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2 - 1차 십자군과 보에몽, 개정판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2
김태권 글.그림 / 비아북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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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5년 서유럽, 은자 피에로가 출현하여 이교도로부터 예루살렘을 탈환해야 한다고 외치고 다녔다. 이슬람과의 전쟁을 통해 우위를 확보하려는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피에르를 불러들인다. 교황청의 허수아비가 된 이후 군중십자군의 리더가 된 피에르와 주변 인물들은 무지와 편견에서 비롯된 가당치도 않은 전쟁을 벌인다. 이름하여 십자군 전쟁이다. 유럽은 피에르가 주도한 이 전쟁으로 어처구니 없는 학살이 자행되고,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학살자가 되는지를 1권에서 살펴 볼 수 있었다.

 



 

군중십자군이 휩쓸고 간 지도 어언 1년. 다시 평화를 찾은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밤마다 울려 퍼지는 소리가 있었다. 바로 은자 피에로의 콧소리였다. 얼마 후면 1차 십자군의 본대가 도착하므로 좋은 시절도 이게 마지막이라는 비아냥이었다. 이번 십자군은 서방의 강력한 세 명의 기사가 이끌고 있었다. 이들은 바로 로렌의 공작 고드프루아, 툴루즈의 백작 레몽, 그리고 보에몽이었다.

 

보에몽과 알렉시오스 황제 간에는 이런 일화가 있다. 1081년 보에몽의 아버지 로베르가 동로마 제국을 침공했다. 당시 동로마 최강의 장군이 젊은 시절의 알렉시오스였다. 열세로 어쩔 수 없이 꽁무니를 빼는 로베르의 뒤를 쫓던 알렉시오스 앞을 왠 낭자가 가로 막았다. 로베르의 젊은 새 부인 시켈가이타가 큰 목소리로 병사들에게 전투를 독려했다. 이후 아들 보에몽이 원군을 이끌고 오는 바람에 전세가 오히려 불리하게 뒤집어졌다. 동로마의 전열이 완전히 무너지고 퇴각하는 알렉시오스에게 보에몽이 칼 끝이 이마로 향했다. 가까스로 피했지만 이마에 부상을 입었던 것이다. 투르크 용병을 고용하여 제국을 지키던 알렉시오스에게 보에몽은 여간 부담이 아니었다.

 

1097년 1차 십자군이 도착하여 니케아를 점령하다

1097~1098년 안티오키아를 둘러싼 엎치락뒤치락 공방전

1098년 십자군 지휘관들의 갈등과 마라트안누만의 학살

1099~1104년 예루살렘 함락에서 하란 전투까지

 

1096년 12월, 십자군 지휘관 고드프루아가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 동로마에서 환영을 하지 않자  이들은 동로마 군대와 일전을 벌였다. 1차 십자군의 첫 번째 전투였다. 1097년 4월, 레몽도 동로마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아무도 환영하지 않자 약탈과 파괴를 일삼았다. 또한, 4월에 보에몽도 동로마에 얼굴을 비친다.

 

"사실 나는 옛날 당신의 적이자 원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나의 자유의지에 따라 폐하의 친구로 왔습니다"

 -보에몽/안나 콤니니의 <알렉시아스>중에서 (99쪽)

 

아버지 로베르가 죽자 새 어머니 시켈가이타가 권력을 차지하면서 찬밥 신세로 전락하여 빈둥거리던 보에몽이 십자군 모집 광고를 보고서 새로운 기회를 찾아서 동로마로 왔던 것이다. 동로마에 막대한 이익을 남길테니 십자군 원정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한다. 아울러, 알렉시오스 황제에게 충성 서약까지 했다.

 

동로마의 지원을 얻어낸 십자군은 보르포로스 해협 너머 무슬림 땅으로 진격했다. 투르크의 젊은 술탄 킬리치 아르슬란은 이들 십자군을 졸로 여겼다. 십자군은 수도 니케아를 단숨에 점령해버렸다.1097년 6월 19일의 일이다. 만삭인 아내에게 성을 맡기고 킬리치 아르슬란은 원정을 떠나고 없었다고 한다. 한편, 복수를 다짐하는 투르크 전사들은 도릴레온 협곡에서 매복하여 십자군이 지나가길 기다리고 있었다. 화살로 공격을 감행하였지만 용맹한 보에몽의 기병에 의해 투르크는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패배의 소식은 이슬람 세계로 퍼져 나갔다. 십자군은 다음 목적지 안티오키아로 향했다.

 

1097년 10월, 안티오키아 주민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십자군은 당황스러웠다. 레몽은 즉각 공격하자고 주장하나 보에몽의 결사적인 반대로 안티오키아를 포위하고 8개월이나 시간을 끌었다. 보에몽과 레몽의 대립각이 날카롭기만 했다. 보에몽이 안티오키아 스파이의 머리로 요리를 해먹었다는 소문이 나돌자 무슬림들은 공포에 떨게 되었다.

 

"보에몽 공작 진영의 주방에 잠입한 밀정들은 쇠꼬챙이에 꿰여

숯불 위에 돌아가고 있는 몇 구의 시신을 목격해야만 했다."

-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제 58장 중에서

 

마침내 보에몽의 속셈이 드러난다. 그는 육상과 해상의 교통 요충지인 안티오키아를 자신의 수중에 넣어 재기하겠다는 것이었다. 날이 밝자 보에몽이 비책을 얻었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 나가고, 이 소식을 들은 십자군 지휘관들은 궁금해서 모두 보에몽에게 찾아왔다. 그는 그들에게 안티오키아를 점령하면 자신에게 양도할 것과 더 이상 토를 달지 않겠다는 두 가지 약속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안티오키아의 내부 밀고자 피루즈의 협조로 성벽을 차지한 십자군은 안티오키아를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이다.

 

1098년 6월 3일부터 성안에서는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이틀 후 카르부카가 출현하자 십자군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무슬림들은 기사회생의 기쁨을 누렸다. 권력을 유지하려고 적을 이용한 카르부카는 안티오키아를 탐냈다. 아무튼 십자군은 투르크 군에게 포위당해 아사 직전이었다. 굶주림과 죽음의 공포 때문에 많은 십자군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군대 용어로 대규모 탈영이었다. 한편, 안티오키아 대성당에 은자 피에로와 나귀가 숨어 들었다. 수도사 한 명이 메시아의 창이 안티오키아에 묻혀 있다고 장담했다. 보에몽은 일꾼들을 데리고 여기저기 파헤쳐서 '롱기누스의 창'을 찾아냈다.

 

"기뻐하시오, 승리는 분명 그대들 것이니!" (177 쪽)

 

성창과 성배의 전설은 그리스 신화 만큼이나 중요한 주제어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될 때 어느 군인이 예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더니 피와 물이 흘러 나왔다. 요셉이 예수의 시체를 모셔다가 유대인 장례 풍습대로 향료를 바르고 고운 베로 감았다. 이 때 사용된 창이 바로 '성창'이고, 군인의 이름을 따 '롱기누스의 창'이라고도 한다. 영국의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들도 성창과 성배를 찾아 모험을 떠나기도 했으며, 히틀러도 성창의 신통력이 제3 제국의 승리를 가져다 준다고 믿었다고 한다.

 

피에르가 낡은 고철을 성창이라고 주장하자 십자군 사령관 아데마르 주교가 즉각 피에르에게 사기를 중단하라고 명하자, 이를 진짜라고 믿는 레몽 백작의 보증 때문에 더 이상 이를 문제 삼지 못했다. 1098년 6월 28일, 안티오키아 정문 앞 전투에 대해 십자군은 성창의 신통력 탓에 이룬 위대한 승리라고 기록하고 있다. 미심쩍은 이 전투에 대해 무슬림 측은 카르부카의 독재가 싫어 그를 배반하면서 발생한 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보에몽이 안티오키아를 차지하려 하자, 레몽이 태클을 건다. 카르부카의 포위망을 뚫은 것은 성창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잘난 척하던 피에르에게 아데마르 주교가 1098년 8월 1일에 공개 토론회를 하자고 제안했다. 궁지에 몰린 피에르는 고민에 빠진다. 그런데, 그에게 또 다시 기적이 일어났다. 7월, 안티오키아에 심각한 전염병이 돌아 아데마르 주교가 죽고 만 것이다.

 

모두 애도하는 가운데 기고만장한 피에르는 성창을 믿지 않은 아데마르가 벌을 받아 지옥으로 갔다고 비난성 망언을 서슴치 않았다. 이에 십자군들이 피에르의 말에 격분하여 여론이 들끓자 피에르는 다시 궁지에 몰리는 신세가 되었다. 성창을 믿는 레몽의 중재로 신명 재판을 하기로 했다. 불의 심판을 받게 된 피에르는 결국 화상 때문에 죽고 말았다. 피에르가 죽자 레몽도 타격을 입고, 마침내 안티오키아는 보에몽의 수중에 들어갔다.

 

한편, 십자군 지휘관들의 내분과 식량 부족으로 병사들의 사기가 바닥에 떨어졌다. 약한 적과 싸워서 승리하여 사기를 올리려는 대책이 마련되어 십자군은 작은 도시 마라트안누만을 공격했다. 격렬한 저항이 있었지만 결국 주민들은 항복했다. 이후 만여 명의 무슬림들이 잔혹하게 학살되었다. 다음의 행선지는 예루살렘이다. 보에몽은 안티오키아에 눌러 앉았다.

 

"마라트안누만에서 우리 십자군은 이교도 어른들을 커다란 솥에 넣어 삶았다.

또 아이들은 꼬챙이에 꿰어 불에 구웠다"

-십자군 병사 라울 드 카엥의 연대기 (231 쪽)

 

1099년 6월 15일, 십자군은 보에몽의 예상과 달리 예루살렘 점령에 성공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엄청난 약탈과 살육을 자행했다. 피로 얼룩진 참상에 사람들은 경악했다. 보에몽도 충격을 받았다. 보에몽에게 교황의 특사로 새로이 다임베르트 주교가 파견되었다. 둘은 궁합이 잘 맞았다. 보에몽은 안티오키아에서 여론을 조성하고, 다임베르트는 예루살렘에 잠입하여 공작을 꾸미기로 둘은 손발이 척척 맞았다.

 

1100년의 성탄 전야, 다임베르트가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그는 고드프루아 공작에게 왜 예루살렘을 통치하느냐고 따지듯 물었다. 이후 노골적으로 통치권을 자신에게 넘기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고드프루아 공작이 갑자기 사망했다. 한편, 빨리 예루살렘으로 오라는 다임베르트의 전갈이 레몽 백작때문에 전해지지 않고 보에몽은 평소대로 무슬림 마을로 노략질 나섰다가 오히려 체포되고 만다. 고드프루아의 동생 보두앵 백작이 통치권을 넘겨 받는다.

 

1101년의 십자군이 보에몽을 구출하러 오자 투르크의 칼리치 아르슬란의 기병대에 의해 전멸하고 만다. 그래도 여전히 보에몽은 자신의 조카 탕크레드가 구하러 온다고 믿었다. 그러나, 탕크레드는 안티오키아에 군침을 흘리고 오히려 석방이 안되도록 방해 공작을 벌이고 있었다. 수감생활에서 풀려난 보에몽은 일대의 복수전을 준비한다. 

 

1104년 하란 전투가 시작되었다. 무슬림 연합군은 후퇴하는 척하며 프랑크 군을 유인했다. 이후 곧장 에워싸고 섬멸하는 작전을 펼쳤다. 동로마 제국에 보에몽이 죽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보에몽의 시신이 동로마 제국에 들어섰다. 송장 냄새를 풍기던 관에서 보에몽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1106년, 대단한 인기를 누리던 보에몽은 프랑스의 부마가 되었다. 다시 한 번 동로마 원정의 길에 나서는 보에몽의 소식에 콘스탄티노플은 발칵 뒤집어졌다. 과거에 아버지와 함께 공격했던 두라초가 공격 목표였다. 이 전쟁이 어떻게 전개될지 3권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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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1 - 군중십자군과 은자 피에르, 개정판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1
김태권 글.그림 / 비아북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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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테러로 미국 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자,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악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했다. 11세기 말 십자군은 '이슬람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900여 년의 시차를 두고 발발한 두 전쟁은 묘하게도 닮았다. 중세 유럽과 이슬람의 역사를 바로 보자는 의도에서 이 만화가 출간되었다.








옛날, 서쪽 사람들은 따뜻한 지중해 연안에 모여 살았다. 아프리카 북부의 카르타고, 이태리 반도의 로마, 헬레니즘 문화를 꽃피운 그리스 등은 모두 강대국으로 이름을 떨쳤다. 같은 하늘에 태양이 둘이 없는 법이다. 카르타고와 로마는 같은 시대에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서 싸움을 벌인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포에니 전쟁이다. 기원전 264년부터 기원전 146년까지 3차례의 격돌을 벌렸다.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의 공격에 로마가 패망 직전에 내몰리기도 했지만 결국 로마가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 사회에는 커다란 변화를 맞게된다. 로마인들은 근처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먹고 살았는데, 지중해 연안을 장악하자 값싼 농산물들이 배로 운송되어 로마 본토로 몰려 들었던 것이다. 1년 내내 바겐세일이었다. 그래서, 농민층이 몰락하고 말았다. 당초 로마인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기에 이 현상은 로마의 위기였다. 로마 정치가들은 지혜를 짜냈다.



귀족들이 불법 취득한 토지를 빈자들에게 나눠 주자고 개혁을 제안한 그락쿠스 형제들이 귀족들에게 살해되고 이 모든 혼란이 전쟁 때문이므로 전쟁으로 해결하자는 논리에 휩싸여 로마는 끝나지 않는 전쟁의 늪에 빠져 들었다. 기원전 137년부터 기원전 71년까지 3차례의 노예전쟁이 이를 대변한다. 특히, 3차 노예전쟁에서 검투사 스파르타쿠스가 등장하여 한때 로마 정규군이 궁지에 몰리기도 했다. 전쟁의 천재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점령한 다음 군사독재 체제가 수립되었다. 군사독재자가 바로 로마 황제이고 이때가 로마 제국의 전성기였다.



달도 차면 기운다고 했다. 힘에 의존하던 로마도 시간이 갈수록 점점 그 힘이 약해졌다. 더 이상 게르만족의 이동을 감당할 재간이 없자 결국 동과 서로 제국을 나누고 서기 330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콘스탄티노플에 새로운 수도를 만들었다. 395년부터 동과 서는 아예 남남이 되어버렸다. 동로마 황제는 아르카디우스가, 서로마는 동생 호노리우스가 책임지게 되었다.



"야만인들의 침략이 성공했던 것은

제국 내부에서 소수의 부자들과 유력자들이 하층민들을 점점 더 압박했던

사회구조 때문이었다.

로마인들 사이에서 불공평과 잔악성을 당하고 사느니

차라리 낯선 관습을 가진 야만인과 함께 사는 것을 택하였다"

-자크 르 고프 (33 쪽)



한편, 사회 내부의 불만과 갈등이 증폭되자 로마의 하층민들은 오랫 동안 자신들을 괴롭혔던 로마 귀족보다 차라리 게르만족을 맞아들이기를 원했다. 하층민과 죽이 맞은 게르만족 침입자들은 쉽게 로마 영토로 이동할 수 있었다. 그들은 여기서 약탈과 파괴를 저질렀다. 서기 476년, 서로마 제국은 결국 멸망하고 만다. 이제 제국은 해체되었다.



로마 제국의 붕괴 후, 지중해의 세계는 게르만족 계열의 앵글로족, 색슨족, 프랑크족, 서고트족에 의해 고만고만한 나라들과 콘스탄티노플의 동로마 제국 그리고 유목민에 의한 아라비아 등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7세기에 이슬람 문명이 탄생하면서 이 모든 상황이 크게 변하고 만다. 신에 순종해야 한다는 마호메트의 설교를 듣고 많은 아랍인들이 무슬림이 되었다. 메카에 거주하던 세력들이 처음엔 이슬람교를 박해했지만, 무슬림의 세력이 점점 커지자 박해자들도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아라비아 반도가 짧은 시간에 이슬람화되었던 것이다. 모하메트 사후에는 칼리파들에 의해 이슬람 세계는 더욱 확장되었다.



"'이슬람'이란 말은 본디 순종한다는 뜻이래요"

"무슬림이란 '복종하는 사람'이란 뜻이래요!" (37 쪽)



정복자 아랍인들의 동기는 너무도 세속적이었다. 그들은 돈이 필요했다. 정복지에서 세금을 받고 싶어서 정복을 감행했던 것이다. 세금만 내면 믿던 종교를 그대로 믿어도 괜찮았다. 로마에 정복당했던 그 땅의 주민들은 동로마 제국에서 거두던 세금보다 싸므로 부담이 없었다. 심지어 이슬람교로 개종하면 세금이 아예 면제였다. 그러자, 웃기는 촌극이 발생한다. 아랍인들은 세수가 격감하자 할인 혜택의 폐지를 검토한 것이다.



"아랍인들은 개종을 강요하지도 않았고 세금도 더 적게 거두었기에

피정복지 주민들은 종종 옛 지배자보다 새로운 지배자를 더 환영하곤 했다"

- E.M.번즈 (43 쪽)



결국 이슬람의 세계는 급격한 확장이 가능하여 지금의 중동은 물론 북아프리카로부터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인도, 에스파니아 등 유럽까지 점령했던 것이다. 이는 이슬람이 칼에 의한 정복이 아니라 여러 나라의 사상과 문화를 수용코자하는 융화와 관용성의 자세를 취한 탓이다. 이슬람의 확장에도 제동이 걸린다. 동로마 제국의 레온 황제가 아랍의 수군을 격퇴한 것이다. 서기 717~718년에 걸친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서 이슬람이 저지되면서 지중해의 세계는 서유럽, 이슬람, 동로마의 셋으로 나뉘어 발전하였다. 동로마가 이슬람 견제에 힘쓰는 동안 서유럽은 프랑크 왕국에 의해 새로운 문명이 태동하고 서기 800년 카를로스는 황제에 올라 서로마 제국의 부활을 선포한다. 그러나, 카를로스가 죽자 서유럽은 다시 군웅할거의 난세에 빠진다.



유럽의 전형적인 귀족은 이웃과 전쟁을 벌이거나, 자신을 지킬 힘조차 없는 약자들을 노략질하는 일에 주력했다. 또한, 기사들도 보호를 명분으로 농민들로부터 빵을 뜯었다. 기사와 농민 사이에 갈등의 골은 깊어지고, 서유럽 사회는 귀족과 하층민의 대립도 극에 달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교회가 이를 중재하면서 기도하는 사람, 싸우는 사람, 일하는 사람의 삼위계의 질서가 잡혔다.



한편, 교회는 강력한 평화운동을 전개하였다. 사실상 기사집단은 오랫동안 혼란과 폭력이라는 부정적 요인이었다. 하지만 이 운동은 기사들의 반발로 이내 난관에 봉착하고 만다. 전사들의 야성을 길들이려고 노력하던 서유럽 교회는 이를 무마하기 위해 기사들이 서유럽 세계 밖에서 싸우도록 만들었다.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간의 적대 관계를 조장한 셈이다. 서유럽도 처음엔 이슬람의 세계를 존중했다. 따라서, 누군가 주장하는 문명의 충돌이라는 얘기는 허무맹랑한 소리이다.



"신의 적들인 이교도에 대항하여 무기를 드는 것은 허용할 만한 일일 뿐만 아니라, 참으로 경건한 일로 생각되었다"

- 조르주 뒤비 (59 쪽)



1095년 서유럽, 당나귀를 탄 노인이 꿈 얘기를 하면서 돌아다녔다. 이 노인이 바로 은자 피에르다. 피에르는 바로 베드로의 프랑스식 발음이다. 그 노인은 '지난 꿈에 또 베드로 성인을 뵈었습니다'라고 말문을 열였다. 얘기의 골자는 이슬람의 손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해방시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무슬림의 수중에 들어간지 400년이 넘었던 성지였다. 이는 전쟁을 하자는 말과 같다.



은자 피에르는 잘나가던 지식인이었다. 내로라는 명문 귀족의 가정 교사로 초빙되고, 고위 정치인의 밀사 업무를 수행하는 등 성공적인 인생을 누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예루살렘에 순례 여행을 갔다가 꿈에 성인을 본 후 그의 인생이 바뀌고 말았다. 정말로 베드로 성인이 꿈에 나타나 성지 탈환을 위한 전쟁을 명했을까? 아무튼 광신도의 꿈을 확인할 방법은 전혀 없다. 여행에서 유럽으로 돌아온 그는 이곳저곳을 떠돌며 낮에는 전쟁을 호소하고, 밤에는 노숙하는 생활을 하였다. 그의 기행은 이미 유럽의 명물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를 주시하고 있는 인물이 있었다. 서방의 실력자인 교황 우르바누스 2세와 그의 측근들이었다. 교황청은 그를 데려가 예루살렘의 침공을 위한 여론 몰이로 이용했다. 마침내 우르바누스 2세는 여론을 못이기는 척하면서 이슬람 세계로의 원정을 선언했다. 또한, 전쟁에 참여하는 사람은 모든 죄가 사면된다고 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자원하였던 것이다. 그 가운데에는 서방의 명성있는 기사들도 있었다. 한편, 모인 사람들의 의복에 십자가를 새기도록 하면서 이들은 십자군으로 불리게 되었다.



1095년 11월 교황 우르바누스 2세, 십자군 원정을 발표하다

1096년 5~6월 유럽 각지에서 군중십자군이 일어나 유대인 학살을 자행

1096년 8월 은자 피에르가 이끄는 군중십자군이 동로마 제국을 거쳐 바다를 건넘

1096년 10월 술탄 킬리치 아르슬란의 반격으로 군중십자군이 니케아 근교에서 전멸



1096년 봄, 공식 일정이 가을로 잡혔지만 은자 피에르와 가난한 사람들끼리 먼저 전쟁의 길로 출발했다. 일부 귀족들은 기마대를 이끌고 군중을 따라갔다. 모험심을 즐기는 기사들도 대열에 참여했다. 이런 식으로 흥분한 군중들의 행렬이 유럽을 가로질러 갔다. 그런데, 이들은 엉뚱한 방향인 독일로 갔다. 십자군은 독일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이후 헝가리 농촌 마을을 지나면서 식량을 확보하려고 약탈과 학살이 자행되었다. 분노한 헝가리 왕은 기병대를 보내어 십자군에게 화살을 퍼부어 보복했다. 전력이 반으로 줄고 말았다. 도나우 강 유역에서 주민 4천 명을 학살하고, 강 건너 텅 빈 베오그라드에 도착하여 모조리 약탈하고 니시로 향했다. 니시는 베오그라드 주민들이 피난간 곳이었다. 동로마의 자랑인 기병대에 의해 십자군은 막대한 사상자를 내고 도망치고 말았다.



1096년 8월, 은자 피에르와 생존자들이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 앞에 집결했다. 동로마는 골치아픈 십자군을 배에 태워 투르크 땅에 무단 투기하기로 결정한다. 십자군이 유럽과 아시아를 나누는 보스포로스 해협을 건너 니케아 근교를 쑥대밭으로 만들며 니케아로 진입했다. 투르크의 킬리치 아르슬란은 그들의 만행을 목격하고선 기병을 출정시켰지만 십자군의 수에 밀려 고전한다.



1096년 10월, 약탈로 수많은 전리품을 취하자 강경파 기사들이 은자 피에르를 왕따시키고 군중들을 대부분 흡수하여 크세리고르돈 요새로 향했다. 이곳에는 술과 고기, 곡물 등 온갖 물품이 풍족했다. 십자군들은 술에 취해 승리를 자축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목마른 기사들이 샘으로 물마시러 갔다가 무장한 투르크인들에 의해 가는 길이 봉쇄되었다. 봉쇄는 8일이나 지속되었다. 물없이 오래 버틸 재간이 없다. 프랑크 원정대의 우두머리인 기사 라이날드가 투르크에 투항했다. 10월 21일, 대부분의 십자군들이 투르크의 매복에 걸려들어 끔찍한 최후를 당하고 말았다. 은자 피에로는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의 구원군에 의해 목숨을 건진다.



군중십자군이 전멸하자 알렉시오스는 불리해졌다. 그들의 패배는 분명 황제가 배신한 탓이라는 것이다. 알렉시오스의 개혁정책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은자 피에르를 꼬드겨 동로마 제국의 정권 교체를 계획한다. 전쟁을 좋아하는 새로운 지도자를 황제로 추대하자는 의도였다. 이제 본격적인 1차 십자군 본대가 도착하게 된다. 기사들로 구성되었고, 이 중엔 보에몽 공작도 포함되어 있다. 2권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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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의 첫번째 컴퓨터 + 인터넷 책 - 윈도우 7
양재봉 지음 / 한빛미디어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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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컴퓨터는 매우 편리하고 유용한 도구이다. 그래서 요즈음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컴퓨터를 접하고 작동하는 법도 일찍 배우게 된다. 반면 어르신들은 이 문명의 이기利器를 새로이 접했기 때문에 컴퓨터 앞에 앉기만 해도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아파오는 증세가 나타난다. 왜냐하면, 작동법이 서툴고 혹시 잘못 만져 고장날까 조바심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어르신을 위한 컴퓨터 학습서로서 컴퓨터가 우리 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는 존재임을 알도록 쉽게 가르쳐 준다. 그냥 편안한 마음으로 책에서 지시하는대로 따라하면 된다. 하다보면 왜 진작 컴퓨터와 친해지지 못했을까?라는 생각이 이내 들게 된다. TV 드라마에 나온 '야동 순재'를 따라하려고 컴퓨터를 배우는 어르신이 많이 늘었다는 우스개소리도 있었다. 굳이 야동이 아니더라도 생활에 필요한 상식과 정보 등 유익한 콘텐츠가 컴퓨터 속에 풍부하므로 쉽게 어르신의 친구가 될 것 같다.



컴퓨터를 켜고 끄는 방법, 마우스를 다루는 방법, 키보드를 사용하는 방법 등의 초보 과정에서부터 사진 또는 동영상 보기, 문서 출력하기 등의 중급 과정뿐만 아니라 인터넷 서핑, 이메일 보내는 방법, 인터넷 지도로 길을 찾는 법, 인터넷 뱅킹 등의 고급 과정에 이르기까지 학습에 유익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아울러, 메신저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가족과 문자로 대화를 하거나 화상 채팅을 하는 법 그리고 심심할 때 즐길 수 있는 컴퓨터 게임 등도 소개되어 있다.



컴퓨터는 모니터, 키보드, 마우스, 그리고 본체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인쇄를 하는 장치인 프린터와 소리를 들려주는 외장 스피커도 있다. 내부의 주요 부품으로는 CPU, 마더보드, 메모리, 하드디스크, 시디롬 드라이브 등이 있다. 전기 기계는 전원을 공급해야 작동을 하듯이 컴퓨터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먼저 모니터의 전원 버튼을 눌러서 켜고 본체의 전원을 켜면 모니터 화면에 글자 또는 그림이 나타난다. 이 과정을 '부팅'이라고 한다. 약간의 시간이 걸리므로 조금 기다려야 한다.









종료시에는 모니터 화면 왼쪽 하단의 윈도우 로고 위에 화살표를 올리고 마우스 왼쪽을 누르면 메뉴판과 비슷한 화면이 나타난다. 메뉴판 오른쪽 아래에 있는 '시스템종료'를 마우스 왼쪽 단추로 눌러서 끈다. 컴퓨터를 끌 때 절대로 전원 단추를 누르거나 전원 코드를 뽑는 식의 방법은 금물이다. 왜냐하면, 컴퓨터가 망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매일 사용하는 자신의 컴퓨터를 치장하는 방법을 알아보자. 윈도우 바탕화면을 자신이 좋아하는 사진이나 그림으로 바꿀 수 있다. 나도 이를 배워서 노트북 바탕화면에 내가 좋아하는 야생화 사진으로 바꾸었다. 바탕화면에서 마우스 오른쪽 단추를 클릭하면 메뉴판이 나타난다. 메뉴에서 [개인 설정]을 선택한다. 컴퓨터의 시각 효과및 소리 변경 창이 나타난다. 아래쪽에 있는 [바탕 화면 배경]아이콘을 클릭한다.



바탕 화면 배경 선택 창이 나타난다. 배경화면으로 지정할 사진을 불러오기 위해 '사진 위치'메뉴의 <찾아보기>단추를 클릭한다. 폴더 찾아보기 창이 나타나면 [사진]폴더를 클릭하고 <확인>단추를 클릭한다. [사진]폴더에 있는 모든 사진들이 선택된 상태이다. 원하는 사진만 선택하려면 <모두지우기>단추를 클릭한 후 원하는 사진만 클릭하고 <변경 내용 저장>단추를 클릭한다. 다시 컴퓨터의 시각 효과 및 소리 변경 창이 나타난다. 맨 위쪽에 있는 [X]단추를 클릭하면 창이 닫히고, 변경된 바탕화면이 나타난다. 멋진 바탕화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취미생활도 할 수 있다. 영화를 극장에서 대형 스크린에서 감상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자신의 컴퓨터에서 DVD로 감상하는 것도 별미이다. 또한, 인터넷을 통해 영화 파일을 다운로드받아 저렴하게 즐길 수도 있다. 윈도우 7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비디오 파일을 실행하는 방법을 살펴보자.



탐색기를 실행한 후 [라이브러리]-[비디오]-[비디오 샘플]폴더로 이동한다. '야생'이라는 샘플 비디오 파일이 있다. 이를 더블 클릭한다. 비디오 파일 재생 프로그램이 실행되면서 동영상이 재생된다. 멋진 동물의 모습들이 담긴 영상이다. 비디오 파일은 큰 화면으로 보는 것이 좋다. 오른쪽 아래에 있는 전체화면 보기 아이콘을 클릭한다. 한편. DVD를 컴퓨터에 넣으면 자동 실행 창이 나타난다. [DVD 동영상 재생]을 클릭한다. DVD타이틀이 재생되면 메뉴에서 [영화보기]를 클릭한다.









이 책은 컴퓨터를 처음 접하거나 이미 접했더라도 활용법을 잘 몰라서 주위 사람들에게 묻기가 창피해 그동안 제대로 이용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위해서 쓰여졌다. 마치 컴퓨터 가정교사를 만난 기분이 든다. 따라하기를 하다보면 컴퓨터에 대한 지식이 늘고 활용하는 방법도 쉽게 배우게 되어 자신도 모르게 실력이 부쩍 늘어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만나게 될 것이다. 특히, 386세대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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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지금 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하는 5가지 습관
아타라시 마사미 지음, 이은희 옮김 / 이너북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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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행복한 인생을 향유하고 싶은 바람을 가지고 있다. 단 한번 뿐인 인생은 스스로 책임져야 할 것이다. 소위 '333 공식'이라는 것이 있다. 자신이 취업을 위해 노동시장에 나가서 3개월 안에, 현재 연봉보다 30% 인상된 조건으로, 3개사로부터 콜을 받는다면 상품성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이런 사람은 1%도 채 안된다.

 

내 자신의 몸값을 높이기 위해서는 좋은 습관을 길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신이 인간에게 평등하게 부여한 것은 죽음과 시간이라고 한다. 돈 많고 실력있는 사람의 하루도 마찬가지로 24시간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시간의 활용은 자신의 습관에 의해 좌우된다. 이 소중한 24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개개인의 몫이다. 

 

"습관은 나무 껍질에 새겨놓은 문자 같아서

그 나무가 자라남에 따라 확대된다"

- 새뮤얼 스마일스

 

이 책의 저자 아타라시 마사미는 32살에 '45살 이전에 기업의 대표가 되자'라는 목표를 세운 뒤, 세부 계획을 수립 이를 차근차근 실천하여 42살에 존슨 앤 존슨 상무로 경력 입사하고 45살에 목표대로 이 회사 사장에 취임한 인물이다. 이 책의 핵심은 좋은 습관 5가지를 실천하여 좋은 결과를 만들자는 것이다.

 

습관 1 살아있는 목표를 세워라

습관 2 이기는 습관을 들여라

습관 3 장점과 친해져라

습관 4 기본을 연마하라

습관 5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라

 

아이작 뉴턴이 사과가 떨어지는 장면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는 평소 문제의식을 갖고 이를 꾸준히 관찰한 결과이다. 문제의식이 결여되었다면 이는 매너리즘에 빠졌기 때문이다. 문제의식을 향상시키려면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냉철함, 신중한 분석태도, 자기 나름의 판단기준, 유연한 사고방식 등의 습관을 길들이도록 훈련하면 된다. 

 

"탈피하지 못하는 뱀은 죽는다"

- 니체

 

사고력의 배양을 위해서 학습하는 습관을 만들어야 한다. 가장 손쉬운 방법이 독서이다. 건강한 몸을 위해 우리는 밥을 먹는다. 독서는 건강한 정신을 위해 지식을 먹는 것이다. 편식이 건강을 해치듯이 다양한 분야의 독서가 이로운 법이다. 몸으로 배우는 교육은 훨씬 효과적이다. 예를 들어, 저자 강연회 또는 주제 토론 세미나 등에 참석한다면 지식이 더욱 설득력있게 다가올 것이다.

 

일일불독서日日不讀書 구중생형극口中生荊棘,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 

- 안중근

 

아무리 식견이 풍부해도 실천력이 중요하다. 노자의 도덕경에 '천리지행시어족하千里之行始於足下'란 구절이 있다.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의미이다. 자신이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목표를 미리 정하고 단계를 밟아 차근차근 나아가는 것이 올바른 자세이다. 이 때 목표는 현실적이어야 하고 숫자로 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정해진 목표는 메모해라. 

 

어느 조사에 따르면 이직 경험자 중 14%만이 '이직하기를 잘했다'고 응답했다. 굳이 이직을 원한다면 지위, 수입, 그리고 회사의 수준 등이 향상되는 발전적인 이직을 해야 한다. 기업가 정신을 확립하여 남보다 항상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 이기는 습관이다. 신발 세일즈맨 2명이 아프리카 오지로 출장을 떠났다. 한 명은 '현지인은 모두 맨발이므로 신발을 팔 가능성이 전혀 없다. 그냥 다음 비행기 편으로 돌아가겠다'는 반응이었고, 다른 한 명은 '신발을 팔 가능성이 무한대이므로 빨리 신발 5만 켤레를 보내라. 현지인 모두 맨발이다'라고 본사로 연락했다. 여기서 신발을 보내달라는 사람은 기업가 정신이 투철한 사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방이 자신을 얼마나 중요한 존재로 인식하는지 알고 싶어 한다. 집안이 가난해 교육을 못 받은 식료품 점원이 있었다. 그는 근무 중 주인의 눈치를 보며 몰래 법률 책으로 틈틈이 공부를 했다. 그가 바로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이다. 그는 자아실현을 위해 열심히 노력했던 것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매슬로우 박사는 이를 인간의 욕구 5단계 중 가장 높은 단계인 '자아실현의 욕구'라고 설명했다.

 

중국 고대 역사서 '정관정요'에는 군주를 칭찬하려면 '60은 듣기 좋은 말을 하고, 나머지 40은 듣기 싫은 말을 하라'고 언급했다.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개성이 강한 상사를 만나기도 한다. 이럴 경우 거북한 상사를 바꾸려고 애쓰지 말고 먼저 자신이 상대를 좋아하는 것이 요구된다. 미국의 정신교육학자 브로드벤트 박사도 상대에게 사랑받으려면 먼저 자신이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자동차 세일즈에 뛰어들어 첫해에 20대, 다음 해에 70대를 팔더니 이젠 한 해에 300대를 판매하는 베테랑 세일즈맨이 있다. 처음 세일즈를 시작할 때 매일 카탈로그와 명함을 들고 오전 20군데, 오후 30군데를 방문하며 다녔다고 한다. 그는 50장을 전부 뿌릴 때까지 결코 영업소로 퇴근하지 않는다는 기본을 지켰다. 이것이 그의 성공적인 영업비결이다. 

 

즐겁고 기쁜 상태에서 업무를 하면 능률이 올라간다. 반면에 미간을 찌푸려가며 심각하게 업무에 매달리면 능률이 오를리 없다. 그런데, 기분좋게 일하려해도 이런 기분이 들지 않을 때가 많다. 즐겁게 일하고 즐겁게 배우려면 스스로 여유로운 마음자세를 가지며, 긴장을 풀고, 회사업무 외의 자기 시간을 철저히 지켜야 할 것이다. 

 

인생을 살다보면 재난과 행운이 몇 번씩 찾아오게 마련이다. 이를 받아들이는 자세는 자신의 마음가짐과 능력에 따라 달라진다. 행운은 노력하는 사람을 좋아하며 준비된 사람에게 찾아오는 법이다. 따라서, 행운이 자신에게 오도록 하려면 끊임없이 노력하는 긍정적인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운을 내 편으로 만들고, 운이 왔을 때는 용기를 갖고 이를 붙잡아라.

 

인생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장거리 마라톤이다. 좋은 습관을 기르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는 배우 바람직하다. 더욱 바람직한 것은 지금 바로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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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같이 좋은 선물 - 부산 소년의 집 오케스트라 이야기
박 불케리아 지음, 윤진호 정리 / 예담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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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 박 볼케리아는 1972년 마리아수녀회에 입회하여 40년 가까이 부산 소년의 집 아이들을 돌보는 엄마 수녀이다. 또한, 1984년부터 지금까지 부산 소년의 집 오케스트라인 '알로이시오 관현악단'을 맡고 있다. 2011년부터는 소년의 집 모든 출신들의 관리와 지원을 담당하고 있다. 한편, 저자의 구술을 원고로 정리한 윤진호 씨는 '말아톤', '마이 파더' 등의 시나리오를 쓴 작가이다. 현재 부산 소년의 집 오케스트라 이야기를 영화화하려고 준비 중에 있다.

 



 

10살에 어머니 손에 이끌려 영세를 받고 동네 친구들과 성당에서 성가대 활동을 했는데, 회비를 매월 꼬박 꼬박 거두자 돈에 부담을 느껴 성당에 발길을 끊고 있었다. 1960년대 촌동네에 살고있는 집안 형편으론 눈치가 보여서다. 태어나 고향인 경남 거창을 떠난 적이 없었던 저자는 22살에 경북 상주에 소재하는 '대한생사조선견직'에 취직했다. 이후 다니던 성당 사무실에 비치된 잡지에서 '가난한 아이들에게 봉사하는 수녀회'라는 문구와 함께 '마리아수녀회'의 회원을 모집한다는 내용에 마음이 끌렸다.

 

1971년 여름 3일간의 휴가를 얻어 수녀회가 있는 부산 송도를 찾았다. 입회를 원한다면 면접후 한 달간 함께 생활을 해야한다고 했다. 다시 상주로 돌아가서 준비하여 한 달 뒤 정식면접을 신청했다. 여전히 면접대기자가 많았다. 최종 소 알로이시오 신부님과 대면했다. 합격이었다. 6개월 진행된 면접에서 최종 12 명이 선택되었다. 직장을 사직하고 입회 허락을 받았다.

 

"이제 집에 가자......" (28 쪽)

 

부모님의 동의는 어려웠다. 결국 부모님 허락없이 수녀원에 입소했다. 한 달째 첫 면회에 아버지가 찾아 오셨다. 아버지는 집으로 가자고 말했지만 안된다고 부인하자 그냥 면회실을 떠났다. 지원기 1년, 청원기 1년, 수련기 2년을 거쳐야 정식 수녀가 된다. 입회하고 한달 쯤 지나자, 원장 수녀님이 아이를 돌보는 지원자를 찾았다. 손을 들어 자원했다. 거리에서 자란 아이들이라 다루기가 쉽지 않았다. 자기들만 사용하는 은어도 이해가 어려웠고 심지어 툭하면 이탈하곤 했다.

 

처음엔 미사 반주를 위해 합주부가 만들어졌다. 당장 아이들의 악기 지도를 맡을 사람이 필요했다. 이 때부터 안유경 선생님을 모셨다. 그녀는 당시 부산 시향의 바이올리니스트였다. 1979년 3월 미사 시간에 처음으로 현악기가 등장했다. 아직은 서툰 솜씨였지만 바이올린부터 베이스까지 현악기의 선율이 미사 시간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초기엔 중학생 중심의 현악합주단의 형태였다. 1996년 관악기를 포함하는 정식 관현악단이 되었다. 합주부는 미사 반주가 주목적이었기에 레슨도 주 1회 정도였다. 그런데도 합주부는 창단 2년 만인 1981년 전국학생음악경연대회에서 현악부 우수상을 받고, 개천예술제에서도 현악합주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하는 등 두각을 나타냈다.

 

1984년 초, 전임 수녀님이 필리핀으로 소임처가 발령나면서 얼떨결에 저자가 합주부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미 340 명의 아이들을 맡고 있었기에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1988년~1990년까지 내리 3년간 부산복지시설 음악 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자 이 대회가 없어지는 해프닝도 생겼다. 다른 팀들이 들러리만 선다고 불만을 표출했기 때문이다. 합주부의 변신이 요구되었다.

 

이쯤되니까, 베네수엘라의 '엘 시스테마'가 생각났다. 1975년, 총소리만 난무했던 어느 허름한 차고에 전과 5범 소년을 포함한 11명의 아이들이 모였다. 이들은 총 대신 악기를 손에 들고, 난생 처음 음악을 연주했다. 이 음악교실은 이후 베네수엘라 전역으로 퍼져나가면서 11명이었던 회원이 무려 30만 명에 이르렀다. 마약과 폭력으로 물들었던 거리의 아이들에게 새로운 오늘을 선물한 이 프로젝트의 이름이 바로 '엘 시스테마'였다. 국내에서 영화도 상영되었고, 금년 3월엔 예술의 전당에서 내한 공연도 했다.

 



 
1991년 자선연주회를 시작했다. 부산 소년의 집의 정신적 지주격인 소 신부님이 루게릭 병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신부님이 수녀회에 실내수영장 건축이라는 숙제를 주었다. 재원 확보를 위한 아이디어가 바로 자선연주회였다. 전문 공연 기획사의 도움을 받아 연주회 장소의 대관부터 팜플릿 제작까지 기획사에서 진행하는 일을 보면서 하나씩 일들을 배워 나갔다. 

 

후원자를 모집하는 공연이므로 레퍼토리를 늘려야 했다.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 모짜르트의 세레나데 중 13번, 슈베르트의 군대행진곡, 비제의 카르멘 서곡 등을 준비했다. 연습 시간이 배 이상으로 늘자, 중도에 탈락하는 중학생의 자리는 졸업생이 대신했다. 티겟판매는 수녀들의 몫이었다. 막상 공연일이 다가오자 불안하여 관람석 빈자리는 학생들이 채운다는 계획까지 짰다.1991년 6월 9일, 우려와 달리 시민회관 대강당은 대만원이었다. 소 신부님은 필리핀에 계셔서 공연 참관을 하지 못했다.

 

1992년 3월 16일, 소 신부님은 선종하셨다. 신부님은 1957년 사제 서품을 받고 부산 송도에서 보육원으로 출발하여 이후 부산 소년의 집, 부산 구호병원, 부산 마리아구호소, 서울 은평 마을사업, 서울 소년의 집, 서울 도티기념병원 등을 일구어 냈다. 1985년부터는 필리핀을 시작으로 멕시코, 콰테말라, 브라질 등 해외 구호 사업에도 나섰다.

 

1993년 제 3회 자선연주회는 두 달 보름에 걸쳐 서울, 부산, 창원, 진주, 대구 등 무려 5개 도시를 돌며 연주했다. 당초 대구는 계획에 없었는데, 진주 행사가 끝난 후 우리를 후원하는 자매님이 대구 MBC 편성국장님을 소개하면서 성사되었다. 대구 행사에서 효성여자대학교 음악대학장을 역임한 홍춘성 교수를 만나게 되었다.

 

1994년 홍춘성 교수님이 지도하는 대구여성가톨릭합창단과 부산 소년의 집 합주부와 협연을 가졌다. 이듬 해에는 부산에서 동일한 형식으로 연주했다. 두 공연을 통해 얻은 수익금에 사비를 보태어 관악기 2 관씩 구매했다. 드디어 합주부가 관현악단이 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이후 부산로터리클럽 제 3660지구로부터 현악기 40여 점을 기증받기도 했다.

 



 

1999년 3월 초, MBC 이채훈 PD 한테서 연락이 왔다. 부산에 연주하러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이 가는데, 부산 소년의 집을 방문하고 싶다는 요청이었다. 그리고 사라 장이 합주를 원하는 악보를 보내왔다. 아이들은 처음 해보는 곡이라 어렵다고 투덜댔다. 이 사실을 전하자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곡을 알려 달래서 바흐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마이 웨이', 그리고 노사연의 '만남'을 선택했다. 드디어 사라 장이 MBC '생방송 화제집중'팀과 함께 학교로 왔다. 열렬한 환호속에 체육관에서 합주부와 함께 세 곡을 연주했다. 사라 장의 아버지의 즉석 제안으로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이 곡들을 사라 장과 함께 연주했다. 이런 인연으로 예술의 전당(2000년), 세종문화회관 대강당(2001,2002년)에서 공연을 가지면서 아이들은 한 단계 더 성장했다.

 

2004년 멕시코 공연 일정이 잡혔다. 8월 18일 출국하여 9월 3일 입국하는 스케쥴이었다. 인솔자를 포함하여 총 125 명이나 되는 대식구가 이동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대통령궁 공연을 포함하여 총 다섯 번의 연주회를 가졌다. 멕시코 일정 중 장대같은 비가 쏟아지는 날 버스 한 대가 고장이 나서 악기며 짐을 모두 다른 버스로 옮겨야 하는 해프닝을 겪으면서 무사히 일정을 마쳤다.

 

마에스트로 정명훈 선생님이 우리 합주부를 위해 지휘봉을 잡은 것은 2007년 기금마련음악회였다. 그렇지만 그 인연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2년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가 내한 공연 뒤 서울 소년의 집 합주반 아이들에게 마스터 클래스를 해준다며 부산에서도 참여하면 좋겠다고 연락와서 첼로 파트 4명의 학생들이 참가한 적이 있다. 이 공연은 CMI에서 기획했는데, 이 회사의 대표가 바로 정명훈 선생님의 큰 형인 정명근 사장이었다.

 

그 해 8월 20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년의 집 기금마련연주회를 가졌다. 1부는 정명훈 선생님의 지휘로 베토벤의 고향곡 '운명'을, 2부는 정명훈 선생님의 아들인 정민 씨가 지휘를 맡고 정명훈 선생님은 피아노를 첼리스트 송영훈 씨와 바이올리니스트 스베틀린 루세브 씨와 함께 베토벤의 '3중 협주곡 Op.56'을 연주했다. 이들 부자와의 인연은 2010년 카네기홀 공연으로 이어졌다.

 

2010년 2월 8일 저녁 8시 비행기로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하여 현지시간으로 8일 저녁 8시 조금 못 되어 뉴욕 JFK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재학생 42 명, 졸업생 54 명, 객원 연주자 15 명, 수녀 5 명, 사무실 직원 5 명 등 123 명의 대이동이었다. 도착하여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19기 졸업생 성철이가 유럽에서 날라왔던 것이다. 그는 바이올린에 남다른 재능을 가졌는데 한국에서 학업을 마치고 동유럽에서 공부하다 지금은 벨기에의 한 교향악단에 단원으로 활동 중이란다.

 

뉴욕의 겨울이 유명한 것은 잊지 않고 찾아오는 손님 때문이었다. 바로 폭설이었다. 이른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발은 이미 온 세상을 하얗게 덮고 있었다. 도로에는 차도 사람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아침이 들어 눈이 잦아들었지만 당장 내일이 공연인데 당사자인 우리도 우리도 움직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관객들이 찾아 오는데 불편한 것 같아 큰 걱정이었다. 오후가 되자 다시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센트랄파크에 놀러갔다. 누군가 눈뭉치를 만들어 던지자 우리 일행은 삽시간에 눈싸움으로 번졌다.

 

2010년 2월 11일 카네기홀 공연이다. 하늘은 새파랗고 날씨는 따뜻했다. 나들이에 무척 좋은 봄 날씨였다. 어제만 해도 카네기홀까지 가는 길이 걱정이었는데 딴 나라 이야기 같았다. 오후 3시부터 리허설을 가졌다. 주어진 시간에서 단 1분만 초과해도 추가비용을 받을 정도로 엄격하다. 공연 전 호른을 부는 준호가 마우스피스를 조이는 나사를 분실하여 이를 찾느라고 한바탕 해프닝을 벌였다.

 

"우리 아이들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다며 오래전부터 준비해왔던 윤진호 작가님이 이번에 함께 동행했는데

리허설하는 모습을 캠코더로 담다가 쫓겨날 뻔하기도 했다" (265 쪽)

 

공연장을 찾은 분들은 대개 근거리에 거주하는 한인들과 그들의 미국인 지인들 같았다. 알로이시오 신부님 가족 중에는 누님과 그 자녀들이 찾아왔다. 서울 도티기념병원을 기증하신 도티 씨 가족도 항공편이 없어 참석을 못했다. 꼭 참석해야 할 분들이 폭설오 인해 참석하지 못해서 정말 아쉬웠다.

 

정민 씨가 지휘를 맡았다. 첫 곡은 베르디의 오페라 '운명의 힘'서곡이었다. 1부는 베르디의 특집 같았다. 2부의 연주곡은 차이콥스키 고향곡 5번이었다. 안단테로 시작한 1악장부터 장엄하고 화려한 4악장 피날레까지 거침없이 연주했다. 관객들이 기립했다. 터져나오는 함성, '브라보! 브라보!'로 장내는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수녀님들의 눈시울이 모두 붉게 물들었다.

 

부산 소년의 집 오케스트라



부산 소년의 집 오케스트라, 출처:Joins.com

 

1960년대 부산의 거리는 넝마를 줍거나 구걸을 하거나 병들어 떠도는 고아들 천지였다. 이런 아이들을 위해 소년의 집을 짓고 학교를 세워 제대로 된 사회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기술을 가르쳤다. 축구부, 육상부, 스키부 등을 만든 것도 모두 자립심 강한 동량으로 만들기 위한 의도였다. 창단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 합주부를 지도하시는 안유경 선생님은 불교에서 천주교로 개종하셨다. 재단에서 운영하는 여러 시설의 피고용인들을 채용할 때 '아이들 중심'이라는 원칙에 충실했기에 종교를 따지지 않았다. 의료진의 선발도 개원 당시 다른 곳보다 더 많은 급여를 지급하면서 실력있는 의사와 직원을 채용했다.

 


올해 초, 대우증권에서 보내온 초청장



 

고故 소 알로이시오 신부님과의 만남은 평범한 20대 직장녀를 수도자의 길로 걷게 만든 계기였다. 아이들에게 웃음과 행복을 주기 위해 부모님의 반대를 뿌리치고 '엄마 수녀'의 길을 선택한 박 볼케리아 수녀는 부산 소년의 집 오케스트라의 살아있는 역사이다. 요즈음 조그마한 텃밭에 감자, 고구마, 무우, 배추, 생강, 벼 등 다양한 작물을 키우다보니 수녀님들 사이에는 농사 전문가 대접을 받는다. 오늘도 텃밭을 가꾸며 아이들을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는 그녀의 마음엔 이들이 인생 최고의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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