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심리는 뭘까. 나는 공포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데도 공포영화 마니아만큼 많이 보는 것 같다. 사람들이 욕을 하면서, 무서워하면서 극장 속으로 기어들어가 공포영화에 시선을 두는 것은 매운 음식을 찾는 것과 흡사하다고 나는 늘 말하고 있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먹을 땐 매운데 먹고 나면 더 땡기기 때문에, 나는 싫지만 애인이 좋아하기 때문에, 그저 매운맛이 맛있어서. 이 매운 맛에 공포영화를 기입하면 어느 정도 비슷하다. 상업적으로 공포영화는 적정 수준의 손익분기점을 가능하게 한다. 그렇기에 머리만 굴려 공포영화를 만드는 감독은 대체로 점프 스케어와 사운드로 공포영화를 만들었다. 인간의 뇌는 상대가 뭔지 모를 때 공포를 느끼고 생존에 위협을 받을 때 극한의 두려움을 받게 되도록 진화가 되었다. 공포는 인간 감정의 저변에 깔려 있는 초석과도 같은 것이다. 사실 무서운 이야기는 단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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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워서 시원한 카페에 지인들과 모였다. 날은 청명하고 무더웠고 카페 안은 에어컨으로 시원했다. 음료도 시원해서 더위를 잊을 수 있었다. 모임으로 모였기에 이야기를 하다가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모임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낮에 운전을 하는데 입에 머리카락이 들어가서 뺐는데 여자 머리카락이 나왔다. 손가락으로 잡고 빼니 긴 머리카락이었다. 한 번에 빠져나오지 않아 당긴 다음 다시 손가락으로 집어서 뺐다. 머리카락은 아주 흑발이고 30센티미터는 되어 보였다. 그때 빵 하는 경적이 울려 앞을 보니 중앙선을 넘어가고 있었다. 놀라서 핸들을 돌렸다. 이상하다? 오늘 오전부터 여자를 만난 적도 없고 여자가 있는 곳에 가지도 않았다. 지인들과 만나서 커피를 마시기에 오전에 들리는, 여자 직원이 있는 카페에도 가지 않았다. 입에서 빼 낸 머리카락을 창문을 조금 열고 밖으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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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를 지인들에게 하고 나니 웃으며 듣던 지인들이 조용해졌다. 카페의 안에서 보는 카페 밖의 날은 화창했고 몹시도 무덥고 맑은 날이었다. 지인들 중에 한 명이 얼굴에 땀을 흘렸다. 너무 무더워서 그런가. 그러더니 모임도 덜 끝났는데 그 사람은 일어나서 가야 한다며 가버렸다. 나머지 지인들도 아무런 말도 없이 조용하게 음료만 마셨다. 나는 화장실에 좀 갔다 온다고 하며 일어나서 카페의 화장실로 갔다. 소변을 보고 손을 씻는데 입안이 또 꺼끌꺼끌했다. 손가락을 입에 넣으니 여자 머리카락이 입속에 있었다. 잡아서 당기니 어딘가에 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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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이야기로 각본을 쓰고 다듬어서 휴대전화로 10분 미만의 영상으로 제작을 해도 꽤 무서운 단편영화가 될 것이다. 누구나 입속에 머리카락이 들어가 본 경험이 있고, 긴 머리카락이 목 너머의 어딘가에 걸려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까지 상상하게 되면 그 이상의 상황과 장면을 누구나 상상할 여지를 둔다. 머리카락이 입속에서 느껴질 때는 유리를 긁는 듯한 사운드를 삽입한다. 무서운 이야기는 어쩌면 단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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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이 길었지만 영화 ‘샤이닝’도 아주 단순한 내용이다. 소설가 잭은 아내 웬디와 아들인 대니와 함께 덴버에 있는 오버룩이라는 호텔의 관리를 5월까지 하게 되는데, 잭은 이전 관리인이었던 그래디의 유령을 만나게 되고 그래디가 그랬던 것처럼 점점 미쳐가는 잭은 자신의 아내와 아들을 도끼로 토막을 내려 한다는 내용이다. 스티븐 킹은 이 영화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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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의 소설을 몇 권 읽어보지 않은 나로서는 편견일 수 있지만 스티븐 킹의 소설은 스티븐 킹 자신이 너무 재미있어서 너무 좋아서 너무 자신의 글에 빠져서 썼는데 사람들이 좋아하는 장르가 되어 버린 것 같다. 그러니까 내가 읽어 본 몇 권의 장, 단편 소설들에게서 사람들이 이렇게 흥분하며 빠져들 정도인가,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미국식 대사와 유머, 같은 것들이 번역을 거쳐서 그런지 빠져들지는 못했다. 비교하기는 뭣하지만 트루먼 카포티의 초년 소설 ‘차가운 벽’같았다. 하지만 카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는 정말 퐁당 빠져서 읽었었지만 스티븐 킹의 소설들은 특유의 공포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다가갈 수 없었다. 물론 나의 문제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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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닝이 무서운 이유는 평범한 아버지이자 남편이었던 잭이 살인마로 변하기 때문이다. 익숙한 것에서 익숙함이 빠져나가고 낯선 것을 느낄 때 우리는 고도의 공포를 느끼게 된다. 이 영화는 흔한 점프 스케이도 없이 공간이 주는 장대한 우울감이 영화를 보면서 보는 이들의 몸속에 이입이 된다. 잭으로 분한 잭 니콜슨의 미쳐가는 연기는 분장을 한 공포 유령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무섭다. 무엇보다 아들인 대니가 자신의 입속에 살고 있는 작은 유령 토니와 이야기를 하는 장면과 대니가 칼을 들고 있는 장면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섬뜩하게 한다. 세상 귀엽고 깜찍하고 너무나 사랑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대니의 연기를 보라, 아니 저 아이가 저 칼을 들고!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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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브릭 감독은 당시에는 없을, 드론이어야만 가능한 촬영기법으로 초반 영상을 장식한다. 장대함과 웅장함이 주는 고요와 고독, 그것은 곧 결락으로 몰아치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독일의 사진 거장, 안드레아스 구르스키의 거대 사진을 보는 듯한 미로의 모습, 성곽 같은 호텔을 덮어버린 엄청난 눈과 눈이 쌓인 미로 속을 헤매는 대니와 도끼를 들고 대니를 쫓는 잭. 이 모든 것들이 짜임새 있게 연출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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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이 영화를 썩 달가와하지 않은 이유는 알지 못하지만 샤이닝을 다양하게 해석한 다큐멘터리 영화 ‘룸237’을 보면 큐브릭의, 큐브릭만의 샤이닝 세계관이 벽 너머의 또 다른 벽처럼 뚜렷했기에 그러지 않았을까 한다. 샤이닝은 그저 공포영화로 보면 그렇게 보이지만 역사적인 사실과 대학살, 그리고 개척자의 미쳐가는 정신과 삶을 고스란히 샤이닝에 녹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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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룩 호텔, 1907년도에 건립된 역사가 있는 호텔이다. 과거의 호텔 관리인은 가족을 몰살한 비극이 존재하는 호텔. 들어가지 말라는 방 237에 들어간 잭과 대니에게는 영혼을 비롯한 환영이 나타난다. 초반에 호텔을 안내하는 장면에서 호텔은 1907년에 착공하여 1909년에 완공됐다는 말을 듣는다. 1907년은 인디언 마지막 영토였던 오클라호마가 미국으로 편입된 해였다. 인디언의 무덤을 허물고 위에 지어진 오버룩 호텔의 내부를 구경하던 중에 웬디는 지배인에게 “전부 인디언 장식들인가요?”라고 질문을 하고 나바호와 아파치 문양이라는 말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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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은 인디언 마지막 전사 제로니모가 사망한 해였다. 인디언들의 저항이 막을 내린 해라고 한다. 오버룩 호텔에는 아주 많은 인디언들을 상징하는 장식과 문형, 문양이 있다. 인디언들이 영혼과 대화를 나누듯 대니가 입속의 토니와 대화를 하는 모습에서 인디언들을 떠올 수 있다. 오버룩 호텔의 지붕과 청소를 하는 호텔 직원들 사이에 ㅅ자로 서 있는 사다리는 인디언들의 텐트인 티피를 보는 것 같다. 인디언들의 무덤을 허물고 세워진 건물 오버룩 호텔은 현재 미국의 모습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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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어있는 호텔은 사람이 없다고 여겼던 신대륙이며 잭은 미국의 개척자의 모습이다. 당시 일자리를 찾아 신대륙으로 건너왔던 영국의 노동자들이 인디언들이 살고 있어서 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아주 평범한 노동자들이었던 영국인들은 총을 들고 살인마로 변해 무참히 인디언들을 이유 없이 죽였다. 인디언 학살로 인해 죽은 사람의 수는 6,000만 명이었다. 전범 국가 일본과 나치의 독일이 홀로코스트나 마루타를 통해 대학살을 했지만 600만 명으로 미국의 개척이라는 명분으로 대학살에 비할 바가 못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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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에게 보이는 강물처럼 흘러넘치는 피바다의 환영은 대학살의 잔류이고 나타나는 영혼들의 모습은 대학살 속에서 사라진 인디언들이었다. 그렇지만 잭과 대니와 웬디는 애써 환영을 무시하고 못 본채 하려 한다. 그저 넘기려 한다. 호텔의 이름이 오버룩으로 뜻이 못 본체 하다,이다. 과거사의 과오를 못 본채 넘기려 하는 미국을 꼬집었다. 대니가 쓴 레드럼이라는 글자를 뒤집으면 머더, 살인이며 복잡하고 왜곡된 미국의 역사 같은 미로 속으로 잭을 피해 들어간 대니는 거꾸로 쓴 레드럼처럼 자신의 발자국을 다시 뒤로 밟아 가면서 그곳을 탈출하게 된다. 그 방법은 인디언들이 주로 사용했던 방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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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 카메라는 1921년의 사진 속 잭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잭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잭은 늘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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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어른, 어른이 된 남자들은 대체로 애들이다. 그저 아이 같고 철없고 사고뭉치다. 이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은 그런 어른들 중에 아직 덕질을 일삼고 덕후가 되어버린 추억팔이 마니아들에게 기적과도 같은, 그리고 선물과도 같은 완벽한 축제이다. 80년대를 너무나 사랑한 작가 어니스트 클라인의 소설 속에는 80년대를 주름 잡았던 삼라 망상의 모든 캐릭터들이 다 나온다. 어니스트 클라인의 약력을 소개하는 것도 우리나라의 작가들과는 다르게(어디 대학교를 나왔고, 몇 살에 무슨 상을 탔고 등) 즉석으로 전문 조리사, 생선 해체 작업사, 혈장 기증자, 비디오가게 우수점원 등이 어니스트의 약력으로 당당하게 실려있다. 그는 시나리오 작가로 레디 플레이어의 소설을 적었고 그것을 덕후들을 위해 스티븐 스필버그의 마력을 만나 영화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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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B급 대중문화를 사랑하여 덕질을 일삼는 덕후들에게 마음껏 축제를 즐겨라,라며 2시간여 동안의 긴 추억팔이를 할 수 있게 만든 영화다. 고귀하고 숭고한 A급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저급 B급 문화를 무시하는 경향은 늘 있어왔다. 영화 속에도 아이오아이의 태도가 그렇다. 이 영화는 그런 사람들에게 엿이나 먹어라,며 저급 대중문화가 우리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말하고 있다. 서태지의 기괴한 페스티벌 콘서트에서도 서태지는 우리를 향해 말했었다. 대중문화를 사랑하는 여러분이 진정한 예술가입니다. 소리 질러, 울트라맨.라고 해서 우리 모두가 울트라맨을 허공을 향해 외쳤던 경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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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은 흔히 있는 이야기, 가상과 현실, 나와 아바타, 이름과 아이디의 문제나 가치를 따지지 말고 그 경계에서 꿈을 실현시켜주는 것은 바로 대중문화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미 매트릭스나 공각기동대나 아바타에서 호접지몽이니 실존주의니 다 다뤘다. 인터넷이 도래했을 때 그 무서움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기성세대 꼰대들은 말하지 않았던가. 범죄의 온상으로 치부가 되었던 인터넷 세상. 하지만 지금은 어떨까. 범죄는 인터넷보다 현실에서 더 무섭고 더 기이하고 변태 적인 범죄가 많이 일어난다. 인터넷 세상이나 밖의 세상이나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은 다 똑같다. 그 속에 대중문화가 있고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이 바로 꿈을 실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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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이전의 캐릭터와 패러디와 오마주가 기관 총알처럼 영화 속을 휘젖고 나올 때면 흥분, 흥분 그 자체가 된다. 어마어마한 저작료를 주고 캐릭터를 빌려와서 그저 1초 안 되는 엑스트라로 지나가게 만든 스필버그에게서 와이 낫, 뭐가 문제야, 좋아하는 캐릭터가 있다면 한 번 찾아봐,라는 무심한 매력이 돋보여서 더 흥분하게 된다. 조지 마이클이 있던 웸의 노래가, 블론디의 노래가 나오고 후반에 게이머들이 전부 모여들어 식서들과 전투를 벌일 때 스트위트 시스터의 wanna gonna take it이 나올 땐 엉덩이가 들썩 일 수밖에 없었다. 처키가 칼을 휘두르고 스폰이 잠시 등장하며 건담이 칼을 휘두를 땐 정말 가벼운 전율이 왔고 키티가 아기처럼 걸어갈 때 박수를 칠 뻔 했다. 뭐야 스필버그 할아버지는 정말 완벽한 덕후잖아. 이 할아버지 바로 한 달 전에는 더 포스트를 만들었다구! 영화는 찬란하게 빛나는 에너지가 가득 매우고 있고 추억팔이를 하는 우리는 그 에너지를 고스란히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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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백 투 더퓨처와 샤이닝과 자이언트를 봐야만 영화를 더 알 수 있다고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샤이닝의 초반 장면이 나오지만 몰라도 상관없다. 백 투 더퓨처도 그렇다. 문제가 없다. 그것이 뭐가 문제가 되며 꼭 그 이전의 영화를 보고 레디 플레이어 원을 봐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말은 무시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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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내용은 간단하다. 가상의 세계 오아시스에서 대중문화를 통해서 세상을 구한다는 내용이다. 스필버그는 이 축제 같은 영화 속에서도 철학적인 의미를 숨겨 놨다. 2045년 미래의 가상세계 접속 방법이 현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간 수많은 미래 영화와는 역행하는 모습이다. 자신의 오래된 영화 A.I 보다 더 떨어지는 미래의 모습이다. 하지만 스필버그는 미래라는 모습이 장대한 혁신이 아닌 현재 대중문화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모습이 바로 미래이며 그것이 곧 현실에서 꿈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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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아이오아이는 초 대기업, 재벌기업 같은 것이다. 하지만 오아시스에서 게이머들과 전투를 하려면 접속기를 통해 인해전술을 펼칠 수밖에 없다. 아이오아이는 현실 세계에서는 온갖 비리의 온상이다. 협박이 통하고, 로비를 펼치고, 엠엔에이가 이루어지며 작은 기업 따위는 먹어 버릴 수 있지만 가상세계 속에서는 그런 것 따위가 전혀 통하지 않는다. 오로지 룰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곳이 바로 가상세계다. 그 속에서는 가난한 자, 부자의 개념이 없다. 군인, 대통령, 여자, 남자, 아이, 어른 모두가 가상세계에서는 똑같은 존재이며 룰에 따라 움직여야만 퀘스트를 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삼성 같은 거대 기업 아이오아이도 가상세계에서는 룰에 순응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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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퀘스트를 깨는 게임이 아 타 리 라니. 정말 스필버그는 신이 아닐까. 이 영화는 나처럼 아직 아이로 남아있으려는 마음이 강해서, 그리하여 집의 진열장이 그릇 대신 피규어로 가득 찬 어른들에게는 분명 굉장한 축제이며 스티븐 스필버그가 우리에게 주는 장대한 선물인 것이니 영화 속으로 풍덩 들어가 즐기면 된다. 영화 속에서 웨이드는 이런 대사를 한다. 여기서는 모든 게 다 느리다.라고. 스필버그는 앞만 보며 미친 듯이 달려가는 우리들에게 뒤를 한 번 돌아봐, 그리고 추억팔이를 해봐,라고 말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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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블랙 회사에 다니고 있는데, 지금 나는 한계에 도달했는지도 모른다(이후 블랙 회사)’는 10년이 좀 덜 된 영화다. 영화리뷰는 최근작 위주로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리뷰하게 된 것은 아무래도 현재, 어제(이틀 전)부로 통계로 나와있는 사상 최악의 실업률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며 생산적인 활동에 매달려야 하는 3, 40대들이 일을 못하거나 직업을 가지기를 꺼려 하거나 다니던 직장에서 쫓겨나거나 때려치우는 현실이 되었다. 이탈리아도 베네수엘라도 3, 40대에서 생산적인 활동을 못하게 되면 나라가 휘청거리고 20대들이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등지고 떠나는 사태가 벌어진다. 그건 우리보다 우리 밑의 아이들에게 분명하게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지금도 기성세대는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는가, 가 화두인데 우리 밑의 아이들은 점점 더 설 기회가 사라진다는 말이다. 그럴수록 기존에 없던 방식으로 돈을 벌어들이려 할 것이다. 당연하지만 BJ들은 지금보다 급격하게 늘어날 것이고 쉽고 많이 돈을 벌어들이려 할 것임에는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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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생활밀착형 영화다. 만화적 구성과 한정된 공간에서의 연출, 시트콤화되어 있는 과한 행동, 몇 명 되지 않는 등장인물만으로도 가능한 이야기가 생활밀착형 영화다. 우리나라의 생활밀착형을 살리는 배우는 유해진이나 성동일이 있겠다. 영화 블랙 회사는 코믹하게 테이크가 이어진다. 과하고 또 과하게, 그리고 중간중간 과한 합성 처리로 인해서 생활밀착의 어려움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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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마코토는 IT 회사에 입사를 하게 된다. 학창시절에 늘 왕따를 당하다가 고등학교 중퇴를 하고 몇 년 동안 니트족으로 집에서 나오지 않고 게임만 하다가 자격증을 취득하여 어렵게 회사에 들어온다. 하지만 회사는 매일 밤샘에 쌓이고 또 쌓이는 업무에 마코토는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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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코토가 히키코모리로 지내고 니트족으로 지내지만 부모님은 마코토를 늘 응원한다. 마코토의 첫 정장을 사 오던 엄마는 그날 교통사고로 죽고 만다. 흔한 클리셰지만 마코토는 엄마를 위해서 블랙 회사에서 절대 지치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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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게 들어온 작은 회사는 블랙회사다. 이 업계에서도 가장 밑바닥의 세계다. 입찰을 받아오면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기일 내에 오더를 끝내려 하는 팀장과 그 밑에서 죽어나가는 직원들. 오로지 할 줄 아는 건, 또 해야만 하는 건 컴퓨터 앞에 앉아서 수치를 맞추고 계산서를 뽑아내고 할당량을 넘어선 업무를 해내야 하는 것이다. 이 복잡하고 다양한 세계에서는 쓰러져 없어져도 누구 하나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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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고 원대한 꿈은 신입사원으로 들어가는 순간 쓰레기 취급을 당하는 세계. 타 회사와 경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옆의 동료를 밟고 올라야 살아남는 세계. 이 바닥에서 10년 넘게 일만 하다 회사에서 쫓겨나면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도시형 좀비가 되어있다. 그 흔한 스파게티 하나 끓여 먹지 못하고 바느질도 못한다. 자존감의 결핍과 매일 비슷한 말과 똑같은 단어의 향연. 비전이라고는 1도 없는 블랙 회사는 나를 갉아먹기만 하는 괴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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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분명 2009년에 나왔지만 근로기준법이라는 것이 무색하게 되어 버린 2018년의 블랙 회사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과한 동작과 대사와 독특한 구성의 영상은 영화의 몰입에는 방해가 된다. 하지만 부자연스러움이 자연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인간은 갈등을 바라지 않지만 갈등 없이 하루를 보낼 수는 없는 이상한 세계. 우리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가 블랙 회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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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더 도메스틱은 2018년에 나온 1998년 같은 영화다. 도메스틱은 지구가 망하고 난 후에 살아남은 자들이 생존하는 투쟁기다. 이런 클리셰의 영화는 차고 넘쳐난다. 좀비로 인해서, 괴식물에 의해서, 태양이 망가져서, 행성이 떨어지거나 전쟁 또는 질병 내지는 AI와의 전투 등으로 지구가 멸망하는 영화는 끝없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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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망해야 하는 이유는 새고 샜다. 하지만 망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몇 가지 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 몇 가지 안 되는 이유 때문에 삶을 유지하고 보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매일 조깅을 하지만 조깅을 그만둬야 할 이유는 천지다. 하지만 조깅을 매일 꾸준하게 해야 하는 이유는 한두 가지 정도 밖에 없지만 그 한두 가지의 이유가 나를 매일 조깅하게 만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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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영화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뉘는데, 졸작이 있고 망작 그리고 괴작으로 나누는데, 더 도메스틱은 망작에 가깝다. 졸작은 그나마 나은 것이지만 그렇다고 괴작까지는 아니다. 그 이유는 마지막에 말하도록 하자. 더 도메스틱은 미국 정부에서 아! 인간이 싫어!라며 영화 초반 미국 초등학교 아이들이 수업을 마치고 야호 하며 나오는 장면에 하늘을 가득 뒤덮는 대공 수송기들이 검은 독가스를 뿌리면서 인류를 멸망시킨다. 그러면서 독가스에도 살아남은 사람들이 죽기 살기로 생존해야만 하는 이야기다. 그 중심에 남녀 주인공, 니나와 마크가 니나의 부모님이 있는 곳으로 가면서 사람을 사냥하는 갬블러들을 피해서 가는 생존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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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나로 나오는 케이트 보스워스는 언젠가부터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서 빠져 버렸다. 대부분의 영화에 죽 주연으로 나오고 있지만 딱히 떠오르는 영화가 없다. 슈퍼맨의 연인으로 나왔었고, 우리들에게는 장동건의 연인으로도 나온 액션 닌자형 판타지 영화 워리어스 웨이로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더 도메스틱에서 케이트 보스워스, 니나는 저 코리아가 새겨진 잠바를 죽어라 입고 있다. 심지어는 빌런들에게 잠바를 빼앗겼지만 총을 들고 씨발 빨리 잠바 내놔 하며 다시 입을 정도로 저 잠바에 집착을 보인다. 저 코리아 잠바가 뭐라고. 니나는 소극적이고 빌런들을 무서워하고 총을 잘 못 쏘는데, 영화 후반으로 갈수록 갑자기, 느닷없이(맥주를 마시며 하드록에 몸을 흔들고 난 후 신기가 들렸는지) 미군처럼 총을 쏘며 자세까지 군인처럼 확실한 걸음걸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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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는 왜 독가스를 뿌렸는지, 영화 속 살아남은 자들도 관객도 모른다. 아마도 이 부분은 상상에 맡기려는 거 같은데 너무 개연성이 없다. 이유도 모르고 지구가 회색빛으로 망해버린 이야기는 비고 모텐슨과 샤를리즈 테론의 ‘더 로드’가 있다. 해가 없고 아들과 함께 생존해가는 이야긴데, 코맥 맥카시의 소설만큼 깊이 있지는 않았지만 인간이 가장 밑바닥에 깔렸을 때 무엇을 중심으로 생존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영화였다. 아들과 아버지는 신발을 구하는 것과 우리 이외의 인간을 피해 다니는 것이 맹점이다. 단백질 보충을 위해 인간은 인육을 먹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지구가 왜 멸망했는지 나오지 않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그 이유에 접근할 할 수 없을 만큼 생존기에 흡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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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도메스틱은 살아남은 사람도 많다. 집들도 꽤 멀쩡하다. 볕이 든 집 앞에서 서로 이야기를 할 때는 너무 평온해 보여서 그 장면만 보는 사람이라면 휴먼 드라마라고 해도 믿을 법하다. 이 엄중하고, 살벌하고, 여기서도 갬블러들은 사람을 사냥하여 고기로 먹는 이 와중에 서로들 모이면 커피 잔을 들고 커피를 마시며 살아남았구나, 같은 이야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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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식량부족의 시대에 커피라니, 그것도 우아하게 커피 잔에. 그럴 수 있다고 치자. 영화 속에는 뚱뚱한 사람들이 많다. 독가스 살포 후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만약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다면 살이 찐 사람들이 남아 있을 수 있지만 시간이 몇 년 지난 다음이라면 절대 식량 부족인 시점에서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는 니나와 마크가 한 집에서 식사를 하는 장면에서 대화를 하는데, 우리가 먹은 맛있는 고기는 소입니까?
소? 가축을 본지 얼마나 됐나? 새나 고양이 개를 본 적이 있는가. 동물은 이 세계에서 소멸했다고 말하는 대화가 나오는데 그러면서 우리가 먹은 고기는 인육이라고 말을 한다. 마크는 그 이야기를 듣고 바로 구토를 한다. 그게 인간이라면 뇌가 반응하는 대로 하는 행동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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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영화 속 독가스는 인간보다는 동물들에게 더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바로 소멸했거나 아니면 살아남은 동물일지라도 독가스를 마셨기에 남은 인간들이 그 고기를 먹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화 속 뚱뚱한 사람들은 그 몸을 유지하기 위해 인육을 맛있게도 마음껏 먹었다는 것인데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에서도 거티스는 열차 마지막 칸에서 식량이 극도로 부족해서 아기를 먹는 장면을 말하는데 고통과 윤리적 죄책감에 울면서 말을 한다. 남한산성을 읽어보면 전쟁 중에 먹을 것이 절대 부족하여 길거리에 죽은 사람에게 눈을 돌리는데 그때는 이미 인간은 인간이라는 그 의미에서 벗어나야 했다. 배고픔을 이길 수 없기에 인육을 먹으나 평소처럼 사고하고 생각하며 행동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도매스틱의 뚱뚱한 사람들은 그저 평소의 거친 사람들이다. 인육을 먹어가며 그 몸을 유지하면서 평소처럼 지내기는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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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로드에서 바짝 마른 코디 스밋 맥피의 모습과 더 바짝 말라버린 비고 모텐슨이 어렵게 콜라 캔을 하나 발견하여 마시는 장면을 떠올려보면 도메스틱의 설정이 얼마나 대충대충인지 알 수 있다. 갬블러들에게 잡혔다가 다 죽이고 탈출한 킬러 같은 것으로 나오는 소노야 미즈노는 매력적으로 나오는 것 같은데, 없어도 될 캐릭터다. 나와서 갬블러들에게 총을 쏘아대는 것 까지는 좋은데 니나가 버린 반지를 찾아서 마크에게 주다가 머리가 뚫려 죽는다. 이 무슨. 소노야 미즈노는 엑스 마키나에 나왔던 그녀로 이 신비하고 매력적인 캐릭터는 도매스틱에서는 오갈 때 없는 하나의 소품으로 전락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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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나와 마크가 한 가정에서 식사를 할 때 그 집의 12살 정도 된 아들이, 갬블러들이 칼에 찔려 죽은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다. 가슴 밑으로 칼에 팍팍 찔려 죽은 장면을 말한다. 난도질이 일정하지 않고 키가 작은 사람, 즉 어린아이가 한 것이라는 말을 하며 영화는 끝으로 갔을 때 핏빛 가득한 조그만 발자국과 니나와 마크가 지켜주었던 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있는데 손과 발에 피가 잔뜩 묻어 있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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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은 많은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괴작이 되기 직전에 멈추게 한 장면이었다. 무라카미 류의 ‘희망의 나라로 엑소더스’라는 소설이 있는데 그 소설을 읽어보면 그동안 전 세계를 두렵게 했던 IS 테러범들이 어린아이들을 훈련시켜 살인을 하는 모습이 잘 나와있다. 이 책은 2000년도에 나왔으니 그때는 IS 테러범이라는 말이 있기 전 테러범들이 있었다. 무라카미 류는 3년 동안 취재를 하여 이 소설을 적었는데 읽으면서 아아 굉장하다,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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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잔인하다. 아이는 순수하고 천진난만하기에 살인을 하나의 놀이로 인지를 한다. 사람이 피를 토하며 죽는 모습을 어른처럼 한 번 걸러서 생각하며 눈으로 보지 않는다. 그저 재미로 느껴지면 정확하게 그 일을 한다. 그것에 어떠한 도덕적 죄책감이나 수치심 내지는 감정의 변이를 일으키지 않는다. 테러범들은 그 사실을 잘 알기에 아이들을 잡아서 훈련을 시킨다. 무엇을? 총의 무게를 이겨내는 훈련을 시킬 뿐이다. 그러면 정확하게 목표물에게 접근하여 적확하게 살인을 한다. 하나의 놀이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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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나라로 엑소더스를 읽으면 놀라게 되는 것이 20년 후의 이야기, 즉 작금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변이나 일들이 그 소설에서는 고스란히 말하고 있다. 희망의 나라로 엑소더스는 반드시 영화로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전혀 기미가 없는 것이 이상하다. 더불어 ‘코인 로커 베이비’도 영화로 나올 것 같은데, 같은데 하면서 나오지 않는다. 아무튼 도메스틱의 마지막 장면은 이런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면서 괴작으로 가지 않고 망작에서 끝날 수 있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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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헌터 2:요괴 사냥단은 인디아나 존스의 추격신과 이티의 그 장면, 드레곤 길들이기 외 많은 모험 판타지 영화의 장면이 아주 골고루 섞여 있는 영화다. 그것이 좋다 나쁘다,로 꼭 집어서 말할 수는 없다. 인간은 기억에 의존을 하고, 기억이란 축소되거나 확대되거나 왜곡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런 이런 장면에서 지난 기억을 떠올렸을 때 단순히 기억을 하는 사람이 있고, 마음의 추억이 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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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헌터:요괴 사냥단은 1편에서 우바와 헤어진 샤오란과 천음이 우바를 잊지 못하고 찾아가는 내용에 반가운 양조위, 도박범 투스꾼이 등장하면서 우바를 둘러싸고 벌이는 한바탕 농담 같은 이야기다. 영화 초반에는 역시 반가운 오군여와 증지위가 잠깐 등장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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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에서 이미 우바의 귀여움과 표정에 빠져버린 사람들은 이제나저제나 2편이 나오기만을 기다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바의 캐릭터는 아시아 영화권에서는 드물게 사랑스러운 스크린 캐릭터를 완성해냈다. 1편에서 끝내면 안 되는 것이다. 이 우바라는 하나의 아기 몬스터 캐릭터를 만들어내기까지는 어마어마한 수고와 고생이 뒤따른다. 우바는 인간으로 치면 2살에서 2살 반 정도의 아기이다. 그러다 보니 2살 반짜리의 아기의 표정과 말투와 걸음걸이를 캐릭터에 넣어야 했다. 우바는 무(우)처럼 보여서 친밀감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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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에서 우여곡절 끝에 샤오란과 천음은 부부가 되고 우여곡절 끝에 우바와 만나고 인간계에 몬스터가 있으면 안 된다고 해서 우여곡절 끝에 헤어지면서 끝난다. 그리고 2년 만에 2편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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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적으로는 소포모어 징크스를 깨지 못했지만 1편보다 우바의 표정과 동작이 훨씬 다양해졌다. 짜증이 난다는 사람이 있지만 마음을 넓게 가져보자. 영화는 심각하지 않다. 인간계와 요괴계 사이를 오고 가는 요괴들의 모습을 볼 수 있고, 양조위의 코믹한 연기를 볼 수 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가 가볍고 난해하지 않다. 뮤지컬 같은 음악 연출이 있고, 음악은 중국풍과 현대풍이 가미되었다. 게다가 영화의 배경과 세트가 화려하고 색채가 아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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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서 투스꾼이 사기도박으로 사람들에게 쫓겨 풍선에서 잠이 들 때 우바와 다른 요괴에게 이불을 덮어준다. 언젠가부터 영화 속 장면에 이불을 덮어주는 모습이 나오면 나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이불을 덮어준다는 건 친밀한 관계거나 친밀할 관계이거나, 친밀했던 관계가 어떠한 일로 같이 밤을 보내게 되었을 때 우리는 이불을 덮어준다. 이불을 덮어 준다는 건 그만큼 친밀한 사람이 곁에 있다는 말이다. 집에 있는 강아지와 한 침대에서 잠을 들 때에도 우리는 가끔 이불을 덮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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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제외한 이종은 대체로 이불 따위는 필요 없이 잠을 자는 존재로 영화에 많이 등장한다. 전 세계가 이티에게 열광했던 건 엘리엇과 거티가 이티에게 담요를 덮어주고 자신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아낌없이 보여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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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이종은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존재이지만 그들은 현실의 소수민과도 비슷하다. 일본의 다큐멘터리영화 카운터스를 보면 일본의 수많은 우익들은 일본에 있는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범죄의 온상이고 여자들에게 피해를 주는 악으로 나온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나라에 있는 소수민들에게 똑같은 잣대로 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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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서 이종에게 이불을 덮어주는 건, 영화 속에서 엄마가 딸에게, 또는 친구가 친구에게, 애인이 애인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이불을 덮어주는 친밀감 그 위의 친밀감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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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여곡절 끝에 우바는 인간의 엄마, 아빠인 샤오란과 천음과 다시 만나고 같이 지내게 된다. 개인적으로 스타더스트나 말레피센트(너무 아름답고 감동적이었다) 같은 영화가 좋아서 그런지 우바의 이야기 같은 영화가 계속 나왔으면 한다. 중국은 자본의 나라이기 때문에 아마도 지속적으로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리뷰가 이불 얘기만 하다가 끝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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