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알탄 사나이 3탄은 그야말로 패러디의 향연이다. 패러디만으로도 영화를 만들 수 있다니. 이 영화는 가벼움이다. 가볍게 보고 웃고 즐기자는 것이다. 그러니까 400미터 계주에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가 달리고 있다. 2등과 많은 차이로 1등을 달리는 미국이 300미터에서 가볍게 달리는 것 같은 영화다. 당시에는 미국의 중산층들이 80년대를 거치면서 앞만 보고 달려온 덕분에 제2의 부흥기를 맞이했다. 걸프전을 거쳤고 총알탄 사나이1탄에서 역시 첫 장면에 미국이 지정한 악의 축을 레슬리가 때려잡는 것도 패러디화시켰다
.

미국은 무기의 나라다. 아이언맨 1편에서처럼 미국은 무기를 각국에 팔아서 강대국이 되었다. 그래서 전쟁이 끊어지면 안 된다. 끊임없이 세계대전이 곳곳에서 일어나야 미국은 더욱 강대국이 된다. 그렇다면 세계인들에게 일본은 어떤 나라일까. 소니의 나라? 미쯔비시의 나라? 일본은 스시의 나라다. 이탈리아는 페라리? 패션? 아니다 우리도 이탈리아를 파스타의 나라로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한국을 삼성이나 현대의 나라로 알고 있는 세계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삼성은 알아도 삼성이 한국이라는 것은 당연하지만 관심이 없다
.

무기의 나라가 미국, 그래서인지 2000년대를 넘어서 나오는 영화 속 백인이나 미국인은 되려 악의 축으로 몰리고 있다. 2010년 이후부터는 그 모습이 확실히 표가 나는데 이것 역시 상당한 클리셰다. 영화 동주나 박열에서처럼 일본인이라 해서 모두가 악이냐 그렇지 않다
.

레슬리가 26년 생인 걸 감안하면 94년에 나왔다고 해도 꽤 많은 나이다. 그럼에도 레슬리의 익살스러운 표정과 과한 동작과 능청스러운 연기로 관객에게 가벼움을 주었고 웃음도 주었다. 미국의, 미국식 코미디가 티브이, 영화에서 정점을 이루던 시기였다. 천재소년 두기에서도, 캐빈은 12살에서도 미국식 코미디가 주를 이루었다. 비버리힐즈의 아이들에서 섀넌 도허티마저 코미디식 대사로 인기를 얻었다. 16년에 암 투병 중이라는 기사가 있었는데 이겨내고 나았으면 좋겠다
.

어떻든 총알탄 사나이 3편는 패러디의 가벼운 미국식 팝콘 영화다. 델마와 루이스의 일탈을 꿈꾸지 않아도 된다. 지금에서 이 영화를 이야기를 할 때는 배우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주인공인 레슬리 닐슨은 지금은 죽고 없다. 안나 니콜 스미스도 고인이 되었다. 미국의 새간에서는 안나 니콜 스미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좋아한다. 먼로가 환생했다고 믿었던 안나 니콜 스미스는 결혼도 생활도 그리고 죽음마저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불행하면서도 덜 불행한 배우일 것이다. 안나 니콜 스미스가 방송대상 같은 곳에 나와서 말을 하면 사람들은 욕을 했다. 그 허느적 거리는 말투와 풀린 눈과 버튼을 누르면 확 다 벗겨질 것 같은 옷. 하지만 그게 안나 니콜 스미스였다. 폭행, 성폭행, 자유와 인권의 나라 미국에서 마저 여자는 핍박받고 당하고, 재벌가와의 결혼, 재산 분쟁, 약물중독, 알코올중독, 어린 아들의 죽음. 멀쩡하다면 오히려 이상해야 할. 안나 니콜 스미스의 말투는 귀엽고 마음에 들기까지 했다. 왜 저를 가만두지 않나요? 이 말이 미국이라는 나라를 말해주는 것 같기도 했다
.

그리고 영화 속 프랭키의 아내로 나오는 프리실라 프레슬리. 그녀 역시 총알탄 사나이 3편을 끝으로 영화계에서는 주연으로서의 은퇴를 한 것 같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아내로 마이클 잭슨의 아내였던 리사마리 프레슬리를 낳았다. 프리실라가 엘비스와 결혼하게 된 이야기가 재미있다. 군 복무 시절 엘비스가 아직 미성년자였던 프리실라에게 반하여 프리실라 아버지를 찾아가 자신이 프리실라가 학교를 제대로 졸업을 시키겠다는 약속 하에 결혼을 허락받았다. 그렇게 프리실라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가 67년. 68년에 리사마리가 태어난다. 행복하게만 보이는 엘비스와 프리실라. 미국은, 아니 전 세계는 들썩였다
.

하지만 두 사람의 결혼은 오래가지 못했다. 엘비스는 그렇게 미인인 아내와 예쁜 딸을 두고 여자 문제가 심했고 술과 약물에 시달렸다. 프리실라를 두고 투어를 다니며 염문을 뿌렸다. 외로운 프리실라. 결국 두 사람은 별거에 들어가고 결론은 예상대로였다. 정말 뻔하지만 슈퍼스타들의 결혼 생활은 오랫동안 이어지지 않는다. 미국도 일본도. 홍콩도 중국도. 그에 비한다면 한국의 중년 스타 커플들은.
엘비스가 죽고 나서도 프리실라는 그의 죽음이 그녀의 탓이라고 사람들에게 질책을 받으면서 고통을 받았다. 그러다가 총알탄 사나이 시리즈에서 발랄한 모습으로 나타났기에 사람들은 영화의 맥락, 재미, 완성도를 떠나 좋아했다
.

레슬리는 사실 그렇게 많은 나이에 죽은 것은 아니다. 84살에 고인이 되었다. 폐렴으로 앓다가 합병증으로 사망하게 되었다. 레슬리는 아나운서 출신이다. 총알탄 사나이에서도 그렇지만 무서운 영화 4에서도, 드라큘라 페러디에서도, SF물까지 건너가서 패러디를 해서 레슬리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준다. 지금 본다면 그렇게 웃음이 나오지 않는 것은 패러디 코미디는 타이밍이 중요하다. 근간의 사람의 기억 속에 들어있는 장면과 대사를 패러디를 해야 사람들에게 웃음을 줄 수 있는 것이다
.

영화배우는 매력적인 직업이다. 여러 사람의 인생을 살아야 하고 내가 아닌 제3자의 인생을 대신 사는 동안은 죽어서도 다쳐서도 안 되는 운명을 지닌다. 그렇기에 최선을 다해 연기를 했다면 관객들은, 사람들은 응원을 하고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린다. 그런 영화배우만큼 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리는 사람이 코미디언이라 생각한다. 채플린이 그런 코미디를 펼치기 위해 삶은 얼마나 정확하고 처절하고 지루하지만 담백했는가. 코미디는 인간의 삶과 유사하다. 코미디는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채플린의 말이 떠오른다
.

이제 한 화면 속에서 레슬리, 프리실라, 안나 니콜 스미스가 같이 있는 모습을 볼 수는 없다. 그렇지만 영화는 그게 가능하게 해준다. 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돌려 볼 수 있게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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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로물에서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는 빌런이다. 빌런은 보수적인 경향을 지니려는 슈퍼히어로들의 반대편에서 기존의 틀과 질서를 비틀고 파괴하여 변화를 꿈꾸고 변혁을 이루려 한다. 판타지 히어로물의 빌런은 공리주의 성향을 지니고 있으며 빌런을 보는 우리들은 쳇 바퀴 돌듯 돌아가는 일상에서 일탈을 꿈꿀 수 있게, 이상주의적인 동기부여를 주기 때문에 사람들은 빌런에게 매력을 느낀다
.

다스베이더도, 한니발 렉터 박사도, 에일리언도, 히스 레저의 조커도, 모두가 영화의 중심이었고 극을 이끌었고 무엇보다 사람들에게 그들의 매력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했다. 작금의 이 답답하고 도저히 변하지 않을 것만 같은, 딱딱하고 갑갑하고 차별이 심하고 힘없는 자가 핍박받는 이 세상의 틀을 깨버릴 것만 같다. 우리는 그런 매력적인 빌런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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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데드풀의 웨이드는 슈퍼히어로이면서 빌런의 성향을 지니고 있다. 슈퍼히어로 영화인데 19금을 걸고 끝도 없이 내뱉는 씨발과 가좆과 걸핏하면 사람의 머리에 총구멍을 낸다. 애초에 액스맨 울버린의 탄생에 잠깐 등장한 데드풀을 영화로 만들기로 했기에 실험적으로 탄생한 데드풀 웨이드는  액스맨을 욕하며 성인 취향을 파고들었다
.

웨이드는 빌런보다 더 악당스럽다. 이 영화의 히어로는 모순이다. 빌런이라고 등장한 케이블은 침묵을 지니고 있다. 영화는 빌런의 경계를 허물어트림으로 모순과 침묵이 (잘 안  되지만)밸런스를 맞춰가려 하며 영화를 이어간다
.

데드풀의 웨이드는 항상 밝다. 유쾌한 인물이 웨이드다. 이 유쾌함이 웨이드가 지니는 동전의 앞뒤 면이다. 암이 온몸에 퍼져 감에도 바네사를 잃어버리고서도 웨이드는 시종 밝은 모습이다. 사실 뭐랄까 그런 웨이드의 모습을 보면서 감정이 이입이 되어 버렸다. 꼭 저 꼴이 나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주위에서도 이렇게 밝은 사람, 늘 통통 튀고 항상 웃고 눈이 맑은 사람이 아픔이 깊고 너무 커서 누군가에게 말도 못 하고 혼자서 힘들어하다가 좌절하는 경우를 봤다
.

오히려 늘 힘들고 매일 죽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은 의외로 늘 잘 지내는 경우가 많다. 정말 힘들고 절망이 깊으면 그런 말 자체를 못한다. 나 힘들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나는 사실 아직 힘들지 않다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정치인들이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라는 말과 비슷하다. 그 말은 우리는 책임이 없습니다.라는 말과 같으니까
.

데드풀의 웨이드는 어쨌든 밝다. 자신의 아픔도 미화로 승화시키고 뭣 같은 상황도 그대로 받아들인다. 마지막에 정말 죽음으로 가고 싶어서 능력을 소거시키는 목걸이를 차고 총알을 맞는 것을 보면 유쾌함 뒤의 어두운 면을 볼 수 있었다. 웨이드가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 이유는 바네사 때문이다. 1편에서도 그렇지만 이 두 사람의 사랑은 가난하지만 당당하고 거침없고 정말 아름답다. 이런 모습이 눈물을 나게 한다. 환경이 너무 안 좋기에 두 사람의 사랑은 더 반짝거린다. 두 사람의 사랑에는 여자친구가 토플리스에서 일을 해도, 남자친구가 암세포가 온몸에 퍼진 쭈글쭈글한 얼굴을 가진 욕쟁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의 사랑을 막을 순 없다. 그들은 앞뒤 재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사랑한다. 두 사람은 가난하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가난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고 그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그들의 사랑을 찾는 모습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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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은 모든 것을 뛰어넘고 기괴하고 음산하면서도 서로의 몸을 만지고 사랑을 나누었던 아름다운 사랑의 모양이었던 셰이프 오브 워터를 떠올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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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드풀은 제4의 세계를 넘나든다. 데드풀은 영화를 통해서 자신의 욕망을 관객에게 말하고 있다. DC 유니버스에서 온 거냐느니, 설정에 문제가 있을 법 했을 때 카메라를 보며 대본 대충 쓴다며 쓴소리를 한다. 데드풀은 히어로물에 대해서 경종 같은 것을 던지기도 한다. 도대체 관객은 언제 로봇 팔에 질리는 거야? 데드풀은 관객의 욕망을 대신하기도 해서 보면서 웃음과 좋은 기분을 끌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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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히어로물은 인기가 곧 줄어들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히어로는 판타지 히어로물이다. 사람들은 간절히 히어로를 바란다. 불타는 집에 뛰어 들어가서 사람을 구출하는, 학대받는 아이를 구해내는, 성폭력으로 망가진 인생을 바로잡아주는, 우리 주위의 숨은 히어로들을 우리는 바라고 있다. 이 강호의 고수 같은 히어로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릴 수 있는 것은 영화이며 소설이다. 슈퍼 히어로의 고뇌는 깊을 수밖에 없다. 다크나이트에서처럼 하비와 레이첼, 둘 중 하나를 선택해서 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위험에 처했을 때 둘 다 구해낼 수 있는 그 주위에 숨어 있는 우리의 히어로들
.

데드풀 2는 다른 슈퍼히어로물에서처럼 대단한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 영화의 사건은 농담 같은 것이다. 큰 틀을 비틀고 거창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러셀을 두고 일어나는 하나의 작은 해프닝이다. 그리고 이 영화의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는 도미노다. 도미노는 등장부터 슈퍼히어로의 슈퍼파워는 그저 운이라고 한다. 그게 관객에게 데드풀이 하는 말이다. 대체로 모든 슈퍼히어로의 능력은 운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빌런을 물리치고 세계관을 바로 잡아가는 것 역시 운이라는 것이다. 설정이나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그저 보라는 것이다. 슈퍼히어로물은 보며 즐기고 웃을 수 있는 팝콘무비이니 재미있게 봐라. 와이 낫. 을 도미노를 통해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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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상대를 전혀 모른다는 것에서 온다. 가령 세계 챔피언에게 도전하는 도전자는 공포가 덜하다. 그건 챔피언의 스타일을 연구하고 그간 봐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혀 이름도 모르는 신인이 링에 올라서면 그 공포가 더 하다고 한다
.

공포는 인간의 초석을 이루는 감정이다. 공포는 인간뿐 아니라 생명을 지니고 있는 생명체는 모두 느끼고 있다. 공포는 우리가 느끼는 그 외의 감정, 기쁘고 슬프고 즐거운 감정보다 더 위에 있는 감정이다. 공포에 비한다면 다른 감정은 감정이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로 가장 큰 감정이다. 공포에 빠져 코마 상태에 있다가 나온 사람들의 공통점은 기뻐하지도 슬퍼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두려워하는 것, 그것뿐이다
.

공포의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 공포는 인간이 지구에 나타난 그 순간 공포를 죽 느꼈다고 한다. 길게 이야기할 순 없지만 프로이트의 글을 봐도 최초 인간이 군락을 만들고 거기서 우두머리를 만든 이유도 우리 인간이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바람이었다. 공포의 근원은 생존에 있다. 영화 포스 마쥬어를 보더라도 인간이 생존에 위협을 급박하게 당하게 되면 공포에 뇌가 공격을 당해 그런 행동을 하게 된다
.

그것은 우리 인간, 사람을 포함한 생명체의 기저에 깔린 본능은 생명을 유지시키고 죽음을 최대한 배제하게끔 프로그래밍이 되어있다. 이 근본적인 공포를 멀리하고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한다. 공포를 잊기 위해 뇌를 속이는 것 역시 어렵다고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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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어떨 때 공포를 느낄까. 엘리베이터에 갇혔을 때에도 그렇지만 가장 근원적인 공포를 느끼는 것은 직접적으로 신변에 위협을 받았을 때이다. 누군가 칼을 들고 위협을 한다거나, 정신질환자가 삶을 포기해 무차별적으로 죽음의 위협을 가한다거나 또 물에 빠져 죽기 직전에 인간은 극한의 공포를 느낀다
.

이런 상황에서 인간은 위협이 있다고 착각할 때에도 공포를 느낀다. 간접적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낄 때에도 공포를 느끼게 된다. 우리의 뇌는 보이지 않는 상황에 속기 쉽게 만들어졌고 학습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공포는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방어를 하게끔 한다. 겁을 집어먹을 수밖에 없는 하찮은 존재 인간이 공포가 있기에 조심하게 되고 한 번 더 사고하게 된다. 공포는 인간의 방어 기저와도 밀접한 관계를 두고 있다
.

그리고 미지의 세계관에서 공포를 느낀다. 미지의 존재. 최초에 말했듯 아무것도 모르기에 미지에의, 이종의 공포는 클 수밖에 없다. 공포는 찬동하게 되고 동조한다. 친구가 무서워하면 같이 무서워한다. 으슥한 밤에 이야기 잘 하는 사람이 무서운 이야기를 하면 모두가 찬동하게 된다. 공포는 뇌를 속이고 동조를 이끌어 내기에 영화에서의 공포는 모두가 하나로 모으는 찬동이 가능하다
.

하지만 미지의 존재, 이종계로 인간을 끌고 가는 이야기는 너무 뻔한 이야기다. 이 뻔한 이야기가 엑스파일을 넘어설 수 없다. 두 시간 안에 엑스파일에서 보여줬던 숨 막힐 듯 조여오는 구성과 인간과 이종 사이의 대립과 간극에서 감탄을 불러들일 만큼의 사건을 보여줄 수는 없다. 하지만 너무 뻔하기 때문에 실패할 확률은 적을 수 있다. 어딘가 놀러 가서 새로운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보다 라면을 끓여 먹는 것이 맛이 더 좋을 수 있다. 라면의 맛은 너무 뻔하기 때문에 실패하지 않는다. 너무 뻔하고 또 뻔하기에 맛있을 수 있다. 아니 맛있다
.

외국의 공포영화 같은 경우, 한국으로 넘어왔을 때 정서가 다르다는 점은 공포영화에 빠져들어가는데 부딪히게 된다. 외국의 집은 집 안에 계단도 있고 2층에 복도도 있고 주방도 크다. 그 속에서 구성은 다양하게 이루어지지만 한국인들이 외국의 정서를 받아들이는 것에는 경험이 아닌 오직 상상만으로 해야 하기 때문에 공포가 반감이 된다. 그리하여 외국의 공포영화는 한국에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해왔다
.

누군가는 개연성, 설득력, 구조, 플롯을 따지지 말고 상업 영화로만 봐라,라고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앞의 것들을 제대로 배치해서 잘 만들어진 영화가 이미 여럿 있기 때문이다. 샤말란의 싸인처럼 작품성이 우수한 영화가 있고, 엑소시스트처럼 관객이 기절을 하고 토하고 걷지 못하는 공포영화가 있었기에 이후 나오는 공포영화는 더 잘 만들어야 한다. 무섭고 공포스럽고 빠져들어갈 긴 영화가 우리는 필요하지, 장황하게 설명이 긴 공포영화를 바라지 않는다
.

팝콘무비가 아닌 이상 감독의 세계관이 클리셰적인 세계관이 아니어야 한다. 그럼에도 다크 스카이는 각본의 힘인지 보는 동안에는, 뻔한 구조와 뻔한 결론임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으로 빨려간다. 역시 라면이 맛있다. 보이지 않는 공포 속에서 인간은 서로를 의심하고 서로에게 동조된다. 빨아들이는 흡입력과 몰입에는 다크 스카이는 꽤 만들어진 영화였다. 허구인 영화는 실제인 인생을 반영하고 공포는 인간의 가장 밑바닥 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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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까는 리뷰이기에 한국판 리틀 포레스트를 흡족하게 봤다거나 영화를 보고 힐링을 얻었다거나 마음의 치유가 됐다거나 하는 사람은 읽지 말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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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재미있게 봤다는 김태리의 리틀 포레스트. 하지만 나는 그렇게만 볼 수 없었다. 이 영화는 현실성에서 너무 동떨어져 버렸고 힐링과의 거리를 좁힐 수가 없는 영화였다. 리틀 포레스트는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원작이 있고 하시모토 아이 주연의 일본의 영화가 있다. 그 영화는 느리고 과하지 않고 농촌의 생활을 잘 보여준다. 영화는 거기서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라는 말에 걸맞게 치유의 맹점을 놓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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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의 생활. 김태리표 영화 속, 이 농촌의 생활이라는 것이 원작과 그리고 현실과 너무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영화 내용은 간단하다. 도시의 복잡함과 임용고시의 탈락을 맛본 혜원은 지치고 힐링을 얻고자 시골로 내려가서 편의점 도시락이 아닌 느리고 제대로 된 음식을 해 먹으며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며 신선한 채소를 가꾸며 일탈적인 일상에서 마음의 안정을 얻고 치유를 받는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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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은 초반 편의점 알바를 하며 편의점 도시락을 먹다 밥을 뱉어내고 쓰레기통에 버린다. 도시생활의 은유적 작법이다. 편의점 도시락을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이 편의점 도시락을 먹어본 사람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편의점 도시락은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건 포르노를 좋아서 보는 것과는 다르다. 청춘들에게는 애증의 기호, 싫어하지만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음식이다. 청춘들에게 또는 사회 초년생들에게 싸고 맛있고 알찬 편의점 도시락을 쟁탈하기 위한 경쟁이 있는지 기성사회, 기득권들은 절대 알지 못한다. 아마 청춘들 중에, 편의점 도시락을 싫든 좋든 먹는 사람들 중에 밥을 그대로 뱉어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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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에서 낙지볶음을 먹다가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린다면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 어떤 누군가에겐 편의점 도시락이 식당에서 먹는 낙지볶음과 같을지도 모른다. 누구도 쳐다보지 않을 것 같은 편의점 도시락이지만 누군가에게 편의점 도시락은 삶을 지탱하고 유지시키는 생존에 흡착된 음식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감독의 청춘에 대한 이해도에 의심이 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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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삶, 그 속의 빠듯한 인간관계에서 현대인은 힐링을 무엇보다 강하게 원한다. 현대인인 혜원은 시골로 가서 요리에 최선을 다하며 영화는 혜원의 치유를 보여준다. 친구들과의 충만함과 술자리, 땀을 흘리며 직접 재배한 채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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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포레스트는 실제 농촌의 생활을 농촌의 아름다움으로만 덮어 버렸다. 방향이나 생활의 방식이 다를 뿐이지 하루를 버티고 살아낸다는 것, 살아가는 것은 도시나 농촌이나 다를 바 없이 어렵고 힘들다. 여기에서 영화가 혜원을 대하는 태도에 문제가 있다. 혜원이 농촌 생활에 적응을 하며 상처를 입체적으로 이겨가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영화는 혜원보다 김태리의 예쁜 얼굴에 초점을 두고 있다. 자전거를 타고 환하게 나오면서 부터 어? 어? 하게 되는데 혜원은 농촌에서 하는 노동을 무시하게끔 하는 태도를 취하게 만든다. 농촌에서의 노동이라는 것이 단순히 허리가 아픈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도시생활에서의 힘듦의 몇 배, 아니 몇 십 배 더하다. 특히 농번기의 농사라면 말이다. 농사짓는 부모들이 얼마나 이를 악물고 농촌 생활에 적응을 하고 농사를 짓고 있는지 혜원은 알지 못하게끔 영화는 그런 태도를 보인다. 입체적인 혜원보다 평면적인 김태리에 조명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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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리틀 포레스트가 탄생된 배경에는 이런 면이 작용을 했을 수 있다. 일본에도 농촌을 빠져나가는 젊은 층이 심해지면서 농사 인구가 극심하게 가물었다. 이에 일본 정부는 젊은 층에게 귀농하여 농사를 지으면 집과 농업방식과 터전을 지원해주었다. 무엇보다 그 결과에 대해서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농사를 망해도 정부가 지원해주는데 이러쿵저러쿵하지 않는 것이다. 귀농 그 자체에 의미를 두고 정부는 귀농한 젊은 층에게 감사한 태도를 취했다. 그것이 벌써 15년 전이었다. 그렇기에 이치코가 농촌의 생활에 대한 태도를 보이는 리틀 포레스트는 개연성이 있고 설득력이 있다. 그렇지만 임순례표 리틀 포레스트는 그렇지 않다. 과연 청춘과 마주한 적이 있나 할 정도로 청춘에 대해서 너무 모르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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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음식, 농촌으로 가서 만들어 먹는 음식이 마음에 안 든다. 혜원은 오코노미야키를 만들어 먹는 것부터 별로다. 꼭 한국 음식을 만들어 먹을 필요는 없지만, 일본에서의 오코노미야키야 서로를 이어주고 힐링푸드일지 모르나 한국의 청춘들에게 오코노미야키나 타코야키는 패스트푸드, 로드푸드의 개념이 강하다. 편의점 도시락과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농촌으로 갔으면 솥뚜껑을 뒤집어서 들기름을 부어 부추 전이라도 만들어 먹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를 보면서 계속 의심스러운 부분, 감독은 정말 청춘을 이해를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이 시대의 청춘을 다룬 이창동의 버닝을 보면, 이창동이 감독 이전에 소설가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영화 속 주인공도 소설을 쓰려고 하고, 종수와 해미가 술집에서 리틀 헝거의 이야기를 하면서 술집 주위를 비춰준다. 화면에 보이는 청춘들의 모습이 현실의 청춘들이라 할 수 있다. 이창동은 소설의 문체를 영화의 문채로 끌어와서 종수의 이미지는 자연광으로만 촬영을 하여 늘 어둡고, 소설적인 인물 밴은 인공조명으로 종수와 그 반대의 개념적 인물로 묘사를 한다. 이창동의 영화는 화면을 보는 것이 아니라 소설을 읽는 것처럼, 공백과 여백이 가득하고 공백과 여백 사이에 메타포를 한없이 심어놔서 보는 이들이 그 메타포를 느끼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을 한다. 그에 반해 리틀 포레스트는 머리로 계속 계산을 하게 만든다
.

임순례 감독은 청춘에게 애잔한 치유를 보내고 싶었다 하는데, 이 영화는 일정 청춘보다는 포괄적으로 사람들에게 보내는 시골판타지 래플리카 영화였다고 본다. 그럼에도 영화의 괜찮은 점을 찾아야 했다. 그러다 보니 찾을 수 있었다. 한국의 사계절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다큐가 아닌 상업영화에서 이렇게 한국의 사계절을 환하게 담아낸 것은 참 괜찮은 점이었다. 그리고 류준열의 연기는 아주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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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수면 위의 일본 영화는 과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다.
예전에 ‘지금 만나러 갑니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조제, 호랑이,,,,’ ‘철도원’ 같이 손을 뻗어 아무거나 휙 건져도 영화의 세계에 압도당하고 이야기에 몰입하곤 했던 적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신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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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쿠 스완은 원작 만화를 재미있게 봤기에 영화가 나왔을 때 팬들은 당연하게도 우려반 기대반으로 보게 된다. 원작 만화가 있는 영화가 성공할 확률은 원작 소설을 영화화 하는 것에 비해 확연하게 떨어진다. 그건 프래쉬함이 낮기 때문이다. 프래쉬함이란 오직 한 번이기에. 원작 만화의 신선함을 영화가 넘어서기란 기적에 가깝다. 그러니 성공에서는 멀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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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는 일본의 연기를 잘 하는 배우들이 종합선물세트처럼 나온다. 주인공인 아야노 고, 야마다 타카유키, 이세야 유스케, 키네코 노부야시, 사와지리 에리카, 그 외 선이 굵은 중견배우들이 곳곳에 포진되어 있다. 그렇지만 만화를 영화로 옮겨놓다 보니 과하다. 입을 다물지 않고 우루사이!를 소리치는 것과 같은 발성이 과하게 영화를 가득 메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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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즈도 과하고 미장센은 좋으나 역시 과하다. 과함에 과함으로 덮고 과함을 튀겨낸 영화가 신주쿠 스완이다. 거기에 소설적 대사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젤리처럼 만든다. 일본의 신주쿠 가부키쵸는, 캡처한 화면에서처럼 향락의 도시다. 소비가 매일 이루어지는 도시. 생산은 요만큼인데 소비는 이만큼인 도시. 바로 꿈의 도시다. 이는 곧 욕망을 드러내는 도시이며 현실 속 꿈같은 세계이다. 전체는 있지만 일부가 없는, 모호하고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드는 도시이다. 누구 하나 말없이 사라져도 그 자리는 또 다른 인형이 들어서는 세계이다. 젊은 사람들은 욕망이 강하다. 좋은 가방, 좋은 차, 좋은 옷, 맛있는 음식,으로 향한 욕망은 인간의 밑바닥 본능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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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향락과 물욕, 그리고 인간의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는 도시는 어느 나라에나 있다. 내가 있는 바닷가의 여기 도시에도 자정을 기점으로 향락으로 변모하는 도시가 있다. 지나가면 삐끼들이 따라다니며 말을 걸며 그들의 세계로 오라고 손짓을 한다. 겉이 화려할수록 속은 미궁 같은 곳은 대도시일수록 한없이 추악하고 가학적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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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안타깝게 죽어버린 엔서니 보뎅(안소니 부르뎅)도 미국을 움직이는 화려한 뉴욕 사람들의 더러운 뒷이야기 ‘키친 컨피덴셜’을 적었다. 그 속에는 뉴욕을 움직이는 거대한 사람들의 이중적인 모습- 마약, 음식 저장고 속에서의 섹스, 과음, 있을 수 없는 식재료, 그리고 업계의 폭로 등을 그대로 써냈고 그 이야기는 브래들리 쿠퍼 주연의 폭스 티브이 드라마로 제작이 되었다. 미국은 물론 전 세계는 발칵 뒤집어진 적이 있었다. 화려함, 커튼 뒤의 모습은 누구도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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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풍속점, 패션헬스, 카바죠나 호스트가 산업이다. 섹스를 산업으로 두고 있고 길거리 스카웃은 합법적이다. 그러다 보니 야쿠자와는 다른 이쪽 업계의 종사자들은 경찰들과도 이런저런 이해관계로 얽혀있다. 일본과 한국의 다른 점은 한국은 잡아끄는 경우도 있지만 일본은 절대 손을 대서는 안 된다. 바로 경범죄에 속하기 때문에 그저 말로만 가와이, 우와 초 가와이! 같은 말로 스카우트 제의가 온다. 일본의 걸그룹은 섹시한 콘셉트가 거의 없다. 대체로 귀여움으로 무장을 하고 자주 바뀌게 되는 반면 한국은 걸그룹이 섹시한 콘셉트가 많다. 일본에서는 풍속점을 비롯해서 AV 업계가 온통 섹시함으로 줄줄 흐르고 있기에 걸그룹은 그 사이를 뚫을 수 없는 구조다. 성인여배우, 이들은 회사를 통해 팬들을 만나는 것도 꺼려 하지 않는다. 할아버지들과도 거침없다. 무엇보다 짧은 기간에 거액의 돈을 거머쥘 수있다. 명과 암이 도사리고 있고 선택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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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이 슌지의 립반윙클의 신부에서도 그런 내용이 나온다. 마지막 장례식 장면에는 키자키 제시카를 비롯해 현역 AV 배우들이 실제로 영화에 출연을 했다. 좀 웃긴 이야기지만 일본의 섹스산업도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데 오프라인의 대형 섹스샵에 가면 70퍼센트가 한국인, 25퍼센트가 외국인 나머지가 그 외에 사람들이 그 곳에서 입을 벌리고 구경을 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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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쿠 스완은 그런 향락의 도시의 뒷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만화 속에서 가장 인기가 좋았던 에피소드를 꺼내 영화로 만들었고 2년 뒤에 또 다른 에피소드로 2편을 만들었다. 두 편다 과함의 연속이고 감독의 세계관을 볼 수 있다. 만화와 비슷한 것은 역시 타츠히코의 머리 스타일이려나. 오히려 원작의 타츠히코의 얼굴은 분명 이세야 유스케가 하면 싱크로가 딱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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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학적인 장면, 과한 피 터짐, 향락 뒤 지저분한 뒷모습의 대도시 신주쿠를 보고 싶다면 봐도 좋을 듯하다. 영화는 인간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 한다. 인간이 인간을 만나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대도시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그것을 평범하지 않은 향락의 세계에서 종사하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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