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악보를 사고 싶었고 그는 나를 헌책방으로 데려다 주었다. 말수가 적은 주인은 조용히 서가의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아래쪽 두 칸에 크거나 작은, 두껍거나 얇은, 오래되거나 그렇지 않은 악보들이 꽂혀 있었다. 허리를 굽히고 뒤지다가 나중에는 바닥에 앉아버렸다. 좋아하는 피아노곡을 찾았지만 뒷부분이 찢겨 나가고 없었다. 마음에 드는 악보가 있었지만 바이올린곡이었다. 서점은 고요하고 동행은 나를 내버려 두었으므로, 주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으므로, 나는 그곳에 있는 모든 악보를 하나씩 꺼내어 만져보고 다시 꽂아두는 일을 반복했다. 악보 갈피에 꽂힌 누군가의 메모, 음표와 음표 사이의 낙서 같은 것들을, 해독하지도 못하면서 오래오래 들여다보았다.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나는 바흐의 칸타타 악보 하나를 손에 쥐고 있었다. 피아노곡은 아니었지만 멜로디를 흥얼거릴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오래된 악보의 음표들이 어떤 길을 알려줄 것 같기도 했다. 아니면 이 지상에는 길이 없다는 사실을 전해주거나, 서른 페이지 남짓 되는 그 악보를 가만히 보던 주인은 2유로를 달라고 했다. 밖은 이미 어둠이고 이미 가을이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구를 반 바퀴 돌아 당신의 악보를 손에 넣었노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발견한 것은 내 마음 중에 가장 깊은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P.38 )

 

 

 

 

                                                                              -황경신, <밤 열한 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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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3-10-26 04:51   좋아요 0 | URL
책방마실을 하면서 조용히 책읽기에 사로잡히면
책에 깃든 빛을 누릴 수 있어요.

appletreeje 2013-10-28 04:39   좋아요 0 | URL
예~저도 책방마실 하면서
조용히 책읽기와 책빛 누리고 싶습니다.^^

2013-10-26 1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28 04: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26 2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28 04: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31 1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01 18: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처음 보는 저녁

 

 

 

 

 

                            이 세상에 처음 해 보는 것이 많겠지만

                            막 걸음마를 뗀 아이의 발걸음이

                            처음 해 보는 것이 꽃 앞에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이가 눈을 감은 채

                            물방울에 손을 집어 넣고

                            꽃 속에 저무는 발걸음과 만나는 것이 처음 해 보는 것이

                         었습니다

                            꽃에 스치는 물방울도 길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온 마음들이 비치는 물방울이

                            바다처럼 맺혀서 보는 이도

                            이 세상에 나서 처음 보는 것 같은 저녁인 것이었습니다

                            저도 그렇게 눈을 감는 일이었습니다

                            가만히 가만히

                            꽃 앞에 무릎을 끓고 있는, 처음인 저녁인 것이었습니다  (P.17 )

 

 

 

 

 

 

 

                           악기를 연주하고 싶은 그런 날

 

 

 

 

                              오랜 서가에 꽂아 둔 낡은 책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썼던 편지를 발견할 때,

                              마치 내가 나에게 편지를 쓴 것처럼 아릴 때

                              그런 날에는, 정말

                              먼지를 뒤집어쓴 악기를 꺼내어 연주해야 한다

                              가슴에 묻어 둔 사랑의 밀어를 바라보면

                              기억조차 희미해져 제 별자리로 돌아간 듯 하다

                              어느 누군가도

                              나에게 그런 편지를 썼으리라

                              흐릿한 시간의 별자리에서 천천히 돌고 있는,

                              어린 무 잎처럼 아린 글씨가

                              빼곡히 들어찬 부치지 못한 편지들

                              먼지와 세월에 얼룩진,

                              뒤틀린 책 속 공명통에서 울리는

                              나의 밀어와 영혼을 간직한 악기여  (P.34 )

 

 

 

 

 

 

 

                           찐빵집에서 올라오는 하얀 김

 

 

 

 

 

                               겨울에 도시로 전학 와 새 학교 갔다

                               처음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저녁이 오도록 집을 못 찾고

                               비슷비슷한 골목길을 헤매 다녔다

                               시골집에서는 저녁때가 되면

                               무쇠솥을 들썩이는 밥물의 김처럼

                               부엌문을 열고 어머니가 나를 부르는 소리만으로

                               동네 어디에서 놀고 있어도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

                               이제는 나 혼자의 힘으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야 한다며,

                               찐빵집 앞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김을 바라보았다

                               겨울 저녁 찐빵집 앞을 지나가다 그때처럼

                               추억의 온도로 부연 찐빵의 김에 내 자신을 맡기고 싶어

                            진다

                               앙꼬 가득한 찐빵을 뜨겁게 목구멍 속으로 밀어 넣으며

                               하얀 김 속에서 그렇게,

                               집에 가다 말고 잠시 서 있고 싶어진다  (P.87 )

 

 

 

 

 

 

                            신발장

 

 

 

 

 

                                버려진

                                냉장고 속에

                                나란히 놓여 있는

                                아기의 꽃신과

                                노인의 털신 하나

 

                                노인과 아기가

                                눈 내리는 날,

                                냉장고에서

                                신발을 꺼내어

                                나란히

                                시골길을 걷는다

 

                                그들의 뒤로

                                찍히는 발자국은

                                사랑의 다른 이름일까

 

                                언젠가, 나도

                                저런 냉장고 한 대

                                갖고 싶다  (P.88 )

 

 

 

 

                                                         -박형준 詩集, <불탄 집>-에서

 

 

 

 

 

 

 

 

 

 

 

[시인의 산문]

어머니는 ‘불탄 집’이다. 어머니는 평생 심화(心火)를 가슴에 안고 사셨다. 이제 그 집은 불타 사라졌지만 그 심화는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 마음속의 불, 어머니의 가슴에 타는 그 불을 누가 꺼뜨릴 수 있었겠나. 내가 시를 쓰는 것은 그런 어머니의 가슴에 팔찌를 하나 놓아 드리는 일이었다. 자식과 가족을 짝사랑하여 언제나 가슴에 불을 품고 사는 여인, 그 여인의 가슴에 시라는 팔찌를 내려놓은 일은 그 불을 다스리고자 하는 일만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여자 지귀(地鬼)였는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내가 시를 쓴다 하여 무슨 왕족이 될 수 있는 것도, 더구나 여자 임금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상상력이 한계가 없다 한들 현실의 뿌리까지 바꿔 낼 수 있겠나. 다만 그 뿌리에서 피어난 꽃을 조금은 아름답게 허공에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닌지.
쉬페르비엘의 시를 일컬어 조르쥬 뿔레는 “보존된 수천의 기억보다 재발견된 추억 하나에 더 많은 기쁨이 있다”라고 평을 내렸다는데, 내가 어머니의 가슴에 놓아 드리려 했던 시라는 팔찌도 그 말과 먼 것 같지는 않다. 내 시의 팔찌는 어머니의 수천의 심화가 하나의 추억으로 재발견되기를, 그리하여 가족과 나를 짝사랑한 그녀의 인생이 조금은 찬란해지기를 바라는 답례품이다. 이제 시라는 팔찌가 된 어머니의 추억은 세상의 만물을 비추어 준다고 시를 쓰는 한은 믿고 또 믿어야만 할밖에 나로서는 도리가 없다.
어쩌다 보니 지난 시집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 그리고 이번 시집은 또 하필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 씌어진 시집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이 두 시집은 그걸 기념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위한 팔찌 한 쌍인 셈이다. 결과적으로 이 시집은 지난 시집에 이어 조금은 일찍 내는 시집이 되고 말았지만, 나는 이제 돌아가신 어머니로부터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돌이킬 수 없이 가깝고 가장 멀기도 한 여정으로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빛도 태양도 더 이상 없을 때에 어머니의 가슴에, 그리고 그녀의 무덤 위에 놓인 그 팔찌가 비추어 주는 게 비단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적어도 그 팔찌를 통해 우리는 서로의 존재 이유를 조금은 확인할 수 있지 않겠나. 아들이 이승에서 고생만 하다가 저승으로 간 어머니에게 주는 답례품이 시라는 팔찌라면―이승에서 수천의 고생의 기억만 가진 그녀의 재발견된 추억 하나―어머니의 인생은 참으로 허무하고 참담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지만, 그러나 어쩌겠나. 시를 쓰지 않았다면 어머니의 심화를 아로새길 팔찌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고, 나 또한 내 심화로 불타 버렸을 것이기에, 어머니를 위한 팔찌는 결국은 나를 위한 팔찌이기도 한 셈이다.
이제는 어머니와 나의 심화만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심화가 승화된 불로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시를 쓰고 싶다. 영원히 잃어버릴 것 같은 망각의 변방에서 승승장구 돌아올 밝은 시를 쓰는 것은 언제나 나의 꿈이었다. 열렬하게 지귀의 시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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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13-10-25 16:12   좋아요 0 | URL
오늘도 좋은 시들을 올려 주셔서 감사 드려요~*^^*

행복한 오후 되세요~^^

appletreeje 2013-10-25 21:27   좋아요 0 | URL
제가 더 감사드리는데요~*^^*

후애님! 날씨가 추워졌습니다.
옷 따뜻히 입으시고, 즐겁고 행복한 주말 되세요~^^

2013-10-25 17: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25 2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25 1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25 2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블루데이지 2013-10-26 02:22   좋아요 0 | URL
이런 서정적인 시들 참 좋아해요!
appletreeje님이 저만을 위한 시들을 제 귀에 읊어주시네요?
저도 이시집 사서 곁에 두고 아껴 읽어야겠어요!
또 appletreeje님과 함께 읽는시집이 생겼네요..ㅋㅋ 좋아라!

처음 보는 저녁을 읽고있으니 자꾸 제 막내아들 하는 요즘 모습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면서 나중엔 찡한 눈물이 살포시 맺히네요...ㅋㅋ 주책이죠?

appletreeje 2013-10-28 04:51   좋아요 0 | URL
저도 블루데이지님과 함께 읽는 시집이 또 생겨서
너무너무 기쁘고 좋습니다~^^
막내아드님의 예쁜 모습과 그 모습을 지켜보시며 웃으시고
또 찡한 눈물도 살폿 맺히시는, 데이지님을 생각하며 제 마음까지
물들어가는 그런 아름다운 가을이에요. ^^

블루데이지님! 오늘도 행복하시고 고운 날 되세요~*^^*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 - 김재규 평전
문영심 지음 / 시사IN북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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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이란 기존 질서를 파괴하고 신질서를 수립하는 것입니다.`한 김재규의 10.26이 33주기가 되었다. 그러나 박정희의 정치적 아들인 전두환이 건재하고,그의 딸이 대통령이 된 이 시대는 여전히 신질서가 수립되지 않고 있다. 눈 밝은 국민들이 이 책을 많이들 읽기를 바란다. 작가에게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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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25 00: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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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25 0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란놀 2013-10-25 08:46   좋아요 0 | URL
사람들이 앞으로 눈도 마음도 밝게 살아가면서
슬기로운 삶 일구기를 빌어 마지 않아요...

appletreeje 2013-10-25 15:32   좋아요 0 | URL
자기 판단에 의해 선택을 하면 그 선택에 대한 책임도 져야겠지요.
모든 사람들이 함께살기님 말씀처럼, 눈도 마음도 밝게 살아가며
후회없는 선택을 하며 살아가야 할 것 같아요.
 
별밭공원
송기원 지음 / 실천문학사 / 2013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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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10년만에 나온 자전적 구도소설. 자기만의 우주적 공간을 찾고 선과악, 아름다움과 추함의 이분법적 잣대의 경계에서 벗어나, 혼신으로 맞서고 있는 삶의 어떤 피투성이 싸움이야말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확장한다. 아주 오랜만에 만나는 익숙한 안도감을 준 책. 맑은 술 한 잔,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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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23 20: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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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24 2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란놀 2013-10-23 21:24   좋아요 0 | URL
둘로 나눌 수 없는 삶이고,
언제나 하나로 아름다운 사랑이니,
이 대목 헤아리면 늘 웃을 수 있는 글
태어나리라 생각해요.

appletreeje 2013-10-24 23:04   좋아요 0 | URL
예, 그러리라 생각 합니다.^^

2013-10-24 18: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24 23: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후애(厚愛) 2013-10-24 23:48   좋아요 0 | URL
벌써 읽으셨군요~
저는 나중에 보려고요.^^

저는 조금전에 맑은 술 한잔 했습니다.ㅎㅎ
그냥 기분이 울적해서요..

좋은 꿈 꾸시고 내일 하루도 좋은 하루 행복한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appletreeje 2013-10-25 00:05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예전의 구도소설을 볼 때처럼, 몰입하며 읽었습니다~
후애님께서도 무척 좋아하실 책 같아요~
이 책, 다음에 보내드릴께요~^^

저도 요 며칠 좀 기분이 울적했는데, 이궁..후애님도 그러시군요.
맑은 술 한 잔,이 조금은 도움이 되지요. ^^;;
내일이면 괜찮아 지시리라 믿습니다.^^

후애님께서도, 편안한 밤 되시구 내일은 즐겁고 좋은 날 되세요~*^^*
 

 

 

 

 

 

                        환하고 빛나는 한 켠

 

 

 

 

 

                           꽃은 환하다 빛난다

 

                           세상 한 켠에 등불을 켜고, 우리들 눈동자에 불을 지피고 가

                        슴을 멍들게 한다 꽃은 아름다운 이데올로기, 살아서 영혼이 된

                        것들, 하나하나마다 혼령이 붙어 하늘 가득 나비 떼를 띄운다

                        나비는 꽃의 영혼, 꽃의 혼령을 날개에 달아 저리 가벼웁다

 

                           우리 집 똥개 버꾸, 어머니는 개똥을 모아 꽃밭에 북을 돋우

                        시고 기름진 개똥에 날이 갈수록 꽃들은 만발하고 버꾸는 밥

                        잘 먹는 천하의 태평성대, 아름다운 꽃 속에서 졸리운 듯 졸리

                        운 듯 그런 눈으로 훨훨 나는 나비를 꾸벅꾸벅 지켜보고 있다

                        세상 한 켠을 고스란히 제 몫으로 지키며, 떨어진 꽃잎을 혀로

                        밀어내며, 하얗게 개 밥그릇을 핥고 있다

 

                           개 팔자 환하다 빛난다   (P.33 )

 

 

 

 

 

 

 

                         풋사과

 

 

 

 

 

                           아직은 무더운 초가을

                           할머니

                           떨어진 풋사과를 줍는다

                           할머니의 할머니는 아담의 아내

                           까마득히 쫓겨난 에덴의 추억을

                           쓰다버린 광주리에 담아

                           시장에 내어놓는다

                           할머니의 손은

                           늙은 비애의 손

                           쭈글쭈글해진 손아귀의 힘으로

                           벌레 먹은 선악과를

                           하나씩 쌓아 올리며

                           한 무더기 천 원,

                           천 원이라고 쪼그리고 앉아 있다   (P.48 )

 

 

 

 

 

 

 

                       누가 저 황홀을 굴리는가

                                    -낮달

 

 

 

 

 

                            어느 분이 저 황홀을 굴리는 것일까

                            한눈도 팔지 않고

                            강물에 쓸리지도 않고

                            구름인 듯 저 황홀에는 어느 분이 기거하고 계실까

                            휘적휘적 걷다가

                            저 황홀을 만났다

                            꼼짝 없이 황홀에 갇혀 개처럼 눕고 싶어졌다

 

                            미친 듯이 가려운 살갗을 벗겨내고

                            가만히 들여다 보니

                            내 안에도 저 황홀이 하나 둥실 떠 있다  (P.83 )


 



 

 

 

                         아마도에는

 

 

 

 

 

                            아침부터 들판에

                            비오고

                            눈 내린다

 

                            눈에 맞은 겨울 배추가 달아

                            푸른 배추 잎에 삼겹살을 올려놓고

                            말없이

                            말도 없이

                            소주도 한 잔

                            그리운 이름마다 한 잔씩

                            따라놓고 있자니

                            눈도 이유 없이

                            한없이

                            한없이

                            내리어 쌓인다

 

                            동네 정육점 가게

                            먼 데서 혼자 사는 이도 삼겹살을 사러 왔다

                            돼지 축사는 망하고

                            헛간마다 빚더미는 그득한데

                            괜스레 눈 온다고 자기도 한 잔 할랑가 보다

 

                            아마도 그럴랑가 보다

                            아마도

                            아마도에는

                            비는 비처럼 내리지 않고

                            눈은 눈처럼 내리지 않는다  (P.94 )

 

 

 

 

                                                 -김완수 詩集, <누가 저 황홀을 굴리는가>-에서

 

 

 

 

 

 

 

 

 

 

 

 

등단 15년 만에 세상에 선보이는 처절한 감성!
시인동네 기획 시인선 그 두 번째,
김완수 시집 『누가 저 황홀을 굴리는가』

제도를 넘고, 이해와 관계를 넘어 저 낡은 새로움마저 뒤로 하고
홀로 외로운 길을 걸어가는 시인을 우리는 애타게 기다려왔다.


김완수의 시는 온갖 거추장스런 정념과 사념들로 들끓었을 육신의 피와 살을 덜어내고 남은 오롯한 근골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마치 김종삼의 시세계를 연상시키는 듯한 간결한 말들이 직조해내는 선명한 서정적 이미지와 단아한 여백이 만들어내는, 어쩌면 깊은 침묵 속에서 휴식하고 있는 것 같은 말들의 풍경은 바로 이 같은 근골 이미지의 언어적 번안이라고 해야 하리라. 사실상 이 간결하고도 침묵하는 듯한 말들의 풍경이야말로 김완수의 시세계를 진폭이 큰 공명의 자장으로 만드는 데에 핵심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말할 수 있다. 역으로 말하자면, 저 자장이 형성하는 침묵하는 말들의 풍경 속에는 한편으로는 개별 주체로서 모든 존재자의 유한성으로부터 비롯되는 외로움과 슬픔 혹은 상처와 아픔의 정신적 에너지들이 강렬하게 요동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 삶과 세계의 무상함으로부터 기원하는 허무와 관조의 시선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뜻이겠다. 시인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하나의 허공이고, 또한 이 허공을 딛고 선 우리 존재는 공허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물론 불교적 세계관에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이러한 세계와 존재의 이해 방식이 유달리 새로워 보일 것은 없을 테지만, 사실상 이 시인의 시들이 발산해내는 매력은 이 같은 세계관이 말과 침묵으로 교직되어 오롯이 형상화되는 그 역설적 긴장의 풍경 속에 있다고 하는 편이 옳다. 하기야 시가 그런 것이 아니라면 또 무엇이겠는가? 시에 있어서 발화는 침묵의 한 방식이며, 이 침묵은 또한 세계와 삶의 말할 수 없는 진실들에 대해서 바치는 존재자의 최상의 경외감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시란 결국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말이거나 말할 수 없는 것 자체의 말, 혹은 모든 존재와 언어의 가능성들이 하나의 임계점에 도달해 이윽고 텅 빈 세계의 심연으로 돌아가는 순간의 어떤 불가능한 말일 수밖에 없을 듯하다.

 



       꿈속에서 또 꿈을 꾸며 내가 자고 있다
       꿈속의 나는 나인데
       꿈속에 꿈꾸는 나는
       내가 아닌 듯 나고 나인 듯 내가 아니다
       이곳인가
       저곳인가
       그곳인가
       삼생(三生)에 걸쳐 누군가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

       야심한 시각
       달도 없는데
       창문에 어른거리는 그림자

       빈 배 한 척이 살얼음 허공에 밀려와 있었다
       어디서 왔는지 흰 눈이 높이 쌓여 있다
       또, 어디로 가는 신호인지
       텅 빈 무거운 몸을 흔들며 바람에 돛이 흔들렸다

       한 꿈에서 깨어보니 또, 한 꿈 속이다
       꿈 속의 꿈은 누구의 꿈인가
       잠 속에서도

       먼 길을 떠나온 사람처럼

       웅크린 나의 모습이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 [외롭고 쓸쓸한] 전문. 

 

 

 

 

 

: 김완수 시인과 칠년을 같이 살았다. 한 번도 말다툼 하지 않았다. 그가 마음이 넓다. 친구들이 문단에 얼굴을 내밀 때 한번 작품을 응모해보지 했더니 ‘나는 아마추어 원로로 남을란다.’ 하며 웃었다. 그는 들밥을 이고 징검다리를 건너는 어미처럼 조심조심 차분차분 신성한 정신을 잃지 않고 시를 써왔다. 일부러 더디게 쓴 그의 시에는 시간이란 긴 다리가 놓여 있다. 그는 다리를 오가며 ‘사람보다 빈집이 많은 고향’을 보기도 하고 ‘가을밤 가을비에 외로워서/세상이 온통 울고 있는데/다만,/잎 작은 대추나무 아래, 젖은/귀뚜라미만 외롭게 울지 않고 있다’고 읊조리기도 한다. 그의 시들은 행간이 넓고 깊어 마음을 시큰 휘어놓는다. 참, 고마운 쓸쓸함이다.

 

: 김완수의 시는 우리로 하여금 익숙한 서정을 느끼게 한다. 실제로 그의 시는 많은 서정시의 모습과 닮은꼴을 하고 있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김완수의 시는 우리에게 익숙한 발견에 대한, 익숙한 서정에 대한 재고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김완수의 시는 새롭다. '꽃을 꺾으면/들 한 쪽이 가만히 비'는 이 당연한 사실과 발견 앞에서 우리는 사실에 대한 경이를 맛본다. <서정의 과학>, 나는 그의 시를 이렇게 부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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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3-10-21 12:34   좋아요 0 | URL
삼생이라는 말이 참 좋습니다.
누군가와 삼생에 거쳐서 만날 수 있다면 더욱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실은, 지금도 그렇게 만나는 이가 있을지 모르나 누군지 모르겠으니 다 소중하게 해야겠지요.

배추 부침개가 확 땡깁니다. ^^
평온한 한주 되셔요.

appletreeje 2013-10-23 18:33   좋아요 0 | URL
지금도 그렇게 만나는 이가 있을지 모르나 누군지 모르겠으니 다 소중하게
해야겠다는 말씀이, 유난히 가슴에 와 닿는 저녁입니다.
저도 배추 부침개를 안주로 소주 한 잔 하고 싶네요..^^;;;

마녀고양이님께서도, 평온하고 좋은 한주 되세요~*^^*

보슬비 2013-10-21 17:48   좋아요 0 | URL
가을이라 그런지 자연이 더 아름답게 느껴져요.
정말 환하고 빛나는 계절인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고 계속 돌아다니게 되네요. ㅎㅎ

appletreeje 2013-10-23 18:36   좋아요 0 | URL
정말 환하고 빛나는 계절이지요~?^^
보슬비님이 요즘 즐겁게 다니시는 곳들 이야기 듣고 싶어요~

보슬비님! 편안하고 행복한 저녁 되세요~*^^*

파란놀 2013-10-21 18:20   좋아요 0 | URL
아름답게 살아가는 마음으로
아름답게 노래를 불러
아름다운 가을날 즐거이 누리는
글 한 조각 태어나는구나 싶어요.

appletreeje 2013-10-23 18:36   좋아요 0 | URL
함께살기님의 댓글은 언제나
한편의 아름다운 시이십니다~

하늘바람 2013-10-22 00:11   좋아요 0 | URL
처절한 감성

appletreeje 2013-10-23 18:37   좋아요 0 | URL
처절한 감성...^^

하늘바람님! 날마다 좋은 날 되시길요.*^^*

후애(厚愛) 2013-10-22 23:34   좋아요 0 | URL
올려주신 시들이 참 좋습니다!!!*^^*
많이 많이 감사드려요~

좋은 꿈 꾸시고 행복한 밤 편안히 주무세요~*^^*

appletreeje 2013-10-23 18:40   좋아요 0 | URL
시들이 참 좋다 하시니
저야말로 많이많이 감사드려요~^^
이제 어둠이 내려 앉은 저녁이네요.
따뜻하고 맛있고 행복한 저녁,되세요. 후애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