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지옥
유메노 규사쿠 지음, 마이너스 옮김 / 해밀누리 / 202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유메노 규사쿠(夢野久作, 1889~1936)는 일본 근대문학사에서 언제나 조금 비켜 서 있는 사람이다. 동시대의 에도가와 란포처럼 추리작가로 분륟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에로,구로,난센스'라 불리던 1930년대 기 취향의 정점에 놓이기도 한다. - '옮긴이의 말' 중에서 


(사진, 책표지)


작가의 본명은 스기야마 나오키이며, 필명인 '유메노 규사쿠'는 후쿠오카 방언으로 '꿈꾸는 바보'를 뜻한다. 그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와세다 대학을 중퇴한 후 승려 생활, 농업 경영 등 다양한 직업을 경험했다. 특히 정신 의학, 불교, 심리학 등 다양한 분야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이같은 이력이 그의 작품 세계의 원동력이 되었다. 작가의 대표작이기도 한 이 책은 세 편의 단편을 묶어 '별 것 아니었다', '살인 릴레이', '화성의 여자'으로 구성되어 있다.


별 것 아니었다


저는 지난번, 마루노우치 클럽의 경술회에서, 단시간 영광을 얻은 사람으로, 귀형과 마찬가지로 규슈 제국대학, 이비인후과 출신 후배입니다. 작년, 쇼와 8년 6월 초순부터, 이곳 요코하마시 미야자키초에, 우스키 이비인후과 간판을 내걸고 있는 자입니다만, 돌연 이와 같은 기괴한 편지를 올리는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9쪽)


'별 것 아니었다'란 단편은 이렇게 우스키 이빈인후과의 원장인 우스키 리헤이가 대학 선배인 시라타가 히데마로에게 보내는 편지글로 시작한다. '히메쿠사 유리코라는 여성이 자살했다'는 내용인데, 그녀의 허구에 관해 이야기를 써내려 간다.  


(사진, 경찰을 속인 전화 21쪽)


우스키 이비인후과 개업 전날 저녁에 간호사가 필요한지를 문의해 해온 여성이 바로 히메쿠사 유리코였다. 아오모리현이 고향이며, 부모님은 그곳에서 양조장을 운영 중이지만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려고 간호사 일을 해보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또 아오모리의 현립 여학교를 졸업, 시나노마치의 K대 이비인후과에 입학해 재학 중이며, 신원 보증인은 시타야에서 미용사를 하는 이모님이라고 했다. 만 19세 2개월인 소녀의 순진무구한 태도에 빨려 들어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간호사로 채용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 관한 신원 정보는 모두 거짓이었다. 


소녀 '히메쿠사 유리코'는 끊임없이 자신을 과장하고 거짓으로 계속 꾸면댄다. 이같은 거짓에 깜빡 속아 넘어가는 병원, 경찰 등은 도대체 그녀의 무엇을 믿었을까?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이름조차 거짓인 한 소녀의 허영심, 욕망,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 등의 감정이 결국 '진실'이 아닌 '거짓'임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사진, 이름도 가짜, 94쪽)


이를 읽으면서 내 머리에 떠오른 속담은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였다. 이는 어릴 적부터 부모님으로부터 하도 많이 들어서 귀에 못이 박힐 정도의 가르침이었다. 소녀 히메쿠사 유리코의 언행도 마찬가지였다. 사소한 거짓말이 한두 번 계속 쌓이면서 '별 것 아닌 것'으로 스스로를 마취시킨 셈이었다. 이 정도면 과대망상증에 걸린 환자가 아닐까란 생각마저 든다. 아무튼 거짓이 탄로나는 순간 그녀에겐 죽음이었으니 그녀의 거짓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던 것이다.   


살인 릴레이

여차장만큼은 정말로 안 돼요. 농부로 사는 것보다 훨씬 재미없고, 훨씬 더 무섭고, 싫은 일이에요. 여차장의 운명이라는 건, 길거리에 흩어진 종잇조각보다 훨씬 값싼 것이에요. 여차장이 되어 보면 곧 알게 돼요. 간단히 말하자면, 농부의 딸로 있으면 신랑감은 순박한 마을 청년들 중에서 부모님이 골라 주시잖아요. 운이 좋으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도 있지요. 하지만 여차장이 되면 그런 행복은 처음부터 포기해야 해요. 회사 중역이라든가 임원이라든가, 자동차 담당 순경님 같은 이들의 말은 아무리 부당하고 불쾌해도 얌전히 들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바로 해고돼요. 어떻게든 구실을 붙여서 쫓아내 버리니까요. (120쪽)

부모 형제도 없는 고아 신분인 도모나리 도미코는 미나토 버스의 여차장이다. 술에 취한 승객에게 놀림을 당하기도 하고, 멋 부리는 운전사에게 찔리거나 무서운 순경에게 손을 잡히는 등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이뿐만 아니라, 훨씬 더 무서운 일을 당하기도 한다. 

초등학교 동급생인 쓰키카와 쓰야코도 하마마쓰의 공부 버스에서 여차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런데, 자꾸 누군가에게 살해당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는 편지를 보내왔던 것이다. 내용인 즉, 새로 입사한 한 운전사 니타카가 석 달쯤 되자 쓰야코의 아버지에게 정식으로 청혼을 넣었고, 회사 전무가 직접 중매를 선 까닭에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인데다 호감가는 남자라서 이를 승락했다는 거다. 

그런데, 도쿄 아오 버스에 근무하는 친구 마쓰우라 미네코의 갑작스런 편지에 따르면 놀랄만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한 마디로 니타카 다쓰오란 운전사가 새로 온다면 이 남자를 반드시 조심하라는 경고와 함께 아주 무섭고 평판이 나쁜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아오 버스에서 일하는 동안 수많은 여차장을 유혹해 내연 관계를 맺고, 이후 싫증 나면 죽여서 어딘가에 버린 탓에 경시청으로부터 주목받자 아오 버스를 몰래 사직하고 사라졌다는 거다.

이후 문제가 발생한다. 정직한 심성을 가진 쓰야코 여차장은 이 편지를 아버지가 아닌 니타카에게 보여주는 바보 같은 행동을 했던 거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두 남녀는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기 떼문이다. 증거가 될 수도 있는 편지를 다 읽은 그는 이를 화로에 넣어 태워 버리기까지 하면서 이렇게 무서운 말을 내뱉었다.
 
"바보구나... 너는... 이런 걸 남한테 떠벌리면 가만 안 둘 거야" 

이후 쓰야코는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사망해 장례까지 치렀다. 쓰야코의 아버지 말로는 '버스 대용으로 쓰이던 신형 포드 차의 운전사는 니타카였고, 만원 차의 여차장은 쓰야코'였으며 어둠 속에서 반대편 트럭의 돌진을 피하는 순간 쓰야코는 전봇대에 부딪혀 불행한 일을 당하고 말았다는 승객의 증언이 있었다고 한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듯이 니타카 운전사는 나중에 미나토 버스 회사에 취직했다. 니타카의 범죄 행각을 이미 알고 있는 이 회사 버스 여차장으로 근무 중인 도모나리 도미코에겐 과연 어떤 일이 닥쳐 올까? 벌써 머리로는 그림이 상상된다.    

색마色魔의 연속되는 살인 사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여성(여차장)이 자신의 친구에게 고백 편지를 보낸다. 그녀는 벌어진 사건 속에서 자신이 행한 역할로 인해 혼란에 빠진다. 즉 자신이 피해자인지, 아니면 오히려 가해자인지를 말이다.


(사진, 도미코의 행동 131쪽) 

그렇다면 이 소녀는 뭔가를 숨기고 있을까? 도무지 이 사건의 진실은 무엇인지 이에 도달하기까지 긴장감의 연속이다. 마치 '스톡홀름 증후군' 이 연상되는 사랑과 증오가 혼재混在한 소녀 도미코의 내면이야말로 소설의 제목처럼 잔혹한 '지옥'이 아닐까 싶다.

화성의 여자

지난 3월 26일 새벽 2시경, 시내 오도리 지역 6번째 구역에 위치한 현립 여고 운동장 구석의 낡은 창고에서 불이 났다. 강풍이 불고 있었기에 자칫 큰 화재로 번질 뻔했지만, 시 소방서장을 비롯한 소방대의 신속한 대응으로 창고 한 채만 전소된 채 진화되었다. 다행히 교사 건물에는 피해가 없어 교직원들과 학생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151쪽) 

며칠 뒤 화재 장소를 정리하던 중에 새까맣게 탄 시신 한 구軀를 발견하면서 지난 26일에 발생했던 화재는 크게 관심을 끌게 되었다. 부검 결과, 시신의 주인공은 스무 살 정도의 여성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특히 시신의 허리 부분 주위에 화재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연료가 집중 배치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경찰 당국은 성추행에 연관된 방화 살인 사건으로 판단하고, 관련 보도를 일시 중단하고 철저한 수사에 들어갔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단서를 잡지 못하고 사건은 이미 미궁迷宮에 빠졌다는 소문이 꼬리를 물고 번져 나갔다. 

사실 이 학교의 낡은 창고는 평소 아무도 출입하지 않았으며, 또 화기 취급은 전무했기에 자연 발화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경찰은 여전히 타살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두고 있었다. 여고는 3월 19일부터 봄방학에 돌입했고, 화재 당시 기숙사엔 학생은 전혀 없었기에 단순한 화재가 아니라 비극적인 사건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화성의 여자'(교장이 붙여준 별명)가 교장 선생님에게 보낸 편지엔 이런 글이 있었다. 

동급생들 가운데서도 저와 정반대로, 가장 아름답고 모든 면에서 뛰어난 단 한 명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 선생님, 동급생들 모두 저에게는 상냥한 말 한다디 건네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묘하게 저와 거리를 두고, 어딘가 기묘하게 차가운 웃는 얼굴로 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지요. 용모나 성적만을 두고 서로 경쟁하던 아이들에게 저는 왠지 모르게 열등하고, 어딘가 결함이 있는 사람처럼 보였던 모양입니다.(181쪽)

평범함을 벗어난 특이함이 이토록 불편할 줄이야. 작품의 주인공은 큰 키와 강한 힘을 가진 여고생 '아마카와 우타에'로, 대항전이 열리거나 테니스, 배구, 달리기 등의 경기가 펼쳐지는 운동장에선 온갖 찬사를 한 몸에 받았지만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면 오히려 그로테스크한 괴물 취급을 당했다. 

이에 소녀는 현실 도피를 위해 마치 폐가와 같은 학교의 낡은 창고로 숨어 들어 지내며 혼자만의 은밀한 즐거움을 누렸다. 소녀 혼자만 즐기는 은밀한 공간인 줄 알았는데, 이곳에선 악과 비리가 움트고 있었던 것이다. 즉 교장 선생님, 곱사등이 노인 서기, 뚱보 영어 여선생님 등이 학교 예산을 어떻게 횡령하는지 또 서로 다투는 소리까지 모두 엿듣게 되었던 것이다.


(사진, 교장의 비리)

이렇게 교장과의 얽힌 사건으로 인해 그녀의 삶은 비극적인 방향으로 전개된다. 소녀 스스로도 자신을 '화성의 여자'로 규정한다. '새까만 소녀 사건'. '모리스 교장 실종', '엉망진창이 된 현립여고' 등과 같은 신문의 기사와 사건 관련 진술 내용 등이 뒤섞이며 피해와 복수의 경계가 흐려진다. 과연 진실과 거짓은 어디까지인가? 독자들은 조각난 기록들을 따라가며 한 소녀의 삶과 고통 그리고 사회적 폭력 등을 마주하게 된다. 

1930년대에 발표된 작품이므로 약 100년 전의 사건 사고들이 고전소설 속에 등장한다. 횡령, 통정, 간통, 내연 관계, 살인, 사랑과 증오, 진실과 거짓 등등 인간사에 벌어지는 이같은 심리와 사건은 지금도 여전하며 언론과 매스컴에 자주 보도되는 사회비판이란 점을 생각한다면 우리 모두가 살고 있는 이곳이 '지옥'과 진배 없다. 


#일본소설 #추리소설 #미스테리소설 #진실과거짓 #소녀지옥 #유메노규사쿠 #심리 #여성서사 #고전문학 #고전소설 #사회비판 #광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저스티스의 한 뼘 더 깊은 세계사 : 중동 편 - 6,000년 중동사의 흐름이 단숨에 읽히는
저스티스(윤경록) 지음 / 믹스커피 / 202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중동 지역의 역사에 대해 풍부한 지식을 담고 있어서 모두에게 추천하고 싶어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통주로 빚은 인문학
박운석 지음 / 학이사(이상사)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에서는 우리 전통주의 맛과 멋을 알리는 데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이미 잘 알려진 매력 외에도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전통주가 지닌 인문학적 가치를 발굴하고 알리는 데 중점을 두었다. 우리 전통주가 같은 발효주인 와인이나 맥주와 비교해 더 뛰어난 술임을 실제 사례를 통해 알려준다. - 머리말' 중에서 


(사진, 책표지)


책의 저자 박운석은 한국발효술연구원 원장이다. 우리 술의 대중화와 교육에 힘쓰는 전문가로 활발한 저술 활동도 병행하고 있다. 현재 대구일보에 '박운석의 우리 술 이야기'를 연재 중이며, 매일신문에 '박운석의 전통주 인문학', '박운석의 수제맥주 이야기'등을 연재하기도 했다. 


총 4부로 구성된 책은 선조들의 술 문화(1부), 이야기의 보고, 전통주(2부), 고문헌 속 전통주 이야기(3부), 전통주의 오늘과 내일(4부) 등을 통해 최근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K-푸드 발전을 위해선 K-술과의 결합이 필요함을 강조하면서 우리 전통주가 세계에 널리 알려질 수 있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고 있다.


술자리에서 풍류를 배운다


술은 그 나라의 정치 수준까지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문화적 척도라 했다. 옛 선조들은 술을 마시는 데도 불문율을 지켜 왔다. 일종의 주도酒道인 풍류風流였다. 풍류는 함부로 웃통 벗어 제끼고 박장대소하며 소란을 떨면서 노는 게 아니라 멋스럽고 풍치 있게 노는 일이다. 


그렇다고 잘 노는 것만 의미하지는 않는다. 인문과 예술적 소양까지 갖추어야 풍류라고 할 수 있다. 당시엔 풍류가 생활의 주요 영역이었다. 자연 속에서 술을 마시며 시詩, 서書, 금琴을 즐겼다. 이때는 당연히 선비들의 술 문화가 음악과 그림이라는 문화를 생산하는 모태가 되었다.

윤선도는 “술을 마시되 덕이 없으면 난亂하고, 주흥을 즐기되 예를 지키지 않으면 잡雜되기 쉬워 술을 마실 때에는 덕과 예를 갖추어야 한다.”고 말했고, 조지훈은 “술에 취하지 않고 흥興에 취하기를 즐긴다. 오욕칠정의 잠재된 모든 감정을 술로 풀려는 것은 술의 사도邪道”라고 했다. 


이처럼 술 때문에 생기는 폐해를 막고 예를 바로 세우기 위한 방안도 있었다. 향촌의 선비와 유생들이 향교, 서원에 모여 학덕과 연륜이 높은 이를 주빈으로 모시고 술을 마시는 행사인 향음주례鄕飮酒禮였다. 하지만 향음주례는 1905년 일제에 의해 사라졌다. 1895년, 조선을 되살리기 위해 전국의 유생들이 향음주례를 핑계로 세 규합에 나섰고, 이는 의병 활동으로 이어졌다. 결국 일제는 이를 금지시켜 버렸다. 


금주령의 두 얼굴

영조는 말년에 다리가 아파서 고생을 했다. 이 불편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송절차松節茶 덕분이었다. <영조실록>엔 송절차를 마시고 나서부터 걸어다닐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송절차는 송절주다. 소나무 가지 마디를 채취해 말린 다음 빚은 술이다. 송절은 관절통, 신경통을 완화시켜 준다고 알려져 있다.


송절주를 굳이 송절차로 부른 것은 이유가 있었다. 영조는 재위 기간 대부분 금주령을 내렸다. 쌀을 주원료로 술을 빚다 보니 백성들이 먹을 식량도 부족한데 술을 마신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영조는 술을 ‘사람을 미치게 하는 광약’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대신들이 술을 마시는 것을 경계하도록 했다. 


강력한 금주령을 발동했던 영조도 재위 후반부엔 조금씩 느슨해졌다. 1767년 종묘제례에 감주가 아닌 술을 사용토록 허용했다. 이런 조치 배경엔 스스로 금주를 지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송절주를 송절차로 위장하기보다 대놓고 맘 편하게 들이키고 싶었을 것이다.


전통주는 이야기의 보고寶庫

<고려대규합총서>엔 술맛이 아름답고 사나움으로써 주인의 길흉을 안다고 하였고, 술맛이 시고 나쁘면 주인집에 근심이 생긴다고 했다. 예전엔 양반의 역할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조상의 제사를 받들어 모시고, 찾아오는 손님을 대접하는 것이었다. 


중국 전국시대의 맹상군, 평원군, 신릉군, 춘신군 등 네 공자公子(군자)도 별채에 食客들을 불러모아 이들에게 술과 음식을 제공하는 한편 이들이 보유한 기술과 정보를 활용했음이 사마천의 <사기>에도 수록되어 있다.


당시엔 곳곳에서 모여드는 손님들이 중요한 소식통이자 돈 되는 최신 정보를 가진 정보원이었다. 여러 사람으로부터 다양한 정보를 접하다 보니 항상 앞서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당연히 술맛이 나빠지면 과객이 줄고, 최신 정보도 얻을 수 없으니 주인집엔 근심이 생기는 것이다.


술 빚기는 과학이다

우리 전통주는 발효주이다. 발효를 잘 시켜야 맛 좋은 술이 되고 잘못 되면 시큼해서 쉰 내가 풍긴다. 여기에 바로 과학이 숨어 있다. 전통주 빚기에 물누룩인 수국水麴을 만드는 과정엔 과학이 들어 있다. 단양주單釀酒를 빚을 때 사용하는 수국은 누룩을 사용하기 전에 물속에 3~5시간 담가 둔다. 바짝 말라 있는 누룩 속 미생물을 미리 활성화하기 위해서다. 


알코올을 만들어 내는 누룩 속의 효모는 본격 활동에 앞서 8시간 정도의 잠복기를 거친다. 이 시기가 술 빚기에서 외부 잡균에 노출될 수 있는 가장 취약한 시기다. 결국 수국을 만드는 이유도 이 잠복기를 줄여 효모가 더 빠르게 알코올을 만들어 내게 하기 위해서다.


쌀을 다양한 방법으로 가공해서 술을 빚는 것도 술의 맛과 향을 다양화하고 좋게 하는 방법이다. 밑술을 죽이나 범벅, 떡 등의 방법으로 빚어 술의 맛과 향을 살려 놓고, 마지막 덧술에 고두밥을 넣어 주어 알코올 도수를 올려 준다. 하나의 술을 만드는 과정에 여러 가지 쌀의 가공 방법을 써서 다양한 풍미를 내는 것이 우리 전통주의 매력이다. 


전통주의 적정음주량?

국립청주박물관에는 조선 선조 대의 정치가이자 문인이었던 송강 정철(1536~1593)이 선조에게 하사받은 은술잔이 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이 은술잔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품고 있다. 그는 술을 너무나 좋아했고, 술 때문에 구설이 잦아 반대 세력으로부터 공격을 많이 받았다. 이에 선조는 그에게 은술잔을 하사하면서 하루 석 잔만 마시라고 명했다. 그러나 어명을 어길 수 없었던 그는 술잔을 두드려 크기를 늘린 후 사용했다고 한다. 가히 술꾼다운 발상이다.


당시 식사 때 반주로 마시는 술도 한두 잔이었다. <동의보감>에 전하는 적정 음주량 석 잔, 선조의 어명인 하루 석 잔, 반주로 마셨던 한두 잔도 정확한 측정치는 없지만 아마도 세계보건기구가 권장하는 하루 적정 음주량 이내였지 않을까 싶다.


혼자 마시는 술, 동정춘

책에 수록된 동정춘 빚는 법을 보면 쌀 11㎏에 물은 불과 1L만 쓴다. 물을 거의 넣지 않고 단맛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술을 빚기 때문에 술맛은 많이 달다. 실제 ‘꿀보다 달다’고 기록해 뒀을 정도다. 워낙 단맛이 강해 전통주 강의 교육 과정에서 동정춘 빚기를 실습할 때는 『임원경제지』 레시피 절반의 쌀을 사용한다. 쌀 6㎏에 물 1L를 쓴다는 뜻이다. 쌀의 양을 절반 정도 줄였지만 발효가 끝난 이후 술의 단맛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단맛만 강하다면 좋은 술이 아니다. 동정춘은 쌀과 누룩, 그리고 극히 적은 양의 물만으로 빚는 술이지만 완성된 술은 다양한 과일 향과 꽃 향도 품고 있다. 그래서인지 전통주 교육을 받은 분들이 수시로 교육원에 와서 동정춘을 빚는다. 수업 중 실습으로 만들었던 동정춘의 맛과 향이 너무 강렬해서다. 발효실에선 또 다른 팀이 빚은 동정춘이 익어 가고 있다. 3개월 교육 과정 중 매주 여러 종류의 술을 빚었으면서도 유독 동정춘에 끌리는 모양이다.


따뜻하게 데워 마시는 우리 술

요즘은 냉장고에 보관하던 술을 꺼내서 차게 마신다. 맥주도, 와인도, 막걸리도, 증류 소주도 그렇게 한다. 그런데, 술의 온도가 너무 차가우면 그 술의 향을 제대로 음미하지 못한다. 술맛도 날카롭다. 사실상 이는 좋은 방법이 아니다.


맥주는 알코올 도수가 10%~14%로 높고 단맛이 강한 임페리얼 스타우트는 온도가 15℃ 정도일 때 마셔야 향과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차가울 땐 맥주의 향을 전혀 알 수 없을뿐더러 맛이 날카로운데, 온도가 올라갈수록 향이 살아나고 맛도 부드러워진다. 냉장고에서 금방 꺼내서 마실 때와 한 시간쯤 지나고 맥주 자체의 온도가 올라갔을 때 맛과 향은 천지차이다.


알코올 도수가 높은 증류식 소주는 술의 온도가 상온에 가까울 때 마시는 게 좋다. 그래야 높은 도수에서 나오는 날카로운 알코올 향을 부드럽게 느낄 수 있다. 나이가 지긋하신 어른들은 밥을 담은 식기의 뚜껑에 증류 소주를 따라 마시던 추억을 가끔 이야기한다. 뜨거운 밥을 담았던 식기의 뚜껑에 차가운 소주를 부으면 적당하게 따뜻한 상태로 온도가 올라가 소주의 향과 맛이 확 살아나게 된다. 맛과 향이 좋아질뿐더러 추운 날 혈액 순환을 돕는다. 콩나물 해장국과 함께 마시던 모주도 그렇고, 퇴근 때 오뎅을 안주 삼아 마시던 히레사케도 그러했다. 


#전통주 #우리술 #전통주로빚은인문학 #박운석 #학이사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니데이 2025-12-07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시우행님, 안녕하세요.
제 서재에 댓글을 남겨주셔서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올해도 벌써 12월이 되어 송년 모임이 많을 시기가 되었네요.
전통주에 대한 내용 잘 읽었습니다.
따뜻한 주말 보내세요.^^

호시우행 2025-12-09 23:3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젤소민아 2025-12-08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25 서재의 달인 등극, 축하합니다~
 
마더 카브리니 - 세상 가장 낮은 땅에 희망의 제국을 일구다
시어도어 메이너드 지음, 고정아 옮김 / 니케북스 / 202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린 시절 프란체스카 카브리니는 중국에 선교를 가고 싶어헸고, 성심선교수회 역시 중국을 염두에 두고 세웠다. 스칼라브리니 주교가 프란체스카에게 그보다 뉴욕의 가난한 이탈리아 이민자들을 먼저 돕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을 때 그녀는 뉴욕도 미국도 자신에겐 너무 좁을 뿐, 전 세계 또한 좁다고 답했다. 


"동쪽이 아니라 서쪽으로 가세요, 수녀님"


프란체스카가 레오 13세 교황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야심을 드러냈을 때 운명이 결정되었다. 흰 예복을 입고 흰 모피로 가장자리를 두른 진홍색 망토를 걸친 노교황老敎皇은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이에 교황을 올려다보는 그녀에게 부드럽게 말했다.프란체스카가 거칠면서도 섬세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자 그가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사진, 카브리니의 어린 시절 모습)


위대한 운명을 개척하는 사람들이 첫걸음엔 실수하는 게 흔하다. 프란체스카 카브리니의 시작도 예외는 아니었다. 8년이란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녀의 어린 시절 꿈인 선교사와 그 거리가 점점 더 멀어지는 느낌이 들 즈음 지역 사제의 부탁으로 한 공립 학교에서 2주간 임시 교사를 맡았으나 어린 아이를 가르치는 일이 처음이라 언니에게서 배운 엄격한 훈육 방식으로 임했다. 

그런데, 봉사자 신분이었던 프란체스카와 달리 돈을 벌 목적으로 일자리를 원했던 여자들은 취업 기회를 놓치자 '엄격함'을 비난의 구실로 삼았다. 그리고 부당하게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았다고까지 비난했던 것이다. 프란체스카의 첫 실수는 교실에서의 경직된 태도였다. 

또 프란체스카는 가톨릭 금욕주의를 신봉하며 침대가 아닌 나무판자에서 자느라 건강이 더욱 나빠졌다. 당시 교구 사제 세라티 몬시뇰은 그녀를 눈여겨보다 성심수녀회에 지원하려는 걸 알고 자신의 사업에 쓸 목적으로 원장 수녀에게 건강이 나쁘다는 정보를 흘리며 거절하도록 유도하는 교활한 방법을 사용했다. 결국 프란체스카는 입회를 거절당했다. 이후 이같은 작전이 밝혀졌지만 프란체스카에겐 최선의 결과를 안겨 주었다. 

세라티 몬시뇰의 목표는 교구의 고아원 시설인 '섭리의 집'을 개혁하고자 프란체스카를 이곳에 묶어두려 했다. 그럼에도 프란체스카는 자신의 계획을 기꺼이 포기하고 고아원 시설을 개선하는 일에 참여했다. 이는 수녀로서의 진정한 수련이었다.      

프란체스카는 섭리의 집의 수녀가 되기로 한 날, 그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낼지 모르는 가운데 자신만의 진정한 선교 수녀회를 만든 셈이다. 다른 방식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섭리의 집은 괴짜 수녀 안토니아 톤디니의 성격을 생각한다면 아주 부적합한 이름이었지만, 진실로 섭리가 지혜와 힘과 사랑을 보여준 집이었다.


(사진, 책표지)

만일 성인聖人이 화를 낸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그를 성인이라고 지칭했을 때다. 그는 신과 자신의 긴밀한 관계를 알 수도 있지만 아무리 가까워도 거기 만족하지 않는다. 이 생에서는 이룰 수 없는 더 큰 완전함이 언제나 저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성인은 한순간이라도 자신이 성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때로 그렇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는 프란체스카 카브리니에게 꼭 들어맞는 사실이었다. 누가 프란체스카의 지인에게 "그분이 성인인 걸 아셨습니까?"하고 물으면 몇몇은 아주 솔직하게 대답할 것이다. "아뇨, 전혀 몰랐어요. 물론 정말로 훌륭한 분, 친절한 분이라는 건 알았습니다. 하지만 성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프란체스카는 이 대답에 만족했을 사람이다. 그녀는 항상 평범하게 보이려고 애를 썼다.

프란체스카 카브리니는 고독과 묵상을 갈망하는 사람이었지만 맹렬한 활동 역시 그녀의 기질에 맞았으리라는 생각이 들 법하다. 마더 카브리니에게 잠재되어 있던 커다란 에너지와 실행력은 기회만 있으면 발현될 수 있었다. 물론 이 모두를 신이 하사했을지도 모른다. 프란체스카는 오직 소명에 순종해서 선교수녀회의 장상 자리를 받아들였고, 그 직무를 맡아 이토록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사실은 그녀를 수줍고 예의 바른 시골 교사로만 알던 사람들에게는 충격이었다.


(사진, 마더 카브리니의 관)

성인으로 가는 길

프란체스카 카브리니는 생전에도 당대의 모든 교황에게 성인에 준하는 대접을 받았다. 레오 13세는 실제로 그녀를 성인이라 불렀고, 베네딕토 15세-1889년에 프란체스카가 미국에 가져간 교황 훈령을 작성한 델레 키에사 몬시뇰-는 그녀에게 성령이 충만하다고 말했다. 비오 10세는 그녀를 복음의 진정한 사도라고 불렀다. 

#에세이 #종교에세이 #성인 #마더카브리니 #가톨릭인물 #미국최초의성인 #시어도어메이너드 #니케북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재즈 시대 이야기 울림 2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마이너스 옮김 / 해밀누리 / 202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재즈 시대'라는 이름은 스콧 피츠제럴드 자신이 명명한 시대의 이름이다. 이는 주로 1920년대 미국의 사회, 문화, 경제적 격변기를 일컫는 용어였다. '표효하는 20년대'라고도 불린 이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종전 직후부터 1929년 뉴욕 대공황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짧지만 격렬했던 황금기였다. - '옮긴이의 말' 중에서



(사진, 책표지)

이 소설의 저자 피츠제럴드는 미국 태생으로 제1차 세계대전 참전 후 출판계로 방향을 돌려 <낙원의 이쪽>(1920)을 발표하며 일약 문단의 스타가 되었다. 소위 '잃어버린 세대'의 대표적 인물로 부상한 그는 제2차 산업혁명 이후 번영을 구가하던 미국 사회의 허영과 낭만, 그리고 몰락의 정서를 탁월하게 묘사했다. 

<재즈 시대 이야기>는 저자의 문학적 개성과 시대 인식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단편집인데 3부(마지막 플래퍼들, 환상들, 분류되지 않은 걸작들) 에 걸쳐 젤리빈, 낙타의 등, 메이데이, 도자기와 분홍색,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행복의 앙금, 산골소녀 제미나 등 총 11편의 단편소설을 싣고 있다. 

마지막 플래퍼들

또한 이 시기엔 플래퍼가 등장했다. 단발로 머리를 짧게 자르고 직선형의 짧은 드레스를 입고, 공개적으로 춤을 추고 담배를 피우는 젊은 여성들은 전통적 여성상을 거부하며 여성 해방의 상징이 되었다. 라디오와 영화, 광고 산업이 일상을 바꾸며 도시가 팽창했고, 젊은 세대는 과거의 윤리보다 현재의 쾌락을 더 중시했다. 

'젤리빈'이란 말은 옛 남부 연합 지역에서 '한평생 게으름이란 동사를 1인칭으로 활용하며 사는 사람'을 뜻한다. 즉 '나는 빈둥거린다. 나는 빈둥거려왔다. 나는 앞으로도 빈둥거릴 것이다'라는 식으로. 북부 사람들의 무심한 표현을 빌리자면 '거리의 한량閑良'이었다. 

짐 파월은 젤리빈이었다. 짐은 초록빛 모퉁이에 서 있는 하얀 집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싸움 중에 총상을 입고 죽었는데, 당시 짐은 고작 다섯 살이었다. 이후 하얀 집은 한 여인이 운영하는 하숙집이 되었다. 짐은 그녀를 '메이미 아주머니'라고 불렀는데, 매우 싫어했다. 

열여덟 살에 전쟁이 터지자 해군에 입대해 찰스턴 해군 조선소에서 일 년 동안 놋쇠를 닦았다. 브루클린 해군 조선소에서 또 일 년 동안 놋쇠를 닦았다. 전쟁이 끝난 스물한 살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동네의 한 정비소 위층에 방 하나 얻어 지내며 오후엔 차 손보는 일을 도와주며 지내고 있었다. 

4월 어느 저녁, 파티 초대를 받았다. 마을 최고의 인기남이자 짐의 같은 반 친구 클라크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컨트리클럽 파티에 초대했다. 짐은 여자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무도회장 구석의 외딴 소파에서 구경만 하는 조건으로 클라크와 함께 파티장에 들어갔다.   

"그곳엔 다 모여 있을 것이다. 그 옛 무리들, 오래전에 팔려나간 하얀 집과, 그 벽난로 위에 걸려 있던 회색 군복 차림의 장교 초상화로 보건대, 짐 역시 본래는 그 무리에 속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 무리들은 소녀들의 치맛자락이 해마다 조금씩 길어지고, 소년들의 바지가 어느 날 갑자기 발목까지 내려왔던 것처럼, 오랜 세월을 함께하며 단단한 소집단으로 자라났다. 

이름만 부르면 다 통하는 그 친밀한 사회, 이미 잊힌 첫사랑들로 엮인 그 작은 세계 속에서, 짐은 철저한 외부인이었다. 가난한 백인들과 어울려 다니는 사람. 남자들은 그를 알고 있었지만, 언제나 약간의 우월감이 섞인 태도로 대했다. 그가 모자를 벗어 인사하는 여자아이들은 세 명, 많아야 네 명. 그게 전부였다." - '젤리빈' 중에서


(사진, 젤리빈) 

재즈 시대는 1920년대와 1930년대 초 재즈 음악과 댄스가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은 시기다. 이는 미국 뉴올리언스에서 아프리카계系 미국인 문화에서 유래해 대중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엔 연 평균 9% 이상의 경제성장률을 유지하며 호황기를 누렸던 미국에선 중산층이 증가함에 따라 자동차가 대대적으로 보급된 '마이카 시대'가 열렸다.  

'젤리빈'은 남북전쟁에서 패배한 남부의 젊음을 짐 파월이란 인물을 통해 재즈 시대의 도취와 허무를 보여준다. 이어서 작품 '낙타의 등'은 낙타로 분장한 남자의 우스꽝스런 오해 속에 사랑과 체면이 뒤엉킨 희극이며, '메이데이'는 1차 세계대전 후 혼란에 바진 미국 사회를 배경으로 상류층의 환락과 퇴역 군인들의 절망이 교차하는 모습을 그린다. '도자기와 분홍색'은 욕조 속의 한 여인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도발적인 희곡극을 보여준다. 

영화에 출연해도 결코 손색이 없을 만큼 매력적인 여성 베티 메딜은 톨리도 태생의 스물여덟 살 변호사 페리 파크허스트를 사랑했다. 그리고 또 사랑하지 않았다. 너무 즐거운 인생을 보내고 있었기에, 결혼이라는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그들의 비밀 약혼은 이미 너무 길어져 언제든 무너질 듯 위태로웠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작은 키의 남자 워버튼이 페리를 부추겼다. 

“그녀에게 초인처럼 굴어! 혼인 허가증을 받아서 메딜 집에 가. 지금 당장 결혼하자고 하든가, 아니면 영원히 끝내버리라고 말해!” - '낙타의 등' 중에서

전쟁은 승리로 끝났고, 승전국의 거리는 개선문으로 가로질러졌으며 흰색, 붉은색, 장밋빛 꽃들이 뿌려져 환희로 물들었다. 길고 긴 봄날 내내, 귀향한 병사들은 둥둥거리는 북 소리와 유쾌하고 울려 퍼지는 금관악기 소리를 뒤따르며 주요 도로를 행진했다. 그동안 상인들과 사무원들은 말다툼과 계산을 멈추고, 창문으로 몰려나와 창백한 얼굴로 밀집해 지나가는 군대를 엄숙하게 바라보았다. - '메이데이' 중에서 


(사진, 고든 스테릿의 권총 자살)

환상들

이 파트는 네 개의 작품들이 소개된다. '리츠 호텔만큼 큰 다이아몬드'는 엄청난 부富를 감추고 있는 한 가족의 이야기인데, 미국식 욕망과 허영을 상징하는 탐욕과 파멸을 다룬다. '벤저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노인으로 태어나 점점 어려지는 벤저민 버튼의 생애를 통해 인생의 아이러니와 인간 존재의 덧없음을 일깨워주는 우화이다. 

이어서 '치프사이드의 타르퀸'은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 런던의 밤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로 누군가에게 쫓기는 친구를 숨겨주면서 벌어지는 풍자극이다. '오 루셋 마녀!'는 평범한 서점의 점원인 멀린 그레인저가 평생 한 여인을 멀리서 바라만보다가 기회를 놓치고 마는 이야기다.

나는 벤자민 버튼이 열두 살에서 스물한 살 사이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길게 이야기할 생각은 없다. 그 시절은 ‘정상적인 역성장’의 세월이었다는 것만 기록해두면 충분할 것이다.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 벤자민은 마치 쉰 살 남자처럼 꼿꼿했다. 머리숱은 더 많아졌고, 색깔은 짙은 회색으로 변했다. 걸음걸이는 단단했고, 목소리에서는 더 이상 노인의 떨림이 사라지고 건강한 바리톤의 울림이 났다. 그러자 아버지는 그를 코네티컷으로 보냈다. 예일대 입학시험을 치르게 하기 위해서였다. 벤자민은 시험에 합격했고, 신입생으로 등록되었다. -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중에서


(사진, 벤저민 버튼)


분류되지 않은 걸작들


마지막으로 이 파트엔 세 편의 단편 작품이 소개된다. '행복의 앙금'은 사랑과 시련 속에서도 끝내 남겨지는 감정의 잔향殘香을 그린, 깊은 여운을 남기는 비극적인 사랑을 보여준다. '미스터 이키'는 世俗化된 가족과 물질만능 사횔를 향한 풍자를 담은, 이키 가족의 기묘한 희극이며, '산골 소녀 제미나'는 격렬한 집안 싸움에 휘말리는 산골 소녀와 도시 남자의 비극적인 운명을 다룬다.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그녀를 돌봐주고 싶어 미칠 남자들이 한둘이 아닐 거에요.” 실제로 그랬다. 여기저기서 어떤 남자들은 그녀에게 다가왔다. 희망으로 시작해 경외심으로 끝났다. 그녀의 마음에는 사랑이 없었다. 단, 이상하게도 ‘삶’에 대한 사랑만은 남아 있었다. 세상 사람들에 대한, 거리에 나앉은 부랑자에게 나눠주는 빵 한 조각에서부터, 그녀에게 싼 고기를 건네는 정육점 주인에게까지 닿아 있는 사랑이었다. 다른 형태의 사랑은 이미 봉인되어 있었다. 그것은 늘 빛을 향해 고개를 돌린 채, 마치 나침반 바늘처럼 움직이지 않는 시신 속 어딘가에 묻혀 있었다. 그는 그저 마지막 파도가 심장을 덮칠 때를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 '행복의 앙금' 중에서 



다시 피츠제럴드를 읽는 이유 


우리들에게 널리 알려진 '위대한 개츠비'가 그랬던 것처럼, 그가 묘사했던 시대는 이미 지나간 것이 아니라 그 리듬이 여전히 우리의 삶 속에서 울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욕망, 허무, 그리고 사랑과 상실은 시대를 초월한 것으로 같은 박자를 연주한다. 그가 남긴 문장들은 지금도 재즈처럼 우리들 내면에 흐르고 있다. 


#미국 #재즈시대 #재즈시대이야기 #피츠제럴드 #소설 #책추천 #요즘읽는책 #위대한개츠비 #벤저민버튼의시간은거꾸로간다 #해밀누리출판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