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짙어지면 아침에 온 세상을 비추던 햇빛이 늦은 오후까지 이어지지 않는다. 오후의 어느 시간, 하루가 꺾이는 시점, 한 4시 정도부터 날은 흐려지기 시작한다. 하늘에 마땅히 떠 있어야 할 태양은 구름과 구름 사이로 숨어버리고 날은 급작스럽게 흐리고 어두컴컴해진다. 창에 붙은 바에서 하던 작업을 멈추고 노트북을 닫고 뜨거운 커피를 마시고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조금 졸다가 밖을 바라보았을 때 날은 이미 흐리고 어둠이 대지에 내려오고 있었다.



이제 오후 5시 30분 정도인데 말이다. 여기서 바라보는 풍경은 언제나 비슷하다. 맹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위태롭고 메마른 풍경이 보일 뿐이다. 메마른 풍경 속에는 누군가 기분이 나쁘다며 성냥불을 그으면 온 세상이 그대로 불이 붙을 것처럼 메말라 보였다.


매년 이맘때 이런 풍경을 바라보며 추억에 젖었다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떠올리곤 한다. 푸석푸석 누르면 그대로 바스러질 것 같은 푸석함이 풍경 곳곳에 가득하다. 곧 볼기짝을 맞은 것처럼 날은 차가워지고 두꺼운 외투가 어울리는 계절이 올 것이다. 작년에도 이맘때 이런 기분으로 이런 비슷한 글을 적었다. 재작년에도.


촌스럽지만 The Doors의 Moonlight Drive를 틀어 놓는다. 이상하지만 Moonlight Drive는 따뜻한 기분이다. 이렇게 흐린 날 그럴 리 없지만 마음이 추워지는 날 짐 모리슨의 목소리는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준다. 날이 메마르고 추울수록 Moonlight Drive를 찾아 듣게 된다.


창으로 풍경을 바라보다가 실내에서 풍경 속으로 나와본다. 창 안에서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풍경 속에서는 일정하지 않은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공기는 거리의 사람들에 따라 이동을 하며 농도를 다르게 만들었다. 참 신기한 일이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가만히 앉아 있을 때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직접 피부로 닿으면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시간조차 뜯어먹다 버린 빵처럼 일정하지 않다.


The Doors - Moonlight Drive https://youtu.be/uCX8VJIYgM8?si=_NthlcWbZidxVA0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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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안녕! 하면서 책장 저 밑 어둠의 구석에서 기어 나왔을 때 정말 기분이 좋았다. 이 에세이는 먼 북소리 다음에 쓴 해외 체류기 정도 된다. 먼 북소리가 인사 정도의 유럽 여행기라면 슬픈 외국어는 본격적인 미국 체류기, 미국 생활기 정도 될 듯하다.


 책갈피로 스벅 페이퍼를 사용했는 모양인데 연도가 2010년인걸 보니 그때쯤에 읽은 것 같다. 이 에세이에는 미국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 보스턴 마라톤이나 미국적 속물근성이나 미국 재즈와 프린스턴 대학에 관한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제일 재미있는 챕터는 하루키가 영화 [숏컷] 시사회를 보고 난 후의 이야기다. 영화 숏컷에 대한 이야기를 주절주절하는데 재미있다. 그 이유는 나도 숏컷을 재미있게 봤기 때문이다. 숏컷은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영화로 이 감독의 영화가 대체로 재미있다.


영화 숏컷은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들을 엮어서 만든 영화다. 주 골자는 가장 유명한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소설이고 그 외 카버의 여러 소설들이 영화 속에서 에피소드 식으로 나온다. 엔디 맥도웰, 줄리안 무어, 메들린 스토우, 팀 로빈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등 명배우들의 초년병 시절의 파릇파릇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영화를 보면 20대 줄리안 무어의 깨알딱 벗은 모습이 가리는 거 없이 적나라하게 나와서 놀랐다.


이 영화는 세 시간이 넘는다. 그런데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을 좋아하고 알트만의 영화를 좋아하면 하루키의 말대로 세 시간이 후딱 지나간다. 하루키는 시사회에서 숏컷을 봤는데 알트만이 직접 나와서 세 시간이 넘으니까 각오해라,라고 웃으며 말했다고. 밑의 사진에 있다.  


이 영화는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소설 몇 편을 모자이크 식으로 구성해서 만든 것인데, 상당히 변형되어서 대체 몇 편이나 되는 카버의 단편이 삽입되었는지 쉽사리 알 수 없었다. 손가락을 꼽아 가며 보았는데, 내가 아는 범위 안에서 따져 보니까, 전부 아홉 개였다.라고 하루키가 말했는데 이때에는 아직 영화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얻지 못했을 때였을 것이다. 시사회고 그러니까.


그런데 정확히 숏컷은 카버의 소설 9편을 엮어서 만들었다. 하루키 사마 스고이네. 까도 까도 끝이 없는 하루키 이야기.

  

에세이 속에는 알트만 감독과 레이먼드 카버의 티키타카도 있어서 재미있다. 레이먼드 카버는 '작가란 무엇인가'에서 그 큰 키의 몸을 굽혀 비엠다블유 차 안에서 쪼그려 글을 쓰는 걸 좋아했다고 한다. 레이먼드 카버는 모두가 알겠지만 시를 쓰고 싶어서 단편 소설로 기초를 다졌다. 비엠다블유 차 안에서 몸을 구겨서 글을 쓰는 이유는 글을 써서 처음으로 산 비엠다블유차라서 굉장히 기뻐했다. 레이먼드 카버의 스승은 존 가드너로 알고 있는데 그의 소설 '그렌델'은 아주 좋은 소설이었다.

이렇게 젊은 하루키의 얼굴이


시사회를 본 후기 같은 에세이




메들린 스토우와 팀 로빈슨


넌 나중에 아이언 맨이 된다


어떤 블로그에서 퍼 왔는데



예고편 https://youtu.be/ePyhGz9_RCI?si=d3y1HGWrosZko8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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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을 버터에 구워 먹으며 생각해 보니

근래에 자주 그런 일들이 생기는데 내가 일하는 건물에 여러 학원이 있다. 컴퓨터 학원과 베이커리 학원 그리고 미용 학원이 있다. 그래서 엘리베이터에 어떤 시간에는 사람들이 우르르 탈 때가 있다. 그러나 나는 우르르 몰릴 때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는다. 내가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건 하루에 한 번 주차를 하고 올라올 때뿐이다. 일을 마치고 내려갈 때는 계단을 통해서 걸어간다. 그런데 사람들이 많이 건물에 오고 가서 그런지, 아니면 언제부터인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고 하는데, 내리기도 전에 나를 밀치고 먼저 들어오는 사람이 생겼다.


엘리베이터는 내린 다음에 타도 늦지 않습니다. 같은 말은 요즘 별로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 한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내리는 시간에는 별로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사람이 없지만 가끔 올라타는 사람은 모두 그렇게 탄다. 나도 성격이 급하지만 그 정도로 급하지는 않은데 이게 단순히 성격 급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그저 무의식 적으로 몸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먼저 들어오는 것이 아닐까. 어떤 시기를 기점으로 사람들이 엘리베이터를 그렇게 타기 시작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사람들은 그렇게 타지 않는다. 아파트의 엘리베이터는 내리기를 기다렸다가 올라탄다. 그러나, 너무나 이상하지만 일하는 건물에는 내리기도 전에 먼저 올라타려는 사람이 많아졌다. 연령과도 무관하다. 베이커리 학원의 원생들은 나이가 어리고, 미용이나 컴퓨터 학원에는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내려가는 버튼의 불이 들어와 있는데도 올라타서 내려가면 왜 올라가지 않고 내려가지? 하면서 혼잣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 내려간다고 점등이 되어있는데도 자신이 타면 그냥 올라가는 것을 당연시 받아들이는 걸까.


저녁에 전복에 버터를 구워 먹었다. 버터를 구워 먹는 건 아무래도 그냥 전복을 구워 먹는 것보다 귀찮다. 하지만 1과 2 정도의 차이지 그냥저냥 귀찮아도 해 먹게 되는 것이 있다. 버터를 까고 프라이팬에 두르고 전복을 굽는 것은 그저 조건반사적으로 하는 것이다. 누군가 내리기 전에 엘리베이터를 먼저 타는 것은 그런 조건반사 같은 것일까.


또,

대부분 전화를 하면 지금 갑니다. 같은 말을 한다. 지금 간다는 말은 거기서 지금 출발한다는 말이지 지금 여기에 도착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래서 도착은 언제 하냐고 물으면 한 시간 정도 걸린다고 한다. 도대체 한 시간이나 걸리는데 지금 간다고 하면 이게 맞는 말일까. 이런 문제가 몇 년째 이어지고 있다. 반드시 도착하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나? 같은 질문을 해야 제대로 된 답을 얻는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지금 간다는 말을 한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출발하는 사람은 그저 지금 간다, 지금 도착한다는 의미로 말을 한다.


너는 제대로 하냐?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일상에서 자주 부딪히는 부분이라 불편한 건 불편한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매일 타지 않는 사람은 내리기 전에 먼저 올라타는 사람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고, 매일 지금 간다는 말을 사람에게서 들을 필요가 없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이런 문제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 문제라는 건 늘 어디에나, 도처에 널려 있다. 아차 싶으면 그 문제가 나의 눈앞에 전봇대처럼 우뚝 서 있다. 발로 걷어차기도 힘들고 잡고 분질러 버리기도 힘들다. 그저 내가 피해 가야 한다.


나도 그렇지만 사람은 자기 위주로 생각을 하고 말을 하는 것 같다. 인사를 하고 지내는 할머니 한 분도 늘 그런다. 겉으로는 예, 예 하면서 들어주지만 들어보면 온통 자식욕이나 주위 사람들 욕뿐이다. 할머니 주위 사람들은 만나본 적이 없고 오직 내가 아는 사람이 그 할머니라 맞습니다! 라며 맞장구를 쳐주지만 욕을 듣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귀가 간질간질해서 후벼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보통 나이가 들면 고집이 드세 진다는데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말을 잘하지 않는 나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듣기에 쓸모없는 말이면 대화를 잘하지 않으려고 한다. 세상사 쓸모없는 말이 어디 있나. 같은 말을 할지도 모르지만 그저 내가 듣기에 이게 뭐야? 이거 너무 쓸모없잖아.라는 생각이 들면 잘 이야기를 안 한다. 그러다 보면 오해가 생기기도 하는데 이런 오해는 일 년에 한 번도 생기지 않기에 그저 나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다. 그러나 영화이야기나 하루키 이야기를 할 때에는 많은 말을 한다. 내가 생각해도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말을 많이 한다.


며칠 전에도 라우드니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머틀리 크루의 이야기를 하게 되고, 그러다가 영화 더 더트에 대한 이야기부터 팸 앤 토미의 이야기까지 하다 보니 한 시간 반을 그렇게 떠들고 있었다. 라우드니스는 정말 대단한 밴드다. 일본 내에서 활동이 좁다고 느껴 미국으로 가서 미국을 씹어 먹었다. 세계 3 대장 기타리스트에 잉위 맘스틴과 더불어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이런 이야기는 이쯤에서 그만 접고.


인간은 어째서 먹어야만 하는 걸까. 같은 쓸데없는 생각을 자주 한다. 먹는 행위는 별론데 맛있는 음식이 도처에 지뢰처럼 많아서 먹지 않을 수가 없다. 배부르게 안 먹기는 너무 힘들다. 식당에서 한 그릇이 나와서 먹고 나면 배가 부르다. 나는 배가 부른 포만감을 싫어하는데 음식은 포만감을 느끼게 할 만큼 맛있어서 끊임없이 위장으로 넣어주게 만든다.


어제는 조깅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늘 장사를 하는 마라탕 가게에 여중생이 혼자 앉아서 마라탕을 먹고 있었다. 중학생이 혼자 먹는 게 뭐 어때!라고 하겠지만 보통 여중생 여고생은 혼자서는 식당에서 거의 먹지 않는다. 그럼에도 마라탕 집에서 홀로 마라탕을 먹는 걸 보면 이 거부할 수 없는 마라탕의 유혹이 굉장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나저나 여중생은 밤 9시쯤 마라탕 집에서 왜 홀로 먹을까. 근처 학원이나 스카에서 공부를 하다가 아, 나 마라탕이 먹고 싶어! 해서 나와서 먹는 걸까. 아니면 저녁을 친구와 같이 먹기로 했는데 친구가 일이 있어서 약속이 깨져버렸지만 나 혼자서라도 마라탕을 먹을 테야.라고 했을까. 보통은 혼자서 식당에서 음식을 먹는 사람은 휴대폰도 보면서 여유롭게 먹지만 여중생은 마치 국밥 집의 홀로 온 아저씨들처럼 전투적으로 마라탕을 먹었다.


그 모습을 보며 지나쳐왔다. 마라탕은 한 번 먹어 봤는데 나쁘지는 않았지만 나는 찾아서 먹게 되지는 않았다. 내가 마라탕 집에서 먹어 보니, 마라탕의 장점이라면 맛도 맛이겠지만 친구들과 우르르 가서 자기 먹고 싶은 것들을 담아서 테이블에 앉아서 깔깔깔 떠들면서 먹는 맛도 있는 것 같았다. 여고 앞 분식집의 떡볶이와 김밥을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그렇게 모여 앉아서 먹는 맛이 있다. 그런 맛은 기억보다는 추억을 만든다. 시간이 지나 비슷한 음식을 먹으면 그때 그런 대화를 우리가 했었지!!! 하며 즐거워하게 된다. 아마 그렇게 신나게 먹는 음식이 소화도 잘 되고 혼자서 먹는 마라탕보다는 더 낫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버터에 구운 전복을 파는 곳이 없기 때문에 전복버터구이는 집에서 간단하게 해 먹는다. 먹으며 뉴스 기사를 보니 요 며칠은 봉골레 하나의 주인공 이선균과 펜싱국가대표였던 남현희의 이야기가 한가득이다. 이선균에 대한 이야기는 일주일 내내 쏟아져서 뭐 그렇고, 남현희는 이렇게 될 줄 알면서도 자신의 사랑을 대대적으로 공표했다. 오늘은 디스패치에 의해 사기 전과까지 전부 밝혀졌다. 그럼에도 남현희는 여자든 남자든 상관없으며 그에 대한 사랑에 대해서 믿고 있다고 개인계정을 통해서 말을 하고 있다. 이렇게 다 알게 될 텐데 왜 그럴까.


생각해 보면 남현희는 선물로 받은 벤틀리를 자랑하면서 행복함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그냥 일반 대중에게 이렇게 빨리, 나 지금 너무 행복하단 말이야,라고 자랑하려고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아마 누군가에게 나는 너와는 다르게 지금 너무 큰 행복으로 좋아 죽을 지경이야 라고 밝히고 싶었고, 빨리 알리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에 대한 사랑보다는 그 사람에 대한 미움이 불러오는 행동이 아닐까 싶기도 한데. 이럴 때 오은영 박사를 불러야 하는데 오은영은 언제나 많은 말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마지막으로 막혔던 이태원참사 다큐영화 ‘크러쉬’ 예고편이 열렸다. 예고편을 볼 수 있는 곳은 아이엠피터의 유튜브다. 이 영화는 파라마운트에서 만들었고 그 당시 사람들이 녹화한 휴대전화 영상과 살아남은 사람들의 인터뷰를 토대로 만들어졌다. 한동안 한국 유튜브에서는 이 예고편을 볼 수 없었다. 한국에서는 만들지 못하고 미국에서 만든 이태원참사의 다큐멘터리 영화.



이태원 참사 다큐멘터리 '크러쉬'(Crush) 예고편https://youtu.be/qtZ45h4-Nzk?si=JQk3goEcyi4ud0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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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키 이야기는 3인칭이다. 하루키는 90년대 초반이전의 소설은 1인칭으로 감정의 노출을 과감하고 여과 없이 드러냈다. 다자키 이야기는 3인칭인데 그만 하루키가 자신이 개입이 되어 버린 부분들이 꽤 있다. 초반에 인물에 대한 묘사가 너무 좋아서 머릿속에 네 명의 다자키 친구들의 모습이 탁탁 탁탁 형상이 된다.


그런데 다자키는 썩 박식하지도 않고 문화적인 교양이 있는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처음 핀란드에 가서 지나치는 나무를 보고 자작나무, 가문비나무, 단풍나무 따위를 다 알아버리고 소나무는 적송이라고 하는 것도 알아버린다.


직장상사에게 핀란드로 간다고 말했을 때 핀란드에 뭐가 있지?라는 질문을 받고 바로, 시벨리우스, 아키 카오리즈마키, 노키아, 마리메코, 무민이라고 대답을 한다. 핀란드에 대해서 알아보고 대답했을 수도 있지만 다자키는 구글을 통해서 세세한 것을 검색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처음 사라가 다자키에게 친구들의 이름을 물어보는 장면을 상상해 보면 알 수 있다. 시벨리우스는 클래식, 아키는 영화감독, 노키아는 핸드폰, 마리메코는 유명한 핀란드 침구브랜드이고 무민은 만화캐릭터이다. 이 정도면 핀란드 한 나라를 다 안다는 것인데 하루키가 그만 1인칭으로 개입을 해버렸다.


다자키 이야기는 시간과 공간, 숫자가 크게 중요한 의미가 있다. 현재에서 실체를 두고 과거로 가서 이야기를 하는 방식은 하루키가 늘 하는 방식이지만 우리는 어느새 하루키의 양을 둘러싼 모험이라든가 일각수의 꿈, 어둠의 저편, 해변의 카프카에서 이미 녹을 대로 녹아서 캐러멜이 되어있다.


5명으로 완전한 공동체에서 시작하는 이야기는 다자키라는 자신이 추출되는 방식으로 인해 완전한 공동체가 와해가 된다. 완전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5인 체제라는 것이 먼저 있을 수 없는 환상 같은 것이다. 공동체에서 완전함을 이룰 수는 없지만 그들은 이루고 있었고 그것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암묵적인 평행을 이루는 관계의 지속이라는(이성관계가 없는) 것이다.


이 깨져버린 5인 체제는 16년이 지난 후 핀란드의 구로를 만나러 가서는 다시 5인체제의 완벽한 모습으로 결속이 된다. 그것은 구로와 그녀의 남편, 그리고 두 딸. 그리고 일본에서 온 낯선 남자, 바로 다자키 자신의 모습이다.


구로를 찾아가는 이야기가 아주 복잡하게 얽혀있다. 그것이 다지키가 좋아하는 역의 모습과도 아주 흡사하다. 다자키가 어린 시절부터 좋아하는 역과 선로의 모습은 마지막에 신주쿠역의 복잡한 모습에 투영을 하고 있다. 그 복잡함이 바로 인생이며 사람이라는 것이다.


다자키는 하이다를 만나면서 어쩌면 묘한 감정을 지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다자키의 마음속에는 알게 모르게 시로와 구로가 자리를 잡아버려 이미 사귀었던 몇몇의 여자들에게 마음을 두지 않았다. 오로지 사라를 만나서 자신의 마음을 열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 역시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꿈속에 시로와 구로가 나타나서 같이 섹스를 즐긴다. 그리고 하이다에게 정액을 쏟아낸다. 다자키는 어쩌면 자신도 모르는 새에 점점 동성에게 마음이 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정말 자신도 모르는 새,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음속에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그리고 등에 새겨진 그 어떤 것에 의해서 점점.


구로를 만나서 이제 자신의 이름을 부르지 말아 달라고 말한다. 시로의 이름도 부르지 말아 달라고. 다자키는 그럼 자신의 이름에 대해서 이야기했을 때 다자키는 그대로 다자키 쓰쿠루로 남는 게 좋다는 말에서는 조금 벅차올랐는데 그것은 색깔을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은 색채가 변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원래부터 색채를 지니고 있지 않았던 다자키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자기만의 방식과 타인과의 타협을 배제하더라도 꿋꿋하게 남아있어 달라는 당부처럼 들렸다. 그 모습은 마치 하루키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았다. 모든 작가나 독자, 그리고 세상이 변해서 처음과 다른 이름으로 불리더라도 하루키 자신은 하루키라는 이름 그대로 영원히 사람들에게 불리기를 바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에 다자키는 사라에게 전화를 하고 끊어 버린다. 그리고 울리는 전화는 사라라는 것을 알고 있다. 점점 전화벨이 울릴수록 다자키는 움직이지 않고 전화를 받지 않는다. 이 부분은 마치 개츠비가 데이지를 기다리는 부분 같았다. 개츠비는 데이지가 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개츠비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데이지를 기다리고 있다.


모순이 가져오는 극렬한 통감에 대해서 다자키도 느끼고 있었다. 전화를 받으면 사라가 할 말을 다자키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다자키는 그것이 두렵고 무서웠다. 정말 얼마나 무서웠을까. 시로와 구로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사라를 만났지만 사라에게서 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는 다자키 자신은 몸이 떨렸고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


다자키는 구로의 말처럼 색채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다자키는 어쩌면 많은 색채를 지니고 있었다. 그 색채가 색 배합이 제대로 이루어있지 않고 있었던 아주 여린 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다자키는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절대로 놓칠 수 없는 소중한 사람에게 다가가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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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에세이 – 낙지를 부드럽게 하는 방법


낙지를 가끔 먹다 보니 낙지에 대해 쓴 작가들의 재미있는 글들이 있다. 행복한 세계 술맛 기행의 저자, 니시카와 오사무가 한국에서 낙지를 먹고 그 느낌을 자신의 책에 서술했다.


[젓가락으로 집었더니 접시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중략) 씹을 때의 촉감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경쾌하다. 접시 위에서는 짧게 토막이 난 낙지의 다리가 한 마리 긴 애벌레처럼 여전히 꿈틀거린다. 블랙유머 같은 느낌이 든다. 가나자와에서는 그릇 안에서 헤엄치고 있는 투명한 방어를 산 채로 먹어본 적이 있지만 그보다 몇 배는 더 유머를 느끼게 하는 음식이다.]


미식의 나라 일본에서도 산 낙지는 정말 블랙유머에 해당하는 모양이다. 올드 보이에서 산 낙지를 먹는 오대수의 그 장면은 훗날 콩: 스컬 아일랜드에서 콩, 킹콩이 거대한 문어를 씹어 먹는 장면이 나오는데 오대수가 낙지를 뜯었던 그 시퀀스대로 오마주를 했다. 감독은 그 장면뿐 아니라 톰 히들스턴이 무기를 휘두르는 장면도 오대수를 오마주 했다. 초반 섬에서 청년 두 사람이 싸우는 장면은 영화 놈놈놈을 오마주 했고, 등장하는 스콜크롤러의 외형은 봉준호 감독의 괴물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감독은 후에 이런 사실을 인터뷰에서 밝혔다.


다시 산 낙지 이야기로 돌아와서, 하루키도 ‘일상의 여백’에서 하와이 사람들이 낙지를 부드럽게 하는 방법을 말하고 있는데 읽어보면 유머러스하다.


[집에 갖고 가서 일단 세탁기에 집어넣어 세탁해 버린다. 그리스에서는 잡은 낙지를 콘크리트 바닥에 내동댕이쳐 부드럽게 만들지만 미국의 낙지잡이는 그런 야만스런 짓은 하지 않는다. 시어즈 전자동 세탁기의 헹굼이나 탈수 스위치를 눌러 덜그럭 덜그럭 하고 나서 그것으로 끝난다. 보고 있노라면 낙지가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들지 않는다. 생각해 봐라. 기분 좋게 잠을 자고 있다가 끌려 나와 아니 이런, 하고 생각하고 있을 동안에 ‘탈수’ 당하면 정말 견딜 수 없는 일이다. 정말 그런 식으로는 죽고 싶지 않다.]


하루키의 그렇지 않은 척 그런 유머스러운 글을 읽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낙지가 되어 양팔과 두 다리를 쭉 뻗고 탈수기에 들어가는 상상을 하게 된다.


쓸데없이 문득 든 생각인데, 김신영이 예전에 살을 뺀다며 할머니한테 풀만 먹을 거야,라고 하니 할머니가 야야 코끼리도 풀만 먹는데 몇 톤이데이라고 한 말이 생각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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