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기억을 보라 - 비통한 시대에 살아남은 자, 엘리 위젤과 함께한 수업
엘리 위젤.아리엘 버거 지음, 우진하 옮김 / 쌤앤파커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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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 위젤홀로코스트(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저지른 유대인 대학살)에 대한 증언과 고백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그때 겪은 참극에 대한 특별한 경험을 바탕으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가르침을 전파했다. - '머리말' 중에서 

 

홀로코스트 이야기, 우리 모두 목격자가 된다

 

이 책의 저자 아리엘 버거는 15세 때 처음 엘리 위젤을 만나서 20대를 그의 학생으로 보냈으며, 30대를 그의 조교로 보냈다. 작가이자 화가, 교사로서 영성과 창의성, 사회 변화를 위한 전략을 통합하는 연구를 계속해왔고, 엘리 위젤의 유대인 연구 및 분쟁 해결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책 <나의 기억을 보라>의 독자들이 엘리 위젤의 학생이자 목격자가 되도록 안내한다.

 

먼저 엘리 위젤(1928-2016)은 누구인지를 살펴보자. 그는 루마니아 태생의 유대계 미국인 작가, 교수, 인권 활동가, 홀로코스 생존자이자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2차 세계 대전 중인 1944년 3월, 헝가리를 점령한 독일의 유대인 강제 이주 정책에 의하여 가족들과 함께 게토로 이주했다가 다시 그해 5월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15세였다.

 

이때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유대인 중 90%가 사망했으며,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 세 명도 살해되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가 부헨발트 수용소로 옮겨져 가스실에서 죽게 될 운명이었으나, 1945년 4월 미군에 의해 부헨발트 수용소가 해방되면서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해방 직전에 수용소에서 사망했고, 그의 왼팔에는 수감자 번호 A-7713이 문신으로 새겨졌다. 종전 후에는 프랑스의 고아원으로 보내진 뒤 1948년 소르본 대학교에 입학하여 문학, 철학, 심리학을 공부했다.

 

전쟁 후 10여 년간 홀로코스트에 대해 언급하기를 거부했으나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설득으로 1958년에 회고록 <밤LA NUIT>을 프랑스에서 출간했다. <밤>은 1960년 미국에서 영어로 번역, 출간된 후 1000만 부 이상 판매되었고, 전 세계 30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1963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그는 1976년부터 보스턴 대학교 인문학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세계 각지의 폭력과 억압, 인종 차별과 인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아내 메리언과 함께 '인류를 위한 엘리 위젤 재단'을 설립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198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 후로도 남아프리카, 니카라과, 코소보, 수단 등지에서 벌어진 폭력과 집단 학살을 강력하게 비난하는 등 '강력한 인권 옹호자'로서 활발히 활동했다. 또한 미국 홀로코스트 추모 기념관 설립을 주도하고, 뉴욕 인권 재단의 창립 이사로 일하면서 전 세계 인권 증진을 위해 정치 지도자들과 교류했다.

 

 

 

 

이 책은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엘리 위젤이 생전에 보스턴 대학교에서 매주 수요일마다 세계 각지에서 온 학생들과 함께 대화하고 토론한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 엘리 위젤은 나치 독일의 유대인 대학살이나 인권 문제뿐 아니라 기억, 믿음과 의심, 광기와 저항, 말과 글을 넘어서는 예술 같은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어떻게 하면 인간에 대한 애정으로 세상의 아픈 곳을 치유할 수 있을지 학생들과 자주 이야기했다.

 

지식의 배반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과 실제 생활 사이의 괴리감에 대한 저자의 의문들은, 위젤이 이야기하는 규범적 교육에 대한 비판과 통하는 면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일 위대한 문학적 개념이나 거창한 철학적 전통이 광신주의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할 수 없다면, 그리고 종교조차 (수많은 역사가 보여주듯 광적인 설교에 휘둘려 신앙의 이름으로 온갖 잔혹한 짓을 저지를 만큼) 쉽게 타락할 수 있다면, 도덕적 명확성을 지키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엘리 위젤은 배움에 대한 열망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이 세상을 광기로부터 구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렇다면 교육이 도덕적, 그리고 윤리적 타락을 이겨내도록 해주는 뭔가 숨겨진 주요 요소가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가르치는 교사로서 위젤 교수는 이제 이 숨겨진 요소를 찾아내는 연구에 평생 천착한다. 이 요소만 찾아낸다면 지식은 다시 저주가 아닌 축복이 되고, 그 지식이 쌓여 증오가 아닌 공감과 동정의 행위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과학자처럼 자신의 글쓰기와 사색을 통해, 특히 강의를 통해 실험에 실험을 거듭했고 마침내 그 숨겨진 주요 요소를 찾아내 이름을 붙였다. 바로 기억이었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억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딸이자 작가이기도 한 론다 핑크 위트먼이 2013년 아이비리그 대학교들을 방문해, 학생들에게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본적 질문들을 했다. 학생들의 대답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학생들이 역사적 사실에 무지한 것도 문제였지만, 그런 갑작스러운 질문을 받았을 때 아무렇게나 대답한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홀로코스트가 언제 일어났는지 묻는 질문에 1800년이라고 대답한 학생도 있었다.

또한 유대인 희생자들의 숫자에 대해 처음에는 대충 300만 명이라고 했다가, 잠시 눈치를 보더니 3억 명이라고 대답하는 식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사례는 비단 나치의 유대인 학살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인간의 도덕성이 한없이 추락한 특별한 사건들, 예컨대 1970년대 캄보디아 학살, 1992년 유고슬라비아 분열과 인종 청소, 1994년 르완다 대학살 등 다른 수많은 학살과 인종 청소, 그리고 분쟁이 홀로코스트와 마찬가지로 잊혀가고 있다.

 

"우리는 그런 망각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요?"

 

어느 날 오후 위젤 교수의 연구실에서 저자는 이렇게 물었다. 그러면서 저자는 특별히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운동홀로코스트 부정 운동에 대해 최근 발표된 미국 연방수사국FBI의 보고서를 언급했다. 위젤 교수는 마치 자신도 마땅한 해결책을 알지 못한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만 이내 말했다.

 

"역사란 좁다란 다리이며, 우리가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충격적인 사실들을 계속 기억하는 데 두려움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사실 잊으려고 노력하고 있고, 또 실제로 어느 정도 잊어야 하는 일들도 있지요. 그저 기능적 측면에서 보더라도요. 그런데 만일 우리가 정말로 그냥 잊어버리려 한다면 역사는 결국 되풀이되고 말 겁니다." 

 

우리도 이야기꾼이다

"우정이란 나에게 종교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도 아주 좋은 종교지요. 누군가 우정에 열광한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있을까요? 우정 극단주의자가 되는 경우도 없을 테니 그저 서로에게 아주 좋은 친구가 되어주기만 하면 됩니다!"

 

위젤 교수는 또 말했다. "여러분이 나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는 만큼 나 역시도 여러분에게 많은 것을 배워 나갑니다."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기꺼운 마음 한편으로 부담감도 느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나중에야 이 간단한 이야기가 학생들을 그저 수동적으로 배우기만 하는 위치에서 능동적 기여자로 바꿔주는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위젤 교수의 그 말은 모두가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배움의 장을 만들어내는 핵심 원칙인 셈이었다. 탈무드에도 "송아지가 젖을 먹고 싶어 하는 만큼이나 어미 소도 젖을 먹이고 싶어 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바로 그런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기도 했다. 학생들이 질문이나 호기심이 없고 아예 뭘 알고 싶은 생각마저 없다면, 교사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교사와 학생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이며, 일종의 교육 생태계를 함께 만들어 나간다.


"과거의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새로운 이야기를 써가야 합니다. 우리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그래서 아무도 알 수 없는 우리 자신의 상황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겁니다." 

 

공감과 갈등

2차 세계 대전 동안 유대인 대학살을 경험했지만 엘리 위젤은 매일 자신의 갑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학생들에게 자신을 모두 열어 보였다. 그리고 학생들은 그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서로의 꿈과 희망에 귀 기울이고 신앙과 우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말했다.

 

"사랑도 가능하고, 희망도 가능합니다. 나는 항상 열린 마음으로 강의를 합니다. 도덕적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교사가 먼저 마음을 열면 학생들이 마음을 여는 일이 가능해지거든요."

 

양심을 속이지 않고 살아가는 법

 

다음 주 강의 시간, 위젤교수는 학생들에게 지금까지 읽은 내용이나 강의 시간에서 다룬 문제에서 궁금한 점이 있으면 함께 나눠보자고 제안했다. 먼저 키가 크고 두꺼운 안경에 금발의 레게 머리를 한 학부생 데이브가 질문했다. "교수님, 언제부터 인권 문제에 관심을 두고 활동하시게 되었습니까?"

 

"글쎄요, 일단 나는 프랑스와 미국에서 꽤 오랫동안 언론인 생활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이디시어로 발행되는 신문의 기자로, 그다음은 이스라엘 계열의 신문사에서 일하며 기사 한 편당 원고료를 받았지요. 그렇게 일을 하며 가장 좋았던 건 개인적으로 가보기 힘든 곳들을 신문사 비용으로 방문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저는 여러 곳에서 고통 가운데 신음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분쟁과 압제, 그리고 어떤 비인간적 행위가 벌어지는지도 알게 되었고요. 인도의 빈민, 베트남의 난민, 캄보디아의 크메르루주(1975년부터 5년간 캄보디아를 통치하며 대규모 학살을 자행한 급진 공산주의 혁명 단체) 희생자, 중앙아메리카에서 박해받은 혼혈 원주민까지. 이미 아는 사실들을 또다시 확인하고 한 번 본 일들을 연거푸 보면서, 그런 사람들을 돕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한낱 기자에 글이나 쓰는 사람일 뿐인데 말이지요."

"그렇다면 일단 내가 확인한 사실들을 기사로 쓰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모인 글들은 훗날 여러 권의 책으로 출간되었고요. 더 나중에는 [뉴욕 타임스]를 비롯한 여러 주요 매체에 필요할 때마다 특별 외부 기고자로 많은 글을 싣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청하기 시작했습니다. 노벨상 수상자나 작가처럼 도움을 원하는 사람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접촉해, 말과 글을 통해 현실을 바꾸고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내려고 노력했지요."



 

"때로는 가진 것이 말과 글뿐일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말이나 글이 일종의 증언이 되고, 단순히 추상적 관념에 그치지 않는다면 분명 그 안에 힘이 있지요. 비록 기자 생활을 그만둔 지 오래되었지만, 지금도 세계 여러 곳을 둘러보고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한 목격자는 확신을 가지고 세상에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 메시지에는 분명 힘이 실리지요."

위젤 교수는 어떤 노력과 행동으로 도덕적 자격을 얻었는가.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당시의 경험을 담은 자전적 소설 <밤>을 출간한 그는 분명 고통과 생존이라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활동할 수 있는 자격을 일찌감치 얻은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 자격은 다른 억압받는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얻은 것이기도 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여러 분쟁 지역을 방문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자격은 비로소 진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그저 말만 앞세우며 대중 앞에서 가식적인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직접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목격자가 됨으로써 '권력 앞에 진실을 이야기하는' 자신의 행동에 도덕적 무게감을 실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유일한 도구만 가지고 세상 앞에 나서고 또 나섰다. 그의 도구란 그의 눈과 그의 마음과 그의 글이었다. 1986년 노벨 평화상을 받기까지 그는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학자이자 작가, 사회 활동가였으며 그 어떤 단체나 조직 혹은 후원자를 대표하지 않았다. 노벨상을 받은 후에는 엘리 위젤 인권 재단을 설립해 처음으로 실질적 후원 단체를 갖게 되었고, 주요 신문 지면에 광고를 실을 수 있는 자금도 확보했다. 또한 다른 노벨상 수상자들과 지속적인 만남을 갖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는 완전한 자유와 자율적 책임 아래 독립적으로 활동한다는 원칙을 한 번도 저버린 적이 없었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종종 언급하며 자신은 백악관이나 국제 연합에서 이야기할 때도 어느 작은 유대인 마을에서 온 예시바 학생이었을 때처럼, 어떤 단체나 위원회에도 소속되지 않은 채 오직 말과 글로 싸우는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언어와 그 한계 

"우리는 언어가 자유를 누리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원래 내보이고 싶었던 뜻을 그대로 전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지요. '굶주리는 어린이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왜 굳이 '소득 불균형'이라고 돌려서 말합니까? 그냥 '죄 없는 가족이 돌팔매질을 당하고 있다'고 말하세요. '인종 간 갈등'이라고 말하지 말고요. 정치에서도 문학에서도, 그리고 물론 교육에서도 이런 원칙이 똑같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계속 언어를 왜곡한다면 진실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습니다."

위젤 교수에게 말이나 글은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저자는 이해했다. 그가 강의 시간에 노래를 부르기로 결심한 것은 다음과 같은 중대한 질문에 대한 답이었으리라. '전하고자 하는 뜻을 잘 전달했습니까? 그러지 못했다고요? 그렇다면 말이나 글로써 할 수 없는 일을 노래 한 곡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나은 불꽃을 피워 올리자

 

정말로 열정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그런 열정을 잃어버렸고, 더 이상 그런 열정을 찾지 않는 풍조마저 생겨났다. 그런 열정 대신 그저 기분 전환을 할 수 있는 오락거리를 찾게 되었다. 명심하라. 나치도 공산당도, 그리고 크메르루주도 모두 열정으로 가득 찬 집단이었다.

 

그들에게는 이상이 있었으며, 국민이 간절히 바라는 소망을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이끌어내 지배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국민은 민족적 순수성, 계급 간 투쟁의 종결, 역사의 새로운 시작과 종교적 지배권 등에 대한 소망을 품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불꽃이 있었다. 그런 자들과 싸우는데 미적지근하게 대처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들보다 더 나은, 더 뜨거운 불꽃을 피워 올려야만 한다.

 

 

망각은 우리를 노예로 만든다

 

위젤은 당시 강의실에 앉아 있었던 학생들에게, 그리고 지금 책을 손에 쥔 독자에게 똑같이 강조한다. 역사의 참극이 되풀이되는 걸 막기 위해 역사의 목격자가 되어 기억하고 또 증언하라고 말이다. "망각은 우리를 노예의 길로 이끌지만 기억은 우리를 구원한다. 나의 목표는 언제나 한결같다. 과거를 일깨워 미래를 위한 보호막으로 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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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버 로드 - 사라진 소녀들
스티나 약손 지음, 노진선 옮김 / 마음서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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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부터 그는 실버 로드를 따라 운전하기 시작했다. 크고 작은 쓰레기통을 모두 열어보고 맨손으로 뒤졌으며, 습지와 폐광에도 들어가 확인했다. 집에서는 컴퓨터 앞에 앉아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리나의 실종에 관해 각자의 가설을 써놓은 인터넷 커뮤니티의 글을 읽었다. 구역질나는 가설들이 길게 얽혀 있었다. 리나가 도망갔다, 살해됐다, 납치됐다, 시신이 토막 나서 버려졌다, 길을 잃었다, 익사했다, 차에 치였다, 윤락가로 끌려갔다. 그 밖에 생각도 하기 싫은 끔찍한 가설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렐레는 다 읽었다. 거의 매일 경찰서에 전화해서 딸을 찾아내라고 소리쳤다. 자지도 먹지도 않았다. (중략) 그에게는 리나를 찾는 일만 중요했다. - '본문' 중에서 

 

 

실종된 딸을 찾아 나선 부성애

 

저자 스티나 약손은 1983년생으로 스웨덴 북부의 작은 도시 셸레프테오에서 성장했다. 20대에 남편을 만나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고향을 무대로 한 소설을 쓰며 향수를 달랬다. 바로 데뷔작인 <실버 로드>다. 이 작품은 2018년 스웨덴 범죄소설상을 비롯해, 2019년 북유럽 최고의 장르문학에 수여하는 ‘유리열쇠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신인 작가에겐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스웨덴에서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고, 전 세계 20개국에 판권이 수출됐다. 

 

소설은 스웨덴 북부의 작은 마을에서 발생한 소녀 실종사건을 다룬다. 실종된 딸을 찾으려는 아버지의 슬픔과 분노의 수색이 계속되는 중 또 다른 10대 소녀가 실종되는 스토리로 전개된다. 즉 스웨덴 북부 작은 마을 클리메르스트레스크의 버스 정류소에서 의문의 실종 사건이 발생하고, 이 딸을 찾아 나선 아버지 렐레는 돌바카 고등학교 수학 교사로 3년간이나 스웨덴 전역을 이 잡듯 누빈다.

 

한편, 작가는 등장인물에 대한 탁월한 심리 묘사를 통해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초현실적인 자연 현상인 백야의 풍경을 마치 우리들이 그 현장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표현함으로써 독자 모두를 스웨덴의 적막한 숲길로 인도한다. 범죄추리소설이라면 마땅히 있어야 할 긴장감은 물론이고, 서스펜스까지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 책 속으로 빨려들게 만든다.

 

 

 

 

스토리의 전개는 두 인물의 시선을 따라 번갈아가며 펼쳐진다. 한 스토리는 딸을 찾기 위해 3년째 수색을 멈추지 않는 아버지 렐레, 그리고 또 다른 스토리는 알콜중독자인 엄마로부터 벗어나려는 소녀 메야와 관련된 사건이다. 그런데, 작가는 마치 퍼즐 조각을 하나씩 꺼내놓듯 상이한 두 사람의 이야기를 각각 들려준다. 이 두 사람의 사건이 어떤 식으로 접점을 이루고, 소녀들의 실종 사건은 또 어떻게 전개될지, 잠시도 긴장의 끈을 늦출 수가 없다.

 

기나 긴 겨울이 물러가고 백야가 시작되면 렐레는 낡은 볼보로 밤마다 실버 로드를 드라이브한다. 그 이유는 의문의 실종을 당한 사랑스런 딸 리나를 찾기 위해서다. 스웨덴 동부 해안에서 노르웨이 국경으로 이어지는 95번 국도, 일명 실버 로드라 불리는 이 길은 3년 전 렐레의 열일곱 살 딸이 버스를 기다리다 감쪽같이 사라진 곳이다. 리나의 마지막 목격자는 오직 아빠인 렐레, 그밖엔 아무도 이를 본 사람이 없고 그 어떤 단서도 없어서 사건은 오리무중에 빠진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리나의 실종에 관해 각자의 가설을 써놓은 인터넷 커뮤니티의 글을 읽었다. 구역질나는 가설들이 길게 얽혀 있었다. 리나가 도망갔다, 살해됐다, 납치됐다, 시신이 토막 나서 버려졌다, 길을 잃었다, 익사했다, 차에 치였다, 윤락가로 끌려갔다. 그 밖에 생각도 하기 싫은 끔찍한 가설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렐레는 다 읽었다. 거의 매일 경찰서에 전화해서 딸을 찾아내라고 소리쳤다. 자지도 먹지도 않았다. (…) 그에게는 리나를 찾는 일만 중요했다.(27-28쪽)



 

3년 후 지금, 렐레는 여전히 딸의 생존을 확신하며 나홀로 수색을 이어간다. 어둠이 짙은 숲, 안개 낀 습지, 그리고 폐가를 샅샅이 수색하던 중 그의 눈에 수상한 용의자들이 하나씩 포착된다. 숲속의 폐가에 은둔해 있는 퇴역군인, 딸의 남자친구, 포르노 수집광인 늙은 남자, 강간 전과자, 밀주를 판매하는 쌍둥이 형제 등 렐레는 그들의 범죄 혐의점을 찾고자 차례로 그들에게 각각 접근한다.

한편, 렐레가 거주하는 스웨덴 북부의 적막한 마을에 열일곱 살 소녀 메야 모녀가 이사를 해온다. 알콜중독자로 홀로 딸을 키우는 메야의 엄마 실리에에게 이곳에 얹혀 살 수 있는 새로운 애인이 생겼기 때문이다. 엄마는 지나칠 정도로 개인적이고 자유분망한지라 딸이 집에 있든 말든 남자 애인과 거침없이 육체를 나누며 뒹군다.

 

이내 아래층에서 엄마의 신음 소리가 올라왔다. 처음에는 나직하다가 점차 높아졌다. 토르비요른은 큰 소리를 냈고, 마룻바닥 위로 가구 밀리는 소리가 났다. 마치 그가 엄마를 죽이려는 듯했다. 메야는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밖에서 흔들리는 우듬지를 바라보았다. 외로움이 밀려드는 가운데 다른 목소리들이 머릿속에 침입했다. 그녀를 조롱하는 목소리. 니네 엄마가 그 대가로 돈을 받는다는 게 사실이야? (66쪽) 

 

이런 엄마로부터 벗어날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는 메야 앞에 인근에 사는 삼형제의 막내 칼 요한이 나타난다. 삼형제 가족은 기술문명과 교육을 거부하고 숲에서 자급자족하는 원시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비록 특이한 생활 방식이지만 평안한 가정을 갈망했던 메야이기에 그녀는 금방 칼 요한에게 빠져들고, 결국엔 엄마 곁을 떠나 그의 집으로 들어간다.

 

렐레가 잠도 자지 않고 실버 로드를 수색하던 어느 날, 캠핑장에서 또 다시 열일곱 살 소녀가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역시 목격자도, 단서도 없다. 이에 렐레는 직감적으로 이 사건이 딸의 실종과 연관됐음을 느끼고 유력한 용의자를 찾아 나선다. 경찰의 대대적인 수사에도 진전이 없던 실종 사건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실체를 드러낸다.

 

 

과연 실버 로드에서 사라진 소녀들은 어디로 갔을까? 아버지 렐레는 그동안의 수고에 대한 보상으로 사랑스런 딸을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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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리츠스케일링 - 단숨에 ,거침없이 시장을 제패한 거대 기업들의 비밀
리드 호프먼.크리스 예 지음, 이영래 옮김 / 쌤앤파커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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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업이 주력 제품과 상당한 규모의 확실한 시장, 견고한 유통 채널을 갖출 정도로 성장하면 '스케일업scale-up'이 된다. 이는 수백만, 심지어는 수십억 명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회사가 될 기회다. 스타트업이 스케일업으로 가는 가장 빠른 직선 코스는 단연 블리츠스케일링을 통해 초고속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 '프롤로그' 중에서 

 

 

단숨에 경쟁자를 압도하는 비밀병기

 

이 책의 저자 리드 호프먼은 링크드인 설립자이자 실리콘밸리 투자자이다. 그는 스타트업 CEO들이 가장 먼저 만나고 싶어 하는 기업가이자 실리콘밸리 최고의 투자자로, 스탠퍼드대학교에서 인지과학으로 학사 학위를,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장학생으로 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애플과 후지쯔에서 경험을 쌓다가, 1997년 온라인 데이팅 사이트인 소셜넷을 창업했다. 그 후 페이팔에 합류, 수석부사장을 지냈다. 2003년에는 페이스북보다 한발 앞서 소셜 미디어의 가능성을 보고 비즈니스에 특화된 인맥 서비스를 제공하는 링크드인을 설립해 성공했다.

투자자로서의 안목도 탁월한 그는 벤처 캐피털 회사 그레이록 파트너스의 파트너로서 링크드인, 페이스북, 에어비앤비, 드롭박스, 인스타그램, 징가, 그루폰 등 50여 곳이 넘는 회사에 투자하여 그들의 성공을 견인했다. 실리콘밸리에서 그는 '연결의 왕'이란 별칭으로 불릴 만큼 창업부터 투자, 사업에 필요한 모든 네트워크를 연결하는 데 탁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저서로는 <연결하는 인간>, <얼라이언스> 등이 있으며, 모두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공저자 크리스 예는 하이테크 기업을 전문적으로 키워온 실리콘밸리 기업가로, 스탠퍼드대학교에서 상위 15%의 성적으로 제품디자인과 문예창작 학사 학위를 받았고,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에서 상위 5%에 드는 성적으로 MBA를 취득한 수재다. 창의성과 경영 능력까지 뛰어난 그는 이제 막 사업을 시작하는 초기 단계의 스타트업을 지원하는 와사비 벤처스를 창업, 지금까지 100개가 넘는 하이테크 스타트업에 조언과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저서로는 <얼라이언스>가 있으며,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시장에는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리스크가 존재했으며, 시장이 무서운 속도로 변화하고 있는 것도 이미 오래전부터 진행되어왔던 현상이다. 페이스북, 구글, 아마존은 오히려 이런 혼란한 틈을 비집고 들어가 기존 시장을 파괴함은 물론, 거대 기업들을 물리치고 치열한 경쟁이 난무하는 시장에서 주도권을 거머쥐었다.

 

그렇기에 불확실성이 갈수록 커지는 지금이야말로 후발주자로 나선 기업들이 굴지의 선도 기업을 역전해 1등의 자리를 낚아챌 수 있는 유일한 때일지도 모른다. 이런 이유를 감안한다면 불확실한 상황에서 전광석화처럼 시장을 장악하는 전략이 먹혀들 수 있다. 이 책의 저자들은 시장 독점자들의 결정적 성공 전략을 '블리츠스케일링'이라고 정의 내리고, 이런 전략을 통해 급성장한 기업들의 사례를 스탠퍼드대학교에서 강의했다.

 

 

 

 

블리츠스케일링기습 공격을 의미하는 '블리츠크리그(Blitzkrieg)'규모 확장을 의미하는 '스케일업(scale up)'의 합성어로, 불확실한 상황에서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엄청난 속도로 회사를 키워 압도적인 경쟁우위를 선점하는 기업의 고도성장 전략을 의미한다. 시장은 점점 더 예측할 수 없는 속도로 변하고 있다. 이에 맞서는 유일하고도 확실한 전략은 재빨리 시장을 선점함으로써 경쟁자가 쫓아오기 어려운 초격차를 만드는 것이다.

 

"다가올 기회는 대단히 좁고 빨리 닫힌다."

- 빌 게이츠 

 

비즈니스 전략의 수립

 

모든 기업은 시장에 뛰어들기 위해 필요한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통상적인 방법은 정보를 수집한 다음 예측한 결과에 대해 합리적인 확신이 생길 경우 구체적으로 수립한다. 이게 전형적인 방식이다. 대체로 이런 이론들은 위험을 감수하라고 하지만 그 위험이란 측정하거나 감당할 수 있는 예측된 범위에 한정된다. 또한 이런 기법에는 속도보다 정확성과 효율성을 우선시하라는 함의가 담겨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렇게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접근하다가는 신기술이 새로운 시장을 만들거나 기존의 시장을 혼란시킬 경우 힘을 잃게 된다.

 

상식적으로 이해불가한 전략 구사

 

블리츠스케일링의 가장 분명한 요소는 고도의 성장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혁신적인 비즈니스 모델과 결합되면 막대한 가치는 물론 장기적으로 경쟁우위를 확보할 수 있다. 많은 스타트업이 스스로 고도성정전략을 추구하고 있다고 믿지만 실은 고도성장에 대한 목표와 바람은 있어도 이에 필요한 현실적 전략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블리츠스케일링 기업들은 주로 승자독식의 시장에서 활동한다. 성장하는 성공적인 기업에 더 큰 위험은 지나치게 천천히 움직여서 경쟁업체가 시장 주도권을 잡고 최초 스케일러 우위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노키아의 사례를 살펴보자. 2007년 노키아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성공한 휴대전화 제조회사였지만 이후 애플과 삼성의 맹추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2013년 노키아는 적자를 내는 송수화기 사업 부문을 70억 달러에 마이크로소프트에게 넘겼다.

 

2016년 마이크로소프트는 피처폰 자산과 노키아 송수화기 브랜드를 폭스콘과 HMD에 매각했다. 가격은 3억 5000만 달러였다. 2007년 990억 달러에 달했던 노키아의 가치가 무려 99%가 넘는 하락이었다. 그래서 당시 노키아의 결정은 옳은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사실상 노키아는 아이폰과 구글의 안드로이드 운영체제가 출시된 이후에도 계속 성장 중에 있었다. 2010년 휴대폰 출하량은 1억 400만 대로 정점을 찍었던 것이다. 이후 노키아의 매출은 하락, 2011년엔 안드로이드가, 2012년엔 아이폰이 노키아를 추월했다. 노키아의 경영진이 실제로 마주한 위협을 인식한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품과 시장의 궁합

 

제품과 시장의 궁합이 잘 맞으면 회사는 급속한 성장을 이루게 된다. 반면에 맞지 않으면 성장을 위해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등 난관을 맞게 될 것이다. 미국의 소프트웨어 개발자 앤드리슨성공적인 스타트업으로 가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시장과 제품의 궁합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정의는 이렇게 간단하다.

 

"제품과 시장 궁합이란 좋은 시장을 만족시킬 수 있는 제품이

그 시장에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회사를 시작할 때 제품과 시장 궁합에 대해 반드시 자문해보아야 할 것이 있다. 뻔하지 않은 시장의 기회를 발견했는가. 그 기회는 특유의 장점이나 접근법을 가지고 있는가. 그래서 한참 앞서 나갈 때까지 경쟁자들이 찾지 못하는 그런 기회인가. '치열한' 시장에서 이런 기회를 발견하기란 어려운 법이다. 모두에게 뻔히 드러나는 기회라면 성공할 확률은 지극히 낮다.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블리츠스케일링의 원리를 파악하고 적용하는 일이 힘든 까닭은 비즈니스를 할 때 일반적으로 따르는 규범을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노련한 경영자일수록 더욱 힘들다. 수년간의 경험을 통해서나 경영대학원에서 또는 스타트업 초기에 작은 규모를 유지하면서 알게 된 모든 것을 내던져야 하기 때문이다.

 

세심한 기획, 주의 깊은 투자, 공손한 서비스, 엄격하게 통제되는 번 레이트(급여를 지급하고, 임대료를 내는 등 매달 기업이 소모하는 현금의 양)는 내던지고, 빠르게 추정하며 화난 고객과 비효율적인 자본 지출을 무시해야 한다. 왜 이런 위험하고 비직관적인 행동방침을 추구하는가? 바로 속도 때문이다. 위험하고 비용이 증가하더라도 아주 빠르게 성장하는 것이 블리츠스케일링의 목표임을 기억하라.

 

빠른 적응과 개선

지속적인 경쟁우위를 창출하려면 블리츠스케일링을 어떻게 이용해야 할까? 또 다른 방법은 가파른 학습곡선을 만들어내는 최초의 기업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자율주행차와 같은 일부 기회들은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 더 빨리 스케일링을 하려면 더 많은 데이터를 학습해야 (머신러닝을 훈련시켜야) 한다. 이는 제품 개선으로 이어져 시장에서 스케일링을 더 쉽게 진전시킬 수 있는 반면, 막 학습을 시작한 경쟁자들은 한참 뒤처지게 된다.

 

넷플릭스스트리밍 비디오 엔터테인먼트의 선두주자다. 이 회사는 가파른 학습곡선을 만들어냄으로써 그 자리에 올랐다. 1997년 넷플릭스가 시작할 때 인터넷 접속을 위한 전화식 모뎀은 고화질 비디오 콘텐츠를 스트리밍하기엔 너무나 느렸다. 이 때문에 넷플릭스는 집으로 영화 DVD를 배송하는 구독 서비스를 제공해 다른 비디오 가게들과 경쟁했다. 이런 과정에서 넷플릭스는 가파른 학습곡선을 만들어야만 했다. 결론은 자체 콘텐츠 개발이었다. 오늘날 명실상부한 선두 위치로 올려 놓았다.

 

멈춰야 할 때

시장이 더는 커지지 않을 만큼 한계에 이르렀을 때 블리츠스케일링을 하는 것은 위험하다. 정점에 이르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기업이 시장의 한도에 충돌하게 되고 갑자기 속도와 추진력을 잃을 수 있다.
갑작스러운 성장 둔화 외에 성장의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는 일반적인 징후는 내분이다. 지속적인 성장에 익숙해진 관리자와 투자자들은 이 상황에 놓이게 되면 이런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누구의 책임인가?"

 

회사가 근본적인 원인을 깨닫지 못하면, 가장 흔한 (그리고 도움이 되지 않는) 조치로 CEO나 경영진 또는 양측 모두를 물갈이하는 것이다(보통은 매출 담당 부사장이 공격받기 쉬운데, 그 사람에게 성장 둔화의 책임을 가장 많이 묻기 때문이다). CEO를 교체해서 고속 성장에 다시 불을 붙인 경우가 얼마나 될까?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유일한 사례는 애플의 잡스뿐이다. 잡스가 기다리고 있다면 CEO를 교체해도 좋다. 그렇지 않다면 CEO나 경영진의 교체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선장에서 장군으로

 

회사의 규모가 작으면 조직이 혁신과 빠른 속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우버의 트래비스 캘러닉의 말은 전적으로 옳다. 하지만 항상 작은 규모를 유지한다고 혁신과 속도가 빨라지는 것은 아니다. 조직의 규모가 커지는 것을 되도록 피하면서 '언젠가' 한 번 크게 도약해서 변화하겠다고 기다리는 것보다 차라리 여러 번 반복하는 조직 구조를 구축하는 것이 더 낫다. 달리 말해, 그 규모에 맞는 경영전략을 수립하라는 의미이다.

 

래리 페이지 같은 똑똑한 사람도 구글 초기에 이 사실을 배웠다. 그는 경영진 없이 400명 전원이 당시 엔지니어링 부문 부사장이던 웨인 로징에게 직접 보고하도록 하는 운영 방식을 택했다. 하지만 이 방식이 실패하면서 그는 당시 CEO이던 에릭 슈밋에게 구글의 현시점에 적합한 조직구조를 구축하라고 지시했다. 

 

해적선의 배 자체와 추종자들이 늘어나면, 그들을 함대에 편입시켜 잘 훈련된 해군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함대에는 기업가로서 추진력을 가지고 움직이는 강력한 선장들과 중앙집권화된 참모들이 필요하다. 성공하려면 창업자와 조직은 이런 변화를 겪어야 한다. 블리츠스케일링은 이런 변화를 반드시 수반되는 속도로 인해 더 어렵게 만드는 동시에 효율보다 속도에 투자하는 데 내재하는 위험 때문에 더 중요하게 만든다. 

 

 

 

 

시장은 정체와 안주를 응징한다

 

미래가 과거보다 나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에게 블리츠스케일링은 희망이다. 반면에 미래가 과거보다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블리츠스케일링은 공포다. 블리츠스케일링이 기존의 질서를 더 빠르게 전복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책의 공저자들은 블리츠스케일링을 하면서 불편한 것은 그런 미래에 더 빨리 도달하기 위해서 참을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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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하지 못한 말 - 최영미 산문집
최영미 지음 / 해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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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사오 년간 여기저기에 기고한 글들과 SNS에 올린 글들을 모아, 책상에 앉아 쓴 글과 침대에 누워 허공에 지껄인 문장들을 모아, 내 영혼의 물음표와 느낌표들을 모아 다시 책을 엮는다. 축구 산문집 <공은 사람을 기자리지 않는다> 이후 처음이니 거의 9년 만이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최영미 시인이 만들어냈던 시대의 일기

 

 

책의 저자인 최영미 시인은 대한민국 미투운동의 문을 연 결정적 인물 중 한 명으로, 작품 '괴물'(황해문화, 2017년 겨울)을 통해 문단 내 성폭행을 폭로하고 2018년 폭풍을 몰고온 미투운동에 불을 붙였다. 그녀의 고발대상자는 한국 문학계의 큰 별이자 늘 한국인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던 고은 시인이었다.

 

 

이 산문집은 그녀가 9년만에 새로 펴낸 것으로 80년대 민주화 운동에 대한 기억과 방황, 촛불시위를 향한 응원과 의지, 시 '괴물' 발표 이후 미투의 중심에 서게 된 시인의 고민과 투쟁의 과정을 기록했다. 2015년부터 2019년까지 페이스북과 지면을 통해 공개했던 글을 다듬고 내용을 보충했다.

 

 

"세상과 넓게 소통하고 크게 부딪쳤던 내 삶의 궤적이 여기에 있다.

저 이렇게 살았어요" 

 

 

 

 

저자가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알리기' 위해 써왔던 글들을 취합해보면 우리들은 한국 문단 내에서, 또 1980년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빚어졌던 만행들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최영미 시인도 "내가 다시 가고 싶지 않은 그 시절을 글로 불러오는 것은, 80년대가 여성들에게 어떤 희생을 강요했는지 말하고 싶어서다"라고 표현했다.

 

 

누군가 진실을 외부에 알리는 일은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더구나 그 상대가 큰 힘과 세력을 지닌 집단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왜냐하면 대체로 우리들 대부분은 나의 삶만으로도 벅차기 때문에 타인의 일에 대해선 크게 관심을 두지 않으므로 이런 일에 휘말리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약자의 진실은 용기없는 사람들의 외면으로 인해 이 사회의 바닥으로 슬그머니 묻히고 만다.

 

 

그렇다. 억울하게 피해를 당한 당사자가 그토록 수치스러운 일을 조용히 묻어 버리지 않고 굳이 이를 모든 사람들에게 폭로하려는 이유는 폭행을 가한 그 당사자의 죄를 물어 사회에서 매장시키려는 그런 나쁜 의도가 아니라 또다시 이런 일이 이 사회에서 재발되지 않도록 모든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림으로써 상대적인 약자로서 이 사회 어딘가에서 지금도 폭행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를 그런 사람들을 밝은 세상으로 인도할 수 있하는 선한 영향력을 기대해서다. 그렇기에 저자 또한 이렇게 강조한다.

 

 

'저는 싸우려고 시를 쓴 것이 아닙니다. 알리려고 썼습니다'


 

 

다시 시를 쓰며(2015년 7월) 

 

2014년 8월 말 소설 <청동정원>을 끝낸 뒤 아홉 달이 지나도록 저자는 제대로 된 글은 한 줄도 쓰지 않았다. 그러다가 오랫만에 시를 만들었다. 이미 존재하는 언어로,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표현하려는 노력이 시였다. 이미 존재하는 언어(의 의미)를 확대할려는 노력, 일상의 언어를 뛰어넘으려는 욕망에서 시가 탄생했다.


시는 살아 있는 숨결이며 생명이기 때문에, 때를 놓치면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지는 않는다. 내게 왔던 시들, 내가 놓쳤던 순간들, 꿈처럼 왔다 가버린 사랑을 생각하며 나는 탄식한다. 인생은 지루하도록 길지만, 시처럼 아름다운 시간은 짧았다. 앞으로 내게 올 시들, 깊고 맑은 얼굴을 상상하며 나는 노트북을 닫는다. 봉천동의 2층 카페에서 자판을 두드리다 너를 보았다. 너, 푸르고 푸른 나뭇잎들. 내가 가고 난 뒤에도 그 자리에 있을 영원한 젊음이여. 

 



자신 있으면 얼마든지 타협해(2017년 6월 3일)

 
최선을 다하는 삶보다 차선을 다하는 삶이 더 어렵다. 타협을 하지 않으면 하루도 살 수 없게 된 지금, 난 알게 되었다. 성인이 되려면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이들과 대화하고 타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언젠가 어느 기업의 연구원과 간부들을 상대로 진행한 강의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원칙을 지키는 건 쉬워요. 그냥 (원칙을) 지키면 돼요. 그러나 타협은 어려워요."

 

타협하면서도 망가지지 않는 게 중요하다. 자신이 있으면 얼마든지 절충할 수 있다. 자신을 지킬 자신이 잇으면 악마하고도 거래하는 게 정치 아닌가. 

 

문단 내 성폭력(2018년 2월 17일) 

 

1992년 등단 이후 저자가 원하지 않은 신체적 접촉(성추행)을 했던 남자는  4명이다. 악수를 하며 그녀의 손을 오래 잡고 손바닥을 간질이는 등 비정상적인 행위를 한 사람들도 두어 명 있었는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그녀는 밝힌다. 이는 일부 매체에서 그녀가 JTBC의 '뉴스룸'에 출연한 뒤 "최영미 시인 문단에서 수십 명 성추행"이라고 왜곡 보도를 했기에 이를 해명한 글이다.

 

권력을 쥔 남성 문인들의 이런저런 요구를(노골적이지 않더라도 결국 성적인 함의를 포함한 메시지를) 거절했을 대, 여성 작가가 당하는 보복은 당장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장시간에 걸쳐 '제외되는' 식으로 문단의 주변부로 밀려나간다. 그들에게 희롱당하고 싶지 않아 문단 모임을 멀리하고 술자리에 나가지 않으면, 더 큰 불이익을 당하는 셈이다. 

 



미투는 과거와 미래의 싸움(2018년 3월 23일)


작년 가을에 시를 쓰고 사람들 앞에서 '괴물'을 읽은 건 오늘이 처음입니다. 잊지 못할 밤이었습니다. 추운데도 많이 오셨더군요. 젊은 그들의 열기에 감염되어 저도 흥분해 무대에서 몇 마디 더 했지요.


"저는 싸우려고 시를 쓴 게 아닙니다. 알리려고 썼습니다. 미투는 남성과 여성의 싸움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의 싸움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겼지만, 남자와 여자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그날을 위해 더 전진해야 합니다. 지금 이 싸움은 나중에 돌아보면 역사가 될 것입니다." 

 

 

 

 

 

저자의 용기가 돋보이는 글

 

산문, 즉 에세이란 글쓰는 이가 평소 일상에서 느끼는 감정이나 특정이슈나 사회적 문제 등에 대해 스스로의 주관적인 감정을 솔직하게 나타내는 글이다. 따라서 이는 글쓰는 이가 느끼는 여러 생각의 편린이자 단상이므로 모든 사람들이 전부 공감할 수 있는 그런 글은 아니다. 나도 마찬가지다. 저자의 글 중 동의할 수 없는 대목들, 심지어 눈에 거슬리는 글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저자의 용기가 내포되어 있는 아무나 할 수 없는 그런 말인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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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눈
딘 쿤츠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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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눈>은 액션, 서스펜스, 로맨스와 더불어 초자연적 현상을 섞어 쓴 나의 초기작이다. 이 소설에는 <Watchers>나 <Mr. Murder>같은 후기작에서 나타나는 강렬함이라든가 인물의 깊이, 복잡한 주제나 전개 방식은 없고, <Intensity>처럼 목이 바짝 타오르는 공포감도 없지만, 헌책방에서 니콜스라는 이름을 달고 출간된 찾은 많은 독자들이 호평을 해주었다. 독자들이 이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잃어버린 아이, 또 어린 아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아내기 위해서라면 뭐든 하는 헌신적인 어머니라는 소재가 우리 마음속 원초적인 심금을 울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엄마의 사랑는 강하다

 

이 책의 저자 딘 쿤츠매년 2,000만 부 이상이 팔리고 38개 언어로 80여 개국에 번역되어 5억 부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한 미국의 초대형 베스트셀러 작가. 스티븐 킹과 함께 서스펜스 소설계의 양대 산맥으로 불린다. 현재까지 발표한 작품 중 총 16권의 소설이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영미권에서는 신작이 출간되자마자 즉시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오를 만큼 독자들의 뜨거운 애정과 신뢰를 받고 있다. 미국 언론은 그를 일컬어 "스티븐 킹이 소설계의 롤링 스톤스라면, 딘 쿤츠는 비틀스다!"라고 극찬했으며 롤링 스톤스는 "미국 최고의 서스펜스 소설가"라고 칭송한 바 있다.

1945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유년 시절 상습적으로 폭행을 일삼는 알코올중독자 아버지를 피해 주로 도서관에서 책을 읽거나 소설을 습작하며 시간을 보냈다. 시펀스버그주립대학 영문과에 진학한 후에는 애틀랜틱 먼슬리 매거진이 주최한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으며 글쓰기 실력을 인정받았다. 졸업 후 청소년 상담 지도사, 영어 교사, 록 밴드의 드러머, 식품창고 직원 등으로 일하며 밤과 주말을 이용해 집필 활동을 계속해왔다. 

 

주로 SF 소설을 쓰는 무명 소설가였던 딘 쿤츠는 1973년 <인공두뇌(Demon Seed)>와 1975년 필명으로 발표한 <Invasion>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대중과 평단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여러 필명으로 <The Key to Midnight>, <펀하우스(The Funhouse)>, <어둠 속의 속삭임(Whispers)> 등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연달아 발표했고, 1986년 본격적으로 본명인 '딘 쿤츠'라는 이름으로만 책을 출간하기 시작했다. 라이벌인 스티븐 킹과 달리, 한동안 작품의 영상화를 거절해왔던 딘 쿤츠는 비록 영화나 드라마로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오늘날까지 매해 2천만 부 이상이 꾸준히 팔리고 있는 명실공히 미국의 가장 대표적인 대중 작가 중 하나로 손꼽힌다. 

 

 

 

 

<어둠의 눈>은 딘 쿤츠가 '리 니콜스(Leigh Nichols)'라는 필명으로 1981년 출간한 초기작이다. 이 필명으로 썼던 여섯 권의 소설 중 두 번째 소설로  1980년대 출간된 스릴러인 만큼 스릴러 장르 특유의 장치와 문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도 현대 독자들에게 익숙한 스릴러와는 사뭇 다른 매력을 풍긴다.

 

즉 주인공들은 피 터지는 복수극보다는 아들의 사고가 죽음으로 은폐되어야 했던 어두운 진실을 파헤치고 아들을 되찾아오는 데 집중한다. 또 호신용 총을 휴대하고 다니지만 최대한 살인을 저지르지 않으려고 몸을 사린다. 피와 살인 등의 잔혹한 묘사가 자주 등장하는 일반 스릴러와는 달리, 두 주인공은 암살자를 죽이고도 괴로워하고 '악'으로 대변되는 세력이 자멸하는 것을 보고도 양심이 가책을 느끼는 너무나도 인간적인 인물인 셈이다.

또한 당시 스릴러에서 범죄의 피해 대상이었던 여성 캐릭터를 사건 해결의 주체로 내세웠다는 점도 새롭다. 아이를 찾기 위해 목숨 건 여정을 떠나는 강한 모성은, 성별性別을 떠나 '인간'이 지닐 수 있는 강인함을 보여준다. 피와 잔혹함으로 도배되는 스릴러에 지친 독자에게 1980년대 아날로그 감성이 담긴 스토리는 색다른 김동으로 다가온다.

 

소설의 주인공은 아들 대니, 대니의 엄마 티나, 그리고 엄마 티나의 조력자 역할을 하는 변호사 엘리엇이다. 일년 전 사고로 아들을 잃은 대니의 엄마 티나는 미국 라스베이거스 쇼의 제작자로 큰 물량을 투입한 공연 <매직!>을 눈 앞에 두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의 눈에 아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길거리에선 아들을 닮은 환영이 보이고, 아들의 방에선 '죽지 않았어'라는 글자가 칠판에 적혀있다.

 

그래서, 대니의 엄마는 이것이 마치 아들이 자신에게 보내는 메시지처럼 느껴지면서 사고후 지금껏 아들의 시신을 한번도 확인한 적이 없음을 깨닫고 아들의 죽음에 의문을 품는다. 이에 그녀는 아들의 무덤에서 시신을 확인하고자 변호사 앨리엇을 만나다. 이때부터 그녀의 주변에선 의문의 사건사고가 발생한다.

 

아들을 찾겠다는 엄마의 도전을 단순히 그린다면 이는 스릴러가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작가는 여기에 '초자연적 현상'을 도입한다. 즉 '죽지 않았어'라는 메시지가 출현하면 주변의 기온이 급격히 하락하거나, 주변의 전기기구들이 멋대로 오작동하며, 또 마치 신호를 작정하고 보내는 것같은 '깜빡임' 현상들이 묘사에 동원된다.

 

죽지 않았어. 그러니까 이 글자는 여기에 계속 쓰여 있었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대니가 죽기 전 남긴 글자가 분명했다. 물론 아이의 글씨체는 그 애의 성격처럼 단정했다. 이런 식으로 휘갈겨 쓰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글자는 대니가 쓴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야 말이 된다. 그런데 이건 그 애가 버스 사고로 죽은 걸 두고 하는 말 아닌가? 아니, 우연의 일치다. 당연히 대니가 죽기 전에 써놓은 글자일 것이다. 그 애가 죽은 뒤에 이 글자를 발견했다고 밑도 끝도 없는 해석을 해대면 안 된다. 이건 그야말로 어처구니없는 우연의 일치다. 그녀는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보지 않았다. 또 뭐가 있을지 생각하면 너무나 무서워질 것 같았다. (29~30쪽)
 

한편, 이 소설이 갑자기 한국 독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유발하는 이유가 소설 후반부에 등장하는 이런 내용 때문이다. 리첸이라는 중국인 과학자가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중국에서 개발한 위험한 생물무기 정보가 담긴 디스켓을 갖고서 말이다. 이 물질의 이름은 우한 외곽에 위치한 DNA 재조합 연구소에서 개발되었기에 '우한-400'으로 명명되었다. 이는 연구소가 개발한 400번째 인공 미생물로 독자 생존이 가능한 종種이다. 우한-400은 완벽한 무기다. 오로지 인간만을 괴롭힌다. 그리고 매독균처럼 살아있는 인간의 몸을 벗어나면 1분 이상 생존할 수가 없다.

 

다른 생물무기와 비교했을 때 아주 중요한 장점이 있다. 바이러스와 접촉한 지 4시간만 지나도 타인에게 감염시킬 수 있다. 그리고 일단 감염된 사람은 24시간을 넘기지 못하고 모조리 죽는다. 대부분은 12시간 만에 목숨을 잃게 된다. 아프리카의 에볼라 바이러스보다 더 강력해서 우한-400의 치사율은 100퍼센트다. 중국은 무수히 많은 정치범들에게 이를 실험해서 얻은 결론이다. 아무튼 우한에서 발병된 신종 바이러스는 중국에서 개발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으니 이 소설의 내용과 매우 흡사하다.    

 

결국은 '사랑'이다

 

등장인물들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인간을 향한 애정을 끝까지 놓지 않는다. 인간의 악하고 잔혹한 면을 다루면서도 선함에 대한 확신을 끝내 놓치지 않는 이 소설은 단순히 스릴러로 정의하기엔 다소 무리인 듯 싶다. 실체가 없는 거대한 조직에 맞서 개인적인 슬픔을 이겨내는 어머니의 사랑은 극한 상황 속에서 더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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