 기록을 보니 360일을 달렸고, 재작년에는 이틀 빼고는 매일 한 시간 이상씩 달렸다. 그래서 평균적으로 일 년에 350일은 한 시간 이상씩 달리는 셈이다. https://youtu.be/mYODGbBp5Qw?si=1722NyJ4rLeSjaQn








역시 그동안 주위에서 가장 많이 듣는 소리가 대단 하네, 였다. 그러나 하루키도 말한 것이지만 전혀 대단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매일 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잠을 매일 자야하고, 밥도 매일 먹어야 한다. 배설도 매일 해야 하고 팬티도 매일 갈아입어야 한다. 달리기도 그렇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면 간단해진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간단하게 생각하면 간단하게 해결이 된다.

밥은 하루 안 먹어도 되잖아요, 배설도 하루 안 해도 되잖아요,라고 하는데 그래서 달리기도 ‘거의’ 매일 달리는 것이다. 매일 달릴 수는 없다. 태풍이 오면 비가 와도 나가서 달리는 나였지만 태풍은 좀 그렇다. 독감 예방주사를 맞은 날에도 조깅은 피한다. 그러나 이틀 이상 쉬는 경우는 없었다. 배설은 하루 안 해도 괜찮잖아요,라고 하지만 소변을 하루 종일 보지 않으면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싶다.

아직 조깅을 하지 못할 정도로 아프거나 다친 적이 없기 때문에 이틀 이상 달리지 못한 경우는 없었다. 그 점에 대해서 나의 몸뚱이에게 감사하게 생각한다. 한번은 내가 하루키를 좋아하는 걸 아는 친구가 하루키를 좋아하니 달리기도 따라서 하는 것 아니냐라는 말을 들었다. 하루키를 아무리 좋아해도 달리는 걸 좋아하지 않으면 매일 달릴 수는 없다. 당연한 거지만 달리는 걸 좋아하니까 매일 달릴 수 있는 것이다.

십 년 동안 몇 명이 살을 빼고 싶다면서 내가 달리는데 따라와서 같이 달린 적이 있었다. 그러나 전부 일 년을 채우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고작 몇 달도, 그 기간 동안에도 일주일에 3, 4일 정도 달리고는 그만두었다. 이는 달리는 것 자체가 재미있지 않기 때문이다. 살이 찌는 건 신체는 더 이상의 음식을 거부하는데 뇌가 때가 되면 음식을 먹어서 도파민을 뿜어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살을 빼려면 그 점에 다가가야 한다. 뇌는 끊임없이 도파민의 중독에 노출되어 있어서 그걸 극복해야 한다. 의지만으로는 요즘은 힘들다.

살이 많이 찐 사람들은 조깅으로 살을 빼는 건 무리다. 일단 무릎에 치명적이고 위에서 말한 것처럼 조금 하다가 지치면 안 뛰게 된다. 조깅은 다른 운동에 비해 들어가는 비용이 적기 때문에 더 그만두기 쉽다. 자전거나, 배드민턴이나 탁구처럼 비용이 들지 않는다. 그저 운동화와 길만 있으면 되니까 접근이 쉬운 대신 포기도 빠르다.

매일 밥만 먹을 수는 없잖아.라고 하는데 그래서 매일 같은 곳을 달리지는 않는다. 어제처럼 평소와 다른 코스로 달리면 11킬로미터 정도를 달리고 평소에는 8, 9킬로미터를 달린다. 평소 마지막 2킬로미터는 오르막길이 있어서 그 구간은 다리가 끊어질 것 같은 기분 좋은 고통을 느낀다. 오르막길을 쉬지 않고 달리는 알 수 없는 고통의 쾌감이 있다. 그런 쾌감을 매일 느낄 수 있는데 달리는 걸 멈출 수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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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카프카에는 아이러니에 대해서 나온다. 거대한 줄거리, 오이디푸스 신화의 줄거리에서 따온 이 이야기 자체가 아이러니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을 한다는 예언, 그리고 예언이 현실로 이루어진다는 이야기. 아이러니다.


다무라 녀석은 오이디푸스 같은 저주 받은 예언에서 벗어나려고 집을 떠나 사쿠라를 만나고, 오사마 상이 있는 고무라 도서관으로 가게 되지만 결국 그곳이 예언이 현실이 되는 곳이 된다.


나카타 상이 조니워커를 죽이지만 잠에서 깨어나 보니 피가 묻은 사람은 다무라 녀석이다. 저 멀리 떨어져 있던 아버지가 죽는 날이었다. 아이러니다.


거기에 아이러니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런 모든 일이 가능하게 되었다. 인간이 운명을 선택한다고 보통 생각하겠지만 운명이 인간을 선택한다. 이것이 그리스 비극의 근본을 이루는 세계관이다.


아이러니는 아이러니컬하다. 인간은 각자가 지닌 결점에 의해서 비극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자의 미질, 타고난 장점이나 아름다운 성질에 의해서 더욱 커다란 비극 속으로 끌려 들어가게 된다.


실제로도 외모적으로 드러나는 그 아름다움, 미질 때문에 비극이 된 마를린 먼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이 뚜렷한 본보기라고 해변의 카프카에 나온다. 오이디푸스의 게으름이나 우둔함 때문에 아니라 그 용감성과 정직함 때문에 그의 비극은 초래되었다.


그 속에 불가피하게 아이러니가 생겨나게 된다. 주위에도 너무 똑 부러지고 잘나고 옳은 말만 하는 사람은 사랑보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아이러니는 인간의 삶에 이런 비극을 그림자처럼 끌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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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하루키 얼굴을 그린 일러스트에서는 우수에 찬 하루키의 눈빛이 인상적이다. 마치 소싯적 느와르 속 총알을 전부 남발하고 난 후 앞의 풍경을 보며 우수에 찬 주윤발이 떠오르기도 한다.


주윤발은 젊은 시절 스크린 속에서 빛났는데 얼마 전 부국제에서 본 나이 든 주윤발은 현실에서 빛이 났다. 나는 늙어가는데 주윤발은 나이만 들어간다.  멋있게 나이가 들었다. 외모도 마음도.


이번 노벨상 후보에 올랐지만 하루키가 받지 못할 거라는 걸 나도, 하루키 본인도 알고 있었다. 노벨상을 주는 주최 측에서 바라는 소설과는 아주 먼 소설을 하루키는 쓰기 때문에, 대중성은 심각하게 떨어지더라도 그들이 주고 싶은 작가에게 노벨상을 주는 걸 우리는 다 알고 있다.


그나마 하얀성을 재미있게 읽었는데, 오르한 파무크에 노벨상을 준 것은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러나 두 달 전에 죽은 밀란 쿤데라는 노벨상을 받지 못한 것으로 안다. 한림원에서 보기에 밀란 쿤데라가 쓴 소설은 소설이 아니라는 것이다. 3인칭이었다가 1인칭이었다가 작가가 소설 속에 등장하기도 하고, 그들이 전혀 원하는 방향의 소설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대중은 밀란 쿤데라에 열광했다. 밀란 쿤데라는 노벨문학상만 못 탔지 여러 문학상과 작가 상을 받았다. 더불어 7월에 타계한 밀란 쿤데라에게 그동안 수고했습니다. 밀란 쿤데라 씨.라고 말하고 싶다.



두 번째 하루키 얼굴은 누가 그린 건지 모르겠지만 어? 하루키네? 같은 그림이다. 이렇게 대충 그려놓았는데 하루키답게 보이는 건 순전히 안자이 미즈마루 씨 덕분이다.


점. 선. 면. 이 단순함으로 하루키를 표현했으니 연필 하나로 끙끙하며 마음을 다해 대충 그리면 하루키가 된다. 하루키는 안자이 미즈마루 씨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에세이에서 언급했는데.


“딸이 결혼을 하겠다는 말을 꺼내면, 토라져서 밥상을 뒤엎고는 집을 나가버리겠다.”라고 큰소리치고 있는 것 같다며 귀여운 구석이 있다고 하루키는 말했다.


안자이 미즈마루 씨 같은 어른이 주위에 있으면 생활이 유쾌할 텐데. 하루키는 그런 재미를 느끼며 하루하루 일상을 보낸 것을 안자이 미즈마루 씨를 슬쩍 까돌리며 자랑을 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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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공주 엘자가 있기 전 저짝 불란서에도 엘자가 있었다. 엘자 륑기니. 오늘처럼 가을의 흐린 날에 잘 어울리는 불란서 노래, 샹송이라 하기에는 팝적이고, 팝이라 하기에는 불란서의 분위기가 확 나는, 파트리샤 카스와 다른 엘자가 있었다.


파트리샤 카스가 한국에 와서 노래를 부를 때 그 무대의 사회를 배철수가 봤는데 그 영상을 유튜브에서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네.


엘자 하면 글렌메데이로스가 따라오지만 그녀의 앨범을 들어보면 이야 노래 정말 좋아,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엘자를 검색해 보면 어린 시절부터 노래를 부르고,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 어쩌고 하는 이야기들이 죽 있다.


우리가 엘자를 알게 된 건 글렌메데이로스였다. 중고등학생 때 집만큼 들락거렸던 음악감상실에서 디제이가 글렌메데이로스의 음악을 뮤직비디오로 틀어주면서 엘자의 이야기도 같이 해 주었다. 세계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글렌메데이로스를 좋아하던 프랑스 소녀가수가 직접 글렌메데이로스를 몰래카메라 형식으로 만나면서 두 사람은 듀엣 곡을 부르게 되고 그 곡은 우리가 있는 이 도시의 바닷가까지 울려 퍼지게 되었다.


엘자와 글렌메데이로스의 만남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글렌메데이로스의 이야기를 할 때 했으니 여기서는 생략.

https://brunch.co.kr/@drillmasteer/2618


두 사람의 꿀 떨어지는 듀엣곡 Un roman d'amitie https://youtu.be/8dOxNAHMsvw?si=NR6KIU0HCsjQkn4W


두 사람의 듀엣곡은 정말 사랑스럽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곡이 있나 싶을 정도다. 그래서 두 사람은 결국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그렇게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두 사람의 현재 모습도 검색을 하면 다 볼 수 있다.


아무튼 우리에게 불란서 노래를 가장 많이 듣게 해 준 가수가 엘자였다. 추석이 지나고 가을 속으로 흘린 날이 덮치면 그때나 지금이나 알 수 없는 기시감에 시달리고 조금은 우울했다. 그럴 때 그때는 하교하면 졸졸졸 음악감상실에 들어갔다. 학교 뒤에서 음악이나 내내 듣는 그런 놈들끼리 마음이 맞아서 음악 감상실에 앉아서 굉장히 큰 화면으로 보는 뮤직비디오는 재미있기만 했다.


엘자는 현재도 가수로 활동을 하고 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키가 너무 커버려서 목소리가 예전만큼 나오지 않는다. 엘자나 글렌메데이로스의 음악을 들으면 거짓말처럼 그 당시로 확 돌아가는 착각이 든다. 교복을 입고 가방을 메고 학교에서 나와서 쫄래쫄래 음악감상실에 가곤 했던.


살아보지 못했던 60년대의 음악, 루 리드나 데이빗 보위, 제니스 조플린의 노래를 들어도 이상하지만 그 당시로 가는 착각이 든다. 음악은 그런 알 수 없는 마법을 부린다. 그런데 제이슨 데룰로나, 올리비아 로드리고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현실감각이 사라져 버린다. 현재의 음악인데 음악을 듣고 있으면 현재는 바람에 날리는 가루처럼 날아가 버리는 착각이 든다. 우리나라의 김추자의 노래를 들어도 그렇다. 김추자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건물이 막 바뀌면서 예스러운 풍경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물론 착각이지만. 함중아의 노래를 들어도 그렇다.


얼마 전에 존윅의 프리퀄, 존윅 이전의 이야기 윈스턴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콘티넨탈을 보는데 영화 속에 데이빗 보위, 루 리드 등을 언급을 한다. 음악이란 아무튼 묘한 힘을 지니고 있다.


엘자 륑기니는 조용한 노래만 부를 것 같지만 90-91년 투어 공연 영상을 보면 무척 섹시한 옷을 입고 댄스곡도 부른다. 댄스곡이라고 하기에는 뭣 하지만 전기기타와 드럼이 뒤를 받쳐주고 격렬하게 몸을 흔들며 무대를 장악해 가며 가냘픈 몸으로 섹시하게 노래를 부른다.


오늘은 날이 무척 흐리다. 이러다가 하늘에서 뭔가가 일어날 것만 같다. 중학생 때에도, 고등학생 때에도 이런 날에는 엘자 같은 음악을 찾아서 들었는데 그럴 때의 기분이 든다. 문득 든 생각이지만 세상에 나와있는 음악은 몇 곡이나 될까. 그리고 인간은 음악에 왜 이렇게 열광을 하고 목을 매다는 것일까.


엘자의 투어 공연 영상 중에는 제니스 이안의 At seventeen를 부르는 영상도 있다. 나의 아저씨 14화에 박동훈이 정희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에서 제니스 이안의 At seventeen이 배경음악으로 나온다. 정희가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어서,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려고 가게 앞에 앉아서 하루를 여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 그때 지안이 옆에서 십 분 동안 같이 있어준다.


그렇게 죽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 제니스 이안의 엣 세븐틴이 흘러나온다. 엣 세븐틴은 제니스 이안이 17살에 겪었던 일로 예쁜 소녀들에게 관심을 주는 사람들로 인해 열일곱 소녀가 겪어야 했던 사랑에 대한 좌절을 이야기하는 노래다. i learned the truth at seventeen로 시작을 한다. 당시 제니스 이안의 목소리에는 쓸쓸함이 가득 묻어있다. 나는 열일곱 살에 진실을 알아 버렸어,라며 제니스 이안은 그 특유의 쓸쓸함으로 그때 받은 사랑의 좌절을 노래한다. 깨끗하고 맑은 얼굴을 가지고 지난 사랑의, 당시에 받은 좌절을 쓸쓸하게 노래한다.


그건 마치 정희를 보는 것 같다. 언제나 자신감에 차 있는 정희는 혼자가 되면 더없이 쓸쓸하고 외롭다. 잠드는 것이 무섭고 아침에 눈을 뜨는 것조차 버겁다. 사랑의 좌절이 정희를 그렇게 만들었다. 누군가 정희를 안아주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려 버릴 것만 같다. 그건 아마도 정희 옆에서 십 분 동안이나 같이 있어줬던 이지안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제니스 이안은 14살에 데뷔해서 75년에 엣 세븐틴으로 빌보드 1위에 오르고 75년 전체 히트곡 랭킹에서 19위를 차지한다. 그 쓸쓸함이 묻어나는 제니스 이안의 노래를 엘자가 부른다. 잘 부른다.


제일 많이 들었고, 제일 많이 알려진 노래가 아닌가 싶다 Mon cadeau https://youtu.be/2IhQj4G009M?si=a2a8JmBpBxCQT4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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