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김수환 추기경 1 - 신을 향하여 아, 김수환 추기경 1
이충렬 지음, 조광 감수 / 김영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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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하는 시대를 살았던 추기경 김수환의 생애는 개인사에 그치지 않고 깊은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김수환 추기경의 전기에는 무수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 책은 한 개인의 전기임과 동시에 당대를 살았던 교회 안팎의 많은 사람들에 관한 집단 전기이기도 하다. - '감수의 글' 중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발자취를 따라

 

1951년 9월 15일, 한국전쟁을 발발한 북한이 연합군에 밀려 항복 직전까지 이르게 되자 뒤늦게 전쟁에 참여해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중국 인민군은 낙동강을 넘지 못하고 후퇴했다. 당시 대구에선 전투가 없었고 평민들은 일상으로 복귀했다. 대덕산 자락의 빼곡한 초가집 굴뚝에서는 저녁마다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직 가을이라기엔 이른 시기였다. 대덕산 골짜기를 따라 내려온 물은 계산동으로 흘러들었다. 개천을 따라 시내로 가는 길목에는 붉은 벽돌의 대구대성당(현, 계산성당)이 있다. 조선시대 끝자락에 대구에서 사목활동을 하던 프랑스 신부들이 고딕 양식으로 건축한 성당이다. 두 개의 뾰족한 첨탑, 그 위에 십자가가 있다. 이곳은 대구 천주교의 중심 성당이라 일요일엔 신자들로 붐볐다.

 

오늘은 토요일임에도 개천을 따라 이곳을 향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두 명의 새로운 신부가 탄생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대국가 고향인 김수환 부제副祭와 왜관 출신의 정하권 부제였다. 서울에서 대신학교(사제가 되기 위한 대학교와 대학원 과정)를 다니다 대구에 피난와서 나머지 과정을 마치고 오늘 사제 서품을 받는 것이다.

 

당시 신학교의 과정은 길었다. 대구 성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 2년, 서울 동성상업학교(현, 동성중고둥학교) 을조에서 소신학교 과정 5년, 대신학교 6년, 총 13년이었다. 이렇게 긴 과정을 마치고 신부가 되는 사람은 입학 때의 5분의 1 정도였다. 그런데, 김수환 부제는 동창들에 비해 4년이 늦은 17년 만에 신학교 과정을 마쳤다. 일본 유학 중 학병으로 강제징집을 당했고, 해방 후엔 일본군 전범재판의 증인으로 괌에 다녀오느라 2년 후에야 귀국할 수 있었다. 

 

김수환 부제의 친가와 외가는 조선 말 천주교 박해시대부터 신앙을 지켜온 오래된 교우집안이다. 할아버지는 대원군의 병인박해 때 희생된 순교자이고, 어머니와 두 누나는 대구 성요셉성당(현, 남산성당)의 오랜 신자였다. 셋째형은 사제 서품을 받은 김동한 신부다. 외가도 외할아버지, 큰외삼촌, 이모들 모두 신앙심이 깊다고 소문난 신자들이었다. 이처럼 친가나 외가를 아는 많은 천주교인들이 이곳 대구대성당으로 김수환의 서품식을 축하하러 왔다.

 

 

    

 

김수환의 부모는 경상북도 칠곡 장자골 옹기촌에서 결혼했다. 당시 아버지는 서른한 살, 어머니는 열입곱 살이었다. 천주교인끼리의 중매결혼이었다. 결혼 후에도 '옹기장이' 신세를 면치 못했다. 조선 말 천주교 박해 때 순교자의 자손이나 피신자들은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어 옹기 만드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국 천주교에서 '옹기장이'라는 단어는 모진 박해 속에서도 옹기를 구우며 자신들의 신앙을 지킨 조선시대의 신자와 가난한 옹기촌에 살면서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을 포기하지 않은 근대의 신자들을 상징하는 말이다. 그래서 훗날 김수환 추기경은 자신의 아호雅號를 '옹기'라고 했다. 서품식이 끝나고 가족사진 촬영 후 두 모자는 이렇게 대화를 나누었다. 곧 칠순이 될 어머니는 막내아들에게 경어를 사용했다. 이는 천주교 집안의 전통이었다.

 

"어머니, 고맙습니다"

"이제 신부님은 내 아들이 아니라 천주님의 아들이니, 신자들을 잘 잘 보살피이소"

 

 

식민지 소년의 분노

 

당시 제6대 대구교구장을 역임했던 최덕홍 신부(1902~1954년)가 김수환에게 사제 서품을 수여했다. 두 사람에는 이런 일화가 있다. 1939년 6월 25일, 최 신부가 소신학교 기숙사 사감으로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당시 4학년이던 수환의 가슴속에 있던 불덩이가 폭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수신 과목이 끝나자 장면 교장은 그를 교장실로 따라오라고 했다. 얼마 후 그가 시무룩한 모습으로 교실로 돌아왔다.

 

그러자 짝인 김정진이 물었다. "스테파노, 요왕 선생님(장면의 세례명이 요한이었다)이 왜 부르신 거니?" 수환은 잠시 숨을 고른 후 대답했다. "며칠 전에 수신시험 답안지에 나는 황국 신민이 아니라서 천황의 칙유勅諭(친히 내린 말)에 대해 소감이 없다고 썼다고 따귀를 맞았어. 너는 위험해서 신부가 되면 안 되겠다는 말씀도 하셨고. 아무래도 학교에서 쫓겨날 것 같아"

 

그때 동성학교 교사들 중에는 민족의식이 투철한 분들이 많았다. 경성제국대학 사학과를 졸업한 유홍렬 선생은 역사를 가르쳤는데, 일본 역사를 가르치는 척하면서 한국사를 얘기해주었고 한문강사였던 조윤제 선생은 <적벽부>를 가르치면서 신라의 화랑도 이야기 등을 해주었다. 또 장면 선생이 교장 업무 때문에 수업을 많이 못하자 새로 부임한 이훈 영어 교사는 창밖을 힐끗거리면서 상해 임시정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밖에 많은 한국인 교사들은 수업 시간에 일제의 만행들을 이야기했기에 수환의 마음속엔 분노의 불덩이가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독일 유학과 박사학위 포기

 

1962년 10월 11일, 가톨릭교회의 변화와 쇄신을 위해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열렸다. 세계 각지에서 참석한 주교만 2,540명이었다.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준비중이던 수환은 독일인 친구 신부들과 함께 바티칸 방송에 라디오 주파수를 맞춰놓고 발표 내용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가톨릭교회가 문을 활짝 열어 새바람을 맞아들이고, 쇄신을 통해 시대 변화에 적응하려는 희망의 대역사대역사였다. 가톨릭교회에 변화와 쇄신의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감지했다" -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중에서

 

그 발표를 듣는 순간 김수환 학생신부는 강한 전율을 느끼며 온몸이 굳는 듯했다. 이미 회프너 교수신부와 폴크 교수신부의 강의를 통해 들었던 내용들이라 얼른 이해가 됐다. 바로 이거다! 이제 가톨릭이 세상을 향해 엎드리는구나! 성신(성령)이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교황 요한 23세와 함께하고 계시는구나! 그 순간, 그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바티칸 성베드로대성당의 문이 열리는 모습이 보였다.

 

지도교수는 결국 오지 않았다. 그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참석차 로마에 와 있던 서정길 대주교에게 학위를 포기하고 귀국하겠다고 편지를 보냈다. 독일에서 보낸 7년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갔다. 비록 박사학위는 받지 못햇지만, 새로운 공부를 체계적으로 할 수 있었던 유익한 시간이었다. 신학적 시야와 사고의 폭이 넓어진 시기였다.

 

 

초대 마산교구장 주교로 임명되다

 

1966년, 마흔네 살의 중년 사제가 된 김수환은 교황청 서울 공사 안토니오 델 주디체 대주교로부터 전화를 받고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대주교의 말씀으로는 부산교구에서 마산 지방을 따로 떼어 새로운 교구를 설립하고 초대교구장 주교로 그를 임명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마산으로 떠나기 전 그동안 다녔던 교도소와 희망원을 방문, 봉사하는 수녀들과 작별인사를 했다. 그는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절대로 잊지 않겠다고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주교 서품식 일정을 5월 31일로 정한 그는 주교직 사목 표어를 무엇으로 정할지 많은 생각을 했다. 사목 표어는 주교로서의 사목 방향을 짧은 성경 구절이나 기도문 등에서 찾은 성구聖句로, 일종의 각오 같은 것이다.

 

그는 사제 서품 당시에는 성경 구절에서 성구를 정했지만 이번에는 제2차 바타칸공의회 실천 정신을 나타낼 수 있는 성구로 하고 싶었다. 그는 진정한 주교의 자세는 예수님처럼 세상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내놓아야 한다고,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온갖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들과 고통을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에 걸맞은 성구를 생각하느라 머리를 싸맸다.

 

얼마 후, 예수님께서 자신을 한없이 낮추시고 몸을 나누어주시며 우리들의 '밥'이 되어주셨듯, 자신도 모든 이에게 먹히는 존재, 많은 이의 '밥'이 되겠다는 마음으로 '여러분과 또한 많은 이들을 위하여'라는 경구를 사목 표어로 정했다. 주교 서품식은 마산 성지여중고 운동장에서 거행됐다.

 

 

노동자의 인권보호에 앞장서다

 

1968년 1월, 김수환 주교는 JOC 총무로부터 '심도직물 JOC 회원 관련 보고서'를 전달받았다. 그는 이 사건의 성격을 노동자들에 대한 인권 탄압이자 명백한 종교 탄압이라고 판단하고, 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JOC 전국 회원들이 해고노동자를 지원하기 위한 '하루 한 끼 절미節米 운동'도 전개해나갔다.

 

"교회는 그리스도교적 사회정의를 가르칠 권리와 의무가 있다. 노동력 착취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범하기 쉬운 자본의 횡포이다. 따라서 주교단은 강화성당 신부와 노동자들의 정당한 활동을 지지한다" - 가톨릭시보(1968년 2월 15일) 중에서

 
한국 최초의 천주교주교단 성명인 '사회정의와 노동자 권익 옹호를 위한 주교단 공동성명서'는 곧바로 로마교황청을 통해 교황 바오로 6세에게 전달되었으며, 이후 교황청으로부터 격려서한을 받았다. 이는 한국 가톨릭교회가 세상에 대한 거의 최초의 발언으로, 이후 가톨릭교회는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과 생존권보장 요구에 적극 앞장섰다.

 

 

서울대교구장이 되다

 

1968년 5월 29일, 김수환 대주교의 서울대교구장 착좌식이 거행되었다. 당시 서울시 인구는 약 430만 명이었고, 대교구 산하에 48곳의 성당과 63곳의 공소가 있었다. 신자 수는 약 14만 명이었다. 임시교구장 체제로 운영되던 지난 1년 동안 극심한 재정 문제에 시달리고 있는 실정이었다. 

한마디로 과도기였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의 실천은 한국뿐 아니라 오랫동안 가톨릭이 뿌리를 내려온 유럽 등 세계 각지에서 모두 겪는 어려움이었다. 그러나 변화와 쇄신은 시대의 흐름이었고, 물러설 수 없는 사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된 것이었다.

 

그는 붉은 벽돌의 명동성당을 바라보앗다. 한국 천주교를 상징하는 건물답게 웅장하고 위엄이 있었다. '서울과 비교도 안 되게 작은 마산교구의 주교가 된 지 2년밖에 안 되는 신출내기인 내가 대한민국 수도인 서울대교구를 변화시키고 쇄신할 능력이 있을까?', 그의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상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추기경에 임명되다

 

1969년 3월, 로마 교황청과 미국으로의 출장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당시에는 미국에서 한국까지 직행 비행기가 없어 일본에서 하루를 잔 후 다음 날 아침 서울행 비행기를 타야 했다. 그때 게페르트 신부로부터 전화가 왔다. 추기경에 서임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한동안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그토록 무거운 소명이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았다. 그는 서울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자신의 비서직을 수행중인 장익 신부에게 말했다. "장 신부, 만약 이 소식이 오보가 아니라면 이건 내가 아니라 한국 교회에게 내린 영예야. 선교사 없이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 선열들의 믿음을 세계 교회에서 인정한 거야. 이건 절대로 내 개인의 영예가 아닌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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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나처럼 살 수 있다
이요셉.김채송화 지음 / 스타리치북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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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윌리엄 제임스의 글을 인용하고자 한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뀔 것이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그리고 삶이 바뀔 것이다' 그렇다면 생각은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사랑과 기다림과 격려 속의 따듯함만이 스스로 선택하게 만든 것이다. 내가 선택한 생각을 바꿀 수 있는 따뜻한 방법은 바로 '즐거움'이자 '웃음'이다. - '머리말' 중에서

 

 

보이지 않는 힘이 더 큰 힘을 발휘한다

 

털어버릴 힘, 자신감, 자존감, 긍정적 가치관, 공동체를 지향하는 신념, 자아 정체성, 나를 조절할 수 있는 셀프컨트롤, 관계를 좋게 만드는 소통 등이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다. 이러한 힘을 필요로 하는가? 책은 우리들에게 짧다면 턱없이 짧은 '2박 3일 행복여행'을 제안한다. 이를 통헤 건강과 행복과 성취가 이루어지길 소망하면서.

 

저자 이요셉김채송화는 대한민국 부부 스타 강사 1호이자 한국웃음연구소 공동소장으로 '웃음 연구와 웃음치료'라는 한길만 걸어온 지 15년이 넘는다. 국내 최초로 웃음치료를 시행해 수많은 암환자와 불면증, 우울증 환자들에게 건강과 삶의 기쁨을 전파했다. 또한 웃음을 통해 수많은 이들의 자신감, 자존감을 회복시켜 행복이 넘치는 가정을 만들도록 도와왔다.

 

청와대, 검찰청, 시청, 교육청 등 관공소와 삼성전자, 한전, 이마트, KT 등 5천 곳이 넘는 기업을 돌며 특강과 세미나를 통해 신바람 나는 행복한 일터를 만들도록 이끌었다. 국내뿐 아니라 중국, 미국, 인도 등 한인사회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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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테라스에 펭귄이 산다 - 마젤란펭귄과 철부지 교사의 우연한 동거
톰 미첼 지음, 박여진 옮김 / 21세기북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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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살바도르는 펭귄이다. 암율하고 불안한 시절을 살아가던 사람들을 매료시킨 펭귄이다. 테러 조직이 미쳐 날뛰고 여기저기서 폭력적인 시위가 일어나는 가운데 금방이라도 무정부 상태로 치달을 듯 위태로웠던 친 페론 정권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위안을 준 펭귄이다. 당시의 자유, 기회, 사상 등의 개념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젊은 여행지였던 나와 죽음의 바다에서 우여곡절 끝에 구조된 씩씩한 펭귄 후안 살바도르는 더없이 행복한 우정을 나눴다. - '프롤로그' 중에서

 

 

반려동물과 우정을 나누다

 

저자 톰 미첼은 교사이자 화가다. 영국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악어 세 마리를 키웠을 정도로 시골인 마을에서 자랐다. 그 덕분에 동물과 새, 식물에 대한 애정이 깊다. 어릴 때부터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사는 친척들이 보내준 편지를 보며 먼 나라에 대한 동경을 키웠다.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 싶다는 이유로 20대 초반에 아르헨티나에서 기숙학교 교사로 생활한 바 있다.

 

1970년대 아르헨티나, 당시 혼란과 격변의 시기를 거치며 암울하고 불안한 시절을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웃음과 위안을 선사한 펭귄이 있었다. 이 책은 영국인 청년의 집 테라스에 살게 된 펭귄과의 특별한 우정이 담긴 실화다. 하얀 넥타이에 검은색 연미복, 새까맣고 반짝이는 눈동자, 실룩거리는 두툼한 엉덩이, 뒤뚱뒤뚱 걷는 짧은 다리, 호기심 어린 얼굴을 가진 '후안'은 키가 어른 무릎 높이만한 마젤란펭귄이다.

 

톰의 집 테라스에 사는 후안은 학교 제일의 스타다. 녹조 낀 수영장에서 함께 수영하고 아이들과 계단 빨리 내려가기 시합을 하거나, 럭비팀의 마스코트가 되어 응원도 하면서 아이들은 후안의 열렬한 팬이 된다. 학교 선생님들의 귀여운 술친구가 되고, 세탁실 아주머니의 든든한 지원자도 되어준다. 또한 근심에 쌓인 사람에게는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는 뛰어난 고민상담가다. 학교에서 주목받지 못하던 한 소년의 수영 코치가 되어 그의 삶에 큰 변화를 선사하기도 한다.

 

 

 

 

펭귄을 구하다

 

눈에 충격적이고 비통한 광경이 들어왔다.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움직임이 없는 검은색 물체였다. 처음엔 얼마 되지 않은 줄 알았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보니 그 수가 어마어마했다. 마치 검은 색 카펫을 깔아놓은 듯 까만 사체들이 해변을 온통 뒤덮고 있었다. 검은 기름을 뒤집어쓴 펭귄들이 해안을 따라 끝도 없이 길게 누워 있었다.

 

문명이라는 얼굴은 이같은 민낯을 드러낸다. 정말 무섭고, 잔인하고, 끔찍한 모습니다. 앞으로도 얼마나 이런 일들을 자행할지 암담하기만 하다. 소위 '죽음의 띠'로 불리는 기름 유출 사고는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다. 그 장소가 어디냐에 따라 죽어나가는 개체만 달라질 뿐이다. 태안 앞바다 기름 유출 사고로 한국에서도 얼마나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기름 띠를 벗겨내려고 노력했던가.

 

스물세 살의 영국 청년 톰은 우루과이 해안의 휴양도시 푼타델에스테에서 휴가를 즐기던 중 이 현장을 목격한 것이다. 그는 죽은 새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기가 영 거북스러워 일부러 걸음을 재촉하다가 시야 한편에서 언뜻 미약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이에 그는 걸음을 멈추고 움직임이 느껴지는 곳을 주시했다. 착각이 아니었다. 대견하게도 펭귄 한 마리가 살아 있었다. 온통 죽음뿐인 그곳에서 유일하게 고군분투하고 있는 단 하나의 생명이었다.

 

온 몸에 타르를 뒤집어쓴 채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몸을 깨긋하게 씻어준다면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위협을 느끼고 경계를 늦추지 않는 펭귄에게 그물을 던져 포획한 다음 그는 자신의 숙소로 데리고 갔다. 지난 40년 동안 펭귄의 개체 수가 80퍼센트 넘게 줄어들었다고 한다. 심각할 정도의 감소 이유는 환경오염과 무분별한 포획 때문이다. 결국 그 주범은 우리 인간들이다.

 

처음엔 완강하게 거부하던 몸짓이 얌전해졌다. 자신을 해치려는 게 아니라 몸에 묻은 기름을 제거해주려는 것임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는 목욕통 물을 비우고 다시 따뜻한 물을 채웠다. 세제를 부어도 더 이상 피하지 않았다. 덕분에 온몸 구석구석을 씻길 수 있었다. 이젠 목욕통에서 똑바로 일어서서 목욕에 적극 협조했다. 한 시간 정도 씻기고 나니 펭귄의 형체가 드러났다.

 

그는 아르헨티나에 신입교사로 일을 해야 하기에 휴양지를 떠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야만 했다. 문제는 펭귄의 처리였다. 아파트에 그냥 내버려둘 수도 없고 생각 끝에 다시 바다에 풀어주기로 했다. 이게 펭귄에게도 자유로운 삶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데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펭귄 또한 동족과 함께 있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사용한 욕실 용품을 채우기 위해 욕조에 펭귄을 둔 채 그는 장을 보러 갔다. 돌아와보니 욕조에 있던 펭귄이 폴짝폴짝 뛰며 날개를 파닥거렸다. 펭귄의 작은 두 눈이 반짝였다. "어디 갔다 이제 와! 한참 기다렸잖아. 도대체 날 여기에 두고 어디서 뭘 하다 온 거야?"라는 눈치였다. 마치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처럼 녀석은 그를 반기고 있었다.

젖은 모래 위에 펭귄을 놓아주고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신나게 바다로 풍덩 뛰어드는 모습을 상상했는데 웬걸 펭귄은 곧장 그에게로 달려오는 게 아닌가. 이번엔 바위 위에 올려두고는 살펴보았다. 잠시 후 파도가 밀려왔고 녀석이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는데 눈 앞에 버둥거리는 녀석이 보였다. 이러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지만 결국 펭귄은 그에게 돌아오고 말았다.  이젠 하는 수 없이 아르헨티나로 데려갈 수밖에 없다.

 

학교로 돌아가야 하는 톰은 커다란 가방 속에 펭귄을 넣고 종이봉투로 머리를 가린 채 몬테비데오행 버스에 오른다. 도중에 펭귄의 배설물 냄새 때문에 버스에서 황급히 내리고, 가방 속 존재를 눈치 챈 구두닦이 소년에게 팁을 두둑이 줘야 했다. 배를 타고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도착했더니 세관을 통과해야 하는 엄청난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국경을 넘어 학교로 돌아온 톰이 자기 방 테라스에 펭귄의 방을 만들어주면서 유쾌한 동거 생활이 시작된다.

 

이 책은 실화를 소재로 다루고 있다

 

톰의 테라스에 사는 펭귄 '후안'은 학교에서 제일 가는 스타가 된다. 럭비팀의 마스코트가 되어 응원도 하고, 아이들과 녹조 낀 수영장에서 함께 수영을 하며 학교에서 소외되었던 한 소년의 수영 코치가 되어 그의 삶에 큰 변화를 선물하기도 하고, 아이들과 계단 빨리 내려가기 시합도 하면서 아이들을 자신의 열렬한 팬으로 만든다.

 

또 세탁실 아주머니의 든든한 지원자가 되어주고, 학교 선생님들의 귀여운 술친구가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근심에 쌓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줌으로써 '고민상담가'로서의 뛰어난 면목을 보이기도 한다. 개그 같은 얘기지만 아무튼 후안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당연히 펭귄과 인간 사이에 대화란 없다. 오직 느낌과 몸짓으로 나누는 바디랭귀지 뿐이다. 그럼에도 펭귄 후안이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소중한 존재로 자리매김한다는 게 일견 감동적인 이야기이면서 한편으론 그만큼 우리들이 상호 간의 대화가 부족하고 정을 나누지 못하고 있는 슬픈 자화상으로 비춰진다. 사람 대신 애완견을 선택한 우리들에게 뭔지 모를 화두를 던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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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사는 용기 - 인생에 후회를 남기지 않는 청춘 사용법
혼자 걷는 고양이 지음, 김미경 옮김 / 다온북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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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주 평범한 대학에서 지극히 평범한 분야를 전공했습니다. 평범한 대학에 갔으니까 당녀히 평범하기 짝이 어없는 인생을 살거하고 생각했죠. 그러다 책 한 권을 보게 되었어요.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한 환경에서 쉬지 않고 노력해서 눈부신 인생을 살게 되는 내용이었어요. 그때 처음으로 대학이 인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인생을 좌우하는 건 그 사람의 행동이라는 걸 알게 되었죠. 그때부터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어요. 그렇게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했죠. - '한국어판 서문' 중에서

 

 

어떤 내일을 원하는가?

 

책은 평범했던 저자가 거둔 비범한 성장의 기록이자 현실에 부딪혀 좌절하는 청춘들의 고민에 대한 답장이다. 자신의 경험뿐만 아니라, 수많은 청춘들이 고백한 고민을 책을 통해 공유하도록 해준다. 즉 입시를 망쳐서 희망이 없다는 학생부터, 번번이 취업의 문턱에서 좌절하는 취준생, 반복되는 업무에 지쳐 꿈마저 잃은 직장인, 꿈 때문에 모든 걸 포기할 만큼 넉넉하지 않은 처지의 사람들을 위로하면서 현실적인 충고를 한다.

 

책의 저자 자오싱趙星은 현재 오길비(Ogilvy) PR에서 근무 중이다. '혼자 걷는 고양이'라는 블로거로 활동하며 올린 직장 생활과 성찰을 담은 청춘 일기가 많은 이들로부터 공감을 얻으며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중국의 차세대 오피니언 리더로 주목받으며, 시나닷컴에서 진로상담 전문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좋아하는 일을 해야만 옳은가(?)

 

우리는 좋아하는 일을 해야 옳다고 믿는다. 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뭘까? 이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다. 저자도 "일이 아니라, 취미가 내 마음의 소리를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했다. 하지만 일은 자신이 원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도대체 마음이 원하는 일은 무엇일까? 좋아하는 취미를 본업으로 삼는다면 정말 즐겁게 일할 수 있을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왜 계속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집착할까? 도피하고 싶어서다.

 

우리는 늘 하는 일이 즐겁지 않고, 원치 않는 삶을 산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마음의 소리를 따르자"라는 말로 자신을 격려한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수록 현실에서 멀어진다. 그리고 환상에 빠지고 원망을 쏟아낸다. 사실 평범한 사람이 생각하는 마음의 소리란, 가만히 앉아서 공짜로 얻는 떡을 말한다. 세계일주를 할 정도로 돈이 많기를 바라지만, 욕먹어 가며 돈을 버는 건 자신이 바라는 삶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현실에서 도피한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서 돈 걱정 없이 사는 사람이라는 환상을 품는다. 그래서 직장을 그만둔다 어쩐다, 힘들다고 몸부림치면서 지금 사는 세상은 본인이 바라던 세상이 아니라고 하소연한다. 그렇게 몇 번 난리를 치고 나면, 인생이 더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밖에는 달라질 게 없다.

 

 

"당신이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다. 무엇을 하는지가 중요하다"

 

 

환경을 탓하는 시간도 아깝다

 

현재 자신이 처한 환경이 진흙탕 같아서 벗어나고 싶다는 고민을 토로하는 편지를 저자는 많이 받는 편이다. 또 수준이 한참 떨어지는 학교에 합격해서 부모님께 죄송하다거나, 월급은 적은데 일이 너무 고달파 그만두고 싶다면서 지금 상황을 어떻게 하면 탈피할 수 있는지 알려달라는 식이다.  

진흙탕 같은 환경은 뭘까? 동료의 아이큐가 떨어지고 사회적 지위가 낮기 때문에? 학교 건물이 별로고 선생님 수준이 롤 모델로 삼을 만큼 높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진흙탕이라고 말하는 건가? 도대체 어떤 환경에 데려다 놓아야 자기 미래에 자신감을 가질지, 알 수가 없다. 우리가 남을 원망할 때 마찬가지로 우리도 누군가에겐 원망의 대상일 수 있다. 지금 환경이 별로고 주변 사람들의 수준이 떨어진다고 불평할 때, 우리도 남들 눈에 수준 낮은 사람으로 보일지 모른다.

 

정말로 역경에 부딪혔거나 진심으로 흙탕물 같은 환경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한다면, 여기저기 묻고 징징거릴 여유조차 없다. "할 일이 없어서 원망이나 하고 있는 거야. 할 일이 있는데 그럴 시간이 어디 있겠어"라고 대꾸해주고 싶다. 이 말은 저자의 친구가 한 말이다. 항상 이를 기억해 두고 저자도 원망이 생길라치면 바로 이 말을 스스로에게 한다.

 

"노력과 시간을 들여야만 어제보다는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좋아질 수 있다"

 

 

너무 많이 바라는 게 아닐까(?)

 

삶은 전부 주지 않는다. 특히 당신이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더더욱 그렇다. 대학에서 막 졸업한 친구들이 바빠 죽겠다고 푸념할 때가 있다. 사람도 만나고, 놀러도 다니고, 푹 쉬고, 잠도 많이 자고, 잘 먹어서 피부도 윤기나게 가꾸고 싶다. 또, 일을 잘해서 돈도 많이 벌고 실력도 키우고 싶다. 그렇게 다 하려니 시간이 너무 부족한데 어떻게 균형을 맞춰야 하느냐고 묻는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균형을 이룰래야 이룰 수가 없다. 누구나 마찬가지다.

 


바라는 게 너무 많은 거 아닌가? 미친 듯이 노력해야 남들 눈에 여유 있어 보인다. 그리고 세상엔 공짜도 없고 헛된 고생도 없다. 진짜 소중한 일에 더 마음을 쓰고 더 꾸준히 하라. 어떤 노력을 했고 얼마나 꾸준히 했는지는 바로 눈에 보이는 법이다.

 

신은 공평하다. 얻은 게 있다면 다른 걸 조금 손해봐도 무방하다. 하나를 얻으면 곧 큰 시련이 닥칠 거다. 로또 복권에 1등 당첨된 사람이 아내와 이혼하고 결국엔 모든 재산 다 날리고 길거리 노숙자로 전락하는 사례가 있듯이 말이다. 신이 무엇을 주셨는지 따지지 말고 자신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먼저 생각하라. 만약에 서른 살 전에 전부 얻었다면, 앞으로 좋은 일이 별로 없겠거니 생각해라.

 

 

어디든, 어떤 상황이든, 나다운 내가 최고라고 믿어라. 넘지 못할 산도, 극복하지 못 할 어려움도 없다. 어려움을 딛고 돌아보면 깨닫게 될 거다. 그 모두가 그저 지나가는 바람과 같았음을.

 

 

내가 잠든 사이, 누군가는 노력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하나만 꾸준히 할 수 있느냐고, 어떻게 하면 환골탈태할 수 있느냐고, 어떻게 하면 인생의 새로운 장을 펼칠 수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어떤 일을 정말 하고 싶다면 이런 질문도 하지 마라. 질문자는 그냥 누워서, 자면서, 간식을 먹을면서, 드라마를 보면서 힘 하나 안 들이고 멋진 인생을 살 방법이 알고 싶은 거 아닌가?

 

"내가 잠든 사이, 누군가는 노력하고 있다"

 

군 입대하기 전, 대학 1학년 1학기 때 곧 입대를 앞 둔 나는 청춘과 자유를 만끽하고 싶어 동기들과 자주 어울리며 실컷 놀았다. 놀이에 심취하다 보니 중간고사 일정이 잡힌 줄도 몰랐다. 당시 나는 수유리 시장 인근에서 친한 동기와 하숙방을 같이 사용했지만, 사실 초급행원의 부당한 처우에 불만을 갖고 대학입시를 준비해 늦게 입학했기에 동기들에 비해 나이 많은 1학년이었다.

 

당시 상고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문교정책이 바뀌면서 상고는 인문계 학교와는 교과목이 영 딴판이었다. 즉 주판, 상업부기, 상업영어, 상품학 등 배우는 과목들이 대학입시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루는 하숙방 동기가 크게 코를 골며 자는 통에 잠이 깨어 일어난 나는 '어떻게 공부해서 입학한 대학인데 놀기만 할 것인가?'란 생각이 미치자 정신이 번쩍들었다. 그때부터 중간고사 준비를 했다. 낮엔 동기들과 어율려 놀더라도 새벽에 일찍 일어나 공부를 계속했다. 결국 성적 장학생이 되었다. 나중에 하숙방 동기가 새벽에 일어나 공부한 사실을 알고 나를 '독종'이라고 불렀다.

 

 

무작정 회사를 그만두지 말라

 

젊은이들은 다분히 충동적이다. 충동은 분노로 변하고 분노로 인해 침착함을 잃는다. 최근 몇 년간 물가는 올랐지만 월급은 늘 제자리다. 게다가 업무 스트레스는 커지고, 슬프고 분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그냥 있다가는 사고를 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결국 퇴사를 결심하고 과감하게 사직서를 제출한다.

 

"이제 이 몸은 그만 물러가겠다고 전해라"

 

이 순간만큼은 패기 넘치는 모습과 영웅적인 자태 때문에 부러움의 시선이 막 날라온다. 하지만 이 순간이 지나고 나면 어떤 일이 생길까? 잠간은 늘어지게 쉴 수 있어서 마음이 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냉엄하다. 요즈음 같은 불경기에 다른 직장을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최근 친하게 지내던 후배가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었다. 연말 상여금 때문에 사장과 트러블이 생겼는데 이게 만족스럽게 해결되지 않자 블만이 점점 커져서 1월말에 사직서를 던졌다. 평소 작은 회사라 과중한 업무에다 낮은 처우로 인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던터라 언젠가는 그만 둘 것이란 생각은 늘 있었다. 그런데, 설연휴 때 식사를 함께하며 향후 계획에 대해 물었더니 아무런 대책 없이 사직을 결행했다는 거다. 가족의 안정된 생활을 염두에 둔다면 이는 용기가 아니라 사실 만용이었다.

 

이처럼 어리석은 행동을 해선 안 된다. 나중에 뭘 한 건지 충분히 고민한 끝에 그만둬야 한다. 대부분 당장의 무거운 짐과 우울함을 견디지 못해 허둥지둥 퇴사하고 만다. 하지만 행복은 짤다. 반면에 공황 상태는 길다. 왜냐하면 나갈 돈은 계속 생기는데, 들어오는 수입이 없기 때문이다. 최소한 다른 직장이나 생업을 정한 다음에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야 한다.

 

 

꿈은 고독이라는 시험을 치뤄야 한다

 

우리들이 가는 길에 대해 만인의 동의를 받기는 어렵다. 어떻게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지지를 해주겠는가 말이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우리의 그런 길을 심하게 몰아붙이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냉혹한 현실이 두렵고 조금이라도 더 빨리 앞서 나가려고 삼삼오오 뭉치려고 한다. 하지만 한 번 생각해보자. 이렇게 타인의 지지와 격려를 받아야만 용기가 난다면 절대로 멀리 갈 수가 없다.

 

길은 전부 미래로 통한다. 여기서 어디까지 가느냐가 중요한 포인트다. 어려움을 하나씩 극복하고 나중에 돌아보면, 그 당시 세찬 비바람처럼 느껴졌던 문제가 그저 가랑비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런데, 그 가랑비를 맞으면 우리들의 내면은 더욱 강건해진다. 자신의 주변 반응이나 타인의 시선에 맞추려고 전전긍긍한다면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세상에서 우리 자신을 무조건 믿고 도와주는 사람은 없다. 가족과 친구들이 옆에서 힘껏 박수쳐야지만 꿈을 이룰 수 있다면, 그건 꿈이 아니라 허영심을 위해 쇼를 하는 것이다.

 

 

10년 뒤, 나의 모습은(?)

 

우리는 시간과 함께 성장한다. 천방지축이었던 젊은이가 어느 날 차, 집, 돈, 부인이나 남편, 자식이 있는 사회인이 된다. 인생의 모습이나 행동에 옳고 그름이 없다. 모두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 어떤 것이 자기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하느냐가 중요하다. 어디에 살고, 어디에 다녀서가 아니라 아울러 똑같은 날을 반복하는 게 아니라, 미래에 대해 어떤 꿈과 희망을 갖고서 얼마나 많은 땀을 쏟느냐에 따라 우리의 일상은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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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소방관의 기도
오영환 지음 / 쌤앤파커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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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방관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떨어지는 출동 지령, 생사의 갈림길에서 고통에 울부짖는 사람들, 흩어지는 생명들 가운데 구해낼 수 있었 던 그 작고 어린아이. 소방관이 아니었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순간들을 나는 매일같이 경험하고 있다. 소방관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렇게 참혹한 현실 속에서 또 한 기적과도 같은 희망을 발견해내기에 삶의 아름다움을 누구 보다 절실하게 실감하는 일이다. 오직 타인의 손을 잡아주기 위 한 일을 사명으로 삼는 삶. 그리고 소방관들은, 수많은 현장의 크고 작은 위험에 스스로 뛰어드는 날들 속에서 그 자신마저 불살라지는 희생의 순간을 맞이하기도 한다. - '프롤로그' 중에서

 

 

먼저 간 선배들의 영웅적인 희생에 존경을 표한다

 

살려내지 못한 이는 누구였던가, 1분 1초만 더 빨랐더라면. 실 낱같은 희망에 기대어 간절히 기도했고, 너무도 자주 반복되는 좌절과 절망 속에 수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 모든 순간은 오랜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가슴속 깊은 상흔으로 남았지만, 위험에 처한 누군가의 손을 잡고 구해낼 수 있던 어느 날 스스로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와 사명에 최선을 다했기에 또 한 번의 감격 적인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저자 오영환은 대한민국 소방관이다. 부산 의무소방대원을 거쳐 서울소방에 임용된 뒤 도심 119구조대원과 산악구조대원, 그리고 구급대원으로서 오직 현장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사람을 구하지 못한 날엔 좌절감에 남몰래 혼자 울었고 꽉 막힌 도로에서 구급차가 꼼짝 못할 땐 조여드는 심장에 괴로워했다. 죽을힘으로 달려가 심폐소생술을 실시하고 꺼져가던 생명

 

 

 

 

 

제가 부름을 받을 때에는,

신이시여

뜨거운 화염 속에도

한 생명을 구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내가 늘 깨어 살필 수 있게 하시어

가냘픈 외침까지도 들을 수 있게 하시고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화재를 진압하게 하소서 

 

- <어느 소방관의 기도> 중에서

 

위의 시詩는 1958년 미국의 한 소방관이 현장에서 아이들을 끝끝내 구출해내지 못한 어느 날 써내려 간 것으로, 국내에서도 인기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한 유명 대사로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이다. 또 '신의 뜻에 따라/ 저의 목숨을 잃게 되면/ 신의 은총으로/ 저의 아내와 가족을 돌보아주소서'라는 글귀는 우리 모두에게 깊은 울림을 전한다.

 

 

절망은 아직 나의 몫이 아니다

 

시내 곳곳에서 수시로 발생하는 응급 환자들은 더러는 살고 대개는 죽었다. 죽음은 늘 너무나 가까운 곳에 있었고, 그곳엔 어김없이 슬픔이 따랐지만 일일이 그 슬픔에 젖어버릴 순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의식적으로라도 익숙해져야만 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낮과 밤의 시간 동안 수많은 생사의 갈림길을 향해 다가가야 하는 소방서의 구급대원으로서, 그 모든 개별적인 슬픔에 동화同化되어서는 아마도 그 어두운 중량감을 이겨낼 수 없을 터였다. 물론 주관적인 체험을 객관적인 시야로 바라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익숙해졌다고 믿던 그 어느 날에라도, 문득 고개를 돌려보면 슬픔은 여전히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너질 수 없다' 

 

 

 

 

 

 

 

왜 이런 날에도 사고가(?)

 

오늘은 설날, 우리 팀은 전원 근무중이었다. 새벽 네 시가 넘은 시각, 광나루길로 출동이다. 현장은 녹다만 눈더미와 시커먼 매연이 뒤엉켜 지저분했다. 운전석에 앉은 남성의 상체는 찌그러진 차량 하부에 깔려 있었다. 창문 쪽으로 고인 피 웅덩이가 조금씩 퍼져 나간다. 차석 주임님이 깨진 유리창 틈으로 요구조자요구조자의 몸을 만져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부대장님은 지휘대장님에게 다가가 고개를 저었다. '즉사 추정'

 

깨끗한 정장 차림의 남자의 신원은 지갑 속의 신분증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86년생, 스물여섯, 저자와는 불과 두 살 차이. 어금니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거주지는 지방의 한 오피스텔로 적혀 있었다. 차량 뒷 창문 너머로 떨어져 있는 금빛 상자가 보였다. 다시 보니 보자기에 곱게 싸여 있는 나무 상자였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가시길 바랍니다'

 

교대를 마치고, 퇴근길에 정종을 나눠 마셨다. 토끼 같은 딸들이 기다리는 부대장님은 먼저 일어서며 나에게 술을 한 사발 더 따라주었다. 차석 주임님은 형수님이 아들을 데리고 고향에 갔다며 쓸쓸히 말했다. 일찍 취한 나는 지난 크리스마스 저녁에도 트럭에 깔린 아저씨를 꺼내지 않았었냐며 왜 이런 날에도 사고가 일어나야 하는 거냐고 물었다. 선배들은 쓴웃음을 지으며 이런 날뿐 아니라 저런 날에도, 또 다른 날에도 사고는 언제나 늘 항상, 시시때때로 나는 거라고 말했다. 

 

 

 

구조대원은 절대 포기하는 거 아니다

 

부산 해운대 수상구조대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무전기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즉시 13망 열한 시 방향 2차 부표로 이동!" 즉시 제트스키를 몰고 나아갔다. 거리를 좁혀갈 때 저 멀리, 전방 십여 미터 앞 수면에서 위태로운 그림자를 발견했다. 2차 부표를 넘어선 지점에서 떠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하는 희미한 몸부림이 보였다. 레스큐 튜브를 옆구리에 끼고 입수했다.  

 

깊은 수심 속에서 버둥거리는 저자의 손에 너무나 강력하고도 간절한 손길이 와서 닿았다. 그가 먼저 잡은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 어떤 간절한 힘이 수압을 뚫고 그의 손을 강하게 붙들고 있었다. 마주 잡은 손을 꽉 잡고 힘차게 핀을 차며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아…… 이럴 수가.

 

너무도 작은 여자아이였다. 열 살 정도나 되었을까. 동그란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 눈이 풀려 있었다. 소리칠 힘이나 의지는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의식조차 혼미해 보였다. 그러나 아이의 조그만 손은 진정 놀랄 정도의 강한 힘으로 나의 손을 간절히 부여잡고 있었다.

 

서둘러 레스큐 튜브를 아이의 겨드랑이 아래에 두르고 양 끝을 연결했다. 작은 몸이 행여 빠져버릴까 튜브에 달린 슬링으로 한 번 더 둘러 묶었다. 그 와중에도 파도는 쉴 새 없이 밀려들었고, 그는 숨을 깊게 한 번 들이마시고 아이의 눈을 바라보았다. 바르르 떨리는 아이의 몸이 차가웠다. 조그만 손을 다시 한 번 단단히 움켜쥐었다.


"괜찮아. 아저씨가 구해줄게"

 

 

 

희망은 숱한 절망 속에서 피어난다

 

삼각산구급대, 의료진은 동맥혈 검사를 위해 환자의 사타구니에 거대한 주삿바늘을 꽂아 넣었다. 멈췄던 심장이 처음으로 다시 뛰고 있음을 목격했다. 최후의 호흡이 꺼져가던 한 노인을, 죽음의 문턱에서 그의 가족과 이웃 그리고 그의 일상이 있는 이 세상으로 다시금 데려다 놓을 수 있었다.

 

갑작스럽게 눈이 화끈거린다. 흔들리는 시야가 당황스럽다. 마스크 아래 이를 꽉 깨물어본다. 누가 볼까 서둘러 화장실로 가며 손을 펼쳐 관자놀이를 눌러야 했다. 나는 세면대에 고개를 처박고서 눈물을 틀었다. 모든 긴장이 쏟아져 내린 자리에 따뜻한 무언가가 가득히 차올랐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살아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소방공무원의 인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조사한 소방공무원의 인권 실태는 참혹했다. 절반 가까이 되는 사람이 수면 장애를 앓고 있었다. 다섯 명 중 한 명은 우울증이나 불안 장애를 앓고 있었다. 공항 장애를 얻어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운 사람도 있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발병률은 일반인보다 무려 10배나 높았다. 자살을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람도 7%가량 되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언제나 묵묵히 일했다.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했다. 마땅히 준비되어야 할 것들이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서도 국민의 생명을 지킨다는 자부심 하나로 땀 흘려 일했다. 하지만 여전히, 달라진 것은 없었다. 사고가 있을 때마다 언론에서 강조하는 것도 잠시뿐, 개선책은 너무나 더디기만 하다. 사람들도 세상도 당장 보이지 않는 것은 너무나 빨리 잊어버린다.

 

소방관이 되고 싶었던 어린 시절의 마음을 떠올린다. 감당할 수 없는 위험에 처한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다가가 손 내밀어 주는 사람. 그 든든하던 뒷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렇게 살 수만 있다면 내 삶도 충분히 가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믿음 하나로 지금 이 순간에도 최선을 다해 달리고 있다. 하지만 그 달음질 끝에서, 절망해야 하는 순간도 나날이 늘어가고 있었다.

 

구급대원에게 욕설을 내뱉는 사람을 마주할 때, 소방관은 심부름 센터가 아님을 설명해야 할 때, 목숨 걸고 현장으로 나가면서도 충분한 장비와 인력을 지원받지 못할 때, 수시로 발생하는 소방관의 부상과 순직 소식이 들려올 때. 나는 생각한다. 언제쯤 달라질 수 있을까. 달라지는 날이 과연 오는 걸까. 열악한 처우를 동정해달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소방관의 열악한 환경은 곧 국민 자신의 안전과 직결된다는 것만 알아주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우리는 늘 달린다

 

깊은 물 아래 가라앉은 어린아이의 손을 마주 잡을 수 있었던 날. 멈추었던 한 노인의 심장이 내 손끝에서 다시 뛰던 날. 걷고, 숨을 쉬고, 밥을 먹던 날.

 

타오르는 불길과 연기 아래 꺼져가는 마지막 숨소리에 귀 기울이며, 최후의 순간까지 포기해선 안 되는 이들이 소방관 이기에 우리는 몇 번을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야 하는 숙명을 지녔다. - '에필로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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