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확실하게 겨울의 밤이 아니었다. 조깅을 하는데 봄의 기운을 느낀 날이었다. 겨울의 그 혹독함이 밤인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달리다 보면 등에서 땀이 나는 그런 날이었다. 땀이 식어도 축축하지 않은, 그래서 춥지 않은 밤이었다.


날이 풀리면 가족 단위로 강변에 운동을 하러 나오는 경우가 있다. 방학이라 그런지 퇴근한 아빠를 따라 나온 초등생 아들도 보였다. 집에서 밥 먹고 난 후 폰으로 게임이나 하는 것이 좋을 나인데 다른 아이들에 비해 통통한 몸매 때문에 아빠를 따라나섰다. 아빠 역시 배가 많이 나와서 두 사람은 운동을 하러 나온 모양이었다.


강변을 따라 조깅을 하다가 몸을 푸는 곳에서 다리를 풀고 있었다. 턱걸이를 하는 곳에 아주머니가 섰다. 아주머니였다. 50대? 초반? 40대 후반? 그렇게 보였는데 겉옷을 벗어서 걸어두더니 턱걸이를 정확한 자세로 10개를 완벽하게 하더니 다리를 올려 거꾸로 매달렸다. 그리고 그 자세로 윗몸일으키기를 했다. 대단했다.


그 모습을 입을 벌리고 보던 초등학생이, 초 3 정도 되어 보이는 아들 녀석이 아빠에게 큰 소리로 아빠는 저거 할 수 있어?라고 물었다. 옆에서 알 수 없는 운동을 하던 아빠는 조용하게 아니 못 해.라고 했다. 아들이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 윗몸일으키기를 하는 아주머니를 한참 보더니 느닷없이 아버지! 아버지는 스무 살에는 저렇게 할 수 있었죠?라고 높임말을 했다.


갑자기 아빠가 아닌 아버지라며 높임말을 하는 아들 녀석 때문에 나는 웃음이 나왔지만 웃을 수 없었다. 뭔가 아들 녀석은 진지했다. 근본 없는 높임말에 아빠가 당황을 해서 인지 스무 살에도 아빠는 턱걸이는 못했다고 아들에게 말했다. 그러자 아들이 헐 진짜요? 아 왜요?


날이 풀려 하필 운동하러 나온 사람들이 많을 때 아들 녀석은 눈치라고는 1도 없이 큰 소리로 실망을 해버렸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그 자리를 빠져나왔지만 이후 아들내미의 아버지 문책은 계속되었을까. 그 모습을 보니 한창 대중목욕탕에 다닐 때가 생각났다. 그때에도 한 초등학생이 아버지와 목욕탕에 들어왔다.


초등학생 때에는 아빠와 목욕탕에 가는 게 무엇보다 재미있고 좋다. 마음껏 떠들어도 아버지라는 든든한 방패막이 있어서 안심을 하며 떠들 수 있다. 아버지는 그런 존재니까. 좀 벗어난 얘긴데 라디오에서 맛있는 거 하면 일단 아이들을 먼저 먹이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다가 유통기한 지난 건 다 아빠 거라고 했다. 아빠는 맛없고 유통기한이 지난 거 먹어도 괜찮아. 아빤 그런 존재야. 아버지는 그렇게 든든하다. 비록 몰래 화장실에서 설사를 하더라도.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는데 초등생이 아버지와 목욕을 하다가 옆에 등에 용문신이 어마어마하게 있는 깍두기 형님으로 보이는 남자가 목욕을 하는데 눈치 없던 아이가 아빠에게 목욕탕이 울리도록 아빠 저 아저씨는 왜 등에 용 그림으로 황칠했어? 머리 감던 아빠는 도대체 무슨 죄야. 방황하던 그 초등학생 아버지의 눈빛을 나는 기억한다.


눈치가 없는 건 어른이 되어서 바뀐다거나 하지 않는 것 같다. 예쁘고 잘생긴 연예인이라면 허당이라고 해서 웃음으로 승화가 되지만 현실에서 허당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 그래서 눈치가 없는 사람에게 아무리 주의를 줘도 그게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어떤 시인은 허당인 자신을 알기에 다니던 회사를 관두고 글을 써서 훨훨 날아다니고 있다. 주위를 힘들게 할 바에는 혼자서 일을 하는 게 낫다 싶은 것이다.


눈치가 없는 사람은 오너가 되어도 힘이 든 것 같다. 대리는 눈치가 없지만 회사에서 사무실 직원들과 단톡방에서 활동도 많이 하며 직원들과 친하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모른다. 다른 직원들이 따로 단톡방을 만들어서 대리만 빼고 대화를 하는 것을. 그런 거 일일이 따지면서 어떻게 생활을 하나 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깻잎을 젓가락으로 떼주면 되니 안 되니 하는 세상이다. 어제는 남자친구가 팬아저가 뭔지 모른다고 여자 친구에게 한 소리는 듣는 장면도 목격했다. 그런 세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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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요네즈를 매일 밥을 먹으며 먹었더니 매일 하는 조깅이 마요네즈를 이기지 못했다. 조깅을 하는 시간과 거리는 일정한데 먹는 양과 질이 많아지고 달라지니 살이 붙는다. 마요네즈를 매일 먹기 전으로 돌아가려면 조깅을 평소보다 더 많이 해야 하는데 체력이 달린다. 마요네즈는 어떤 음식에 달라붙어도 그 음식의 맛을 맛있게 만들어 준다. 세상에 정말 이런 식품이 있다는 것에 놀라면서 몇 달을 매일매일 마요네즈의 세상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빠져나와야 할 때가 되었다. 아직 라면에 넣어서 먹어보지는 않았는데 라면에 한 번 넣어 먹고서는 그만둘까.



식빵에 계란 프라이를 올렸다. 그리고 마요를 뿌렸다. 아 정말 맛있다. 몸에 미안해서인지 옆에 마늘장아찌를 두었다. 기묘한 것은 고소한 계란 프라이에 마요가 뿌려지면 느끼할 것만 같은데 고소함이 두 배가 된다. 그래서 정말 맛있다.


동네 빵집에서 옛날 햄버거를 사 왔는데 거기에도 마요를 뿌려 먹으면 음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내가 좋아하는 고추무침에도 마요가 합쳐지면 고추의 맛이 더 맛있다. 그냥 맛있다. 넋을 놓고 먹게 된다. 그러니 너무 배고플 때 먹으면 안 된다.


닭 가슴살을 먹으면 뭐 해. 나는 닭 가슴살도 퍽퍽한 채 먹는 걸 좋아했는데 이 죽일 놈의 마요 때문에. 퍽퍽한 닭 가슴살에도 마요가 들어가는 순간 닭 가슴살이 아닌 닭다리의 맛이 난다고. 할 정도다.


말해 뭐 해. 냉장고 털어 있는 반찬 넣어서 밥을 비빈 다음 마요를 뿌려서 먹는다. 팍팍 비벼서 먹어도 좋지만 마요 부분을 밥과 함께 숟가락으로 떠서 한 입 가득 먹는 그 맛이 좋다.


그 유명한 명란마요다. 명란젓에 마요를 뿌리면 마법의 반찬이 된다. 맛이 없을 수 없다. 입맛 없다는 사람들? 마요를 옆에 두어라. 하지만 명심해야 할 건 옆구리 살도 같이 불어난다는 걸.


닭 가슴살이 많아서 하루는 이렇게 먹고 하루는 저렇게 먹지만 중요 포인트는 역시 마요다. 닭 가슴살에 계란지단을 같이 올려 먹는 용감함과 하루는 치즈를 넣어서 먹는 무모함도 마요와 먹게 되면 잡고 있던 생활의 정신 줄을 놓게 된다.


몇 달을 매일 마요를 밥과 함께 먹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 하게 된다. 마요를 검색하면 다양한 맛의 마요가 있고 사람들 역시 마요의 맛에 빠져서 야호를 부르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번 마요를 마지막으로 이제 마요를 끊거나 올해는 먹지 않으려 한다. 뭐 잘 안 되면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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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계절의 경계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날입니다. 이런 날은 꼭 달의 뒤편에 서 있는 기분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맘때가 되면 늘 드는 감정이니까요. 달의 뒤편은 가본 적이 없지만 상상을 하면 달력의 뒷면처럼 늘 가까이 있지만 펼쳐 보지 않는 세계, 그래서 그 세계가 있다는 걸 알지만 알 수 없는, 그런 기분입니다. 어제까지 주머니에 손을 짚어 넣어 걸어야만 하는 날씨였다가 오늘에 이르렀을 때 그 틈을 벌리고 봄날의 기운이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달의 뒤편 같은 겨울의 끝인 것 같은 기분입니다. 그러나 끝이라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끝이 있으면 반드시 시작이 있으니까요. 끝이란 시작을 알리는 시점 같은 것입니다. 나는 궁금하여 뒤편으로 돌아가면 다시 저만치 가버리고 주저하다 보면 어느새 달의 뒤편은 사라져 버리는, 그래서 분명 밤이 도래하면 역시 겨울의 차가운 날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뒤편의 세계가 사라질까 불안합니다. 기시감이 들지만 이런 기시감은 언제나 기묘한 감정을 불러들입니다. 그 속에는 불안이 가득 들어차 있습니다.


지금에서 보니 나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텅 빈 인간인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 와서 이렇게 끝없는 불안이 밀려들지는 몰랐습니다. 인간의 삶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 알 수는 없으나 내내 불안했던 마음이, 지금 불안이 더 커졌다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불안의 형태와 크기는 더 커지고 불확실합니다. 불안은 점점 모호해지며 구체적으로 늘어난다는 걸 나는 알 수 있습니다.


나의 불안은 어쩌다 불안하지 않을 때 더 증식합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일상을 유지하지만 눈덩이처럼 커지고 나면 이 불안은 나의 일상을 위협할지도 모릅니다. 그러고 나면 분명 일상은 와그작 망가지겠죠. 매일 라디오를 켜 놓는데 가요가 나오면 가사는 되도록 곱씹어 듣습니다. 가사가 주는 터치가 음이 건드리는 터치보다 나에게는 더 강력합니다. 그래서 가사를 무시하려고 하지만 가사에 집착은 더 심해집니다. 집착을 피하기 위해 다른 나라 노래를 들어야 하는데 라디오는 그렇게 하지는 않군요.


지금 나는 어디에 서 있는 것일까요. 나는 분명 달의 뒤편처럼 알 수 없는 곳에 서 있습니다. 깜깜해서 도저히 일어날 수 없을 때 누구에게 털어놔야 합니까. 아닙니다, 나의 불안을 듣는 사람은 불행해집니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나의 불안 따위를 털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거울 속에는 불안이 짐짝처럼 붙어 있는 한 남자가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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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물을 다 먹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이 필요하다


                                    설에 먹고 남은 마지막 나물이다


설에 우리는 음식을 하지 않는다. 원래부터 그런 건 아니고 몇 해 전부터 점점 줄여서 이젠 음식을 아예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래서 그런지, 왜 그런지 나물은 산더미처럼 한다. 동생 가족도 나물을 먹지 않고, 나물을 산더미처럼 한 모친도 먹지 않는다. 그래서 그걸 해치워야 하는 사람은 나뿐이다.


너 나물 좋아하잖아.


나물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냥 있으니까 먹는 것뿐이고, 나는 음식에 있어서 이렇다 저렇다 같은 말을 하지 않을 뿐이다. 못 먹는 거 빼고는 그냥저냥 다 맛있게 먹는다. 못 먹는 음식은 매운 음식이다.


설에 해 놓은 산더미 같은 나물을 이제 끝을 보려는데 정월대보름이다. 또다시 나물과의 전쟁이다. 나도 나물이 싫다. 맛을 떠나 설이 지나고 매일 나물을 먹었는데, 맛있는 음식도, 좋은 음식도 매일 먹다 보면 그게 맛이 있을 수 없다.


내가 이런 얘기를 누군가에게 했더니 그 누군가는 자신의 냉장고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냉장고 안에 먹지 않고 있는 나물이 있고, 그걸 다 먹기를 바라는 그 누군가의 모친께서 매일 연락해서 어서 나물 통을 비워라, 또 가져다줄게.라고 한단다.


티브이 여기저기서 명절이 끝난 후에 나물을 맛있게 먹는 법 같은 영상이 나오는데, 나물을 맛있게 먹는 법 같은 건 없다. 그냥 적당히 해서 먹자. 나물이 먹고 싶다면 가끔 나물 비빔밥을 사 먹거나, 김밥을 사 먹자. 본인은 먹지 않으면서 도대체 누구 먹으라고 나물을 이렇게나 몇 날 며칠을 먹어도 남을 만큼 하는지. 나 지금 되게 신나. 하하하.


오늘은 정월대보름. 나물이 기다리고 있다. 어제까지 설에 남은 나물을 먹어치웠다. 오늘부터 새로운 나물의 무한 굴레 속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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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빔밥 한 번 먹어봐, 맛있을 거야.

술 마시고 속이 좋지 않은데 비빔밥은 무슨 비빔밥이야?

아니야, 의외로 비빔밥이 만취에 괜찮아.


그때 우리는 낮부터 마신 술 때문에 저녁이 되어서는 초주검 상태였다. 아직 바닷가에는 희미하나마 해의 기운이 자동차 보닛 위에 남아서 다 흘러내리지 않고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입에서는 술 냄새가 올라왔다. 맥주를 네 캔씩 사서 몇 번이나 마셨는지 모른다. 화장실도 몇 번이나 갔는지 모른다. 안주는 필요 없었다. 우리는 낮부터 바다를 보며 맥주를 밤이 올 때까지 마시고 또 마셨다. 정오가 조금 지났을 때 우리는 바닷가로 나왔고 그때부터 편의점과 가까운, 화장실에서도 가까운 벤치에 앉아서 맥주를 마셨다. 이야기를 끝없이 했고, 입을 다물고 바다를 한참이나 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노래도 불렀다.


라디오 헤드 노래 불러줄 수 있어?

라디오 헤드 노래를 여기서 불러라고?

응, 여기서 불러줘.


가방에서 아이패드를 꺼내서 라디오 헤드의 렛 다운을 틀었다. 그녀는 내가 부르는 렛 다운은 좋아했다. 발음이 엉망이었지만, 특히 그녀가 듣기엔 더더욱 엉망인 나의 발음을 그녀는 좋아했다. 그녀는 미국에서 15년을 살다가 왔기에 나의 발음은 엉망으로 들렸겠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라디오 헤드의 렛 다운을 내가 너무나 좋아한다는 걸 그녀가 알고 있었다.


우리는 렛 다운을 흥얼거렸고, 맥주를 마셨고, 드라이 앤 하이를 렛 다운을 다 부르고 나면 불렀고, 맥주를 마셨고, 카마 폴리스를 또 불렀다. 맥주가 떨어지면 편의점에서 네 캔을 사들고 와서 마셨다. 화장실을 다녀왔고 맥주를 마시다 이번에는 킨의 노래를 불렀다. 에블바디 체인징을 불렀고, 맥주를 또 마셨고 디스 이즈 라스트 타임을 불렀다. 또 맥주를 마셨다. 맥주로 취하니 속이 좋지 않았다. 기분 나쁘게 좋지 않았다.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도 모르고 이야기를 하다가 머리를 맞대고 큭큭 웃었고 그러다가 맥주를 마시고 바다와 하늘이 닿는 곳을 같이 바라봤다. 이 죽일 놈의 아이패드 배터리는 아직도 반이나 남아 있었다.


우리는 또 킨의 노래를 불렀다. 둘 다 킨의 노래를 좋아했거든. ‘더 러브즈 알 루징’을 부를 때 누군가 벤치 옆으로 와서 노래를 같이 따라 불렀다. 외국인이었다. 어딘가 모르게 아메리칸으로는 보이지 않고 덴마크나 노르웨이 같은 곳에서 온 사람 같지도 않아 보였다. 그녀가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영국인이었다. 정확히는 영국이 아니라 웨일스다. 이 외국인도 킨의 열렬한 팬이었다. 킨은 영국밴드니까.


예전에 말이야,

킨이 신인일 때 말이지, 우리나라 서태지의 기괴한 태지 콘서트 1회를 했는데 그때 왔었거든. 근데 얘네들이 말이야, 노래를 부르고 흥에 겨워서 큰 소리로 아! 리! 가! 토!라고 했지 뭐냐.


물론 이 말은 전부 그녀가 번역을 해 주었다. 그랬더니 외국인은 정말?라고 한국어로 말했다.


킨에서 중추적인 역할이 키보드잖아. 피아노 천재 팀 말이야 팀 녀석. 그 녀석이 원래 콜드 플레이의 키보드 자리에 가려고 했었는데 말이다. 옆에서 그녀가 착실하게 번역을 해 주었다.


킨은 록 밴드인데 기타가 없다. 그런 밴드가 몇 있다. 옆 나라 일본의 엄청난 밴드 글레이에는 드럼이 없다. 킨에서 중심부 연주는 전부 건반이 하는데 라이브를 보면 노래 한 곡 연주하고 나면 팀 녀석은 아마 근육통에 몸살 걸려 일주일은 못 일어날 것만 같다. 우리는 그렇게 벤치에 앉아서 맥주를 물처럼 마셨다.


외국인 녀석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지만 스캇이라 하자. 스캇이 끼어들고 맥주와 소주를 섞어 마시는 걸 가르쳐 주었다. 스캇은 잘 받아먹었다. 가끔 외국인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다 보면 느끼는 게 얘네들은 말이 많아서 그런지 술이 됐는지 멀쩡한지 그 경계를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스캇 녀석도 눈동자가 풀렸는지 술이 취했는지 어떤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비빔밥 좀 먹어봐.

에이, 무슨 비빔밥이야. 물이나 좀 줘.


우리는 식당에 앉아 있었다. 우리 앞에는 비빔밥이 놓여 있었다. 그녀가 비빔밥을 주문했다. 바닷가에는 24시간 식당이 있고 통유리로 된 테이블에 앉으면 밤바다가 바로 보였다. 우리는 나란히 앉았다.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지 않았다. 그냥 나란히 앉고 싶었다. 바닷가에서 술이 취해 먹은 음식이 하고많은 것 중에 비빔밥이라니.


그렇지만 그녀가 야무지게 비벼 놓은 비빔밥을 한 숟가락 먹으니 자동적으로 계속 퍼먹게 되었다. 생각을 해보니 우리는 정오부터 자정까지 맥주를 마셨다. 마신 맥주는 오줌으로 다 나오고 술기운만 몸속 어딘가에 붙어서 이렇게 나를 괴롭혔다. 오색찬란한 비빔밥을 비벼 놓으니 참기름의 냄새에 혹하여 바닥이 보일 때까지 고개도 들지 않고 퍼 먹었다. 스캇은 어디 갔냐고 물으니 한참 전에 갔다고 했다. 녀석, 여행 중이라는데 외국인들은 보통 서울을 여행하는데 여기 바닷가까지 오다니. 나의 비빔밥을 다 먹고 나니 그녀가 옆에서 턱을 괴고 나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너는? 너는 안 먹어?


내 말에 그녀는 웃기만 했다. 비빔밥은 비빔밥의 맛 이외에 오색찬란한 색감의 맛이 있었다. 그녀가 옆에 앉아 있고 창문 너머 밤바다가 빛나고 있고, 식당의 낮은 색온도가 비빔밥의 빈 그릇을 비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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