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사건으로 보는 돈의 역사 돈의 역사 1
홍춘욱 지음 / 로크미디어 / 201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계 역사를 바꾼 중요 사건의 배경을 살펴봄으로써,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이해의 폭을 넓혀보자는 것이다. 물론 이 책 한 권 읽는다고 해서 세상일이 명쾌하게 다 설명되지는 않겠지만, 영웅의 행동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세계사의 이면도 있음을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 '서문' 중에서

 

 

돈의 관점에서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다

 

저자 홍춘욱은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한 뒤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 명지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3년 한국금융연구원을 시작으로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투자운용팀장, KB국민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 키움증권 투자전략팀장(이사) 등을 거쳤다. 현재 EAR Research 대표이자 숭실대학교 금융경제학과 겸임교수로 있다. 2016년 조선일보와 에프앤가이드가 '가장 신뢰받는 애널리스트'로 선정했으며, 수년 간 부동산 및 금융 분야, 국제 경제 전망을 아우르는 전문가로서 각종 미디어의 1순위 인터뷰어로 손꼽혀왔다.

지은 책으로는 <돈 좀 굴려봅시다(2012)>와 <환율의 미래(2016)> 외 10여권에 이르며, <순환장세의 주도주를 잡아라(2018)> 등 여러 권의 책을 번역했다. 1999년부터 개인 홈페이지 <홍춘욱의 시장을 보는 눈>을 운영하면서 네티즌과 지식을 공유해왔으며, 최근에는 유튜브 채널 <홍춘욱의 경제강의노트>를 통해 어려운 경제 및 금융시장 지식을 쉽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책은 프랑스보다 군사력이 열세였던 영국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던 배경에는 중앙은행을 비롯한 금융 시스템의 도입이 있었음을 이야기하며, 18세기부터 서양이 동양보다 잘 살게 된 이유, 일본의 버블 자산이 일어난 배경, 대한민국의 광복후 토지개혁과 이후 외환위기까지 역사적 사건들을 이야기하며, 돈의 역사는 과거에 시작되어 그 순간 끝난 것이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책은 총 7부로 구성되었는데, 1부에서는 나폴레옹 전쟁을 중심으로 산업혁명 전후의 서양 세계 발전 정을 살펴본다. 2부에서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양의 역사를 다룬다. 명나라 가정제 시절 왜구가 창궐했던 이유, 스페인의 아메리카 대륙 침략이 명나라에 미친 영향 등을 샇펴본다. 3부에서는 산업혁명의 발생과 확산 과정을 다룬다. 

 

이어서 4부에서는 11929년 대공황을 다루는데, 특히 금본위제에 대한 설명에 집중하고 있다. 5부에선 1971년 닉슨 쇼크 후 금본위제가 붕괴된 후 세계경제에 어떤 변화가 나타났는지를 다룬다. 6부에서는 왜 엔화의 강세가 나타났고, 어떻게 역사적인 자산 버블로 연결되었는지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7부에서는 한국 경제에 있었던 다양한 이벤트를 살펴본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선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

 

19세기 초 유럽을 제패했던 나폴레옹에게 가장 위협적인 대항마는 섬나라 영국이었다. 영국은 프랑스를 견제코자 일곱 차례나 프랑스동맹이라는 군사 동맹을 주도했고, 프랑스의 뒷마당격인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반란(1808~1814년, 반도전쟁)을 지속적으로 지원했다. 또 1812년 살라망카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패퇴시킨 당사자도 바로 웰링턴 공작이 이끌던 영국군이었다.

 

급기야 1813년 10월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프랑스동맹군에게 완패함으로써 나폴레옹의 군사지배 체제에 금이 가기 시작한 직접적 원인이 되고 말았다. 사실상 반도전쟁에서 가장 돋보인 존재감은 바로 영국 해군이었다. 영국에서 포르투갈까지 해상 보급선을 유지하고, 필수 군수물자 공급에서 프랑스군보다 우위를 점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영국은 극강의 해군력을 확보할 수 있었을까? 이는 18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넬슨 제독이 프랑스와 스페인의 연합함대를 완벽하게 제압한 이후 해상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어서다. 이들은 104문의 대포를 장착한 전함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이는 당시로선 최첨단 전투선이었다.

 

 

그런데, 영국의 숲은 18세기 이전에 이미 사라지고 존재하기 않았기에 배를 만드는 목재는 스웨덴과 북미에서 수입해야만 했다. 여기에다 대포 제작과 수많은 병사들의 인건비 등 당연히 선박 구축비용이 많이 소요되었다. 이 막대한 비용을 영국은 어떻게 충당할 수 있었을까? 영국의 명예혁명(1688년)은 영국의 국채금리를 급격히 인하시켰기에 저금리로 조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영국 왕들이 빈번하게 채무불이행을 선언한 것은 국가 재정이 튼튼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찰스 2세의 아버지인 찰스 1세가 1649년 올리버 크롬웰이 이끈 의회군에 패배해 처형당한 사건, 즉 청교도 혁명도 전함 건조를 위해 특별 세금인 건함세建艦稅를 부과해 귀족과 금융업자의 반발을 샀던 것이 원인이었다. 이후 영국 의회는 네델란드의 오렌지 공 윌리엄을 새로운 국왕(윌리엄3세)으로 앉히고 신설되는 세금은 사전에 의회의 동의 구할 것과 국민의 재산을 함부로 강탈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음으로써 더 이상의 원리금 연체가 발생하지 않았다.

 

네델란드 금융이 도입된 영국의 금융시장은 1702년 영국의 국채금리를 단번에 6%로 떨어뜨렸다. 특히 1755년엔 2.74%를 기록함으로써 다른 어떤 나라도 꿈꿀 수 없었던 저금리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다. 이는 영국의 육군과 해군의 전력 상승으로 이어졌다. 거대한 함대의 건조는 물론이고, 사전에 화약을 이용한 실전 훈련을 꾸준히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금리 하락의 혜택이 영국 정부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재산을 형성한 영국 국민들은 채권, 특히 만기가 없는 영구 채권(콘솔 공채)에 투자해서 노후를 편하게 보낼 수 있는 설계가 가능했다. 나아가 '신뢰가능한' 자본시장이 형성되자, 전 세계의 부자들은 투자를 목적으로 너도나도 영국 런던으로 몰려왔던 것이다.  

 

왜 네덜란드에서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인 '동인도회사'가 출범하게 되었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네덜란드가 중세 유럽 사회의 핵심인 '장원제도莊園制度)'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장원제도란 영주가 자신의 봉토에 속한 농노農奴들을 수직적으로 지배하는 시스템이다. 영주는 자신에게 몸을 의탁한 농노들에게 최소한의 안전, 즉 신변 보호와 농사지을 토지의 이용권을 보장했다. 영주가 권세를 잃거나 전쟁에서 목숨을 잃으면, 그의 장원은 다른 기사나 영주에게 넘어가게 되지만 일단 형식적으로는 ‘거래 관계’에 의해 성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네델란드 대부분의 주에는 장원제도가 발달하지 않았다. 네델란드 육지는 대부분 바다나 늪지를 개간한 땅이다. 개간한 사람이 주인인 것이다. 유럽의 다른 나라들보다 자연스레 네델란드 사람들은 실용주의적 태도가 생겼다. 그리고 기나긴 독립전쟁(1568~1648년)이 네델란드의 혁신에 한몫 거들었다. 네델란드 정부는 해외 시장 개척을 위한 민간 자본 육성에 동인도회사를 활용했던 것이다. 이들은 단순한 회사가 아니라 해외에 요새까지 구축하는 등 군사력까지 행사했다.

 

중세 말 대규모 상행위를 위해서는 국가로부터 특권을 부여받아야 했다. 이로 인해 대상大商들은 정부에 자금을 빌려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소위 '정경유착'의 형태가 발생해 사업과 정치는 긴밀하게 결탁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런 과정을 가장 극적으로 밟은 예가 바로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이다. 메디치 가문은 14세기 후반부터 두각을 나타냈고, 로마 교황청의 외환거래를 전담하면서 빠르게 성장했다. 당시에는 금화, 은화, 금속 주화 등 다양한 주화가 공존했기에 장거리 무역이나 납세 업무 시 환전 절차로 골머리를 앓았는데, 메디치 가문이 교황청의 이러한 어려움을 덜어준 것이다.

 

은행에 대한 신뢰도가 낮을 때 예금을 맡긴 사람들은 항상 '예금을 제때 찾지 못할 수 있다'는 공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당시에는 '예금보험제도'가 없었기에, 사람들이 일거에 예금을 찾으면 은행은 '지급불능' 상황에 빠질 수 있었다. 이런 현상을 우리들은 흔히 '뱅크런' (Bank Run)이라고 부른다. 우리들도 이미 이를 목격한 바 있다. 2010~2012년 저축은행 구조조정 당시, 자신의 예금을 인출하려고 끝없이 장사長蛇진을 친 행렬을 목격했었다. 

 

프랑스를 '영원한 도전자'라고 세계사는 평한다. 그도 그럴 것이 16세기에는 스페인이 패권 국가의 자리를 움켜쥐었고, 17세기에는 네덜란드가 암스테르담 은행과 동인도회사라는 신무기를 내세워 세계의 바다를 호령했으며, 18~19세기에는 영국이 무적 해군을 앞세워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한 반면 프랑스는 항상 2인자에 머물렀다.

 

금리가 높은 나라는 투자처로 적합하지 않을 때가 많다. 이를 '투자'의 영역에 적용하자면, 금리가 높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터키나 브라질 등의 신흥국이 발행한 국채, 혹은 우리나라 내에 신용등급이 낮은 기업들이 발행한 회사채의 금리가 높은 것은 타당한 이유가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호시절에는 고금리 채권을 선호하는 투자자들이 늘고 이 채권의 인기가 높아지기도 한다. 그러나 2000년이나 2008년처럼, 경기가 악화될 때는 첫 번째 자금회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자.

 

대항해시대로 열린 '글로벌 경제'

 

스페인의 아메리카 대륙 정복은 비단 유럽 사회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권에도 영향을 끼쳤다. 특히, 당시의 중국은 명나라 시기로 주화 제작을 은銀으로 대체하고 있었다. 만력제(재위 1572~1620년) 초기의 명재상 장거정이 단행한 일조편법一條鞭法이 이런 현상을 초래했다. 이 개혁의 핵심은 각종 세금을 토지세 하나로 단순화하고 세금은 모두 은銀으로 받는 것이었다.

 

명나라는 가정제(재위 1521~1566년) 때부터 계속되는 전쟁으로 인해 조세 개혁은 시급한 과제였다. 이 시기에 역사상 최악의 왜구 침탈을 경험했는데, 이를 '가정대왜구'라고 부른다. 그런데,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이들 해적의 명칭이 '왜구'이지만 구성원 대부분은 일본인이 아닌 중국 상인이었음이 밝혀졌다. 수백 척의 선박과 십만 명 이상의 선원을 휘하에 두었던 해적왕 왕직 역시 중국 출신이었다. 이처럼 '가정대왜구'는 일본인의 침략이 아니라 중국인들 내부의 갈등 표출이었던 것이다.

 

가정제는 밀무역 통제를 위해 해금海禁 조치를 시행하면서 수백 척의 무역선을 파괴하고 밀수상들을 처형했다.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이는 남중국해에 서양세력 (포르투갈)이 등장해 본격적으로 약탈행위를 일삼고, 전국시대 일본의 지방 영주들이 교역을 요구하면서 행패를 부리는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에 이를 경계할 목적으로 전면적 통제가 발생했다. 

 

이와같은 통제는 결국 중국 무역상들이 생업의 어려움으로 인해 해적으로 나서게 만듦으로써 중국 동남해안은 통제 불능 상태가 되었던 셈이다. 가정제 사망 후 융경제(재위 1567~1572년)의 복선성 장저우 항 개방, 포르투갈인의 마카오 조차 승인 등을 허용했지만 이미 명나라 재정은 견디기 힘든 수준에 이르렀다. 장거정의 개혁은 이런 국가 위기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멕시코에서 출발한 스페인의 대규모 선대가 필리핀을 거쳐 중국에 도달, 도자기나 비단을 구입한 대금으로 은화를 지불함으로써 중국의 일조편법으로 인한 '은銀 부족' 현상이 해소되었으니 당시 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들어온 대부분의 은이 중국으로 이동했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였다. 여기엔 깊은 속사정이 있다. 중국이 다른 지역보다 은의 가치를 높이 쳐주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의 16세기 금은 교환비율대체로 1대 12였는데, 중국은 유독 1대 6이었다. 중국으로 은을 가져가기만 해도 남는 장사였다.

 

  

 

일조편법의 시행과 '귀금속 공급 확대' 덕분에 명나라의 재정은 매우 윤택했다. 적어도 명나라 때가지는 동양의 중국이 서유럽보다 더 부강했거나 또는 비슷한 생활 수준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역사학계의 거두 이언 모리스 교수도 로마제국 멸망 이후 동양이 우세한 모습을 보인다고 밝혔다. 아래 도표를 보면, 18세기 말에 비로소 서양의 우위로 전환됨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런 명나라가 왜 갑자기 멸망하게 되었을까? 강력한 만주족 기마병 때문에 망했다고 분석하기도 하지만 이는 옳지 않다. 당시 명의 군사력은 만주족을 능가했기에 오히려 이자성이 주도하는 대규모의 농민 반란이 명 패망의 주된 이유다. 왜 농민 반란이 일어났을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민생이 핍박해지면 대규모 봉기가 발생한다. 현 문재인 정권의 민생 도탄도 더 이어진다면 마찬가지 현상이 발생할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주장이 있다. 하버드 대학의 티모시 브룩 교수'기후 변화'가 명 멸망의 직접적 원인이라는 것이다. 1613년부터 중국 북부 전역에서 홍수가 지속되었고, 1615년에는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며 추워졌다. 이를 기후학계에선 '소빙하기'라 칭한다. 1616년 후반기에 기근이 발생, 중국 북부에서 양즈강 유역으로 번졌고, 이어서 광둥성을 덮쳤다. 이후 2년 동안 가뭄과 메뚜기 떼의 약탈이 극성이었다. 물론 당시 명나라 황제가 기상 이변에 대응할 정도로 재정이 탄탄했다면 결코 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1997년 이후 우리나라는 왜?  

 

외환위기 이후 가계와 기업 등 경제 주체들이 과거 학습에 기인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인해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가 발생하고 있는데, 이는 저축보다 투자가 적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좋은 현상인 것 같으면서도 실상은 어두운 미래의 자화상이다. 즉 대마불사라던 경제 상식이 엎어지고 대기업들이 속수무책으로 붕괴되면서 수많은 실업자가 양산되는 현상을 목격했던 '트라우마' 때문에 소비와 투자를 줄인 결과,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가 발생한 것이다.

 

하지만 심각한 문제는 우리 자신의 소비는 다른 사람에겐 '매출'이라는 점이다. 만성적인 경상수지 흑자가 발생하는 현상은 내수 비중이 높은 기업의 영업 환경이 악화되는 것을 뜻하므로, 이는 기업의 투자와 고용 위축으로 자연스레 연결된다. 따라서 작금의 고용 부진 사태의 원인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경제 주체의 적극성이 약화된 탓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사람들의 심리를 바꾸는 것은 매우 어렵고, 시간도 많이 걸리는 일이기에 확실한 처방을 제시하기는 힘들다. 다만 정부의 재정지출 확대 정책이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018년 기준 우리 정부의 GDP 대비 재정수지는 1%대 중반의 흑자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며, GDP 대비 정부 부채도 12.2%에 불과하다. 이렇듯 건전한 재정을 활용해서 정부가 기업들의 투자를 촉진할 다양한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공공부문의 일자리를 만드는 한편 경제 전체의 생산성 향상을 유발할 것으로 기대되는 사회간접자본에 적극적으로 투자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돈의 역사라는 측면에서 바라볼 때 현재와 같은 내수경기의 부진이 계속 이어진다면 국민 개개인의 실질 소득 감소와 일자리 불안 및 감소로 인해 삶이 핍박해짐과 함께 덩달아 세수기반이 축소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정부의 재정지출은 현명함을 요구하는데, 무분별한 선심성 지출을 가급적 억제하고 실질 효과가 유발되는 부문에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할 것이다. 현 정권의 세수 증강책과 복지 포퓰리즘의 확대는 나라의 미래를 어두움 속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우려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잔 술, 한국의 맛 - 알고 마시면 인생이 즐겁다
이현주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는 식품점에서 사온 술이 제주祭酒로 올라갑니다. 소주도 내리지 못합니다. 멀리도 아니고 바로 아버지 대에서 술 하나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일찍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장맛이 좋았다는 것은 들어 기억하고 있지만 술 빚는 솜씨도 좋았다는 것은 술일을 시작하고서야 엄마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라도 배워 둘걸.' 못내 아쉬워하신 엄마. 이 일을 업 삼지 않았다면 그 술 두세 가지쯤 없어진 것이 뭐 대수이며,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르고 살았겠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이보다 더 아까운 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한 대를 더 물리지 못하고 사라진 술과 음식이 비단 우리 집에만 있는 건 아닐 겁니다. - '술독을 열며' 중에서

 

 

한국의 술에 대하여

 

책의 저자 이현주세종대학교 호텔관광대학 조리외식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벤처대학원대학교에서 발효식품·양조학을 전공했다. 농림축산식품부가 설립한 〈전통주 갤러리〉의 초대 관장을 지냈으며 현재 전통주 강연과 시음·전시 행사 기획자로 활동하고 있다. 2012 전통주 소믈리에 대회 국가대표 부문 1위를 한 전통주 전문가이자 귀에 쏙 박히는 열정 강의로 명성이난 강사이기도 하다. SNS상에서 전통주 읽어주는 여자라는 닉네임으로 한국 술의 멋과 맛을 알리고 있다.

국가 주요 행사의 건배주와 다수의 호텔, 레스토랑, 외식업체에 전통주를 추천하는 자문 활동을 해왔다. 홍콩에서 열리는 〈한국 10월 문화제FESTIVE KOREA〉, 벨기에에서 열린 세계민속축제 〈포크로리시모FOLKLORISSIMO〉, 파리에서 열린 〈한국 OECD 가입 20주년 기념식〉 등 국내외에서 여러 전통주 행사를 진행했다.

 

한국 역사 속에는 우리 술의 근간이 흔들릴뻔한 시기가 있었다. 먼 옛날 조선시대에 시행되었던 금주령, 1909년 일본에 의한 주세법의 제정, 1960년대 식량부족을 극복하고자 시행된 양곡관리법과 밀주 단속의 시기. 한국 술의 뿌리를 위협하는 여러 풍파 속에서도 굳건히 살아남은 우리의 술들이 있고, 그 계보를 잇기 위해 굳건히 전통주 시장을 지키는 양조장들과 새로이 술독에 뛰어드는 젊은 양조인들이 있다.

 

책은 수백 년 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전통주부터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신생 양조장들이 선보이는 새로운 전통주들을 소개하며 술에 담긴 가치를 전한다. 농림축산식품부가 설립한 '전통주 갤러리'의 초대 관장, 전통주 소믈리에인 저자는 그간 보고 듣고 마시고 느낀 증류주, 약주, 탁주 등 다양한 전통주에 대한 이야기들을 책에 가득 담았다.

 

 

 


민속주 안동소주

 

조옥화 명인은 자신의 집에서 술을 빚어오던 방식에, 안동 지역의 집집마다 내려오던 비법들을 찾아내고 체계화하여 1987년 안동소주 기능보유자로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12호에 지정이 되었고 2000년도에는 전통식품명인 제 20호로 지정되었다. 1999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방한 당시에는 생일상과 함께 안동소주를 내놓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후 앤드류 왕자가 다시 20년 만에 하회마을을 찾았는데 방한 전 여왕으로부터 하회마을에서 받았던 생일상이 특히 인상적이었다는 소감을 전해 들었다고 한다.

 

조 명인의 안동소주 원료는 단순하다. 쌀 한 가지와 직접 빚은 전통 누룩을 사용한다. 토속적인 향기와 구수함을 동시에 갖고 잇다. 명인의 안동소주는 옛 조상들이 써왔던 소줏고리와 같은 상압증류 방식으로 증류한다. 게다가 직접 띄운 개성 강한 밀 누룩을 사용하고 장기간 발효시킨 술덧을 쓰기에 그 특색이 더해서 여타 안동소주의 다른 맛의 특징들이 있다.  

 

조옥화 명인의 안동소주와는 어떤 음식이 잘 어울릴까? 원래 술과 음식은 한 밥상 위에서 자란 동무이기에 그 지역의 음식과 가장 궁합이 잘 맞는다. 바다와 멀리 떨어진 안동 지역은 자반고등어 산지로 유명하다. 쌀뜨물에 담가 짠맛을 적당히 제거한 뒤에 석쇠에 얹어 노릇하게 구워낸 간고등어는 안동소주에 딱 어울리는 안줏거리이다. 짭짜름한 소금기가 소주의 단맛을 잡아끌어내 45도나 되는 술이 달짝지근하게 느껴진다. 서울에서도 흔히 맛볼 수 있는 찜닭의 원조도 안동이다. 적당히 달고 간이 배어 부들거리는 닭고기 살점과 곁들여진 감자며 당면 한 젓가락도 이 유서 깊은 술의 안주로 그만이다.

 

 

 

문배주

 

2000년 6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 만찬장에서, 작고한 김정일 위원이 '문배주는 대동강 일대의 주암산 샘물로 빚어야 제맛'이라고 했다던가? 지금 평양에서는 이 술을 찾아볼 수 없지만 대신 대동강 일대의 주암산 샘물과 물맛이 많이 닮았다는 경기도 김포의 석회암 암반수로 문배주를 빚는다.

 

문배주양조원에서 만난 이승용 전수자의 모습은 참 분주해 보였다. "수수도 심어야죠. 술도 돌봐야죠. 바쁘네요" 하며 환하게 웃는다. 양조장 한편에는 좁쌀 누룩을 띄우는 제국기製麴機가 돌아가고, 발효 탱크마다 술 익는 향이 달큰하다. 증류한 술을 담아 숙성시키는 커다란 숙성조 속에서 문배주가 시간과 함께 익어가고 있다.  

 

문배주는 눈으로 보기에도 즐거운 술이다. 대한민국 구가무형문화재라는 위상에 걸맞게 술병도 다양하고 세련되게 갖춰져서 선물하기에도 좋다. 하얀 백자에 은행잎 문양이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문배술 명작'은 술의 품격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기에 호텔과 항공사의 기내 판매용으로 인기가 좋고 용 모양이 양각된 백색의 긴 도자기 '문배술 용상'은 700ml 너근한 용량을 담고도 가격이 저렴해서 좋은 사람들끼리 나눠 마신 뒤 빈 병은 꽃 한 송이 꽂아 두고 보기에도 제격이다.

 

 

 

계룡백일주

봄부터 시작해서 여름을 나고, 가을의 서리가 내려야 술 빚을 준비가 된다. 3월의 진달래, 5월의 솔잎, 7월의 잇꽃, 9월의 오미자, 무서리 내린 늦가을의 황국까지 다 갈무리해서 계룡산의 사계절을 다 넣어 만드는 술이 계룡백일주이다. 본시 궁중의 술로 조선 16대 왕 인조가 반정의 일등공신인 연평부원군 이귀의 공을 치하하기 위해, 술 만드는 비법을 연안 이씨 가문에 내려주었다고 이성우 명인은 말한다. 

 

계룡백일주 빚는 과정은 누룩을 준비하는 일부터 시작된다. 물을 갈아가며 깨끗이 씻은 통밀을 물에 불려 절반이 타개지도록 빻아야 한다. 여기에 쌀가루를 같은 비율로 섞은 뒤에 약간의 물을 더해서 반죽을 하는데 너무 질어서도 안 되고 수분이 아주 부족해도 안 된다. 손으로 한 주먹 쥐어서 해변의 모래처럼 엉켜지는 반죽을 누룩 틀에 넣고 단단히 밟아서 누룩을 만든다. 한국의 전통 누룩은 그 형태도 만드는 방법도 다양하고 누룩 안의 미생물의 종류는 더 다양하다.

 

계룡백일주는 이양주二釀酒 기법으로 만든다. 이양주란 밑술 한 번, 덧술 한 번 총 두 번에 걸쳐 술을 빚는 방법을 말한다. 처음 빚는 밑술은 알코올을 만드는 미생물인 효모酵母를 증식시켜 알코올 발효를 잘 할 수 있게 준비하는 과정이고, 덧술은 밑술에 술의 주재료가 되는 쌀이나 좁쌀, 수수 등의 곡물과 감자나 고구마처럼 전분이 들어 있는 원료를 익혀 밑술에 넣어 본격적으로 알코올을 만드는 과정이다.

 

밑술로는 찹쌀가루로 죽을 쓴다. 쌀가루가 멍울지지 않도록 잘 풀어서 죽을 쑤어 차게 식으면 누룩을 섞어 준다. 시간이 지나면 술이 말 그대로 부글부글거리면서 탄산이 용암처럼 터지며 끓어오르는데, 그 기운이 조금씩 잦아들어 마치 시냇물이 흐르듯이 조분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미리 준비한 찹쌀 고두밥을 밑술과 함께 잘 섞이도록 섞어 준다. 이때, 진달래, 황색 국화, 솔잎, 오미자를 넣어주는데 국화와 진달래, 솔잎이 각각 다섯 홉씩 들어가고 오미자가 세 홉이 들어간다. 이렇게 만들어진 술덧을 낮은 온도에서 100일 동안 발효를 하고 잘 익혀 거르면 계룡백일주가 된다.    

 

함께 전통주 갤러리에서 근무했던 일본인 동료가 이렇게 말했었다. "한국 약주에 들어가는 재료들은 정말 놀라워. 만약 일본 사람들이 이 술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알게 되면 무척 놀라게 될 거야." 막걸리와 한국의 전통주를 이야기할 때면 눈이 별처럼 반짝이던 이 일본인 동료를 통해 저자는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다시 돌아보는 법을 배웠다. 대개의 것들이 그런 듯하다. 가까운 것에 대한 소중함과 소소한 가치를 알기가 사서삼경 떼기보다 어렵다.

 

 

 

면천두견주

면천두견주는 일제강점기와 1960년대 양곡정책으로 인해 쉬쉬하며 밀주로 조금씩 빚어지던 두견주가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 86-2호로 지정된 것은 1986년의 일이다. 집안 전승으로 이어지던 비법으로 두견주의 명맥을 잇던 인간문화재 박승규 씨가 타계하면서 면천두견주는 다시 마을의 술이 되었다. 두견주를 이을 사라밍 없게 되자 2007년 여덟 가구의 마을 주민이 뜻을 모아 '면천두견주 보존회'라는 이름으로 문화재청에 의해 자격을 인증받은 것이다. 

면천두견주는 물을 적게 잡아 빚는 술이다. 단맛에 귀했던 시절에 이 끈적한 단맛은 가히 부와 호사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달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맛을 살짝 받쳐주는 새콤함이 있어 그 맛이 지루하지 않다. 잘 빚은 술에서는 꽃 향과 과실 향이 나는데, 이 향이 꼭 진달래의 꽃 향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봄을 연상하기에는 충분하다.

 

여러 박람회장에서 만날 때면 떡 한 조각을 기어이 저자의 입에 넣어 주며 두견주 한 잔을 권하던 그분들이, 하얀색 가운과 모자, 장화를 신고 서늘한 발효실로 저자를 안내하는 이 어머니들이 맞는가 싶어진다. 발효조마다 날짜가 꼼꼼히 기록되어 있고, 현대적 양조 장비가 그득하다. 전통은 지켜가되 꾸준히 연구하고 현대적 기술을 접목하여 지금 사람의 입맛에 맞도록 하며, 청결히 빚어야 한다는 것이 면천두견주를 빚는 마을 어머니들의 지론이다.

 

 

 

한산소곡주

 

한산소곡주는 한국의 대표적인 앉은뱅이 술로 통한다. 이래 지방에서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가는 선비는 이 서천의 주막거리를 지나야 한다. '시장기도 채울 겸, 딱 한 잔만.' 그러나 종내는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세 잔이 되고, 시를 읊고 달을 보며 일어나지 않을 핑계를 하나둘씩 보태다가 그만 과거 시험을 놓치고만 선비가 열에 하나쯤은 있었을 법도 하다. 

 

오래 전부터 이 서천마을의 어느 집 대문을 두드려도 됫병에 담긴 소곡주를 구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서천마을에서는 집의 대소사를 잊지 않고 술을 빚어가며 한산소곡주의 명맥을 유지하였고 전국에서 이 술의 명성을 알고 알음알음 찾는 사람들에게 조금식 팔아 자식들 교육과 생계에보태기도 했다. 현재는 서천군청의 주도로 70여 가구가 양조장 시설을 갖추고 주류 제조 면허를 취득, 술을 빚고 있다. 가히 '술 익는 마을'이다.  

오래전, 술 공부하던 선생님들과 당시에는 서천에서 유일하던 우희열 명인의 한산소곡주 양조장을 방문하던 날, 아이 키만큼이나 커다란 항아리 속에서 익어 가는 한산소곡주를 보여주셨는데 아직도 한산소곡주를 마실 때면 그날의 감동이 떠오른다. 바가지로 술지게미를 헤쳐내면 바닷가 모래에 구덩이를 파고 놀던 어린 날의 기억처럼 노오랗게 익은 술이 쏘오옥 하며 고여서 올라오는데 그 광경을 보던 사람들이 모두 "이야!" 하며 탄성을 질렀다. 독에서 갓 떠낸 이 술을 한잔 맛보라며 권하시는데 '아……, 세상에! 이런 달콤한 꿀술이 또 있을까?' 입에 쩍 달라붙는 술맛에 웃음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역시 술은 술독에서 떠 마셔야 제맛이다. 

 

 

 

맑은바당

 

제주의 양조장, 술도가 제주바당에서 생산하는약주인 맑은바당의 술맛을 처음 보던 날에는 그동안 맛보았던 전통 누룩을 사용하는 쌀 약주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원료 처리와 발효조건, 사용하는 누룩이나 물 사용량을 살펴봐도 비슷하게 술을 빚는 다른 곳의 술보다 무게도 덜하고 산미도 있어 따듯한 제주 날씨 탓이려니 생각도 했다. 

 

시대가 변하면 입맛도 취향도 변한다. 지금은 산뜻한 산미가 나는 술이 많아졌지만 불과 몇 년 전 당시에는 전통 누룩을 사용하여 만든 약주의 대부분이 묵직하고 중후한 맛을 가진 술들이 많아, 화이트 와인의 산뜻한 맛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한국 약주가 단맛 위주라 지루하며 균형미가 부족하다 토로하곤 했다.

 

술에 있어 산미酸味는 악센트와도 같아서 지나치면 산만하고 부족하면 심심하다. 제주바당의 임효진 대표의 걱정과 달리 가볍고 새콤한 맛을 가진 이 술은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 먼저 이름이 나서 '봄바람처럼 산들산들한 술'로 인기를 얻었다. 술의 산미는 일종의 이상 신호와도 같아 산미와 산패酸敗의 경계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풍정사계 춘'

2015년, 저자가 경험한 전통주 시장의 수면 아래는 분주했다. 특급 호텔 레스토랑과 여러 외식업체에서 전통주를 알리고 판매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젊은 청년들의 전통주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동아리가 여럿 만들어지기도 했으며, 미디어 매체의 관심 역시 어느 때보다 높았다. 무엇보다 국가 주요 행사의 만찬 석상에 전통주를 올리기 위한 노력들이 활발한 시점이기도 했다.

 

당시에는 취재와 자료를 요청하는 미디어 매체, 외식업체들의 자문 요청, 부처와 기관 담당자들의 질의가 하루에 몇 건씩 이어졌는데, 같은 술이라도 여러 변수와 상황을 고려해 응대해야하니, 메뉴 구성과 추천 사유, 한 줄 평 작성이 새벽까지의 일과가 되어 마치 시 구절 하나를 갈구하는 시인의 마음처럼 절박한 심정으로 한 해를 보냈다. 그 한 축에 풍정사계도 있었다.

 

풍정楓井은 '단풍마을 우물'이란 뜻이다. 과거엔 단풍나무의 우리말인 '싣나무'가 있는 우물 마을이기에 '싣우물 마을'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태어나서 이 동네를 오래 떠나본 적이 없는 화양 양조장 이한상 대표가 자신이 빚은 술에 마을 이름 '풍정'을 붙이고, 춘하추동 사계절을 담아냈다. 봄 산의 진달래, 여름날 정자나무, 단풍 물든 가을 저녁, 겨울 굴뚝 하얀 연기는 오래토록 기억에 남았던 것이다.

 

술 빚는 할머니 곁에서 한 줌씩 고두밥을 집어먹던 소년이 이젠 할머니가 하늘에서 자랑스러워할 술을 빚는다. 그냥 술이 아니라 궁중이나 세도가에서 만들어 귀하게 썼다던 향온香醞곡을 만들어 빚는다. 향온곡은 거피去皮한 녹두를 물에 불렸다가 갈아 즙을 걸러내어 반쯤 타갠 밀에 물 대신 섞어 반죽한 뒤 누룩 틀에 단단히 밟아 따뜻한 곳에서 띄워 만든다. 게다가 녹두는 비싸다. 2016년 농림축산식품부가 주최한 대한민국 우리술 품평회 증류주 부문에서 증류식 소주 풍정사계 동冬으로 최우수상을 받았다. 약주풍정사계 춘春은 2017년 한미 정상회담 만찬주로 선정된 뒤 '트럼프 술'이라는 별명이 붙으며 품절 사태를 불러왔다. 

 

풍정사계 춘은 백설기로 밑술을 한다. 이것에다 향온곡을 섞어 밑술을 만들고 밑술이 완성되면 닷; 고두밥으로 덧술을 하는데 이 모든 과정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지고 작은 옹기를 써서 발효하기에 생산하는 양이 많지 않다. 굳이 손 많이 가는 백설기로 술을 만드는 이유는 백설기로 밑술을 하면 깔끔하게 떨어지는 맛을 내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미인주

 

사미인주는 장성의 유기농 쌀을 사용하는데, 장성군 삼계면에 있는 친환경 쌀 재배단지에서 계약 재배를 통해 사미인주에 사용할 쌀을 조달한다. 인공감미료는 스자 않는 대신 올리고당과 사과농축액, 꿀로 술에 단맛을 더했다. 막걸리를 만드는 과정은 기존의 대규모 막걸리 양조장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발효실의 온도를 13도에 맞추어 두고 낮은 온도에서 25일간 발효를 한다는 특징이 있다.

 

알코올을 만드는 1차의 과정과 숙성을 겸한 2차 발효를 통해 술에 원숙미와 청량함을 동시에 부여한다는 점 이외에도 사미인주는 사용하는 효모도 특별하다. 한국식품연구원에서 10여 년간 한국의 전통 누룩을 연구하여 찾아낸 토종 효모 사미인주에 사용한다. 바나나향이 독특한 이 효모를 통해 사미인주에 감성을 더하고 좋은 원료와 현대의 양조과학을 더해 한 달이 넘는 시간을 들여 사미인주의 원숙한 맛을 냈다.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막걸리는 다 같은 맛이라는 평을 많이 들었는데 그간의 인식도 많이 바뀐 듯하다. 갓 걸러 신선한 상태로 마시는 술 막걸리는 병 속에서 무궁한 변화를 보이니 오늘 마신 이 막걸리 맛이 내일 같으리라는 법이 없다. 지금 마시는 이 술 한 잔이 전 우주에서 유일한 맛을 가진 술이니 그 운명과의 조우에 집중한다면 술맛은 더 귀해진다.

 

얼추 천여 종이 넘는 막걸리가 더 다양한 모습으로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니 그 맛을 그저 보는 데도 평생은 걸릴 듯한데, 막걸리 하나하나가 시간마다 다른 모습을 보이니 그 재미만을 풀어보아도 본전은 나올 듯하다. 먹고 취하는 것만이 술꾼의 자세는 아니다. 막걸리의 이 무한한 변신의 세계에 합류를 하게 되면 저렴한 막걸리라 마구 대하고 그저 취해 주사를 부를 여유는 없을 듯하다.

 

 

 

전통주 제조 과정을 이해하고 사랑하라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주폭酒暴에 대한 기사들을 접할 때마다 암담한 마음과 안타까움을 떨칠 수 없다. 주폭은 술의 문제가 아니라 술을 사랑하지 않아서 생기는 사람의 문제이다. 술 빚는 일의 고된 수고와 설렘을 안다면 함부로 술과 자신을 천대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올바른 식습관과 사회인으로서의 예절을 위해 밥상 교육이 필요하듯 술 교육도 반드시 필요하다. 술은 단순히 취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삶을 풍요롭게 하는 문화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책이 술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 작은 씨앗이 되기를 바라면서, 더불어 여러 거창한 이유를 들지 않더라도 이렇게 맛있는 한국의 전통주를 더 많은 사람들이 맛보게 되길 희망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디테일 경쟁 시대
임용택 지음 / 해냄 / 201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8세기 중반 영국에서 1차 산업혁명이 시작된 이후 4차 산업혁명이 진행되고 있는 현 상황에 사회, 경제, 문화 구조의 변화를 보면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금의 순도를 99퍼센트 또는 99.99퍼센트 등으로 표시하는데, 소수점 뒷자리에 9가 늘어날수록 순도는 더 높다. 이처럼 높은 순도의 금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적으로 훨씬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단기적인 성과에 연연해하지 않는, 과정에 대한 올바른 사회적 인식과 시스템이 절실하다. - '글을 시작하며' 중에서

 

 

과학기술의 지속적 발전을 위해서

 

이 책의 저자 임용택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서 기계설계학을 전공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버클리대학교 대학원에서 기계공학 박사 학위 후 오하이오주립대학교 공과대학 산업및시스템공학과 조교수를 역임했고, 1989년 한국과학기술대 조교수로 부임했다. 1996년 에어랑겐대학교 생산공학연구소 훔볼트 팰로우 과정을 거쳤고, 2000~2002년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기계전문위원을 지냈으며, 2007~2011년에는 KAIST 홍보국제처장, 대외협력처장, 글로벌협력본부장 등을 맡아 과학기술 교육과 연구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2014~2017년 한국기계연구원 원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KAIST 기계공학과 교수로 후학 양성과 정밀제조업 분야 발전에 힘쓰고 있다. 2019년 기계공학 분야 연구와 개발, 후학 양성, 국제화, 정부출연연구기관 운영 등을 통해 국가산업 경쟁력 발전에 다양하게 이바지한 공로로 청조근정훈장을 수훈했다.

 

저자는 선진 교육 및 연구 환경 시스템 구축을 위한 사회적 기술, 사회적 기술을 이용한 국제화 전략, 물리적 기술과 사회적 기술 통합을 통한 과학기술 강국 건설이라는 큰 주제를 이야기하기 위해 지금까지 개인적으로 경험한 사례를 세밀하게 나누어 총 11장으로 정리했다. 과학기술 발전에 대한 저자의 의견과 함께, KAIST와 기계연이 이제껏 발전해오기까지 구성원들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도 함께 읽을 수 있다.

 

 

 

 

질적 평가가 확대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구성원들의 참여와 노력 없이 기관이 발전할 수는 없다. 그래서 구성원들의 공정한 평가가 중요하다. 평가의 중요성은 누구나 인정하지만 공정하게 평가하기는 쉽지 않다. 어느 정도의 역사와 규모가 있는 연구실이라면 연구비 지원을 받는 평가가 상대적으로 신규 실험실에 비해 유리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기관의 지속적 성장과 발전을 위해선 훌륭한 연구자와 행정원이 모두 필요하다. 따라서 평가 시스템은 업무와 기관의 특성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 일방적인 잣대로 줄 세우는 식의 평가는 곤란하다. 기계연과 같은 출연연의 평가 시스템은 연구, 공공, 행정 서비스의 세 분야가 같이 이루어져야 하며, 상대 평가보다는 질적 평가가 확대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구성원들에게 동기를 유발하기 위해서는 행정과 공공 서비스 부문과 연구 영역에서 이바지하는 구성원들의 평가가 공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기계연의 신임 연구원들은 2년차까지는 평가가 유예된다. 2년이 지난 다음부터는 기존 연구원들과 동일한 잣대로 평가를 받아야 한다. 2015년, 신생 조직인 기계연 대구연구센터의 인사 평가 결과는 정말로 참담했다. 인사 평가를 담당한 연구부원장은 결과를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너무 가혹한 평가는 연구를 종료할 수도 잇다는 생각에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2016년 기적 같은 일이 발생했다. 일부 연구원들의 논문이 한국연구재단에 게재되는 등 대구연구센터의 실적이 획기적으로 개선된 것이다. 2015년 결정을 바꾸지 않았다면 이런 성과가 발생했겠는가? 때론 황소걸음이 빠른 걸음인 것이다.  

 

 기계연 대구연구센터

 

 

고등교육 재정 지원 강화

 

"학사 과정의 수준을 대학원 과정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학사 과정 교육에 교수들이 더욱 신경을 쓰는 것이 바람직하고, 학과별 학사 과정 수준의 차이를 줄이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 ABET 평가팀의 KAIST 평가 최종 보고서(1992년)

 

(주석) ABET : 미국공학교육인증원

 

국제경영개발대학원의 2017년 국가 경쟁력 순위에서 우리나라의 대학 교육 경쟁력은 63개국 중 37위다.  세계경제포럼의 국가 경쟁력 순위가 2011년 24위에서 2017년 26위로 하락하는 동안, 대학 시스템의 질은 55위에서 81위로 급락했다. 한강의 기적은 교육에서 비롯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4차 산업혁명도 잘 훈련받은 인력이 공급되어야 이룰 수 있다. 교육 목적에 맞게 고등교육 재정 지원을 강화할 방안이 시급한 이유다. 그런데, 현 정권의 교육 정책을 보면 앞날이 참담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회의감일까?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기관 대 기관으로 이루어지는 공동 연구 주제는 전략적으로 대학의 경영진이 결정할 수밖에 없다. 재정적 능력이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냉전시대에 미국 정부는 국방을 강화한다는 명목으로 컴퓨터, 전자공학 등이 강한 대학을 지원했다. 최근에는 생명과학이 강한 대학을 집중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에서는 모든 대학을 균등하게 지원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분산 투자 방식으로는 연구중심대학을 만들기가 어렵다. 21세기를 대비하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연구중심대학이 필요하고, 잘하는 대학을 집중적으로 밀어줘야 한다. 이에 우리들도 전세계 연구중심대학과 경쟁하기 위해선 대학 육성 방식에 대해 새롭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

 

과감한 도전의 유발효과 

 

한 기관이 발전하려면 국제 경쟁력 강화가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선 체계적인 국제 행사가 많은 도움이 된다. 2014년 10월 24일, 대전 ICC호텔에서 1회 미래기계기술포럼 코리아를 개최했다. 이 포럼에서 다룰 주제는 흔히 4차 산업혁명이라고 부르는 인더스트리 4.0이었다. 세종대왕 시절, 찬란한 과학기술의 역사가 있었던 점을 상기해서 이를 국제적으로 재현시킬 의무가 있는 것이다.

 

자기부상열차는 소음과 진동이 적고 분진이 없어 친환경적이며 승차감이 우수해 미래형 열차로 꼽힌다. 이 기술은 전선 주변에 생기는 자력자력으로 열차를 선로 위에 살짝 띄워 동력을 제공하는 기술이다. 설치비용 또한 지하철보다는 30% 정도 적게 든다. 독일이 1971년 처음 개발했고, 1989년 동경 엑스포에서 일본이 선보인 적도 있다.

 

인천공항에 설치된 도시형 자기부상열차는 무인 운행 시스템으로 개발되었는데, 사고가 날 경우를 대비해 비상 대피로를 설치해야 함에도 처음 하는 일이라 성계 단계에서 이에 대한 대책을 미처 갖추지 못했다. 이 시스템이 안정되기까지 임시로 기관사를 활용하면 해결할 수 있음에도 인천공항공사는 한 치의 양보가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2016년 2월 3일 세계에서 3번째로 개통됐다. 

 

작은 인연에서 시작되는 국제 협력

 

ARAMCO는 세계적인 석유회사다. 사우디아라비아 다란에 위치한 ARAMCO 근처에는 킹파드석유광물대학교가 있다. 이 학교의 베키르 새미 일바스 교수는 기계과에 근무 중인데, 저자와는 국제 논문집 편집 활동을 통해 알게 된 사이였다. 한번은 그가 외국인 자문 교수단을 초청하려는데 서남표 총장을 원한다고 이메일을 보내왔다.

 

당시 자문단은 쉘석유회사 부회장, 유명 대학의 총장을 포함한 유력 인사들로 구성되엇는데, 이에 흡족한 서총장도 흔쾌히 동의했다. 당시 칼리드 알 팔리 자문단 의장은 ARAMCO 회장이었다. 이렇게 맺어진 인년으로 KAIST는 ARAMCO와 이산화탄소 저감에 관한 공동연구 프로젝트를 추진하게 되었다. 이 프로젝트와 별도로 사우디아라비아 교육부 장관 일행이 2010년 10월 26일 KAIST를 방문했다. 이후 사우디아라비아 문화원 주관으로 사우디 교육부와 주요 대학을 방문할 기회가 생겼고, 문화원장의 소개로 킹사우드대학과 국제 공동 연구 과제가 성사되었다. 

 

 

 

인생을 행복하게 영위하려면

 

2014년은 한국의 무역 교역량이 세계 10위에 오른 해이다. 외국의 많은 이들이 이를 '한강의 기적'이라고 평하면서 이를 매우 궁금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저자에게 이를 문의해오면 "1962년 제1차 국가경제5개년계획을 필두로 중공업 위주로 신업화의 초석을 마련한 선각자들의 현명한 판단과 가난에서 벗어나 좀 더 살아보겠다는 국민의 의지가 성공 신화를 이루어냈다"고 답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경제 혜택은 국민의 교육열, 민주화와 더불어 이룬 사회적 통합, 과학기술 연구 개발의 결과물임을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정부는 기계 산업 의 부흥을 위해 1974년 4월 기계산업단지를 창원에 설립했고, 산업체에서 필요한 관련 연구를 진흥코자 1976년 창원산업단지 내에 한국기계금속시험연구소(한국기계연구원의 전신)를 설립했다.

 

기계연은 1973년 대덕연구단지 조성 계획에 따라 1992년 본원을 대덕으로 이동했다. 재료 부문은 기계연의 부설 연구 기관으로 창원에 그대로 남아 창원 부지를 사용하고 있다. 2014년 현재 대덕연구단지에는 KAIST, 충남대학, 대덕대학이 있으며, 22개의 국가 출연연이 자리잡고 있어서 전체 연구 인력은 2만여 명에 이른다.

 

정부의 산업화 정책에 힘입어 경제는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최근에 벌어진 미중 무역분쟁과 일본의 무역규제 사태 등을 극복하기 위해선 각국에 가지고 있는 사회, 경제, 문화적 요인에 의한 복합적인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이젠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챙길 수 잇는 전략을 적극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상대방을 원수로 여기는 그런 보이콧 정책은 자국에도 피해를 기친다. 지피지기 백전백승이 아닐까.

 

1967년 4월과 1973년 10월에 발발했던 3, 4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을 상대로 전쟁을 수행했다. 상대적으로 우위를 점했던 이집트 동맹군은 미국과 유럽의 지원을 등에 업고 제공권制空權에 기반한 이스라엘의 치밀한 작전 때문에 단기간에 초토화된 뒤, 국제연합의 중재로 휴전에 들어갔다. 이 전쟁은 한국에 교훈을 주었다. 냉혹한 국제 정치의 현실에서 생존하려면 힘을 길러야 한다는 사실을.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 정부는 이를 잊고 있는 듯하다. '탈원전' 하나만 봐도 알 수 있다.     

 

신생아 출산율 개선을 위해 지난 10년간 100조 원을 투자하고도 여전히 OECD국 중에서 최저를 면치 못하고 있다. 2015년 OECD가 발표한 국제학업성취도 평가는 더욱 충격적이다. 15세 국내 학생들의 삶의 만족도가 10점 만점에 6.36점으로 48개국 중 47위다. 그렇다. 각 분야에서 문제의 본질을 좀 더 잘 들여다보고 허울보다는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이 시급하다.

 

 

과학기술 강국이 돼야 한다

 

한국 사회를 정치적 이분법으로 혼란을 만들 일이 아니라 사소해 보이는 것부터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또한 원칙을 지키면 최소한 손해는 보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디테일을 챙겨야 한다. 이를 통해 교육과 연구 시스템을 선진화하고, 선택과 집중을 통한 과학기술 개발에 매진하여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과학기술 강국이 되는 것이 필요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00세 시대 부동산 관리기법 - 부동산투자의 성공은 부동산관리에서 시작된다
이정찬 지음 / 텔루스 / 2020년 1월
평점 :
품절


나이 들어 직장에서 은퇴를 할 나이가 되면 재산을 불리기 위해 노력하는 것 보다 가지고 있는 재산을 지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자기 집의 방 한 칸에 대한 임대도 직접 놓아야 하고 오피스텔 하나를 팔 때도 직접 팔아야 한다. 하지만 그 관리방법을 모르면 내 소중한 재산을 지킬 수가 없다. 그래서 부동산 관리방법도 배워서 알아두어야 하고 부동산 사기에 당하지 않는 노하우도 배워야 한다. - '저자의 말' 중에서

 

 

 

 

100세 시대를 대비한 부동산 관리법

 

 

책의 저자 이정찬은 20년 넘게 부동산업에 종사했던 인물이다. 자신이 직접 경험했던 바를 토대로 한 실전사례를 담고 있다. 약 50여개 정도의 사례는 성공사례보다는 실패한 사례를 많이 다룬다. 왜냐하면, 앞으로 부동산 사기사건 등에 휘말리지 않도록 경종을 울리고 부동산 관련 사건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다. 저자의 경력 및 이력은 아래와 같다.

 

- 전원주택 전문 FM 건설 및 시행사 대표 역임
- 금상합동공인중개사, 금상 리얼티홀딩스 대표 역임
- 부동산 경제TV 방송전문위원, 개발사업단장 역임
- NPL 자산운용회사 주)가온AMC 대표이사 역임
- 대기원시보 중국연구소 부동산전문위원 역임
- 서울경제TV 부동산 고민상담 코너 패널 역임
현) 대우 부동산중개법인주식회사 대표이사
현) 미래부동산경제연구소 대표/회장 (2005년~)
현) 랜드프로 중개창업실무 및 NPL 교수
현) 한국공인중개사방송국 방송전문위원, 뉴스해설위원
현) 세무TV 세무컨설팅최고전문가 과정 NPL 주임교수
현) 한국메디컬부동산협회(KMRA) 대표이사

 

책은 총 10개의 장으로 구성되었는데, 100세 시대 부동산 관리의 필요성과 임대 및 임차 관리기법, 매도와 매수 관리기법에 대해 분석하고 설명했다. 부동산계약서 작성방법과 주의사항들도 상세히 다루고 있다. 평균수명의 연장으로 정년퇴직 후에도 30~40년의 시간을 살아가야 한다. 아무런 수입 없이 하루하루를 연명하며 살아간다면 100세 수명이 괴롭기만 할 수도 있다. 먹고 살기 빠듯한 삶에 노후를 준비할 여유자금이 생길지 의문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부동산 관리를 통한 노후대비를 알려준다.

 

 

 

 

노후대비 부동산 관리의 필요성

 

2010년 여름, 잠실 주공 5단지(119평방미터)에 살고 있는 부부가 저자의 사무실로 상담차 방문했다. 자식들은 모두 결혼후 분가했기에 부부만 살고 있는데, 아파트를 매각할지의 여부와 판다면 어디로 이사가면 좋을지를 물어왔다. 또한 노후 생활자금의 마련도 동시에 고민했다.

 

이에 저자는 아파트를 팔아서 기존 대출금 2억 5천만 원의 상환과 양도소득세를 납부하고 나면 약 6억 5천만 원 정도 남으므로 이중에서 2억 원을 은행에 생활여유자금용으로 예치하고, 나머지 돈으로 규모가 작은 25평 아파트 또는 빌라를 매입하거나 전세로 입주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당시 잠실에서 가까운 성수동 인근 지역은 전세금이 2억 원 정도로 형성되고 있었으며, 전세가 싫다면 잠실 인근의 석촌동이나 삼전동의 신축빌라(방 3개)를 사라고 권했다.

 

은행예금과 주택자금을 빼면 여유자금이 약 2억 5천만 원 정도였다. 이 돈으로 생활비 마련을 위해 천호동 또는 길동권역의 오피스텔을 구입해서 임대한다면 매월 약 140만 원의 정기적인 수입이 발생할 수 있었다. 즉 수익률 6~7%대로 오피스텔 2채를 매입해서 임대하는 방식이었다. 여기에다 국민연금 수령액을 합한다면 생활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렇다. 자녀들을 모두 결혼 후 분가시키고 나면 부부만 덜렁 큰 평형의 아파트에 거주할 필요가 없다. 평형이 클수록 아파트 관리비도 더 많이 지출해야 한다. 그래서 이젠 살림도구들도 불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것은 과감하게 버리고 규모에 알맞도록 정비해야 한다. 집에 관련된 경비를 가급적 절약하는 것이 노후생활에 유리하다.

 

 

임대 및 임차 관리

 

은퇴 후 부동산 관리는 당연히 본인이 직접 해야 한다. 소유 주택의 방 한 칸부터 상가나 오피스텔, 빌딩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동산의 관리는 임대에서부터 시작한다. 따라서, 부동산 임대의 기본을 알면 관리가 무척 용이해진다. 이에 대해 대부분은 알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혹 모른다면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배워야 한다.

 

임대관리 기본원칙

 

적정 임대료 산정~ 공실空室 방지

임차인 파악~ 임차인의 직업, 업종, 애완동물 여부 등

임대보증금과 임대료~ 보증금은 임대인의 부채, 임차인의 자산

 

계약자의 임대료 납부가 제대로 이행되는지 최초 3개월은 특히 신경을 써야 한다. 왜냐하면, 보증금이 있다고 임대료를 연체하는 경우 이를 심하게 독촉하지 않으면 임차인은 임대인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이리 되면 연체를 밥 먹듯 쉽게 하는 게 인간의 심리이다. 따라서 임대료 납부는 독촉하고 입금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민약 3개월 이상 계속 미납한다면 이를 내용증명으로 통보하고 명도소송을 진행해야 한다.

 

 

 

매도 및 매수

 

부동산의 임대차와는 달리 매도 및 매수는 투자의 수단으로 재산의 증식과 연결된다. 은퇴자의 보유자산 중 70퍼센트 이상이 부동산이며, 부자가 된 사람들의 공통적인 투자수단이 바로 부동산이었다. 매도 및 매수 관리기법은 부동산을 매도하거나 매수할 때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기본적인 관리법을 말한다.

 

매도인은 실제로 거래되는 가격을 알고 있어야 해당 부동산을 제 때와 제 가격으로 팔 수 있다. 우선 매매가격은 직접 현장에서 조사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당해 부동산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는 규모가 큰 부동산사무소에 들러서 가격을 문의해 보면 된다. 가급적 두세 곳을 들러서 파악하는 게 좋다. 그러데, 부동산의 시세가 급등락할 때는 매매가격 결정에 더욱 신중해야 한다. 급락시엔 과감하게 가격을 낮출 필요가 있고, 급등시엔 성급하게 매도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팔기 전에는 미리 주택을 손질해야 한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매수자의 관심을 끌려면 남보다 노력을 많이 해야 한다. 도배나 장판을 새로 하고, 간단한 수선은 미리 해놓고, 페인트칠을 해서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도록 해야 한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말처럼, 매수자는 깨끗한 상태의 집을 선택한다.

 

매매계약 시 주의사항 

 

복수의 중개업소에 의뢰한다

매매 진행 상황을 수시로 문의한다

매매에 필요한 사항을 자세히 알려준다

중개수수료 지급에 인색하지 말자

계약금은 반드시 10%를 받아야 하는 게 아니다 

매수인의 지급능력과 매수목적을 파악하라

계약서 특약사항을 꼼꼼히 점검한다

잔금기일의 지정(계약금, 중도금, 잔금)

누군가 갑자기 부동산을 팔라고 하면 그 이유를 조사하라

 

 

부동산계약서 작성법

 

부동산 거래와 계약서의 작성은 공인중개사가 맡아서 이행하지만 그렇다고 거래와 거래 내용까지 중개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보통 부동산 거래 금액은 크기 때문에 계약에 신중해야 한다. 공인중개사의 설명만 믿고 무작정 서명, 날인해서는 안 된다. 나중에 잘못된 사항이나 불리한 내용을 발견하더라도 계약내용을 바꿀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계약 전에 현장을 점검해야 한다. 수도의 파손 여부, 전기의 상태, 가스의 공급상태, 소방에 관한 사항, 난방과 연료 공급 방식, 승강기, 배수시설, 벽면의 균열이나 누수 상태 등을 미리 파악해서 계약 체결 전에 이런 부동산 상태를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해주는 것이 좋다. 만일 설명하지 않고 계약이 성사되더라도 하자가 발견되는 순간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작성시 주의사항

 

매도매수인 상호 간에 신분증으로 본인 여부르 확인한다

등기사항전부증명서를 계약일에 발급받아 권리사항을 확인한다

인감증명서 발급시 매수인의 인적사항을 정확히 기입한다

부동산 대출금 상환시엔 매수인이 법무사에 의뢰, 직접 납부토록 한다

잔금은 소유권 이전 서류를 준비, 법무사가 작성 완료 후에 매도인 명의 계좌에 입금한다

모든 당사자가 반드시 자필 서명하고 동시에 날인한다

 

 

 

부동산 관리, 아는 것이 힘이다

 

이밖에도 책은 오피스텔 관리기법, 전원주택 관리기법, 부동산 사기 및 사기 예방법 등이 이어진다. 오피스텔의 경우 1인 가구의 증가로 인해 여성 혼자서 사는 주거용으로 바귀는 추세이므로 보안시설의 구비가 매우 중요한 포인트이며, 전원주택의 경우 계곡에 붙어 있거나 또는 높은 산꼭대기에 위치한 것은 피해야 한다. 그리고 책 후반부에 실린 부동산 사기 예방법은 우리들에게 매우 유익한 내용이다. 노후 세대들이라면 이 책의 필독을 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들은 어떻게 세상의 중심이 되었는가 - 김대식의 로마 제국 특강
김대식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든 길은 로마로 가고, 서양 문명의 대부분은 로마 제국에 대한 '각주'일 뿐이기에,  이 책 역시 로마 제국의 흥망사를 소개할 것이다. 하지만 로마 제국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인류 문명이 시작된 '레반트'라는 거인의 어깨에 가장 확실히 앉았기에 로마는 성공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 '서문' 중에서

 

 

모든 제국은 언젠가는 과거의 제국일 수밖에 없다

 

책의 저자 김대식과학과 인문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인류의 과거와 현재 나아가 미래를 날카롭게 분석하는 융합적 지식인. KAIST 전기 및 전자공학부 교수이자 뇌과학자이며, 건명원建明苑의 운영위원을 맡고 있다. 독일 막스-플랑크 뇌과학연구소에서 뇌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미국 MIT에서 뇌인지과학 박사후 과정을 밟았다. 일본 이화학연구소 연구원, 미국 미네소타대학교 조교수, 보스턴대학교 부교수를 역임했다.

저서로는 <인간을 읽어내는 과학>,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김대식의 빅퀘스천>, <김대식의 인간VS기계> 등이 있으며, <조선일보>에 '김대식의 브레인 스토리'를 연재하고 있다. 그는 역사상 가장 높은 수준의 기술과 부를 누리는 오늘날의 세계가 멸망한 로마 제국의 역사를 좇고 있다고 말한다. 영원할 것만 같던 제국이 사라졌듯이 우리의 세상도 치명적인 위기에 직면했다면? 놀랄 만한 과학적 혁신에 심취한 21세기, 우리가 여전히 로마를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를 이 책에서 밝힌다.

 

책은 총 4부(기원, 멸망, 복원, 유산)로 구성되었다. 맨 먼저 로마 제국이 인류 문명의 '기원'이 된 족적을 좇는 것을 시작으로, 위대했던 제국이 '멸망'하면서 우리에게 어떤 인사이트를 남겼는지 그리고 로마의 흔적은 오늘날까지 어떻게 '복원' 되었는지,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어떤 '유산'을 남기는지를 살펴본다.

 

 

 

'기원-어떻게 로마는 세상을 정복했는가'

 

30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가 아프리카 지역에서 탄생한 이후부터 로마 제국이 탄생하기까지 역사의 중요한 지점들을 짚어내며, 로마가 처음부터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섰기 때문에 강력한 제국으로 발전하고,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유럽을 넘어 전 세계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문명이란 결코 홀로 존재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인류 역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위대한 제국 로마도 결국 멸망을 피하지 못했다. 영원한 제국은 불가능하니까 말이다. 흥미롭게도 제국을 세운 로마보다, 제국을 다시 잃은, 멸망한 로마가 오늘날 우리에게 더 많은 교훈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로마는 멸망하기를 거부했기에 어쩌면 여전히 오늘날까지 먼 거울distant mirror로서 우리의 또 다른 모습을 비추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만약에 유럽이 아닌 중국이 전 세계를 지배했다면,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아마도 현재의 한국인들은 한복을 입고, 바닥에 앉아, 붓글씨를 쓰고 있을 것이다. 이는 전 세계인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닌 노자와 공자가 현대 문명의 기둥이 되었을 것이다. 심지어 실리콘밸리는 성공한  IT기업의 백만장자들의 99칸 기와집으로 가득할 것이다.  

 

로마의 문명은 현실주의에 기반하고 있었다. 효율성과 유용성을 추구한 듯 싶다. 즉 전통을 고수하기보다는 지금 도움이 된다면 즉시 바꿔버린다. 오늘날 로마를 과거 미국에, 그리고 그리스를 유럽에 비유하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다. 문명은 그리스, 유럽에서 왔지만 현실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로마였고, 과거 미국이었다.

 

로마가 생각한 전술은 혁명적이었다. 당시의 지중해 해상 무역은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가 장악하고 있었다. 레반트와 아라비아 반도를 넘어 인도와 지하자원이 풍부한 이베리아(지금의 스페인 지역)까지 독점하고 있었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카르타고를 물리치지 않는다면 자신들의 미래가 없다는 걸 이미 깨닫고 있었다. 육지에서의 전쟁엔 능한 로마는 아예 바다를 육지로 바꾼다. 이를 위해 개발한 게 '코르부스'다. 끝이 뾰족한 긴 다리를 카르타고의 배에 연결해서 마치 육지에서의 전쟁처럼 수행했던 것이다.

 

 

 

 

'멸망-왜 위대한 로마 제국은 무너졌는가'

 

찬란했던 로마의 영광이 어떻게 사그라들었는지를 분석한다. 전쟁에서의 계속된 패배, 황제의 급속한 교체, 국가 재정의 파탄 등등. 3세기 로마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닥뜨린다. 탄생할 때 이미 멸망의 씨앗을 안고 태어난 로마 제국의 비밀을 통해 시대의 거대한 흐름과 이에 맞서는 인간의 한계를 되짚어본다.

 

아주 작은 마을에 불과했던 로마는 이미 앞서 있었던 문명을 통해 지중해 주변의 전 세상을 지배하는 제국으로 탈바꿈한다. 그러나 찬란한 로마의 영광도 결코 영원하지는 못했다. 로마는 왜, 언제부터 멸망하기 시작했을까? 과연 로마는 멸망한 것일까? 우리는 여전히 더 이상 보이지 않는 로마 제국에 살고 있지는 않을까?

 

로마는 처음부터 세계를 정복하려는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전쟁을 했다. 외부로부터 침략받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싸운 결과 승리를 쟁취했던 것이다. 그런데, 점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로마 공화정 때엔 직업 군인이라는 제도가 없었기에 군인은 모두 시민 군인이었다. 더구나 자력으로 무기와 갑옷을 구입할 수 있어야만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로마의 팽창은 문제점을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의 교통수단으로는 귀가할 때까지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도보로 영국과의 전쟁에 참여했다면 이탈리아로 돌아오기까지 10년 이상 걸릴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장기 출정은 사회적으로 파장을 몰고왔다. 한 가정에서 장성한 아버지와 큰 아들이 전쟁에 참가한다면 이 집안의 생계엔 분명히 차질이 생긴다. 결국 남겨진 가족은 고율의 부채를 질 수밖에 없고, 이를 상환히지 못해 마침내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

 

또 로마가 전 세계의 정복을 통해 수백만 명의 노예를 챙길 수 있었고, 노예들은 모두 전쟁 자금을 많이 납부한 세넥스의 차지가 된다. 이로 인해 중산층 누구도 돈을 받고 일자리를 얻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무료로 일하는 노예가 있기 때문이다. 드디어 로마의 중신층조차 직업울 구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공화정 마지막 시기엔 로마 실업률이 70~80퍼센트에 육박했다고 한다.

 

로마 공화정의 문제점

 

첫째, 로마 안에서의 불평등 가속화

둘째, 로마와 이탈리아 간의 차별성

셋째, 노예의 반란(스파르타쿠스 반란)   

 

이후 카이사르가 크라수스, 폼페이우스와 함께 1차 삼두정치를 시작, 최후의 승자가 된 뒤 종신 독재관으로 정권을 장악한다. 하지만 브루투스에 의해 암살당하고, 이어서 2차 삼두정치(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를 거쳐 황제가 통치하는 제국이 되었다. 로마에 다이너스티, 즉 왕조가 생겼다.

 

한편, 마리우스에 의해 직업 군인의 개념이 도입되었다. 처음엔 이 제도가 사회적 문제점을 해결해주는 좋은 대책처럼 보였는데, 나중엔 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이끈 주된 계기가 되고 말았다. 당시 로마 안에서는 피를 보는 싸움을 금지하는 불문율이 있었다. 그런데, 마리우스의 대대적인 술라 당 숙청으로 인해 그리스와 소아시아에 있던 술라가 군대를 이끌고 로마에 입성해 마리우스를 추방시키고 만다. 한 동안 잠잠하다가 술라가 은퇴하자 또 다시 마리우스 당이 로마로 진격해 술라 세력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하는 처참한 모습을 연출했다.

 

3세기에 이르러 로마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다. 235~284년에 로마에는 무려 26명이나 되는 황제가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6개월 이상 재위하지 못했다. 심지어 21일 만에 목숨을 잃는 황제도 있었다. 3세기 로마는 다음의 세 가지 커다란 문제점에 노출되어 있었다.

 

첫째, 후계자 선정 규정이 없었다.

둘째, 황제 자리의 권위가 실추되었다.

셋째, 직업 군인들의 보상 문제 발생

 

이런 위기 상황을 해결하고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문제의 핵심을 파악, 매우 파격적인 해결책을 찾아냈다. 첫째,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할한다. 둘째, 후계자 선정 절차를 규정화해 네 명의 황제들이 통치하는 4두 정치(테트라키)를 표방한다. 셋째, 시장의 안정화를 위해 가격을 통제한다. 20년 임기를 마치고 은퇴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뒤를 이어, 콘스탄티누스 1세가 등장한다. 전임자의 정책 중 동로마와 서로마 분할책 외에는 모두 폐기하고 새로운 개혁을 표방한다.

 

313년, 밀라노 칙령을 발표, 기독교를 정식 종교로 채택

수도를 콘스탄티노플(오늘의 이스탄불)로 이전

 

 

3세기의 혼란을 겪은 로마는 410년 게르만 반달족에 의해 로마가 함락되고 만다. 1000년 전 켈트족에게 함락된 후 단 한 번도 점령당한 적 없는 로마. 영원한 제국의 영원한 수도 로마가 함락되다니! 로마가 함락되고 사라진다면 이 세상 그 어느 것도 영원한 것은 없어 보였다. 인류 역사에 필연적일 것 같았던 로마 역시 하나의 도시에 불과하다면 인간의 조건은 결국 무의미하다는 말이 된다. 
 

'복원-무엇이 로마의 역사를 이어지게 하는가'

 

멸망 이후 결코 사라지지 않은 로마의 흔적을 추적한다. 문명은 '운명의 바퀴'에서 벗어나 다시 미래를 향해 내딛기 시작한다. 유럽은 신과 종교에서 벗어나 평범한 일상 속의 인간에 주목한다. 15세기 유럽은 로마의 지식, 인쇄 기술,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으로 다시 한번 도약할 수 있는 행운을 부여받는다.

 

3세기의 위기로 로마의 내부 사회 시스템은 붕괴되었고 생산성 또한 현저히 낮아졌다. 도로는 망가지고 무기 생산도 원활하지 않았다. 로마의 장점인 시스템이 무너지기 시작하니 전쟁은 이제 개인 간의 전투력 싸움으로 바뀌었고, 여기에서 로마가 패권을 거머쥐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런데도 로마인들은 이 과정을 오랫동안 이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과거를 동경하며 결국에는 이를 신에 대한 믿음 문제로까지 투사했고, 새로운 종교까지 횡행하기에 이른다. 로마는 그렇게 멸망하는 순간까지 자신의 멸망 원인을 찾지 못한다. 로마 멸망의 최후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그들이 성공가도만을 달렸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역사를 되짚어보면 모든 나라가 도약을 위한 기회를 한 번씩은 부여받는다. 일본은 그 기회를 놓치고 만 것이고, 중국 또한 마찬가지였다. 명나라 때 일곱 차례의 대원정을 이끈 정화淨化의 모든 성과 또한 영락제永樂帝가 죽은 뒤 황제가 된 홍희제洪熙帝에 의해 철저히 폐기된다. 역사가 준 기회도 함께 말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현 정권에서 벌어지고 있는 '탈원전脫原電'도 이와 유사하다.  

'유산-누가 로마 다음의 역사를 쓸 것인가'

 

'세상은 발전하는 방향으로만 흘러가지 않는다'는 진리를 발견한다. 4차 산업혁명으로 놀랄 만한 혁신을 이룬 오늘날, 우리의 세계는 여전히 중세기의 전쟁을 치르고, 가속화되는 세계화의 물결 속에 자유민주주의는 위기에 처하는 등 전 세계는 멸망한 제국의 형상을 닮아가고 있다.

 

 

우리는 흔히 인공지능 시대의 일자리 걱정을 한다. 직업의 47퍼센트가 사라진다는 예측에 실질적인 위기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우리는 이미 이러한 과정을 로마 역사 속에서 봤다. 제국 팽창의 결과로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시민들은 생산력을 상실하고, 극심한 부채에 시달렸다. 여기에다  정복을 통한 노예의 증가로 직업까지 잃게 되는 상황이 도래했었다.

 

"과거의 노예는 현재나 미래의 인공지능과 같다"

 

우리들은 사회는 언제나 발전한다는 순진한 믿음을 갖는다. 하지만 찬란했던 로마 제국도 멸망했고 이후 유럽은 1000년 동안 중세기를 살았다. 암흑의 시대가 우리에게만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사회 발전은 결코 당연하지 않다. 발전을 위해 싸우고 노력하지 않으면 역행의 가능성은 언제든 열려 있다.

 

 

역사를 모르면 역사는 반복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의 전 세계의 움직임은 멸망한 제국의 역사를 좇고 있는 듯하다. 역사를 모르면 역사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물론 역사를 알아도 반복되는 역사를 모두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역사를 아는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조금은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