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개의 그림자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시릴 페드로사 지음, 배영란 옮김 / 미메시스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때가 되면 그것이 아무리 놓치고 싶지 않은, 소중한 존재라도 사라질 것이다. 그렇치 않으려 하는 자는 불멸의 고통을 당하리니. 일어서서 버텨라. 그리고 삶이 있는 곳에 머물러라. 매순간의 삶을 행복하고 소중하게 함께 누려라, 매우 아름답고 혼곤한 책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3-11-26 15: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29 07: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란놀 2013-11-26 16:22   좋아요 0 | URL
날마다 즐겁게 받아들이며 누릴 때에 아름다운 삶 되겠지요

appletreeje 2013-11-29 07:03   좋아요 0 | URL
그러리라 생각 들어요~^^
 
- 그리고 거기에 곰이 있었다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뱅상 소렐 글 그림, 김희진 옮김 / 미메시스 / 201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무심한 곰의 표정처럼, 무심함을 가장하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소박한 소시민들의 삶과 보편적인 갈등의 모습들이 그림자,처럼 넘실거린다. 곰은 결국 죽고, 모험을 떠난 자들만이 저 건너 숲에서 그 곳을 바라 보겠지.

댓글(4)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3-11-26 15: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29 07: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란놀 2013-11-26 16:04   좋아요 0 | URL
<곰>이라는 이름만 붙은 책이 더 있네요.
저는 다른 그림책을 떠올렸어요~

appletreeje 2013-11-29 07:08   좋아요 0 | URL
레이먼드 브릭스의 <곰> 아닐까요~?^^
그러고 보니 이젠 <눈사람 아저씨>를...ㅎㅎ
 

 

 

 

 

 

 

 

 신기할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외모가 풍기는 분위기와 식성도 비슷한 경우가 많다.

 이 집으로 이사오기 전, 개량한옥에 살 때였다. 잠깐 우리 집에 들어와 있던 또또가 내 다리에 매달리며 강한 의사 표시를 했다. 나는 그때 원두커피를 마시고 있었기 때문에

또또가 커피를 원한다곤 상상도 못했다. 그날 또또는 커피를 얻어 먹지 못했다. 그뒤에도 가끔 그런 일이 있었고, 드디어 나는 알아차렸고, 또또는 커피를 마셨다. 그뒤부터 또또는 내가 커피를 마시면 '조금은 남겨주겠지'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반드시 남겨 주려고 했음에도 개가 워낙 조용히 있는 바람에 깜박 잊고 다 마셔 버렸다간 실망해서 폭폭 내쉬는 녀석의 한숨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녀석이 밤새도록 그렇게 한숨을 쉬며 안 잘 것 같아 다시 커피를 끓인 적도 있었다.

 또또가 아파 잘 걸을 수 없을 때면 우리는 산책하다 쉴 겸 가끔 밖에서 커피를 마셨다. 날씨가 좋으면 카페 밖에 내놓은 자리에 앉아 한잔의 커피를 나눠 마시기도 했다. 녀석이 카페라떼를 좋아했기 때문에 또또와 같이 커피를 마실 때면 나는 늘 카페라떼를 주문했다. 우리

 

 

를 기억하는 종업원도 가끔 있어서 손님이 없으면 안으로 들어와 편히 앉아 마시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또또는 그들에게 답례하듯 늘 얌전했다.

그처럼 다른 개에 비해 월등히 얌전했지만, 또또도 남의 공간에서 활개를 칠 때가 있었다. 가난한 나를 만나 평생 좁은 공간에서 답답하게 살았기 때문인지 또또는 늘 넓은 곳에 가면 편안해 보였다. 특히 그 집에 사는 사람이 개를 좋아할 때 또또는 한층 생기를 띠었다. 현관 앞에서 내 배낭을 보고 "어머, 개도 왔네!"라고 반기는 사람이 있으면 녀석은 재깍 고개를 쑥 내밀며 눈을 반짝거렸다. 집에 들어가선 방과 화장실까지 둘러보며 자박자박 걸어 다녔다. 반대로 주인이 반기지 않는 눈치면 그 집에서 나올 때까지 배낭 밖으로 고개 한 번 내밀지 않았다. 녀석은 몸을 잔뜩 웅크린 그 상태로 버둥거리지도 않고 몇 시간이든 있었다. 놀랍게도 또또는 내게 약간 저자세인 사람도 금세 알아봤다. 정말로 신통한 동물적 본능이었다.

 

 

 그런 또또를 데리고 마지막으로 여행을 간 곳은 선암사였다. 늙은 또또를 데리고 먼 그곳으로 여행할 마음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이미 셀 수 없을 정도로 여행을 한 적이 있고, 일찍 그보다 더 먼 곳도 가봤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네 명이 함께하는 여행이라 차를 가지고 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또또가 편히 앉을 자리쯤은 있을 거라고 믿었다.

 

 

 나는 그것이 또또와의 마지막 여행이 될 것임을 알았다. 그 무렵 늙은 또또는 혼이 빠진 듯 잠을 잘 때가 많았고, 비명을 지르거나 가위에 눌려 허덕거리다가도 체력이 바닥난 것처럼 곧 다시 곯아떨어지곤 했다. 여전히 밖에 데리고 나가면 제 힘으로 걸었지만, 이미 또또에게 예전의 생기란 없었다. 그래서 선암사에서 비로암으로 가는 길을 걸을 때는 그 여행이 우리에게 마지막 여행일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그때 또또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나와 보조를 맞춰 나란히 걸었다. 가끔은 나보다 앞에서 생기있게 걷기도 했다. 하지만 그 길은 국립공원에 속해 있어 개를 데리고 갈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자주 또또를 안거나 배낭 속에 집어넣었다. 돌이켜 보면 그때만큼 내려다보이는 또또의 등이 슬프고 애틋해 보인 적도 없었던 것 같다.

 그렇게 그 길을 걸어 비로암에 도착했을 때 마애불 앞에는 엄청나게 큰 개가 턱하니 앉아 있었다. 썰매를 끄는 시베리안허스키보다 큰 책에서도 본 적 없는 그 개의 품종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개 주인의 권력이 개를 통해 그대로 느껴졌다. 그곳까지 개를 데리고 온 사람도 개도 너무나 당당했고, 나처럼 법을 따져 가며 다른 사람 눈치를 보지도 않았다. 영향력깨나 행사하고 있을 그 절의 신도가 데리고 왔을지도 모를 개는 심지어 오만해 보이기까지 했다. 늘 좁은 집에서 내 발에 밟히지 않기 위해 신경을 쓰며 산 또또에게선 한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개의 유골을 지고 다니던 이웃은 가여운 개를 끝까지 돌보느라 힘들었겠지만,그들이 그 개를 통해 얻었을 위안은 그 녀석을 잃은 슬픔을 상쇄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개들은 정말이지 인간의 속된 감정을 정화시키는 데 더없이 좋은 존재다. 인간에게서는 쉽게 느낄 수 없는 그들의 순정과 순수함이 주는 위로에 매혹되면, 개와 살면 일생이 평화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혼자 사는 젊은이가 개와 너무 밀착되어 생활하는 것을 보면 조금은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세상을 알 만큼 아는 나이 든 독신들이 그렇게 지내는 것도 조심해야 할 것 같다. 같이 살고 있는 개에게서 얻는 정서적 위안과 평화를 변덕스런 인간관계에서는 쉽게 느낄 수 없어 그들에게 다시는 이성을 만날 기회가 생기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P.161~164 )

 

 

 

 

                                                                  -조은 산문집, <또또>-에서

 

 

 

 

 

 

 

    2001년 조은 시인의 <벼랑에서 살다>,를 읽다가 처음 만났던 '또또'가 죽은 후 1년이 지나고

    17년을 함께 살았던 '또또'에 대해 시인이 담담하게 애정으로 써 내려간 <또또>를 읽었다.

    광화문 근처에 있는 주택가 사직동에서 시인은 22년을 살았다. 한 곳에 눌러앉아 살기엔 만만

    찮은 세월이다. 사직동에서 살았던 세 집 중, 또또는 두 번째 셋집 개량한옥에서 만나게 되었던

    개다. 개를 키우는 모습을 빼면 인정 많고 다정다감한 그 집주인에게서 끔찍한 폭행을 당하며

    인간에 대한 공포와 상처로 평생을 아팠고 예민했던 또또를, 처음에는 결코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 꽤 오랫동안 안간힘을 썼으나..결국은 집주인의 학대와 폭행에서 더는 그 개를 놔둘 수

    없어 세 번째로 이사한 한옥으로 데리고 나온 후, 또또가 죽기 전까지의 이야기다.

    상처투성이로 왔지만, 또또는 시인에게 어떤 마음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한다. 사람으로 받은

    공포감을 다스리지 못해 저도 모르게 시인을 물기도 했지만, 물고 나선 곧바로 신음하고 괴로워

    하는 모습을 보면 그 녀석을 미워할 수 없었다고 했다.  상처 받은 채 왔지만, 사람들과 나누는

    마음은 여러 이유로 변덕이 잦았지만, 한결같이 고른 마음으로 곁에 있었던 작은 잡종견 또또.

    또또,는 시인에게 인간인 자신이 가지고 있던 오만방자한 관념의 틀을 깰수 있게 하였고, 또한

    군더더기 없고 가식없는 삶과 생명의 소중함을 가르쳐 준 고귀한 존재였다고 시인은 말한다.

    또또가 떠난 지 1년이 넘었고, 재개발로 인해 이제 조은 시인도 사직동을 떠날 때가 가까워지고

    있다. 팔고 가야 할 한 평 땅도, 캡슐만 한 집도 없는 곳에서 깊이 뿌리를 내리고 살았던 사직동

    에서 또또를 먼저 떠나 보내고 시인은 말한다.

    '내 뿌리의 본질이 무엇이든 이젠 어디로 옮겨 가도 삶을 향유할 수 있다. 그걸 인식하자 미래가

    너무도 명쾌하다. 살다보니 이런 날이 있다!'라고.

    참 다행이고 좋다,

    어느 사람의 글이나 생각을 오랫동안 읽거나 지켜보고 있으면, 그 사람의 소중한 무엇이 내게

    도 익숙하고 친밀하게 된다.  내게 또또,도 그랬다.

    "또또야, 우리 오늘 씩씩하게 잘하자."

    " 언니와 나는 처음 가는 길을 달려갔다. 한 줌도 안되는 또또의 뼛가루를 가지고 돌아왔다.

    또또와 나, 우리는 정말로 잘했다."

    언제나 또또언니에게 조용한 열정이었고, 이 책의 마지막 챕터의 제목이기도 했던

    예쁘고 포근하고 상냥하고 사랑스럽던, 또또!

    그 곳에서도 언제나 편안하고 행복하길 바란다. 안녕!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란놀 2013-11-24 13:51   좋아요 0 | URL
꽃도 나무도
또 아이들도
모두 우리 모습을 닮겠지요.
우리 곁에 있는 책들까지도요..

appletreeje 2013-11-25 10:24   좋아요 0 | URL
예~함께 곁에서 가까이 지내다 보니
서로서로 같은 마음이 되어, 닮는 듯 싶어요~^^

2013-11-24 14: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25 1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3-11-24 15:09   좋아요 0 | URL
썰매 끄는 견종 중에서 허스키는 그리 큰 개가 아닌데, 아마 알래스카 말라뮤트와 혼동한 것 같아요.허스키보다 두 배는 크죠.

appletreeje 2013-11-25 10:30   좋아요 0 | URL
저도 말라뮤트,를 떠올렸어요.^^
노이에자이트님께선 동물을 참 좋아하시는
따뜻한 분이시지요~!*^^*

2013-11-24 16: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25 1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후애(厚愛) 2013-11-24 17:31   좋아요 0 | URL
선암사에 다녀왔었는데 다시 가고싶은 곳이랍니다~
다음에 갈 기회가 생긴다면 또또가 갔던 비로암을 다시 찾아가봐야겠어요..
참 슬픈 글이지만 참 좋은 글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좋은 글을 읽게 해 주셔서 너무 너무 감사드립니다.*^^*

appletreeje 2013-11-25 10:42   좋아요 0 | URL
선암사는 엄마가 전에, 승선교에서 찍으신 사진이 있는데..그래서
더욱 기억에 남는 곳이에요.^^
김훈의 <자전거 여행>에서 '내세에는 선암사 화장실에서 만나자.'
했지요..ㅎㅎㅎ
후애님! 비가 오는 날, 따뜻하고 좋은 하루 되세요~*^^*

2013-11-25 21: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25 2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01 14: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03 09: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느 늦은 저녁 나는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P.11 )

 

 

 

 

 

 

                           휄체어 댄스

 

 

 

 

 

                               눈물은

                               이제 습관이 되었어요

                               가닥가닥 온몸의 혈관으로

                               타들어오는 불면의 밤도

                               나를 먹어치울 순 없어요

 

                              보세요

                              나는 춤을 춘답니다

                              타오르는 휄체어 위에서

                              어깨를 흔들어요

                              오, 격렬히

 

                              어떤 마술도

                              마법도 없어요

                              단지 어떤 것도 날

                              다 파괴하지 못한 것뿐

 

                              어떤 지옥도

                              욕설과

                              무덤 저 더럽게 차가운

                              진눈깨비도, 칼날 같은

                              우박 조각도

                              최후의 나를 짓부수지 못한 것뿐

 

                              보세요

                              나는 노래한답니다

                              오, 격렬히

                              불을 뿜는 휄체어

                              휄체어 댄스   (P.22 )

 

 

                              * 강원래의 공연에 부쳐

 

 

 

 

 

 

                              파란 돌

 

 

 

 

 

                                십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아직 그 냇물 아래 있을까

 

                                난 죽어 있었는데

                                죽어서 봄날의 냇가를 걷고 있었는데

                                아, 죽어서 좋았는데

                                환했는데 솜털처럼

                                가벼웠는데

 

                                투명한 물결 아래

                                희고 둥근

                                조약돌을 보았지

                                해맑아라

                                하나, 둘, 셋

 

                                거기 있었네

                                파스름해 더 고요하던

                                그 돌

 

                                나도 모르게 팔 뻗어 줍고 싶었지

                                그때 알았네

                                그러러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그때 처음 아팠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난 눈을 떴고,

                                깊은 밤이었고

                                꿈에 흘린 눈물이 아직 따뜻했네

 

                                십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그동안 주운 적 있을까

                                놓친 적도 있을까

                                영영 잃은 적도 있을까

                                새벽이면 선잠 속에 스며들던 것

                                그 푸른 그림자였을까

 

                                십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그 빛나는 내(川)로

                                돌아가 들여다보면

                                아직 거기

                                눈동자처럼 고요할까  (P.33 )

 

 

 

 

 

 

                             해부극장*

 

 

 

 

 

                                한 해골이

                                비스듬히 비석에 기대어 서서

                                비석 위에 놓인 다른 해골의 이마에

                                손을 얹고 있다

 

                                섬세한

                                잔뼈들로 이루어진 손

                                그토록 조심스럽게

                                가지런히 펼쳐진 손

 

                                안구가 뚫린 텅 빈 두 눈이

                                안구가 뚫린 텅 빈 두 눈을 들여다본다

 

 

                                              (우린 마주 볼 눈이 없는걸.)

                                             ( 괜찮아, 이렇게 좀더 있자.)   (P.44 )

 

 

 

                               * 17세기 이탈리아의 해부학자 안드레아 베살리우스의 책. 수년

                                  간의 급진적 해부 연구 끝에 인간의 뼈와 장기, 근육 들 정교한

                                  세부를 목판에 새겨 제작했다. 독특한 구도의 해골 그림들이 실

                                  려 있다

 

 

 

 

 

 

                                저녁의 소묘 3

                                                -유리창

 

 

 

 

 

                                    유리창,

                                    얼음의 종이를 통과해

                                    조용한 저녁이 흘러든다

 

                                    붉은 것 없이 저무는 저녁

 

                                    앞집 마당

                                    나목에 매놓은 빨랫줄에서

                                    감색 학생코트가 이따금 펄럭인다

 

                                   (이런 저녁

                                    내 심장은 서랍 속에 있고)

 

                                    유리창,

                                    침묵하는 얼음의 백지

 

                                    입술을 열었다가 나는 

                                    단단한 밀봉을 배운다  (P.65 )

 

 

 

 

 

 

                                  괜찮아

 

 

 

 

 

                                     태어나 두 달이 되었을 때

                                     아이는 저녁마다 울었다

                                     배고파서도 아니고 어디가

                                     아파서도 아니고

                                     아무 이유도 없이

                                     해질녘부터 밤까지 꼬박 세 시간

 

                                     거품 같은 아이가 꺼져버릴까 봐

                                     나는 두 팔로 껴안고

                                     집 안을 수없이 돌며 물었다

                                     왜 그래.

                                     왜 그래.

                                     왜 그래.

                                     내 눈물이 떨어져

                                     아이의 눈물에 섞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말해봤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괜찮아.

                                     괜찮아.

                                     이제 괜찮아.

 

                                     거짓말처럼

                                     아이의 울음이 그치진 않았지만

                                     누그러진 건 오히려

                                     내 울음이었지만, 다만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며칠 뒤부터 아이는 저녁 울음을 멈췄다

 

                                     서른 넘어야 그렇게 알았다

                                     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향해

                                     괜찮아

                                     왜 그래,가 아니라

                                     괜찮아.

                                     이제 괜찮아.  (P.76 )

 

 

 

 

 

 

 

                                저녁의 소묘 5

 

 

 

 

 

                                      죽은 나무라고 의심했던

                                      검은 나무가 무성해지는 걸 지켜보았다

 

                                      지켜보는 동안 저녁이 오고

 

                                      연둣빛 눈들에서 피가 흐르고

                                      어둠에 혀가 잠기고

 

                                      지워지던 빛이

                                      투명한 칼집들을 그었다

 

                                     ( 살아 있으므로)

                                      그 밑둥에 손을 뻗었다   (P.137 )

 

 

 

 

 

                                                -한 강 詩集,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에서

 

 

 

 

 

 

 

 

 

 

 

 

 

 '문학과지성 시인선' 438권. 한강의 첫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에는 침묵의 그림에 육박하기 위해 피 흘리는 언어들이 있다. 그리고 피 흘리는 언어의 심장을 뜨겁게 응시하며 영혼의 존재로서의 인간을 확인하려는 시인이 있다. 그는 침묵과 암흑의 세계로부터 빛나는 진실을 건져 올렸던 최초의 언어로 가닿고자 한다. 뜨겁고도 차가운 한강의 첫 시집은 오로지 인간만이 지닌 '언어-영혼'의 소생 가능성을 점검해보는 고통의 시금석인 셈이다.

 

 

 

 

 

          저녁에 선물 받은 한강의 첫 詩集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를 읽는다.

          여전히 불 속에서 끓고 있는 심장, 얼음 속에서 타고 있는 불, 투명하게 스스로

          숨결마저..숨 죽이며 듣는 고요한 침묵과, 반짝이는 '빛'으로 나가고 있는 詩集.

          

 

 

 

 

 

 























댓글(15)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진 2013-11-20 23:37   좋아요 0 | URL
세상에, 트리제님 벌써 읽으신 거예요? 부러워요.
저는 이 글 안 읽고 아껴둘 거예요.
나중에 책으로 한 자 한 자 새겨가면서 읽을 거예요!

그래도 자기 전에 한 편만 읽고 자야지... ㅎ_ㅎ

appletreeje 2013-11-20 23:59   좋아요 0 | URL
앗, 소이진님이시네요~!^^ 너무 너무 반가워요...흑흑..
아까 저녁에..어느 자리에 갔다가 선물로 받아서 지금 읽고 있어요.
그러지 않아도 이 시집 읽으며 소이진님 생각이 났어요.
이 시집을 읽으며 또 얼마나 아름다운 단상들을 펼치실까,하고..^^
아...한강님은 모습도, 소설도, 시도, 자작곡의 노래들도 다 한결같이
'한강'의 모습이어서 참 좋아요~~

소이진님! 이제 공부하시느라 더 힘드시겠지만, 더욱 기쁜 시간들을 위한
'파종'으로 여기시며..몸도 마음도 늘 건강하고 좋으시길 기도해요.
좋은 밤 되세요~*^^*

2013-11-21 22: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후애(厚愛) 2013-11-20 23:49   좋아요 0 | URL
오늘도 즐겁게 재미나게 잘 읽었습니다~*^^*
다 좋은 시들인데 저는 시 중에 <파란 돌>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좋은 시들을 올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좋은 꿈 꾸셔요~ *^^*

appletreeje 2013-11-20 23:59   좋아요 0 | URL
후애님~~우리 이 시간, 함께 시를 읽네요~
詩들이 다 참 좋아요! 참으로 좋아서 마음이 뻐근해요...
후애님께서도 조금 있다 이 詩集, 반갑게 읽으시리라 생각합니다~

후애님께서도, 환하고 좋은 꿈 꾸세요~*^^*

프레이야 2013-11-21 00:12   좋아요 0 | URL
육년전 엄마 수술 전야에 한강의 가만가만부르는노래,를 읽으며 뜬눈으로 보내며 두렵던 마음을 토닥였던 기억이 나요. ^^ 조근조근 토닥여주는 힘이 있는 한강의 시집, 들려주신 시 이외에도 궁금해집니다.

appletreeje 2013-11-21 01:15   좋아요 0 | URL
가만가만부르는노래,를 읽으시며 그런 시간이 있으셨군요...
올린 시외에도 너무 마음에 들어 오는 시들이 많았는데 간단히 올렸습니다.
1993년에 시인으로 등단한 한강이 거의 20년 만에 묶는 첫 시집이라 이모저모
천천히... 가만가만 읽으실 시들이 참 많으실 듯 해요.
프레이야님께서도 읽어 보시면, 마음에 드는 시집이라 생각되구요~

프레이야님! 하얀 평화,같은 좋은 밤 되세요~*^^*

파란놀 2013-11-21 03:16   좋아요 0 | URL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빛을 느낄 수 있으면
언제나 즐겁게 노래도 시도 되리라 생각해요.
가을달 밝은 밤입니다.

appletreeje 2013-11-23 22:59   좋아요 0 | URL
예~그렇습니다~
함께살기님! 좋은 밤 되셔요~*^^*

하늘바람 2013-11-21 12:59   좋아요 0 | URL
참 좋네요

appletreeje 2013-11-23 23:03   좋아요 0 | URL
예~저도 이 詩集의 시들 읽으며
참, 좋았습니다~
늘 감사드려요~^^
하늘바람님! 편안하고 좋은 주말밤 되시길요~*^^*

착한시경 2013-11-22 00:38   좋아요 0 | URL
정말 오랫만에 서재에 다시 왔어요...여전히 좋은 시를 올려 주시는 트리제님^^ 깊은 밤...잘 읽고 갑니다....

appletreeje 2013-11-23 23:07   좋아요 0 | URL
정말 오랫만이시네요~!^^ 그러지 않아도
요 며칠 착한시경님 생각이 많이 났는데요~*^^*
무지무지 반갑고 참 좋습니다!
착한시경님! 포근하고 좋은 밤 되세요~*^^*

후애(厚愛) 2013-11-22 18:13   좋아요 0 | URL
편안한 금요일 오후 되시고,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appletreeje 2013-11-23 23:11   좋아요 0 | URL
ㅎㅎ 벌써 토요일 밤이 되었습니다~
후애님께서도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셨겠지요~?^^
저도 후애님 덕분에 편안한 주말 보내고 있습니다~
후애님께서도, 즐겁고 행복한 주말 되세요~*^^*
 

 

 

 

 

 

 

 

                            수학자의 아침

 

 

 

 

 

                             나 잠깐만 죽을께

                             삼각형처럼

 

                             정지한 사물의 고요한 그림자를 둘러본다

                             새장이 뱅글뱅글 움직이기 시작한다

 

                             안겨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안겨 있는 사람을 더 꼭 끌어안으려 생각한다

 

                             이것은 기억을 상상하는 일이다

                             눈알에 기어들어 온 개미를 보는 일이다

                             살결이 되어버린 겨울이라든가, 남쪽바다의 남십

                          자성이라든가

 

                             나 잠깐만 죽을께

                             단정한 선분처럼

 

                             수학자는 눈을 감는다

                             보이지 않는 사람의 숨을 세기로 한다

                             들이쉬고 내쉬는 간격의 이항대립 구조를 세기로

                          한다

 

                             숨소리가 고동 소리가 맥박 소리가

                             수학자의 귓전에 함부로 들락거린다

                             비천한 육체에 깃든 비천한 기쁨에 대해 생각한다

 

                             눈물 따위와 한숨 따위를 오래 잊고 살았습니다

                             잘 살고 있지 않는데도 불구하구요

 

                             잠깐만 죽을께,

                             어디서도 목격한 적 없는 온전한 원주율을 생각하며

 

                             사람의 숨결이

                             수학자의 속눈썹에 닿는다

                             언젠가 반드시 곡선으로 휘어질 직선의 길이를 상

                          상한다  (P.14 )

 

 

 

 

 

 

                              평택

 

 

 

 

 

                              벌거벗은 사람이 되어 부끄럽게 서 있던 그 자리에서

                              더 벌거벗은 한 사람이 나타나 오랫동안 당당하게

                           울었다

 

                              자궁에 손을 넣어

                              사산된 새끼를 꺼낸 경험을 들려주던

                              경마장 남자의 껍질 같은 손을 보았다

 

                              아픈 말[馬]을 사람들은 고기라고 부른다고

 

                              치킨을 나누어 먹으며 나는 고기로 앉아

                              헐벗어가고 있었다

 

                              현관에서 신발을 정리하며 한 남자가

                              작별 인사처럼 해준 말이었다

                              직장에 다닌 시간보다

                              해고된 채로 농성을 하고 있는 시간이 더 오래되었

                           다며

 

                              벌거벗은 채로

                              나는 겨우 신발을 신었다

 

                              죽는 순간엔 굳은 살도 다 풀린다고

 

                              그걸 직접 봤다는 남자와 나란히

                              담배를 피우며 걸었다

                              기차는 레일 위로 당당하게 달렸다

 

                              희망이 고문에 가깝다고 말하는 친구가 옆에 앉았다

                              희망이 고기에 가깝다는 말로 들었다

 

                              사람을 만난 날이었다

                              예상치 못한 어딘가가 깊이 파였고

                              더 이상 무섭지는 않았다  (P.22 )

 

 

 

 

 

 

                             원룸

 

 

 

 

 

                              창문을 열어두면

                              앞집 가게 옥외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온다 내

                           방까지 닿는다

 

                              주워 온 돌멩이에서 한 마을의 지도를 읽는다

                              밑줄 긋지 않고 한 권 책을 통과한다

 

                              너무 많은 생각에 가만히 골몰하면

                              누군가의 이야기를 엿듣는 느낌이 온다

 

                              꿈이 끝나야 슬그머니 잠에서 빠져나오는 날들

                              꿈과 생의 틈새에 누워 미워하던 것들에게 미안해

                           하고 있다

 

                              이야기는 그렇게 내 곁에 왔고 내 곁을 떠난다

 

                              가만히 있기만 하여도 용서가 구름처럼 흘러간다

                              내일의 날씨가 되어간다

                              빈방에 옥수수처럼 누워서  (P.49 )

 

 

 

 

 

 

                             생일

 

 

 

 

 

                             흰쌀이 익어 밥이 되는 기적을 기다린다

                             식기를 가지런히 엎어 두고

                             물기가 마르길 기다리듯이

 

                             푸릇한 것들의 꼭지를 따서 찬물에 헹군다

                             비릿한 것들의 상처를 벌려 내장을 꺼낸다

 

                             이 방은 대합실의 구조를 갖고 있다

                             한 정거장 한 정거장 파리함과 피곤함을 지나쳐 온

                          사람이

                             기다란 의자에 기다랗게 누워 구조를 완성한다

 

                             슬픔을 슬퍼하는 사람이 오로지 슬퍼 보인다

                             사람인 것에 지쳐가는 사람만이 오로지 사람다워

                          보인다

                             안식과 평화를 냉장고에서 꺼내 아침상을 차린다

 

                             나쁜 일들을 쓰다듬어주던

                             크나큰 두 손이 지붕 위에서 퍼드덕거릴 때

                             햇살이 집안을 만건곤하게 비출 때

 

                             미역이 제 몸을 부풀려 국물을 만드는 기적을

                             간장 냄새와 참기름 냄새가 돕고 있다

 

                             살점을 떼어낸 듯한 묵상이

                             눈물처럼 밥상에 뚝뚝 떨어진다

                             쪼그리고 앉아 무릎을 모은다  (P.72 )

 

 

 

 

 

 

                             내부의 안부

 

 

 

 

 

                            엽서를 쓰고 있어요 너에게 쓰려다 나에게

 

                            오래전에 살았던 주소를 먼저 적었어요 엽서의 불

                         충분한 지면에 고양이가 와서 앉았어요 고양이가 비

                         킬 때까지 연필을 놓고 고양이가 비킬 때까지 연필이

                         제 그림자를 껴안은 채로 누워 있는 걸 바라보다 연

                         필과 연필의 그림자 사이를 기어가는 개미를 지켜보

                         았어요

 

                            아침에 세면대 속에서 만났던 두꺼비에 대해 엽서

                         를 쓰려다 거울 속에서 보았던 검은 얼굴에 대해 쓰

                         고 있어요 친해질 수 없었던 얼굴과 친숙해져버린 친

                         한 사람에 대해

 

                         빵 부스러기로 축제를 여는 개미와

                         빵에 잼을 발라 허기를 비껴가는 나 사이에

                         잠깐의 친분이 싹트고 있습니다

 

                            엽서를 쓰고 있어요 나에게 쓰려다 두꺼비에게

 

                            조금 전에 만났던 누군가를 조금 전의 감정으로 회

                         상하기 시작했을 때 엽서에다 그림을 그리고 있었어

                         요 그린 그림을 지우고 있었어요 지우개가 그림을 다

                         지울 때까지 연필이 제 그림자와 껴안고 누워 있을

                         때에 유서를 쓰려다 연서를 쓰게 된 사람에 대해 생

                         각해요

 

                            뜨거운 물을 담은 물통을 껴안은 채

                            잠이 들었다고 쓰려다가

                            이 방을 썼던 사람들이 견뎠을 추위가

                            이불이 되어주었다고 쓰고 있어요  (P.80 )

 

 

 

 

 

 

                              강과 나

 

 

 

 

 

                           지금이라고 말해줄께, 강물이 흐르고 있다고, 깊지

                         는 않다고, 작은 배에 작은 노가 있다고, 강을 건널

                         준비가 다 됐다고 말해줄께.

 

                            등을 구부려 머리를 감고, 등을 세우고 머리를 빗

                         고, 햇볕에 물기를 말리며 바위에 앉아 있다고 말해

                         줄께, 오리온 자리가 머리 위에 빛나던 밤과 소박한

                         구름이 해를 가리던 낮에, 지구 건너편 어떤 나라에

                         서 네가 존경하던 큰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나도 들

                         었다고 말해줄께.

 

                            돌멩이는 동그랗고 풀들은 얌전하다고 말해줄께,

                         나는 밥을 끊고 담배를 끊고 시간을끊어버렸다고 말

                         해줄께, 일몰이 몰려오고, 알 수 없는 옛날 노래가 흘

                         러오고, 발가벗은 아이들이 발가벗고, 헤엄치는 물고

                         기가 헤엄치는 강가.

 

                            뿌리를 강물에 담근 교살무화과나무가 뿌리를 강물

                         에 담그고, 퍼덕이는 커다란 물고기가 할아버지의 낚

                         시항아리에서 쉴 새 없이 퍼덕이고, 이 커다란 물고

                         기를 굽기 위해 조금 후엔 장작을 피울 거라고.

 

                            구불구불한 강을 따라 구불구불한 길이 나 있는 이

                         곳에서, 구불구불한 길에 사는 구불구불한 사람들과

                         하루종일 산책을 했다고 말해줄께. 큰 나무 그늘 아

                         래 작은 나무, 가느다란 나무다리 아래 가느다란 나

                         무 교각들이 간신히 쉬고 있다고.

 

                            멀리서 한 사람이 반찬을 담은 쟁반을 들고 살금살

                          금 걸어오고 있다고 말해줄께, 물고기는 바삭바삭하

                          다고, 근사한 냄새가 난다고, 풍겨온다고, 출렁인다

                          고, 통증처럼 배가 고프다고, 준비가 다 됐다고, 지금

                          이라고 말해줄께.  (P.96 )

 

 

 

 

 

 

                        정말 정말 좋았다

 

 

 

 

 

                           갑자기 우렁차게 노래를 불렀다

                           연료가 떨어진 낡은 자동차처럼

 

                           너는 다음 소절을 우렁차게 이어갔다

                           행군하듯 씩씩하게 걸었을 거다

 

                           같은 노래를 하면

                           같은 입 모양을 갖는다

                           같은 시간에

                           같은 길에서

 

                           모퉁이를 돌면서

                           같은 말을 동시에 할 수도 있다

                           "와, 보름달이다!"

                           같은

 

                           모퉁이를 돌아도

                           꿈이 휘지 않는다는 착각을

                           나누어 가진다

 

                           땀을 뻘뻘 흘리는 눈사람에게

                           장갑을 끼워줄 수도 있다

                           장갑차에게 꽃을 꽂아주듯이

 

                           가로등이 소등된다

                           우리의 그림자가 사라진다

                           저 모퉁이만 돌면 우리, 유령이 되자

                           담벼락에 기댄 쓰레기봉투에서

                           도마뱀이 꽃을 물고 기어 나오듯이

 

                           숨어 있는 것들만 믿기로 한다

                           병풍 뒤에 숨겨진 시신처럼

                           우리는 서로의 뒷모습이 된다

                           정말 정말 좋았다   (P.120 )

 

 

 

 

                                                        -김소연 詩集, <수학자의 아침>-에서

 

 

 

 

 

 

 

 

 

 

 

 

 

정지한 사물들의 고요한 그림자를 둘러보는 시간

매일 아침, 잠시 죽음 속으로 들어가
들리지 않는 것을 듣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다

‘그렇지 않았던 것들’을 포착해내는 아침의 감각

1993년 등단한 후 지금까지, 세 권의 시집을 통해 서늘한 중에 애틋함을 읽어내고 적막의 가운데에서 빛을 밝히며 시적 미학을 탐구해온 시인 김소연이 네번째 시집 『수학자의 아침』을 출간했다. 시인은 묻는다. “깊은 밤이란 말은 있는데 왜 깊은 아침이란 말은 없는 걸까”. 그래서 오늘 아침에는 조금 “낯선 사람이 되는 시간”을 가져보기로 한다. 평론가 황현산은 시집의 발문에서 김소연의 이러한 실천을 가리켜 “깊이를 침잠과 몽상의 어두운 밤에서 찾으려 하지 않고 이성과 실천의 아침에 두려” 하고 있다고 말한다. 시인이 바라보는 아침의 풍경은 정지해 있는 사물들의 고요한 그림자가 전부인 듯하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이르러 “새장이 뱅글뱅글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제까지는 ‘그렇지 않았던 것들’이 시인의 선명한 감각에 포착되는 장면 중 하나다.

 

 

 

 

 

 

                                씩씩하고 슬프게

 

 

                                                         황 현 산

 

 

 

 

 

 소연에게.

 태국에서 두 번, 히말라야의 어느 산록에서 한 번, 그리고 터키에서 암행하면서 또 한 번, 너는 내게 엽서를 보냈지만, 나는 너에게 답장을 한 기억이 없구나. 너는 내내 주소를 바꾸며 움직이고 있었으니 답장을 보내려 해도 보낼 도리가 없었지. 네가 어디에 정주해 있다 하더라도 사정은 아마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직업적인 급박한 요청도 없이 백지를 내려다보고 앉아 있는 일이 끔찍하게만 느껴지는 내 성격도 성격이겠거니와 무엇보다 네가 답장 같은 것을 기다리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었다. 그렇더라도 마음의 빚은 쌓이기 마련이어서 어떻게든 내 자신을 위로하여 채무감에서 벗어나고 싶지. 그럴 때는 가볍게 찬탄조로 한마디 한다. "씩씩한 소연이."  (P.127 )

 

 

너를 씩씩하다고 말해야 하는 것은 네가 있어야 할 자리에 어김없이 네가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너는 네가 손수 꾸린 어린이도서관의 관장이었고, 시를 가르치는 선생이었지. 너는 용산의 시인이었고 강정의 주민들에게 낯익은 얼굴이었지. 해야 할 말을 다 하고, 그러면서도 너는 늘 틈을 내서 세상에서 가장 깊은 곳까지 찾아들어 가장 깊은 생각을 캐낼 줄 알았지. 그러나 무엇보다도 너를 씩씩하다고 말하게 한 것은 진흙의 늪을 뚫고 왕골처럼 솟아오르곤 하던 네 시의 말이었다. 나는 너를 생각할 때마다 늘 그 한마디를 말하며, 너의 첫 시집 [극에 달하다]의 그 긴 시, 아니 시가 아니라 제목이 긴 시, "바다를 보러 가야겠다"로 시작하여 여섯 줄로 제목을 채우고서야 본문이 시작되는 그 시를 아마도 떠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세월을 물 쓰듯 썼던 그 시절을 보러 가야겠다"던 그 시를 누가 잊을 수 있겠니. 너는 감정의 재벌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낯설고 억센 바람 창문을 흔들어대는데, 우왁스런 그 감정의 손아귀와 싸우며 책상 앞에 화병처럼 앉아 있다가, 끝내 마음의 자락자락 들끓던 힘들을 낭비하고 말았다고 한탄하였다. 그래서 악기의 빈 공명통보다 더 비어버린 네 삶의 목적이 천 년 동안 잠을 자는 것이라 했고, 너의 수면이야말로 시대에 대한 예의이며 자비라고도 했다. 시대는 네 감정을 착취할 줄도 몰랐으니 당연하지. 시대는 네 감정 남의 감정 모든 감정을 폐차장의 고철처럼 켜켜이 쌓아두고 녹슬기만 기다렸으니 당연하지. 나는 네 천년의 잠을 씩씩하다고 말한다. 그 수면의 바다를, 그 끝없을 물결을, 네 잠을 깨우지도 않고 문명도 아닌 그 모든 문명을 삼켜버릴 그 파도를 씩씩하다고 말한다. 꿈의 넓고 긴 파동으로 세상의 지형을 바꿀 네 수면의 바다보다 더 거대한 반역을 나는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P.128~129 )

 

 

 씩씩한 소연아.

 너의 새 시집이 슬픔으로 가득하구나. 내가 슬픔을 말하는 것은 시구의 갈피에 삶의 고독한 정경이 곤두서 있기 때문도 아니고, 이해받지 못하는 어떤 진실들이 망각의 웅덩이를 이루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여전히 네가 일상의 곡절 속에서 낭비된 마음들을 바다와 같은 천 년의 잠으로만 회복하려 한다고 여겨서도 아니다. 내가 슬픔이라고 부른 것은 다른 것. 온갖 감정과 의지의 무변한 저수조가 아득하게 저기 있는데 너는 한 번의 물결을 실천할 때마다 저 온전한 바다를 잠시 잊어야 하는 것이 불안하다는 듯 특별한 목소리로 말하지. 집 뒤의 볏단을 높게 쌓아둔 농부 아낙이 추수가 끝난 논에서 이삭을 주울 때는 그 노적을 잊고 이삭으로 채우지 못한 바구니만 안타까워하듯이. 너는 아침에 일어나 창을 열 때마다 네가 심정의 깊은 자리에 간직한 바다가 네 손끝의 작은 물결로 졸아들었을 것을 염려하지. 그러나 한 줌 물결을 버리고 또 한 줌 물결을 쥐는 일이 아니라면 무슨 수단으로 바다를 기억할 수 있을까. 저 바다라 한들 기슭의 잔물결을 거두어들이고 만다면 달리 무엇으로 바다가 될 수 있을까. 아니, 너에게 물을 필요도 없겠다. 너에게는 아주 익숙한 비밀이 바로 그것이기도 하니 말이다. 네가 깊이를 침잠과 몽상의 어두운 밤에서 찾으려 하지 않고 이성과 실천의 아침에 두려 하는 것도 - "깊은 밤이라는 말은 있는데 왜 깊은 아침이라는 말은 없는 걸까", [낯선 사람이 되는 시간]에서 너는 괄호를 쳐놓고 이렇게 물었지-  그 때문이지. 너의 명중한 수학자가 두뇌의 민첩함과 숨을 멈추고 잠시 죽음 속에 들어가며, 들리지 않는 것을 듣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며, 아침마다 [수학자의 아침]을 맞는 것도 그 때문이지.  (P.130~131 )

 

 

 씩씩한 소연아.

 영롱하도록 슬픈 시 [강과 나]를 말하지 않을 수 없구나. 너는 지금 그 자리에서, 지금이라고 말하는구나. 너는 지금 모든 준비가 다 끝났다고 말하려 하는구나. 같은 머리의 물기를 햇볕에 말리고 바위 위에 앉아 있다고, 돌멩이는 동그랗고 풀들은 얌전하다고, 낚시꾼의 낚시는 낚시 항아리가 풍요롭다고, 장작불 위에 물고기는 바삭바삭하다고, 통증처럼 배가 고프고, 준비가 끝났다고. 지금 너는 말해주려 하는구나. 그러나, 나, 그 시간은 슬프다. 그 지금이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아서 슬프고, 갑자기 와버릴 것 같아서 슬프다. 너는 한 줌 물결로 바다를 연습하는데, 그 바다가 옛날에 죽었다는 소식을 들을까 봐 슬프고, 어쩌면 거대한 물 한덩이가 무덤덤하게 눈앞에 누워 있을까 봐 슬프다. 너의 지금은 네가 가장 깊은 슬픔으로 짠 시간이기에 슬프다. 슬픔만이 진정으로 씩씩한 것을 만든다는 이 아이러니가 슬프다. 소연아.   (P.135 )  / [발문]에서.

 

 

 

 

 

 

 

 

 

 

 

 

 

 

 

 

 

 

 

 

 


 

 

 

 

 

 

 

 

 

 

 

 

 

 

 

 

 

 

 

 

 

 

 

 

 

 

 

 

 

 

 

 

 

 

 

 

 

 

 

 

 

 

 

 

 

 

 


댓글(9)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늘바람 2013-11-18 16:26   좋아요 0 | URL
첫눈이 내린 날 좋은 시 읽네요

appletreeje 2013-11-19 09:10   좋아요 0 | URL
예~첫눈 내린 날,
하늘바람님과 함께 시를 읽어서
참 좋고 감사합니다~*^^*

2013-11-18 19: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19 09: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후애(厚愛) 2013-11-18 20:07   좋아요 0 | URL
제 마음이 슬퍼서 그런지 아니면 울고 싶어서 그런지 올리신 글들을 읽고 있으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네요...^^;;;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대구는 첫눈이라고 해야하는건지...ㅎㅎ 아주 쪼금 눈이 내렸어요~
조카는 첫눈이라고 하네요.
서울에도 첫눈이 내렸겠지요?
함께 첫눈을 보면 참 좋았을텐데... 하고 생각을 해 봤습니다.*^^*
날씨가 많이 춥습니다.
옷 따뜻하게 입고 다니시고 건강조심 감기조심 하셔요!*^^*

appletreeje 2013-11-19 09:21   좋아요 0 | URL
후애님~왜 마음이 슬프신지 울고 싶으셨는지..걱정이 듭니다..
오늘은 슬프지도 울고 싶지도 않은, 그런 즐거운 날 되시길 바래요.
예~어제 서울에도 눈이 조금 내렸어요. 첫눈이라 하기엔 아쉬운.
'같은 노래를 하면 같은 입모양을 갖는다'지요~?^^
다음 정말 눈다운 눈이 펑펑 내리시는 날, "와, 눈이다!"
함께 생각하고 즐거워하기로 해요~
후애님께서도, 옷 단디 입으시고 오늘도 좋은 날 되세요~*^^*

2013-11-19 1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란놀 2013-11-19 03:20   좋아요 0 | URL
삶과 죽음이란,
기쁨과 슬픔이란,
언제나
아침과 저녁처럼
찬찬히 갈마들면서 나타나는
한몸 한모습이지 싶어요.

삶인 듯하면서도 죽음이고
슬픔인 듯하면서도 기쁨이 될 테지요.
꽃이 지고 떨어져야 열매와 씨앗을 맺고,
이 열매를 사람과 새와 짐승이 먹으며
사람과 새와 짐승이 똥을 누어
씨앗이 밖으로 나와 떨어져야
다시 새로운 꽃이 핍니다.

appletreeje 2013-11-19 09:24   좋아요 0 | URL
예, 맞는 말씀이세요.
오늘도 좋은 말씀 선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