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3세 대해부 - 매경 기자들이 현장에서 전하는 주요 그룹 오너 3세 이야기
매일경제 산업부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한국기업의 발전사를 돌이켜보면 세대별로 특징이 나타난다. 창업세대인 재계 1세대는 '맨땅에 박치기'격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 삼성그룹의 이병철 회장과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이 이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이 땅에 설탕, 섬유 등의 공장을 세우고 이후 반도체 공장까지 만든 삼성그룹, 헝그리 정신과 불굴의 추진력을 바탕으로 중화학 공업의 기틀을 마련한 현대그룹 모두 우리나라 재계의 대부인 셈이다.

 



 

삼성 이건희 회장, 현대자동차 정몽구 회장으로 대변되는 재계 2세대는 IMF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우리 경제의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한 공을 세웠다. 세계 1등 품목이 대거 양산되고 그들의 화두는 '글로벌'이었다. 재계 1세대들은 근검, 절약으로 대변되는 헝그리 정신으로 한국 경제의 초석을 다졌다면, 2세대들은 뛰어난 경영전략으로 글로벌 기업과 한 판 승부를 벌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3세대가 무대의 주인공으로 등장할 때이다. 기업인으로서 본격적인 경영수업을 받아 유능한 경영자가 되는 것은 물론, 노블리세 오블리주로서의 사회적 역할도 수행해야 할 것이다. 삼성전자의 경우 예전에는 선두를 추격하는 추격자(Fast Follower)였으나 이젠 선두주자(Leader)의 입장으로 변모했다. 예로부터 '부자 3대 가지 않는다'는 말처럼 부를 유지, 계승하는 것이 어렵다. 이들 3세 중 가장 활발한 인물의 활약상을 살펴 보도록 하자.

 







  

삼성그룹은 한국을 대표하는 명실상부한 글로벌 기업이다. 유럽여행을 하다보면 여기저기에서 삼성 로고의 간판을 만난다. 삼성은 일제시대인 1938년 대구에서 창업자 호암 이병철 회장이 삼성상회를 설립하면서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성장했던 소년이 2010년 12월 그룹 사장단 인사에서 마침내 사장으로 승진했다.

 

1968년 생인 이재용 사장은 경복고등학교 재학시 모범학생으로 통했다.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마을버스를 타고 통학하며 학생회장을 맡을 만큼 리더십을 갖추고 있었다. 대학에서는 경영학이 아닌 인문학을 전공으로 선택하여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4년 내내 할아버지 이병철 회장이 삼성 초기에 사용하던 낡은 갈색가방을 들고 다닌 것은 유명한 에피소드 중 하나이다. 검소한 생활습관을 읽을 수 있다.

 

"키가 크고 한류스타처럼 잘생겼으나 전혀 위엄을 부리지 않는다.

생각이 유연하고 젠틀맨으로 사람들에게 호감을 준다"

<닛케이비즈니스, 2011년 1월 3일자> 중에서

 

이 사장은 2008년 삼성 비자금 특검시 백의종군을 선언하고 브라질, 러시아, 인도, 독립국가연합, 미국, 일본, 유럽 등지의 주요시장을 다니며 거래선과의 폭 넓은 교류를 가졌다. 이 과정에서 그는 앨 고어 전 미 부통령, 콜린 파월 전 미 국무장관 등 미국 정계의 주요 인사들과도 각종 모임을 통해 인연을 맺었다.

 

그의 사무실에는 삼국지의 명장면인 '삼고초려' 그림이 걸려 있다. 이 그림엔 좋은 인재를 널리 구하라는 메세지가 담겨 있다. 고 이병철 회장의 인재 욕심은 재계에서 이미 유명했다. '인재중시'경영은 이건희 회장을 거쳐 3대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다. 우수한 인재를 중시하고 이런 인재를 불러 모아서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 승부하겠다는 삼성 오너가의 경영철학인 셈이다.

 

한편, 그는 오래 전부터 어려운 이웃들을 도와왔다. 2007년에는 두 차례 서울 영등포역 인근 쪽방촌에 두움을 주고, 2005년에는 마리아수녀회에서 운영하는 '부산 소년의 집'이 예산부족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월급에서 일정액을 떼어내 사비로 매달 낡은 PC 10대를 교체해 주었다. 기부 습관이 몸에 밴 그는 2010년 12월 승진한 임원들의 명의로 정신지체인을 위한 지역사회재활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단체에 기부를 하기도 했다. 글로벌시장에서 존경받는 기업으로 잘 키울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2011년 4월 12일, 한복 디자이너 이모 씨가 한복을 입고 신라호텔의 부페 식당을 찾았다가 입장을 거절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언론과 네티즌들은 이에 대해 집중포격을 가했다. 그러자, 이부진 사장은 직접 이모 씨를 찾아가 정중하게 사과했다. 이후 네티즌들 사이에는 호텔 직원의 미숙한 대응을 대표이사가 나서서 직접 사과하고 사태가 수습되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2010년 12월 3일, 삼성그룹 사장단 인사 발표를 보고 출입기자들 사이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이건희 회장의 장녀인 이부진 호텔신라 전무가 부사장을 건너 뛰고 사장으로 승진했기 때문이다. 삼성의 인사 스타일에서 이런 파격 승진이 없었다. 뿐만아니라 삼성에버랜드 경영전략 사장과 삼성물산 상사 부문 고문도 겸하는 인사발령이었다.

 

"이부진 사장은 어렸을 때부터 꼼꼼하고 똑 부러졌다.

사리판단이 분명하고 스마트하기 때문에 사업도 잘할 것이다" (40 쪽)

 

1970년 생인 이부진 사장은 연세대학교 아동학과를 졸업했다. 대원외국어고등학교에 재학시에도 조용하고 검소한 여학생이었다. 아동, 복지, 문화 등에 관심이 많아 대학에서의 전공도 아동학이다. 1995년 삼성복지재단 기획지원팀에 입사하여 1998년 6월부터 1년간 삼성일본 본사담당 과장으로 근무하다가 그해 8월 당시 평사원인 임우재 씨(현, 삼성전기 전무)와의 결혼으로 세인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호텔신라와의 인연은 2001년에 시작되었다. 그해 여름 전사기획 담당부장으로 입사했다. 그녀의 부임이후 호텔신라는 긴장감과 더불어 변화가 시작되었다. 호텔신라의 업그레이드를 위해 경쟁사인 워커힐호텔에 직접 투숙까지 하면서 참고사항을 점검했다. 업무의 시스템화를 시도했고, 2006년에는 호텔 로비와 레스토랑, 연회장 등을 리모델링했다. 2년에 걸친 꼼꼼한 공사로 호텔의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3~6 층에 신설된 '라이프스타일존'은 호평이었다.

 

이 사장이 언론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것은 2009년 9월 삼성에버랜드가 당시 호텔신라 이 전무를 자사 경영전략담당으로 영입했다고 발표하면서부터이다. 경영상태가 좋지 않은 에버랜드의 경영정상화를 위한 것이었다. 주력사업인 테마파크의 경우 2005년 입장객 865만 명을 정점으로 제자리걸음을 해왔다.

 

이 사장은 철저한 현장주의자이다. 모든 것을 본인의 눈으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린다. 일에대한 욕삼과 승부욕이 강하다는 것이 업계의 평판이다. 에버랜드의 명물인 사파리 스페셜 투어도 직접 체험한 결과, 차량 보호망의 색깔이 은색이어서 승객이 바깥을 관망할 때 눈부심 현상이 나타나는 점을 파악하고 현재의 암녹색으로 변경했다.

 

2010년 11월 루이비통 브랜드를 인천공항 신라면세점에 유치했다. 3년에 걸친 롯데면세점과의 유치 경쟁에서 이긴 것이다. 루이비통의 아르노 회장이 직접 방한하여 롯데와 신라 모두 면담한 뒤 결정을 내렸는데, 루이비통이 공항 면세점에 입점한 것은 신라면세점이 세계 최초라고 한다. 호텔신라의 매출이 4,200억 원(2002년)에서 1조 4,000억 원(2010년)으로 증가했고, 이 중 면세점 매출이 전체 매출의 81%를 차지하는데 이는 세계 7위 수준의 면세점 매출이다. 이만하면 경영능력을 인정받을만하다. 이미 신세계와 한솔이 분리되었던 것처럼, 이부진 사장도 계열분리의 길을 걷게될지 재계의 관심이 쏠린다.

 



 

 

1973년 생인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은 서울예술고등학교와 미국 파슨스디자인스쿨을 졸업했다. 일찌기 패션과 디자인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2002년 제일모직 패션연구소 부장으로 입사하여 기획담당을 하며 제일모직에 변화의 바람을 일으켰다. '갤럭시'나 '로가디스' 등 신사복 의존도가 높은 패션사업 구조에 손을 댔다. 2003년 여성복 브랜드 '구호(KUHO)' 인수를 시작으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새로 구성하고, 빈폴도 글로벌 브랜드화 전략에 착수했다.

 

2010년 초 이 부사장은 미국 패션디자이너협회의 이사회 멤버로 선정되었고, 그 해 가을에 열린 '2010 F/W 뉴욕컬렉션'기간 중에는 '헥사 바이 구호(Hexa by Kuho)'라는 라벨로 구호의 첫 해외컬렉션을 선보였다. 2005년부터는 삼성패션 디자인펀드를 설립하여 전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장래가 촉망되는 한국 디자이너를 발굴, 후원하고 있다.

 



 김연아 평창 프리젠테이션에서, 의상은 '구호' 제품임 

 

그녀가 합류하고 제일모직은 질과 양 모든 면에서 크게 성장했다. 매출이 2조 원(2002년)에서 5조 원(2010년)을 돌파했고, 패션사업부의 매출도 8,100억 원(2002년)에서 1조 3,000억 원(2010년)으로 증가했다. 2009년부터는 광고대행사인 제일기획의 경영도 챙기고 있다. 제일기획이 글로벌 크리에이티브 경쟁력 강화를 목적으로 그녀를 기획담당 전무로 영입했었다.

 

2010년 말 부사장으로 승진과 동시에 케미컬과 전자재료 사업까지 챙기기 시작했다. 그녀가 즐겨 찾는 곳은 R&D센터에 있는 컬러랩(Color Lab)이다. 2005년에 설립된 컬러랩은 글로벌 업체의 다양한 컬러 요구에 부응할 목적이었다. 노하우가 축적되어 흰색만해도 현재 2천여 종을 보유하고 있을 정도이다. 디자인과 컬러의 조화로 시너지를 극대화하자는 것이다.

 

"디자인 역량이 소재사업의 미래를 좌우한다.

최첨단 IT제품의 경쟁력에서 컬러디자인을 빼놓을 수 없다"

(56 쪽)

 

 


올 초 현대차 판매촉진대회에 참석한 정의선 부회장.


 
 



1970년 생인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은 정몽구 회장의 1남 3녀 중 막내이다. 휘문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할아버지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권유로 1995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샌프란시스코대 MBA과정 중 현 배우자인 삼표회장의 장녀 정지선과 인연을 맺었다. 1997년 8월 MBA를 마치고 일본 이토추상사에서 근무하다가 1999년 말 현대차 자재본부 구매실장(이사대우)으로 첫 발을 내딛었다. 상하 가리지 않고 직원들과 잘 어울려 평이 좋았다.

 

"직원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려 폭탄주도 마시고 노래방에서 노래 시합을 벌인 적도 있다"(66 쪽)

 

그의 진가는 2000년대 중반부터다. 상무(2001), 전무(2002), 부사장(2003) 등으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여 입사 6년 만인 2005년에 기아차 사장으로 승진했다. 일단 맡겨보고 자질을 검증하는 현대그룹의 전통에 따른 것이다. 그는 '디자인 경영'을 선언하며 세계 3대 자동차 디자이너로 꼽히는 피터 슈라이어를 기아차 디자인 담당 부사장으로 전격 영입했다. 이를 발판으로 적자인 기아차를 흑자로 전환시키더니 2010년엔 사상 최대의 실적을 달성했다.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날지 주목된다. 

 

그의 누나 셋은 현대차의 경영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 이것도 현대가의 전통이다. 단지 사위들이 계열사의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장녀 정성이의 남편인 맏사위 선두훈은 선병원 이사장으로 딴 길을 가고 있다. 둘째 사위 정태영은 종로학원 정경진 회장의 장남인데 현대카드와 현대캐피탈의 대표이사 사장이다. 제일 왕성한 활동을 하며 정몽구 회장의 신임이 두텁다. 셋째 사위 신성재 현대하이스코 사장은 현대모비스에 입사하여 현대하이스코로 근무지를 옮겨 영업본부장 시절 1조 원대를 맴돌던 매출을 2조 3천억 원으로 끌어올린 입지전적 인물이다.

 



 

 프로야구 두산 베어즈의 구단주인 박정원 회장

 

1962년 생인 두산건설 박정원 회장은 두산가 4세 중 맏형이다. 두산그룹은 올해로 창립 115년의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이다. 구 한말 종로에서 '박승직상점'이라는 포목점을 시작으로 OB맥주, 코카콜라, 코닥, 3M 등 외국기업의 국내 비즈니스를 도맡았던 대표적인 소비재 기업이었다. 변신의 움직임이 일었다. 1995년 두산은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당시 맥주가 하이트의 추격에 직면하여 적자가 엄청나게 누적되었기 때문이다. 영등포 공장과 을지로 본사 사옥의 매각이 단행되었다.

 

박회장은 어릴 적부터 경영수업을 착실하게 밟아왔다.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1990년 두산산업 뉴옥지사에 입사했다. 이후 도쿄지사를 거쳐 미국 보스톤대 MBA를 마치고 일본 기린맥주에 취업했다. 창업주 박승직은 1930년대 소화기린맥주의 주주로 참여하고 있었다. 소화기린맥주는 기린맥주의 한국 현지 생산공장이었다. 2년 후 그는 OB맥주로 복귀했다.

 

"남의 집 밥을 먹어봐야 내 것을 잘 알 수 있고, 경영인으로서의 자질을 갖출 수 있다"

 - 창업주 박승직 경영철학

 

1968년 생인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은 유명 탈렌트 고현정과의 결혼으로 한 때 세인의 관심을 많이 받았다. 그의 어머니 이명희 회장은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막내딸이다. 그는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과 경복고등학교 동기동창이다. 미국 브라운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신세계 전략기획, 기획조정실 상무, 경영지원실 등 컨트롤타워에서 경영수업을 받았다. 2010년 총괄 대표이사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image src


↑ 왼쪽부터 신세계 이명희 회장, 정용진 부회장, 정유경 부사장.




 

2011년 3월 18일 주총에서 신세계는 백화점과 이마트가 별도법인으로 분리되었다. 재계에서는 정부회장과 동생 정유경이 각각 나눠 가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는 성격이 소탈하다. 트위터 매니아인 그는 트위터로 고객뿐만 아니라 친구들과 자유롭게 의사소통을 한다. 최근의 이마트 피자 논쟁의 무대가 바로 트위터였다.

 

"가식적이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줘 사람을 끄는 친근한 매력이 있다"(208 쪽)

 

경영 감각이 날카롭다는 평가를 받는 그는 '현장경영'에 나서고 있다. 이마트와 백화점 매장에 직접 나가 상품과 고객의 반응을 살피고 있다. 이마트의 자체 브랜드인 PL 상품에 대한 관심도가 매우 높다. 아직은 어머니로부터 경영독립을 하지 못했지만 멘토인 구학서 회장과 어머니로부터 그동안 많은 경영수업을 받았기에 조만간 경영권을 물려받을 것으로 예측된다.

 

 

이 책에는 범현대가를 포함하여 모두 17개 그룹 50여 명의 리더들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회사의 역사가 제일 오랜 두산의 경우는 이미 4세가 경영권을 행사하고 있는 반면, SK그룹의 경우는 아직 2세 경영 체제임을 알 수 있다. 역사가 짧은 탓인지 SK그룹은 신성장동력이 없어서 미래가 불안하다는 증권가의 루머도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국내 재벌의 가계도가 잘 정리되어 큰 도움이 되었다. 호불호好不好가 있기 마련인데 경영자의 좋은 면만 부각시켜 형평성을 잃은 것이 옥의 티 같아 다소 아쉬웠다. 혹자는 물려받은 부富가 뭐 그리 대단하냐고 처음부터 색안경을 끼고 재벌가문을 비난하기도 한다. 하필 왜 그들이 기업을 경영하는지 그점에 대해선 나 역시도 불만이다. 주식회사란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부를 승계하고 더 나은 발전을 위해서 남보다 더 많은 공부로 유창한 외국어를 구사하는 등 글로벌 정신을 갖추었고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는 점을 낮게 평가해서는 안되겠다. 아무튼 한국의 기업이 3대를 넘어 100대까지 이어져 세계 기업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종이달 2022-06-28 0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하늘 스케치 - MBC 헬기기장과 함께하는 특별한 비행
정갑표 지음 / 제이앤씨커뮤니티 / 201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성장해서 사회로 진출하면 부모님으로부터 '한 우물을 파라'는 가르침을 받는다. 이 책의 저자인 정갑표 MBC 방송 취재용 헬리콥터의 기장도 조종사로서 한 우물을 파고 있다. 그의 이력을 보면 공군사관학교를 나와 공군의 헬기인 블랙호크의 비행대대장으로 근무중 우연히 MBC TV 자막에 나온 조종사 채용 공고를 보고서 밑지는 셈치고 지원했다가 덜컥 합격하여 근무지를 공군에서 방송국으로 옮긴 인물이다.







MBC 헬기는 전국을 누비고 다니며 시청자들에게 보다 더 사실적이고 생생한 현장 화면을 제공하도록 조력자로서의 일에 충실해왔다. 10여 년간의 비행업무 수행중 그가 겪게된 여러가지 이야기를 우린 이 책에서 만나게 된다. 김수환 추기경, 가수왕 조용필,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 산악인 엄홍길 등의 저명인사와의 만남, 태풍이 휩쓸고 간 수해 현장의 취재기, 터널공사 반대를 시위 중인 지율스님과 천성산의 취재비행 등이 생생하게 소개되어 있다.



1973년 2월 초,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약 150 명의 무리 속에 섞여 서울 대방동 공군사관학교 정문에서 성무대 언덕을 넘기 시작했다. 여느 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처럼 처음 생각했던 그는 이게 아니구나를 직감했다. 사관학교도 엄연한 군대였기에 겨울 새벽 6시에 울려 퍼지는 기상나팔 소리를 시작으로 뛰고, 뒹굴고, 얻어맞으며 계속되는 훈련 속에서 그는 서서히 군인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러나, 빨간마후라의 조종사가 되기엔 아직도 미흡한 '메추리'였다. 전체 동기생 중 고등비행과정을 수료한 숫자는 40%가 채 되지 않았다. 고등비행훈련을 모두 마치고 전투 비행단으로의 배치를 앞둔 어느 날, 그는 훈련 비행단으로 차출되었다. 공군본부로부터 향후 예상되는 고가의 헬기와 수송기의 도입과 관련하여 헬기와 수송기에도 고등비행수료자를 보내라는 지시에 따라 4명이 차출되었던 것이다.



1995년 겨울, 대한민국 공군의 최신예 헬기인 블랙호크 비행대대장으로 근무하던 어느 날, 야간비행을 마치고 텅빈 관사로 들어가 무료함을 달래려고 TV를 켰다. 아이들의 교육 때문에 가족들 모두 수원에 있었다. 혼자서 텅빈 집에 들어가는 기분은 바로 공허함과 외로움이다. 소파에 누워 TV를 보는데 조종사 채용에 관한 전화번호가 잠시 보였다 사라졌다. 다음 날 대대 아침 브리핑 후, 신기하게도 그 전화번호가 생각나서 재미삼아 대대장실 전화 버튼을 눌렀다.



"이거 미리 다 정해놓고 형식적으로 선발하는 척하는 것 아닙니까?"

"정말 실력이 있다면 한 번 도전해 보시죠?"

(26 쪽)



귤화위지橘化爲枳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강남에 심었던 귤이 기후와 풍토가 다른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된다는 뜻이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제나라의 안영이 초나라에 사자로 파견되었다. 당시 안영은 똑똑하다고 다른 나라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는 체구가 왜소하고 얼굴이 거무스레했다. 방자한 초나라 왕이 그를 업신여겨 수모를 주려고 작정하고서 미리 짠 각본대로 한 사람을 꽁꽁 묶어 일부러 자신과 안영이 있는 장소를 지나가도록 했다.



"이 제나라 사람은 도적의 혐의가 있습니다", "제나라 사람들은 도적질을 잘하는 모양이오?"

"제가 듣기로 강남 일대의 귤은 향기롭고 달지만, 강북에다 옮겨 심으면 쓰고 덟은 탱자가 된다고 하더군요. 무엇 때문일까요? 바로 환경이 이유입니다! 지금 제나라 사람이 제나라에서는 도적질하지 않다가 초나라에 와서 도적이 되었으니, 이게 바로 환경 때문이 아니겠습니까?"(28 쪽)



1996년 5월 2일, 기장으로 최종 합격했다는 소식과 함께 MBC는 최선의 배려차원에서 '부장대우'라는 간부 직급을 부여했다. 그의 심정은 귤화위지였다. 방송사 헬기가 하는 일은 다양하다. 공중취재, 스포츠 중계,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 제작, 교양프로그램 등 여러 장르에 활용된다. 요즈음 조종사가 전문직종으로 인식되어 젊은이들이 선호한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 조종사와는 달리 방송국의 조종사는 저공에서 방송업무를 수행하는 등 위험에 노출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조종사이면서 동시에 방송인이 되어야 하는 특징이 있다.



MBC는 민영도 공영도 아닌 어중간한 형태의 소유구조로 운영되고 있다. 그래서 MBC만이 가지는 프로그램 제작의 장단점이 있다. MBC는 본디 부산의 한 개인의 소유였다가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KBS에 귀속되었다가 전두환 대통령의 언론통폐합 과정에서 '방송문화진흥회'가 소유하게 되었다. 한편, '방문진'의 이사진이 대통령과 국회, 야당과 여당에서 지명하는 저명인사들이 월급을 받는 임기직 이사로 구성되는 독특한 지배구조이다.



1995년 4월 어느 날, 김수환 추기경을 독도까지 모시라는 상부의 지시가 있었다. 용산기지를 출발하여 약 1시간 10분 정도 지나 독도 동도의 중앙 헬기장에 착륙했다. 헬기 승무원 모두를 불러 기념촬영을 제의했다. 독도일정을 마치고 잠시 울릉도 해군기지에 들렀다. 이곳에서 추기경은 천주교 신자인 그를 불러 강복을 주셨다.







2003년 7월 30일 잠실경기장 옆 둔치 헬기장에서 가수 조용필 일행을 태워 속초 음악제 현장으로 비행했다. 발 아래로 청평유원지가 내려보이고 잠시 후 춘천을 지나 설악산 대청봉이 보이자 "야!"하고 감탄사를 날린다. 고도를 7천피트로 올려 내설악을 가로질러 속초로 향하는 빠른 항로를 택했다. 예정시간보다 빨라서 설악산 중청봉 옆 헬기장에 잠시 내려 경관을 감상하도록 배려했다.



2011년 3월 11일, 제주공항에서 산악인 엄홍길 씨를 헬기에 탑승시켰다. MBC창사 50주년 기념 특별프로그램으로 '엄홍길 바다로 가다'를 제작하기 위해서였다. 이틀간 돌고래 무리를 찾다 모슬포 해안에서 이들을 발견하고 촬영에 들어갔다. 제주 돌고래의 정식명은 '남방 큰돌고래'이다. 인도양과 서태평양의 열대와 온대 해역의 얕은 바다에 분포하는데, 한국에선 제주연안에서만 발견된다. 모슬포나 협제 등 제주서남부지역에서는 이들을 '수애기', 성산포와 김녕 등 동북부지역에서는 '감새기'라고 부른다.







대형화재, 산불, 태풍, 장마로 인해 수해 등 긴급재난이 발생하면 이를 취재키 위해 헬기는 위험을 무릎쓰고 현장으로 날라간다. 2003년 태풍 매미의 피해상황을 촬영하기 위해 수마가 할퀴고 간 경상도 남부지역의 비참한 모습을 영상으로 보도국에 전송했다. 또한 2004년 3월 100년 만의 폭설, 2010년 1월 41년 만의 수도권 폭설, 2005년 강원도 폭설, 2006년 10월 서해대교 대형 교통사고, 2010년 4월 천안함 침몰 등 크고 작은 취재 비행을 통해 정말 힘든 일임을 느끼게 한다.







한편, 독도 국제요트경기, 춘천마라톤, 동아 국제마라톤 등의 비행 촬영을 통해 시청자들이 편안하게 TV를 통해 멋진 영상과 함께 스포츠를 즐길 수 있고 그리고 드라마 주몽, 드라마 선덕여왕 등의 촬영 현장을 보니 드라마 명장면의 탄생 배경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헬기가 드라마 PD에게도 꼭 필요한 장비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종사 생활이 어떠한지, 그리고 그 과정이 얼마나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지 미처 생각도 못하고 사관생도의 제복과 빨간마후라의 동경만으로 성무대 언덕을 넘어설 때부터 지금의 MBC 취재헬기 기장에 이르기까지 그의 비행일기는 흥미와 재미를 뛰어넘어 헬기 비행의 상식까지 알게 해준다. 아울러, 독서하는 내내 방송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의 노고를 한꺼번에 이해할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그의 무궁한 발전을 기대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방황해도 괜찮아
강성찬 지음 / 일리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프로복싱이 전성이던 때가 있었다. 빅게임이 있는 날이면 다방 문 앞에 TV 중계방송 안내 표지판을 붙였을 정도였다. 동료들과 함께 커피 한 잔 시켜놓고 목이 터져라 응원했던 옛날이 생각난다. 1970년대엔 유독 실력있는 복서들이 많았다. 그러나, 요즘엔 좋은 복서들이 눈에 띄지 않는다. 매맞으며 돈벌지 않아도 되는 시절임을 대변하는 현상인 듯하다. 

 

그런데, 얼마 전 여성복서가 세계 5대 기구 통합 챔피언에 등극했다는 기사가 사진과 함께 눈에 띄었다. 남성들도 회피하는 스포츠 종목이 프로복싱이라고 한다. 예쁘장하게 얼굴을 가꾸어야 할 젊은 여성이 복싱이라니, 정말 인생에는 단 하나의 정답만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여실히 보여준다.

 

"사람은 자기가 읽는 것으로 만들어진다"

- 마르틴 발저    

 

그렇다고 인생이 그냥 살아지는 것이 아니다. 인생이란 자신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지고 자신은 이에 대한 답을 만들어가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왕 사는 것이라면 '살아지는' 수동적인 삶보다 '살아가는' 능동적인 삶의 자세가 좋지 않겠는가. 저자는 조그마한 시골 마을 출신으로 책과의 만남을 계기로 밤낮으로 꿈을 꾸기 시작했다. 독서를 통해 그는 인생화두를 잡고 있었다.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잘할 수 있는가?'

(21 쪽)

 

그의 첫도전은 IBM 입사였다. 지방대학 출신이라는 불리한 스펙을 안고 있었기에 IBM이라는 성 안으로 들어가기엔 너무나 높고 단단한 철옹성 처럼 보였다. 간절함이란 커다란 바위도 뚫고 무쇠도 녹이는 강렬한 힘이다. 그는 불리한 스펙에 굴하지 않고 회사로 찾아가 응시서류를 받아 들었지만 자기소개서에 단 한 줄도 채울 수가 없었다.

 

'본인의 주위나 학교, 세상을 위해 혁신한, 창의적 사례가 있는가?'

'21세기 세계화에 대비하려고 본인 자신을 세계화하려 노력한 사례가 있는가?'

(28 쪽)

 

2007년 새해가 코 앞에 다가온 즈음, 포항의 호미곶 일출을 보려고 그는 부산에서 약 120 킬로미터의 행군을 시작했다. 그의 계획에 힘을 보태기 위해 아버지도 동참했다. 붉게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그는 다짐했다.

 

'올해는 반드시 IBM에 간다'

 

1박 2일 과정의 '웃음치료사', 2박 3일 간의 '대학생 리더십 아카데미', 토익의 고득점, 3박 4일 간의 카이스트 국제 대학생 컨퍼런스 등 다양한 스펙을 쌓으면서 IBM 자기소개서를 채우기 시작했다. 2007년 하반기, 이력서는 초라하지만 자기소개서는 열정으로 가득 채웠다. 서류전형을 통과하고 면접까지 잘 치루었다. 최종 합격 통보를 받는 순간 그는 무척 행복했다.

 

열정 하나로 입사했지만 언젠가부터 그의 열정이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다. 겨우 몇 달을 지났을 뿐이었다. 프랭크 베트거의 <실패에서 성공으로>에서 언급되는 '카네기 코스'가 국내에도 교육과정이 있었다. 조금씩 열정을 회복하던 중 우연히 구본형 소장의 강연을 듣고서 새로운 것에 눈을 뜨게 되었다. 구본형 소장은 IBM에서 20년 가까이 근무한 후 독립하여 1인 기업가로 성공했다. 2009년 새해가 밝아오자 그는 비장한 결단을 내렸다. 직장인이라는 길을 떠나기로 작정했다. 

 

"내가 하는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미야모토 무사시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20대'와 관련된 책들을 닥치는대로 읽었다. 얻은 게 별로 없었다. 그래서, 전라남도 광양시에 소재한 무등암을 찾았다. 책 50여 권을 싸 들고 입산한 셈이었다. 이제껏 독서하며 '무엇을', '어떻게'만을 고민했을 뿐 '왜?'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파헤치지 않고 지내왔음을 깨닫게 되었다. 더 넓은 세상으로 갈 때가 왔다. 여행은 아시아와 중동을 거쳐 아프리카로, 유럽을 거쳐 남북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어졌다. 여행기간 중 많은 젊은이를 만났다. 한결같이 세상의 고민을 안고 살고 있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카미노 데 산티아고', 산티아고 가는 길은 스페인의 북서부 대서양 변에 위치한 산티아고로 예수의 제자 야곱이 복음을 전하려고 이 길을 걸었던 데에서 유래한다. 이후 많은 사람들이 야곱의 묘를 참배하려고 산티아고로 향한다. 과거 이 길은 목숨을 걸 정도로 위험했지만 지금은 '노란 화살표'를 따라가면 된다.

 












 

벽안의 스님 현각, 그는 예일대와 하버드 대학원을 졸업한 엘리트였다. 그런데, 숭산 스님과의 첫 만남에서 그에게 던진 "너는 누구냐?"란 단 하나의 질문 때문에 그는 출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당시 현각은 자신의 이름은 어쩌구, 좋아하는 사람은 저쩌구 등을 늘어 놓았다. 그러자 숭산 스님이 버럭 소리 질렀다. "너는 누구냐고 물었다!" 현각은 순간 큰 충격을 받았다. 즉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모르겠습니다"

"네가 누구인지, 그것을 공부해라. 그것만 공부해라"

(158 쪽)

 

 

산티아고에 도착한 사람들은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모든 것이 자신의 내면에 있음을 깨달았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도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라고 이야기했다. 저자가 겪어야만 했던 방황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한 노력 과정의 하나였다. 자신만을 위한 정답을 찾고자 노력하지 않았다면 방황도 없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의 한 수 - 위기의 순간, 나라를 살린
신동준 지음 / 북클래스(아시아경제지식센터) / 2011년 7월
평점 :
품절


책사策士란 꾀를 잘 내어 일을 성사시키는 사람을 말한다. 우리가 잘 아는 역사 속의 인물로는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제갈공명이 이에 해당한다. 최고통치자의 리더십이 국가의 흥망을 좌우한다지만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2인자의 보필이다. 하물며 기업경영도 국가경영과 다를 바가 하나 없다. 총수가 뛰어난 식견을 가졌다해도 곁에서 이를 보좌할 사람이 전무하다면 그 힘은 분명 반감될 것이다.

 

역사 속 특히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는 수많은 영웅호걸과 책사들이 등장하여 그 실력을 겨루었다. 가히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시기였다. 이 책에는 춘추전국시대를 대표하는 2인자 8명의 행적을 소개하고 있다. 그들을 각각 지신智臣, 양신良臣, 정신貞臣, 현신賢臣, 모신謀臣, 간신諫臣, 능신能臣, 직신直臣으로 나누어 그들만의 독특한 2인자 리더십을 설명하고 있다.

 

관중 - 제나라 지신智臣

 

'관포지교管鮑之交'로 유명한 관중은 제나라 사람으로 공자가 매우 존경한 인물이다. 관중과 포숙아는 각각 제나라 양공의 이복동생인 공자 규와 소백을 가르치는 스승이었다. 어느 날 양공이 피살되어 정국이 소용돌이 속에 빠지자 포숙아는 재빨리 소백을 데리고 제나라 인근의 거나라로 피신했다. 반면 관중은 공자 규가 보위 계승 1순위이므로 그와 함께 도성안에 피신해 있었다. 그러나, 정국이 수습되지 않고 오히려 쿠데타 세력이 공자 규를 죽이려하자 관중은 규와 함께 규의 외가인 노나라로 달아났다.

 

이후 제나라의 대부들이 합세하여 쿠데타 세력들을 제거한 뒤 정통성를 가진 공자 규와 소백 중 한 사람을 왕위에 옹립하려했다. 빨리 제나라에 도착하는 사람이 왕이 될 상황이었다. 지리적으로 제나라에서 가까운 나라는 거나라였기에 소백이 매우 유리했다. 불리함을 느낀 관중은 규를 왕위에 옹립하고자 별동대를 데리고 제나라의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소백에게 화살을 날렸다. 소백이 쓰러지자 그는 급히 규에게 입국하라고 연락했다.

 

그러나, 규의 행렬이 제나라 경계에 도착했을 때 이미 소백은 왕위에 오른 후였다. 소백은 자신에게 쏜 화살이 혁대에 맞자 죽은 척했던 것이다. 소백이 바로 후에 춘추시대의 첫 패자覇者가 되는 환공桓公이다. 이리되자 공자 규의 외가인 노나라는 소백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고 제나라에 전쟁을 선포했으나 대패하고 말았다. 승전한 소백은 공자 규를 죽이고 관중은 제나라로 압송하라고 노나라에 요구했다. 결국 노나라의 장왕은 공자 규를 죽이고 관중을 제나라로 압송했다. 관중을 압송하게 된 이면에는 포숙아의 강력한 건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보필하는 나라는 반드시 패권을 차지할 것이니 그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20 쪽) 

 

관중은 예禮, 의義, 염廉, 치恥를 국가의 근본으로 삼고 재정경제를 튼튼히 하면 나라가 부강해진다는 논리를 펼쳤다. 이를 토대로 제나라가 부강한 나라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던 것은 또한 인재경영 탓이었다. 자신보다 나은 인재를 천거한 포숙아, 자신에게 활을 쏘았던 관중을 발탁한 환공 등의 뛰어난 인물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여기,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쓸 줄 알던 사람 잠들다"

- 철강왕 카네기의 묘비명 중에서

 

관중은 치국의 길은 반드시 백성을 잘살게 하는 데서 시작한다며 '필선부민必先富民'을 주장했다. 창고 안이 충실해야 예절을 알고, 의식이 넉넉해야 영욕을 아는 법임을 깨닫고 있었다. 그의 부민富民철학은 '중본억말重本抑末'정책으로 구체화되었다. 여기서 '본本'이란 농, 축, 수산업을 뜻하며, '말末'이란 사치소비재의 생산과 유통, 고리대금업을 의미한다. 즉 1, 2차 산업이 제대로 육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금융서비스업이 기형적으로 커지면 경제가 파탄에 이른다는 것이다. 농업과 염철 등 1, 2차 산업의 활성화로 제나라의 수도인 임치성엔 장사꾼들이 구름처럼 몰렸다고 한다. 후대의 학자들은 임치성의 상주인구가 대략 10만여 명이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아무튼 금융자산의 버블을 우려하여 이를 억제한 그의 정책은 온고이지신으로 삼아야 할 것 같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 사치하면 국고를 낭비하게 되어 인민들이 가난하게 된다. 인민들이 가난해지면 간사한 꾀를 내어 나라를 어지럽히게 된다" (38 쪽)

 

 

오자서 - 오나라 모신謀臣

 

'오월시대'의 개막은 오랫동안 남방을 호령하던 초나라가 중원으로의 진출에만 신경을 쓰고 내정에는 소홀히 함에 따라 빚어진 현실이었다. 장강 하류 동남쪽에서 신흥세력인 오와 월나라가 급부상했다. 오는 오늘의 강소성 남부와 절강성 북부의 비옥한 평원을 차지하고 있었고, 월은 절강성 중남부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웠다. 지리적으로 두 나라는 붙어 있었기에 양립이 불가능했다.

 

초나라 평왕에게는 정식 혼례를 치르지 않은 지방 장관의 딸 사이에 태어난 아들 건이 있었다. 나이 15살이 되자 비무기의 추천으로 진秦나라에서 며느리를 들였다. 그런데, 웃기는 촌극이 발생했다. 며느리가 될 여인이 워낙 미색인지라 비무기는 초평왕에게 이 여인을 취하고 왕비로 삼게 했다. 비무기는 후환이 두려워 평왕을 설득하여 태자 건을 변방에서 근무하도록 만들었다.

 

비무기의 생각대로 이 여인이 아들 웅진을 낳았다. 그러자, 비무기는 태자 건과 이를 비호하는 오사를 싸잡아 모함했다. 비무기의 모함으로 죽음에 내몰린 태자 건은 잽싸게 송나라로 도망쳤다. 그러자 비무기는 오자의 자식들을 모함하기 시작했다. 오자에게는 자식이 둘있었다. 형인 오상은 동생 오자서에게 원수를 갚아 달라고 부탁하고 순순히 소환에 응했다. 오자서가 도망치자 평왕은 격분하여 오사와 오상을 저자에서 처형하고 말았다. 오자서의 복수심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오자서는 태자 건이 있는 송나라로 피신했지만, 송의 사정이 매우 혼란스러워 오나라로 향했다. 오자서는 오왕 요의 사촌 형인 공자 광이 딴 뜻을 품고 있음을 알아 채고 자객을 광에게 추천했다. 자객의 이름은 전설제인데 후일 광을 위해 오왕 요를 죽인다. 초평왕이 죽자 왕자 웅진이 초소왕으로 즉위했다. 초나라의 국상을 틈타 오나라는 초를 침공했다. 이는 오자서의 계책이었다.

 

공자 광은 지하실에 무장한 갑사들을 숨기고 오왕 요를 집으로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공자 광이 자리를 비키자 자객 전설제가 '전어'요리 속에 칼을 감추고 들어가 요리를 올리는 척하며 순식간에 요의 급소를 찔러 죽였다. 공자 광은 매복시켜준 군사를 동원하여 요의 일당을 모두 제압하고 왕 위에 올랐다. 이 사람이 바로 오왕 '합려'이다. '합려'란 '누추한 오두막 집'을 뜻한다. 이는 후대의 사관이 공자 광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는 의도가 담긴 듯하다.

 

오왕 요의 동생인 공자 두 사람이 초나라로 도주해 오자 초소왕은 오나라와 가까운 땅을 영지로 하사하고 그곳에 머물게 했다. 오왕 합려를 자극했다. 합려는 초나라로 도주토록 만든 서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서나라의 군주도 초나라로 망명했다. 이에 오는 초를 쳐 대승을 거둔다. 그런데, 합려는 급습을 노린 월나라와의 접전에서 사망한다. 뒤를 이어 아들 부차가 왕이 되었다.

 

부차가 왕위에 오르자, 그는 초나라에서 망명했던 백비를 발탁 인사하고 오자서를 고문 정도의 위치로 밀어냈다. 부차는 회계산 전투에서 월왕 구천을 대파했다. 구천은 부차의 노복이 되어 충성을 하겠다고 다짐하고 목숨을 구걸했다. 오자서는 차제에 월나라를 완전히 멸망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의 건의는 묵살되고 오히려 백비의 강화론이 채택되었다. 이후 구천의 석방문제를 놓고 또 다시 오자서와 백비는 격돌했다. 이 때에도 오자서의 강경론 대신 백비의 석방론을 부차는 수용했다.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제나라 토벌 문제였다. 백비는 하루 속히 제나라를 치고 부차가 패자의 자리에 오를 것을 부추겼다. 그러나, 오자서는 이것이 월나라 구천의 간교한 속셈임을 알기에 이를 말렸다. 당시 오자서는 제나라의 사신을 자청해 은밀히 자식을 제나라 대부 포씨에게 맡겼다. 부차는 오자서의 이러한 행동을 매국으로 간주하고 자신의 보검을 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강요했다. 오자서가 죽은 후 오나라는 결국 월나라에 패망당하고 만다. 백비는 월나라의 태재가 되었다.

 

"나의 무덤가에 가래나무를 심어두시오. 나무가 관을 짤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할 때면 오나라는 대략 망하고 말 것이오. 자만하며 교만해지는 자는 반드시 실패하게 되어 있는 게 하늘의 이치요" (167 쪽)

 

'부차'란 '덜 떨어진 일개 사내'란 뜻이다. 충신 오자서를 죽음으로 내 몬 어리석은 군주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구천의 간교한 술책을 읽어내고 충언을 서슴치 않았던 오자서를 믿지 않고 그를 죽게 만든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주군을 설득하는 방법이 다소 거칠었다는 오자서와 신하의 충성스런 간언을 무시했던 부차, 이 두사람 때문에 오나라는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고리대금을 하는 자들을 '저축은행'으로 둔갑시켜 주고 뇌물을 받아 먹고, 이를 감독해야 할 위치에 있는 금융감독원과 감사원에 이르기까지 한통속이 되어 부정을 저지른 '부산저축은행'의 사태를 생각해보면, 왜 오자서 같은 당당한 관리가 이 시대에는 없는지 아쉬움이 든다. 오자서의 흠이라면 미리 사직을 하지 않은 것이리라. 무릇 사람은 박수칠 때 떠날 줄 알아야 한다.

 

 

인상여 - 조나라 직신直臣

 

조나라는 무령왕 시절 강력한 군사정책을 펼쳐 진나라와 대등한 위세를 떨쳤다. 무령왕이 죽고 혜문왕이 즉위하면서 다시 어려운 국면에 처했다. 그러나, 인상여란 인물 때문에 나름 선방하고 있었다. 사마천의 <사기> 중 '염파인상여열전'에 의하면, 인상여는 조나라 사람으로 환자령(환관의 우두머리) 무현의 집사 출신이다. 쉽게 말해 미천한 출신임을 시사하고 있다.

 

'화씨벽'은 조나라에서 생산되는 옥덩어리이다. 진나라에서 15개 성읍과 화씨벽을 교환하자고 제의해 왔다. 혜문왕은 진나라가 화씨벽만 취하고 땅을 주지 않을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이 때 인상여가 나서서 진의 요청을 거절하면 이는 조의 허물이 됨을 지적하면서 자신이 직접 사자로 가서 완벽하게 일처리를 하겠다고 혜문왕을 안심시켰다.

 

인상여가 화씨벽을 들고 진나라로 입국하자 진나라의 소양왕은 크게 기뻐했다. 화씨벽을 전달받아 감탄을 연발하며 중신들과 돌려보며 구경하면서도 땅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에 인상여는 진나라의 속셈을 눈치채고 화씨벽에 미세한 흠이 있다며 돌려주면 그것을 알려주겠다고 거짓말을 하고 다시 돌려 받았다.

 

화씨벽은 천하에 둘도 없는 보물이므로 닷새 동안 목욕재계하고 '구빈지례九賓之禮'를 행해야만 화씨벽을 바치겠으며 이에 응하지 않으면 바로 부숴버리겠다고 인상여는 소양왕을 윽박질렀다. 워낙 탐나는 보물인지라 인상여의 전략이 먹혀 들었다. 소양왕이 이를 승락하자 숙소로 돌아온 인상여는 수행원을 변복시켜 화씨벽을 조나라로 가져 가도록 했다.

 

닷새가 지나자 인상여는 소양왕에 나아가 진나라는 이십여대 동안 약속을 지키는 군주가 없었음을 상기시키며 화씨벽을 다시 조나라로 돌려보냈으니 자신을 처벌하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러자, 소양왕은 화씨벽을 얻지 못할 바에야 공연히 나쁜 소문을 퍼뜨릴 이유가 없다면서 그를 빈객의 예로 대우하고 조나라로 돌려보냈다. 혜문왕은 그가 귀국하자 그를 상대부로 삼았다.

 

진나라의 소양왕은 화씨벽을 갖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인상여가 '완벽'의공을 세운지 4년이 흐른 후에 소양왕이 하남 땅 민지현에서 회합을 갖자며 조나라로 사신을 보내왔다. 조나라의 혜문왕은 진나라가 과거에도 회합을 미끼로 다른 나라의 왕들을 인질을 삼았던 사례를 거론하며 민지에서의 회합에 대하여 무척 겁을 냈다.

 

그러자 인상여가 왕을 직접 수행하겠다고 나섰다. 한편, 염파 장군은 인질의 경우에 대비하여 30일이 지나도 귀국하지 못하면 태자를 왕으로 옹립하겠다고 약조까지 받았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이 회합에서도 인상여의 기지와 강경한 태도 때문에 동등한 위치에서 조와 진 두 나라는 우호조약을 체결했다.

 

진나라 신하들; "오늘 군왕이 각별한 대접을 받았으니 이 자리를 축하하는 뜻에서 15개 성읍을 우리 진나라에 바치시요"

인상여; "조나라가 즉시 15개 성읍을 바칠 터이니 진나라도 조왕의 장수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함양성을 우리에게 내주시요"

 

민지에서의 회동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귀국하자 혜문왕은 인상여의 덕분으로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며 그의 공적을 치하하며 상경 벼슬을 내렸다. 조나라에서 제일 높은 벼슬이었다. 염파 장군은 일개 미천한 집사 출신인 인상여 밑에서 벼슬을 하려니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인상여를 만나면 욕을 보이겠다고 말했다.

 

인상여는 염 장군의 심정을 충분히 헤아리고 행동에 늘 신중했다. 외출했다가 염 장군의 수레가 보이면 재빨리 하인에게 골목으로 자신의 수레를 숨기라고 지시할 정도였다. 한번은 인상여의 하인들이 염 장군의 눈치를 너무 본다면서 창피해서 대감을 못 모시겠다고 항의를 했다. 그러자, 그는 두 마리의 호랑이가 다투면 진나라만 좋아할 일이라며 사사로운 원한보다는 나라가 더 소중하다고 말하자 하인들 모두 이에 탄복했다. 염파가  이말을 전해 듣고 웃통을 벗고서 가시덤불을 짊어진 채 인상여의 문 앞에서 사죄를 청했다. 두 사람은 '문경지교刎頸之交'를 맺고 진나라의 위협으로부터 조나라의 안녕을 보호했다 .

 

 

이 밖에도 백성을 먼저 생각한 초나라 양신良臣 손숙오, 공자를 감동시킨 정나라 현신賢臣 자산, 2인자의 모범이 된 제나라 정신貞臣 안영, 토사구팽을 피한 월나라 간신諫臣 범리, 통일의 기반을 닦은 진나라 능신能臣 상앙 등의 이야기도 실려 있다. 금세기 현재 글로벌 기업들의 총수는 현량과 모책을 앞세우고 있다. 갈수록 치열한 비즈니스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리가 있는 선택이다. 고사성어의 탄생 비화는 덤이다. 8인의 2인자 리더십은 현재에도 유용하다 하겠다. 나는 누구를 닮을까 곰곰히 생각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주식 말고 기업을 사라 - 투자의 신 워렌 버핏의 주주서한
워렌 버펫 지음, 로렌스 커닝햄 엮음, 이건 옮김 / 서울문화사 / 201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워렌 버핏에 관련된 책들이 그간 많이 출간되었다. 기존의 출간 도서와 달리 이 책은 조금 특별하다. 투자기법을 소개하는 내용이 아니라 워렌 버핏이 주주들에게 보내는 연차보고서의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이다. 이 편지 속에는 그의 투자 철학과 원칙 등이 담겨져 있다.

이 책은 기업의 지배구조, 기업금융과 투자, 보통주의 대안, 보통주, 기업인수합병, 회계와 평가, 회계정책과 세금 등 7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1979년부터 2000년까지 22년에 걸쳐 버크셔 해서웨이 연차보고서에 실렸던 주주서한이 주제별로 잘 정리되어 있다.

기업의 지배구조

경영진은 주주들의 자본은 관리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관리능력에 따라 그 자본은 증가 또는 감소되거나 심하면 모두 잠식되고 말 것이다. 훌륭한 경영진은 중요한 사안을 결정할 때 주주의 입장을 고려하고 나아가 주주의 이익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검토할 것이다.

버크셔 종속회사의 CEO들은 기업경영에 있어 단순한 세 가지만 지시를 받는다.

1. 자신이 유일한 주인인 것처럼 경영하라
2. 이 회사가 유일한 자산인 것처럼 경영하라
3. 앞으로 100년 동안 회사를 팔거나 합병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라
 
경영진의 성과는 수익성으로 측정해야 한다. 만약 스톡옵션을 제공한다면 이것도 기업의 실적이 아니라 개개인의 성과와 연계해야 한다. 탁월한 경영인이라면 성과에 대한 현금 보너스를 받아 이것으로 주식을 살 것이다. 버크셔는 경영진에 대한 보상으로 스톡옵션을 제공하지 않는다.

기업금융과 투자

가장 혁신적인 투자 아이디어는 개별 종목을 연구하는 것이 시간낭비라는 현대재무이론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주식시세표에 다트를 던져 투자종목을 선정하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이 이론에서의 핵심은 포트폴리오이다. 분산투자로 위험을 제거하자는 거인데,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격언이 대표격이다. 그러나, 이 이론이 주장하는 것처럼 시장은 결코 효율적이지 않다.

이에 반해, 버핏은 분산투자 대신 집중투자를 권한다. 왜냐하면, 시장주의자들이 신봉하는 '베타'는 불합리하기 때문이다. 어떤 주식은 시장보다 주가가 가파르게 하락하여 전보다 훨씬 싸졌는데도 베타 기준으로는 더 위험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애완용 돌이나 훌라후프 한 가자만 판매하는 회사가 더 위험한지 아니면 모노폴리나 바비인형 한 가지만 판매하는 회사가 더 위험한지를 베타로는 구별하지 못한다.

버핏은 베타를 연구하고 분산투자를 전략으로 채택할 것이 아니라 회사의 주인이 된다는 생각으로 투자해야 장기적 관점에서 투자에 성공할 거라고 강조한다. '이 꽃에서 저 꽃으로 날아 다니는'투자방식을 구사하면 수수료, 세금 등 거래비용이 제법 발생한다. 결론적으로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를 추종할 것이 아니라 마크 트웨인의 조언을 따라야 한다.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아서 잘 관리하라"
- 마크 트웨인의 <바보 윌슨>중에서

버핏은 1950년대에 컬럼비아 경영대학원 재학시절에 벤저민 그레이엄으로부터 투자기법을 배웠다. 그레이엄은 '미스터 마켓'이라는 독특한 인물을 내세워 '가격'과 '가치'에 대한 가르침을 주었다. 미스터 마켓은 매일 시장가격에 주식을 사거나 또는 팔고 싶어한다. 그는 변덕이 심해 조울증이 걸릴 정도로 끊이없이 환희와 절망 사이를 오간다. 그의 변덕이 심할수록 가격과 가치의 괴리가 더 커지므로 좋은 투자기회가 생긴다.

'안전마진'이라는 소중한 가르침도 주었다. 이에 따르면, 증권가격이 증권의 내재가치보다 훨씬 낮을 때에만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다. 버핏은 이런 강의를 수강한지 40년도 더 지났지만 여전히 이 기준을 신봉하고 있다. '가격'과 '가치'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가치자'라는 용어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가치투자'에 의하면, 가격이 상승하리라는 희망에 배팅하는 것은 투자가 아닌 투기에 불과하다.

보통주의 대안

1980년대에 투자등급보다 훨신 낮은 정크본드(쓰레기채권)에 투자하는 행위가 성행했다. 정크본드는 높은 이자율이 매력적이긴 하지만 부도의 위험이 매우 높은 채권이다. 정크본드를 신봉하는 타락천사들은 이 시장이 절대로 붕괴되지 않는다고 장담했다.

이들은 운전대에 칼이 솟아 있으면 운전자가 더 조심해서 차를 몰 것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그렇게 날카로운 칼이 놓여 있으면 운전자는 극도로 조심할 것이다. 그러나, 도처에 늘린 것이 움푹 파인 웅덩이라서 치명적인 사고의 발생확률이 높다 하겠다.
 
버핏은 이러한 '단검이론'을 이용하여 월스트리트와 정크본드 옹호자들의 논리에 강력하게 반박했다. 과도한 부채를 지고 회사를 경영하는 것은 운전대에 가슴을 향해 날카로운 칼을 꽂은 채 운전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는 '안전마진'만이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1990년대 초에 정크 신봉자들은 엄청난 손실을 보았다.

보통주

버핏이 생각하는 배당금 지급기준은 명확하다. 배당금 지급을 유보할 때 주식의 시장가치가 그 이상으로 상승하면 이익을 유보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배당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이익의 유보라는 행위는 그 금액 이상으로 이익을 벌어들일 때만 정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버핏은 주식분할도 주주의 이익을 해치는 행위라고 비판한다. 주식분할은 주식의 회전율이 높아져서 거래비용이 증가하고, 주가 등락에 집중하는 단기 투자자들을 주주로 끌어 들이지만 주주들에게 아무런 혜택이 없으므로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이다. 

기업인수합병

주식시장에서는 무수한 인수합병이 발생한다. 특히, 큰 금액의 프리미엄을 지급하며 이런 일들이 자행되고 있다. 그러나, 버핏은 기업을 통째로 인수하더라도 프리미엄을 지급할 이유가 거의 없다고 주장한다. 단지 독점적 성격을 가진 기업에 대해서만 예외적으로 프리미엄을 지불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린메일도 주식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나쁜 관행이다. 그린메일이란 경영권을 위협하는 주주의 주식을 회사가 프리미엄을 붙여 매수하는 행위이다. 모든 주주를 대상으로 자사주 매입이라면 주식의 가치를 높이겠지만 그린메일은 회사를 강탈하겠다는 저의가 담긴 못된 관행인 것이다.

회계

회계는 형식에 불과하다. 형식이기 때문에 조작될 수 있다. 그레이엄이 풍자적으로 예시한 회계의 속임수는 현재 미국 기업들이 흔히 사용하는 속임수와 크게 다르지 않다. 버핏은 재무제표가 첫째 기업의 가치가 대략 얼마나 되며, 둘째 미래의 부채를 감당할 능력은 얼마나 되며, 셋째 경영진이 회사를 얼마나 잘 운영하고 있는가를 알려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재무관련 보고서를 조작하려는 시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CFO는 새로운 회계기법을 만들어 내고 있을 것이다. 이에 반해 버핏은 GAAP가 요구하지 않는 일부 정보도 버크셔 주주들에게 정기적으로 제공하고 있다. 버핏은 회계정보가 투자자들에게 매우 유용한 것이지만 한계성이 있음을 지적한다.


버핏은 정치와 경제에 대한 예측을 계속 무시하겠다고 한다. 이런 예측들은 투자자의 마음을 흐트러뜨리는 값비싼 요물이기 때문이다. 지난 30년간 베트남 전쟁 확대, 두 번의 석유파동, 소련 해체, 다우지수의 508포인트 폭락 등 크고 굵직한 사건들이 넘쳤지만 이를 이전에 예측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놀랍게도 이런 거대한 사건들조차 벤저민 그레이엄의 투자원칙을 전혀 훼손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합리적인 가격에 인수한 좋은 기업은 이런 사건 속에서도 여전히 건전한 투자였던 것이다.

두려움이 변덕쟁이에게는 적이지만, 원칙주의자에게는 친구입니다 (358 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