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 앤더슨의 개들의 섬은, 많은 사람들이 감독의 일본을 향한 애정의 영화라는 말을 하는데 실은 애정이 아닌 애증이 아닐까 생각한다. 개들의 섬은 개독감이 도시를 덮어버린 날 시장인 고바야시가 모든 개를 쓰레기 섬으로 추방을 하고, 고바야사의 양자인-사고로 부모를 잃은 아타리가 자신의 경비견 스피츠마저 쓰레기 섬으로 버려져 찾으러 가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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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 오프닝에서 ‘소년 무사와 머리 잘린 조상’의 이야기를 보면 개들의 섬이 탄생된 배경을 잘 알 수 있다. 수 세기 전에 고양이를 좋아하는 고바야시족은 들개를 길들여 애완견이 되었지만 인간의 변덕으로 개들이 고통을 받게 된다. 아직 반려견이 아니라 애완견, 장난감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이때 어느 소년 장수가 개들을 벌레 취급하는 고바야시족 수장의 목을 베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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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은 고양이를 좋아한다. 소설, 영화, 만화, 드라마에 늘 개보다 고양이가 우선순위이다. 고양이는 영묘하며 영적이고 개와는 다르게 인간과 기이한 소통을 한다고 나온다. 웨스 앤더슨은 아마도, 어쩌다가 지구에서 오직 인간만을 바라보고 한 번 섬긴 주인의 모든 행동을 주시하며 오로지 주인의 눈빛을 따라다니는 반려견인 개가 버려지면 되려 인간을 공격한다, 그런 경우를 많이 봐왔으니까, 실은 개를 함부로 버리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니 애정이 아니라 애증 어린 눈으로 영화를 만들지 않았을까, 하고 그저 개인적으로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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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들어서 웨스 앤더슨의 영화를 몇 편 봤다. 웨스 앤더슨의 영상에는 독특하고 꿈같은 컬러가 있다. 색채가 몹시 기묘하지만 놀랍도록 고혹적이며 흐트러짐 없는 구성이 일품이다.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장르를 복합적으로 뭉쳐 놨는데 지저분하지 않다. 허술한 것 같은데 촘촘하고 탄탄하다. 마치 31아이스크림에 밥을 비벼 먹는데 이상하지 않고 맛있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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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작품은 다큐영화 ‘히치콕 트뤼포’다. 두 거장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로 히치콕을 좋아한 트뤼포가 히치콕의 책을 얼마나 많이 보고 연구를 하는지, 그리고 현재의 거장이라 불리는 데이빗 핀처, 폴 슈레이더, 올리비에 아사야스 등 감독들이 나와서 히치콕과 트뤼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준다. 우리는 그저 듣고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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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을 이야기하고, 거장의 이야기 속을 들여다보고, 거장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즐거운 일임에는 분명하다. 거장은 영화사에 남을 영화를 만드느라 인생을 보냈고 인간의 삶, 인간의 역사를 말할 때 영화사 역시 거기에서 절대 빠지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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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임파서블에서의 토끼발 같은 수많은 영화 속 맥거핀을 만들어낸 히치콕은 대단할 수밖에 없다. 히치콕의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 무엇보다 히치콕의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확실한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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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처럼 영화 속 장치를 창조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많은 작가가 벽에 부딪히는 것이 창작에 있어서 창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통, 대부분, 대체로 자신의 이야기를 쓴다. 창조란 얼마나 위험하며 대단하고 숭고한 일인지는 영화 프로메테우스와 에일리언 커버넌트에서 데이비드와 월터를 보면 알 수 있다. 데이비드와 월터가 피리를 부는 장면에서의 대화는 영화 마니아들에게 있어 회자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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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리를 불 줄 모른다는 월터에게 데이비드는 네가 나보다 더 우수하게 만들었을지 모르나 나는 피리를 불 줄 알고 작곡을 할 줄 안다고 한다. 그것이 창조가 가능한 창조주가 가지는 능력이다. 바그너의 음악, 니벨룽의 반지가 영화 속에 나오는데 이 음악은 반지의 제왕의 이야기를 탄생시켰고, 음악 속에 나오는 두 거인 형제가 반지를 두고 싸움을 벌이는데, 데이비드와 월터도 그렇게 한다. 창조된 피조물은 창조주를 마냥 따르지 않는다. 자신이 새로운 창조주가 되려 하고 거기서 새로운 종, 인간과 다른, 인간의 몸속에서 배양된 이종을 탄생시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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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트뤼포의 초기 작품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고 옛날 영화라 템포가 느리다. 하지만 트뤼포 만의 독특한 분위기와 화면 톤을 만날 수 있다. 거기에 암시적인 인간의 심리를 묘사하는 건 아직 트뤼포를 따라갈 감독이 없을 지경이다. 분명 따분한 거 같은데 지겹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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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도 해변의 카프카에서 트뤼포를 유연한 호기심에 가득 찬, 구심적이면서도 집요한 정신이라고 했다. 호시노 상에게 대공트리오를 알려준 카페의 주인을 빌려 하고자 하는 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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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좋아한다면, 영화를 좋아한다면 교과서적이지만 공부에 교과서가 제격인 것처럼 히치콕과 트뤼포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거장의 세계관이 빠져들기에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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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류가 고등학생 때, 60년대의 고교시절을 소설로 적었고 영화가 되었다. 류가 쓴 거 맞아? 하지만 그 속을 관통하는 흐름은 류가 맞다. 하루키와 류는 그들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전공투 세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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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상 사고 치고 학생부 선생님에게 두드려 맞는 게 일상인 야자키와 야마다 그리고 단정한 이와세는 늘 수업 후 운동장에서 매스게임을 연습하는 여학생들을 보며, 무엇인가를 강요 당하는 집단은 지겹다는 야마다의 말에 야자키는 이제 17세의 소녀들에 우울한 체육복은 어울리지 않는다며 그녀들을 해방시키기로 하면서 소위 권력에 자기들 방식으로 저항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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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세계관이 60년대를 바라보는 무라카미 류의 세계관이라 생각한다. 자유주의를 표방한 자본주의 속에는 집단주의와 단체주의가 가득하고, 여성들은 성적으로 핍박받고 성적이 최고로 우선시되고, 정치는 퇴행해 가는 일본 사회에 경종을(류의 대부분 소설에 그런 것이 나온다) 알리고 싶었다



그들은 결국 교장의 책상에 똥을 싸지르고 그것에 사상을 붙인다. 영화와 소설을 뒤덮은 정신적 세계의 바탕은 보브 딜런, 롤링 스톤즈, 제니스 조플린이 있다. 가장 직설적이고 정확하고 몸에 닿을 수 있게 저항할 수 있는 것이 음악이었고 당시는 전 세계에 음악으로 전쟁과 기근, 기존 기득권에 저항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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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자키가 좋아하는 레이디 제인(은 롤링 스톤즈의 노래다)도 셰익스피어보다는 사이먼 앤 가펑클의 가사가 훨씬 쉽게 이해된다고 한다. 주인공들이 밤새 똥을 싸지른 난장판 중에서도 ‘상상력이 권력을 쟁취한다’와 당하고 있는 야자키를 돌려 달라며 상상력으로 권력에 대항을 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정말 멋진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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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녀석들의 이야기를 보며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나면 나에게는 아직 손상받지 않은 하루가 남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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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수작이다. 마지막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고 농밀하고 무겁고 깊은 밀도가 영화 내내 흐르고 있다. 그 흔한 작위적인 내용의 전개도 없고 길게 설명을 하지도 않는다. 수작이라는 평을 듣는 것에는 촘촘한 각본의 테일러 쉘러던과 짜임새 있는 드니 빌뇌브의 연출에 있다. 그리고 케이트, 멧, 알레한드로의 주인공들이 다른 목적으로 모여들어 다른 행동 원리가 부딪히면서 상황과 상황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이뤄내는 모습에는 한없이 빠져들 수밖에 없다. 두 시간 동안 마음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둔탁한 긴장감이 관객의 정신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못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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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황한 설명 없이 공간이 주는 무한정성과 주인공들의 움직만으로 서스펜스를 보여준다. 멕시코 사막의 황량한 공간과 은밀한 지하 공간에서의 펼쳐지는 암살자들의 임무. 긴 대사를 통하지 않고 상황을 주인공들은 관객에게 전달한다. 늘 중반이나 마지막에 늘어지는 영화를 보아왔던 우리들은 마지막, 끝까지 긴장감이 이어지는 흔하지 경험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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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한 현실의 상황과 그 속에서 인간이 가지는 고뇌를 다루는 방식은 멕시코와 미국에 대해서 쥐뿔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도 손색이 없다. 훌륭하다. 예측이 불가능하다. 예측이 불가능한 영화가 좋고 예측이 가능한 영화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예측이 가능한 장면이 괜찮으려면 설득력이 있어야 하고 이전 장면과의 개연성과 의미가, 당연하지만 확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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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처처럼, 욕심 많았던 검사 나리군,이라는 대사에서 관객은 이미 엄청난 긴장감을 몸에 둘렀는데 거기에 상상을 하게 만든다. 암살자가된 알레한드로에 대한 설명을 일절 빼버렸다. 이런 모습은 터미네이터 2에서 T1000이 정보처리 기능을 어떻게 하는지 길게 촬영을 했지만 제임스 카메론은 빼버렸다. 관객을 우습게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관객이 상상할 수 있는 부분은 남겨두는 것으로 하려고 했다.
알레한드로는 CIA 출신도 아니고, 특수부대의 출신도 아니다. 그런 검사였던 알레한드로가 가족의 죽음을 맞이하고 암살자가 되기까지, 이렇게 잔인하고 표정 없고 절제된 행동과 치밀한 타격을 하는 암살자로 재탄생되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나, 어떤 훈련을 거친 것일까-케이트에게 총을 쏘며 나에게 총구를 겨낭하지 마라는 장면에서- 하는 상상을 하게 만든다. 이런 상상을 개무시하게 만든 것이 시카리오의 2편에서 영화가 산만해지면서 개연성이 떨어지는 대사들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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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니 빌뇌브의 철학적 고뇌가 돋보였던 블레이너 러너 2049와 현실감이 가득한 이종과의 만남을 다룬 컨택트 역시 개인적으로는 굉장한 수작이라 생각한다. 드니 빌뇌브의 영화는 선과 악이 굉장히 모호하다.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역시 현실의 미국 상황을 다룬 선과 악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미국 국경을 두고 멕시코와 미국의 부패한 경찰이 멕시코 카르텔만큼 멕시코와 미국의 사회를 좀 먹는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끌려가는 케이트에 관객들은 이입이 될 수밖에 없다. 마지막에 총을 들고 알레한드로에게 겨냥을 할 때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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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수많은, 음식을 먹어, 먹어, 하는 대사가 많았지만 이토록 긴장해야 하는 먹어, 먹어는 보지 못한 듯하다. 잔인하고 세상에서 가장 끔찍하고 섬뜩한 리얼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영화가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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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그랬다#드니빌뇌브가보는인간세상은#그을린사랑#의연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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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이 되어 돌아온 자리를

공포 대신 공허와 슬픔이 대신하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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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허와 슬픔에 영화를 보는 이가

같이 결락으로 녹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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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롱테이크와 사각 비율의 화면으로

이별을 당한 사람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유령

상실이 시가 된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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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의 틀 속에 갇힌 반복되는 일상이

시간이 지나면 추억이 된다

결락을 글이 아닌 화면으로 끌어다 놓은 것 같아서

닭살 돋았음

2분 이상 가는 긴 테이크를 끌어가는 건 대사 없는 

주인공들의 표정 연기뿐

그 속에서 화산처럼 나오는 슬픔이 보였다

아 굉장한 느낌

영화가 주는 충격을 오랜만에 느껴본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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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영화이야기#영화그램

#어#고스트스토리

#그리고#중간을흐르는#영화음악

#이로써#케이시애플렉#은먼저떠버린절친

#멧데이먼#과#벤에플렉#을따라잡을것인가

#쪽지에는뭐라고써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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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알탄 사나이 3탄은 그야말로 패러디의 향연이다. 패러디만으로도 영화를 만들 수 있다니. 이 영화는 가벼움이다. 가볍게 보고 웃고 즐기자는 것이다. 그러니까 400미터 계주에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가 달리고 있다. 2등과 많은 차이로 1등을 달리는 미국이 300미터에서 가볍게 달리는 것 같은 영화다. 당시에는 미국의 중산층들이 80년대를 거치면서 앞만 보고 달려온 덕분에 제2의 부흥기를 맞이했다. 걸프전을 거쳤고 총알탄 사나이1탄에서 역시 첫 장면에 미국이 지정한 악의 축을 레슬리가 때려잡는 것도 패러디화시켰다
.

미국은 무기의 나라다. 아이언맨 1편에서처럼 미국은 무기를 각국에 팔아서 강대국이 되었다. 그래서 전쟁이 끊어지면 안 된다. 끊임없이 세계대전이 곳곳에서 일어나야 미국은 더욱 강대국이 된다. 그렇다면 세계인들에게 일본은 어떤 나라일까. 소니의 나라? 미쯔비시의 나라? 일본은 스시의 나라다. 이탈리아는 페라리? 패션? 아니다 우리도 이탈리아를 파스타의 나라로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한국을 삼성이나 현대의 나라로 알고 있는 세계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삼성은 알아도 삼성이 한국이라는 것은 당연하지만 관심이 없다
.

무기의 나라가 미국, 그래서인지 2000년대를 넘어서 나오는 영화 속 백인이나 미국인은 되려 악의 축으로 몰리고 있다. 2010년 이후부터는 그 모습이 확실히 표가 나는데 이것 역시 상당한 클리셰다. 영화 동주나 박열에서처럼 일본인이라 해서 모두가 악이냐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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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슬리가 26년 생인 걸 감안하면 94년에 나왔다고 해도 꽤 많은 나이다. 그럼에도 레슬리의 익살스러운 표정과 과한 동작과 능청스러운 연기로 관객에게 가벼움을 주었고 웃음도 주었다. 미국의, 미국식 코미디가 티브이, 영화에서 정점을 이루던 시기였다. 천재소년 두기에서도, 캐빈은 12살에서도 미국식 코미디가 주를 이루었다. 비버리힐즈의 아이들에서 섀넌 도허티마저 코미디식 대사로 인기를 얻었다. 16년에 암 투병 중이라는 기사가 있었는데 이겨내고 나았으면 좋겠다
.

어떻든 총알탄 사나이 3편는 패러디의 가벼운 미국식 팝콘 영화다. 델마와 루이스의 일탈을 꿈꾸지 않아도 된다. 지금에서 이 영화를 이야기를 할 때는 배우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주인공인 레슬리 닐슨은 지금은 죽고 없다. 안나 니콜 스미스도 고인이 되었다. 미국의 새간에서는 안나 니콜 스미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좋아한다. 먼로가 환생했다고 믿었던 안나 니콜 스미스는 결혼도 생활도 그리고 죽음마저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불행하면서도 덜 불행한 배우일 것이다. 안나 니콜 스미스가 방송대상 같은 곳에 나와서 말을 하면 사람들은 욕을 했다. 그 허느적 거리는 말투와 풀린 눈과 버튼을 누르면 확 다 벗겨질 것 같은 옷. 하지만 그게 안나 니콜 스미스였다. 폭행, 성폭행, 자유와 인권의 나라 미국에서 마저 여자는 핍박받고 당하고, 재벌가와의 결혼, 재산 분쟁, 약물중독, 알코올중독, 어린 아들의 죽음. 멀쩡하다면 오히려 이상해야 할. 안나 니콜 스미스의 말투는 귀엽고 마음에 들기까지 했다. 왜 저를 가만두지 않나요? 이 말이 미국이라는 나라를 말해주는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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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영화 속 프랭키의 아내로 나오는 프리실라 프레슬리. 그녀 역시 총알탄 사나이 3편을 끝으로 영화계에서는 주연으로서의 은퇴를 한 것 같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아내로 마이클 잭슨의 아내였던 리사마리 프레슬리를 낳았다. 프리실라가 엘비스와 결혼하게 된 이야기가 재미있다. 군 복무 시절 엘비스가 아직 미성년자였던 프리실라에게 반하여 프리실라 아버지를 찾아가 자신이 프리실라가 학교를 제대로 졸업을 시키겠다는 약속 하에 결혼을 허락받았다. 그렇게 프리실라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가 67년. 68년에 리사마리가 태어난다. 행복하게만 보이는 엘비스와 프리실라. 미국은, 아니 전 세계는 들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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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두 사람의 결혼은 오래가지 못했다. 엘비스는 그렇게 미인인 아내와 예쁜 딸을 두고 여자 문제가 심했고 술과 약물에 시달렸다. 프리실라를 두고 투어를 다니며 염문을 뿌렸다. 외로운 프리실라. 결국 두 사람은 별거에 들어가고 결론은 예상대로였다. 정말 뻔하지만 슈퍼스타들의 결혼 생활은 오랫동안 이어지지 않는다. 미국도 일본도. 홍콩도 중국도. 그에 비한다면 한국의 중년 스타 커플들은.
엘비스가 죽고 나서도 프리실라는 그의 죽음이 그녀의 탓이라고 사람들에게 질책을 받으면서 고통을 받았다. 그러다가 총알탄 사나이 시리즈에서 발랄한 모습으로 나타났기에 사람들은 영화의 맥락, 재미, 완성도를 떠나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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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슬리는 사실 그렇게 많은 나이에 죽은 것은 아니다. 84살에 고인이 되었다. 폐렴으로 앓다가 합병증으로 사망하게 되었다. 레슬리는 아나운서 출신이다. 총알탄 사나이에서도 그렇지만 무서운 영화 4에서도, 드라큘라 페러디에서도, SF물까지 건너가서 패러디를 해서 레슬리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준다. 지금 본다면 그렇게 웃음이 나오지 않는 것은 패러디 코미디는 타이밍이 중요하다. 근간의 사람의 기억 속에 들어있는 장면과 대사를 패러디를 해야 사람들에게 웃음을 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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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배우는 매력적인 직업이다. 여러 사람의 인생을 살아야 하고 내가 아닌 제3자의 인생을 대신 사는 동안은 죽어서도 다쳐서도 안 되는 운명을 지닌다. 그렇기에 최선을 다해 연기를 했다면 관객들은, 사람들은 응원을 하고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린다. 그런 영화배우만큼 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리는 사람이 코미디언이라 생각한다. 채플린이 그런 코미디를 펼치기 위해 삶은 얼마나 정확하고 처절하고 지루하지만 담백했는가. 코미디는 인간의 삶과 유사하다. 코미디는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채플린의 말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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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한 화면 속에서 레슬리, 프리실라, 안나 니콜 스미스가 같이 있는 모습을 볼 수는 없다. 그렇지만 영화는 그게 가능하게 해준다. 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돌려 볼 수 있게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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