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루에 앉아 하루를 관음하네
뭉게구름이 세상의 기억들을 그렸다 뭉갠다
아직껏 짝을 찾지 못한 것이냐
애매미의 구애는 한낮을 넘기고도 그칠 줄 모르네
긴꼬리제비나비 노랑 상사화 꽃술을 더듬는다
휘청~ 나비도 저렇게 무게가 있구나
잠자리들 전깃줄에 나란하다
이제 저 일사불란도 불편하지 않다
붉은머리오목눈이 한 떼가 꽃 덤불 속에 몰려오고
봉숭아 꽃잎 후루루 울긋불긋 져 내린다
하루해가 뉘엿거린다
깜박깜박 별빛만이 아니다
어딘가 아주 멀리 두고 온 정신머리가 있을 것인데
그래 바람이 왔구나 처마 끝 풍경소리
이쯤 되면 나는 관음으로 고요해져야 하는데
귀 뚫어라 귀뚜라미 뜰 앞에 개울물 소리
가만있자 마음은 어디까지 흘러갔나 (P.11 )
노래
상처받은 영혼을 통해 노래가 나온다고
마음의 깊은 동굴로부터
울려와 들리는
초원의 평화로운 풍경이
양떼구름의 하늘로 퍼져가는 이거나
슬픔으로 가득찬 유리창에
눈물처럼 적시며 피어나는 이거나
그리하여 고백이다 기다림이다
비탄으로 애끓는 탄식이나 춤이다
영혼을 관통하는 시다
해와 달인들 사랑 없이 어찌 뜰 수 있으리
생명 있는 것으로부터 나온다
바람처럼 떠돌던 세상의 불립문자들이
다가와 어루만지며 무늬를 이룬다
노래가 절절하고 아리게 된 가지가지 이유이다 (P.45 )
중독자
익어가고 있다
햇빛과 달빛, 별들의 반짝이는 노래를 기다렸다
너무 격정적이지 않게 그러나 넉넉한 긴장과 두근거림이
휘감았다 마디마디 관통했다
사랑이었던, 슬픔이었던
너를, 당신을, 나를
거친 바닥에 깔아 무참히도 구긴다
비빈다 휘감아 뭉갠다
산다는 것 이렇게 서로의 몸을 통해
흔적을 남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 퍽큐- 나를 더 뜨겁게 짓이겨줘
악을 써봐 제발 비명을 질러봐
어찌하여 상처가 향기로운지
이따금 틈틈히
모던한 멜랑콜리와 주렴 너머의 유혹이 슬그머니 뿌려
진다
찻잎의 그늘이 깊어진다
어쩌면 고통,
어쩌면 욕망의 가장 먼 길 저 산 너머 끝자리
한 점 티끌이기도 거대한 중심이기도
지독하다 끔찍하다 너에게로 물든 중독
발효차가 익었다
우주의 고요 한 점 아침 찻잔에 띄운다 (P.48 )
-박남준 詩集, <중독자>-에서
생은 과일처럼 익는다
이기철
창문은 누가 두드리는가, 과일 익는 저녁이여
향기는 둥치 안에 숨었다가 조금씩 우리의 코에 스민다
맨발로 밟으면 풀잎은 음악 소리를 낸다
사람 아니면 누구에게 그립다는 말을 전할까
불빛으로 남은 이름이 내 생의 핏줄이다
하루를 태우고 남은 빛이 별이 될 때
어둡지 않으려고 마음과 집들은 함께 모여 있다
어느 별에 살다가 내게로 온 생이여
내 생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구나
나무가 팔을 벋어 다른 나무를 껴안듯
사람은 마음을 벋어 타인을 껴안는다
어느 가슴이 그립다는 말을 발명했을까
공중에도 푸른 하루가 살듯이
내 시에는 사람의 이름이 살고 있다
붉은 옷 한 벌 해지면 떠나갈 꽃들처럼
그렇게는 내게 온 생을 떠나보낼 수 없다
귀빈이여 생이라는 새 이파리
네가 있어 삶은 과일처럼 익는다 (P.20 )
여자비
안현미
아마존 사람들은 하루종일 내리는 비를 여자비라고 한다
여자들만이 그렇게 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울지 마 울지 마 하면서
우는 아이보다 더 길게 울던 소리
오래전 동냥젖을 빌어먹던 여자에게서 나던 소리
울지 마 울지 마 하면서
젖 먹는 아이보다 더 길게 우는 소리
오래전 동냥젖을 빌어먹던 여자의 목 메이는 소리 (P.36 )
짐
어머니학교6
이정록
기사 양반,
이걸 어쩐댜?
정거장에 짐 보따릴 놓고 탔네.
걱정 마유. 보기엔 노각 같아도
이 버스가 후진 전문이유.
담부터 지발, 지발 짐부터 실으셔유.
그러니까 나부터 타는 겨.
나만 한 짐짝이
어디 또 있간디?
그나저나
의자를 몽땅
경로석으로 바꿔야겠슈.
영구차 몰듯이
고분고분하게 몰아.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고분이니께. (P.54 )
꽃은 자전거를 타고
최문자
그녀가 죽던 날
꽃은 자전거를 타고 왔다
그녀의 남자가 입원실 현관 앞에 자전거를 세우고
막 아네모네 꽃을 내리려고 할 때
그녀의 심장은 뚝 멎었다
꽃은 다시 자전거를 타고 영안실 근처로 갔다
죽을 자리에서도 타오른다는 아네모네가
놀란 자전거를 타고 앉아
헛바퀴만 돌리고 또 돌렸다
그날,
꽃은 온종일 자전거에게 끌려 다녔다
꽃을 태운 자전거는 참았던 속력을 냈다
꽃도 그녀처럼 자전거를 타고 앉아
남자의 등을 탁탁 때리며 달렸다
꽃의 내부가 무너지도록 달렸다
마지막 꽃 한 송이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뭐라고 말했지만
바람이 그 말을 쓸어갔다
그날,
빈 자전거 한 대
고수부지 잡석 사이에 쓰러져 있었다 (P.130 )
-안상학 엮음 <시의 꽃말을 읽다>-에서
'지축을 울리는 누떼의 발자국처럼' 멀리서 우레가 치고 비가 내린다.
말복 지나고 아침 저녁 선선해져 한시름 놓으며.. 연휴 전, 을미년 대서 무렵에
안상학 시인이 엮은 50편의 시와 이야기들이 들어 있는 '시의/ 꽃말/를 읽다'와
박남준 시인이 지역출판사인 진주의 펄북스.에서 펴낸 오랫만의 시집 '중독자',
영원히 살 것처럼 사는 우리들에게 묻고 들려주는, 우리 삶의 종착지에서 만
나는 우리 삶이 압축된 시간들의 이야기, '내 눈길 머무는 곳마다 내 숨결 가 닿는
곳마다 고맙고 감사하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 살아 있는 동안 우리가 해야 할 일'
임을 담담히 일깨워주는 '후회없이 살고 있나요?'를 다시 한 번 펼쳐 보는 날.
퇴고는 화장하는 과정이 아니라 화장을 하나하나 지워가는 과정인 것처럼, 그렇게
삶의 꽃말을 가만히 들여다 본다.
저녁에는 삼우제를 지내고 온 사람과 여럿이 모여, 맑은 술 한 잔 해야겠다.