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위스키 성지여행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윤정 옮김, 무라카미 요오코 사진 / 문학사상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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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한다면, 이처럼 고생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잠자코 술잔을 내밀고 당신은 그걸 받아서 조용히 목 안으로 흘려 넣기만 하면 된다.(p15~16)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한다면, 수다스런 마누라들과 사는 남편들은 모두 간암에 걸려  일찍 돌아가셔야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적지않은 날들을 고주망태가 되어 보내야 할 것만 같다.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가 아니고 그냥 언어인 것이 다행스럽다.



짐에게 술통 제조 기술을 전수한 그의 스승은 하루에 위스키를 딱 두 잔씩 마셨다. 그보다 많이도 마시지 않고, 그보다 적게도 마시지 않았다. 그리고는 아흔여덟까지 살았다고 한다.(p49)


       위스키를 이용한 장수비법. 비법을 잘못 시행하여 주화입마시에는 알콜중독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져 인생 종치는 수도 있을 것이다. 내 보기에 이 비결의 요점은 ‘딱 두잔’에 있다. 문제는 절제에 있다는 말이다. 굳이 위스키일 필요도 없다. 와인이면 어떻고 소주면 또 어떻겠는가(소주는 좀 그런가?)



내가 위스키 만드는 일을 좋아하는 까닭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낭만적인 직업이기 때문이지(p50)


       그 직업이 정말 낭만적인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정말 낭만적이라야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우리는 장례식에서도 위스키를 마시지”하고 아일레이 섬사람은 말한다. “묘지에서 매장이 끝나면, 모인 사람들에게 술잔을 돌리고 이 고장에서 빚은 위스키를 술잔 그득 따라주지. 모두들 그걸 단숨에 비우는 거야. 묘지에서 집까지 돌아오는 춥고 허전한 길, 몸을 덥히기 위해서 말야. 다 마시고 나면, 모두들 술잔을 바위에 던져서 깨 버려. 위스키 병도 함께 깨 버리지. 아무것도 남기지 않아. 그것이 관습이거든.”(p62)


       망자에 대한 슬픔의 표현이라고 해도 술병이나 술잔을 깨어 버리는 것은 조금 아깝지 않은가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것이 관습이라는 데에야, 뭐라 할 말이 없지. 관습은 우리가 어쩔수 있는 것이 아니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아일레이 위스키의 맛을 설명할 수 없어. 그 매력은 해명할 수 없는 거지.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이지. 무라카미씨, 가장 나중에 오는 건 사람이야. 여기 살고 있는 우리가 바로 아일레이 위스키의 맛을 만드는 거야(p77~p80)


       위스키의 맛을 만드는 일은 물론이고, 그 어떤 사소한 것이나 그 어떤 중차대한 것이든 그 일을 결국 이루어내는 것도 사람이지만 결국 그 일을 망치는 것도 사람이다. 사람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나중에 올 수밖에 없는 까닭일 것이다.



아일랜드를 무대로 한 존 포드의 <아일랜드 연풍>이라는 영화중에서, 상대 배우가 베리 피츠제럴드에게 위스키를 권하면서 “물을 줄까”하고 물으면, “난 말이지, 물을 마시고 싶을땐 물만 마셔. 위스키를 마시고 싶을 땐 위스키만 마시지”하고 대답하는 제법 차밍한 장면이 나온다.(p93)


       네이버 국어사전에는 연풍의 뜻이 세가지로 풀이 되어 있다. 1. 연풍(連豊) : 여러 해를 계속해서 드는 풍년. 2. 연풍(軟風) : 가볍고 시원하게 부는 바람. 혹은 ‘산들바람’의 이전 일컬음. 3. 연풍(年豊) : 풍년이 듦. 그리고 장동건이 나오는 영화제목이 연풍연가인데 이 연풍(戀風)은 국어사전에 나오지 않는다. 굳이 풀이하자면 ‘사모하는 바람(?)‘, 존포드의 영화에서 연풍의 뜻은 무엇일까 궁금하다.

 

산지에서 멀어질수록 그 술을 구성하고 있는 무언가가 조금씩 바래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흔히 말하듯이 “좋은 술은 여행을 하지 않는” 법이다.(p130)

       지당근하신 말씀이다. 좋은 친구와 좋은 술은 내가 직접 그들을 찾아 가야하는 법이다.



아일랜드의 딩글에 있는 한 바 벽에 걸려있는 세명의 아일랜드 문학가. 브랜단 베한, 제임스 조이스, 오스카 와일드(p117의 사진)


       브랜단 베한이 누구지. 과문한 본인 알라딘에서 검색해 보았으나 없었다. 야후를 찾아보니 <인질>이라는 희곡을 쓴 아일랜드 작가라는 정도. 생몰년도는 1923-64



 

짧은 글이다. 위스키 산지로 유명한 스코틀랜드 서부의 작은 섬 아일레이와 아일랜드 일대를 둘러보는 여행기이다. 읽는데 1시간도 채 걸리지 않은 것 같다. 듬성듬성한 글씨에  140페이지 정도의 분량인데, 거기다가 또 50페이지 정도는 사진이다. 서점에 가서 서서 읽기 딱 좋은 책이다. 하지만 하루키의 기행문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더구나 설상가상으로 이제 막 위스키에 관심을 가져 볼려고 하는 그런 사람으로서는 이 책을 사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후회는 없지만 그렇다고 잘샀다는 생각도 없다. 다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할 뿐이다. 살다보면 호오(好惡)를 떠나 어쩔수 없이 하게 되는 일도 많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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閑山島 夜吟 한산도 야음

이순신


한 바다에 가을 빛 저물었는데

찬바람에 놀란 기러기 높이 떴구나

가슴에 근심 가득 잠 못 드는 밤

새벽 달 창에 들어 칼을 비추네


水國秋光暮 驚寒雁陣高

憂心輾轉夜 殘月照弓刀


*************



우리 공장에서 전개하는 독서운동의 5월달 선정도서는 김훈의 <칼의 노래>이다. 당근 읽어 보았고, 어줍잖은 서평도 올렸던 것 같다. ‘지나간 모든 끼니는 닥쳐올 단 한 끼 앞에서 무효였다’라는 제목의(물론 소설중에 나오는 문구다). ‘닥쳐올’이라고 하니..‘닥쳐라’가 문득 떠오른다. 이번 기회에 다시 한번 읽어 볼 생각이다. 김훈이 한글 산문 미학의 한 경지에 올랐다는 말은 지당하다고 생각하거니와, 일부 그의 글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인사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재독의 가치가 있다는 나름의 계산이다.


김훈이 그려낸 이순신은 광화문 앞에서 긴칼 옆구리에 차고 떡하니 서있는 시원하게 찢어진 눈매의 위풍당당한 이순신이 아니었다. 소설 속의 이순신은 쓸쓸하고 외롭고, 고독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허무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이순신은 과연 누구인가.....이순신.........순신, 순신, 순신하고 불러보니 그 이름이 요즘은 잘 사용하지 않는 이름 같다는 전혀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그런 생각만 떠오르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역시나 잘 모르겠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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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ni 2006-05-04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네시로 카즈키의 <레벌루션 No. 3> 등 더 좀비즈 시리즈에 재일교포 주인공 이름이 '순신'이지요. 일본어로 발음하기 어려울 텐데, 묘한 이름이라고 생각했어요.

붉은돼지 2006-05-07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설마 성도 이씨는 아니겠지요?
 

 

 

 

 

이번 달 특강에는 <연어>의 저자 안도현이 초청되었다. 경북예천이 고향이고, 대구 대건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때 시인 자신만큼 상을 많이 탄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라고 한다. 온갖 백일장이며 문예공모에 당선되었다고 하니 이른바 소년 문사로 일찍부터 문명을 휘날렸으며 수많은 여학생 팬들을 몰고 다녔다고 한다. 문학을 하게된 데에 대하여 뭐 이렇다할 특별한 계기나 동기는 없었던 듯 하다. 몇 년간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전교조활동으로 해직되었다가 복직했다. 그후 교직을 떠나 전업작가생활을 하다가 지금은 우석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요즘은 북쪽에 나무를 보내는 일을 하고 있으며, 지난주에 평양에 다녀왔다고 한다. 대구만큼 사과로 유명하다는 황주(처음 들어본다)의 3만평의 부지에 사과나무를 심는 일이란다. 시인의 근황이다.


연어는 일명하여 어른을 위한 동화라고 한다. 본인의 입장을 말하자면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라. 임금은 임금다워야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어쩌고 저쩌고....(내가 뭐 고문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맹자나 공자같은 것을 읽다가 보면 옛경전의 한구절에는 너무 많은 뜻이 함축되어 있어 일면으로는 대단한 진리를 내포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다른 일면으로는 바람타고 구름잡는 허황한 소리같기도 하니 연하여 또 해석상에 온갖 구구한 억측을 낳기도 하는 것이니 뜻글자인 한문의 매력이 여기 있다는 생각도 든다)


무슨 멍멍 개 짖는 개소리냐 하면 이런 이야기다. 동화는 마땅히 아이들이 읽어야 하고 어른들은 어른들에게 어울리는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 본인 생각이니, 단도직입적으로다가 그러니까 단도로 배때기를 곧바로 찌르듯이 말하자면 어른들을 위한 동화니 뭐니 하는 것들에 본인은 반대한다는 그런 말이다. 특강중에 시인은 <연어>의 모델은 <어린왕자> 인데, 어린왕자 서문에 “이 책을 어린이가 아닌 어른에게 바치는 점에 대해 어린이들에게 양해를 구한다” 는 말이 나온다고 하면서 쥐빼리도 그런 걸 썼잖아~ 뭐~ 하면서 변명 비슷한 소리를 하고, 또 전업작가 시절에 이 책 한권 때문에 그래도 그럭저럭 배채우며 버텼다고 하니 어린아이도 아닌 어른인 본인이 양해를 안해줄 수도 없는 입장이 되었다. 그건 그렇고..


특강중에 몇 번 시인이 언급하였지만 인터넷에 한창 떠돌아 대한민국 국민이 다 안다는 연탄재 시(제목은 너에게 묻는다.이고 내용은 이렇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는 내 생각에 시가 아니고 일종의 아포리즘이다. 그 내용에야 십분천백분 공감동감하지만, 그건 일종의 금언이나 경구에 가깝다는 생각이다. 시는 읽는 이로 하여금 마땅히 감흥이나 감동을 일으켜야 할 것이니, 부끄러움이나 참담함을 느끼게 한데서야 그게 성경, 불경, 사서삼경의 경전이 아닌가 이 말이다.


시인의 시 중에 <우리가 눈발이라면>이라는 시는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려 있다고 한다. (시인으로 태어나 자신의 시가 그나라 국어 교과서에 실린다는 것은 과연 얼마만한 영광인가 잠시 생각해 보았는데.......역시 잘 모르겠더라) 중학교 다니는 시인의 아들이 어느날 아빠에게 이 시를 언급하면서 이 시중에 대비를 이루는 단어 몇 개 찾아보라고 하더란다. 그래서 시인이 조금은 황당한 마음에 대충 다섯 개를 찾았는데 그중 하나는 틀렸다고 한다. 허 참!! 시를 소개해 본다.(시인은 이 시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아마 중학생의 나이에 어울리는 시라서 중학교 교과서에 실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단다)


우리가 눈발이라면 - 안도현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 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 살이 되자



우리 공장의 직원 중 한분이 특강 말미에 시인의 시 중에서 시인이  암송하고 있거나 아니면 마음에 들어하는 시가 있다면 한 편 멋지게 낭송해 줄 수 없느냐고 하자 <사랑한다는 것>이라는 시를 낭송해 보였다. 시낭송에 뭐 특별한 것은 없었다. 고은처럼 흐느껴 울며 쌩똥폼 잡고 쑈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시를 소개해 본다.(전교조 해직교사 출신으로 “서울로 가는 전봉준” 같은 시를 썻던 시인이 왜 이런 시를 쓰는 시인으로 변했는지 - 이런 종류의 시가 나쁘다거나 시인이 뭐 변절했다는 둥둥의 그런 의미가 아니다 -  궁금했지만 손들고 물어보기가 부끄러워 그냥 어쩌다 살다보니 그리 되었겠지 내 멋대로 혼자 짐작하고는 그냥 참았다. 나는 떵이 매려워도 대충 잘 참는 편이다...꿍)


사랑한다는 것 - 안도현

길가에 민들레 한 송이 피어나면/ 꽃잎으로 온 하늘을 다 받치고 살 듯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오직 한 사람을 사무치게 사랑한다는 것은

이 세상 전체를 비로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차고 맑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우리가 서로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은

그대는 나의 세상을/ 나는 그대의 세상을

함께 짊어지고/ 새벽을 향해 걸어가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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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달 2008-08-14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이디를 '四宜齋'라는 한자로 표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자교육 不在로 한문학 전적을 제대로 번역해 읽을 수 있는 분도 점점 사라져 가는데 한문과 우리 古代史를 공부하는 이로서 모처럼 한자로 표기해 주신 분을 만나니 참 반갑습니다.
 
이지누의 집 이야기
이지누 지음, 류충렬 그림 / 삼인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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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희가 불렀던가 아~옛날이여어~ 지난 시절 다시 올수 없나 그으 나알~ 어쩌고 저쩌고. 중국으로 말하자면 요순우탕의 시대가 진정한 태평성세였고 지금은 암담한 난세지만 옛 성현들의 말씀을 열심히 쫓아 사람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 그러니까, 그래도 옛날이 정말 좋았다는 생각을 황금사관이라고 한다고 어데선가 들었다. 요순시대는 역사적으로 말하자면 청동기시대일 것인데, 움집에서 살며 비파형 동검으로 전쟁치고, 반달형 돌칼이니 하는 석제 농기구로 이제 겨우 농사를 짓기 시작했던(청동제 농기구는 없었다. 이거 시험에 많이 나왔다) 시절이 무에 그리 인의가 득세하는 태평세월이었겠는가 이 말이다.

지금이 살기 어렵고 고달프니까 옛날에는 좋았는데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당시에 아무리 쌩똥 피떵을 싸고 흘리며 고생을 했다고 하더라도 세월 흘러 돌아보면 왠지 그 시절이 그리워지고 그래도 그때가 좋았어!! 하는 생각이 들고 하는 법이니 바로 추억의 힘이고 위력이다. 흔히 하는 말로 제대하고는 군대가 있던 쪽으로 오줌도 누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술만 처마셨다 하면 군대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박터져도 박통때가 좋았지. 민주주의가 어쩌고 해도 우리가 이만큼 먹고 살게 된게 누구 덕인데....전통때는 그래도 깡패는 없었잖어...그때가 좋았지 그랴...그런거다.


     부엌에서의 일과 밥상을 들고 마루나 안방으로 오는 동선은 매우 합리적이다.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하는가 하면, 계단을 오르듯 마당으로 올라서고 잠시 평지를 걷는가 싶으면 어느새 댓돌에 올라서야 하니 이는 지금의 부엌구조보다 합리적인 동선임을 부정할 수 없다. 분명 힘이 드는 일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당시의 노동구조나 노동의 양을 따져 보았을 때 이는 스트레칭에 가까운 것이고 그렇게 단련되지 않은 몸으로는 당시의 노동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p 170)


부엌에서 밥상을 들고 마루나 안방까지 오는 동선이 매우 합리적이라니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다. 작가가 그리움 속에 추억하고 있는 당시는 우리의 어머니가 부엌일은 물론이요, 논일, 밭일을 남정네 못지 않게 해야하는 처지였을 것이고 그런 처지에 부엌에서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해야하고 계단을 오르듯 마당으로 올라서고 다시 내려와야 하고 하는 그 동선이 합리적이라니..... 그것도 매우 합리적이라니 도대체가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다.


보통 부모님모시고 삼사남매 키우는 집안으로 볼때 부엌에서 군불때고 반찬하고 밥푸고 국뜨고 수저놓고 상차리는 것과 한끼 식사 설거지 꺼리만으로도 씻고 헹구고 허리가 휘어질 판일 것이며, 그 집구석이 명색이 반가(班家)라고 한다면 사대봉사에 명절 차례까지 한달에 한번꼴로 제사상을 차려내고 친지손님들 접대해야 할 것인데, 부엌에서 마루로 안방으로 앉았다 일어서고 마당으로 올라서고 부엌으로 내려 앉고 하는 그 동선이 무에 그리 합리적이라는 말인지 알 수가 없다.


또 그렇게 단련된 몸이라야 당시의 노동을 견딜수 있다니, 하루의 밭일, 논일, 들일, 집안일, 부엌일, 빨래일 등으로 이미 단단히 단련되었을 터인데 그것으로는 부족하니 부엌에서 쪼그려 뛰기도 하고 댓돌 올라섰다 내려서기도 해서 좀 더 단련을 해야 무슨 일이든 잘 해낼 수 있다는 말인지 도대체가 알 수가 없고, 당시의 노동구조와 노동의 양이 어떠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구조와 양을 따져보았을 때 부엌에서의 가사노동이야 가벼운 스트레칭 정도이며, 정말 고된 논일 밭일을 하기 전에 이정도의 준비운동은 해야 된다는 이야기인지 도대체가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내 왜 흥분하는고 하니, 우리 엄마의 평생의 소원이 아파트로 이사가서 허리좀 펴고 편하게 사는 것이었는데, 칠십 가까이 되어서야 그 소원을 이루었으나 허리는 이미 완전 90도로  꼬부라진 이후였다. 장성한 아들들이 있으나 서울이나 객지로 나가있어 그 연세에 아직 당신 진지를 당신이 차려 드시는 형편을 생각하니 저자의 생각에 공감하기 실로 난감했다는 말이다.


본인의 언사가 침소봉대의 면이 많다는 것을 내 안다. 책의 내용 중에 좋은 이야기도 많았는데 ‘스트레칭’ 하나에 너무 집중하여 후벼 판 점이 인정된다. 우리의 옛것에는 작가의 말대로 선조들의 슬기로운 지혜가 담겨있는 것도 많지만 후대에 물려주기 답답한 악습도 적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자꾸 들으면 질리기 마련이고  맹목적인 애국주의, 전통주의, 복고주의가 결국은 나라를 망치는 법이다. 물론 이 책이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너무 옛것에 꽃단장을 입혀 미화하는 것 같고, 결정적으로 스트레칭 운운에 배알의 일부가 배배 꼬이고 꼴렸던 것이다. 저자의 우리 것에 대한 사랑이나 관심을 폄하하고자 하는 것이 결코 아님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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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6-05-02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내용이야 우찌됐건...리뷰는 정말 잼납니다~

Koni 2006-05-02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리한 지적이세요. '맹목적인 애국주의, 전통주의, 복고주의'는 주의 깊게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붉은돼지 2006-05-03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카루님, 제가 트집은 좀 잡았지만, 사실 책 내용이야 뭐 '행복이 가득한 집'에 연재될 만한 그런 내용들이죠...
냐오님, 예리라니 부끄럽습니다...^^;; 맹목이야 어디다 같다 붙여도 좋은 소리 못 듣잖아요...그래도 어떨 때는 맹목적인 사람이 부러울 때도 있어요..
 

 

 

 

 

 

요즘 서평 숙제를 위해 <이지누의 집이야기>를 열심으로 읽고 있는데, 책 중에 나오는 회재 이언적의 독락당이니 낙산사 원통보전이니 하는 그런 것들을 찾아보려고 옛날에 읽었던 김봉렬의 <한국건축의 재발견>시리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월간 이상건축에서 1999년에 나온 초판 2쇄본인데, 이게 요즘 돌배게에서 개정 증보판이 나와서 사람 마음을 어지럽게 하고 있다. - 를 다시 꺼내보기도 하고 나름으로 건축이나 집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차에,

오늘 낮에 우연히 “이금희의 파워인터뷰”라는 프로를 보게 되었는데, 우리나라 현대건축의 아버지인 김수근 문하에서 십여년을 공부했으며 현재는 건축사무소 이로재履露齋(아마도 신발에 이슬 묻혀가며 세상을 돌아다니고 열심히 건축공부해서 사람 살기 좋은 건물을 만들겠다는 뭐 그런 뜻이 이로재라는 당호에 담겨있으리라 내 멋대로 짐작해보았고, TV를 보니 이로재라는 현판이 서재같은 사무실 벽에 붙어 있었는데 고풍스런 멋이 있더라)를 운영하고 있고, 자신의 말에 의하자면 김수근으로부터 ‘기맥힌 놈’이라는 소리를 들었다는 승효상이라는 사람이 인터뷰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알라딘에서 검색해보니 승효상의 저서로 여러권의 책이 줄줄이 줄을 잇고, 그 중 <건축, 사유의 기호>라는 책은 내가 오다가다 슬쩍슬쩍 보면서 관심을 가지기도 했던 것인데, 오늘 내가 안 기맥힌 사실은 내가 이때까정 승효상을 송효상으로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초중고대 16년의 학교생활중 내가 아는 친구중에 승씨라고는 눈을 씻고 닦고 찾아봐도 없었던 것이니 ‘승’을 ‘송’으로 착각했다고 해서 큰 허물이라 할 수는 없으리라. 아래 사진을 보면 승효상이 입고 있는 검도복에 이로재(履露齋) 승효상(承孝相)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인터뷰중 기억에 남는 이야기 두 토막. 하나. 승효상이 빈 유학시절에 절체절명의 어려운 시기에 처해있을 때 그에게 용기와 희망을 준 선배의 편지내용 “너는 낭중지추(囊中之錐)” 그때 그 말이 많은 도움이 되어서, 그래서 요즘 자신도 후배들에게 많이 돌려주고 있다고 한다. 칭찬은 역시 고래도 춤추게 한다.


둘. 영화 토탈 이클립스(나는 이 영화를 보지는 못했다. 다만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랭보 역으로 나오고, 동성애하면서 술처먹고 지랄하며 별스럽게 예술하는 넘들의 이야기라는 정도만 알고 있다...음...)를 보다가 랭보가 베를렌에게 했다는 “너는 시를 어떻게 써야하는 지를 알지만, 나는 시를 왜 써야 하는 지를 안다”는 말을 듣고 섬뜩했다는 이야기. 건축도  멋을 부리거나 똥폼만 잡을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요지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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