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동서대전 - 이덕무에서 쇼펜하우어까지 최고 문장가들의 핵심 전략과 글쓰기 인문학
한정주 지음 / 김영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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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8세기를 중심으로 멀게는 14세기부터 가깝게는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조선을 비롯해 중국, 일본 그리고 서양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문장가 혹은 작가들이 선보인 글쓰기의 미학과 방법을 교차 비교해 살펴보면서 "어떻게 글을 써야 할까?"라는 문제에 대해 필자 나름대로 접근해 본 작업의 결과물이다. - '들어가는 글' 중에서

 

 

동서양 글쓰기의 핵심은 무엇일까?

 

18세기 조선을 강타한 동심童心의 글쓰기는 무엇이었는가? 신세계를 향해 떠난 미친 선비 서하객의 60만자 일기에는 어떤 욕망과 포부가 담겨 있었는가? 조닌 계급의 애욕과 삶을 대변한 이하라 사이카쿠의 소설은 어떤 시대적 상황 속에서 태어났는가? 풍자의 글쓰기가 유행했던 18세기 영국과 19세기 일본의 제국주의 사회는 어떻게 서로 닮아 있었는가? 서양의 마르코폴로에서 중국의 이탁오와 공안파, 그리고 조선 호모 스크립투스 심노숭에 이르기까지 39명의 동서양 글쓰기 천재들로부터 글쓰기의 모든 것을 살펴볼 수 있다.

 

 

"모든 전위 문학은 불온하다", 이는 고故 김수영 시인의 문장론이다. 전위 문학을 고전에 적용하면 '기궤첨신奇詭尖新'한 문학이다. 여기서 기궤奇詭란 '기이하고 괴이하다'는 뜻이고, 첨신尖新이란 '날카롭고 새롭다'는 말이다. 조선에서 기궤첨신한 문학의 대표 작가로는 스승 이익을 넘어 문원文苑(재야 문단)의 권력을 지배했던 혜환 이용휴를 꼽을 수 있다.

부채를 흔들어 바람을 일으키고, 물을 뿜어 무지개를 만든다. 재 가루로 달무리를 이지러뜨리고, 끓는 국으로 여름철 얼음을 만든다. 나무로 만든 소를 걸어가게 하고, 구리로 만든 종을 스스로 울게 한다. 소리로는 귀신을 불러오고, 기운으로는 뱀과 호랑이를 막아낸다. 서방 세계의 끝에서부터 동해 바다의 끝까지를 상상 속에서 눈 깜빡할 동안에 한번 둘러보고, 천상 세계에서부터 지하 세계까지를 생각 속에서 순식간에 도달한다. 백세百世 이전의 과거로 거슬러올라가 그 세상을 기록하고, 천 년 이후의 미래를 미루어 헤아려 그 세상을 예측한다. 비록 지나가버린 옛날의 수많은 철인哲人들도 오히려 타고난 재주와 주어진 역량을 다 발휘하지 못했다. 이렇게 거대한 직관과 지혜 그리고 거대한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피와 살덩이에 불과한 7척 몸뚱어리에 부림을 당해서 주색과 재물과 혈기에 빠져서 지낸다면 어찌 크게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 - '이용휴, <혜환잡저>, 조운거 군에게 주다' 중에서 

마치 상상 속 동물인 곤어鯤魚와 대붕의 변신과 비상을 담은 우화를 통해 자유정신을 묘사한 <장자> '소요유逍遙遊' 편을 읽는 것 같다. 특히 상상을 통해 서방 세계의 끝에서 동해 바다의 끝까지 그리고 천상 세계에서 지하 세계까지를 경각頃刻의 시간에 일주한다는 발상과, 백세 이전의 과거를 기록하고 천 년 이후의 미래를 예측한다는 묘사는 이용휴가 문장 속에 담은 기상과 기백이 얼마나 거대하고 담대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이용휴의 잠언 <환아잠還我箴>은 유학사 최고의 이단자 이탁오의 <동심설>을 다시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환아잠>에서 이용휴는 본래의 나를 순수한 천리로 본 다음, 성장하면서 생겨나는 지각과 견식과 재능이 도리어 순수한 천리를 해쳐 참다운 나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논리를 구사하는데, 강명관 교수는 이용휴의 <환아잠>이 이탁오의 <동심설>을 18세기 조선 버전으로 번역한 것이라고 하면서 두 글의 논리가 완전히 동일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왜 이용휴는 <동심설>을 직접 인용하지 않았던 것일까? 강명관 교수는 그 까닭을 "당시의 조선 지식인이 도저히 공개적으로 언급할 수 없는 이탁오의 이단성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사유의 연장선상에서 이용휴는 "모든 성인은 지나가는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언사까지 서슴지 않았다. 주자 성리학적 이데올로기를 전면적으로 거부한 이탁오의 이단적 사유를 이용휴 자신의 글에 담았던 것이다. 생명체의 진화와 혁신은 '돌연변이의 출현'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러한 법칙은 문장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당대 사람들에게 낯선, 즉 익숙하지 않은 실험적이고 창조적인 문장은 대개 기이하고 괴상한 문장으로 취급받아 배척당하기 일쑤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에는 이러한 문장의 출현이 글쓰기의 영역을 무한히 확장하고 일거에 혁신했다.

 

 

동심의 글쓰기

소품의 글쓰기

풍자의 글쓰기

기궤첨신의 글쓰기

웅혼의 글쓰기

차이와 다양성의 글쓰기

일상의 글쓰기

자의식의 글쓰기

자득의 글쓰기

 

 

풍자의 글쓰기

 

조너선 스위프트는 여행기의 형식을 빌려 세상과 인간을 통렬하게 비판 풍자한 <걸리버여행기>를 집필했다. 일찌기 그는 "풍자란 그것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자신의 얼굴만 빼놓고 다른 모든 사람들의 얼굴을 발견하게 되는 거울이다"라고 밝힌 적이 있다. 따라서 풍자가는 마땅히 세상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불편하고 쾌하고 분하게 만들어 자신과 세상과 인간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소인국은 전통적으로 계란의 큰 쪽 끝부터 먼저 깨는 관습이 있었다. 그런데 현 황제의 할아버지가 어릴 적 관습대로 계란의 '큰 쪽 끝'을 먼저 깨다 손가락을 다치는 사건이 일어난 이후 계란의 '작은 쪽 끝'을 먼저 깨야 한다는 새로운 법령을 만들어 시행한다. 그리고 이 법령을 위반한 사람에 대해서는 엄벌에 처했다. 그러자 전통적인 관습에 충실한 사람들이 수차례에 걸쳐 반란을 일으켰고, 이 때문에 어떤 황제는 목숨을 잃고 어떤 황제는 왕위를 잃었다. 그런데 이 반란을 일으킨 주동자들이 모두 이웃한 제국 블레프스큐의 황제들이다. 그들은 반란을 지휘하다가 진압되거나 실패하면 자기 제국으로 몸을 피했다가 다시 소인국에 나타나 반란을 일으키곤 했다. 이 때문에 걸리버가 소인국에 갔을 때, 이 나라는 블레프스큐 제국과 36개월 동안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이 흥미로운 이야기는 영국의 종교 분쟁, 즉 구교와 신교 간의 논쟁과 다툼을 풍자한 것이다. 전통적인 관습에 따라 계란의 '큰 쪽 끝'을 깨야 한다고 주장한 측은 구교를, 새로운 법령에 따라 계란의 '작은 쪽 끝'을 깨야 한다고 주장한 측은 신교를 비유한 것이다. 스위프트가 계란의 어느 쪽 끝을 깨느냐를 두고 다투는 소인국의 이야기에 빗대 신교와 구교의 종교 분쟁을 풍자한 것은 곧 이 종교 논쟁과 다툼이 별반 중요하지 않는 지극히 사소한 문제를 두고 싸우는 것에 불과할 뿐이라는 조롱과 비웃음이다.

 

여기에서 현 황제의 할아버지는 종교개혁을 주도한 헨리 8세를, 반란 도중 목숨을 잃은 황제는 청교도혁명 때 처형당한 찰스 1세를, 왕위를 잃은 황제는 명예혁명 때 프랑스로 망명한 제임스 2세를, 그리고 블레프스큐 제국은 영국의 신구교 종교 분쟁과 왕위 계승에 개입한 프랑스를 상징하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소인국의 나라' 속 풍자는 현실 세계에 대한 지극히 사실적인 묘사다.

 

 

기궤첨신의 글쓰기

 

사이카쿠의 소설이 대중적으로 성공한 배경에는 "조닌들의 성격과 당대 도시의 풍경을 사실적이고 생생하며 유머러스하게 풍자하는 데 특출난 문학적 재능"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모두 사이카쿠 자신이 상인 계급, 곧 조닌 출신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예를 들어 <호색일대남>에 묘사되고 있는 오사카, 교토, 에도 등 대도시 유곽의 주요 향유자는 조닌들이었기 때문에, 유곽의 풍경과 그곳에서 일어난 온갖 사건들은 곧 상인 계급의 생활 속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던 조닌 문화 중 하나였다. 오사카의 유곽 문화와 뒷골목 풍경을 생생하게 묘사하면서 그곳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그린 다음과 같은 대목은 일찍이 존재했던 그 어떤 문학작품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장면이다. <호색일대남>이 호색 소설 혹은 풍속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리얼리즘 문학의 원형이라는 찬사를 받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오사카에 도착한 요노스케는 오사카 동남부, 다니마치 거리의 후지노다나에 집을 얻어 귀이개 등을 만들며 덧없는 나날을 보냈다. 여전히 연애질은 계속되었고, 고타니나 후다노쓰지의 사창, 월정 계약의 첩, 남자를 좋아하는 식모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찾아다녀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다가 본디 이 길에 몸 바쳐왔던 터라 남들이 손가락질을 하든 말든 기생들의 기둥서방을 하기도 했다. 이런 유의 일에 종사하는 여자들은 호적 조사가 두려워 한 남자를 지아비로 가장하고 자신은 매춘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것이 관례이기도 했다. 나카데라초나 오바시 등 절이 많은 동네의 중을 상대로 하는 사창이 있긴 하나 기둥서방들은 연말에 유곽 부근은 얼씬도 못하는 노인네들 돈을 등쳐먹는 일을 하기도 한다. 오, 파파노인이 되어도 색의 번뇌는 어찌할 수 없나니.

 

 

차이와 다양성의 글쓰기

 

박제가<정유각집>에서 정조에게 음식과 맛에 비유해 사물의 천성은 제각각 달라서 어느 한 가지로 귀결시킬 수 없는 것처럼, 문장이란 다양한 것, 곧 시대에 따라 변하고 사람에 따라 차이가 나는 것이 본성이기 때문에 "문장의 도는 한 가지로 일괄해서 말할 수가 없다"라고까지 주장했다.

 

정조의 문체반정을 반박하는 박제가의 논리는 이렇다. 짠맛, 신맛, 매운맛, 쓴맛, 단맛 등 음식의 맛이란 차이와 다양성이 본질이며 천성이다. 그런데 짠맛이 나는 소금과 매운맛이 나는 겨자와 쓴맛이 나는 찻잎을 두고 매실과 같은 신맛이 나지 않는다면서 나무라거나 처벌한다면, 그것은 소금과 겨자와 찻잎의 본성을 무시하는 것일뿐더러 사물이 지니는 천성을 폐기하려는 것에 다름없다. 만약 이렇게 세상의 모든 맛을 매실의 신맛에 맞추라고 한다면 온 천하의 맛은 반드시 사라지고 말 것이다. 문장도 마찬가지다. 정조의 명령대로 세상의 모든 문장을 순정한 고문에 맞추라고 한다면 이로 인해 온 천하의 문장은 반드시 없어지고 말 것이다.

 

맛으로 말한다면 소금으로는 짠맛을 내고, 매실로는 신맛을 취하고, 겨자에서는 매운맛을 가져오고, 찻잎으로는 쓴맛을 냅니다. 지금 짜지도 않고 시지도 않고 맵지도 않고 쓰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소금과 매실과 겨자와 찻잎에게 죄를 묻는 것은 마땅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만약 반드시 소금과 매실과 겨자와 찻잎이 그러한 것을 책망하면서 "너는 어찌하여 서적과 같지 않느냐?"하고 하거나 국과 고기에게 "너는 왜 상의 앞에 자리하지 않느냐?"라고 말한다면, 지목을 당한 것들은 실질을 잃어버리고 천하의 맛은 폐해지게 될 것 입니다. - '<정유각집>의 비옥희음송 병인' 중에서 

 

 

일상의 글쓰기

 

상추쌈을 예찬하며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듯이 세밀하고 생동감 넘치게 상추쌈을 먹는 방법을 묘사하고, 이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음식인 용미봉탕龍味鳳湯이나 팔진고량八珍膏粱과 같은 음식보다 더 맛있다고 한 글 역시 일상의 하찮은 일을 소재로 삼아 맛깔나게 지어낸 한 편의 희작이다. 특히 상추쌈을 먹는 중에 우스운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번 크게 웃기라도 하면 밥알과 상추 잎이 입 밖으로 튀어나와 사방에 흩뿌려질 것이니 조심하라는 경고 아닌 경고 앞에서는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서 식사나 회식 중에 흔하게 만날 수 있는 광경이기 때문이다.

매년 여름 단비가 처음 지나가고 나면 상추 잎이 아주 잘 자라서 마치 푸른 비단 치마처럼 싱싱해 보인다. 커다란 동이의 물에 한참 동안 상추를 담갔다가 깨끗하게 씻어낸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받아 두 손을 정갈하게 씻는다. 왼손을 크게 펼쳐서 하늘에서 내리는 장생불사의 감로수를 받아먹기 위해 만들었다는 승로반承露盤처럼 손 모양을 만든 다음 오른손으로 두텁고 커다란 상추를 골라서 두 장을 뒤집어엎고 손바닥 위에 펼쳐놓는다. 이때 비로소 흰밥을 취해 큰 숟가락으로 두드려서 마치 거위 알처럼 둥글게 모양을 만들고 상추 위에 얹어놓는다. 그리고 흰밥의 가장 윗부분을 약간 평평하게 다져놓고 다시 젓가락을 들고 얇게 회를 뜬 소어蘇魚(송어)를 집은 다음 황개장黃芥醬에 담갔다가 흰밥 위에 올려놓는다. ... 처음 상추쌈을 씹을 때에는 옆 사람과 우스갯소리를 주고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만약 삼가 그렇게 하지 않고 한 번 깔깔거리며 웃기라도 하면, 입에서 내뿜은 하얀 밥알이 이리저리 튀고 파란 상추 잎이 이곳저곳으로 흩뿌려질 것이다. 반드시 입에 든 모든 것을 다 뱉어내고 난 다음에야 멈추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10여 차례 상추쌈을 목구멍 아래로 삼키고 나면, 나는 진실로 천하의 진기한 맛인 용미봉탕과 천하의 진귀한 맛인 팔진고량과 같은 허다한 음식조차 알지 못하는 지경이 되고 만다. - '이옥, <백운필>의 <담채>' 중에서

특히 상추쌈을 즐겨 먹었던 우리의 음식 문화를 호방하고 유쾌한 필치로 묘사한 이 글을 보고 있으면, 이옥이 글감의 선택에서 얼마나 얽매임이 없이 자유로웠는가, 표현의 기법에서 얼마나 개성적이고 자유분방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이렇게 자신만의 감성을 담아 세태기 혹은 풍속기를 즐겨 썼던 이옥의 글을 통해, 필자는 다시 한 번 일상생활 속 신변잡기와 잡감을 기꺼이 글로 옮겼던 18세기 특유의 미학 의식, 즉 일상성을 접하게 된다. 

 

 

자득의 글쓰기

 

'자득'에 관한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첫째 독서, 둘째 사색, 셋째 글쓰기 등 세 가지 차원에서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쇼펜하우어의 독서에 관한 자득의 철학부터 알아보자. 독서는 분명 글쓰기에 필수불가결한 주춧돌이다. 그러나 모든 독서가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해로운 독서도 있다. 그렇다면 해로운 독서란 어떤 독서인가? 지식을 습득하기 위한 독서, 생각을 마비시키는 독서가 바로 해로운 독서이다. 쇼펜하우어는 "너무 많이 책을 읽는 사람, 거의 종일토록 독서에만 매달리는 사람"은 마치 "말만 타고 다니는 사람이 걸어 다니는 것을 점차 잊어버리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주장한다. 대개 학자라는 사람들의 독서라는 게 그렇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독서에 대해 매우 근본적인 비판을 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독서는 무용하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일 만큼 그의 견해는 급진적이다.

독서란 자기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대신하여 생각해주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그 사람 마음속의 과정을 반복하는 데에 그친다. ... 많은 학자의 경우가 이러하다. 그들은 독서를 함으로써 바보가 되었다. 여가가 생기면 곧 책을 손에 쥐는 것처럼 쉬지 않고 독서를 계속하는 것은 쉬지 않고 손을 놀리는 일 이상으로 정신을 불구로 만든다. ... 스프링이 계속 다른 물체의 압력을 받으면 탄력을 잃는 것처럼 정신 또한 다른 사람의 사상을 받으면 탄력을 잃게 된다. 영양을 너무 많이 섭취하면 위를 해치고, 그 때문에 몸 전체를 해치는 것처럼 정신의 영양도 너무 많이 섭취하게 되면 정신은 질식해버린다. - '쇼펜하우어, <인생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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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브릭 로맨스 - Sewing in the Garden
정은 지음 / 성안북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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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메마르지 않는 감동이 필요하다. 특히 가슴 사무치게 느껴지는 감동은 우리의 작업에 흠뻑 스며들어 강력한 빛을 발하게 된다. 집중을 요하는 작업을 앞두고 있다면 급하게 작업에 뛰어들기보다 우선은 충분히 숙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럴 때 자신의 작업에 영향을 주면서 마음의 위안을 안겨주는 아티스트를 안다는 건 커다란 이점이다. 언제라도 그들의 책을 꺼내 갈증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홀로 나서는 산책, 여행, 명상의 시간 속에서 앞으로의 몰입을 이어나갈 에너지를 채울 수 있다. - '프롤로그' 중에서

 

 

패브릭과 사랑에 빠지다

 

얼마전 아내의 요청으로 시골집에 다녀왔다. 홀로 계신 어머님의 건강 상태를 점검하러 가는 길에 부탁을 받았다. 결혼 후 아내는 어머님이 사용하시던 물품 중에서 물려받고 싶은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바로 어머님의 오랜 손 때가 묻은 재봉틀이었다. 요즘은 그리 흔하지 않은 '싱어'사 제품이다. 이것을 오는 길로 가져와 달라는 것이었다.

 

아내는 나의 어머님 만큼이나 재봉질을 좋아했다. 두 딸을 기르면서 왠만한 옷들은 손수 제작하거나 고쳐서 입히곤 했다. 우리들의 결혼은 한참 늦은 만혼晩婚인 탓에 아내의 친구들은 자녀들에게 입히던 깨끗하고 예쁜 옷들을 골라 아내에게 주곤 했다. 버리기엔 아까운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시집올 때 혼수로 장만해 온 'ㅂ' 미싱이 자주 고장나서 속을 태우곤 했었다.

 

심지어 내가 입는 잠옷, 덮고 자는 이불과 요, 베개 커버, 식탁 보, 책상 보 등은 모두 아내의 작품이었다. 집안의 어른끼리 맺어준 인연이라 사실 아내를 잘 모르고 결혼했기에 이런 궁금증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내는 미대에 진학하려고 했을 정도로 예술적 재능이 있었지만 장인 어른의 극구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한 아쉬움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을 아내에게 선물하려 한다. 아내의 취향에 꼭 들어맞고 평소에도 늘 관심이 많은 패브릭 관련 제품들이 많이 소개되어 있어서다. 책의 내용은 모두 여섯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작가의 스튜디오, 가방, 앞치마, 스커트, 이불, 커튼, 자투리 원단 등이 잇달아 소개되고 있다. 특히, 화려한 색상과 많은 사진 컷들이 나에겐 무척 인상적이다.

 

작가 정은은 영어학을 전공한 후 지금껏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본업으로 삼고 있다. 취미 생활로 시작한 패브릭 작업이 이젠 그녀의 일상에 있어 중요한 한 축을 맡고 있다. 2012년 개인전을 시작한 이래 매년 전시회를 통해 자신의 작품을 꾸준히 보여주고 있다. 그동안 진행해 온 작업과 이에 대한 이야기들을 이 책에 담고 있다. 

 

 

             

 

작가의 작업 공간은 전주시에서 번화가에 속하는 중화산동에 위치하고 있다. 8년 전 이곳에 발을 내딛었을 때는 골목에 커피숍이 한 곳이었고, 듬성듬성 이런저런 가게들이 있었다. 이후 몇 차례 이사 끝에 현재의 1층에 작업실을 갖게 되었다. 자신의 패브릭 작업을 행인들에게 보여줄 수 있고 나아가 이들이 소중한 인연으로 연결될 수 있기에 굳이 1층을 고집했다.

 

비록 북적거리는 도심 속에 작업실이 있지만 한 골목 차이로 비교적 조용하고 아늑한 공간이다. 가끔 진열창 외부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행인들도 있고, 여기에 그치지 않고 용기를 내서 가게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한적한 동네에 굳이 갤러리로 꾸미지 않아도 충분히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작업실을 보여줄 수 있다.

 

수국, 리시안셔스, 아네모네, 라넌큘러스, 카네이션, 금어초, 델피니움, 양귀비, 설유화, 금잔화, 부르니아, 동백꽃, 튤립, 접시꽃 등 책 속엔 많은 꽃 사진들이 등장한다. 작가는 "패브릭 작업을 몰랐다면 아마도 꽃을 다루는 플로리스트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게 꽃이 없는 일상은 상상하기 어렵다"라고 말한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슬그머니 웃음을 지었다. 나도 한때 야생화에 미쳐서 넓은 화단이 있는 아파트 1층으로 이사했고, 철철이 야생화를 만나려고 이산저산 다녔던 생각이 떠올라서다.

 

 

 

 

작가는 패브릭작업을 하면서 가장 많이 만들었던 작품이 가방이란다. 4년 전에 기록한 갯수가 1,000을 넘어섰다. 이렇게 많이 제작하다보니 이젠 선호하는 가방이 몇 종류로 압축된다고 한다. 친환경 에코백, 크로스백, 클러치백, 빅백, 백팩 등이 차례로 책에 소개되면서 에코백 만들기와 염색하기도 설명하고 있다. 아마도 여성들의 패션에 있어서 가방은 필수적인 아이템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 적어도 가방을 두 개는 메고 나온다. 서너 권의 책과 스카프, 파우치를 넣을 수 있는 비교적 큰 사이즈의 가방 하나와 핸드폰과 지갑을 넣을 수 있는 작은 사이즈의 크로스백 하나. 이 두 가방은 어딜 가나 나의 필수품이다. 가끔 짐이 더 있으면 가볍게 접을 수 있고 은근히 수납도 많이 되는 에코백을 활용한다. 여행할 때도 백팩의 앞주머니에 에코백을 작게 접어서 꼭 넣고 다닌다. 이게 정말 유용하게 사용된다" - 36 쪽에서

 

피곤하고 지친 자들은 모두 이곳으로 오라. 남녀노소 불문하고 뭔가 허전하거나 피곤할 때 찾는 것이 있다. 바로 쿠션이다. 포근한 감촉이 좋아서다. 의자에도 소파에도 쿠션은 이들의 친구다. 크기도 색상도 각양각색이라 어떨 때는 베개와 헷갈리기도 한다. 커버를 많이 준비해둔다면 자주 교체함으로써 색다른 기분을 느낄 수 있으므로 기분 전환에도 무척 좋다. 

 

 

 

어느 집에나 앞치마는 하나쯤 있을 것이다. 앞에서 보면 마치 스커트를 입은 것처럼 보이는 스커트형 앞치마를 작가는 선호한다고 한다. 원피스형이든, 스커트형이든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만든다면 더욱 애착이 갈 것이다. 취미로 뭔가를 만드는 핸드메이드의 진수는 무엇을 표현하는 것에 있다. 눈과 귀, 촉감 등 우리 몸 감각기관의 촉을 세우고 진지하게 집중해보라. 그 과정 자체가 바로 기쁨이 된다. 서툴고 귀찮다고 방치해두지 말고, 한 번쯤 관용을 베풀어서 당신의 손이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있도록 기회를 줘보면 어떨까? 

작업을 하다 보면 처음 의도와는 다르게 용도가 바뀌는 경우가 있다. 어떤 수작업이든 그러하겠지만, 특히나 패브릭 작업은 용도의 전환이 자유로운 편에 속한다. 이 작품 역시 싱글사이즈 이불을 생각하면서 시작했으나 결과물은 커튼이 되었다. 햇살이 쏟아지기라도 하면 그 느낌은 마치 성당에서 스테인드글라스를 바라보는 것처럼 찬연해진다.

 

비록 결과물이 커튼이 되었을지라도 그 용도는 도 다시 바뀔 수 있다. 어중간한 공간을 가리거나 공간을 분리하고 싶을 때 가리개로 사용하면 딱이다. 커튼이든 가리개든 한 폭의 패치워크가 선사해주는 다챠로운 색상의 에너지가 우리들에게 한없이 생기를 준다. 잠시 시선을 고정해 이를 바라볼 때 마음 한 가득 풍요로움이 느껴질 것이다.

 

 

작가가 패브릭 작업에 주로 사용하는 원단은 디자이너 원단이다. 텍스타일 디자이너 특유의 개성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어 작업시 기분이 좋다. 그리고 색감의 표현이 우수하고 세탁 후에도 색이 전혀 변하거나 탈색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패브릭은 20수 새틴 원단과 30수 원단을 사용한다.

 

본격적으로 바느질 작업을 할 때엔 꼭 필요로 하는 도구들이 있다. 가위, 쪽가위, 시접자, 재봉틀, 다리미, 줄자, 연필, 시침핀 등이 바로 그것이다. 천을 자를 때 커터기를 사용하면 여러 장을 한꺼번에 편리하게 자를 수 있지만 칼날의 교환이 번거롭고 날카로운 칼날에 손을 베일 수 있다는 단점도 있다. 묵직한 쇠가위가 의외로 섬세하게 천을 잘라주지만 오래 작업하다 보면 손목이 아프다. 그래서 작가는 스프링이 달린 가위를 추천한다.

 

 

자신만의 감성을 표현하자

 

책을 덮는 순간 자신이 직접 만들어봐야겠다는 결심이 설 것이다. 남자인 나도 그런데 여성들이라면 더 할 것이다. 꽃을 좋아하는 나이기에 머그컵을 사더라도 꽃 그림이 있는 제품을 찾듯이 각자의 감성에 따라 패브릭 작업은 각양각색으로 진행될 것이다. 벌써 머리로는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다. 재봉질을 즐겨하는 아내에게 이 책을 선물하면서 야생화 그림이 들어간 등받이 쿠션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잠재되어 있는 스스로의 내면의 끼를 발산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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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에 대한 반론 - 생명공학 시대, 인간의 욕망과 생명윤리
마이클 샌델 지음, 김선욱.이수경 옮김 / 와이즈베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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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문 생명윤리학자는 아니지만, 저명한 과학자, 철학자, 신학자, 의사, 법학자, 공공정책 전문가들과 함께 줄기세포 연구나 생명체 복제 등의 주제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할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에 큰 호기심이 일었다. 실제로 그들과의 토론은 대단히 고무적이어서 내게 강렬한 지적 자극을 주었고, 마침내 그것을 계기로 내 강의와 저술에서도 이 주제를 다뤄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 '서문' 중에서

 

 

'유전적 강화'의 윤리에 관하여

 

유전학의 획기적인 발전은 밝은 전망과 어두운 우려를 동시에 안겨준다. 유전학은 인간을 괴롭히는 다양한 질병을 치료하거나 예방할 길을 열어준다는 점에서 밝은 전망을 제공한다. 우려되는 점은 새로운 유전학적 지식으로 인해 자연으로서의 우리 모습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가령 근육의 힘과 기억력과 기분을 향상시키고, 자녀의 성별과 키를 비롯한 유전적 특질을 선택하고, 신체적,인지적 능력을 개선하고, 우리 자신을 "비할 데 없는 최선의 상태"로 만드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유전적 강화의 윤리라는 문제와 씨름하려면, 현대사회에서 거의 간과되고 있는 문제들을 마주할 필요가 있다. 바로 자연의 도덕적 지위에 관한 문제, 주어진 이 세계에서 인류가 취해야 할 적절한 태도에 관한 문제가 그것이다. 이런 문제는 거의 신학의 영역에 가깝기 때문에 현대의 철학자들과 정치학자들은 기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생명공학의 새로운 힘을 갖게 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그런 문제를 외면할 수가 없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승자독식勝者獨食사회, 급기야 인간은 유전공학의 힘을 차용해 완벽한 신이 되려는 위험한 항해를 시작했다. 수많은 과학자, 철학자, 정치가, 지성인들이 지적해온 것처럼 유전공학의 발전은 미래에 대한 밝은 전망과 동시에 이를 악용하려는 어두운 우려에 직면하고 있다.

 

지금껏 인간을 괴롭혔던 다양한 질병의 치료와 예방의 길을 열어준다는 점에선 우리 모두 유전공학을 반길 형편임엔 틀림없다. 하지만 발전된 유전공학 기술을 이용해 인간의 유전자 특성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다면 과연 향후에 탄생하는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야말로 새로운 인간 종種이 출현하는 셈이다. 문제는 출현만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전지전능한 힘을 부여받아 마치 신과 같은 위치를 향유하려한다는 점이다. 이는 우려할만한 수준을 뛰어넘는 그 이상이다.  

 

 

 

"유전공학을 이용해 재능과 능력을 지배하려는 태도는 옳은가?"

 

인류의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인간의 본성본성을 재설계하는 것은 올바른가. 어째서 이것이 문제가 되는가? 그렇다면 삶과 생명에 대하여 우리들이 견지해야 할 올바른 가치와 미덕은 무엇일까? 한국 사회에 '정의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던 마이클 샌델 박사가 이번에는 생명윤리를 둘러싼 도덕적 난제들에 관하여 흥미진진한 철학적 논쟁을 벌인다.

 

책은 몇 년 전 한 커플이 소리를 듣지 못하는 아이를 낳기 위해 청각장애자로부터 정자 기증을 받는다는 이야기로 출발한다. 레즈비언 커플인 샤론 듀세스노와 캔디 매컬로는 청각장애인으로 이런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이들은 듣지 못하는 것을 치료해야 할 장애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적 정체성이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5대째 청각장애를 갖고 있는 가족 출신으로부터 정자 기증을 받아 자신들의 꿈이 현실이 되었다. 즉 아들 고뱅이 청각장애아로 태어났던 것이다. 이들의 이야기가 <워싱턴 포스트>에 소개된 후 엄청난 비난의 뭇매를 당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세상인들은 이 커플이 고의로 자식에게 장애를 유발했다는 사실에 분노했기 때문이다.

 

계획적으로 자녀를 청각장애로 만드는 것은 잘못된 일인가?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청각장애를 유발해서인가, 계획적으로 그렇게 했기 때문인가? 이 사건이 논란으로 비화하기 전, 하버드 대학 교내신문 <하버드 크림슨>에 광고가 하나 실렸다. 내용인 즉, 불임 부부가 난자 제공자를 찾는데, 특별한 조건이 붙어 있었다. 신장이 175cm에 탄탄한 몸매여야 하고, 가족 병력이 전무하고, SAT 점수가 1400점 이상이어야 했다. 이에 대한 사례비는 5만 달러였다. 그런데, 이러한 주문형 아이에 대해선 비난이 없었다.

 

 

스포츠의 이상理想: 노력인가, 재능인가

 

마이킁 샌델 교수는 강화와 유전공학에 따르는 주요한 문제는 그것이 인간의 노력과 주체성을 훼손한다는 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보다 더욱 위험한 것은 그러한 기술이 일종의 과도한 행위 주체성을, 다시 말해 우리의 목적과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인간 본성을 비롯한 자연을 개조하려는 프로메테우스적 열망을 대표한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인간의 기계화가 아니라 자연과 본성을 정복하려는 충동이다. 그리고 그런 태도는 인간의 능력과 성취가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선물이라는 관점을 놓치고 있으며 심지어 그런 관점을 파괴할 수도 있다.

 

우리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재능은 미약하지만 피나는 노력과 투지, 의지력으로 자신의 분야에서 빛나는 성공을 거둔 피트 로즈 같은 야구선수에게 존경을 보낸다. 타고난 천부적 재능으로 수월하게 탁월한 송과를 낸 조 디마지오 같은 선수도 존경한다. 그런데, 이 두 선수가 약물을 복용했다면 어느 선수에게서 더 심한 환멸을 느낄까? 스포츠의 이상에서 노력과 재능 중 어느 쪽이 더 심각하게 훼손되었다고 여길까?

 

 

맞춤 아기의 설계

 

생명공학과 유전학적 강화가 양육양육의 본질을 퇴색시킬 위험이 존재한다. 부모의 사랑은 자식이 가진 재능과 특성을 조건으로 하는 게 아니다. 부모의 야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여지지 않고 자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럼에도 자녀를 설계하려는 부모의 오만함, 그리고 샹명 탄생의 신비를 마음대로 통제하려는 욕구가 문제다.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의학에도 그 방향을 좌우하고 제약하는 목적이 존재한다. 부모에게 아픈 아이를 치료할 의무가 있다면 건강한 아이를 더 강화할 의무, 삶에서 성공하기 위해 아이의 잠재력을 최대화해야 할 의무도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건강을 순전히 도구적 관점으로만 보는 것, 즉 다른 뭔가를 최대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반면, 강화 찬성론자들은 아이의 능력을 교육우로 향상시키는 것과 생명공학을 통해 향상시키는 것이 원칙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강화 비판론자들은 이 둘이 완전히 다르다고 주장한다. 유전적 구성을 조작해서 아이를 강화하려는 시도가 우생학을 연상시킨다고 말한다.

 

월스트리트의 주식  애널리스트 잭 그루브먼은 자신의 두 살배기 쌍둥이 딸들을  명망 높은 맨해튼 92번가 Y유치원에 입학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상사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AT&T 주식을 거짓으로 높게 평가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애쓴 그의 사례는 오늘날의 세태를 잘 보여준다. 부모가 자녀에게 갖는 기대치를 변화시키고 아이가 달성해야 하는 성과에 대한 요구를 증가시키는 압력이 높아지고 있다.

 

생명공학 기술로 아이의 능력을 강화하는 것이 과도한 간섭과 관리가 수반된 요즘의 양육 방식과 정신적으로 비슷하다는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 그러나 그 둘이 유사하다 해도 아이의 유전적 조작을 찬성해야 하는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오히려 우리가 흔히 받아들이는, 부모가 지나치게 관리하는 양육 관행에 물음표를 던져봐야 할 이유가 된다. 오늘날 자주 목격되는 과잉 양육은 삶을 선물로 바라보는 관점을 놓친 채 과도하게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심리를 보여주는 징후다. 이것은 우생학에 가까워지는 불안한 징조이기도 하다.

 

 

 

겸손과 책임

 

유전적 강화가 노력과 분투의 의미를 퇴색시킴으로써 인간의 책임성을 약화시킨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책임성의 약화가 아니라 책임성의 증폭이다. 겸손이 와해되면서 책임성이 엄청난 수준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우리는 점점 더 운보다는 선택에 많은 무게를 두게 된다. 아이를 위한 적절한 유전적 특성을 선택한 것이나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이 부모에게 지워지게 된다. 또 팀의 승리에 도움이 되는 재능을 획득한 것이나 획득하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이 운동선수 자신에게 지워지게 된다.

요즘도 프로스포츠 분야에서 운동능력 강화 약물을 사용하는 경우가 빈번해지면서 선수들이 서로에 대해 갖는 기대치가 미묘하게 변화하고 있다. 과거에는 선발 투수가 속한 팀의 득점이 부진하면 나쁜 운을 탓하면서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요즘은 암페타민이나 여타 자극제를 사용하는 경우가 상당히 늘어나서, 그런 약제를 복용하지 않고 경기에 나오는 선수들은 "발가벗고 출전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보험을 예로 들어보자. 사람들은 자신이 언제 이런저런 질병에 걸릴지 몰라서 건강보험이나 생명보험에 기입해 리스크를 공동 부담한다. 보험 시장은 사람들이 질병이나 사고와 관련된 위험 요인을 모르거나 통제할 수 없을 때에만 연대성이 드러나는 공간이다. 유전자 검사 기술이 발전하여 각 개인의 병력과 기대수명을 신뢰할 만한수준으로 예측할 수 있게 된다고 가정해보자.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보험에 가입하려 하지 않을 것이고, 건강하지 못할 운명을 지닌 사람이 부담하는 보험료는 엄청나게 치솟을 것이다. 좋은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이 나쁜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이 속한 보험회사에서 탈퇴하기 시작하면서 보험의 연대성 측면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반론에 대한 반론

 

마이클 샌델 교수가 말하고 싶은 것은, 강화를 둘러싼 논란에 내재한 도덕적 의미는 자율성이나 권리 같은 익숙한 개념만으로, 또 비용과 이익의 계산만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강화에 대한 그의 우려는 그것이 개인적 악덕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습관과 존재 방식에 결부되는 문제라는 데 있다.

 

"인간성이라는 뒤틀린 목재를 가지고 똑바른 일을 성취한 예는 없다"

- 칸트

 

우리의 본성에 맞게 세상을 변화시키는 대신 세상에 맞추기 위해 우리의 본성을 바꾸는 것이야말로 사실 우리의 힘과 자율권을 잃어버리는 행동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세상에 대해 비판적으로 숙고하기 힘들어지며, 정치적·사회적 개선을 향한 충동도 무뎌진다. 우리는 새로운 유전학적 힘을 이용해 "인간성이라는 뒤틀린 목재"를 똑바로 펴려고 하기보다는, 불완전한 인간 존재가 지닌 재능과 한계를 관대하게 받아들이는 사회적, 정치적 제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인간 생명의 신비로움을 지켜야 한다

 

미끄러운 경사길 오류, 배아 공장, 난자와 수정란의 상품화를 경고하는 이들의 우려는 타당하다. 그러나 배아 연구가 필연적으로 그런 위험들을 초래할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배아 줄기세포 연구와 연구용 복제를 무조건 금지할 것이 아니라, 초기 인간 생명의 신비로움을 지키기 위한 적절한 도덕적 규제들을 마련한 가운데 그러한 연구를 허용해야 한다.

 

그런 규제책으로는 인간 개체 복제 금지, 연구실에서의 배아 배양시간에 대한 합당한 제한, 불임클리닉 영업의 의무요건 강화, 난자와 정자의 상품화 제한, 특정 주체들이 줄기세포 라인을 독점하는 것을 막기 위한 줄기세포 은행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접근법을 취할 때에야 비로소 초기 단계의 인간 생명을 악의적으로 이용하는 행태를 막을 수 있으며, 생의학의 발전이 인간적 감수성을 침식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건강을 증진시키는 축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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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내지 않고 가르치는 기술 : 첫 부하직원이 생긴 당신이 읽어야 하는 책
이시다 준 지음, 이혜령 옮김 / 21세기북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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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기업들이 '부하직원을 어떻게 가르칠까?'하는 문제를 전적으로 상사 개인의 능력이나 역량에 맡기는 것이 현실이다. 때문에 만약 상사가 '가르치는 방법'을 잘 알지 못하면 부하직원은 원하는 만큼 성장하지 못한다. 미국에서 시작된 '행동분석학'에 기초한 매니지먼트 방법론의 가장 큰 특색은 인간의 '행동'에 초점을 맞춘다. 비즈니스의 성과나 결과는 모두 사원 한 사람 한 사람의 행동이 모이고 쌓여 이루어진다. 행동을 바꾸면 원하는 결과와 성과를 얻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 '프롤로그' 중에서

 

 

사람을 카우는 게 가능한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리더가 될 수 있다

 

이 책의 저자 이시다 준 사단법인 행동과학 매니지먼트 연구소 소장. (주)윌PM 인터내셔널 대표이사 사장 겸 최고경영 책임자. 미국 행동분석학회(ABAI) 회원이자 일본 행동분석학회 회원으로, 일본의 행동과학(분석) 매니지먼트의 제 1인자로 꼽힌다. NASA, 보잉 등 600개 이상의 회사가 도입하여 미국 비즈니스 업계에서도 성과를 올린 미국 행동분석학, 행동심리학을 독자적인 방법을 통해 일본인에게 적합한 내용으로 개발하여 '행동과학 매니지먼트'를 전개하고 있다.

 

행동에 초점을 맞춘 그의 과학적이며 실용적인 매니지먼트 방법은 단기간에 80%의 '일을 못하는 사람'을 '일을 잘하는

 

 

 

 

'가르친다'는 것은 상대로부터 ‘바람직한 행동’을 이끌어내는 행위이다

 

행동분석학의 특징은 재현再現성이 잇다는 것이다. 즉, '언제, 누가, 어디에서' 해도 동일한 결괴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행동과학 매니지먼트' 역시 올바르게 실천하면 누구나 착실한 결괴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 책에는 부하직원을 교육 내지 지도할 때 필요한 구체적인 방법과 힌트들이 소개되어 있다.

 

 

인정받고 싶기 때문에 성장한다

 

기본적으로 아이들은 부모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새로운 행동'을 익힌다. 두 다리로 서서 걷기 시작하거나, 많은 단어들을 기억하면서 말을 더 잘 하게 되는 것도 이런 능력을 보일 때마다 자신의 부모가 크게 기뻐하고 칭찬해주기 때문이다. 이는 마찬가지로 어른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상사나 선배에게 인정받는 것은 부하직원이나 후배가 더욱 열심히 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결과'를 내지 못하는 사원은 상사나 선배에게 칭찬받거나 인정받을 기회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진심으로 부하직원이나 후배의 성장을 바란다면 일의 '결과'만을 주목하지 말고 후배직원이나 후배의 일하는 모습과 '과정'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실패담을 이야기하자

 

일을 막 시작하는 신입에게 일을 가르쳐주는 선배나 상사는 그야말로 동경의 대상이다. 그런 선배나 상사가 자신들의 빛나는 성공담만 예시할 게 아니라 "이런 실수를 한 적이 있다", "이렇게 했더나 잘 되지 않았다" 등과 같은 실패담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게 더욱 필요하다. 그러면 배우는 사람의 입장에선 공감대가 형성되므로 선배나 상사가 가르쳐주는 것들을 쉽게 받아들이게 된다.

 

모든 비즈니스에서 성공을 위한 길이란 수없이 존재한다. 하지만 '나는 이런 방법으로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지도하게 되면 부하직원은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일을 하시오'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반대로 '이렇게 했더니 실패했다'라고 구체적인 예를 들으면 그와 같은 확실히 잘못된 방법을 배제하고 그 외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방법 중에서 효과적인 것을 부하직원이 스스로 찾을 수 있게 된다.

 

 

지적하기에 앞서 자신을 먼저 체크하라

 

부하직원에게 일을 가르쳐도 그 성과가 기대만큼 올라오지 않을 때, '의욕이 부족해', '열정이 없어', '엄하게 혼을 내서 근성을 바로잡아야 해' 등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가르쳤는데도 불구하고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을 의욕, 근성, 열정 등의 성격 또는 기분에 그 원인이 있다고 섣불리 판단한다는 점이다.

 

왜 성과가 오르지 않을까? 실패의 원인은 상사가 부하직원에게 가르치는 방법 속에 숨어 있다. 예를 들어, '가르치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설명이 추상적이라 부하직원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등 지도가 제대로 되지 않은 이유와 원인을 발견해 정확하게 개선시킨다면 그 부하직원은 분명 성장하여 성과를 올릴 수 있게 될 것이며, 상사도 '가르치는 기술'을 보다 진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일 잘하는 사람의 행동을 철저하게 분해하라 

어떤 업종, 직종이든 그 업무는 수많은 '행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컨대 볼링이라면 가르쳐야 할 '지식'과 '기술'이 있다. 이를 나누어서 지도하는 게 필요하다. 즉 철저하게 분해해 기록해 놓으면 가르쳐야 할 것이 지식인지, 아니면 기술인지 보다 명확해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행동의 분해'이다.

 

물론 분해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은 그 일을 어려움 없이 척척 해결하고 유능한 성과를 거두는 사원의 행동이다. 왜냐하면 성과를 내는 사람은 성과를 내는 행동을 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일에는 다양한 방식이 있으므로 여러 사원의 일하는 모습을 분해하는 게 가장 이상적임을 명심하자. 이렇게 기록해 놓으면 그 업무의 '체크리스트'로 삼아서 사용할 수 있다.

 

 

지시나 지도는 구체적 표현으로

 

정말로 지시하고 싶은 행동이나 몸에 익혔으면 하는 업무가 있다면 그 내용을 가능한 한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행동을 구체적으로 언어화하려고 할 때 참고가 되는 것이 있다. 즉 행동분석학에선 행동을 정의할 때 'MORS의 법칙(구체성의 법칙)'이 있다. 이는 아래와 같은 4 개의 조건으로 성립된다.

 

Measured 계측할 수 있다

Observable 관찰할 수 있다

Reliable 신뢰할 수 있다

Specific 명확하게 이루어져 있다

 

 

목표를 높게 잡아라

 

목표를 잡을 때는 조금 높게 설정해야 한다. 마라톤 완주코스를 4시간 만에 달리는 사람에게, 3시간 59분이라는 목표는 너무 쉬워 게으름을 피우게 될 우려가 있다. 반면 2시간으로 설정하면 아예 처음부터 포기해버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열심히 하면 달성 가능할지도 모르겠다'고 느낄 만한 목표가 가장 적합하다.

 

 

비즈니스에서 바람직한 ‘결과’를 얻는 것이 부하직원이 그 '행동'의 빈도를 높일 수 있게 만들며, 나아가서 일에 자발적으로 몰두할 수 있도록 만든다. 

'혼내기'는 상대의 행동 등을 개선할 필요가 있을 때, 그것을 지적하거나 요구하는 행위이다. 정말로 상대를 생각하고 있다면 ‘혼내기’도 때로는 필요하지만, 그때는 어느 정도의 배려가 필요하다.

 

 

'가르치는 기술'은 점점 중요해질 것이다

 

책에는 55가지의 방법과 경험들이 소개되어 있다. 이를 통해 우리들의 가르치는 기술이 비약적으로 향상된다면 이로 인해 더 많은 유능한 인재를 육성할 수 있고 나아가 자신의 능력 또한 증강시킬 수 있으므로 인재 양성이라는 기쁨과 자신의 성취감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관통하는 메세지는 다음과 같다.

 

행동을 바꾸면 원하는 결과나 성과를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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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하이든
사샤 아랑고 지음, 김진아 옮김 / 북폴리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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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의 처녀작 <프랭크 엘리스>는 전 세계적으로 천만 부가 팔려나갔다. 자폐증을 앓던 소년이 경찰관이 되어 누이를 죽인 범인을 찾으러 다니는 내용인데, 처음 찍은 10만 부는 겨우 한 달 새 다 팔려버렸다. 파산 위기에 놓여 있던 모리아니 출판사는 그 돈으로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지금 헨리는 자신의 책이 20가지 언어로 번역되어 팔리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수많은 문학상의 수상자가 됐다. 헨리가 그 소설 중 단 한 문장도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 자신과 마르타뿐이었다. - '본문' 중에서

 

 

성공한 베스트셀러 작가의 이중성을 들춰보다

 

성공한 베스트셀러 작가 헨리 하이든, 그가 지난 8년간 펴낸 작품 5권이 20가지 언어로 번역되어 팔렸으며 모두 영화나 연극으로 재탄생되고 데뷔작은 학교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고전 반열에 올랐다. 더구나 그는 매력적인 외모와 분위기를 갖춰 여성 팬들을 심쿵하게 만드는 유명인사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아내 마르타를 만나기 전까지 무수히 많은 여자들과 원나잇스탠드나 즐기거나 좀도둑질이나 하는 그런 밑바닥 인생이었다.

 
어느 날 헨리는 평소 처럼 하룻밤을 보내고 조용히 나가려다가 우연히 침대 아래에서 원고 뭉치를 발견한다. 이것이 그의 인생을 180도 바꿔놓게 될 줄이야. 마치 신이 속삭임이라도 주는지 그녀는 매일 밤 놀라운 글을 써내려가는 천재적인 작가였지만 이 글을 세상에 내보일 생각은 없었기에 원고는 매일 수북히 쌓이고 있었다.

 

글을 쓰기엔 부족했는지 몰라도 괜찮은 글인지는 직감적으로 충분히 판독할 수 있었던 헨리는 그녀의 글을 출판사로 보내 정식으로 출판시키며 공식적인 저자로 나선 후로는 탄탄대로였다. 그런데, 여기엔 한 가지 비밀 약속이 있었다. 원고는 그녀가 계속 쓰겠지만 출간되는 책의 저자는 반드시 헨리로 하는 것이었다. 왜 이와같은 약속을 하는지는 읽어 보면 안다.

 

한편, 헨리가 보낸 원고의 가치를 한눈에 알아본 모리아니 출판사의 담당 편집자 베티는 헨리와의 만남이 계속 이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둘은 서로의 육체를 탐하고 욕정을 불태운다. 서로의 갈증을 채워주었으므로 거기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베티가 임신 소식을 알린 순간부터 모든 것이 꼬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헨리의 밑바닥에서 웅크리고 있던 괴물이 깨어나고 살해 시도는 현실이 되었다.

 

 

 

 

 

 

 

 

소설의 줄거리는 이렇다. 성공한 소설가 헨리는 모리아니 출판사의 편집장이자 애인인 베티에게서 임신 소식을 전해 듣고서 아내 마르타에 대한 죄책감에 구토와 자살충동까지 느낀다. 아내는 그의 유일한 가족이자 현재의 풍요로운 삶을 제공해 준 은인같은 인물이다. 사실 그의 이름으로 발표되는 모든 작품들은 아내가 쓴 것이기 때문이다.

 

이별을 결심한 그는 베티와 만나자고 약속하고 둘의 밀회 장소인 바닷가의 낭떠러지로 차를 몰고 간다. 악마가 발동한 그는 충동적으로 세워져 있던 베티의 차를 들이받아 낭떠러지로 떨어뜨린다. 베티가 차와 함께 차가운 바닷속으로 빠졌을 거라고 추측하며 완전 범죄를 자축한다. 그런데, 귀가 후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문 밖엔 뜻하지 않은 손님이 서 있었다. 놀랍게도 바로 베티였다. 그녀의 말로는 둘의 관계를 눈치 챈 마르타가 자신을 찾아왔었고 자신의 차를 몰고 약속 장소로 나갔다는 것이다. 맙소사.

 

"비밀이 있다는 게 얼마나 괴로운 건지 자네는 모를 걸. 그건 마치 기생충과 같은 거야. 영양분을 빨아먹으면서 점점 크게 자라지. 급기야는 심장을 갉아먹고 이제 밖으로 나오려고 해. 가딱하면 입밖으로 튀어나오고 눈 위로 기어 나온다고!" 

 

 

 

 

 

실수를 만회하려고 위장을 하고 거짓말로 거짓말을 덮어나가며 그의 실체가 한 꺼풀씩 벗겨져나가기 시작한다. 매력적인 작가이자 자상한 남편, 그리고 사려 깊은 친구이자 이웃인 줄로만 알았던 헨리 하이든이 감춰왔던 또 다른 모습은 살인자였다. 미스터 하이든은 과연 누구인가? 보육원의 동기 기스베르트 파쉬의 등장으로 시종일관 긴장을 늦출 수 없는 플롯이 전개되면서 인간에 대한 예리한 관찰력이 빛을 발한다. <미션 임파서블>로 유명한 감독 브라이언 드 팔마가 이 소설의 영화화를 결정했다고 한다.

 

 

"집에 가서 아내에게 다 말할게"

 

헨리는 사내대장부엿다. 이제 집으로 가서 모든 거짓을 걷어버리고 진실을 말할 것이다. 추한 사실들 모두를 말이다. 이는 그동안 신뢰를 기반으로 한 아내 마르타와의 행복한 삶을 끝장낸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반면에 이는 지금의 허위로 가득찬 인생에서의 해방을 의미하기도 했다. 더 이상 찌질한 불륜남이 아니어도 된다.

 

 

그는 베티의 가느다란 허리를 팔로 감쌌다. 풀밭에 큼직한 돌덩이가 보였다. 묵직해 보이는 게 그만하면 사람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을 것 같았다. 허리를 굽혀 들어올리기만 하면 돼! 하지만 이를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그는 스바루의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절벽을 향해 돌진하는 대신 후진 기어를 넣고 차를 뒤로 뺐다. 나중에 크게 후회하게 될 행동이었다.

 

 

원칙적으로 서평을 읽지 않는 마르타와 달리 헨리는 모든 평을 한 자 한 자 다 읽었다. 특히 마음에 드는 칭찬에는 자를 대고 줄을 그었고 기사를 오려서 스크랩북도 만들었다. '문장 하나하나가 요새와 같다.' 헨리는 이 평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책 표지 접히는 곳에 굵은 글씨로 인쇄돼 있었는데 큰 신문사에서 문학 칼럼을 쓰는 페펜코퍼라는 사람이 쓴 것이었다. 헨리는 '그렇지! 단순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문장. 내가 써도 이렇게 썼을 거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애석하게도 그건 그에게서 나온 문장이 아니었고, 그 무엇도 그에게서 나온 것은 없었다. (/ p.33)

거짓말쟁이들은 잘 알겠지만 거짓말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으려면 아주 약간의 진실이 들어 있어야 한다. 한 방울만 들어가도 충분할 때가 많지만 중요한 것은 거짓말 속의 진실은 마티니 속의 올리브와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 p.108)

행복이란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이구나. 그때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그 함께하는 삶이 사라져버렸다. 불에 탄 딱딱한 플라스틱 조각으로 변해버렸다. 따뜻한 난로 앞에 앉아 있노라니 얼굴 오른편에 다시 마비증상이 왔다. 이제는 뺨을 지나 코까지 퍼졌다. 썩어가는구나.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안에서부터 밖으로 썩어가고 있어. 그래, 난 썩을 놈이야. (/ p.99)

 

 

"하이든 씨, 베티 한젠이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내가 그걸 알면 지금 여기 있지 않겠죠"

 

헨리 하이든은 새 소설이 나오기 전 흔적 없이 사라졌다. 소설은 예상과 달리 베스트셀러가 되지 못했다. 평론가들은 결말이 낯설고 당황스럽다고 평했다. 하이든이 사라지고 1년 뒤 오브라딘 바자리크는 모르는 사람에게서 엽서를 받았다. 거기에는 갈색 잉크에 섬세한 필체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한 번도 혼자인 적이 없는 것보다는 항상 혼자인 것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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