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의 노래





모차르트를 높여놓고 설거지를 한다

세제 향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른다

설거지에는  설거지의 도가 있어

먼저 더운물에 그릇을 불리고

거품을 일으켜 애벌 씻은 다음

부드럽게 헹구고 물을 찌워

마른 행주로 닦아 말리면 뽀송해진 그릇들이 좋아한다

어느 과정 하나 소홀하면 안 되고

깊고 얕고 넓고 좁고 그릇에겐 그릇의 품성이 있어

마땅히 예로써 존중해야 한다

아내는 내가 설거지를 해놓으면 좋아한다

어떤 때는 그릇에 얼룩이 그냥 있다거나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고 해도

그러한 지적으로 나의 공부는 나날이 깊어간다

애들이 식기세척기를 사준다 해도

기계는 일은 알지만 살림의 도리를 모르고

마지막으로 행주를 짜 널고

바라보는 재계(齋戒)의 기쁨을 모른다

어떤 날은 이 일 말고 하는 일이 없기도 하지만

그릇을 닦는 일은 세상을 닦는 일이고

나의 경계는 나날이 높아간다  (P.104)






숲속의 의자





누가 숲속에 의자를 가져다 놓았다


많은 사람들이 쉬었다 가기도 했지만


어떤 날은 산이 쉬었다 가고


어떤 날은 바람과 나무가


어떤 날은 고요가 앉아 있기도 했는데


많은 날들을 저 자신이 앉아 있었다  (P.78)





/ 이상국 시집 <나는 용서도 없이 살았다> 中










山으로 가는 어느 길목, 이층에 카페가 있었다. 테이블 다섯에(그중 하나는 주인장의 투명독서대가 놓여 있는 자리이고) 피아노와 악기와 책들과 사진과 그림들이 빽빽하게 놓여 있는.

성악을 전공하고 이러저러한 음악과 공연을 하고, 서울 알만한 교회 성가대 지휘자도 하였는데 어느 날 부조리한 이유로 해임이 되고 그래서인지 어쩐지는 잘 모르지만 교회를 떠났고, 어느날 2층에 1인 카페를 내고, 하루종일 재즈가 흐르는 그 작은 숲속의 옹달샘 같은 카페에 앉아 음악을 듣고 혼자 冊을 읽다가 밤 11시에야 문을 닫고 끝나는 그런 조용한 카페. 지인들과 아주 맛있게 내려 주는 커피를 마시기 위해 갈 때마다, "사장님!" 부르면 정색을 하며 "난 사장 아니다. 그냥 '설거지 하는 놈'이다." 하곤 했는데 우리는 그럼 '설거지 하는 님'으로 "설님!"이라 낄낄대며 호칭을 하곤 했는데, 구석구석 아름다운 풍경과 한밤의 낮고 반짝이는 조명 빛 아래서 바흐도, 모차르트도, 재즈도, '술과 장미의 나날'도 혹은 '시가 될 이야기'도, 노랑 수선화가 피어 있는 실내에서 가곡 '수선화'도 여러 성악가들의 목소리로 고요함 속에 숨죽여 들었던 마치 애니메이션 속 같은 그런 운 좋은 사람들만 누렸던, 탐미주의 에겐남이 언제나 자신을 '설거지 하는 놈'이라고 지칭했던 공간과 시간과 사람. 詩人의 이 詩를 읽다가 문득 주인장 생각이 떠올라 미소 짓는 '수행자의 노래'. 

왜 맨날 한사코 자신을 '설거지 하는 놈'이라 자칭했는지 왠지 알 것도 같은 '설님'에게 이 시를 들려 주면 좋아할 것 같았네.

이제는 '그대의 창에 등불 꺼지고'로 종료하였지만, 같은 아티스트인 그대의 눈 밝고 어여쁜 따님이 오늘도 '새 발자국(Turning Page)'으로 많이 운 날은 야구 모자를 눌러쓰고 오늘도 열심히 '중꺽마'의 정신으로 걸어가고 있으니 잘 지내시길.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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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의 길
김철순 지음, 김세현 그림 / 문학동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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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사과나무 아래서‘의 詩人이 사과나무 열매인 ‘사과‘의 한살이에 대해 쓴 가감 없으면서도 명쾌한 ‘현존‘을 통해 사과의 길과 같은 모든 생명의 길에 대해 쓴 詩 ‘사과의 길‘에, 가장 전통적인 기법으로 가장 현재적인 모색을 펼친 김세현 화가의, 구체적 재현의 지극한 아름다움과 묵직함과 가벼운 상승감을 통한 아름다운 하모니로, 근원적인 기쁨을 만나게 해준 멋진 책. 문득, 1971년에 나온 ‘둥글게 둥글게‘ 를 들으며 이 책을 선물할 꼬마 나윤이에게는 맥도날드의 빨간 사과 그림이 있는 애플파이와 사과즙을, 나에게는 애플진에 이가진 토닉을 섞어 어른 버전 사과의 선물로 마실 궁리를 하게 하는 뜬금없는, 바람 세찬 주말의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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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 부인 살인 사건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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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 부인‘ 공연 날 오페라 단장이자 프리마돈나가 콘트라베이스 케이스에서 시신으로 발견된다. 유리.미쓰기 콤비의 활약과 다채로운 서사, 기발한 트릭, 시간의 모순성들로 음험하고 교묘한 범인이 ‘혐의의 면역성‘을 위해 세운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일으킨 계획 살인이 유리 린타로의 ‘파이프의 곡예‘로 밝혀지는 정교하고 치밀하고 지적인 추리 미스터리소설. 추가 수록된 초역 단편들도 오싹하면서도 낭만적 몽환적 여운으로, 요코미조 세이시의 풍성한 소설들로 연말의 끝을 만족스럽게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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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지사지
김민정 지음 / 난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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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식 전무. 생생하고 싱싱한 문장들. 속시원한 울림과 방향을 가리키는 연말의 너무나 좋은 冊. 발칙하면서도 진중하고 세상에서의 삶에서 ‘사람답지‘ 않는 너무나 무겁고 ‘후진‘ 것들을 낱낱이 상기시키고 일깨워 주는 책. 일부러 빨리 읽지 않는다. 그의 글에서 ‘허망하고 민망하고 부끄러운 느낌이 턱끝까지 차올랐던‘ 탓이다. 누가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의 시인 아니랄까봐. 100자평 썼는데 뭔 이유인지 갑자기 싹 날아갔다. 함께 날아간 ‘좋아요‘ 주신 분들께 진심 감사 드린다. ‘역시 나에게는 쓰기도 쉽고 알아먹기도 쉬운 역지사지가 단연 최고였다. 네가 총을 쏘았으니 나도 총을 쏠 게 아니라 네가 총을 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하는 배포, 욕심일까‘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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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의 풀밭 걷는사람 시인선 135
변영현 지음 / 걷는사람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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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시집은, 눈앞에 있어도 설레어서, 일부러 아껴가며 천천히 읽는다. 일면식은 없지만 우리는 그의 삶의 지향을 오랫동안 그의 마음을 통해 알 것만 같기 때문이다. 이건 시간이 준 진심에 대한 공감일 것이다. ‘발 없는 비둘기도 새라고 퍼덕거려 보다가/ 절뚝절뚝 내게로 걸어온다/ 비둘기 모양을 한 성령이었다/ 평화가 있기를, 인사를 나눌 때/ 알코올 냄새가 났다/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25). 내내 삶과 시와 함께 건승하시고 행복하시길 빈다. 제목도 참 좋다. ‘잠의 풀밭‘이라니. ‘기억에는 원근법이 없다/(..)/ 인연이 있으면 다음에 만나요‘ (121). 다사다난했던 한 해의 끝에 도착한 기쁜 선물 같은 시집. ‘사라지지 않으려고 떨어진 글자를 줍는 사람이 있다‘ [글자로 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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