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안미술관에서 쓰는 편지
내가 너에게 편지를 쓰는 동안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이 너에게로 간다
나의 작은 바람꽃과 목련나무와
아니 나를 에워싼 공산폭포가
은혜사와 보현산 천문대가 따라 움직인다
살구가 익고 덩굴꽃마리가 피고
붉은 장미가 오후의 태양을 품는다
내가 너에게 편지를 쓰는 동안
기차가 달리고 비행기가 날아오르고
배롱나무와 무화과의 자원들이
가동하지 않은 수천의 꽃향기를 부른다
넓은 운동장을 추상화처럼 내건 미술관에서
모든 꽃나무는 방향을 정하지 않고 핀다
미술관 이층에서 내려다보는 몽유도원도,
나도 모르게 너에게만 푸앙푸앙
나는 지금 미술관 안으로 걸어 나간다
너에게 가는 길 무슨 꽃 피는지
미술관은 수천의 꽃 진자리 펼쳐놓는다 (P.71 )
우리 도서관에 꽃핀다
우리 도서관에는 꽃나무가 많다
열람실로 올라가다 고개를 젖히면
화르르, 천장에서도 꽃들이 쏟아진다.
나도 잠시 꽃나무가 되는 순간인가
쏟아진 햇살이 내안에서 출렁거린다.
너 없는 동안 나는 여기서 책을 읽었다.
지난 겨울, 난해한 구름나무 책들을 대출하고
빈 나뭇가지 여위듯 너를 잊으려 했다.
눈을 쓸고 도서관 앞뜰에서 배드민튼을 치거나
홀로 은종이에 싼 감자를 꺼내 먹기도 했지만
모든 관계가 단절되어서야 너를 생각한다.
마른 꽃잎처럼 책장 안에서 길을 잃어도
너에게 새로 펼쳐 보이고 싶은 꽃나무를 위해
나는 지금 도서관에 있다 말하지 않겠다.
어둔 몸속에서도 흘러가는 물소리와
내 안에 있는 작디작은 꽃씨 찾아내기 위해
오늘 하루 나는 여기서 책장을 넘긴다.
나는 꽃피는 도서관에서 꽃나무를 필사하고
다시 사랑의 기술*을 읽고 또 읽는 것이다. (P.106 )
* 에리히 프롬.
시인론
매일
시를 읽는 왕과
시를 읽는 법관과
시를 읽는 환경론자들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꽃처럼 번지는 슬픔을 읽을 수 있다면
마른 뿌리를 흔드는 빗물처럼
모든 피어나는 것들에
손 내밀 수 있다면
누구나 시인이다
정의다, 바다다 (P.47 )
꽃
이름을 묻는 말에 나비라고 했다
샤르트르라고 말한다는 것이
불쑥 꽃의 전령사가 튀어 나왔다
몽마르트 언덕의 낡은 의자에 앉아
얼굴을 좀 자유롭게 그려 달라 했다
혁명보다는 고요함을 그리는 화가는
가벼운 붓과 수채화 물감으로
유럽식 건물을 흐릿하게 뒤꼍으로 깔고
얼굴 표정을 도드라지게 살리려 했다
좋은 그림은 존재를 자유롭게 하는 것,
나는 한국에서 날아온 파랑새*라고 농을 했다
나의 이름과 자유롭게라는 추상은
끝까지 설명하지 못했다 그는 다만
이름을 묻는 말에 돈키호테처럼 웃었다
말로 통하지 않는 것은 몸으로 교정했다
잠시 뒤 도화지에 활짝 핀 나를 보았다
그림 속에 나를 가두고 내가 자유로워졌다 (P.63 )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희곡
단디
책도 단디 읽고
밥도 단디 먹는 거다
사랑도 단디 하고
외로우면
외로움도 단디 하는 거다
너를 만나기 전
작약도 그랬다 ( P.29 )
-한상권 詩集, <단디>-에서
무릇 꽃을 보기 위해 눈을 감고 빗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닫는다. 너와 나의 무수한 층위도, 말하자면 꽃과 빗소리 사이에 있다. 그 안에서 직면하는 모든 경계와 무위를 온몸으로 담는다.
아무것도 어떤 것도 아니라 하나 그 안에서 너와 공명할 수 있다면, 그것이 어떤 길이든 너무 늦은 처음은 아닐 것이다.
어떤 정언명령도 가슴 뛰지 않을 때 너는 내게 가만히 손을 내민다. 마치 온화한 수시(手施) 같고 반짝이는 지평 같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들은 손이 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