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지의 세계
저녁에는 양들을 이끌고 돌아가야 한다
희지는 목양견 미주를 부르고
목양견 미주는 양들을 이끌고 목장으로 돌아간다
이러한 생활도 오래되었다
무사히 양들이 돌아온 것을 보면
희지는 만족스럽다
기도를 올리고
짧게 사랑을 나눈 뒤
희지는 저녁을 먹는다
초원의 고요가 초원의 어둠을 두드릴 때마다
양들은 아무 일 없어도 메메메 운다
풍경이 흔들리는 밤이 올 때
목양견 미주는 희지의 하얀 배 위에 머리를 누인다
식탁 위에는 먹다 남은
익힌 콩과 말린 고기가 조용히 잠들어 있다
이것이 희지의 세계다
희지는 혼자 산다 (P.18 )
멍하면 멍
멍하면 멍 짖어요
내가 좋아하는 나의 작은 새가요
잘못했어요 내가 다 잘못했어요
시에는 개나 새가 나오고 무슨 개고 무슨 새인지는 알기
가 어렵고
그건 누구 잘못인지 모르지만 다 잘못했어요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고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고
그렇게 모두가 다 잘못했어요
그러면 멍 짖어요
내가 좋아하는 나의 작은 새가요
시에서는 누가 죽고 누가 울고 모두 다 잘못했어요
내가 잘못했어요 잘할 수도 있는데
안 그랬어요
반성하는 의미에서 멍 짖어요
내가 좋아하는 나의 작은 새가요
새가 시라는 은유는 몰라요 시가 개라는 은유도 몰라요
누군가 시를 쓴다면 그건 그냥 시예요
누군가 새를 썼더니 새는 날고 울다 천 리를 날아
시가 되어 앉았다는 고사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멍하면 멍 짖어요
내가 좋아하는 나의 작은 새처럼요
잘할 수도 있지만 잘못하기로 했어요
그냥 멍 짖어요
내가 좋아하는 나의 작은 새가요
자꾸 멍하면 좋아요 아주 좋아요 (P.13 )
비의 나라
마른 그릇들이 부엌에 가지런히 놓여 있을 것이다 찬장
에는 말린 식재료가 담겨 있을 것이다 식탁에는 평화롭게
잠든 여자가 있을 것이고
"상황이 좀 나아지면 깨워주세요"
그렇게 적힌 쪽지가 있을 것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너는 이 모든 것이 옛날 일처럼 여겨질
것이다 밝은 빛이 부엌을 비추고 있고 먼지들이 천천히 날
아다닐 것이다 그런 평화가 찾아오는 것이다
무슨 일이 여기서 일어났는지
너는 모를 것이다 선하고 선량한 감정들이 너의 안에서
솟아오를 것이다
기쁨 속에서 너는 국을 끓일 것이다 멸치와 다시마를 넣
고 국물을 우려낼 것이다 흰쌀밥에서 흐린 김이 피어오를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느껴질 때, 너는 무심코 만
지는 것이다
평화롭게 잠든 사람의 부드러운 볼을
너는 흠뻑 젖어 있다
너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P.30 )
-황인찬 시집, <희지의 세계>-에서
시집이 들어가는 앞쪽에,
'이자혜의 만화 [미지의 세계]에서
제목을 빌려 시를 쓰려다
그만 착각을 하고 말았다.'는 시인의 말이 나온다.
[미지의 세계]는
자전적인 것/그렇지 않은 것, 현실/그것을 재가공한 것, 특정한 사건과 계층을 찌르는 것/무관히 넓게 그려진 것, 수동적인 것/공격적인 것이 혼재하는 <미지의 세계>는 연재가 진행중인 지금 여전히 제목처럼 ‘미지의 것'으로 가득하다.
이자혜의 '미지의 세계', 시인의 '희지의 세계', 장이지의 해설이 두루 모아진.. 히키코모리적인 세계, 학교와 시니시즘이 김수영의 [절망]을 패러디한 [멍하면 멍]에서처럼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고/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고" 이렇게 모든 것을 다 반성해야할 것으로 몰아가는 세상에 대한 불만을, 미지의 세계처럼 희지의 세계로 발랄하고 재미있게 노래한다. 덕분에 '폐쇄회로의 시니시즘'에서 또 다른 '시시하고 즐거운 일들'을 찾아 함께, 잘 놀았다. 멍하면 멍 짖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