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손 크루소 같은 행색으로 들어오셨다. 삼복엔 타잔, 태풍엔 로빈손 크루소...니까 한겨울엔 고산자 김정호 같은 패션을 휘날리실 것인가. 아무튼 예의 그 로시난테 닮은 자전거에 기대어 비척비척 들어오셔서는 본당마루에 앉아 망연한 눈길로 하늘을 바라보고 계셨다. 영락없는 로빈손 크루소였다. 도무지 여기가 어디쯤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어, 오랜만에 들어오셨네요. 어디 멀리 다녀오셨어요?

아저씨      아침은 자셨슈?

            네? 아, 네......아직요.

아저씨      그나마 다행이유. 난 유씨가 뜨건 밥 자시구 식은 소리 하나 싶어 걱정했슈.

            (또 시작이다) 그, 그게 무슨 말씀......

아저씨      유 씨야말로 그새 어디 먼 데 다녀 오셨나 봐유. 태풍 왔다 간 것도 몰르구.

            걸 모를리가 있나요. 저도 며칠 전전긍긍했는데요.

아저씨      그런 냥반이 그런 소릴 해유? 태풍이 오는데 농사꾼이 가긴 어딜 가겠슈.

               갈 데가 어디 있겠냔 말유, 시방.

            아, 그럼 그동안.... .

아저씨      뽕밭에 가서 울었슈. 뽕밭에서 울었단 말유.

            (급 당황) 울어요? 뽕밭에서요?

아저씨      유 씨는 뽕밭의 세계를 몰러유. 진짜 몰러유.

            그, 그야 뭐 제가 뽕밭의 세계를 잘 알진 못하지만......아무튼 그 비바람이 몰아치

               는데 며칠 동안 집에도 안 오시고......정말 뽕밭에서..... .

아저씨      나야 한 이틀 못 들어와도 사는데 아무 지장 없지만, 뽕나무 잎사구들은 한 번 떨

               어지면 그걸로 끝장 아녀유. 그냥 생사가 갈리는 거 아녀유. 어디 잎사귀뿐이겠슈

                ? 뿌리까지 뽑혀져 나갈 판인데, 울어야지유. 껴안고 울어서 그 힘으로 뽕나무들

               이 살게 해야지유. 주인의 울음소리 듣구서 뽕나무들이 어떻게든 악착같이 살아

               남게 해야지유.

            (왠지 조낸 심오한 얘기 같은데 뭐라 할 말이 없다)

아저씨      그래서 나는 울었네유. 뽕밭에서 울었네유.

 

 

 

 

동화를 쓴다더니 숫제 트로트 가사를 쓰자는 거? 내가 삼류 트로트 통속 연애 시인이란 걸 눈치채셨나. 아무튼 아저씨도 나도, 아저씨 울음소리 듣고 살아남은 뽕나무들도, 비바람에 쓸려가지 않은 로시난테 자전거도, 부추밭도, 지붕도, 채송화도, 우체국도, 철길도, 길고양이들도, 조낸 반갑다. 살아남았으니 되었다. 살아남았으니 그것으로 다 된 것이다. 아름다운 것이다. 오늘은 나도 죽도록 안 넘어오는 그녀를 붙들고 하염없이 울어나 볼까. 뽕나무 같은 그녀 손목을 붙잡고 하염없이 하염없이 울어나 볼까. 아아, 내게 뽕나무 같은, 푸르른 뽕잎 같은 여자여.  (P.182~184 )

 

 

 

 

                                 -류근 산문집, <사랑이 다시 내게 말을 거네>-에서

 

 

 

 

 

 

 

 

 

 

 

   날씨는 겁나 더운데 할 일은 많은데, 그러면서도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

   음을'의 노랫말을 쓴... 류근 시인이 황막한 세상에 던지는 <사랑이 다시 내게 말을 거네>,를

   며칠을 짬짬히 붙들고 읽었다.  

   염천의 개,처럼...여학교때 가사 시간에 올올이 수놓은 십자수처럼, 나팔꽃처럼 피어나는,

   숙취에 절어 술냄새가 책 밖으로까지 새어 나오는 습하고 뜨거운 시인의 산문을 읽는데

   왜 나는 또, 자꾸만 북풍한설 처럼 마음이 시리고 시린지. 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인의 아름다운 詩들이..새삼스레 아득하다,

 

 

 

 

 

            상처적 체질

 

 

 

 

          나는 빈 들녘에 피어오르는 저녁 연기

          갈 길 가로막는 노을 따위에

          흔히 다친다

          내가 기억하는 노래

          나를 불러 세우던 몇 번의 가을

          내가 쓰러져 새볔까지 울던

          한 세월 가파른 사랑 때문에 거듭 다치고

          나를 버리고 간 강물들과

          자라서는 한번 빠져 다시는 떠오르지 않던

          서편 바다의 별빛들 때문에 깊이 다친다

          상처는 내가 바라보는 세월

 

          안팎에서 수많은 봄날을 이룩하지만 봄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꽃들이 세상에 왔다 가듯

          내게도 부를 수 없는 상처의

          이름은 늘 있다

          저물고 저무는 하늘 근처에

          보람 없이 왔다 가는 저녁놀처럼

          내가 간직한 상처의 열망, 상처의 거듭된

          폐허.

          그런 것들에 내 일찍이

          이름을 붙여주진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또 이름 없이

          다친다

          상처는 나의 체질

          어떤 달콤한 절망으로도

          나를 아주 쓰러뜨리지는 못하였으므로

 

          내 저무는 상처의 꽃밭 위에 거듭 내리는

          오, 저 찬란한 채찍  (P.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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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3-08-14 11:56   좋아요 0 | URL
여름하늘도 높고 파랗습니다. 곧 구월이 오며 가을빛 감돌 테지요.

appletreeje 2013-08-14 19:11   좋아요 0 | URL
예~~함께살기님께서 보여 주시는
여름하늘은 정말, 높고 파랗습니다~
예, 곧 구월이 오고 아름다운 가을빛도 만나겠지요~?^^

비로그인 2013-08-15 09:43   좋아요 0 | URL
내키는대로(꼴리는대로) 어디서 막 굴러먹다 온 것처럼 굴다가 그러면서도 낯가람을 꽤나 할 것 같은 사람,은 도처에 많겠지만 류근도 어쩌면 그런 시인 중에 하나일 것 같네요.^^

appletreeje 2013-08-16 00:07   좋아요 0 | URL
예~잘은 모르겠지만 컨디션님의 예리한 시각이 포착하신 것처럼 저도
류근 시인은 아마 그런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ㅎㅎ

컨디션님! 좋은 밤 되세요~^^
 

 

 

 

 

 

 네가 나의 개인적인 일을 축하해주러 와서, 무척 반가웠고 행복했다. '태양의 노래'.

 둘이서 아구찜 하나 시켜놓고, 이슬 두 병 맛있고 시원하게 잘 먹어서 너무 고마웠다~

 그리고 알로카시오,를 낑낑 차에 실어서 너의 집 베란다까지 잘 옮겨 놓고 와서 더욱 기뻤고.^^ 

 

 

 

 

 

 

 

 

 

 

 

 

 

 

 

 

 

 

그리고 네가 나의 모습,이라 말하며 직접 가마에 구워서 저 바구니에 담아 놓은 그 마음도

너무 고마웠다..  그래서 따로 내 작고 예쁜 이케아 책장에 놓았어.

우리, 잘 살자...지금처럼. 나도 저 컵처럼 잘 살려 애써볼께,

 

 

그리고 나는 내일, 네게 이 책을 선물로 보낼께야.

미팅때...Y에게 받았어.

너와 내게 너무 익숙한 사람의 책이잖아. '익숙해지지 않는 삶'.

세상은 이 밤도 여전히 저희들끼리.. 너무 소란해..그치? (아마, 속으론 저마다.. 외로운가봐, 아무리 소셜 네트워크나 스맛폰으로 소통한다고 믿어도.) 

그래도 델리 스파이스의 '챠우챠우'처럼, 너의 목소리가 들려...

굿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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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3-08-11 00:10   좋아요 0 | URL
마음과 마음으로 주고받는 선물이란
삶을 새삼스럽게 북돋우는 아름다운 빛이 되지 싶어요.

appletreeje 2013-08-11 09:58   좋아요 0 | URL
예~함께살기님 그래요. ^^
선물은 서로 마음을 주고 받는 일이니까요.

2013-08-11 13: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8-12 09: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3-08-11 20:51   좋아요 0 | URL
마음이............ 너무 따스해져서,
가끔, 아니 자주 알라딘 서재를 들러서 여유란 놈을 찾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어요.

아, 여름.........
내 여유는 여름이 뺏어가서 그래, 이렇게 탓을 하는 중이지만,
실제로는 제 자신 탓이겠지요. 줄창 달리는... ^^

넘 더워요, 그래도 여름이.. 헥헥.

appletreeje 2013-08-12 09:33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의 글이야말로 늘 마음을 따스하게 해주시는....
늘, 기쁘고 반갑습니다~^^

아..아...정말 너무 더운 여름이예요...헉헉..
마녀고양이님! 소나기 같은, 팥빙수 같은 시원한 한 주 되세요~*^^*

후애(厚愛) 2013-08-13 11:14   좋아요 0 | URL
너무 아름답습니다~!!!^^
제가 다 행복합니다.*^^*

대구는 정말 덥습니다.ㅠㅠ
대구에서 도망가고 싶어요~ ㅋㅋ

appletreeje 2013-08-13 16:54   좋아요 0 | URL
아아~~후애님! 후애님!!
후애님께서 좋아하시니 제가 더욱 기쁩니다.

아침마다 대구 날씨 보며 걱정하곤 해요...
조금만 참으시면 또 곧, 서늘하고 아름다운 가을이
오겠지요~^^ ㅎㅎ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안토니오 알타리바, 킴 지음, 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 / 길찾기 / 2013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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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에 눌려 패배를 거듭한 인간, 그럼에도 자유를 지향하는 인간 본성을 마지막까지 움켜쥐었던 한 아나키스트의 이야기를, 아버지의 분신인 아들이 쓴, 깊은 헌정의 그래픽 노블. 그리고 이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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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09 15: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8-10 18: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보슬비 2013-08-09 17:57   좋아요 0 | URL
나무늘보님의 평을 읽으니 더 빨리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신랑도 재미있게 읽고 있는 중이라 더 궁금해집니다.

appletreeje 2013-08-10 18:09   좋아요 0 | URL
요즘 만화책을 많이 보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으로 실감을 하며 읽었던 책이었던 것 같아요. 보슬비님께서도 그러실 것 같은, 좋은 책!

파란놀 2013-08-09 21:38   좋아요 0 | URL
'역사'는 여러 갈래로 보아야지 싶어요.
정치권력 흐름 하나,
시골에서 흙을 만지며 밥과 옷과 집을 지으며 아름다움을 찾던 흐름 하나.

아무튼, 정치권력이란
작은 사람들을 짓누르거나 짓밟으면서 바보스레 흘러왔구나 싶어요..

appletreeje 2013-08-10 18:21   좋아요 0 | URL
예...이 책의 주인공이야말로 제국주의의 폭력과 정치권력 앞에서 가장 짓눌리며 자신이 원치 않는 지난한 삶을 살다가, 90세의 어느날 요양원 창문에서 하늘로 날아 갔어요. 그리고 요양원은 아들에게 보낸 편지로 아버지가 1일이 아닌 4일에 죽었기 때문에 월 시설 이용료인 34유로를 지불하라는 기막힌 편지를 보냈지요..이 일로부터 이 책의 태동이 시작 되었지요.
 

 

 

 

 

 

                           곡옥

 

 

 

 

                               갈고 갈아서 갸름한 곡선

                               맑고 맑아서 어리는 속살

                               금관은 아니지만

                               금관의 한 일부

                               저마다의 별들은

                               밤하늘 아니지만

                               밤하늘에 별들 있어

                               반짝이듯이

                               찬란함은 아니지만

                               찬란함의 한 일부

                               찬란함에 깃든

                               별들의 적요

                               영락에 스미는 무언의 환유

                               존재와 부재의 그 외로움

                               네 가슴에 어려오는

                               고요한 슬픔   (P.9 )

 

 

 

 

 

 

                          나무들의 양식

 

 

 

 

 

                                 나무가 먹고 있는 밥을 보았다

                                 몹시 조악한 악식(惡食)이었다

                                 스산한 늦은 저녁이었다

                                 메마른 바람이 불고 있었다

                                 길 잃은 철새가

                                 성긴 가지에 앉아 있었다

                                 나무의 밥과 인간의 밥은

                                 본래 하나

                                 나무와 인간은

                                 같은 밥을 먹지만

                                 내 밥은 그에 비해 푸짐했었다

 

                                 나무의 밥상에는 나무들뿐이었고

                                 인간의 밥상에는 인간들뿐이었다  (P.11 )

 

 

 

 

 

 

                            눈 오는 밤

 

 

 

 

 

                                 "별아!"

 

                                  우제류의 밤이었다

 

                                  어미 소가 말했다

                                  낳은 지 열흘 된

                                  새끼 송아지

                                  젖 빠는 제 새끼

                                  송아지에게 말했다

 

                                  "별아, 네 이름은 별이란다

                                   네가 태어나던 열흘 전 밤하늘

                                   혹한의 밤하늘에 별이 어렸다

                                   내 눈에도 별빛이 어려 있었다

                                   쇠털 같은 세월이 흘러갔다

                                   우리는 내일이면

                                   알 수 없는 세상으로 돌아간단다

                                   땅속 깊이 묻힌단다."

 

                                   별은 땅속에 깊이 묻혔다

                                   제 어미와 더불어 깊이 묻혔다

 

                                   묻힌 자리에 이슬 내리고

                                   묻힌 자리에 꽃이 피었다

                                   밤하늘에 별들이 반짝거렸다

 

                                   별과 꽃 들은 혈육이었다

                                   영원한 영원한 혈육이었다  (P.102 )

 

 

 

 

 

                                                                     -김명수 詩集, <곡옥>-에서

 

 

 

 

 

 

 

 

 

 

 

 

저마다의 찬란함을 간직한 ‘일부’들의 세계
조용히 응시하며, 호명받지 못한 존재들과 교감

미물에서 시작되는 경이로운 발견과 적요한 목격

보잘것없는 대상들과 손잡고 절제된 언어로 삶의 이면을 그려내는 시인 김명수(69)의 아홉번째 시집 『곡옥』(문학과지성 시인선 432)이 출간됐다. 시인은 보이는 번듯함에 가려 그늘진 곳에서만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미물들의 이름을 불러낸다. 표제작의 ‘곡옥’은 옥을 반달 모양으로 다듬어 끈에 꿴, 금관 등에서 볼 수 있는 작은 장식물로, 금관 전체의 휘황찬란함에 비하면 하찮은 물건이다. 그러나 시인은 “금관의 한 일부” “찬란함의 한 일부”라며 곡옥이 본디 갖고 있는 아름다움을 직관한다. 그리고 이 경이로운 발견 속에서 “별들의 적요”처럼 숭고한 묵언을 듣는다. 이는 시인이 전에 없던 세계와 조우하는 순간이며 존재가 저마다 가지고 있는 무한의 시공간을 열어 보이는 순간이기도 하다. 툭 떨어져버리는 과실에서 “가지와 바닥 사이”에 “머무는 평정”(「낙과」)을 읽고, “돌멩이 하나에”서 “향기”(「불행」)를 맡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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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3-08-08 12:36   좋아요 0 | URL
나무는 하늘 먹고 바람 먹겠지요

appletreeje 2013-08-08 17:54   좋아요 0 | URL
그렇겠지요...나무는 하늘 먹고 바람 먹겠지요.
그런데, 사람은...

2013-08-08 13: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8-08 18: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3-08-08 14:50   좋아요 0 | URL
한국 현대시(요즘시) 홍보대사 위촉장을 트리제님께

2013-08-13 07: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3-08-08 18:11   좋아요 0 | URL
아까 버스 정류장에서 폰으로 댓글 달다가 갑자기 버스가 오는 바람에 급하게 닫는다고 한 것이 저렇게 되었네요. 일명 쓰다만 댓글..^^;;
덕분에 트리제님 하시는 일의 일단을 조금 미루어 짐작해 보기에는 2% 부족한 또 다른 신비주의에 살포시 살포당하게 된다는 ...ㅋㅋ

2013-08-13 07: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골목길

 

 

 

 

 

                           이른 아침 출근길 노량진동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오르다 보면

                           하수구로는 졸졸졸 도량물 흐르는 소리

                           집집이 아침밥 준비하는 물

                           양치질하고 머리 감는 물 모여

                           졸졸졸 도랑물 흐르는 소리

 

                           어깨를 겹치고

                           처마를 맞댄 키 작은 집들 사이로

                           된장찌개 끓이는 냄새

                           고등어 굽는 냄새

                           좁은 골목길을 넘실거리고

                           더러는 열어 놓은 창으로 텔레비전 뉴스 소리

 

                           옛날 고샅길 같을까

                           베란다 빨랫줄엔

                           무청 시래기도 내걸리고

                           더러 담장 위 녹슨 철조망에

                           기울어진 채 서 있는

                           대추나무 모과나무

 

                           구불구불 사방

                           핏줄처럼 퍼지고 내장처럼 이어져

                           어디로든 가는 골목길

                           도랑물길 따라 바윗돌 따라

                           어디이든 이어지는 골목길

 

                           달팽이 같은 집들 사이로

                           그길에

                           곧게 내뻗은 직선은 없다

                           달리면서 무너지는 속도도 없고

                           붉은 신호등도 없다  (P.16 )

 

 

 

 

 

 

                          썩은 시

 

 

 

 

                            시가 발효되면

                            술이 될까

                            술이 되어

                            사람들을 취하게 할 수 있을까

 

                            그러고서는

                            오줌이 되고

                            똥이 되어

                            향그러운 흙이 될 수 있을까

 

                            다시 그 땅 위에서

                            파랗게 돋아 나는

                            풀이나 나무가 될 수 있을까

                            풀잎 간지르는 바람이 될 수 있을까

 

                            시도 썩어야 한다

                            썩은 시에서 눈이 돋는다  (P.70 )

 

 

 

 

 

                          개 그냥 살겠다

                                         - 어떤 인생론

 

 

 

 

                             작문 시간에

                             논술은 말고

                             그냥 에세이 식으로

                             인생관을 쓰라 했다

 

                             아, 나도 모르는

                             인생관을 쓰라니

                             참으로 어려웠겠다

 

                             그러나 쉽게 찾아낸 정답

                             정답은 단 세 줄

                             이러했다

 

                             나는 생각해 보니 공부도 못하고 재주도 없고

                             애들한테 아무 인기도 없는 것 같다

                             개 그냥 살겠다  (P.28 )

 

 

 

 

 

 

                           능소화 밥상

 

 

 

 

                              후관 삼층 남교사 화장실

                              북창에서 내려다보면

                              영화초등학교 뒤편 골목길 안

                              낡고 오랜 키 작은 지붕들

 

                              그 가운데 움푹한 빈집

                              구멍 뚫린 슬레이트 지붕

                              서까래는 반쯤 무너진 채

                              마당 가득 능소화 꽃밭

 

                              아무도 내다보지 않으니

                              내게는 황송한 독상

                              호박잎쌈에 강된장 조기젓 놓인

                              열무김치에 감자 넣고 조린 갈치 한 토막

                              한여름 입맛 나는 밥 한 상

 

                              아니면 하늘 정원일까

                              공중 정원일까

                              골목길 안 가까이에선 보이지 않고

                              삼층 북창 허공에서만 보이는  (P.71 )

 

 

 

 

 

 

                            중호 생각

 

 

 

 

                               굴비만 보면

                               마흔 아홉에 죽은

                               시인 윤중호 생각

                               저 세상 어디쯤에서도

                               굴비 한 마리 노릇노릇 구워놓고

                               소주 한 잔에 살 한 점

                               앞니로 조근조근 씹고 있을까

 

                               아니면 다시 스님 되셨을까

                               깊은 산 혼자 사는 암자

                               저물어가는 능소화빛 하늘

                               정지문으로 건네다 보다

                               아궁이불 뒤적이며

                               무국 끓이고 있을지

                               조물조물 고사리나물 무치고 있을지

 

                               굴비 한 마리 노릇노릇 구워놓고

                               부추 겉절이 무치고

                               이 겨울

                               차가운 소주 한 잔

                               목구멍으로 넘기며

                               짜르르 중호 생각이 납니다  (P.108 )

 

 

 

 

                                                                   -윤재철 詩集, <썩은 시>-에서

 

 

 

 

 

 

 

 

 

 

 

    윤재철 시인의 책을 처음 읽은 것은, 시집이 아니라

    2000년에 나온 산문집 <오래된 집>,이였다.

    1985년 교육 무크지 <민중교육> 사건으로 투옥 해직되었다가

    15년만에 복직한 해에 쓴 '오래되고도 하나 낡은 것이 없다'란

    부제가 붙은. 이 산문집의 머리글에서 시인은- 스스로에게 '자유'

    라는 숙제를 주었다 했다. 혼자 한적하게 어디 들어가 살고 싶다

    거나, 현실적인 어떤 굴레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 그 반대로 적나라한 현실 속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것이

    고, 나 스스로 자유로워지고 싶은 것이라는, 부딪치고 깨어지는

    자유를 택하였으며 그러한 자유와 자유를 위한 치열함에 놓인다.-

   쓴 머리말을 오래도록 들여다 본 기억이 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깊은 밤, 기린의 말>속  최일남의 단편소설 '국화 밑에서'에 인용된

   윤재철 시인의 詩, '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를 읽고 너무 좋아 다시 詩集 <능소화>, <거꾸로

   가자>를 또 즐겁게 읽었다. <거꾸로 가자>의 첫 번째 시는, '이제 바퀴를 보면 브레이크 달고

   싶다'인데 1978년 황동규 시인의 '나는 바퀴만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와 바퀴의 '속성'은 같지만

   그 바퀴의 가속도에 빗댄 너무 빠르게만 우리는 ' 너무 오래 달려오지 않았나'를 노래한다.

   그런 윤재철 시인의 새 詩集, <썩은 시>를 다시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읽는다.

   장마철의 어느 오후, 종일 내리는 비로 싱숭생숭해진 학생들에게 단 두 개의 문장을 화두처럼

   던지고 수업을 끝내는 교사 있다 한다. 그 교사가 바로 윤재철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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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3-08-07 09:07   좋아요 0 | URL
마음이 같다면
예나 이제나
사람들 아름다이 어울리는
터전, 마을, 골목, 시골, 도시
모두 될 테지요

appletreeje 2013-08-07 09:45   좋아요 0 | URL
예~그러리라 생각 들어요. ^^

드림모노로그 2013-08-07 10:29   좋아요 0 | URL
위의 시들중에 썩은 시가 제일 마음에 들어요 . 푸하하 ~
시로 취한다는 말이 너무 너무 멋지게 들려서요 ㅎㅎ
썩은 시, 시도 썩을까요? ㅎㅎ
시들이 해학이 가득하여 저절로 웃음이 돋아나게 하네요.
개 그냥 살겠다. 도 좋고 ㅋㅋ
말 그대로 자유로운 시인이라는 성정이 그대로 묻어나는 느낌이 듭니다. ㅎㅎ
복귀와 동시에 즐거움을 한아름 주심을 감사 ~ ㅋㅋ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 ~


appletreeje 2013-08-07 17:36   좋아요 0 | URL
발효는 썩음이기도 하지요. 시는 술이 되고 사람을 취하게 하고, 그리고 그 사람의 똥오줌이 되어 "향그러운 흙"이 되었다가 다시 풀과 나무가 되고 바람이 되고, 온 우주의 생성이 되겠지요. ^^ 이러한 힘은 발효, 그 썩음에서 오는 의미가 아닐까요~? ^^

5공시절 옥고를 치르고 전교조 창설에 주요 영향을 하신, 그리고 부딪치고 깨지는 '자유'의 삶을 번뜩이지 않고 소박하게, 나팔꽃같은 시를 쓰시는 시인이시지요.
저도 '개 그냥 살겠다'도 좋았어요~ㅋㅋㅋ
학생들에게도 <마음이 다 화사해지는 시읽기>를 통해 시읽기의 즐거움,을 가르쳐주려 하시는 열성 문학교사라고 합니다.^^

드림님! 늘 좋은 날 되세요^^ ~

2013-08-07 1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8-07 17: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후애(厚愛) 2013-08-07 14:00   좋아요 0 | URL
저도 시들중에 <썩은 시>가 제일 마음에 듭니다.^^
'썩은 시에서 눈이 돋는다' 이상하게 자꾸 눈길이 갔어요.
즐겁게 재미나게 잘 읽었습니다~*^^*

appletreeje 2013-08-07 17:37   좋아요 0 | URL
후애님! 저도 이 시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썩은 시>가 제일 마음에 들었어요.^^
탁한 진흙구덩이 삶에 작은 뿌리를 심으며, 자신의 순정을 잃지 않고 서서히 꽃을 피우고자 하는 우리의 삶 이야기 같아서요~
즐겁게 재미나게 읽으셨다니, 저도 참 즐겁고 감사드려요~*^^*

프레이야 2013-08-07 23:02   좋아요 0 | URL
개 그냥 살겠다. 재밌네요. 요즘 애들 쓰는 말이라 우습기도하고 씁쓸하기도 하고ᆞᆢ 개웃긴다, 개잼나다, 이런식으로 쓰더라구요. 죄없는 개를 ㅎㅎ

appletreeje 2013-08-08 08:57   좋아요 0 | URL
앗 프레이야님! 그간 잘 지내셨죠~?
요즘 날씨가 너무 무더워 개처럼 헉헉,대고 있어요...ㅋㅋ
오늘도 올해 최고의 기온이라 예보를 봤는데 지금 하늘은 조금
흐려있어서...마음의 준비를 하는 中이랍니다.^^
저도 오늘도, 개 그냥 살까봐요~ㅎㅎ

프레이야님! 더위에 건강 조심하시고 좋은 날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