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버비콘은 조지 클루니가 감독을 했다. 조니 클루니는 배트맨부터 오션스 시리즈까지 멋진 모습은 다했다. 왜인지 포장된 게 아닌가 했지만 영화 디센던트를 보면서 조지 클루니의 진짜 매력에 빠질 수 있었다. 변호사로 잘 나가던 멧(조지 클루니)은 아내가 보트 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지고, 그의 딸들에게 엄마의 상태를 전하러 가면서, 딸들과 함께 중년의 남자에게 심각한 고뇌가 들이닥치는데 디센던트에서의 배 나온 중년 맷을 연기한 조지 클루니는 진정 배우였다. 어쩐지 조지 클루니는 변호사로 분하면 영화에서 해내는 것 같다. 마치 송광호는 영화 속에서 아내가 없어야 하는 배우처럼 말이다. 디센던트에서 큰 딸은 우리나라의 누군가를 떠 올리게 만드는 쉐일린 우들리가 나온다. 아직 얼굴이 어린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이후 주조연을 꿰차며 점점 섹시해져간다

.

 

서버비콘에서는 당연하지만 줄리안 무어를 봐야 한다. 그녀의 연기. 캐리에서 종교에 접합한 여자의 연기,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는 눈먼 자들 속에서 홀로 시야를 확보한 여자의 연기, 킹스맨에서의 액션 연기 등. 줄리안 무어는 다큐영화 ‘감독 알트만’에도 나온다. 알트만 감독과의 인연은 아주 오래전 영화 ‘숏컷’에 정말 마르고 어린 줄리안 무어가 나온다

.

 

영화 ‘숏컷’에는 잘 나가는 미국 배우들이 대거 나온다. 아이언맨인 다웃 주니어의 아주 젊은 모습도, 앤디 맥도웰도 팀 로빈슨도 매들린 스토우도, 쓰리 빌보드의 프란시스 맥도맨드의 젊은 모습이 마구, 온통 나온다. 숏컷은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을 이어붙여 만든 로버트 알트만의 영화로, 영화의 주 골자는 ‘별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이 흐르고 있고 레이먼드 카버의 여러 단편 소설이 골자의 주위 곁가지에 붙어서 나온다. 그러면서 소설을 헤치지 않고 영화에 빠져들게 알트만은 알트만식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3시간이 지루하지 않을 것이다

.

 

엔디 맥도웰이 빵집에서 아들이 죽었다고 말하는데 배를 채우라며 빵을 준다. 그리고 별것 아니지만 도움이 된다는 이 말은 많은 영화에서 한 것 같다. 밥은 먹고 다니냐,부터 독전에서도 밥들은 먹었냐까지. 영화 숏컷에서 줄리안 무어는 무척 젊은 모습인데 다 보여준다. 싹 다 보여준다

.

 

영화 서버비콘은 서버비콘이라는 살기 좋은 곳이라 광고하는 마을에서 일어나는 해프닝인데 자매인 두 명의 줄리안 무어 중 한 명의 줄리안 무어가 사고로 죽는데, 사건으로 번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경찰서에서 범인을 확인하는데 어린 아들이 범인의 얼굴을 보면서 일이 점점 틀어지기 시작한다. 생각지도 않는 곳에서 엉뚱하게 사고가 터지고 그 사고가 또 다른 기이한 사고를 낳는데, 이런 모습은 김지운 감독의 처녀작인 ‘조용한 가족’과 흡사하다. 조용한 가족 역시 봐도 봐도 재미있는 영화로 상황이 상황을 낳고 그 상황이 더 한 상황으로 빠지면서 절대 조용할 수 없는 가족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도 상황이 상황으로 연결되며 이야기를 끌어가는 경우가 많다. 첫 소설이 존 레넌에 대한 이야기였던 거 같은데 내용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소설에 반해버린 기억은 있다. 이후 오쿠다 히데오의 여러 소설을 읽었는데 부산을 좋아해서 부산에 자주 와서 냉면이나 밀면을 먹고 가기도 한 그는 자신의 소설에 무라카미 하루키도 등장시킨다. 은근히 질투하며 존경하는 것 같다.

 

조지 클루니는 감독으로 영리하다고 느껴졌다.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에서도 그 당시의 미국의 중산층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평범하고 그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미국인들이 그 당시에 중산층에 도달하기 위해, 그리고 중산층에 도달해서 그것을 지키려고 하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 미국은 중산층이 이끌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중산층이 무너지면 미국은 무너진다. 아직 컴퓨터가 보급되지 않은 시대로, 살기 좋은 마을 서버비콘에서도 인종차별은 심한 미국의 모습을 조지 클루니는 잘 만들어냈다. 살찐 맷 데이먼의 연기도 볼 수 있고, 조지 클루니가 감독을 했고 줄리안 무어가 나오잖아. 그럼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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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동안 버닝을 여러 번 봤다. 해미와 종수는 언어습관이 억울하고 비굴한 일이 많은지 곧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말을 한다. 바늘로 툭 건드리면 마치 눈물이 탁 터져버릴 것 같다. 그 울음이 분에 차서 나오는 울음인지 환희에 차올라 나오는 눈물인지는 모른다. 그에 비해 벤은 유쾌하고 망설임이 없다. 이창동의 세계에서 보면 이전 영화에서도 서민의 얼굴은 늘, 어쩐지, 지극히 그러했다.

이창동의 버닝을 보고 있으면 당연하지만 윌리엄 포크너의 ‘헛간 타오르다’와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가 동시적으로 드러난다. 스스로 눈을 감는 것과 어떤 무엇인가에 의해 눈이 감기는 것에 대한 고찰 같은 것들이 영화 속 여기저기에 몸을 웅크리고 도사리고 있다. 그걸 손으로 쑥 끄집어 내는 재미가 있다.

윌리엄 포크너의 세계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를 그동안 죽 겪어봤다면 이창동식 버닝에 몸과 마음이 활활 타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해미의 대사에도 나오지만 죽는 건 무섭지만 노을처럼 활활 타서 사라지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일지도 모른다. 이 세상은 결락을 지닌 존재와 좀 더 깊은 결락을 지닌 존재가 있는 곳이니까. 하루키는 전체는 있지만 일부는 사라져버린 현대사회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그간 소설에서 한 것 같다. 내가 쓰고 있는 단편소설의 주인공이었던 문예부 기철이 녀석 역시 그 시절에 윌리엄 포크너에 늘 빠져 있었다.

헛간 타오르다는 보면 아주 고집불통의 완고한 아버지가 나온다. 주인공 ‘나’는 분노조절이 되지 않아 지주의 헛간에 불을 지르는 아들로 완고한 아버지를 닮았지만 또 평화로운 삶을 바란다. 아버지의 완고함은 가부장적이 아니더라도, 그 반대적인 친밀한 아버지의 모습일지라도 어찌 보면 완고한 모습을 가지게 된다. 이 완고함이 가정을 이루고 그 벽이 깨지지 않게 지탱하는 모태가 되기도 한다. 학창시절에 꼴보기 싫었던 아버지의 모습도 막상 나 자신이 아버지가 되고 나면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듯 그런 모습을 하고 있다.

팬터마임, 고양이, 우물, 춤을 추는 무희가 해미를 나타내는 기호들이다. 이런 수식어를 이창동은 하루키에게서 잘 떠왔다. 망가지지 않게 그릇에 잘 담아와서 그것을 화면에 골고루 펼쳐서 해미를 만들어냈다. 해미는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에 나오는 그녀로서, 여러 사람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것이 영화 속에서 말하는 동시 존재이기도 하다. 나 자신을 지칭할 때 저는 이런 사람, 또는 이건 싫어요, 이건 좋아요, 이 맛은 꽤, 이건 별로,라고 할 때 그것이 정말 나 자신인지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상대방에 따라 내가 싫어도 상대방이 좋아하면 따라가는 경우가 있고, 나를 가장한 내 속의 또 다른 추한 마음의 내가 있다는 것도 안다. 내 속에도 여러 명이 동시 존재하고 있다.

해미는 마치 상실의 시대의 미도리의 모습처럼 보인다. 메타포가 뭐지? 하면서도 종수에게 자신도 모르게 꽤 많은 메타포를 안겨준다. 종수는 그 메타포의 끈을 잡고 해미를 찾으려고 한다. 그런 모습은 양을 쫓는 모험에서도, 댄스댄스댄스에서도 심지어는 15살 소년 카프카에서도 잘 나타난다.

벤의 모습은 이 사회의 중심이 되는 하나의 구심축 같은 존재다. 어느 시대에나, 어느 나라에나, 어느 시점에도 존재하는 축. 물질로 이루어져 사람들을 돌아가게 만들고 사람들이 그 축을 따라 움직이며 서로 공격하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하는 거대한 사회의 중심이 되는 축. 굳건한 진실 같은 것이다. 절대 무너지지 않고 단단한 물질로 이루어져 시대가 아무리 흘러도 구성원만 바뀔 뿐 근간을 이루는 물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 축은 동시에 우물 같은, 무서운 것이기도 하다. 세계의 곳곳에 있는 우물에 한 번 빠지면 어둠에 갇혀 위를 보며 언제 빠져나갈지 모르는 공포에 갇혀 시간을 보낸다. 그 속에서 흔들리는 가능성 하나만 믿고 누군가를 기다리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진실과 마주한 현실이 무섭기만 하다.

마지막으로 해미는 남자에게 휘둘리지 않는다. 벤에게도 종수에게도 해미는 자신의 주관대로 움직이고 행동한다. 이창동 감독은 해미를 비추는 빛, 조명을 결핍되게, 모자라게 해미를 표현함으로 해미는 일반적인 사람과는 다름을 말하지만 자연의 빛을 받은 해미는 그야말로 자연의 아름다움이 된다. 해미는 혼자 스스로 노을이 되어 타올랐는지, 아니면 어떤 무엇에 의해서 타버렸는지 모른다. 하지만 해미는 이 세상은 결락을 지닌 존재와 좀 더 깊은 결락을 지닌 존재가 같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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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 싫은 소리가 있다면 그건 타인의 웃음소리다. 나에게는 절대 나올 수 없는 웃음소리. 음산하면서 마치 나를 향해 깔보는 말들을 흘려보내는 것 같은 웃음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있다.

무라카미 류는 무의식중에 들리는 웃음소리는 폭력에 가깝다고 했다. 히히히히, 킥킥 킥킥, 크크크크 같은 웃음소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근처에서 계속 들린다면 아마도 누구라도 돌아버릴지도 모른다. 꼭 나에게 하는 지랄맞은 말 같아서.

씨발 나는 해미를 사랑한다구요. 종수가 애타게 말을 하지만 벤은 큭큭큭큭 웃으며 대마를 피운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으니 안 그런 척 하지만 나 이외의 사람들은 멸시당해도 지극히 당연하다는 웃음. 킥킥 킥킥 거리며 웃는 소리는 귀로 들어오는 게 아니라 피부를 통해서, 내 얼굴에 뚫려 있는 구멍을 통해서 기어 들어온다. 마치 벌레처럼.

종수는 복수를 하는 것이 아니다. 종수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종수가 말했다. 나는 아버지를 미워하다고, 아버지는 분노조절장애가 있다고 말이다. 그래서 한 번 터지면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다고 말이다. 종수는 그런 아버지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걸 알고 있다.

가진 게 없어도 재미를 위해서 여행을 가고 팬터마임을 배우는 해미는 재미를 위해서 무엇이든 하는 벤과 어울리지만 종수는 낄 수 없다. 공항에서 곱창집으로 가면서 벤은 엄마와 통화를 하면서 우수한 DNA를 이어받았으니 걱정하지 말라며 종수가 가지지 못한 엄마와 웃음을 난타한다. 종수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분노조절로 구치소에 간 것처럼 자신도 그런 아버지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다는 것을. 해미 이전의 해미들이 벤의 서랍 속에서 사라져갔다는 것을. 유전자는 내면의 호러인 것을.

사람들은 버닝이 미스터리하고 애매해서 어렵다지만 실은 버닝은 구체적이어서 어려울지도 모른다. 모든 장면과 대사가 구체적이고 구체적으로 다 나타난다. 단지 너무 가까이 있어서 구체성을 사람들이 찾지 못해서 어려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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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르르르릉
“여보세요.”
나는 잠결에 전화를 받았다. 내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 있는 긴 얼굴의 누군가에게 닿았을 테지만 아무런 소리도 말도 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집으로 온 후 벌써 몇 번째 이런 전화가 오고 있다.

아버지는 자존심 때문에 곤란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변호사는 말했지만 실은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집을 나간 이후 더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아버지는 나와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도 마치 나 이외의, 내 뒤에 있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건 꼭 나를 가장하고 있는 아버지의 유전자를 잉태하고 아버지의 모습으로 나타난 아버지 자신의 또 다른 모습에게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나와 이야기를 하지만 아버지는 지극히 공허와 대화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남은 삶을 세상과 타협을 하며 살아가는 방법이라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버지 자신의 자기방어 기저를 만들었고 그건 아버지 자신에게 어떤 면으로(생활에 대해서) 미저러블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아버지에게 장소는 중요하지 않다. 아버지는 이미 장소를 옮겨 다니고 있을 지도 모른다. 전화를 하는 건 아버지일지도 모른다. 아버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나의 착각이라는 것을 알지만 아버지는 나에게 공허를 통해 무엇인가 말을 하려고 한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전화를 하는 건 벤일지도 모른다. 벤에게서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매일 잠이 들면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꿈을 꾼다. 벤은 두 달에 한 번쯤 태우는 페이스가 제일 좋다고 했다. 당연하지만 남의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것, 범죄행위를 저지르는 것, 명백한 범죄 행위, 이 명백하고 사실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건 너무나 간단한 것이라 했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게 할 수 있다고 했다.

해미가 그랬다. 원래 없는 것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 형태를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없는 그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를 생각하지 않는 것. 벤이 하는 말을 듣고 어쩐지 해미가 한 말이 떠올랐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게 하는 것. 그건 어쩌면 나는 원래 나오지 말았어야 했을지도 모를 인간이었는데 아버지의 유전자를 옮겨 받아서 후세에 그것을 다시 옮겨주는 어떤 냄비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벤은 뭘 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포르쉐를 몰고 다니며 좋은 집안에 태어나서 늘 유쾌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인간인지 알 수 없었고 집에 친구들을 초대해 와인파티를 한다. 일정 시간을 들여 좋은 곳에 위치한 짐에서 운동을 해서 에너지를 소모했다. 여자들이 싫어할 리 없는 종류의 인간이다. 벤이란 그런 인간이다. 그렇게 타고 난 인간이다. 세상에는 그런 인간이 있다. 이미 그런 인간은 정해져 있다. 그렇게 정해져 있는 인간에게 세상의 어떤 틀은 그런 인간을 어쩌지 못한다.

해미도 벤의 주위에 감도는 그런 분위기에 그만 끌리고 말았다. 밖에서 보면 옅은 물이지만 막상 발을 담그면 무릎까지 차올라 놀라게 되는 그런 몹쓸 개울물에 해미는 들어간 것이다.

큰 비닐하우스가 다 타는 데 십 분도 걸리지 않는다. 벤은 대마초를 흡입하고 연기가 뇌를 건드리기도 전에 그런 말을 했다. ‘나’라고 하는 비닐하우스를 만드는데 이만큼의 시간이 걸렸어도 사라지는 건 일순간이다. 십 분 정도 만에 나는 사라질 수 있다. 범죄행위란 해보지 않는 이상 간단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는 없다.

나는 어릴 때 엄마의 옷을 아버지가 태우라고 해서 직접 태운 적이 있다. 나는 그 말을 벤에게 했다. 엄마의 옷을 태우는 꿈을 꾼다. 엄마의 옷은 불이 붙자마자 홀라당 타서 없어졌다. 엄마의 깊은 냄새가 배어있는 옷은 그을음으로 바뀌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버지와 나는 홀랑 타고 있는 옷을 지켜본다. 타 없어지는 것, 타고 남은 재도 사라지고 나면 그을음으로 동력 삼아 우리는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것의 또 다른 이름은 추억일지도 모르고 미미하게 남은 그리움이라 부를지도 모른다.

해미를 만나고 벤을 알고 난 뒤부터 나는 고립이라는 것에 들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이대로 홀랑 타서 죽어버리는 것보다 이대로 두 사람의 주위에서 고립된 채 영원히 살아가는 것이 무섭다. 그것이 나에게는 무서운 일이다. 해미는 벤을 만나기 이전에는 나를 좋아했다. 나의 페니스에 콘돔을 끼워주던 혜미의 손길을 나는 기억한다. 보일이의 밥을 챙겨주러 들어가면 집 구석구석 박혀있는 해미의 냄새에 도취되어 나는 자위행위를 했다. 그 순간은 절실하게 해미를 떠올릴 수 있었다.

“한국에는 비닐하우스가 정말 많아요. 쓸모없고 지저분하고 눈에 거슬리는 비닐하우스는 몽땅 내가 태워주기를 바라고 있어요. 그리고 나는 그 불타는 비닐하우스를 보며 희열을 느끼는 거예요.” 벤은 말을 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난 다 알고 있어, 하는 표정의 미소.
자신의 손을 심장 가까이 대고 뼛속까지 울리는 베이스가 있다고 했다. 그건 뭘까. 그건 정말 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태.우.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그건 형이 판단하는 거예요?”
“나는 판단 같은 것은 하지 않아요. 그냥 받아들이는 거죠. 그것들이 태워지기를 기다리고 있다는걸. 거기에 옳고 그름은 없어. 자연의 도덕만 있지.”
“자연의 도덕이요?”
“자연의 도덕이란 동시 존재 같은 것이에요. 나는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는 거”
나는 지금 벤과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나는 여기에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나의 모습이 여기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나면 나는 여기에도, 지금 잠들어 있는 해미의 몸속에도 그리고 아버지가 있는 구치소에도 있다.

남자들 앞에서 가슴을 드러내 놓고 춤을 추고 그래, 창녀나 옷을 그렇게 벗는 거야.
내가 왜 그런 말을 해미에게 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날 이후 해미는 보이지 않는다. 해미는 완벽하게 사라진 것이다. 흔적도 없고 가방도 두고 아프리카에도 가지 않고 그대로 어딘가에 동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휴대전화로 해미에게 온 전화로는 해미라는 것을 알 수는 없었다. 마치 생령이 나에게 전화를 하여 어떤 메타포를 던지고 간 것 같았다.
윌리엄 포크너가 그랬다. 인간의 오류는 몰라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다 안다고 착각하는 데서 오는 것이라고.

설령 나의 착각이라 할지라도 나는 해미를 찾아야 했다. 나는 어릴 때 해미에게 못생겼다고 말했다고 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이 없는 것일 뿐 내가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다. 해미가 잘못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역시 나의 착각일 것이다. 해미는 그런 말을 나에게 들었고 나는 그런 말을 해미에게 해 버렸다. 어린 해미에게 나는 상처를 준 것이다. 해미는 그 상처를 입고 어딘가에 풀지도 못한 채 어른이 되어 버렸다. 나는 해미에게 그 상처를 풀어주기 위해서라도 해미를 찾아야 했다. 나는 해미를 좋아하게 되었으니까. 해미의 미소와 담배피우던 모습과, 나에게 말을 할 때 눈빛과 나를 잡아주던 손길을 나는 사랑하게 되었다.

이후 꿈을 꾸면 비닐하우스를 태우고 있는 어린 나를 바라보는 꿈을 꾼다. 그 비닐하우스에 불을 낸 사람은 나는 아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불을 낸 것처럼 희열을 느끼며 바라보고 있다. 그 어린 종수를 나는 쳐다보는 꿈이다. 어린 종수는 어린이 되어 버린 어른 유전자의 종수를 태우며 희열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꿈을 꾸고 나면 개운하지 않게 일어났다. 마치 잠이 들면서 현실의 비닐하우스를 끌고 꿈속으로 들어가 꿈속과 현실이 뒤섞여 몹시 불편한 현실의 자투리처럼 느껴졌다.

나는 비현실의 비닐하우스를 태우면서 현실의 비닐하우스를 찾아 다녔다. 벤이 태웠을 비닐 하우스가 있는지. 그는 가까이 있는 비닐하우스를 태우며 희열을 느낀다고 했다. 바람에 힘 없이 날리는 쓸모 없어진 현실의 비닐하우스 속에 들어가 있으니 결락감이 몸으로 파고들었다. 결락은 차갑고 무서워서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지만 몸이 덜덜 떨렸다.

낡고 못쓰게 된 비닐하우스를 바라보고 있으니 비닐을 통해서 내 모습이 읽어졌다. 그리고 해미의 모습도. 변변찮은 동네의 변변찮은 집에서 변변찮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변변찮은 유전자의 모습이 비닐하우스 속에 있었다. 아무리 발버둥을 치고 노력을 해도 결국에는 몹쓰고 볼품없는 비닐하우스가 될 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원래대로, 원래 이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비닐하우스는 태워지기를 바라고 있다. 포근하면서도 불안한 비닐하우스는 언젠가 태워질 것이다. 아주 빠르고 깨끗하게, 십 분만에 타 없어질 것이다.  

너무 가까워서 놓칠 수 있다. 너무 가까우면 안 보일 수 있다. 벤은 그렇게 말했다. 너무 가까이 있어서 우물을 놓치고 해미를 놓쳤다. 너무 가까우면 안 보인다. 해미가 너무 가까이 있어서 보이지 않는다. ‘너무’라는 부사는 너무 어둡고, 너무 크고, 너무 깊은 것과 어울렸던 부정적인 투영을 나타내는 부사다. 해미는 나에게 너무 가까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해미를 놓치고 만 것이다.

해미는 마지막으로 나에게 전화를 했다. 그렇지만 그것이 해미가 전화를 한 것인지, 해미인지 아니면 해미를 가장한 누군가인지 알지 못한다. 해미의 방은 나와 해미가 나눴던 그 방이 이미 아니었다. 서울타워의 유리에 비친 햇빛이 아슬하게 들어왔던, 위태로운 해미의 숨결이 남아있는 방이 아니었다. 그녀를 찾아야 했다. 보일이처럼 영원히 보이지 않게 되기 전에 해미를 찾아야 했다.

문득 해미가 아주 가까이 있는 비닐하우스라는 생각이 들었다. 벤의 집 화장실에서 해미의 손목시계를 보고 나는 깨달았다. 해미 이전의 해미들이 서랍속에는 가득하다는 것을. 정말 너무 가까이 해미가 있어서 놓친 것이다. 이 세계는 수수께끼 같은 곳이다. 혼잡한 세상 속에서 나 하나쯤 타 없어진다고 해도 사람들은 관심도 없다. 쓸모없는 유전자를 물려받은 냄비에 지나지 않는 육체는 타 없어지는 게 맞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해미는 안 된다. 해미에게 창녀라고 해서 상처를 줬던 것도 사과를 해야 한다. 벤이 끼어들면서 상처받은 내 마음도 털어놓고 싶다. 해미를 찾아야 한다. 이제 소설을 쓸 수 있다고, 너와 함께 다시 한 번 더 잠자고 싶다고 말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찾아야 한다.

애초에 집으로 전화를 건, 수화기 너머 긴 얼굴의 사람은 해미일지도 모른다. 해미는 거기에 있으면서 내가 있는 곳에 전화를 한 것이다. 나에게 무엇인가 말을 하기 위해서, 나에게 손을 내밀기 위해서, 나에게 입은 상처를 제대로 나에게 표현하기 위해서 전화를 한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태우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태우고 나면 그 후에는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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