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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뒤흔든 5가지 생체실험
김서형 지음 / 믹스커피 / 2024년 7월
평점 :
인류의 역사를 보면 비합법적이고 강제적인 생체실험 때문에 논란을 일으킨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생체실험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생체실험을 통해 어떤 지식과 정보를 얻었을까? 당대에는 생체실험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리고 우리는 생체실험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 ‘들어가는 글’ 중에서
동물실험은 동물을 대상으로 시행하는 실험을 의미한다. 오늘날의 동물실험은 인체실험 이전 단계에서 시행되어 안전성 예측에 도움을 준다. 기록에 따르면 최초의 동물 실험은 기원 전 450년 경 알크마이온이 시행했다.
그는 안구眼球의 신경이 뇌와 연결되어 사물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시신경을 ‘뇌로 빛을 전달하는 일종의 연결통로’로 본 것이다. 이를 증명코자 그는 동물실험을 진행, 개를 해부하여 안구와 연결된 시신경을 자르면 시력을 상실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아가 그는 해부학 지식을 얻기 위해선 동물실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특히 살아 있는 동물을 해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 이런 주장을 했을까? 고대엔 종교적 영향으로 시체 해부가 금지되었다. 해부는 ‘인간을 존중하지 않고 신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물의 장 기와 시체만이 해부학의 연구 재료로 활용되어 연구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인체 해부는 금지되었다. 그래서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는 동물들을 해부해서 근골격계의 구조를 파악했고, 신장을 비롯한 일부 장기의 기능을 파악했다. 염소를 해부한 그는 뇌가 막에 의해 양쪽으로 나뉜다는 사실과 혈액이 뇌로 공급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과거부터 신성한 병이라고 여겼던 뇌전증(간질)에 대해서도 도 신성한 병이란 존재하지 않고, 모든 질병의 원인을 규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해부학을 통해 뇌전증이 뇌에 이상이 생겨서 발생하는 질병임을 밝혔다.
그렇지만 동물 해부학을 기반으로 한 히포크라테스의 해부학적 지식엔 오류가 분명히 존재한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그는 여성의 히스테리 발생이 ‘자궁이 몸속을 돌아다녀서’라고 믿었다. 근대 의학이 발전할 때까지 히포크라테스의 해부학적 지식은 장기간 유럽을 지배했다.
고대 로마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의사는 클라우디오스 갈레노스(129~199년?)였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명으로 왕자의 주치의가 되었으며 그는 로마 제국뿐만 아니라 여러 지역의 의학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근대 의학이 발전하기 전까지 서양의학에서 갈레노스의 사상은 절대적이었다. 가히 ‘의학의 황제’로 불릴 만했다.
165년 로마 제국 내외에서 원인 불명의 유행성 전염병이 발생했는데, 이 병에 감염되면 열이나고 설사를 하며 몸이 붓는다. 위장 출혈 때문에 설사가 검붉고 심한 악취도 난다. 역병에 걸린 지 9일째가 되면 발진이 나타나고, 시간이 지나면 딱지처럼 떨어진다. 갈레노스가 남긴 이 기록을 통해 현대 의사들은 이 역병을 천연두로 추정한다. 당시엔 이를 ‘안토니우스 역병’ 또는 ‘갈레노스 역병’이라고 했다.
이는 인류 역사 속 최초의 팬데믹으로 인해 로마 제국의 인구가 총 10%정도 감소했으며, 로마 제국의 군대에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갈리아를 수비하기 위해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신분에 상관없이 건강한 남성이라면 누구나 군인이 될 수 있도록 법령을 개정했다. 이에 가난한 사람이나 노예도 이젠 제국의 군인이 될 수 있었다. 팬데믹으로 인구가 급감하자 세금 납부자 역시 크게 줄었다. 노동력이 부족해서 방치된 토지는 황폐화되었고 곡물가의 급등과 함께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결국 로마 제국은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갈레노스의 해부학에도 오류가 있다. 이는 동물실험에 국한해 인체의 장기를 살펴보았기 때문이다. 갈레노스의 가장 큰 오류는 혈액과 관련한 것이다. 그는 사람이 섭취한 영양분이 간으로 이동해서 ‘자연의 기운(Natural Spirit)’을 통해 혈액으로 변한다고 믿었다. 이후 심장으로 이동하고, 호흡을 통해 폐로 들어가 ‘생명의 정기(Vital Spirit)’와 섞여 온몸으로 순환한 다음 소멸한다고 생각했다. 이같은 오류가 바로잡히기까지 무려 1,500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프리드리히 2세의 생체실험
신성로마제국이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체실험 중 가장 끔찍하다고 알려진 것은 바러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한 실험이었다. 그는 인간 언어의 기원아 너무도 궁금한 나머지 아기들에게 식사와 목욕 외의 어떤 상황에서도 말을 못하게 했다. 그 결과 아기들은 애정 결핍과 기본적인 상호작용의 부재로 인해 전원 사망했다.
1240년, 그는 의사의 실력을 향상시키고자 5년에 한 번씩 인체 해부를 해도 된다는 명령을 발표했다. 이를 계기로 유럽은 인체해부 금지의 암흑시대가 종식됐다. 해부를 통해 ㅈ장기를 정확하게 관찰하면서 근대 의힉은 급속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당시 기독교 사회에선 ‘악마의 본성’으로 비난했을지라도 그는 의학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누구보다 더 인식하고 있었음에 틀림 없다.
아르메니아 집단학살
아르메니아인은 터키(튀르키에)와 카스피해 사이에 있는 아르메니아 고원에서 장기간 거주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오스만 제국에 속했지만 독자적인 밀레트를 형성하고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전 세계에서 최초로 기독교를 공식 종교로 인정, 시간이 흐르면서 오스만 제국 내의 무슬림이 이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 전역에 자유주의와 민족주의가 확산하면서 그리스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거부하고 독립전쟁을 일으켰는데, 기독교를 믿는 유럽 국가들이 이에 개입하면서 결국 독립할 수 있었다. 이후 프랑스, 러시아 등 유럽 국가들이 기독교인의 권리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오스만 제국의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그리스 독립 이후, 세르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 발칸반도에 위치한 여러 나라에서도 독립전쟁이 발생했다. 러시아와의 전쟁을 비롯해 여러 전쟁에서 패배한 오스만 제국은 사회질설를 유지하기 위해 기혹한 탄압을 시작했다. 물론 그 대상은 기독교인이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의 황제였던 압둘하미드 2세는 ‘하다미예’라는 친위부대를 동부 국경지대에 투입했는데, 실제 목적은 이 지역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인의 학살이었다.
콘스탄티니예(현재의 이스탄불)에서 발생한 학살은 이후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군인만 학살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민간에서도 학살에 참여했다. 기록에 따르면 총살을 비롯해 가죽을 벗긴 시신도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서유럽의 어떤 국가도 아르메니아인을 돕지 않았다. 이 학살로 10만 명에서 30만 명 이상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한다. 그래서 역사학자들은 아르메니아 학살을 ‘현대사회 최초의 제노사이드’라고 부른다.(147쪽)
2차 학살은 1909년에 발생했다.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한 아르메니아인이 폭동을 일으키면서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당시 오스만 제국 측의 기럭에 따르면 782명의 무슬림이 사망했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아르메니아인이 학살되었다. 발표는 5천 명이었지만 실제론 2만~3만 명이 살해되었다. 수사도 대충하고 끝마침에 따라 진실은 덮히고 말았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오스만 제국은 아르메니아인에게 러시아를 공격할 것을 부탁, 반면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 내의 반란을 일으킬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아르메니아인들은 어느 쪽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이레 위협요인으로 판단한 오스만은 3백만 명 이상을 시리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만족주의 성향이 강했던 청년 튀르크당은 아르메니아인을 멸종시켜야 할 인종으로 간주, 박해를 멈추자 않았다. 이슬람교로 개종해도 마찬가지였다. 1915년 발생한 박해로 미국이나 유럽의 역사학자들은 약 60~80만 명 정도가 집단학살된 것으로 추정한다. 하마닏로 끔찍한 제노사이드였다.
나치의 생체실험
요제프 멩겔레는 SS장교이자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내의 내과 의사였다. 그는 수용소로 이송된 수감자 중에서 강제 노역자와 생체 실험자를 결정하는 역할을 했다. 우생학에 심취한 그는 우월한 아리아인들의 출생률을 높이는 방법을 연구했다.
바로 쌍둥이 연구였다. 나치가 레벤스라움을 확보하면 이곳으로 이주할 독일인을 증가시키고, 완벽한 인종을 지배하는 독일 제국을 완성키 위해 쌍둥이 출산법에 관심이 많았으며 맹목적으로 우생학을 신봉하는 사람이었다.
단정한 옷차림에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그는 쌍둥이에게 사탕니나 과자를 주며 잔신의 진면목을 철저하게 감추었다. 그랬기에 쌍둥이들은 그를 친절한 멩겔레 아저씨라고 부르며 좋아했다. 이런 그가 뒤로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자행했던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생체실험이 눈동자 색 실험이었다. 금발과 푸른색 눈동자를 가진 아리아인들이 세상에서 가장 우월한 인종이라고 신봉했기에 그는 어리아이들의 눈동자 색을 변형시키는 생체실험을 감행했다.
이에 그는 눈에 화학물질을 주입하거나 눈동자에 푸른색 물감을 주입시키는 악행을 자절렀다. 심지어 마취도 하지 않은 채로 외과 실험을 했다고 한다. 물론 눈동자 색은 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피실험자 아이들은 실명하고 말았다. 눈동자 색은 홍채의 색으로, 머리카락처럼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쌍둥이 실험 또한 악명이 높다. 그는 쌍둥이의 여러 기관이나 장기 크기를 재고 기럭한 후, 한 아이에게 세균이나 약, 화학물질을 주입했다. 그리고 변화가 발생하면 이를 다른 아이와 비교했다. 그런 다음 아이를 죽여 해부까지 했다.
심지어 하나의 몸을 공유하는 샴쌍둥이를 직접 만들었다. 일반 쌍둥이의 몸 일부를 잘라 인위적으로 샴쌍둥이를 민들고, 이들이 얼마나 생존하는지 관찰하기도 했다. 하지만 연결한 정맥 부위에 염증이 발생하면서 그들은 곧 사망했다.
기록에 따르면 멜겔레의 생체실험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수가 약 40만 명에 달한다. 1,600명 이상의 쌍둥이 중에 생존한 쌍둥이가 200명이 채 되지 않는다. 이런 악행을 벌인 그는 종전 후 독일에 순어 지내다가 아르헨티나를 거쳐 브라질로 이주했다. 1979년 심장마비로 사망한 후에 바로 멩겔레였음이 밝혀졌다.
이밖에도 전범국가 일본제국의 731부대가 자행한 생체실험이 얼마나 잔혹했는지를 설명하고 있는데, 아직도 일본 정부는 이 끔찍한 만행을 부정하고 있다.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인정한 정직한 독일과는 영 딴 판의 모습을 보인다. 하늘이 일본 열도의 침몰로 그 죄를 벌하려 할까?
인종 집합소인 신생국가 미국은 한때 백인우월주의에 빠졌을 정도로 미국 사회는 인종적 편견이 심했다. 유명한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년)에서 묘사된 노예제 옹호와 흑인의 부정적 이미지가 바로 그것이었다.
KKK는 미국의 극우비밀결사단체를 듯하는데, 그 유래는 미국 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65년 테네시주 남부의 팔레스키에서 6명의 퇴역 남부 장군들의 주도로 설립, 초기엔 남부 백인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당시 KKK의 목적은 백인과 흑인을 분리하는 것이었지만, 미국 연방헌법에선 모든 노예제를 금지했고, 투표권 제한도 못하도록 규정했다. 그럼에도 미국 사회엔 흑백의 분리에 대한 믿음이 만연해 있었다.
이 시기 KKK의 대표적인 폭력이 ‘린치’였다. 이는 법원의 판결을 거치지 않고 임의로 형벌을 내리거나 폭력을 가하는 행위다. 미국의 사법 체계가 아직 확립되지 않았던 18세기 때 버지니아주 치안판사 찰스 린치는 흉악범을 사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린치법’을 동원했다.
인류의 방향성을 살펴보다
책은 단순히 생체실험의 내용만 살피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분석하고 생체실험이 지니는 의미를 평가한다. 이를 통해 생체실험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를 균형 잡힌 시각에서 바라보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