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 인생을 다시 설계하는 무의식의 힘
존 바그 지음, 문희경 옮김 / 청림출판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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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루동안 말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얼마나 통제할까? 나아가 의식적으로 얼마나 통제하지 못할까? 더 나아가 무의식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한다면, 다시 말해서 우리가 어떤 행동을 왜 하는지 안다면 스스로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의 숨은 동인을 이해한다면 갖가지 생각과 감정과 행동의 이유를 밝혀낼 수 있을까? 그러고 나면 우리 삶에 어떤 의미로 작용할까? - '들어가며' 중에서

 

 

무의식의 세계를 배운다

 

이 책의 저자 존 바그는 미시간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뉴욕 대학교에서 약 20여 년간 학생들을 가르치고 현재 예일 대학교에서 심리학과의 제임스 롤런드 에인절 교수이자 ACME(인지, 동기, 평가의 자동성) 실험실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180종 이상의 간행물에 연구를 게재하는 등 사회 및 인지 심리학자이자 세계적인 무의식 연구자로 널리 알려졌다. 그간 연구의 공로를 인정받아 구겐하임 펠로우십과 함께 미국심리학협회의 신인과학공헌상(1989), 우수과학공헌상(2014) 등 다수의 주요 상을 수상했다.

 

이 책은 그의 첫 번째 대중 심리서로, 우리의 일상에 무의식이 어떻게 작동하며,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알려주기 위한 유익한 지식을 흥미롭게 소개한다. 그동안 우리가 몰랐던 새로운 무의식의 세계를 다양하고 놀라운 임상실험과 함께 소개함으로써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부여한다.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었는데, 1부(숨겨진 과거)에서는 우리의 과거를 들여다보고 현재의 우리가 먼 과거 진화의 역사와 지금은 거의 망각한 유년기의 기억과 성장 과정의 문화에서 어떤 영향을 받는지 알아본다. 2부(숨겨진 현재)에서는 우리의 현재를 알아보고, 마지막으로 3부(숨겨진 미래)에서는 미래 계획의 숨은 효과를 알아보고 무의식적 동기에 관한 최신 연구를 살펴본다.

 

연초에 세운 금연, 금주와 다이어트를 끝까지 실천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소위 '작심삼일'이나 '다이어트 요요현상' 처럼 스스로의 결심만으로는 인생을 바꾸지 못할 때가 많다. 왜 그럴까? 이런 때에 책은 우리들에게 무의식에 물어보라고 답한다. 결과적으로 우리들은 책을 통해 그동안 잘 몰랐던 무의식의 세계를 파악함으로써 어린 시절에 형성된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의사결정의 실패로부터 벗어나 자신이 꿈꾸는 미래를 설계해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구분은 끈질기고 집요한 착각에 불과하다"

- 알베르토 아인슈타인

 

지금껏 무의식이 우리들의 생각과 행동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해 체계적이면서 정밀하게 이를 측정하는 방법이 없었다. 여러 심리학자들의 다양한 가설과 수많은 환자들의 임상실험 사례를 토대로 부단히 논쟁이 있어왔을 뿐이다. 사실 심리학자 프로이트가 꿈에 대한 의미를 말하기 이전부터 무의식의 개념, 즉 의식 없이도 정신이 작동한다는 이론은 있어왔다.

 

심리학계의 두 거장 윌리엄 제임스와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역사적으로 만남을 가진 후 마음의 연구에 대해 과학계에선 거세게 반발했다. 심리학 연구에서 실험 참가자가 경험한 내적 경험은 동일한 사람일지라도 같은 상황에 대해서 때로는 달리 보고할 수도 있다는 지적과 함께 이를 신뢰할 만한 증거로 채택하지 않았던 것이다.

 

 

세 가지 시간대(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이 세상의 모든 생물체가 존재함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 시간이다. 이 책의 대전제는 '마음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의식적인 경험은 뇌에서 이 세 가지가 상호작용을 거쳐서 나타난 총합總合이다. 그러나 마음의 시간대를 구성하는 요소가 그리 간단하지 않다. 하나는 쉽게 확인할 수 잇지만 나머지 두 가지는 그렇지 않다.

 

기원전 3200년경, 갈색 눈의 곱슬머리 남자가 현재 이탈리아 알프스의 해발 3킬로미터 이상의 높이에 있는 바위로 덮힌 협곡에 스러져 죽어갓다. 얼굴이 바닥을 행해 추락했고, 왼팔이 목 아래 끼었다. 키 158센티미터 정도에 나이는 45세 가량이거 피부에 문신이 있고 앞니 사이가 벌어져 잇었다. 곡식과 야생 염소고기를 먹은지 얼마 안 되었고, 갈비뼈가 부러졌다. 남자는 죽었고 이후 폭설이 내려 시신이 얼음 속에 봉인되엇다.

 

언론에선 이 사람에게 외츠티라는 별명을 부여했다. 발견 후 과학자들은 이 남자의 유류품을 면밀히 분석했다. 사인을 찾고자 했다. 몸에서 기생충이 검출되었고(위에서 기생충의 알이), 손톱 검사 결과에서 만성잘환(라임병 가능성)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어쩌면 외츠티는 하약하새 협곡으로 추락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직접적인 사인은 다른 인간에게 살해당한 것이다. 즉, 2001년 X선 검사에서 예리한 화살촉이 그의 몸에 파묻힌 걸 발견했던 것이다. 개인적인 경험과는 달리 이런 먼 과거의 기억이 우리들에겐 없다.

 

2013년, 새로운 사실이 발견됐다. 외츠티에겐 자식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유전자에 의한 것이다. 그가 숨진 잔소 인근의 오스트리아 지역에 거주하는 4천명 정도의 혈액 표본을 수집, 분석한 결과 외츠티와 정확히 일치하는 19명을 찾아냈다. 외츠티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생존 욕구의 충족엔 실패했지만 다음 세대에 유전자를 물려주는 것은 성공한 셈이었다.

 

진화심리학의 초기 연구는 주로 '짝짓기'에 주목했다. 리처드 도킨스<이기적 유전자>에서도 유전자가 다음 세대까지 살아남는 게 지상 최대의 목표라고 언급한다. 번식에 관한 생물학적 명령은 오늘날에도 발현된다. 이탈리아의 한 연구가가 밝힌 실험 연구의 결과에 따르면, 이력서에 붙인 매력적인 사진이 면접의 기회를 증가시킨다는 것이다. 또 매력적인 외모는 승진의 좋은 영향을 미친다. 이처럼 매력적인 외모에 끌리는 이유는 이기적 유전자의 역사 때문이다. 즉 무의식적 영향으로 남아있는 셈이다. 

 

 

날씨가  우리들 생각에 영향을 미친다

 

"날씨는 순전히 사적인 일이다"

- 일바로 무티스, 콜롬비아 시인

 

나는 개인적으로 비오는 날씨보다 화창한 날씨를 더 좋아한다. 우리 대부분은 밝고 화창한 날이나 축처지는 흐린 날에 어떤 기분이 드는 지는 경험으로 잘 안다. 그런데, 날씨는 우리들의 기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이다. 사회심리학자 노버트 슈와츠와 제럴드 클로르는 마음과 날씨 간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실험 연구했다.

 

1983년 늦은 봄, 여성 실험자가 화창한 날이나 비 오는 날에 참가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리노이 대학교 캠퍼스에서 학생 전화번호를 무작위로 추출했다. 지금과 달리 발신자 정보라는 게 없던 시절이라 실험자는 시카고 캠퍼스에서 전화를 했다고 속일 수 있었다. 참가자의 절반에게는 "그쪽 날씨 어때요?'라고 물었고, 나머지 절반에게는 아예 묻지도 않았다. 이후 모든 참가자에게 현재 삶의 만족도에 관해 질문하고 마지막엔 행복한지를 물었다.

 

"화창한 날에 전화를 받은 학생은 비오는 날에 전화받은 학생들에 비해

전반적으로 삶에 더 만족하다고 답변했다. 행복에 대한 감정도 마찬가지 결과였다"

 

또 2003년, 미시간 대학교 행동경제학자 데이비드 허슐레이퍼타일러 섬웨이는 특정 도시의 날시가 주식시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연구하여 발표했다. 전세계 26개 주식시장의 15년 간 자료를 토대로 분석한 결과, 아침에 날씨가 흐리면 일관되게 주가의 상승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이에 합당한 합리적인 설명은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날씨가 영향을 미쳤다. 이것이 바로 무의식 아닐까. 

 

 

현재의 목표가 마음과 가치관을 변화시킨다 

 

행동을 바꾸기 위한 정책처럼 개인적인 욕구와 미래의 목표는 우리가 그 목표를 추구하는 동안, 결국에는 무의식적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주어진 목표를 추구하면서 중요한 가치관과 자아 개념을 거스르는 행동, 이를테면 평소에는 도덕적이지 않고 윤리적이지 않고 건전하지 않다고 여기는 행동을 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나중에 청구서가 날아오면 어리석고 불필요한 데 돈을 썼다고 생각할 법한 방식으로 돈을 쓸 수 있다. 여느 때라면 좋아하지 않을 사람을 좋아하고 친한 친구들을 평소보다 덜 좋아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런 변화가 현재 원하는 목표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현재 목표가 우리의 정신, 마음, 그리고 가치관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이런 변화를 인지하지 못한다.

 

 

우리는 마음을 통제한다 

 

책은 마지막 장에서 무의식의 영향을 통제하고 적절하게 활용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설명한다.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과정으로 원치 않는 무의식적 영향을 가로막거나 통제할 수 있고, 반대로 무의식적 기제를 이용해서 평소의 의식적인 방법으로 감당하지 못하는 일에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아래의 세 가지 핵심을 일상에서 적용하라고 권한다.

 

우리에겐 '자유의지'가 있다. 다만 이는 완전하고 전능하진 못하다

완전한 자유의지나 의식적 통제력이 없음을 인정한다면 실제로 가진 자유의지와 통제력은 늘어난다

무의식의 힘을 활용해서 훨씬 쉽게 스스로를 조절하라

 
실제로 자기조절을 잘하는 사람(성적도 좋고 건강하고 운동도 많이 하고 살도 안 찌고 담배도 피우지 않고 돈도 많이 벌고 행복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은 남보다 의지가 강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자기 삶을 효과적으로 조절하는 성인군자 같은 축복받은 사람들은 바람직하게 행동하면서도 덜 의식적이고 더 자동적이고 더 습관적이다. 우리도 물론 이렇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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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일런트 페이션트
알렉스 마이클리디스 지음, 남명성 옮김 / 해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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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이는 계속 잔소리를 했지만 나는 꼼작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며칠이 지나자 그이는 글을 쓰라면서 이 작은 노트를 주었다. 검은색 가죽 표지에 두껍고 하얀 백지가 묶인 노트. 나는 첫 번째 페이지를 손으로 어루만지면서 부드러운 감촉을 느꼈다. 그리고 연필을 뾰족하게 갈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 '프롤로그' 중에서

 

 

왜 그녀는 침묵했을까?

 

작가 알렉스 마이클리디스는 사이프러스에서 그리스계 사이프러스인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아메리칸 필름 인스티튜트에서 시나리오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 소설 <사일런트 페이션트>가 그의 첫 발표작임에도 불구하고 전세계 언론에서 극찬한 화제의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영화로 제작된다고 한다.

 

이 소설의 모티브는 에우리피데스의 유명한 그리스 비극 <알케스티스>에서 차용했다. 즉, 사랑하는 연인을 대신해서 죽은 여인 알케스티스를 연상시키게 한다. 신화에 따르면 남편인 아드메토스를 대신해 기꺼이 목숨을 내준 알케스티스는 헤라클레스의 도움으로 지옥에서 현세로 되돌아오지만 살아난 이후로 침묵을 고수한다.

 

"하지만 그녀는 왜 말하지 않는가?"

- 에우리피데스, <알케스티스>

 

 

일반적으로 미스테리나 스릴러 소설의 경우, 일정한 프레임을 지니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즉 잔잔한 일상의 흐름에서 갑자기 충격적인 사건이나 일이 발생되는 도입부가 있고, 이어서 이 사건이나 일의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전개과정을 거친다. 중간중간에 등장인물의 캐릭터나 성장 배경들을 서술함으로써 독자들의 스토리 이해를 돕고 나아가 향후 전개 과정을 미리 엿보게 만든다. 그리고 반드시 포함되는 게 있으니 바로 '반전'이다. 스토리의 클라이막스이자 독자의 집중을 최대한 끌어들인다. 이 소설도 그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소설의 주인공 베린슨 부부는 결혼 7년 차의 예술가 부부로 큰 저택에 살고 있다. 남편 기브리엘 베린슨은 사진가로, 아내 앨리샤 베린슨은 화가로 활동하고 있다. 앨리샤는 현재의 남편을 만나 행복한 삶을 이어가고 있으며, 나아가 남편 가브리엘은 그녀 세상의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늘 슬럼프에 빠져 어무것도 하지 못하는 그런 날의 연속이었다. 이는 심리적인 병으로 전형적인 우울증세로 보인다.

 

이에 남편 가브리엘은 아내 앨리샤의 기분 전환을 위해 예쁜 선물을 건넨다. 검은색 가죽 표지에 히얀 백지가 묶인 그런 노트였다. 남편의 의도를 알아챘는지, 앨리샤는 하루의 일상을 낱낱이 노트에 기록하면서 스스로 지친 마음을 어루만진다. 남편이 일하러 나간 후 넓은 저택에 홀로 외롭게 남겨진 그녀의 일상은 그리 거창할 것도 사실상 없다. 그림을 그리는 일외에는 고작 집 밖에 비치는 광경을 바라보거나 이웃 사람들과의 수다 정도다.

 

평범한 일상의 흐름에서 갑자기 충격적인 사고가 발생한다. 앨리샤가 그토록 사랑하는 남편을 총기 발사로 살해한 것이다. 더구나 늦게 귀가한 남편 가브리엘의 얼굴에 다섯 발이나 쏘았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는 사건이지만 이웃 주민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가브리엘은 손발목이 철사줄로 묶인 채 총에 맞아 절명해 있었던 것이다.

 

남편의 죽음 때문에 정신적으로 충격이 큰 탓인지 이후 그녀는 마치 실어증에 걸린 사람처럼 말문을 닫아 버린다. 침묵에 빠진 그녀는 과거 정신질환을 앓은 사실이 있었다는 이유로 북런던에 위치한 정신질환 범죄자 감호 병원 '그로브'에 수감된다. 가브리엘의 살해 사건은 그 진실이 외면된 채 앨리샤가 진범임을 기정 사실화하면서 그대로 묻히고 말 것인가?

 

그녀는 병원의 일인용 병실에 누워 있었다. 경찰이 그녀의 변호사가 동석한 가운데 심문을 했다. 앨리샤는 심문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백한 입술에는 핏기가 보이지 않았다. 가끔 입을 씰룩거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어떤 질문에도 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가브리엘을 살해했다는 의심을 받았을 때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체포당하는 순간에도 입을 다문 채 죄가 없다고 부인하지도, 그렇다고 자백하지도 않았다.앨리샤는 다시는 입을 열지 않았다. - 20쪽 중에서

 

이후 앨리샤의 사건에 관심을 가진 한 범죄 심리상담가가 등장한다. 테오 파버라는 인물이다. 그는 앨리샤의 이야기를 접한 후 그녀의 심리 치료를 담당하고 싶은 욕망이 일었다는 것이다. 사고 발생 후 지금껏 어느 누구도 엘리샤의 닫힌 말문을 열지 못했는데, 과연 이 상담가는 침묵의 환자 앨리샤의 입을 열게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이 사건의 전모를 파헤칠 수 있을 것인가?

 

마침내, 앨리샤는 입을 연다

 

한편, 소설의 전개는 화자話者 두 명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 그렇다. 한 명은 주인공인 침묵의 환자 앨리샤이고, 또 다른 한 명은 심리상담가 테오 파버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수감자와 심리치료를 맡은 상담가의 입장은 정반대이지만, 스토리의 전개가 이어지면서 둘 사이엔 공교롭게도 곤통점이 숨어 있다. 즉 한 사람은 젊은 시절 마리화나를 흡연했던 후유증을, 다른 한 사람은 정신병을 앓고 약물을 복용한 경험을 가졌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소설이 그렇듯, 스토리의 전개가 후반으로 치닫을수록 사건의 결말이나 사건의 진범 등을 캐치할 수 있는 내용을 살짝 드러내 놓는다. 예를 들면, 심리상담을 진행하던 테오 파버가 엘리샤에게서 두려움을 느끼는 장면, 테오 파버가 아내의 불륜을 의심하며 추적한 끝에 그 현장을 목격하는 장면, 혐의를 입증할 앨리샤의 일기 등이 바로 그것이다. 

 

앨리샤에 두려움을 느끼는 테오

 

테오, 아내의 불륜현장을 목격하다

 

앨리샤의 일기 

 

 

압도적인 데뷔작이다


그리스의 비극 <알케스티스>의 내용에 의하면, 헤라클레스의 도움으로 지옥에서 다시 현세로 귀환된 아드메토스의 아내 알케스티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이를 궁금해하는 아드메토스에게 헤라클레스는 마음을 달래는 제사를 올려야 하며 세 번째 햇빛이 다가와야 말을 할 수 있다고 답한다. 아마도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라서 다소 회복 시간이 필요함을 언급하는 듯하다. 이에 힌트를 얻는 작가는 앨리샤가 남편으로부터 배신당한 마음 때문에 입을 닫는 것으로 설정하고 있다.

 

작가는 젊은 시절 정신병원에서 일했던 경험과 나중에 직업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했던 경력 등을 되살려 압도적인 데뷔작을 창작했다. 또 대학원에서 심리학을 전공했고, 정신과 의사인 누나의 도움으로 정신병원에서 2년간 근무한 적도 있었기에 정신질환자들과 의료진에 관한 상황도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곧 여름이다. 휴가 때 시원한 물에 발 담그고 이 책을 읽는다면 더위도 잊을 수 있을 듯해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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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민석 한국사 능력 검정시험 기출문제집 중급편 기출문제집 + 기출해설집 세트 - 전2권 - 3, 4급 시험 대비, 핵심 키워드 연표 제공
설민석 지음 / 단꿈드림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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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먼저 개인적인 얘기부터 해보려한다. 나의 딸은 현재 고등학교에서 한국사를 가르치는 선생님이다. 평소 역사에 대해 관심이 많아서 나는 역사도서라면 가리지 않고 역사드라마도 빼놓지 않고 챙기는 스타일이었다. 심지어 역사만화까지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집엔 역사와 관련된 도서들이 정말 많은 편이었다. 특히, 내가 자주 읽는 사기, 십팔사략, 초한지, 삼국지의 경우엔 만화 전집이 있어서 두 딸들도 이를 자주 읽었고 때론 나에게 읽어 달라면서 잠자리에 들곤 했다.

 

 

국민이라면 한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어느 날, 딸이 나에게 시간날 때 한국사 능력시험 한번 도전해보라고 권했다. 그러겠다고 답해 놓고서는 차일피일 미루다가 거의 일년은 지난 듯하다. 요즈음 나는 회사 경영에서 은퇴를 하고 고문직을 맡고 있기 때문에 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시간이 나는 편이다. 그동안 자주 만나지 못했던 학교 친구나 지인들과의 모임에 빠지지 않는 게 술인데, 딸은 이를 경계하면서 나에게 권한 게 바로 한국사 다시 공부하기였다.

 

한국사 강의와 관련해 몇 권의 책들이 시중에 발간되어 있었는데, 이 중에서 딸에게 추천받은 게 설민석 쌤이 진행하는 이 책이었다. 이 책은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미 매스컴을 통해 우리들에게 얼굴을 알린 역사전문가 설민석 쌤이 대표로 재직 중인 단꿈교육에서 출간되었다. 기출제된 문제들을 설민석 쌤이 해설하고 있는데, 크게 3개 파트로 구성되어 테마 36개로 출제 경향을 파악하고, 제34회에서부터 제37회까지 이미 출제된 문제를 실제로 풀어보며, 이어서 이에 대한 꼼꼼한 해설이 뒤따른다.

 

 

이렇게 기출 문제집기출 해설집 2권이 세트인데, 이 책은 인터넷 강의를 통해 시험을 준비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인터넷 강의는 설민석 쌤이 대표로 재직 중인 (주)단꿈교육의 회원으로 가입하면 소정의 수강료를 결제한 후 인터넷 사용이 가능한 어디에서든 자신이 공부할 수 있는 시간에 언제든지 수강할 수 있다.

 

그런데, 당초 이 책을 배송받을 때만 하더라도 수강에 집중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지방에서 진행하고 있는 회사일에 다소 문제가 생겨 이를 해결하는 일에 투입되다 보니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지금도 여전히 부족한 공부를 토대로 이 체험기를 쓰려니 오히려 미안한 마음까지 앞선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한번 더 체험기를 올려봐야겠다.

 

   

 

이 책으로 공부하면 마치 수업 현장에서 강의를 듣는 것처럼 이해하기 쉽고 재미있게 문제 풀이를 한다. 특히, 설민석 쌤이 시험에 출제될 가능성이 높은 포인트를 콕 짚어주기 때문에 효울적인 시험준비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핵심 정리 코너를 별도로 배치하여 수험생들이 헷갈려하고 반드시 암기해야 하는 개념을 잘 정리해놓고 있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도 홀로 공부하는 수험생에 딱 맞게 정리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래서 인터넷 강의를 수강하다 보면 단꿈에서는 이렇게 강조한다.

 

 

 

 

 

자, 이제 인터넷으로 수강하면서 체험했던 부분들을 소개해 보려 한다. 비록 전체 강의를 모두 수강하지 못했지만 수강했던 내용들 중심으로 이 글을 쓴다. 지구상의 역사에서 단일 왕조로서 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는 신라 왕조 뿐이다. 혹자는 로마제국을 거론하기도 하지만 설 쌤은 로마의 경우 공화정으로의 변신이 있었기에 단일 왕조로 보기엔 미흡하다는 해설이었다.

 

아무튼 신라의 역사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따르면 상대上代, 중대中代, 하대下代로 구분되어 있는데 시험 출제에서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문제가 번성기인 중대 시기에 재위한 신문왕에 관련된 내용이라고 설명했다. 신문왕은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문무왕의 아들로 왕권 강화에 힘썼다고 한다. 특히, 패망한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을 흡수하기 위해 설화까지 활용해서 마치 하늘이 통일신라를 돌봐주는 것처럼 했다는 설명이다. 바로 '만파식적萬波息笛' 설화였다.

 

이는 일연의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설화인데, 나라의 모든 근심과 걱정이 해결된다는 신라 전설상의 피리다. 죽어서 바다 용이 된 문무왕과 하늘의 신이 된 김유신이 합심하여 동해의 한 섬에 대나무를 보냈다. 이 대나무를 베어서 피리를 만들어 부니, 적의 군사는 물러가고, 병은 낫고, 물결은 평온해졌다고 한다. 이는 삼국을 통일한 이후 흩어져 있던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의 민심을 통합해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호국 사상과 모든 정치적 불안을 잠재우고 평화가 오기를 소망하는 신라인들의 염원이 담겨 있다.

 

성골의 대가 끊기고 이후 진골 출신의 김춘추 계열이 왕위를 계승했던 중대 시기엔 정치적으로 다소 불안정했던 모양이다. 이렇게 설화가지 만들어 정치적으로 이용했으니 말이다. 아무튼 신문왕은 삼국시대의 영토를 그대로 본받아 과거의 신라, 고구려, 백제 영토에 각각 3개 주를 편성함으로써 평등하게 예산을 배정했고 군의 주둔도 1개주에 1개(발해와 맞닿은 주엔 2개)를 배치했다. 아래는 강의시의 장면들이다.

 

왕권과 신권의 관계 추이

 

만파식적 설화

 

        신문왕의 포용정책

 

 

이어서 하대 시기엔 진성여왕과 해상왕 장보고에 관련된 내용들이 출제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한다. 신라의 여왕 세 명 중 가장 정치를 엉망으로 한 인물이라는 해설이었고, 공권력이 지방 곳곳에 미치지 못하자 지방 호족들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나중에 고려 창업의 주역들이 된다는 설명을 곁들였다.

 

그리고 이때 나라의 재건을 위해 당나라에서 벼술을 하던 천재 최치원(육두품)이 귀국하여 왕에게 시무십일조라는 개혁안을 건의했으나 거절당함으로써 육두품 세력 또한 고려 창업의 주역으로 돌아서고 말았고, 흉년이 들어 수탈에 반기를 든 원종과 애노의 농민 반란 등 정치적 상황을 강의했다. 이런 상황에서 장보고는 국가를 위협할 정도로 세력이 강성했다고 한다. 보고를 짱 잘하는 사람으로 암기하란다,ㅎㅎ 

 

 

신문왕과 진성여왕의 출제 빈도가 높음

 

 

누구나 능력시험에 합격할 수 있다

 

 

 

 

책은 충분한 도식과 도표로 이해를 돕고 있으며, 출제 빈도를 빅데이터로 제시함에 따라 공부하는 사람은 누구나 쉽게 효율적으로 공부에 임할 수 있으므로 능력시험에 충분히 통과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 생긴다. 비록 이번 5월에 시행된 시험엔 도전하지 못했지만 앞으로 충실하게 준비하여 다음번 회차에 도전하려 한다. 설민석 쌤이 핵심을 콕 짚어주기에 크게 무리가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능검에 관심있는 모든 분들에게 이 책의 필독을 권하고 싶다.

 

한국사 능력검정시험 프리패스  https://pass.dankkum.com/Event/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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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유토피아 십승지를 걷다
남민 지음 / 믹스커피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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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학술서적이 아닌 역사 속 인물들의 발자취를 따라 힐링 명소를 찾아가는 '역사기행서'이자 '감성여행서'다. 선각자들의 지식을 빌려 미흡한 공부를 하고 현장을 찾아가 향토사학자와 마을 원로들에게 탐문하면서 스토리를 완성해나갔다. 그 때문에 이 책의 역사 속 이야기는 정사와 야사, 구전, 그리고 실제로 살아온 사람들의 사례가 공존한다. - '프롤로그' 중에서

 

 

한국엔 십승지라는 유토피아가 있었다

 

이 책의 저자 남민은 오랜 여행을 통해 여행의 개념을 새로 쓰고 있다. 여행이란 단순히 놀러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바꿔 가는 고품격 문화생활이자 평생교육임을 강조한다. 마을마다 품고 있는 역사와 문화를 통해 우리가 즐기며 배울 점을 찾는 인문학 여행을 만들어가고 있다. 또한 매년 이탈리아에서 서양미술사와 르네상스 문화예술, 유럽사를 공부하며 우리나라 문화관광자원의 재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경희대학교 관광대학원 석사학위, 이탈리아 로마 A.M.I 아카데미아 르네상스 미술사 과정 디플로마, 피렌체 트릴로음악학교 예술경영 마스터클래스 디플로마를 각각 취득했던 그는 현재 국내 주요 기업, 공무원, 대학, 도서관, 기관 등에서 여행 인문학 강연과 리더십 강연 및 리더십 트립을 인기리에 진행하고 있다. TV와 라디오를 통해 여러 차례 인문여행 해설을 했으며, 유력 포털사이트에 여행 인문학 글을 연재했다. 저서로는 <근현대사를 따라 떠난 여행>, <내 인생에 잊지 못할 대한민국 감성여행지> 등이 있다.

 

예언서로 불리는 <정감록>에는 총 열 곳의 십승지가 나온다. 조선 최고의 술사가 소백산을 지나는 길에 말에서 내려 배알했다고 하는 영주 풍기, 서애 류성룡 선생의 일가족이 은둔한 땅이자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지 않고 숨어 살았다는 신비로운 이야기가 전해지는 봉화 춘양, 숨어 살면 어떠한 변고가 일어나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보은 속리산, 백두대간과 지리산 바래봉이 에워싸고 있어 외침으로부터 안전하게 방어할 수 있는 남원 운봉, 6·25 전쟁 때 마을을 둘러싼 높은 산들이 총알받이 역할을 해주어 주민들을 무사히 지켜낸 예천 금당실이 그곳이다.

 

또한 공주 유구, 마곡은 일제강점기 때 평안도 주민들이 베틀을 싣고 들어와 정착한 곳이며, 영월 연하리, 미사리, 노루목은 주민들이 6·25 전쟁이 일어난지도 모르고 퇴각하는 인민군이 살아남기 위해 찾아왔다고 한다. 무주 무풍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신변을 담보하기 위한 99칸의 행궁이 지어졌으며, 여기에 깊은 계곡이 '사람을 살리는 땅'이자 허균이 <홍길동전>의 소재가 된 부안 변산, 몸을 영구 보전할 수 있는 최상의 피신처로 알려진 합천 가야도 있다.

 

 

 

 

기원전 221년,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정권의 안정화를 도모하고자 잔인한 폭압정치를 펼쳤다. 그의 독재정치는 백성들에게 사지를 짖어 죽이거나 삼족을 멸하는 등 가혹한 형벌을 내리는 공포정치였다. 어쩌면 현 북한의 김씨 왕조도 이를 본받아서인지 매우 닮아있다. 기록상으로는 진나라 2천만 명 백성 중 100만 명 넘게 죽어나갔다고 한다. 이에 살고 싶은 백성들은 살 곳을 찾아 은둔할 수밖에 없었다.

 

한참 세월이 흘러 기원후 4세기 동진東晉 시절, 중국 후난성의 무릉武陵에 사는 한 어부가 강을 거슬러 오르다가 길을 잃고 말았다. 그가 가던 계곡의 양편엔 복숭아꽃이 만발해 있고 큰산과 수원지, 그리고 작은 동굴이 나타났다. 어부는 배를 묶어놓고 비좁은 동굴 소로를 기어들어갔다. 세상에 이런 일이! 그의 눈 앞엔 별천지가 펼쳐졌다. 동굴 안엔 넓은 평지의 논밭과 예쁜 꽃, 그리고 새소리로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낯선 이의 방문이 신기해서 어부에게로 몰려들었다. 어부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음식을 대접하면서 어부의 사연을 듣더니 자신들의 조상은 진나라 때 전쟁을 피해 이 산속에 숨어들어와 이곳에서만 살았다는 것이다. 이는 중국의 시인 도연명<도화원기桃花源記>에 실린 내용이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폭정에 시달린 백성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은둔의 땅을 찾아 떠났다. 이들은 이런 곳을 '이상향理想鄕'이라고 생각했다. 서양에선 아틀란티스, 아발론 섬, 엘도라도가 있으며, 중국에선 무릉도원, 샹그리라, 삼신산 등이 그러하다. 또 종교에서도 낙원은 빠지지 않고 얘기한다. 불교의 서방정토(극락세계)와 기독교의 에덴동산이 바로 그것이다. 서양에서 말하는 유토피아는 '실존하지 않는 상상 속의 세상'이란 의미가 강하다.

 

그렇다면 동양에 위치한 한국 땅에는 이런 이상향이 있었을까? 이상향의 의미를 죽임을 당하는 고통의 현실을 벗어나 생존을 위한 장소로 규정한다면, "있다"라고 답할 수 있다. 그곳이 바로 '십승지十勝地'다. 이는 정감록에서 언급하고 있는 '생명을 보전할 수 있는 곳'이다. 서양이나 중국의 이상향과는 달리 한국의 십승지는 그 실체가 확실하다. 정감록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미래의 국운을 예언한 도참서이자 살아남기 위해 '십승지'라고 하는 피신처에 찾아가는 비법을 제시한 비결서다.

 

정감록은 지은이가 불분명하고 언제 쓰여졌는지조차 분명치 않다. 수많은 이들의 손에 의해 필사로 전해져 왔기에 그 종류가 무려 육칠십종에 이른다고 한다. 아무튼 이씨 조선왕조가 국운을 다한 후 800년을 이어갈 정씨 왕조가 계룡산에서 등장하고, 이어 조씨의 1천 년이 가야산에서, 다시 범씨의 600년이 전주에서 이어진다고 했으니 정감록은 감히 세상에 내놓을 수 없는 이른바 '금단禁斷의 서書'였다. 그 누구도 천기누설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경북 봉화 춘양春陽

 

정감록의 지명은 옛 지명이라 혼란스럽지만, 현재 주소지로 말하면 알기 쉽다. ㅇ이곳은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도심리 일대이다. 태백산 남쪽 거대한 산들 속에 둘러싸인 분지에 여러 마을이 옹기종기 모여 산다. 옛날에는 산으로 철저히 외부와 차단된 마을이었다. 계곡의 물줄기인 운곡천 협곡 외엔 도무지 들어갈 틈이 없다. 정감록엔 이곳을 2천 년 전의 작은 부족국 소라국召羅國의 옛터라고 표기하고 있다. 

 

춘양 도심촌은 풍산 류씨에겐 생명을 보존할 최후의 이상향이었다. 임진왜란 때 집단 이주했으며, 이후에도 세상이 어지러울 때마다 이곳의 향수를 찾아들었다. 선조가 왕궁을 버리고 명나라로 피란을 계획하자 당시 좌의정이던 류성룡은 3살 위 형의 해직을 왕에게 간절하게 읍소했다. 형이 팔순 노모를 전란 속에서 보필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임금과 벼슬아치들은 모두 북으로 피신하는데, 류성룡의 형은 반대로 왜군과 마주칠지도 모를 남쪽으로 향했다. 왜 그랬을까? 그의 고향은 경북 안동 하회마을이다. 그는 노모와 풍산 류씨 일족 100여 명을 인솔해서 '살아남을 수 있는 땅' 춘양 도심촌으로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 땅이 십승지임을 알고 있었기에 그리 했던 것이다. 실제로 도심촌의 류씨 일족은 단 한 명도 다친 이가 없었다고 한다.

 

명의 지원군이 한양에 입성하고, 이순신 장군이 해전에서 크게 왜를 물리침으로서 종전이 거의 확실시되자 선조와 북인세력들은 노골적으로 서애 류성룡을 제거하여 했다. 이에 서애는 스스로 사직을 청하고 결국 파직되고 만다. 공교롭게도 절친 사이인 이순신 장군이 이날 새벽 전사한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사망엔 3가지 설이 뒤따른다. 첫째는 전사戰死, 둘째는 자살, 셋째는 은둔이다. 여기서 은둔설의 장소가 바로 춘양 도심촌이다. 

 

이순신의 장렬한 전사가 역사의 정설이지만 자살이나 은둔을 했다고 해도 이 또한 그의 우국충정을 시기하고 국난 앞에서 당쟁과 입신양명에만 혈안이 되어 있던 실권자들의 희생양일 뿐이다. 서애 류성룡 선생은 이순신 장군보다 3살 위이지만 어릴 때부터 서울 건천동(현 중구 인현동)에서 자라면서 평생 동지로 살아왔다. 문관이던 서애는 무관인 이순신의 뒤를 항상 돌봐주었다. 춘양 도심리는 십승지라는 이유로 류성룡과 형 운용, 모친, 그리고 100여 명의 일족이 전란에 피신했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고, 이에 이순신 장군마저 은둔해 살았다는 설까지 품고 있는 마을이니 보통 마을은 아니다.

 

 

전남 남원 운봉

 

운봉은 지리산 북서쪽의 바래봉 기슭에 위치, 남원시에서는 가까운 동쪽에 있다. 해발 200미터 대의 남원시와 비교하면 운봉은 고원지대에 속한다. 남원은 섬진강 수계를 가졌고, 운봉은 낙동강 수계를 가졌다. 역사상 남원은 백제 땅이요, 운봉은 신라 땅이기에 지금도 경상도 방언이 남아 있다. 그 경계선이 여원치다.

 

난세엔 전국 각처에서 민초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어 정착했다. 동쪽엔 팔랑치가 있고, 서쪽엔 여원치가 있고, 북쪽엔 덕유산 자락이 막았으며, 남쪽은 지리산 바래봉이 병풍처럼 버티고 있어서 사면이 자연 성벽을 이루고 있는 형세다. 경상도 방향에선 팔랑치, 전라도 방향에선 여원치를 넘어야 비로소 이곳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이 두 고개만 방어하면 안전한 십승지가 되는 것이다.

 

남원 지방의 설화를 고증한 결과, 놀부와 흥부는 실존 인물임이 밝혀졌다. 놀부인 형은 박첨지, 동생 흥부는 춘보가 실존 인물이다. <흥부가>의 '제비 노정기'와 '박타령' 속에 나오는 지명을 고증해서 밝혀진 곳은 운봉고원 한 켠에 있는 인월면 성산리가 놀부와 흥부의 출생지였고, 훗날 흥부가 전국을 유랑하다 돌아와 정착해 복받은 곳은 이웃 아영면 성리였다고 한다. 이 두 마을은 아직도 놀부와 흥부를 위한 제를 올리고 있다. 삼월 삼짇날 박첨지 제사를 지내고 정월 보름에는 춘보망제를 지낸다.

 

이 성리에는 수십 년 전까지도 사금을 채취하러 사람들이 모였다. 그렇다면 흥부도 실제로 이 사금을 캐서 부자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성리 근처는 정감록에서 십승지로 꼽아 임진왜란 때 각지에서 사람들이 찾아와 살았다고 한다. 남원 운봉은 이러한 판소리 소재 발원지인 동시에 동편제를 탄생시킨 고장이기도 한데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닐 듯하다. 

 

 

 

전북 부안 변산

 

십승지 중 유일하게 서쪽 해안가에 위치하고 있다. 왜구의 잦은 노략질로 인해 해안 지역은 마땅한 피신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부안 변산은 당당하게 십승지에 이름을 올렸다. 왜냐하면, 변산의 바다와 들판, 그리고 깊은 계곡이 '사람을 살리는 땅'이었기 때문이다. 소설가로 알려진 허균이 관직에서 파직된 후, 변산 우반동 정사암靜思庵에 들어와 <홍길동전>의 이상국가 모티브를 발견했고, 반계 유형원도 변산의 우반동에 들어와 <반계수록>을 집필했다. 


우반동은 원래 유형원의 선조인 유관에게 세종이 내린 사패지賜牌地가 있었으며, 유형원의 할아버지 유성민이 벼슬(형조정랑)을 마친 후 내려와 별장을 짓고 살던 곳이기도 했다. 이 모습을 보면 도연명이 항쟁의 소용돌이를 피해 관직을 버리고 향리로 내려가 전원생활을 하며 여생을 보낸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보는 듯하다. 은둔의 땅은 그렇게 이들을 보듬어 안았다.

 

우반동에 정착한 유형원은 북서쪽 산 중턱에 반계서당을 짓고 독서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이때 읽은 책이 무려 1만 권에 달했다고 한다. 정치는 물론 전국을 여행하며 익힌 경제와 지리, 병법에 이르기까지 다루지 않은 분야가 없었다. 이곳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은 유형원은 "옛사람들이 말하기를 고요한 후에야 안정을 얻을 수 있고 생각도 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 말이 맞도다"라고 하며 자신의 생활에 만족했다고 한다.

 

 

 

영월 연하리, 미사리, 노루목

 

십승지 마을 중 영월은 가장 북쪽에 위치한다. 태소백의 기운을 받아 사람을 살리는 마을로 유명세를 떨쳣다. 얼마나 운둔의 땅이기에 주민들은 한국전쟁이 일어난지도 모르고 살았을까? 당연히 피난길을 떠난 사람도 없었고, 오히려 퇴각하던 인민군과 빨치산이 살아남기 위해 이곳을 찾아들어왔다니 웃지 못할 사연 아닌가 말이다.

 

16세기 초반, 정치적으로 급진 개혁을 추진하던 조광조는 위훈삭제라는 훈구파의 척결을 부르짖다가 오히려 역풍을 맞았다. 당시 중종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신진사림파들은 유교적인 이상사회를 건설하는 게 목표였다. 하지만 '조초위왕'이라는 사건에 휘말려 중종조차 이들의 개혁을 의심하면서 결국 1519년(중종 14년)에 조광조를 비롯한 70여 명의 신진사림파들이 숙청되고 사약을 받는다. 이것이 바로 기묘사화己卯士禍다. 젊은 나이에 사림의 영수가 된 조광조는 꿈을 펴보지도 못하고 39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후 조광조의 후손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한양을 떠나 숨어든 곳이 바로 영월 미사리未死里다. 삶에 대한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애절했던지 이곳을 '죽지 않는 마을', 즉 미사리라 불렀다. 오늘날 김삿갓면 와석2리다. 한양 조씨가 이곳에 한때 40가구가 살 정도로 몰려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이 정착한 곳을 조촌趙村이라고 불렀다.

 

 

 

십승지, 선조들의 풍수 결과물이다

 

십승지로 거론되는 곳들은 한결같이 주위에 높은 산으로 둘러처져 있다. 한국 풍수론의 대가 최창조 전 서율대 교수는 "풍수란 이 땅에서 살아온 선조들의 딸에 관한 지혜의 집적"이라고 설명했다. 즉 풍수는 종교와 같은 신앙의 개념이 아니라 삶의 지혜를 축적해놓은 결과물이라는 의미다. 결과적으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자신의 이상향이므로 십승지는 앞으로도 영원할 것이다. 올 여름 국내여행을 계획하는 분들에게 이 책과 함께 십승지를 적극 추천하고 싶다.

 

 

"컬쳐300으로부터 무상으로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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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 슈필라움의 심리학
김정운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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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높은 지위에 올라가도 나만의 '슈필라움'을 만들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유명 디자이너의 비싼 인테리어 가구로 공간을 가득 채운다고 '슈필라움'이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내 취향과 관심이 구현된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보잘것없이 작은 공간이라도 내가 정말 즐겁고 행복한 공간, 하루종일 혼자 있어도 전혀 지겹지 않는 공간, 온갖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꿈꿀 수 있는 공간이야말로 진정한 내 '슈필라움'이다. - '프롤로그' 중에서

 

 

주체적 공간의 의미를 찾아서

 

이 책의 저자 김정운문화심리학자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이자 화가다. 고려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베를린자유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디플롬, 박사)했다. 독일 베를린자유대학교 전임강사 및 명지대학교 교수를 역임했으며, 일본 교토사가예술대학 단기대학부에서 일본화를 전공했다. 2016년 한국으로 귀국한 후 여수에 살면서 그림 그리고, 글 쓰고, 가끔 작은 배를 타고 나가 눈먼 고기도 잡는다. <중앙선데이> '김정운의 바우하우스 이야기'를 연재 중이며 <에디톨로지>,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남자의 물건>, <노는 만큼 성공한다> 등을 집필했다.

 

책은 '슈필라움'이라는 독일어 단어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의 말로는 이에 합당한 한국어 번역이 없는데, 굳이 하자면 '여유 공간' 정도로 표현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슈필라움'은 '슈필(놀이)''라움(공간)'의 합성어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율의 주체적 공간'을 의미한다. 즉 물리적 공간은 물론이고, 심리적 여유까지 포함하는 그런 말인 것이다.

 

저자는 한때 문화심리학자로 유명세를 떨치며 공중 매체에도 자주 출연할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뭔가의 깨달음을 얻고선 안정적인 직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교수직을 벗어던지고 홀연히 일본으로 그림 공부한다고 유학길에 올랐다. 이후 귀국해서는 화가로서의 인생을 펼치고자 서울이 아닌 지방 도시 여수에서 간섭받지 않는 주체적인 삶을 누리고 있다.

 

왜 그는 여수에서의 생활을 선택했을까?라는 궁금증을 불러 일으킨다. 이 책의 내용이 바로 그 해답을 보여주는 셈이다. 책에는 24가지의 키워드가 등장하는데, 이는 결국 모두 '슈필라움'으로 통한다. 세상의 모든 길이 세계 최강 로마제국으로 통한 것처럼 말이다. 즉 '슈필라움'이 우리 현대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또 어떤 역할을 하는지, 그리고 나아가서 어떤 삶을 새롭게 꿈꿀 수 있는지를 성찰하게 하는 그런 시간을 갖도록 해준다. 책의 내용은 지난 몇년 간 조선일보에 '김정운의 여수만만 麗水漫漫'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던 글을 모은 것이다.

 

 

 

 

 

나는 딸 둘을 가진 가장으로서 사십대 초반에서 오십대 후반까지 절정의 직장 생활을 보냈다. 일이 좋아서 회사와 결혼했다고 할 정도로 소위 '주인의식'이 충만한 직장인이었다. 그래서 결혼까지도 늦은 만혼이었다. 대학에서 강의하던 노처녀를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생활 덕분(?)에 행운을 차지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내 삶의 사전에는 오직 '회사' 뿐이었다. 그래서 늦게 결혼한 아내조차도 나에게 회사 어딘가에 '꿀단지'를 숨겨 놓았는지 연신 궁금해했다.

 

그렇다. 지금 생각해보니 비록 주체성은 완벽한 게 아니었을지라도 회사엔 나만의 집무공간인 임원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난 이곳에서 회사의 현재와 미래를 위한 청사진을 만들면서 직원들을 독려하는 지휘소로 활용했었다. 심지어 나는 이 방을 간단한 숙식까지 해결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 놓고 있었다. 접이식 간이침대와 세면도구, 커피포트, 사발면 두세 박스, 심지어 양말과 내의 그리고 여벌의 정장과 와이셔츠 등이 늘 준비되어 있었다. 나만의 독립공간은 심리적으로 나에게 편안함과 여유를 제공했고 반대 급부로 나의 비싼 노동을 착취하고 있었다.

 

다음으로 아내와 관련된 얘기를 해보겠다. 현재 거주하고 있는 아파트에 아내만의 작은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이른바 작은 법당이다. 아내가 직접 마련한 곳으로 여기서 새벽 예불로 하루를 시작하고 잠자기 전 예불로 하루 일과를 마친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신앙 생활을 했던 터라 이런 삶이 아내에겐 매우 익숙한 의식이다. 그리고 나 또한 향 냄새를 좋아할 뿐만 아니라 아내의 경전 읽는 소리를 따라 흥얼댄다. 서당개 삼년에 풍월을 읊는다고 하지 않던가.

 

마지막으로 아이들도 어릴 적부터 독립된 자기만의 방이 있어서 사생활이 보호되었기에 이를 매우 만족해했다. 가끔 아내는 같은 여성인지라 아이들 방에 침입해서 야단치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엉뚱한 일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방임주의식 교육법을 채택하고 있던 나는 이런 문제로 아내와 가끔은 티격태격하기도 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하면서 만수산 더렁칡을 읊어대면 아내는 한동안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렇다. 위의 세 가지 상황은 모두 저자가 말하는 '슈필라움'으로 통한다. 여기서 저자가 강조하고 싶은 부문은 바로 주체성과 자율성에 있다. 스스로 생각한 바가 있어서 그 목적에 합치하는 독립된 공간이어야만 진정한 '슈필라움'이라는 것이다. 단순히 공간이라면 나치 치하의 수용소도 '슈필라움'이냐는 질문을 던진다. 심리적으로 불편할 뿐만 아니라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부재하는 이런 곳은 결코 '여유 공간'이 아닐 것이다.

 

 

 

바닷가 작업실 미역창고 

 

 

"인생을 바꾸려면 공간을 바꿔야 한다"

 

이는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의 말이다. 저자가 불현듯 일본화를 배운다고 한국을 떠나 일본으로 공간을 바꾸고, 이후 여수 바닷가의 '미역창고'를 구입해 작업실인 미역창고美力創考로 활용하는 것도 결국엔 자신만의 주체적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일환인 것이다. 5톤 트럭 한가득 서울에 있던 책을 섬으로 가져와 서재를 꾸미고 그림도 그리면서 집필활동도 이어가려 한다. 저자는 우리들에게 묻는다. "당신만의 슈필라움이 있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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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성지 2019-05-31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만의 공간이 필요한데 아직 마련은 못하였네요. 아내의 작은 공간인 법당에서 하루의 시작과 마무리를 겸하는 모습이 연상됩니다. 삼보에 귀의하는 생활로 하루를 열고 닫는 일만으로도 감사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