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 끄기의 기술 - 옥스퍼드 신경과학자가 알려주는 무한 스크롤에서 벗어나는 법
페이 베게티 지음, 이혜경 옮김 / 부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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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이 스마트폰과 소셜 미디어가 없던 시대를 추억하며, 지금보다는 모든 게 단순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하지만 나는 과거에 머물고 싶지 않다. 나는 스마트폰 시대에 머물고 싶다. 스마트폰 시대가 훨씬 더 재미있다. 내 손 안의 작은 기계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저 좋은 디지털 습관뿐이다. - ‘서문’ 중에서



책은 3부 1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선 우리가 왜 스마트폰이 중독적이라고 느끼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 2부에선 습관 형성의 배후에 있는 복잡한 과학 원리를 탐구하며, 끝으로 3부에선 집중력/수면/정신 건강 등을 집중 조명하면서 스마트폰 사용과 디지털 세상의 복잡한 관계를 살펴본다.


책의 저자 페이 베게티는 옥스퍼드대학병원의 현직 의사이자 신경과학자로서 앞서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스마트폰의 중독성을 파헤치기ㅗ다는 오히려 우리들이 어떻게 스마트폰과 관계를 가져야 하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잇다. 즉 스마트폰의 올바른 사용에 대해 화두를 던지고 있는 셈이다.


스마트폰은 중독적?


인간의 두뇌 속엔 뉴런이라는 신경계 단위가 있다. 무려 860억 개에 달한다고 한다. 뉴런의 줄기 끝에는 돌기가 뻗어 있고 이를 통해 이웃 뉴런들과 연결되므로 무수한 조합이 가능해진다. 2개의 돌기 사이에 시냅스라는 작은 틈으로 뉴런은 신경전달물질을 이용해 전기신호를 내보낸다.


일반적으로 중독은 우리의 뇌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물질들 때문에 발생한다. 모든 중독성 약물은 인체의 생명 활동을 무력화할 정도로 엄청난 화학적 효과를 발휘한다. 그 결과 시냅스들엔 신경전달물질이 넘쳐나서 평상시보다 훨씬 높은 수치를 보인다.


스마트폰과 소셜 미디어, 게임 앱의 사용을 약물 남용과 마약 용품에 비견할 수는 없다. 스마트폰을 사용할 때마다 뇌에서 생성된다고 알려진 ‘일정량의 도파민’조차도 중독성 약물이 우리의 신경전달물질에 미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발휘하지는 않는다. 즉 필요 이상으로 스마트폰을 많이 상용한다고 해서 약물에 중독되듯 중독이 일어나지 않는다.


사실 내가 이 도서를 읽고 싶었던 이유도 나이가 점점 들면서 최근부터는 과거에 비해 스마트폰 사용 시간이 많이 늘어났기에 혹시 이게 중독 증세가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다. 사용 시간이 늘어난 이유는 불교 강좌, 영어 공부, 책읽어주는 앱 등에 따른 탓이다. 이는 중독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저자도 이렇게 말한다.


“내 생각에 중요한 점은, 스트폰 사용을 둘러싼 불안감이 스크린 타임을 중심으로 새로운 강박관념을 발전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이미 스마트폰으로 몇 시간이나 보낸 어느 날 사랑하는 사람이 메시지를 보내왔다면, 그리고 당신 역시 거기에 답변하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테니 그렇게 헤도 괜찮다.”


스마트폰의 장시간 사용


30년 넘게 습관을 연구해온 웬디 우드 교수는 우리 일상 행동의 거의 40프로가 습관에 좌우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는 습관이 지닌 자동적이고 무의식적인 특성으로 인해, 실제로는 우리가 매일 수없이 많은 사소한 결정들을 의식적으로 내리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자주 간과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우리의 스마트폰 사용에 대한 통찰을 얻기 위해, 런던정경대학의 연구자들은 눈에 잘 띄지 않는 소형 카메라를 장착한 안경을 연구 참여자들에게 착요하게 했다. 이를 통해 연구자들은 자주 간과되곤 하던 습관들을 추적할 수 있었다. 연구 결과, 평균적으로 참여자들은 5분에 한 번꼴로 스마트폰과 상호작용했으며 계획했던 것보다 장시간 스마트폰을 사용하며 보내는 경우가 잦은 것으로 나타났다.


의지력은 습관으로 배양


사람들이 흔하게 범하는 가장 큰 실수 중 하나는 의지력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의지력 하나에 전부를 거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의지력은 자신을 배신하며, 이는 결국 개인의 실패로 이어진다.


스마트폰을 집어 드는 이유는 의지력이 결핍되었거나 동기부여가 부족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즉 의지가 부족한 게 아니라, 지금 통제하기 어려운 일련의 디지털 습관들이 많아서 곤란한 상황에 처한 것이다. 따라서 목표에 부합하는 습관을 확립한다면 힘들이지 않고 자신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


습관부터 고쳐라


우리가 스마트폰 기기와의 극적인 단절을 시도하는 이유는 우리 대부분이 변화란 큰 것에서 시작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창하고 상징적인 제스처의 이면에는 조급함이 깔려 있는 경우가 많다. 조급함을 야망으로 착각하지 않아야 한다.


따라서, 장기적이고 지속 가능한 변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작은 일에서 시작하고, 또 가장 쉽게 느껴지는 변화에 집중해도 괜찮다. 퍼즐 맞추기를 떠올려 보자. 한때는 많은 조각들을 배치하는 게 불가능해 보였지만 하나씩 서서히 맞춰나감에 따라 이후 훨씬 더 편하게 조각들의 제자리를 찾기 시작한다. 변화도 마찬가지다. 달성 가능한 최적의 경로를 선택하는 것이 현명하고 전략적인 사고다.


습관의 형성은 작은 것부터


습관을 형성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성공 여부가 결정되는 기술 영역에서는 정말로 소소한 행동이 중요하다. 스냅챗은 그저 하루도 여러 차례 수행될 수 있는 정말 소소한 행동이 전부였다. 그 결과 사람들은 자신의 하루 전체를 시간순으로 기록하는 습관을 만들어냈다. 그렇다. 소소한 행동은 엄청난 습관 형성의 힘을 가졌다.


습관이 정말로 소소하다는 말은 습관의 크기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습관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정신적 노력의 양을 의미한다. 그 좋은 사례는 1분 길이 동영상으로 유명한 틱톡 앱인데 사용자에게 더 긴 영상을 생성할 수 있는 선택지를 부여함으로써 편집에 필요한 시간을 대폭 줄일 수 있게 해주었다.


반복 습관으로 각인하기


운동 한 번으로 건강해지거나 한 학기 공부로 학위를 딸 수는 없는 법이다. 반복에는 잠재력이 있다. 벽돌 하나를 놓는 것은 무의미하지만, 벽돌 쌓기를 반복하면 건물이 만들어질 수 있다. 디지털이든 비지디털이든 간에 우리의 모든 습관은 반복적인 행동을 통해 형성된다.


습관을 형성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언가를 빈번하게 하는 것임을 우린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양치질은 습관인 데 반해 자동차보험 갱신은 습관이 아닌 이유다. 습관이 형성되기까지 21일이 걸린다는 속설이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과학적 근거는 없다.


오히려 연구 참가자들은 새로운 습관이 만들어지는 데 걸린 평균 시간이 이보다 긴 66일이었다는 연구가 있었으며, 후속 연구들에세도 비슷한 시간이 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다고 66일이 절대적인 정답도 아니다. 습관 형성은 시간이 아니라 반복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반복하기 쉬운 습관으로 시작하자.


이밖에도 책은 스마트폰 끄기에 유익한 방법으로 집중력 높이기, 수면의 질 높이기, 정신 건강 챙기기, 슬기로운 소셜 미디어 생활 구축하기, 미래를 위해 실천하기 순으로 훈련법을 소개하고 있다. 이는 바로 저자가 스마트폰 사용에 대하여 사용자의 삶과 관련한 생산성 향상에 초점을 맞추라고 강조하는 셈이다.


디지털 습관을 바꾸자


책을 통해 지금 당장 자신의 디지털 습관을 바꾸기 위해 활용할 수 있는 실천가능한 지침과 전략을 배울 수 있다. 책은 우리를 위한 스마트폰 사용법 내지는 안내서라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의 목적에 부합하는 디지털 습관을 작은 것부터 실천해보자.


#자기계발 #스마트폰끄기의기술 #페이베게티 #부키 #웬디북살롱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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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넘는 한국사 - 경계를 넘나들며 만들어낸 한국사의 단단한 궤적
박광일 지음 / 생각정원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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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기록에 그치지 않고, 현재를 성찰하고 미래의 선택을 돕는 지침을 제공한다고 합니다. 역사 속 사건의 배경과 흐름을 살피면 그 안에 숨은 인간의 욕망과 도덕성, 국가와 사회의 본질과 운영 원리를 깊이있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 ‘프롤로그’ 중에서



책의 저자 박광일은 현재 역사여행 전문기획사 (주)여행이야기와 역사 콘텐츠를 만드는 공간 역사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다수의 TV 프로그램, 라디오, 유튜브 등에 출연해 역사 대중화에 앞장서왔다.


그는 긴 호흡으로 한국사를 바라보는 것을 권한다. 선사 시대부터 현대까지 아우르는 한국사를 공부하면서 기존에 선을 그었던 한국사의 경계선을 넘어, 새로운 시각에서 한국사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책은 총 5부로 구성되어 1부와 2부는 ‘한반도’라는 영역의 선을 넘어 중국과 북방 유목민족, 그리고 일본과의 국제 관계 속에서 한반도의 국가들이 어떻게 성장하고 쇠퇴하면서 오늘날의 한반도 지형을 만들었는지를 살핀다.


3부와 4부는 한국사에 영향을 준 ‘경계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한반도의 한국인’이라는 선을 넘어 한국사에 큰 영향을 준 외국인과 세계 곳곳에 거주하며 한국을 알린 한국인 이야기를 소개한다. 마지막으로 5부는 동서양과의 교류 속에서 만들어낸 가장 한국적인 문화를 담았다.


전곡리 유적, 세계 구석기 연구의 틀을 깨다


경기도 연천 전곡리 유적은 1978년 주한미군 그렉 보웬 상병이 한탄강에 놀러 갔다가 우연히 주먹도끼를 발견함으로서 밝혀졌다. 보웬은 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했기에 이를 프랑스 전문가와 서울대 김원룡 박사 등에게 확인을 받으면서 아슐리안형 주먹도끼임을 확인했다.


이 발견으로 인해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 구석기 문화가 인도 및 유럽, 아프리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구석기 문화에 관해 기존에 형성된 편견의 선을 무너뜨렸던 것이다. 이후 2000년에 일본인 후지무라 신이치는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구석기 유적을 발견했다고 발표했지만 이는 내부자의 제보와 집요한 마이니치 신문의 취재로 사기임이 밝혀졌다. 그는 몰래 유물을 묻어 놓고 자신이 발굴한 것처럼 떠들었던 것이다.


고구려는 중국사가 아니다


고구려라는 나라는 오늘날 중국 동북부와 한반도 북부에서 시작되었다. 동아시아의 강국이다 보니 고구려의 영토를 자신들의 역사에 편입하려는 국가들이 몇몇 있었다. 거란족이 고구려의 계승자라며 고려를 침략해 왔고, 현 중국은 동북공정에서 고구려를 지방정권으로 왜곡까지 하고 있다.


이런 일이 자행될 수 있는 이유는 고구려의 역사적 사료가 부족해서 벌어지는 촌극이다. 역사 전공자일지라도 고구려 전체 역사를 자세하게 알기엔 어려움이 있다. 남과 북의 단절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데, 주변 국가들의 터무니없는 역사 논쟁을 일거에 제압하는 사건들이 있었다. 대표적 사례가 바로 고구려의 평양 천도이다.


고구려는 도읍지를 졸본성에서 국내성으로 그리고 평양성으로 이전했었다. 한 국가가 수도를 옮길 때는 이에 따른 의미가 수반되기 마련이다. 국내성 천도의 경우는 고구려가 한사군을 축출하고 한반도를 아우르는 나라임을 알리는 계기였다.


고구려는 처음 졸본(중국 요령성 환인 지역)에서 건국했다. 건국 직후부터 평상시 거점이 되는 도시와 비상시 군사 목적의 산성山城으로 구성된 도성都城체계가 있었다. 환인 분지의 고지대에 위치한 오녀산성이 군사 목적의 산성이다. 이곳 현지인들의 증언 또한 고구려 산성이라고 말한다. 평시엔 그 동쪽 혼강江 근처의 평지에 조성된 도시에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리왕 21년, 제사용 돼지가 도망치는 일이 발생하지 이를 찾아나선 신하가 '국내 위나암'에 이르렀을 때 지세地勢와 물산物産의 풍부함을 목격하고 이를 왕에게 보고했다. 이로 인해 고구려는 졸본에서 국내로 천도하여 위나암 성을 쌓았다. 대체로 이곳을 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지로 본다.


다만 도읍지엔 2개의 중심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현 ‘산성자 산성’으로 고구려 때 환도성으로 불렸던 곳인데, 고구려 역사에서 불행한 사건이 발생한 곳이다. 동천왕 때 위나라 관구검의 군대에게 함락되었고, 고국원왕 때는 선비족의 모용씨가 세운 전연前燕의 군대에 함락되었던 고구려의 도성이다. 둘레가 약 7km의 거대한 산성으로, 동남쪽에서 궁궐터가 발견되었다.


다른 하나는 평지에 쌓은 둘레 2.7km 정도인 국내성이다. 평지인 탓에 개발과 훼손으로 인해 옛 모습을 거의 분간하기 어렵다. 국내성의 축성시기는 동천왕 또는 고국원왕 때로 연구자가 갈리지만, 산성인 환도성을 보완하고 대체할 목적이었다는 공통된 의견이다.


국내성을 도읍지로 삼은 기간은 약 423년으로 미천왕, 소수림왕, 광개토대왕, 장수왕으로 이어진다. 고구려 전체 역사 704년 중 약 60%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 고구려는 전략의 요충지인 서안평을 점령하면서 대륙으로 확장하려는 의지를 드러내고, 한반도에선 한사군을 완전히 내몰았다.


장수왕은 다시 천도를 구상, 평양을 도읍지로 정했다. 평양은 대동강을 통해 서해를 이용하기 좋고, 내륙의 평야지대와도 쉽게 연결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평양성은 668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무너질 때까지 200여 년동안 고구려의 도읍지였다.


천도 1기(427~586년)엔 둘레 약 2.5km, 38만 제곱미터 면적의 안학궁과 그 뒤로 대성산성에 행궁을 둔 구조였다. 즉 평시와 비상시에 번갈아 가면서 사용했던 것이다. 이후 불편함을 느낀 양원왕이 축성을 시작해 평원왕 때까지 새로 조성된 천도 2기 도읍지가 바로 평양성이다. 586년에 안학궁이 평양성 내에 위치하게 된 셈이다.


윤동주가 태어나고 자라고 묻힌 곳


일제강점기에 중국 길림성의 용정은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분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윤동주 시인이다. 최근엔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많은 한국인들이 이곳을 찾아 방문한다. 그런데, 시인의 생가터 앞에 커다란 표석 때문에 당황하게 된다. 이렇게 적혀있다.


‘중국 조선족 애국 시인 윤동주 생가’


한국인이라면 ‘조선족 윤동주’라는 낱말에 충격을 받게 된다. 지난 과거의 역사를 이렇게 조작하는 중국 공산당의 뻘짓에 분노를 느끼게 한다. 독립유공자들의 국적과 명예를 회복하는 일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그분들의 정체성을 찾아드리는 일이고, 조국을 위해 헌신한 그분들께 예의를 갖추는 일이다.


34번째 민족대표라 불리는 사나이


3.1운동과 제암리 학살 사건 당시 사진을 찍어서 일본의 부당함을 전 세계에 알린 스코필드 박사. 34번째 민족대표라 불리는 그는 서울대 수의과대학에서 교수로, 고아원 등에서 아이들을 돌보며 한국과 인연을 이어갔다. 그리고 1970년 4월, 국립의료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서거하기 1달 전, <조선일보>에는 그가 보낸 ‘한국민에게 보내는 메시지’라는 글이 실렸다.


“‘1919년 당시의 젊은이와 늙은이들에게 진 커다란 빚을 잊지 마시오.’ 이 몇 마디는 내가 오늘의 조선 청년들에게 주고 싶은 말이다. 국민은 불의에 항거해야만 하고 목숨을 버려야만 할 때가 있다. 그럼으로써 일종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고 조금은 광명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의 독립운동가였던 스코필드 박사의 묘지는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의 애국지사 묘역으로 정해졌다.


동아시아 불교 네트워크가 만들어낸 세계기록유산


6.25 전쟁 때는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당시 작전권을 가지고 있던 미군이 폭격기 조종사였던 김영환 대령에게 해인사 폭격을 명령했다. 그러나 김 대령은 해인사 뒷산 너머 적군의 보급품 저장소만 공격하고 돌아왔다. 이에 명령 불복종으로 상부에 호출되었지만, 그는 당당하게 말했다.


“영국 사람들은 ‘셰익스피어와 인도를 바꿀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팔만대장경은 셰익스피어와 인도를 다 주어도 바꿀 수 없는 보물 중 보물인데, 전쟁으로 이것을 불태울 수 없었습니다.”


김영환 대령의 대답에 미군은 수긍을 했다고 한다.


역사에 대한 올바른 관점


저자는 이 책을 열린 마음으로 과거와 현재를 바라보는 태도를 가지라도 제안한다. 선을 넘는다는 것은 우리들이 내면에 지닌 편견과 경계를 짓는 우월의식에서 벗어나 더 넓고 깊은 시각을 갖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지금의 삶도 모두 역사이다. 역사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므로 바르게 배워야 한다. 책의 일독을 권한다.


#역사 #한국사 #선넘는한국사 #박광일 #생각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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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에 균열을 낸 결정적 사건들
김형민 지음 / 믹스커피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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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통해서 ‘역사를 재밌게 만든’, 저마다의 방식과 수단으로 드라마틱한 역전극을, 도는 영웅적 비극을 써낸, 패배로써 역사를 다채롭게 하고 좌절을 딛고 일어서는의지로 역사의 주인공이 된 사람들, 그들이 심심한 역사의 균열을 끌어낸 사연을 정리해 보고 싶었다. - ‘들어가며’ 중에서


(사진, 책표지)


역사는 승자의 역사일 뿐이다. 이는 역사를 기록하는 이들이 주로 승자이기 때문이다.핮만 승지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지라도 이에 굴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 격임을 알면서도 스스로 몸을 던진 셈이다.


‘산하’란 필명으로 더 유명한 김형민 저자는 역사 전공자로 역사 지식 뿐만 아니라 뛰어난 글솜씨로 골수팬들을 팬덤으로 두고 있는 글쟁이다. 그는 다섯 개 장에 걸쳐 언더독의 치열한 저항 이야기들을 펼쳐낸다.


소련에 맞섰던 핀란드


2022년 베이징 동계 올림픽이 끝나자 마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세계 2위의 군사력을 자랑하던 러시아군이 금방 우크라이나를 휩쓸 것으로 예측했다. 하지만 젤렌스키 대통령과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끝까지 저항하며 현재까지 이 전쟁은 이어지고 있다.


세계사에서 강성한 나라와 민족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들의 칼날과 말발굽 아래 무릎 꿇고 사라져 간 민족과 나라의 수는 훨씬 더 많았다. 그럼에도 용기를 떨치든 지혜를 발휘하든 압도적인 강자에 맞서 생존을 쟁취한 희귀한 역사적 사건도 있다.


1939년 나치 독일과 함께 폴란드를 나눠 먹은 소련은 발트 3국에 발톱을 들이밀고 사실상 자기들 땅으로 만들어버렸다. 독재자 스탈린은 이제 핀란드에게 카렐리아, 라플란드등을 포함한 땅과 발트해 항구의 소련 해군 주둔권, 조차권 등 무리한 요구를 해왔다.


이 협상을 주도한 사람이 소련 외무장관 바체슬라프 몰로토프였다. 핀라드측은 이런 요구를 거부했다. 협상이 결렬되자마자 몰로토프는 “대화는 끝났다. 이제는 붉은 군대가 말할 차례다.” 라고 선언했다. 마침내 1939년 11월 30일 소련의 맹공격이 시작되었다. 겨우 인구가 370만 명 정도인 핀란드에 소련의 무력은 마치 폭설처럼 쏟아졌다.


핀란드인들은 소련군 기갑부대(탱크)에 화염병을 투척했다. 가솔린 엔진을 사용했던 소련군 탱크에 상당한 타격을 안겼다. 러시아군에 맞서고자 우크라이나 시민들이 화염병을 만드는 모습이 뉴스로 전송되었다. 이를 ‘몰로토프 칵테일’이라고 말했다.


불쌍할 정도로 열세에 놓인 핀란드인들은 효율적인 방어책을 고안하고 모든 걸 짜내어 소련에 저항했다. 굽힐 때는 굽히되 단단할 때는 충분히 단단하며, 나아갈 때는 골리앗을 향해서도 거침이 없되 항상 퇴로를 고민하고 살아날 궁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것이 1940년대 골리앗 소련에 맞섰던 다윗 핀란드의 생존 비결이었다.


수나라에 맞선 지혜로운 고구려


동북아의 최강국 수나라에 주변 대부분의 나라는 고개를 숙였지만 고구려는 호락호락 굴복하지 않았다.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가 계속 고구려를 압박하자 고구려 영양왕은 먼저 말갈족을 이끌고 수나라 영토를 선제공격했다. 일종의 맛보기 시위였던 셈이다.


이에 수 문제는 격노하고 30만 대군으로 고구려 침략에 나섰다. 결과는 대실패였다. 고구려군의 완강한 반격, 장마와 태풍, 전염병 등에 시달린 끝에 대부분의 병력을 잃고 퇴각하고 말았다. 이때 양양왕은 흥미로운 국서를 수 문제에게 보내 비위를 맞춰 주었다. 자신을 납짝 엎드려 ‘요동분토신遼東糞土臣’(요동 똥 덩어리 땅의 신하)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기고만장해도 부족할 판에 의외로 머리를 굽힌 까닭은 수나라의 즉각적인 재침再侵을 막으려는 꾀였다. 퇴각한 수나라의 피해도 엄청났지만 이를 물리치기 위해 방어했던 고구려도 전후 복구를 위해선 상당한 시일이 요구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고구려는 강자를 상대할 줄 아는 지혜로운 약자였다. 여차하면 ‘선빵’을 날릴 줄 아는 과감한 용기를 과시했지만 “저는 똥 덩어리일 뿐입니다”라고 바싹 엎드리며 강자의 비위를 맞추는 것도 서슴치 않았던 것이다.


이후 수 문제가 죽고 탐욕스러운 수 양제(수 문제의 둘째 아들)가 즉위하면서 양국 간의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았다. 자기 맘대로 되지 않는 고구려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결국 최대 병력을 동원해 고구려를 침공했다. 기록상으론 113만 여명의 병력이었다. 믿거나 말거나.


612년 고구려를 침공한 수나라군의 총사령관은 수 양제 본인이었다. 이게 오히려 약점이었다. 황제가 결정하기 전엔 어느 장수도 함부로 적당히 알아서 전투에 나설 수가 없었다. 수 양제는 고구려군이 항복을 표하면 반드시 황제의 명을 기다리라고 전군에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평지에 위치한 요동성은 가히 인해전술로 덤비는 수나라군을 방어하기엔 벅찼다. 성벽을 곧 넘을 위기 상황이 되면 요동성의 수비군은 항복 의사를 타진하며 시간을 벌었다. 수나라군이 황제의 답신을 받을 사이에 원기가 회복되면 재차 성벽에 늘어서서 칼을 번득였다. 이렇게 거짓 항복과 번복을 세 차례나 반복했다.


수 양제도 바보는 아니었다. 요동성 함락이 여의치 않자 별동대 30만 명을 추려서 평양성 공격을 명령했다. 압록강을 넘을 무렵에 수나라군 진영에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이 모습을 나타냈다. 당시 을지문덕이 수나라 군사령관과 어떤 담판을 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사료史料가 없어서다. 거짓 항복을 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황제의 명령을 기다리는 동안 을지문덕은 적진영에 머물며 수나라 장수들간의 대화를 듣고 ‘군량미가 부족하다’는 이들의 약점을 간파했다. 동서고금의 전쟁사를 통털어 배고픈 군대는 가장 허약한 군대로 판명났다. 모험을 걸었던 을지문덕은 재빨리 적진을 탈출하여 고구려군 지휘에 나섰다. 살수대첩을 이끌어 냈다.


여기서 우리들은 교훈을 얻는다. 강대국 수나라가 자신들의 강점을 총동원해 쳐들어왔을 때, 고구려는 상대의 약점을 들여다보았고 그 약점을 철저히 파고들고자 고구려의 수뇌부들은 위험을 감수하며 솔선수범했다. 임진왜란 위기 때 조선을 구한 이순신 장군의 명언 ‘죽기를 각오로 싸우면 산다’(필사즉생必死則生)도 고구려 전쟁사를 탐독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싶다.


희망을 잃지 않은 ‘스파르타쿠스’처럼


트라키아 출신검투사 스파르타쿠스는 검투사들에 대한 잔혹한 처우에 반발, 기원전 73년 여름에 동료 검투사 74명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다. 처음엔 베수비오 화산 근처의 산록에 은신해 산적질을 하는 수준이었지만, 점차 스파르타쿠스의 능숙한 지휘로 로마의 진압군을 잇달아 격파하면서 그 세를 더 강력하게 키워 나간다.


하지만 정식 군대에 미치지 못하는 스파르타쿠스의 노예군은 한계를 절감, 철옹성 같은 로마 공격을 포기하고 계속 이탈리아 반도 남쪽으로 향하던 중, 로마군의 총반격을 받고 이에 대항하던 스파르타쿠스는 결국 목숨을 잃고 만다.


노예군의 영웅인 스파르타쿠스 사후 약 2천년 뒤 미국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영화 <스파르타쿠스>(1960년)는 스파르타쿠스의 최후를 감동적으로 재창조했다. 로마 장군이 노예군 포로들에게 스파르타쿠스를 가리키기만 하면 모두 살 수 있다고 유혹하자, 여기저기서 “내가 스타르타쿠스다!”라고 외친다.


이 영화의 각본을 담당한 인물은 시나리오 작가 돌턴 트럼보였다. 그는 할리우드에 밀어닥친 메카시즘으로 인해 공산주의자 색출 목적의 청문회 ‘반미활동조사위원회’에서 증언을 거부한 10명중 한 명이었다. 이후 그는 할리우드에서 모든 활동을 차단당했다.


그럼에도 시나리오 쓰기를 중단하지 않던 그는 친구 이름으로 대본을 쓴 <로마의 휴일>(1953년)이 대박을 치며 오드리 헵번을 일약 스타덤에 올려 놓았던 것이다. 그의 가짜 이름 ‘로버트 리치’로 덜컥 29회 아카데미 각본상(영화 ‘브레이브 원’. 1956년)까지 받지만 시상식엔 참석할 수 없었다.


이런 트럼보 앞에 커크 더글러스가 나타났다. 그에게 불쑥 내민 대본은 로마 검투사들의 반란 이야기인 스파르타쿠스였다. 제작과 주연까지 맡은 더글러스에게 할리우드의 메카시즘은 빨갱이로 의심된다는 압박을 가했지만 오히려 트럼보의 이름을 크레디트에 올려버렸다.


(사진, 언더독)


언더독의 재발견


이밖에도 책은 힙스부르크 대군을 격파한 스위스 용벙,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과 처참한 몰골을 필름에 담 이기복 사진사의 용기, 히틀러의 암살을 시도한 게오르크 엘저, 파리 코뮌의 여걸 루이즈 미셸 등을 통해 언더독의 치열한 저항의 순간들을 마주하게 된다.


#세계사 #세계사에균열을낸결정적사건들 #김형민 #믹스커피 #원앤원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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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토 - 역사왜곡방법론 : 사례
진정 지음 / 지식과감성#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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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신라’라는 나라가 ‘현, 중국의 강소성에 있었던 강소신라(江蘇新羅)’에서 ‘현, 대한민국의 경상도에 있었던 경주신라(慶州新羅)’로 나라 전체를 통째로 옮겨야만 했었던 혼동의 시기(7C 말~8C 초)에 그 향도의 역할을 했었던 신라 불승(佛僧)들의 고뇌와 헌신을 ‘역사왜곡방법론’이라는 새로운 역사해석기법을 적용해서 설명한 것이다. - “머리말’ 중에서



책의 저자 진정眞正(진실眞實만이 정당正當하다)은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70 노인이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추론推論만을 통해서 ‘수천 년이라는 방대한 시공간의 사건들’을 종횡무진으로 헤매고 다니다 보니 ‘여기저기에 사소한 오류와 모순점들이 뒤섞여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한다고 말한다.


‘참된한국통사’라고 명명한 1편-2권에 해당하는데, 1,000년 왕국 신라인들의 꿈, ‘불국토佛國土’를 설명하고 있다.


신라가 건설한 불교 시설들


법흥왕이 527년에 ‘이차돈의 순교’라는 극적인 이벤트를 통해서 수용한 불교는 진흥왕 때에 완전히 꽃을 피웠다.


흥륜사는 263년 경 산동신라에 불교를 처음 전해준 아도(묵호자)가 묻힌 것으로 사실상 신라의 첫 불교사찰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대왕흥륜사는 이사돈의 순교를 기념해 현, 강소성양주에 새로 세웠다고 보이는 사찰이지만 실제로 간축되었는지, 아니면 그냥 대왕인 법흥왕이 흥륜사의 위상을 격상코자 대흥륜사라고 불렀던 것을 후대에 대흥륜사와 구별하기 위해 대왕흥륜사라고 기록한 것인지 불분명하다.


대흥륜사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처럼 진흥왕이 공사를 완성한(535~544년) 사찰인데, 대왕흥륜사를 재건축헸었거나, 흥륜사를 현, 강소성양주로 옮겨와서 재건축한 것으로 보인다.


아직은 강소신라의 경주신라 이동이라는 기본적인 전제가 완전히 증명된 것이 아니므로 저자의 이런 설명이 황당하다. 하지만 저자는 추가적인 설명을 통해 독자 스스로가 이를 인정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황룡사는 신라 최대의 사찰이다. 이 사찰의 건립 관련 기록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진흥왕 14년(553년) 춘春 2월 황룡사를 짓다~왕이 담당 관청에 명하여 월성의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게 하였는데. 황룡黃龍이 그곳에 나타났다. 왕이 이상히 여겨 계획을 바꾸어 절로 만들고 이름을 황룡皇龍이라고 하였다.


<삼국유사>엔 아도가 신라에 불법을 전하다~ 그 서울(京都)에는 일곱 곳의 절터가 있다..... 셋째는 용궁龍宮 남쪽이요, <삼국유사>황룡사장육조엔 진흥왕이 황룡사를 세우다~진흥왕 즉위 14년(553) 계유2월, 장차 궁궐을 용궁龍宮의 남쪽에 지으려 하는데 황룡이 그 땅에 나타나서 이에 고쳐서 절을 짓고 황룡사黃龍寺라고 하였다.


‘7말8초 역사왜곡’과 관련된 신라 승려들


불교승려들의 활동상황을 개략적으로나마 조사해 보면, 이 역시 불교문화가 ‘강소신라의 한반도 이동’과 어떤 상관관계를 갖는지를 더 깊이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법흥왕이 처음으로 불교를 공인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빅이벤트를 펼쳤던 이차돈을 <삼국유사>엔 ‘염촉멸신’이라는 제목으로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즉 원종(법흥왕)이 불교를 일으킨 것은 염촉(이차돈)이 몸을 버림으로써 가능했다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등재된 많은 승려들 중에서 자장법사와 관련된 내용 비중이 가장 크다. 나당군사동맹은 당태종의 의중이 절대적으로 반영된 것이다. 당태종은 처음 만나는 자장을 통해서 부처님머리뼈, 부처님이빨, 부처님진신사리 및 각종 불교서적을 신라에 줌으로써 군사동맹을 성사시키려고 공을 들였다.


의상법사도 자장 못지않게 많은 기록들이 <삼국유사>에 등재되어 있다. 당고종은 나라에서 불교를 총괄하고 있는 도선율사를 종남산 지상사 부근에 파견하여 강소신라를 경주신라로 강제 이전시킨 뒤 흔적을 아예 지워버리는 역사왜곡 실무작업을 사전에 예행연습 을 하게 했다.


7세기 말~8세기 초 동아시아의 최강국 당나라 주도로 다자간평화협약에 따라 통일신라는 중국 강소성(강소신라)에서 한반도(경주신라)로 이주해야만 했었던 점을 거론하면서 이를 증명하기 위해 저자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내용을 토대로 이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나가고 있다.


아무튼 이제껏 많은 역사공부를 했지만 이처럼 쇼킹한 역사왜곡을 처음 접하고 나니 다소 혼란스럽기만 하다. 앞으로도 좀더 이 문제점을 집중적으로 파고 들어가는 공부를 본격적으로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역사 #한국사 #통일신라 #강소신라 #경주신라 #불국토 #진정 #지식과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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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시가 없다면 너무 외롭지 않을까요 - 흔들리는 인생을 감싸줄 일흔일곱 번의 명시 수업
장석주 지음 / 포레스트북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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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교훈을 전하거나 목소리가 높을 이유는 없다. 시의 목소리는 속삭임이어야 하고, 시의 규모는 작을 수록 좋다. 내가 사랑하고 추앙하던 시들을 한데 모았다. 이것은 시를 교재로 삼은 인생 수업이자, 마음의 기쁨을 위한 희귀한 것이고, 당신이 이제껏 겪지 못한 놀라움들일 것이다. - ‘들어가는 글’ 중에서



‘대추 한 알’의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저자 장석주가 흔들리는 어른들에게 꼭 필요한 77편의 명시를 소개한다. 나태주, 백석, 칼릴 지브란, 메리 올리버 등 전 세대에 걸쳐 사랑받는 작품들을 엄선, 본인의 사색과 통찰을 함께 곁들여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시를 잊고 살았기 때문에 외로웠을지도 모른다. 시인의 글을 이해하지 못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읽고 음미하기만 해도 각박한 현실에 찌든 우리의 마음에 여유가 생길 것이다. 이제 외로움을 느끼지 않도록 매일 한두 편씩 시를 기까이하면서 힐링을 받도록 하자.


더 깊고 진한 위로가 필요할 때


미국 시인 메리 올리버(1935~2019년)는 예술가들의 천국이라는 프로빈스타운에서 살며 매일 술과 바닷가를 거닐었고, 고통과 불안에 바진 사람들을 위로하는 시를 많이 썼다.


(사진, 메리 올리버의 ‘기러기’)


‘기러기’를 처음 읽었을 때 눈이 번쩍 뜨이는 듯했다. 좋은 시를 발견할 때마다 그랬다.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포기하지 말고 살아라, 라고 응원하는 듯했다. 우리 앞에는 천 개의 벼랑이 있고, 천 개의 벼랑을 넘으려면 천 개의 희망이 필요할 테다. 하지만 시는 현실에서 아무 쓸모도 없다. 시는 그토록 무용하지만 우리를 계속 살아가게 만드는 힘이 있다.


시인 백석(1912~1996년)의 본명은 백기행이며, 백석白石은 그의 호다.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고향 정주에서 오산고보를 졸업, 일본 유학파 출신으로 1935년 첫 시집 <사슴>을 100부 한정판으로 발간했다.


(사진,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나타샤, 당나귀, 산골, 마가리, 고조곤히, 응앙응앙 같은 어휘들로 이루어진 백석의 절창絶唱 중 하나다. 이 시는 첫눈 올 때 혼자 소리내어 낭송하기에 좋다. 내 귀가 듣기 좋아하는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라는 마지막 구절은 슬프면서도 아름답다.


살금살금 다가온 문장들


레바논 출신의 지혜로운 시인 칼릴 지브란(1883~1931년)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하지만 그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쉰 적이 없었다.


(사진, ‘사랑에 대하여’)


사랑만큼 이러쿵저러쿵 많은 말들이 있을까 싶다. 사랑에 대한 말 중엔 새겨들을 만한 옳은 소리도 있고, 마이동풍 격으로 흘려 들어야 할 헛소리도 있다. 지브란은 그의 시에서 “사랑의 날개가 그대를 감싸안거든 그에게 온몸을 내맡기라”고 권하며 또 사랑을 조심하라고 말한다.


우리를 계속 살아가게 만드는 시


1981년 장석주 시인이 출간한 시집 <완전주의자의 꿈>에 실린 ‘밥’은 본인의 20대 중반 동안의 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시다. 생계를 꾸리는 일의 엄중함에 예민해진 마음을 엿보게 한다.


귀 떨어진 개다리소반 위에

밥 한 그릇 받아놓고 생각한다.

사람은 왜 밥을 먹는가.

살려고 먹는다면 왜 사는가.

한 그릇의 더운 밥을 얻기 위하여

나는 몇 번이나 죄를 짓고

몇 번이나 자신을 속였는가.

- 장석주, ‘밥’ 중에서


사람들은 밥을 위해 취직을 하고 노동을 한다. 밥 때문에 굴욕을 당하거나 그 억울함을 토하지 못하고 가슴에 안은 채 괴로워하기도 한다. “한 그릇의 더운 밥을 얻기 위하여/나는 몇 번이나 죄를 짓고/몇 번이나 자신을 속였는가.”란 귀절은 통렬한 자기반성인 셈이다.


시를 잊고 살았기 때문에 외로웠던 것일지도


나태주 시인은 젊은 시절 ‘대숲 아래서’를 신춘문예 공모에서 당선함으로써 등단한 셈이다. 시골에서 초등학교 선생을 하면서 경외하는 시인들의 시를 읽으며 외롭게 습작을 몰두하던 중 그 어렵다는 신춘문예을 뚫고 시인이 되었다. 당시 심사위원 중 한 분이 청록파 박목월 시인(1915~1978년)이다. 나태주의 평생 스승이었다.


(사진, ‘대숲 아래서’)


‘대숲 아래서’는 조촐한 산골 생활에 자족하며 사는 사람의 참된 생각으로 가득 찬 시다. 달빛, 대숲, 밤안개, 달님, 우물이 어우러진 시를 읽으면 모두 참된 사람이 되고 싶다. 어디 한 군데 삿된 생각이 스며들지 않은 시, 한 점 오욕이나 티끌도 묻히지 않은 시, 이런 무욕한 시는 순수하게 산 이만 쓸 수 있다. 한 떨기 이슬처럼 빛나는 서정시다.


읽고 나면 머리를 찬물로 헹군 듯 맑아지는 시, 삶의 올바름으로 이끄는 시다. 이게 좋은 시가 아니라면 어떤 시가 좋은 시인가? 시인 장석주도 스무 살 무렵 이 시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 좋은 시란 좋은 삶에서 나온다는 걸 벼락같이 깨달은 탓이다.


모든 날, 모든 순간에 저마다의 시가 있다


소월(1902~1934년)은 민중의 한과 슬픔을 보듬은 민족 시인이다. 한국 서정시의 최고봉이라 극찬할 만하다. 2000년대 초, 어느 시 전문 계간지에서 시인과 평론가 100명에게 20세기에 활동한 위대한 시인 열 명을 선정해달라는 설문을 조사했다. 이때 가장 많이 꼽은 시인이 바로 소월이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김소월, ‘엄마야 누나야’


이 시의 화자話者는 소년이다. 순진한 소년은 강변에서 사고 싶다는 소망을 나타내고 있다.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에 따르면 분명 그곳은 목가적牧歌的인 환경일 것이다. 그런 삶 속에 소년은 엄마와 누나를 콕 집어 초대한다. 이토록 수려한 장소라면 부동산업자들이 그냥 둘 리 없을 것이다.


시가 없는 세상은 삭막하다


장석주 시인의 해설을 곁들인 77편의 명시와 함께하는 시간은 분명 외롭지 않다. 오히려 마음이 안정되고 따듯함을 느끼게 한다. 그렇다. 갈수록 치열한 경쟁 사회 속에서 살아남으려니 나도 모르게 마음 또한 삭막해진다. 이런 우리들에게 시는 일용해야 할 양식이자 외로움을 잊게 하는 존재다.


#시감상 #삶에시가없다면 #너무외롭지않을까요 #장석주엮음 #포레스트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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